이동호 발틱연구소 소장

1. 서양의 티베트 불교 붐

오늘날처럼 불교가 서양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때도 없었다. 그리고 ‘티베트’ ‘티베트 불교’가 지금같이 ‘인기’가 있는 때도 없었다.

서구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달라이 라마(Dalai Lama)를 지원한다. 어디 그뿐인가. 전세계 영화의 메카라 할 수 있는 헐리우드에서는 ‘샹그리라(Shangri-La)’와 부처님을 주제로 환상적인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석하는 바티칸을 방문하는 순례자에 못지 않은 많은 저명한 인사들이 인도의 다람살라로 티베트 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러 온다. 그들은 이곳 ‘작은 라사(little Lhasa)’에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는 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축복으로 여긴다.

좀더 흥미있는 얘기를 해보자. 미국의 유명한 관능적인 미녀 배우 샤론 스톤(Sharon Stone)은 싯다르타 고타마의 그림과 금빛 부처님상으로 그녀의 로스엔젤레스 저택을 꾸미고 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사이에는 수많은 영화배우·기업인·정치인들이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 불교 참선, 명상 센터를 찾아가고 있다.

미국의 인기 가수 마돈나는 어쩌면 이 ‘물질적인 여자(Material Girl)’가 다음에는 티베트 불교의 스님이 될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의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미국인들이 티베트 불교에 열광하는데, 구(舊) 대륙인 유럽에서는 어떤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더블린에서 모스크바까지, 오슬로에서 아테네까지의 전 유럽에도 속물적인 물질문명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지 티베트 불교가 유행처럼 도래했다. 광고 문안 작성자·사업가·대학교수뿐만 아니라 가정주부들에게도 불교, 티베트 불교는 친근한 공통 주제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급속히 증대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영화 ‘쿤둔(Kundun)’의 시사회에 자민당 총재와 경제부 장관을 지낸 오토 그라프 람스도르프 박사가 고문이 되어 성대히 행사를 하기도 했다. 작고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인 다니엘 미테랑 여사도 달라이 라마와 나란히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했다.

다람살라의 망명지를 따스하게 하였던 이러한 서구인들의 인상적인 친견 장면은 유럽인들에게 강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심지어 “불교는 여성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한다.”는 시사 주간지의 광고 문안도 눈에 띈다. 《다섯 티베트 인》이란 삶을 살찌우는 교양서는 독일의 유력 시사 주간지인 〈슈피겔〉의 베스트 셀러에 올라 350주 이상 지속되기도 하며, 어느 백화점 체인은 ‘티베트 컬렉션’이라는 특별전으로 겨울 패션 무대를 성황리에 장식하기도 한다. 서구인들이 이렇게 티베트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2. 서양인들은 왜 티베트 불교에 열광하는가

1) ‘신화’ 같은 티베트


“나는 내가 들었던 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서(西)티베트의 구게(Guge)제국의 왕과 신하들이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의 진실된 계율을 잘 지키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내가 온 것은, 만일 그들이 사실과 달리 하나님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물론 왕이 여기에 동의한다면, 그들의 믿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부족한가를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1)

1624년 11월 8일,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소속의 안토니오 드 안드라데(Antonio de Andrade, 1580∼1634) 신부는 그의 동료 마뉴엘 마르께스(Manuel Marques) 신부와 서티베트를 방문하고 위와 같이 적고 있다. 서구인들에게 있어 티베트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본 모습이 감추어진 ‘신화’처럼 알려져 왔다.

기원전 5세기의 헤로도(Herddot)와 서기 2세기의 프톨레모이스(Ptolemaeus)가 히말라야에 황금빛 무덤과 엄청나게 큰 제국이 있다고 얘기할 때까지, 유럽인들은 티베트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였다. 베네치아 출신의 세계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도 티베트에서 행해지는 마술(?)을 신비하게 생각하여, ‘Thebeth(신비스런 곳)’라고만 언급하였다.

그는 그곳, 세계의 지붕에 가보지도 않았다. 당시 여러 언어로 번역된 드 안드라데 신부의 티베트 관찰기는 유럽인들에게 상당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티베트 인들을 아주 좋게 묘사하였다.

“이 민족은 대부분 평화를 애호하고, 용감하며, 활발하다. 그리고 이 민족은 싸움을 좋아하고, 늘 연습한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자비롭고, 예불을 충실히 드리고 있다. …… 진짜 평화로운 민족으로 보인다.”
이렇듯이 티베트는 신심이 돈독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신비에 쌓인 채로 남아 있었다. 유럽인들은 티베트에 대하여 때로는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였지만, 낯선 종교의 고유한 문화를 가진 티베트를 서구인들은 잘 모른 채로 혹평을 하기도 하였다. 장 자크 루소(J. J. Rousseau, 1712∼1778)나 요한 고트프리드 헤르더(J. G. Herder, 1744∼1803) 같은 사상가는 티베트 인들을 봉건주의에 사로잡힌 야만인이며, 그들의 종교를 뒤떨어진 광란이라며 티베트 불교를 폄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4년 라사에 진주한 영국군은 티베트 인들을 “진실로 신심이 돈독한 신자들”이라고 칭송하였다. 19세기 말, 학문적인 긍정주의에 대한 반기를 든 신지학자(神智學者)들의 움직임은 티베트를 결국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정신적인 중심, 꿈의 나라로 만들었다. 1933년, 작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이러한 티베트의 신비로운 신화에 ‘상그리라(Shangri-La)’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2년 후, 나찌 독일의 하인리히 힘믈러(Heinrich Himmler)는 히틀러 총통의 친위 연구기관으로 ‘종족연구’팀을 발족시켰다. 그의 자문관인 과학자 에른스트 새퍼(Ernst Schaefer)는 티베트는 인류의 저울이며, 아리안의 수수께끼 인종의 피난처로서, 승려계급이 ‘삼바라(Shambha-la)’라는 신비에 쌓인 지식의 제국을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불교 가르침의 상징인 수레바퀴에서 착안한 하켄크로이쯔(Hakenkreuz, :불교의 卍를 변용해서 만들었다. 이후 유럽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상징이 되었다.)를 고안하기도 했다.

1934년, 새퍼는 ‘북방의 정신적인 귀족’의 흔적을 찾는 히틀러 친위대가 보낸 두 번의 티베트 탐사 중 첫번째로 티베트에 도착했는데, 이때 라사에서 1,100km 떨어진 탁체르(Taktser:포효하는 호랑이)란 농촌의 평범한 농가에서 사내 아기가 태어났다. 이곳 근처에는 유명한 티베트 불교 수도원인 쿰붐(Kumbum)이 있다. 이렇게 아무 특별한 징조도 없이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오늘날 세계인이 존경하는 달라이 라마이다. 다만 조금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의 부모가 ‘신의 소망을 성취’해달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 준 것뿐이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 환생을 신봉하는 독특함이 있어 이 어린아이는 후에 14대 달라이 라마로 추대된다. 이러한 수수께끼로 가득 찬 티베트, 티베트 불교는 서구인들에게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에도 신비스러운 그 무엇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신비에 대한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날마다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티베트 라마와 그 가르침은 서구인에게 마치 법국토(Dharma-La)에 살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2) 억압받는 티베트, 티베트 문화에 대한 서양인의 연대의식

1950년 11월 17일, 15살의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수장이 되었고, 늦었지만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 보려고 했지만, 1951년 9월 5일, 마오쩌뚱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라사에 진주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는 참혹한 지경에 처한다.

인민해방군은 농가를 강제로 빼앗았고, 수도원을 파괴하고, 티베트 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주석은 달라이 라마와 약속한 ‘내부적인 자치’를 묵살하였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요, 해독이다.”라고 마오쩌뚱은 티베트의 최고 종교 지도자에게 멸시하듯 말하였다.

1959년 달라이 라마는 5,000m 이상의 태산준령과 협곡을 넘어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수주일 내에 그를 따라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인은 80,000명이나 되었으나, 티베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서 87,000명이나 처형되는 등 피바다가 되었다. 나찌 독일의 끔찍한 인종정책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태인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억압을 피해 조국 티베트를 뒤로 하고 인도와 서유럽·미국·호주 등지로 향하는 티베트 인들의 고단한 망명의 발걸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티베트 인들의 서구로의 망명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티베트 문화가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1975년 베트남 전쟁의 결과, 자유를 찾아 필사적인 탈출을 한 ‘보트 피플(boat people)’도 그들의 종교인 불교를 서구에 전파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시작된 망명정부는 벌써 40년이 지났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 즉 망명 온 티베트 인들에 의해 직접 수립된 망명정부의 수장이다. 물론 형식상으로 의회도 구성되어 있다.

비폭력을 주장하는 달라이 라마는 어느새 티베트 인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면 언론을 잘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 외에 독일의 빌리 브란트 전 연방 총리와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자기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성자는 아니지만 비전·용기·비폭력을 현실적인 힘으로 실현시킬 줄 알았다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그는 서구에서 많은 정치적 인정을 받고 있으며, 유럽에서의 티베트, 티베트 인, 티베트 문화와 연대를 위한 대중집회와 헐리우드의 동정심리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워싱턴·파리·베를린의 정부는 거대한 중국과의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티베트가 다소 성가신 존재라는 사실도 명심하고 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특히 정치적·양심적·종교적·인종적·학문적·사상적인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는 정치적 난민의 지위를 주는 제도적 장치는 서구인들의 인권에 관한 반성의 산물이다. 이러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문화는 자연스럽게 티베트 소수민족에 대한 동정심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전통적인 엄격한 문화가 배어 있는 일본의 선불교(禪佛敎)가 서구인들에게는 불교 수행이 힘들고 어렵다는 인상을 주는 면이 있는 반면, 티베트 불교는 신비스런 신화에 자연스레 이끌리게 하는 점이 있는데, 이 또한 서구인들이 티베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3) 달라이 라마의 개인적인 독특한 카리스마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환생한 14대 달라이 라마로서 그 어렵고 힘든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은, 정형화된 안정한 삶을 누리는 서구인들에겐 하나의 매혹적인 대상으로 보인다. 1960년대, 서구에서의 젊은 대학생들은 기존의 틀을 부정하고, 새로이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거셌다.

소위 히피세대가 등장하면서 아시아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그래서 직접 동남아시아의 불교 국가에 가서 수도를 하든지, 그곳의 스님들을 서구로 초청하여 불교의 세계에 함께 동참했다. 2차 대전의 참혹함을 아는 그들은 당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데모와 징집기피를 통해 다시 한 번 제국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 우월주의적 전통에 대항하여 자유로움과 생명의 존엄함을 표출하였다.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 이슬람교의 성전(聖戰)이라는 지하드, 아랍국(이슬람교)과 이스라엘(유대교)의 전쟁 등 늘 종교전쟁이 있었지만, 역사상 불교의 이름하에 발발한 전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서구인들은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불교가 평화의 종교라는 인식은 티베트 소수민족의 서구로의 정치적 망명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러한 분위 속에 이루어지는 달라이 라마의 서구 방문에서의 법회나 공개 강연에는 수십만까지 운집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그의 유창한 영어와 인자한 모습, 호쾌한 유머, 부드러운 웃음 등은 청중을 압도하는 독특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냉정한 세상의 공허함을 메우고 싶어하는 서구인들은 달라이 라마에게서 우리 시대의 붓다를 발견하고 그를 추종한다.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는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한층 더 빛을 발하며, 티베트 불교는 서구에서 급격한 추세로 성장하고 있다. 단순한 관심 차원을 넘어 신자나 티베트 불교 센터의 수도 크게 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티베트 망명정부의 조직적인 지원도 간과할 수 없다.

4) 서양의 뛰어난 티베트 불교 전파자들의 역할

1893년 미국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이후, 일본의 선불교가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서구에 번역 소개된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일본 선불교에 관한 여러 강연들이 서구인들에게 체계적으로 소개된 것은 티베트 불교보다는 훨씬 앞선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발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본 선불교가 조직적으로 서양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지만, 오늘 날 티베트 불교같이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영받고 있지는 못하다. 티베트 불교의 훌륭한 라마들의 일차적인 가르침뿐만 아니라 엄청난 개인적인 수행으로 청중을 감동시키는 카리스마를 갖춘 서구 출신 라마들의 활약 또한 서구에서의 티베트 불교 열풍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덴마크 출신의 올레 니달(Ole Nydahl) 라마이다. 권투 선수 출신의 올레 니달 라마는 1969년 12월 티베트로 신혼 여행을 가서, 당시 서구인으로서는 어렵게 카르마 카규파(Karma Kagyupa)의 16대 걀와 카르마파(Gyalwa Karmapa, 1923∼1981)의 제자가 된 후 티베트 불교의 열성적인 전파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부인 한나(Hannah)와 같이 1년 중 11달 이상을 그가 이룩해 놓은 ‘금강도 불교(diamond way buddhism)’의 해외 지부를 순회하면서 강연과 명상을 한다.

전 세계 35개국 280여 센터를 돌면서 이루어지는 그의 강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성황이다. 독일 고속도로에서의 제한속도 도입 반대, 성직자의 혼인문제, 반강제적인 채식주의와의 결별, 외국인 정책 등 논쟁적이며, 선입견을 갖고 있는 주제들로 참석자들을 휘어잡는다. “니달 라마는 카리스마적인 법사라서 독일인들이 좋아한다.”고 독일 불교연합 집행부의 일원인 실비아 붸?(Sylvia Wetzel)은 얘기한다.2)

불교의 난해한 의미를 쉽고 적확하게 전달하는 그의 유창한 독일어와 영어 강연 능력, 그리고 적절한 비유와 웃음짓게 하는 반어법, 간결한 문장, 활력 있는 목소리 등으로 인해 그의 강연은 늘 활기차고 열광적이다. 이러한 탁월한 티베트 불교 전파자들의 열정적인 헌신이 티베트 불교의 열풍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다.

3. 서양의 티베트 불교 연구 현황

원래 서구의 불교적 관심은 학문적인 데에서 출발하였다. 동양학 일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대략 16세기 후반에 이미 인도학(Indology)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불교학이 서구에서 제자리를 찾아 착근하는 시기는 19세기 중반 무렵으로 봄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서유럽의 불교는 시기적으로 남방의 상좌불교(Therava?a)에서 출발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반해 북미의 경우는 중국과 일본의 이민자들에 의한 북방 대승불교의 선불교(禪佛敎)가 먼저 소개되었다. 유진 번아우프(Eugene Burnouf)가 쓴 《인도불교사입문》 《법화경 역주》는 근대 불교학의 효시를 이룬다. 영국의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 1832∼1904) 경과 올코트(Olcott) 등이 불교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하여 서술하였고, 독일의 프리드리히 찜머만(Friedrich Zimmermann)은 수바드라 비구(Subbadra Bhikshu)라는 이름으로 불교에 관한 책을 지었으며, 그의 저서는 10개 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19세기 말의 유명한 두 학자, 영국의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 1843∼1922), 그리고 독일의 헤르만 올덴베르그(Hermann Oldenberg, 1854∼1920)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팔리 경전을 서구의 독자들에게 정통적으로 소개하였는데, 이는 서구 근대 불교학의 중요한 분수령이다.

1881년 리즈 데이비스는 팔리 경전 연구회(Pali Text Society)를 설립하여 팔리 경전의 출판과 번역을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금강경》 《정토경》의 번역은 불교가 서양인들에게 종교로서 다가선 계기가 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신지학(Theosophy, 神智學)의 창시자 헬레나 페트로브나 브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 1831∼1891) 여사가 있었다.

그녀 스스로 티베트 불교도라고 하였으며, 어릴 때 벌써 티베트 불교와 깊이 연관되어 왔다고 하였다.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서양의 백인 요기’ ‘빛의 사자(使者)’ ‘금세기 가장 걸출한 여자’ 등으로 불렀다. 신지학자들과 티베트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데, 그들이 그린 티베트상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거지가 없고, 가난하고 배고픈 민족이며, 술취함·범죄·무례함이 알려지지 않는 순수한 가슴을 가진 도덕적이며 단순한 민족이라 표현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신지학자들의 경우 일치한다. 알리스 베일리(Alice Bailey, 1880∼1949), 니콜라스 뢰리히(Nicholas Roerich, 1874∼1947)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헤르더·루소·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 W. F. Hegel, 1770∼1831)·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1844∼1900) 등 철학자나, 구스타브 마이링크(Gustav Meyrink, 1868∼1932) 같은 작가들은 티베트 문화와 티베트 인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빅터와 빅토리아 트리몬디(Victor & Victoria Trimondi, 본명, Herbert & Mariana Roettgen)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반(反) 달라이 라마, 반(反) 티베트 캠페인을 벌이는 왕년의 열성 티베트 불교 신자의 활동도 눈에 띈다. 하지만 현재 서구에서의 티베트 불교 연구는 매우 활발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교의 동유럽·동방학부의 티베트 연구학과,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의 티베트학과,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의 티베트 연구소, 하노버·브레멘·베를린·뮌헨·콘스탄쯔 대학교 등에서 티베트 불교를 연구할 수 있다.

물론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티베트학과 불교학 연구소는 그 명성이 높으며, 그라즈·짤즈부르그 대학교에서도 티베트 불교를 공부할 수 있다. 영국은 팔리 경전 연구회가 자리한 옥스퍼드 대학교와 런던 대학교 학위과정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는 파리의 유럽 불교 대학교가 있는데, 일반인들에게도 다양한 불교의 전통과 종파를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것이 특별하다. 물론 정규 대학교에서도 유럽의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의 라이던 대학교·스위스의 취리히 대학교·이탈리아의 밀라노·로마 대학교·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법문(法門) 불교 대학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정규적인 대학교 외에도 스위스의 리콘 티베트 연구소(Tibet-Institut Rikon)는 티베트 바깥에 현존하는 가장 큰 티베트 도서관을 갖춘 아주 훌륭한 연구소이다. 독일 함부르크의 티베트 센터도 그 규모나 연구물 발행에서 상당한 수준을 자랑한다.

위에 언급한 대부분의 대학교에는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파견한 티베트 라마가 한두 명씩 서구의 학생들에게 티베트 불교를 가르치고 있다. 불교 경전에 대한 해석, 불교사 연구 등으로 연구의 지평을 넓혀 왔으며, 대개 원전 중심의 연구가 활발하며, 그 수준 또한 매우 높다.

미국은 하와이 대학·U.C.L.A.·스탠포드 대학 등이 유명하며, 구대륙에 뒤쳐진 불교 연구를 매우 활발히 진행하여 이제는 그 연구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지는 추세이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은 불교를 삶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며, 교리에 얽매인 도그마의 종교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유럽과 미국에는 티베트 불교 단체나 연구기관의 종합적인 네트워크도 언어별로 잘 갖추어져 있다.

4. 서양에서의 티베트 불교 비판

1) 티베트 불교 열풍의 문제들


아시아의 이주민이나 불교적 체험을 한 서구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파된 불교는 우선, 특정 국가의 불교 전통과 의식 양식, 수행 방법을 강조하는 국수주의적인 면이 뚜렷하다.

베트남 불교는 그들의 법당을 다른 티베트 불교 단체에게 개방하기도 하나 티베트 불교는 다소 배타적이다.
둘째, 신자나 불교 사찰·센터·단체 등으로 봤을 때 티베트 불교가 약 40% 정도에 조금 못 미치리라고 추정된다. 이런 티베트 불교가 마치 전체 불교를 대변하는 듯 잘못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제다.

독일의 경우만 보아도 1992년에 81개였던 티베트 불교 센터가 6년 뒤 141개로 늘어났으며, 고전적인 상좌불교(Therava?a)도 이 기간 센터 수가 2배로 증가하였음을 보면 티베트 불교만 서구에서의 불교를 대표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이다.

셋째,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 수행하는 것보다 특수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넷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책과 경전을 통해 이론적으로만 깊이 연구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러한 풍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서구에서 티베트 불교는 여전히 신비로운 것으로만 남게 되거나 관념의 나락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다섯째, 1990년대 들어오면서 티베트 불교의 붐을 이용한 상업화가 지나치다는 것이다.만화·영화·광고 등에 티베트 불교의 탱화·라마·부처님상(像)이 무차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심각히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티베트식 사랑의 베개’ ‘완전한 해탈을 얘기하는 일본제 캠코더 광고문구’ 흡연을 미덕으로 보지 않는 티베트 불교를 무시하고 만든, ‘밑바닥에 부처님의 그림을 넣은 재떨이’ 등 도를 지나친 제품들이 적지 않다.

여섯째, 티베트 불교는 신비스러움과 달라이 라마의 독특한 카리스마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데, 만일 이러한 것이 없어진 후가 매우 염려된다. 따라서 자칫하면 지금의 티베트 불교 열풍은 급속히 냉각될 수 있다.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신비함을 만들어 나갈지 궁금하다.

일곱째, 티베트의 정치적, 민족적인 위기상황에 대한 동정과 연대의식이 티베트 불교에의 열성적인 수행과 혼동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비록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인에겐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지도자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2) 페미니즘 불교학자의 티베트 불교 비판

독일의 반 달라이 라마의 선봉에 서 있는 빅토리아 트리몬디, 스코틀란드의 종교철학자 준 캠프벨(June Campbell) 등은 《달라이 라마의 그늘(Der Schatten des Dalai Lamas)》 《우주로의 여행자-티베트 불교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서(Traveller in Space - in search of female identity in Tibetan Buddhism)》에서 티베트 불교와 여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티베트 탄트라 불교, 즉 밀교(密敎)에서의 독신인 라마와 실제 또는 상상 속의 여자와의 관계에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탄트라 마스터를 위해 여성의 기를 빼앗아 감으로써 여자를 죽였다는 소문을 확인하려고 매섭게 물어 오고 있다.

또한 캠프벨은 티베트 라마의 영어 통역가로 일했는데, 수 년 동안 칼루 린포체(Kalu Rinpoche)의 ‘숨겨진 성교 파트너’였음을 고백하는 글을 발표하였다.3) 이외에도 이탈리아의 여성 독자로부터의 편지(1999년 3월 28일) ‘내 가슴에 이상한 기운’이라는 사례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후유증에 시달리는 독자의 어려운 일상 생활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4)

이와 같이 티베트 탄트라 불교는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며, 결혼을 금지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티베트 불교의 계율도 어기는 이상한 논리의 영적인 섹스, 상상 속의 여자와의 성적인 관계, 심지어 실제의 여자와의 성적 결합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가혹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티베트 불교의 남성 중심적이며 폭력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평화롭고 신비한 티베트 문화와 그 속의 중심적인 티베트 불교를 자세히 살펴보면 수도원 간의 참담한 대결, 50년대 비폭력을 강조했지만 중국 공산당의 점령자에 대항한 피로 얼룩진 폭력을 사용한 저항 등을 들 수 있다. 티베트 소수민족은 생태학적·환경 친화적인 민족이라 하지만 실제는 다른 어느 민족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그저 평범할 뿐이며 그렇다고 덜 물질적이지도 않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오늘날 티베트 망명정부는 서양의 지지층으로부터 자본을 견인·흡입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티베트에 대한 신화가 깨어지는 것을 막으며, 티베트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봉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비판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티베트 불교 비판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티베트와 다른 서구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예컨대 티베트 불교의 본고장 티베트에서는 아직도 법회 의식이 울긋불긋한 색조와 탱화, 여러 법구 들을 이용한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지만, 서구에 전파된 티베트 불교는 서구의 문화와 적절히 조화하여 지나칠 정도의 의례 중심적인 불교 행사는 하지 않고 있다. 서구인의 사고와 취향에 맞춘 명상 수행 등이 오히려 강조되고 있다.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 있는 탄트라 의식은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며 그 비중을 축소하고 있다. 탄트라 경전은 1,000년이나 오래된 것인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서구의 티베트 불교신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설령 탄트라 경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가치만 있지 않는가라고 자문자답한다.

5. 맺는 말

우리 인간들은 오래전부터 늘 이상향에 대한 막연한 상상의 꿈을 꾸어 왔다. 평화·지혜·건강한 삶·성적인 만족·조화·질서 등이 갖추어진 그런 곳을 갈망해 왔다.

18세기 19세기 서구인들은 남태평양의 섬나라 타히티를 그 이상향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벌써 17세기부터 서구인들에게는 미지의 땅 티베트로 향하는 발걸음이 계속되었다.

실제 직접 방문하지도 않고 여행기를 쓴 서구인도 꽤 있었다. 티베트 인들과 그 불교 문화, 그리고 매혹적인 자연 환경에 대한 감탄적인 묘사는 그 신비한 꿈의 세계, 티베트를 더욱 신화같이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각인된 티베트상은 서구인들에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불교는 로만틱한 추구자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분석가에게도 종교라는 편안한 고향을 준다. 낭만적인 사람들은 신비로운 면을 부각시키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 인식적인 관점을 강조한다.”라고 독일의 불교학자 마르틴 바우만 박사(Dr. Martin Baumann)는 우리 시대의 불교를 설명한다.5)

오늘날 서구인들은 무엇인가 공개적으로 갈구하는 모습이다. 세계 제2차 대전과 베트남 전쟁 이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기독교 문명에 회의를 느끼고, 차갑고 공허한 세계에 대해 다시금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한 성자(聖者)를 구했는데, 우리 시대의 붓다를 찾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에서 그를 발견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달라이 라마도 단지 평범한 스님이기를 원한다. 그는 세계 최고원에 살고 있는 티베트 민족을 위해 고난의 짐을 지고 가는 시지푸스(Sisyphus)인지도 모른다. 편히 쉴 곳도 없이 소박한 약점을 지닌 한낱 티베트 스님인지 모른다.

티베트 불교에 대해 친밀함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거나 모든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티베트 속담을 인용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해 본다. “진실한 친구의 입에서 당신은 어떠한 달콤한 말도 들을 수 없다.” <끝>

이동호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 졸업. 독일 트리어 대학·베를린 자유대학·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수학. 정치학 박사(동유럽 정치 전공). 영국 캠브리지 대학 객원연구원 역임. 현재 발틱연구소 소장·세종리더십개발원 연구위원 겸 이사로 있으며, 동유럽·발트해 연안국가의 정치·경제·문화에 대한 연구 외에 불교에 대한 유럽인의 태도와 신행생활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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