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기획특집
     
달라이 라마, 그는 누구인가 / 김충현
김충현 동국대 박사과정
[5호] 2000년 12월 10일 (일) 김충현 동국대 박사과정
1. 들어가는 말

최근 14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둘러싸고,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증후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열풍이 불고 있다.

정부가 중국과의 외교관계라는 실리를 내세워 그의 방한을 불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망 높은 한국의 종교지도자들이 종파를 초월하여 그의 방한 추진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의 참여도 매우 활발한 편이다.

도대체 달라이 라마의 무엇이 이런 열풍을 만들어 냈는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종교·정치 지도자로서 그의 조국 티베트에서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비폭력 독립 투쟁은 그를 세계 인권의 상징으로 우뚝 서게 했으며, 198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불운한 지도자인 동시에 가장 고귀한 인품과 깊이를 지닌 흔치 않은 스승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으며, 그의 전기나 가르침에 관한 책도 국내에서만 40여 종에 이르고, 오늘날 가장 광활한 사이버 영토를 지닌 나라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한쪽으로만 치우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는 선천적으로 절대 무오류의 성인이 아니다. 그의 환생에 대한 논의 또한 오히려 그의 참모습을 가리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본고에서는 ‘달라이 라마’ 제도와 오늘날의 14대 달라이 라마가 결코 세속과 동떨어지지 않으며, 티베트 역사에서 정치적인 역학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성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오늘날 14대 달라이 라마가 지닌 성스러움이 타고난 모습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일생 동안 닦아 이루어진 결과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참모습을 아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먼저 ‘달라이 라마 제도’에 관해 알아본 후, 현재 생존하는 14대 달라이 라마의 탄생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의 또 다른 축인 ‘판첸 라마’와 ‘환생’에 대한 티베트 인들의 견해를 살펴본다.

2. 세속과 영혼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 티베트 불교와 정치권력과의 관계


고대 티베트 고원에 흩어져 살던 티베트 민족은 7세기 중반 송첸감포라는 걸출한 군주에 의해 왕국으로 탄생했다. 티베트라는 이름은 당시의 몽골어었던 ‘투베트(Thubet : 吐藩)’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눈 위의 거주지’라는 뜻이다.

송첸감포 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나라와 네팔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송첸감포 왕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에 시집을 온 두 공주는 각각 라모체 사원과 투르낭 사원을 세웠으며, 이것이 티베트 불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송첸감포 왕의 뒤를 이은 티송데첸 왕은 761년 불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이후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대석학 샨타락쉬타와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발전은 처음부터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공식적인 최초의 불교 전래는 당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후 인도 불교의 유입으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친인도 세력과 친중국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이는 결국 파벌에 의해 티베트 불교가 유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전통 종교인 본(Bon) 교(敎)와의 갈등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각 종파간의 다툼을 비롯해 본교와의 갈등은 한편으로는 오히려 티베트 불교 발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는 특유의 씨족 교단을 형성하고,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정치세력화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활불전세(活佛轉世 : 환생)’와 ‘정교일치(政敎一致)’라는 티베트 불교만의 독특한 전통이 확립된 것이다.

이 때문에 송첸감포 왕은 달라이 라마의 등장 이전까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티베트 인들에게 추앙되었다. 또한 정교일치 제도로 인하여 티베트 불교는 종파의 형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는 ‘환생’과 함께 ‘정치·종교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 제도가 확립된 계기가 되었다.

9세기 중반 랑 다르마(Lang Dharma) 왕이 즉위하였다. 티송데첸 왕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국교가 된 후, 융성을 거듭하던 티베트 불교는 랑 다르마에 의해 일대 위기를 맞았다. 불교의 강력한 권력 아래 숨을 죽인 채 왕권의 회복을 노리던 그는 본교 세력과 손을 잡고 불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불교 세력은 1년이 되지 않아 왕을 암살했고, 이는 토번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후 티베트는 몽골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1239년 오고타이 칸의 아들 쿠텐은 티베트를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사캬파의 쿵가 겐첸 즉 사캬 판디트(Sakya Pandit)가 몽골과 손을 잡고 집권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몇 개의 불교 종파가 있었으며, 이들 종파는 몽골 제국과의 관계 정립에 의해 집권과 몰락을 거듭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지배가 약화될 무렵 쫑카파가 등장해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 정치권력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2) ‘달라이 라마 제도’의 확립

1357년 탄생한 쫑카파(Tsonkhapa, 1419년 입적)는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카르마파(派)와 사캬파 등 티베트 불교 종파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했다. 그리고 1409년 간덴 사원을 건립하고 겔룩파를 세웠다. 겔룩파는 그때까지 사실상 티베트의 실권을 쥐고 있던 파크모두파(1158년 창설) 등과 권력을 다투었다. 겔룩파가 카르마파에 밀리던 1475년 겔룩파에 겐둔 갸초(Gendun Gyatso)가 태어났다.

그는 후에 2대 달라이 라마로 추대되었고, 당시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던 티베트 불교 세력 다툼에서 겔룩파를 강자로 올려 놓았다. 그의 뒤를 이은 소남 갸초(Sonam Gyatso)가 1543년 태어나 겔룩파를 확고한 위치에 올려 놓았고, 이때부터 사실상 티베트에는 종교와 정치 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 제도’가 확립되었다. 소남 갸초는 ‘살아 있는 부처’로 티베트 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1578년 몽골의 황제 알탄 칸(Altan Khan)을 만났다. 알탄 칸은 그에게 감화되어 그의 이름 중 ‘큰 바다’라는 뜻을 가진 ‘갸초’에 해당하는 몽골어 ‘달라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것이 공식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의 등장이었다. 소남 갸초는 몽골 제국의 원조 아래 왕권이 붕괴된 티베트의 실권자가 되었다. 몽골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세력 대신 종교지도자를 대리통치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티베트에서는 군주로 몽골에서는 왕사(王師)로서의 달라이 라마의 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는 군주의 위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몽골의 지원은 겔룩파의 집권을 가져온 동시에 티베트 불교의 본격적인 정치 세력화와 피비린내 나는 권력 암투를 불러온 것이다. 정치권력의 다툼 한가운데는 언제나 달라이 라마가 있었고, 달라이 라마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티베트의 비극과 희망을 한꺼번에 지닌 존재가 되었다.

역대 달라이 라마를 살펴보는 일은, 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와 티베트 국민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정치 상황하에서 달라이 라마 제도가 유지되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달라이 라마’에게는 ‘쿤둔(Kundun : 모두에게 존경받는)’ ‘걀와(Gyalwa : 위대한 수행자)’ ‘노르부(Norbu : 서원을 이루는 금강석)’ 등 여러 가지 칭호가 붙는다.

3) 역대 달라이 라마

1대 달라이 라마는 ‘걀와 겐둔 둡(Gyalwa Gendun Drub, 1391∼1474)’이었다. 소남 갸초가 달라이 라마로 즉위한 뒤 추서한 1대 달라이 라마가 그였다. 걀와는 ‘위대한 수행자’라는 뜻이다. 그는 카담파의 나르탕 사원에서 출가하여 여러 종파에서 수학하였다. 1447년 그 유명한 시가체(Shigatse)의 타쉬룬포(TashiLhunpo) 사원을 건립했다.

선정(禪定)과 교학(敎學)을 겸비했고, 20년 이상을 수행에 전념하다 1474년 앉은 채로 입적했다. 2대 달라이 라마는 ‘걀와 겐둔 갸초(Gyalwa Gendun Gyatso, 1475∼1542)’다. 그는 닝마파 가문에서 태어났고, 4살 때 1대 달라이 라마 겐둔 둡의 환생으로 확인되었다. 그의 환생을 신성한 호수 라모이 라초(Lhamoi Lhatso)가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서부터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라모이 라초에 의해 확인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1542년, 그 역시 앉은 채로 입적에 들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달라이 라마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는 달라이 라마 제도를 확립한 사람이다. 1543년 탄생한 그는 드레풍 사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78년 몽골의 황제 알탄 칸을 교화하고, 티베트 불교 중 겔룩파의 전성기를 열었다.

일생을 닝마파와 겔룩파의 전통에 따라 수행했고, 이를 융합하려고 노력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장악한 몽골 제국과의 외교관계 설정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로 인해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가 아시아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588년 설법을 하다가 입적했다.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이끌던 달라이 라마 제도는 4대 달라이 라마 ‘용텐 갸초(Yonten Gyatso, 1589∼1617)’대에 이르러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티베트 인이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 제국에서 태어났다. 몽골 제국의 황제 알탄 칸의 직계 후손이 4대 달라이 라마 용텐 갸초였다. 이방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소남 갸초가 알탄 칸에게 몽골로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결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밖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환생의 확인도 즉위도 늦었다.

4대 달라이 라마는 수행과 교육에 전념했고, 일찍 입적했다. 5대 달라이 라마 ‘걀와 나왕 롭상 갸초(Ngawang Lobzang Gyatso)’는 달라이 라마를 굳건한 권력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로 불린다. 그러나 냉혹한 권력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위치에 있기도 했다. 9세기 이후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던 티베트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1642년 그는 정신적이고도 세속적인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티베트의 의료 체계와 국가 교육 체제를 확립한 탁월한 정치가로 활약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 달라이 라마의 상징이며 티베트의 상징이기도 한 포탈라궁을 건설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강력한 군주의 사후 포탈라궁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한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가 입적한 지 17년이 지난 1695년 포탈라궁이 완공되었다. 이 때문에 6대 달라이 라마의 즉위가 많이 늦어졌다.

6대 달라이 라마 ‘걀와 상양 갸초(Tsang Yang Gyatso)’는 사찰에서 수행 생활을 하지 않은 유일한 달라이 라마다. 이 때문에 2대 판첸 라마가 직접 그를 찾아가 환생자로 확인했고 가르쳤으며, 1697년 즉위했다. 그는 시와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20살이 되던 해 자리를 박탈당했고 포탈라궁에서도 쫓겨났다.

그가 사찰에서 수행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일단의 몽골 인들이 침입해 1705년 몽골로 납치했으며 다음해 몽골에서 입적했다. 7대 달라이 라마 ‘걀와 칼장 갸초(Kalzang Gyatso)’는 1708년 동티베트에서 태어났으나, 몽골 제국과의 갈등으로 공식적으로 즉위하지 못했다. 불운한 환경에서 지냈으나 그의 청정한 수행 생활은 티베트 국민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다. 많은 논서를 남겼고 1757년 입적했다.

8대 달라이 라마 ‘걀와 잠팔 갸초(Jampal Gyatso)’는 1758년 태어나 1762년 라사로 보내졌다. 3대 판첸 라마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경이로운 영적 능력을 지녔고 정치를 혐오했다. 그의 생전에 영국이 최초로 티베트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보였고 이때부터 티베트는 고립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1804년 입적했다. 9대 달라이 라마 ‘걀와 룽톡 갸초(Lungtok Gyatso)’는 가장 불행한 지도자였다.

5대 달라이 라마 사후 달라이 라마의 지도력은 급격히 약해졌으나, 외부 세계와의 갈등으로 인해 티베트 내부 정치 상황은 권력 다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달라이 라마’ 제도가 명목을 유지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내부 권력 다툼은 오래지 않아 다시 격화되었고, ‘달라이 라마’는 그 소용돌이에서 비켜날 수 없었다. 이후 9대부터 4대에 걸친 달라이 라마가 모두 단명했다.

9대 달라이 라마는 겨우 10살에 입적했다. 10대 달라이 라마, 11대 달라이 라마, 12대 달라이 라마는 각각 21살, 18살, 20살에 입적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정치적 암살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13대 달라이 라마 ‘걀와 툽텐 갸초(Tubten Gyatso)’는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회복했지만 티베트의 저물어 가는 운명과 일생을 함께 한 비극의 지도자였다. 1876년 태어나 1878년에 즉위한 그는 1904년 영국의 침략과 1909년 중국의 침략을 받았다. 티베트 정치는 외부의 침략으로 인해 안에서 다툴 여력이 없었고, 역설적으로 13대 달라이 라마는 국내 정치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기나긴 중국의 침략을 간신히 견뎌냈으나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조국 티베트의 비극을 예언하며 1933년 입적했고,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티베트의 비극과 함께 환생했다.

3.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1) 비운의 땅 암도에서 태어나다


1933년 12월 7일 지구상에서 가장 신비한 곳 라사의 포탈라 궁전에서는 13대 달라이 라마 툽텐 갸초가 열반했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킬 힘을 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신과 문화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1)

장차 티베트가 바깥 세계의 지배 아래 놓일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과 함께 열반을 맞이한 그는, 1895년부터 서구 열강의 식민지 확장 전쟁과 중국의 침략이 거센 가운데서도 티베트를 굳건히 지켜 왔었다. 티베트 북동부 중국 접경 지역에 자리한 ‘말들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암도(Amdo)는 중국의 서쪽 평원을 내려다보는 고원 지대이다.

접경 지역에 자리잡은 운명으로 인해 중국과의 오랜 전쟁을 겪어야 했던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13대 달라이 라마가 열반에 들고 2년 뒤인 1935년 7월 6일(티베트력 5월 5일) 밤, 그곳 암도 지방의 조그만 마을 ‘탁체르(Taktser : 포효하는 호랑이)’는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무지개가 빛을 발하는 기묘한 하늘 아래 놓여 있었다. 아무도 그날 밤의 암흑과 천둥 번개, 무지개를 주목하지 않았다.2)

그러나 그날 밤의 무지개는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땅 암도에서 14대 달라이 라마 ‘라모 톤둡(Lhamo Thondup)’이 태어난 것을 알리는 축복의 무지개였다. 라모 톤둡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눈을 뜬 채로 태어났다.3) ‘탁체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아미 치리산(하늘을 찌르는 산)’만이 그날 밤의 축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라사의 사자(使者)들이 그를 찾아왔다.

2) 라사의 사자들, 라모 톤둡을 찾아내다

태풍 앞에 놓인 조국 티베트를 지켜 주던 13대 달라이 라마의 열반 뒤 라사의 수행자들은 티베트 불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그들의 수호자 달라이 라마를 찾기에 분주했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이 오랜 세월 지키온 방식 그대로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내 아이 ‘라모 톤둡’을 찾아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며 세상을 떠난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해는 스스로 머리를 북동쪽으로 돌려 그의 후계자가 환생할 곳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왕사(王師)가 파견한 사절단은 늘 그랬듯이 환생자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던 ‘라모이 라초(Lhamoi Lhatso)’ 호수를 찾아 후계자를 만날 것을 기도했다. ‘라모이 라초’ 호수는 1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후계자를 찾아 주는 신성한 호수’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라모이 라초’는 한 번도 그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사절단은 14대 달라이 라마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티베트 어로 ‘아(Ah)’ ‘카(Ka)’ ‘마(Ma)’ 세 글자를 ‘라모이 라초’가 보여 준 것이다. 그와 함께 청록색과 황금색을 띄고 있는 사원의 지붕과, 사원에서 언덕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특이한 모양의 빗물받이 홈통이 있는 집의 영상을 함께 보여 주었다.

‘아’는 암도, ‘카’는 쿰붐 사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또는 ‘카’와 ‘마’가 함께 ‘호랑이가 포효하는 마을’을 지켜 주는 ‘하늘을 찌르는 산’에 있는 ‘카르마 돌파 다르체’ 사원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사절단은 ‘라모이 라초’가 일러주는 대로 찾아가 마침내 ‘라모 톤둡’을 만났다. 사절단의 단장이었던 퀴창 린포체(Kyitsang Rinpoche)는 하인으로 변장했다. 그는 ‘세라’라는 사원의 책임자였다.

어린 라모 톤둡은 하인으로 변장한 그를 알아보았다. 그를 보자마자 “세라의 라마시여”라고 외쳤다. 이틀 뒤 사절단은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을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라모 톤둡은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 정확하게 전생의 자기가 쓰던 물건들을 찾아내었다. 사절단은 마침내 14대 달라이 라마를 찾았다고 라사에 보고했다.

3) 설산을 넘어 산상 도시 다람살라로

1959년 3월 라사는 태풍 앞에 놓인 등잔이었다. 중국의 침략군은 라사를 포위한 상태였다. 라사의 시민들은 티베트의 상징인 14대 달라이 라마의 안녕을 기원하러 포탈라궁 앞에 모여 있었다. 14대 달라이 라마 ‘잠펠 나왕 롭상 예쉐 텐진 갸초(Jampel Ngawang Lobsang Yeshe Gyatso)’는 100여 명의 망명단을 이끌고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 CIA 요원이 망명 대열에서 그들을 돕고 있었다.

라사를 떠난 지 일주일 후 티베트의 변방에서 새로운 티베트 정부를 구성한 달라이 라마 일행은 고국 티베트를 뒤로하고 인도에 도착했다. 4월 27일 그들은 인도의 수상 네루를 만났다. 오랜 협상과 우여곡절을 겪은 후 이듬해 4월 29일에야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영국 식민지 시절 휴양지로 개발된 다람살라는 이제 티베트 인들의 새로운 조국이 되었다.

1937년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결정된 후 잠시도 편한 시간을 갖지 못했던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이제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잠시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는 1959년 3월부터 9월에 있었던 중국의 티베트 침략 전쟁으로 희생된 8만 7천여 명의 동포들에 대한 자책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60년 다람살라에 100여 명의 난민과 함께 자리잡은 티베트 망명 정부는 세기가 바뀌어도 끝나지 않는 ‘비폭력 티베트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고, ‘티베트 불교를 전세계에 알리는 전진 기지’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 역시 끝나지 않은 조국의 불행에서 한시도 비켜서지 않았다. 일관되게 비폭력 독립운동은 펼쳐온 그는 마침내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티베트 불교는 앞에서 말한대로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 자체였다. 권력을 둘러싼 불교세력 내부의 갈등은 암살기도와 독살로 이어졌다. 13대 달라이 라마의 사후 섭정을 맡았던 레팅 린포체는 부정부패로 물러났다가 재집권하려는 과정에서 독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 혼란을 이겨내고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자리잡은 것이다.

4. 티베트 불교의 또 다른 축, 판첸 라마

1989년 1월 21일 제10대 판첸 라마(Panchen Lama)가 입적했다. 그리고 며칠 후 2월 초 그를 추도하는 장례 행렬은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는 격렬한 시위 행렬로 바뀌었다.

그후 한 달 동안 라사에서는 6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다쳤다. 당황한 중국 정부는 3월 7일 티베트에 처음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티베트 국민들에게 또 다른 지도자였던 판첸 라마에 대해 중국은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은 1995년 5월 17일 14대 달라이 라마가 지목한 환생자인 11대 판첸 라마 ‘겐둔 최키니마(Gendhun Choekyi Nyima)’를 납치해 ‘세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정치범’으로 만들었다.

판첸 라마 제도는 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확립된 제도이다. 5대 달라이 라마가 그 스스로 굳건한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그의 스승을 위해 마련한 제도였다. 그의 스승 ‘롭상 최키 걀첸(Lobsang Choekyi Galtsen)’은 겔룩파의 2인자였다. 시가체 지방의 타쉬룬포 사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그를 5대 달라이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제4대 판첸 라마로 임명했다.

그리고 1대 판첸 라마로는 티베트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꼽히는 쫑카파의 제자를 추서했다. 2대와 3대 판첸 라마는 모두 타쉬룬포 사원의 지도자였다. 현재의 판첸 라마는 11대가 된다. 강력한 전제 군주였던 5대 달라이 라마는 판첸 라마를 정치적 동반자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첸’은 ‘위대한 학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관세음보살의 화신 달라이 라마와 아미타불의 화신 판첸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의 정교일치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후 오랜 동안 판첸 라마와 달라이 라마는 서로의 공백기를 메워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때로는 정치권력을 놓고 다투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의 2인자로서 권력의 한 축에 서 있었지만 2인자로서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달라이 라마의 입적 후, 섭정 기간에는 정치고문 역할을 하기도 하고, 환생자 선택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실질적인 정치권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민들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확고해진 것일 뿐이었다. 1728년 중국은 판첸 라마를 이용해 티베트를 분리시키려고 시도했다. 중국은 서부 티베트의 통치권을 5대 판첸 라마에게 부여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8대 판첸 라마(1883∼1937)대에 연출되었다. 강력한 권력 집중을 바탕으로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13대 달라이 라마는 제국의 확장을 노리던 영국이나 중국 모두에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은 판첸 라마에게 접근했다. 결국 그는 중국의 음모에 의해 중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망명지에서 입적했다. 9대 판첸 라마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일찍 입적했다.

그의 뒤를 이은 10대 판첸 라마도 결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에서 태어나 적국의 수도인 북경에서 지내야 했다. 티베트의 문화 발전이 그가 생전에 집중한 임무의 전부였다. 이로 인해 티베트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판첸 라마’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그러나 판첸 라마의 정치적 위상은 1940년대 이후 급속하게 강화된다.

중국은 말을 듣지 않는 달라이 라마를 제치고, 판첸 라마를 식민정책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판첸 라마는 중국에 의해 ‘티베트 임시정부 수반’ 자리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명목상으로는 ‘두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판첸 라마는 말 잘 듣는 중국의 대리인으로 비쳐졌다.

후에 판첸 라마의 침묵은 티베트에 대한 충정 때문임이 밝혀졌다. 1862년 달라이 라마를 비난하라는 중국의 협박을 거절한 대가로 연금되었고, 1964년 자신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기회도 거절했다. 중국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대중연설의 기회를 주었지만, 판첸 라마는 티베트 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권위는 중국에 의한 것이 아니라 티베트 역사와 티베트 국민의 가슴 속에 있으며, 달라이 라마의 생존이 티베트의 희망이라고 역설했다. 이 연설로 중국에 압송된 그는 다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1999년 1월 29일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 그의 10주기 추모 법회를 열었다.

달라이 라마는 10대 판첸 라마에 대해 “티베트의 독립을 추구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애국지사”로 평가함으로써 전대부터 내려오던 서먹서먹한 관계를 청산했다. 또 중국에 연금중인 11대 판첸 라마에 대해서도 “모든 중생을 향한 구원의 역할을 해야 할 판첸 라마를 중국이 납치해서 감금하고 있다.”고 유감을 피력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날 10대 판첸 라마의 전기를 발표함으로써 또 다른 지도자로서의 ‘판첸 라마’를 실질적으로 복권시켰다.

5. 티베트 인들이 생각하는 환생

1) 환생의 의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라는 활불(活佛 : tulku) 제도는 티베트만이 지닌 전통이다. 물론 티베트 불교 초기부터 확립된 제도는 아니다.

강력한 군주이자 신망받는 종교지도자였던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에 의해 17세기에 확립된 제도였다. 그러면 환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윤회의 또 다른 형태는 아닌가.

이에 대한 14대 달라이 라마의 견해는 이렇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제법(諸法)의 실상을 알게 된다. 그 때문에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제도될 때까지 세상에 거듭 나투게 된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그의 자서전에서 스스로 밝힌 환생의 의미이다.

좀더 논리적인 설명이 있다. 1995년 뉴욕에서 칼라차크라 법회를 하면서 한 설법 가운데 일부이다.

“마음은 과거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성을 갖는다. 지금의 생에서 전생의 마음이나 의식을 찾아갈 수 있다면, 물질계가 그러한 것처럼 마음이 갖는 연속성의 시초를 무한한 차원에까지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은 없다. 마음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환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 있는 것이며, 마음이나 의식도 그 직전 상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과 물질은 상호 작용하지만 그 중의 어떤 하나가 서로 다른 어떤 하나의 실체가 되지는 못한다.”
불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존재나 어떤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변하지 않고 ‘나’로서 존재하는 실체는 없다. 그가 말하는 환생에서 전생과 현생, 그리고 다음의 환생을 이어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어떤 존재가 아니다. 우리 의식의 미세한(오묘한) 층이다.

그 층도 실체로서의 존재는 아니다. 오랜 수행 끝에 이룬 깨달음에 바탕을 둔 그러한 미세한 층인 것이다. “의식에는 여러 차원들이 있다. 가장 깊숙한 우리 내면에 있는 미세한 의식이 지닌 특별한 에너지는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설명하는 환생의 논리이다.

2) 제도로서의 환생

달라이 라마가 설명하는 환생은 수행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무명(無明)에 이끌리는 중생의 윤회와는 차원이 다른, 깨달음에 바탕을 둔 방편으로서의 환생인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 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거의 절대적인 신앙을 보이는 환생은 좀더 세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환생자의 전통은 힌두교와 티베트 불교 자체에서 비롯되었다.

84명의 대성(大聖, maha?iddha)이 그 전통의 시작인데, 그들은 수행을 통해 ‘위대하고 완전한’ 경지에 오른 성인들이다. 대성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환생한다. ‘84’라는 숫자는 ‘완전’을 상징하며, 대성 가운데는 티베트 불교지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티베트 불교의 대석학 파드마삼바바도 84명의 대성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들 대성이 티베트 불교에서 환생제도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 환생이 실질적인 권력제도로 자리잡은 것은 불교와의 관계 속에서였다. 티베트의 전통 종교는 불교가 아니다. 본(Bon)교였다. 본교는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8세기 무렵부터 불교에 흡수되고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나 티송텐첸 왕의 강력한 불교 국교 정책의 추진으로 힘을 잃었다. 본교는 제물을 바치고 피를 올리는 제례 의식과 악마를 쫓는 주술이 발달한 토착 종교였다.

강력한 왕권을 지닌 ‘신성한 왕’들은 신의 대리자였다. 대기와 대지, 지하, 하늘을 대표하는 신들은 왕으로 나타나 그들을 돕고 다스렸다. 결국 신성한 왕들은 신들의 화신(化身)이었다. 이러한 본교의 영향은 티베트 불교에서 활불을 인정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티베트에서 환생자는 오래 전부터 그들을 다스리던 신성한 왕의 대리자로서 다시 ‘환생’하였다. 결국 치열한 논쟁과 정쟁(政爭) 끝에 자리잡은 ‘달라이 라마’는 오랜 티베트의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정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본교의 전통에서 확보한 셈이었다.

불교를 반대하는 세력은 본교를 주축으로 힘을 키웠다. 그들을 물리친 티베트 불교의 출가 승단은 정쟁의 와중에서 실종된 중앙 권력을 취할 수 있었다. 권력을 잡은 승단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청정한 모습을 지니지 못한 출가 승단은 강력한 힘을 갖지 못한다. 11세기 티베트 불교 중흥자 아티샤(Atisa, 982∼1054)는 이 점을 꿰뚫고 있었다. 계율 부흥 운동을 강력히 추진했다.

다소 해이해진 승단은 출가의 전통을 확고히 했고, 강력한 계율은 몇 백년 후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승단을 강력하게 만든 출가의 전통은 또 다른 전통을 필요로 했다. 출가자는 강력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혈육보다 강력한 후계자는 없기 때문이다. 3대 달라이 라마는 몽골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 정치의 냉혹함을 보았고, 보다 강력한 후계자를 원했다.

강력한 권력이야말로 티베트를 굳건하게 지켜 줄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 자신 강력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티베트를 다스리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은 강력한 군주가 바로 5대 달라이 라마였다. 그는 환생 제도를 정착시켰으며, 죽음을 감추면서까지 포탈라궁을 완성했다. 환생자로서의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궁전 포탈라(관세음보살이 계시는 곳이 보타락가산이다.)는 성스러운 장소인 동시에 강력한 정치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로 대표되는 환생자, 활불의 전통은 그렇게 성립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거의 모든 티베트 인들의 가슴속에 영혼의 지도자인 동시에 세속의 지도자로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거쳐 확립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환생에 대해 티베트 인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전생활불(轉生活佛)은 당연한 신앙의 대상이다.

환생의 법왕(法王)이 몇 세기에 걸쳐서 유지되고 지금도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본교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신을 대신해 지상에 나툰 신성한 왕은 본교에서 비롯되어 티베트 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둘째, 그들을 다스릴 강력한 권력은 국가 제도 아래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일단 중앙 집중 권력을 확보한 출가 승단에서 후계자를 구하는 일은 법왕의 환생 이외에는 생각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셋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의 화신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퍼졌다. 티베트 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민족이다.

그들이 받아들인 불교의 이념 아래서 화신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환생이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환생제도 자체의 매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법왕 이전의 군주는 혈통에 의해 양위되어 왔다. 그러나 환생한 법왕은 빈부와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것은 환생제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성 84명의 출신성분이 모든 계층과 남녀를 가리지 않는 데서 연유한다. 따라서 티베트 인이 아닐지라도 환생자로 밝혀진다면 티베트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티베트 인들에게 ‘달라이 라마’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될 것이다. 티베트 사람은 누구나 ‘달라이 라마’를 만나야 한다. 한 번만이라도 ‘그분’을 친견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는 일은 그들에게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된다. ‘그분’을 만나면 고통스럽고도 긴 윤회의 여정을 마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마니륜(Mani輪)이라는 조그만 불구(佛具)를 돌리며,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한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고 관세음보살의 진언을 염송하며 깨달음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그저 단순한 세속의 정치 지도자가 아니다.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스승이며, 삶의 등불이다. 다람살라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나, 북인도 지역에서 만난 어린아이들은 예외 없이 사원에 들러 커다란 마니륜을 돌리며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한 후에 학교를 간다. 대부분의 티베트 사람들에게 불교는 삶 그 자체이다.

그들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사원을 세우며, 집에는 예외 없이 형편에 맞는 불단을 설치하고, 예경을 올린다. 부처님상 옆에, 혹은 무릎 위에는 항상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판첸 라마의 사진을 올려 놓는다. 부처님 앞에서 달라이 라마 앞에서 그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한다. 이국 땅에서 떠돌아도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사원을 가장 먼저 세운다.

그리고 학교를 세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민족인 동시에 나라마저 잃은 그들은 쉼 없이 배운다. 부처님과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배우고, 영어를 배운다. 그들이 중국이라는 대제국의 힘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다.

6. 맺는 말

티베트의 미래는 암울하다. 중국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티베트에서 철수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티베트는 독립할 수 없다.

중국은 티베트 자치구에서 가혹한 통혼(通婚) 정책이나 낙태 정책을 통해 티베트 민족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50여 년 동안 파괴된 티베트의 사원과 전통 문화는 이제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세계에서, 인도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의 사원에서, 티베트를 동경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바로 티베트 민족 자체의 존립과 전통 문화, 정신의 말살이다. 중국은 티베트를 포기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티베트 자치구가 가진 막대한 지하자원일 것이다. 우라늄을 포함한 특수 광물의 지하 매장량은 전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또한 3억 Kw에 달하는 막대한 수력 발전 자원, 전체 중국 산림 면적의 37% 등이 티베트 자치구에 있다. 티베트는 천혜의 군사 요충지이기도 하다. 인도와의 접경지대에 티베트 만한 전략 요충지는 없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며, 인도를 내려다보는 이곳을 중국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그밖에도 티베트의 독립이 가져올 연쇄적인 소수 민족의 독립 열망은 중국을 궁지에 몰아 넣을 것이 분명하다. 국제사회에서 얽혀 있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 역시 티베트를 어렵게 하고 있다. 미국은 언제든지 티베트의 인권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활용할 수 있으며 활용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역시 미국의 이러한 입장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중국 내 많은 소수 민족의 인권 문제에 대해 미국은 모두 언급하지 않는다. 이슬람 계열의 소수 민족이 독립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완전한 독립을 포기한 듯이 보인다. 환생의 제도도 “이제는 끝낼 수 있지 않은가.” 하고 서슴없이 말한다.

혹시 15대 달라이 라마로 환생하더라도 티베트에서 환생하는 것은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보다 실질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중국이 티베트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독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그의 정책은 바뀌어 왔다.

간략하게 티베트 망명정부의 입장에 대해 살펴보자. 티베트 망명 정부는 홍콩식의 1국 2체제 방안을 협상안으로 준비했다. 외교와 국방은 중국이 관장하고 경제와 사회, 문화와 교육 정책은 티베트가 맡는 방식이 티베트 망명정부의 ‘티베트 민족 자치 방안’이다. 일종의 ‘완전자치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수준의 자치를 확보할 수 있도록 티베트의 완전한 독립을 포기한’ 정책으로 풀이된다. 궁극적으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와 티베트 민족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 대해 많은 티베트 인들은 늘 그래왔던 대로 달라이 라마의 결단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 전체를 지켜주고 심지어 영혼을 지켜주는 ‘그’의 정책은 티베트 인들에게는 단순한 ‘정책’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독립에 관해 중국에 굴복하고 있으며, 중국의 완전한 일부로서 티베트를 이끌고 있다’고 비난한다.

티베트 청년연합(Tibet Youth Congress)은 달라이 라마의 정책에 대해 일종의 “저주와 다름없는” 처사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인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힐 어떤 발언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는 여전히 티베트 인들에게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고통에서 건져줄 위대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독립 정책과 관련해 격렬한 비난을 하는 세력들도 그러한 사실은 부정하지 못한다. 달라이 라마가 비록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환생할 수도 있다.”고 선언해도, “티베트 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환생은 없다.”고 말해도 달라이 라마는 ‘달라이 라마’인 것이다. <끝>

김충현
성균관 대학교 철학과 졸업.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역서로 《당신의 적이 당신의 스승입니다》 《하바드의 달라이 라마》 《쿤둔》 등이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