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중국 남개대학 역사계 박사과정

1. 들어가는 말

요사이 중국은 서부 개발로 분주하다. 동서의 지역차를 좁힘으로써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서장(西藏)·신강(新疆)·내몽고(內蒙古)·청해(靑海)·협서(陝西)·산서(山西)·운남(雲南) 등지가 개발의 중심지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개발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교통, 통신망의 확충, 지하자원의 개발 등등을 쉽게 떠올리지만, 중국 정부의 서부 개발에는 자연환경과 문화재 보호도 주요 항목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선진적인 ‘개발’ 개념을 도입한 것인 동시에 수자원의 개발과 보호, 관광산업이 중국의 경제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국의 서부에는 지하자원만큼이나 풍부한 관광자원이 산재해 있다. 돈황과 같은 고대의 석굴사원에서부터 현대의 소수민족 문화까지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낙후한 지역일수록 보다 완전한 형태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것일까? 서부 개발 바람을 타고 많은 관광객이 서부의 소수민족 지역을 찾고 있다.

대부분 한족(漢族)인 이들은 서부의 특이한 자연환경과 소수민족의 문화에 쉽게 매력을 느낀다. 비록 같은 중국인이지만, 생김새도 다르고, 때로는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동포를 만나 이국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같은 국가 안에서 문화적 경계를 느끼고 그것을 넘어보는 것이다. 서부로 갈수록 그 흥분은 더해진다. 문화적 경계가 자꾸만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많은 중국인이 티베트를 여행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티베트가 주는 문화적 충격이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중국인들이 티베트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데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의 호기심과는 다른 무엇이 작용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민족주의이다. 필자는 약 2년 전 중국의 남개(南開)대학 역사과 학생회가 주최한 한 강연회에 참석했던 일을 기억한다.

그 날의 주제는 ‘티베트 문제’였고, 학생회의 초청을 받은 한 교수가 티베트 역사와 현재 티베트 문제를 보는 견해를 약 3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긴 시간이었지만, 자리를 메운 300여 명 학생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유학이나 취업 설명회가 아닌 이 강연에 젊은 학생들은 왜 그렇게 관심을 보였던 것일까?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중국인 특히 지식층에게 티베트 문제는 역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로 남아 있었다.

티베트 즉, 서장(西藏)이라는 말만 들어도 애국심에 불타는 중국인들은 중국 대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이완·홍콩 등등 어쩌면 중화민족을 자처하는 국가와 단체는 대개 티베트 문제에 관한 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떠한 역사적 근원을 갖는 것일까? 물론 그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중국의 반제국주의 투쟁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중국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상징, 티베트

19세기 중국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토가 조각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한 세기에 걸친 투쟁의 결과 청조가 남긴 유산은 몽골인민공화국을 제외하고 거의 원형에 가깝게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계승되었다. 특히 티베트의 경우, 1959년 해방 후에도 10년에 걸친 분투 끝에――중국의 표현을 빌리자면――마침내 제국주의와 결탁한 반동세력을 몰아내고 공산당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티베트는 중국 민족주의 승리의 상징인 것이다.

1) 주권논쟁과 티베트

19세기 중국 침략의 선봉에 영국이 있었다. 인도에서의 우세한 지위를 바탕으로 영국은 티베트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중국을 동서에서 협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티베트와 영국의 관계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72년 영국령 뱅갈 정부(British Bengal Government)와 부탄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는데, 당시 부탄은 티베트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므로 6세 판첸 라마(1738∼1780)가 분쟁 조정에 나섰고, 이로써 영국과 티베트는 최초로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 네팔의 구르카 왕조와 티베트 간에 은전(銀錢) 주조 문제와 상업분쟁으로 전쟁이 발생하였고, 청조가 군대를 이끌고 개입해서 ‘흠정장내선후장정이십구조(欽定藏內善後章程二十九條)’를 체결함으로써 티베트와 네팔, 인도 등지의 상업교류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청조의 봉쇄조치는 1876년 중영연대조약(中英煙臺條約)으로 티베트가 개방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영국의 개방 압력에 의해 티베트 개방에 대한 조약은 체결되었으나, 사천(泗川) 총독은 영국인이 중국의 사천을 거쳐 티베트에 들어가는 것을 계속 저지하였다. 이에 영국은 인도와 네팔, 시킴을 거쳐 티베트에 이르는 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1890년 영국은 시킴과 티베트의 변계를 확정함으로써 시킴을 영국의 보호국으로 삼았고, 시킴은 티베트 진입을 위한 영국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04년 영국군이 라사를 함락하자, 13세 달라이 라마(1876∼1933)는 현재의 몽골인민공화국 울란바토르에 해당하는 고륜(庫倫, yeke ku촵iye)으로 향했다. 이제 청조는 동부의 해안뿐만 아니라 서부 변경 티베트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먼저 영국측은 티베트에 대한 청조의 권한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1906년 당소의(唐紹儀)와 프레이져(S.M. Fraser) 사이에 티베트를 둘러싼 주권 논쟁이 시작되었다. ‘주권국으로서 청조는 속지(屬地) 티베트에 대해 종주국이다’라는 청조의 입장에 따르면 청조는 티베트에 대해 자치권을 인정하지만, 중국이 그 외교권과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공관계에 있던 베트남·미얀마·조선은 속국으로서 스스로 주권을 갖지만 청조가 지방관을 파견해 온 몽골·티베트 등 번부(藩部)는 속지에 해당하여 그 주권을 중국이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서구의 외교 용어를 빌려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영국이 청조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청조의 전통적 외교 질서는 영국을 대표로 하는 서구 열강의 외교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영국의 라사 침공과 주권논쟁은 청조로 하여금 티베트에 대해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게 했다. 청조는 1907년 티베트에 교통·경찰·재정·농업·교육 등 9국(九局)을 신설하여 근대적 통치기구를 설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당시 청조의 성도(成都) 이서(以西) 지역 담당 관리로 파견된 장음당(張蔭棠)·연예(聯豫)·조이풍(趙爾豊)은 티베트의 개혁과 사천과 티베트 교계지역의 개토귀류(改土歸流)를 단행하여 운남 북부, 사천 서부 일대 장족(藏族) 지역에 2도(道), 5부(府), 21주현(州縣)을 설립했는데, 이는 이후 서강성(西康省) 건립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새로운 행정구역을 획정하고, 해당 지역의 지배층을 청조의 정식 관료화하는 이 작업은 이 지역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이 지역이 청조의 영토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때 달라이 라마가 북경에 초청된 사실을 중국학계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사천 서부의 개토귀류에 달라이 라마가 간섭한다면 작업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장음당·연예·조이풍 등은 사천 장족 지역 개토귀류의 성공을 위해 달라이 라마가 가능한 한 북경에 오래 머물도록 유도해줄 것을 조정에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달라이 라마는 왜 티베트와 청해를 떠나 오대산을 거쳐 북경으로 향했을까?

2) 13세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독립

중국측 연구에 따르면, 1904년 13세 달라이 라마는 고륜(庫倫)을 거쳐 러시아로 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티베트 문제에 참여해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페테르스부르그에 파견된 사신 도르지예프(Dorjieff)가 아무 성과 없이 고륜으로 돌아왔고, 고륜의 통치자 8세 제브준단파(1870∼1924)와의 사이에 불화가 계속되자 1906년 10월 달라이 라마는 청해 서녕 부근의 굼붐 사원(塔爾寺)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굼붐은 중앙 티베트 고원을 제외한 장족 지역의 대표적 겔룩파 사원으로서 몽골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904년∼1908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나 북경에 이르기까지 5년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단순히 러시아행이 실패로 끝나자 북경에 의탁한 것만으로 해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후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부탄·시킴·라다크 등 티베트의 변계에서 티베트가 누려온 상업이익을 가로채기 위해 티베트에 압력을 행사한 것도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기 위해 13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잠시 떠날 것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청해, 몽골 등 각지의 신도들은 13세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고, 몽골의 왕공들은 앞다퉈 그를 자신의 유목지에 초청하고자 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주변 지역 순방의 역사는 3세 달라이 라마 시기까지 소급되는데 문제는 매번 이것이 달라이 라마와 겔룩파의 세력확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청조의 허가 없이 티베트를 벗어난 사실 때문에 13세 달라이 라마는 청조로부터 ‘달라이 라마’ 칭호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청조의 이런 제재조치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결국 청조는 고륜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제재조치를 취소했다. 그 사실은 1908년 달라이 라마가 북경에 왔을 때, 발표된 청조의 공식입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당시 광서제(光緖帝)와 자희태후(慈喜太后)는 서장(西藏)의 주요 사안을 달라이 라마 스스로 조정에 직접 알릴 권한을 가지며, 또는 주장대신(駐藏大臣), 서장 지방정부와 함께 청조에 상주할 수도 있다고 명시했다.

달라이 라마의 북경 방문은 다시 한번 그의 지배적 지위를 인정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우연이었을까? 때마침 광서제와 자희태후가 잇따라 사망하였고, 장례와 관련된 불사를 달라이 라마가 주관하였다. 6년에 걸친 외유를 마치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로 향한다. 만약 청조가 개토귀류(改土歸流)를 통해 서강성(西康省) 건설의 기초를 세웠다면, 달라이 라마의 이번 순방은 이후 티베트 독립과 영토 획정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909년 12월 달라이 라마가 라사로 돌아왔다.

청조는 이와 동시에 사천의 군대가 라사에 도착해 각지의 티베트군을 철수시키고, 주장대신의 권한을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 군대는 이미 1908년 3월에 티베트 영내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협상은 순조로운 듯 했지만, 협상 이튿날 달라이 라마는 협상을 회피하기 위해 인도로 갔고, 다시 한번 청조는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박탈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신해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티베트 문제의 협상은 청조에서 원세개(袁世凱) 정부의 몫으로 옮겨갔다.

1912년 4월 대총통 원세개는 몽고·서장·신강 등이 중국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이들 지역이 내지(內地)의 각 성(省)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이들 지역에 관련된 사무는 내정에 관련된다고 선언했다. 이는 몽골, 티베트 등의 독립요구를 예상한 대응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티베트에 대해서는 달라이 라마의 지위 회복을 약속했고, 주장대신과 군대가 철수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독립을 후원하는 영국측은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민국 정부를 인정한다는 조건 아래 티베트에 관한 새로운 조약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에 개최된 것이 1913년 심라 회의(Simla Conference)이다.

심라 회의에서 티베트는 중국과는 독립된 별도의 회의 당사자로서 참석해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선 획정을 요구했다. 당시 티베트의 대표는 티베트 언어와 문화권 전체를 티베트 영토로 삼는 국경선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티베트 고원을 제외하고라도 청해성·운남 북부·사천 서부의 장족(藏族) 거주지역 즉, 이후 설립되는 서강성(西康省) 전체가 티베트의 영토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민국 정부는 티베트측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에 영국측 대표 맥마흔(Sir H. Mcmahon)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데 이는 몽골의 경우처럼, 티베트 문화권을 내외장(內外藏)으로 구분해서 중국은 외장의 자치를 인정하고, 티베트는 내장에 대한 중국의 약간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타협안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외장은 중앙 티베트 고원이며, 내장은 후에 설립되는 청해성과 서강성을 의미한다. 중국측의 입장에서 이 회담은 어떠한 성과도 없는 것이었지만, 영국측은 티베트와 협정을 체결하였고, 이 조약은 티베트 독립과 그 영토에 관한 중요한 국제 협정으로서 인정되었다. 이후 티베트측은 이 조약을 근거로 티베트의 동부, 사천 서부 노강(怒江)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간헐적인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청조의 붕괴는 티베트의 국제적 위상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청조의 붕괴에 따른 변화는 티베트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와 유사한 위치에 놓여 있던 몽골에서도 제브준단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체의 출현이 추진되었다. 제브준단파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만큼이나 청조와 몽골인의 존중을 받는 활불(活佛)이었다. 독립의 길을 걷고자 하는 양자의 정치적 입장이 같았고, 종교적으로도 같은 겔룩파 계통이라는 점에서 티베트와 몽골은 공동노선을 채택하였다. 1913년 몽장(蒙藏) 협정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체결되었는데, 그 주요한 내용은 티베트와 몽골이 상호독립을 인정하고 겔룩파의 번영을 추구하자는 것으로 몽골의 황제 제브준단파와 티베트 국왕 달라이 라마를 각기 그 대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 청조의 번부(藩部)는 이제 더 이상 청조의 책봉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3) 달라이 라마의 개혁 실패와 티베트의 운명

다질링에서 정세를 살피던 달라이 라마는 청조가 붕괴되자 티베트로 돌아왔다. 앞에서 살펴 본 조약의 체결은 대외적으로 티베트의 위상을 독립국으로 격상시켰지만――물론 중국은 이를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이것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티베트 내부에 진정한 변화가 수반되어야 했다. 그 동안 청조는 경제와 군사면에서 티베트에 지원을 했던 터였기 때문에 중국 내지로부터 원조가 끊긴 상태에서 티베트는 세금징수와 군대양성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당시 민국 정부는 1,500명의 정부측 군대가 티베트에 상주한다는 조건 아래, 티베트군 양성을 위한 독자적인 군대훈련을 허가했다. 1912년 당시 달라이 라마의 상비군은 약 1만 명 규모였으며, 계속된 증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사원 토지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곧 각지 라마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티베트에서 사원은 각기 지방 정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상당 부분의 토지가 사원에 속해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정교(政敎)세력의 영수로서 물론 각지 라마의 이익을 대변하지만, 만약 달라이 라마가 중앙 정부의 대표로서 지방 정치세력의 권한을 침식해 들어간다면 양자간의 관계는 갈등·대립 관계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달라이 라마 집정 시기 각 분야에 걸친 개혁정책이 보이지만, 신분정책이나 정치체제에서는 획기적인 변화를 이룰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21년 티베트 군대와 라마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13대 달라이 라마는 군대를 파견해서 라사 3대 사찰의 하나인 철방사(哲蚌寺) 승려를 무장해제시켰다. 1923년에는 급기야 판첸 라마가 달라이 라마 휘하의 관료들을 비난하면서 티베트를 떠나려다 13대 달라이 라마의 설득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사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미묘한 관계는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지며 이는 티베트의 정세에 줄곧 영향을 미쳐왔다. 여기에 더해 군대가 그 대우에 불만을 갖고 정부와 대립하였고,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귀족 자제들은 세속 정권의 성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주변국가에서 일어났던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티베트 역시 새로운 시대를 앓고 있었다. 구시대의 유산과 제국주의의 압박이 공존하던 이때, 중국은 서서히 군벌의 분열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손중산(孫中山) 등 혁명세력이 1927년 무한(武漢)에 국민정부를 수립했고, 1928년 정부조직의 일부로 청조의 이번원(理藩院)을 그 전신으로 하는 몽장위원회(蒙藏委員會)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이 기관은 몽골과 티베트 문제를 그 주요 업무로 하였다. 1931년, 1939년 청해성과 서강성이 각각 세워졌고, 1932년 사천·운남·청해·성서·감숙 5개 성 대표와 중앙 몽장위원회·외교부·군정부 등이 참가한 서방(西防)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모두 중국 내지의 상대적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몽장위원회의 사업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한 것을 의미했다.

당시 판첸 라마는 강장(康藏)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당 정부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후 그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933년과 1937년에 13세 달라이 라마와 9세 판첸 라마가 차례로 원적(圓寂)했다. 새로운 영동(靈童)을 선정하기 위한 작업이 일정에 따라 진행되면서 이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각 정치세력의 움직임이 민첩해지기 시작했다.

국민정부 또한 이번 행사를 통해 청조의 역할을 계승하고자 했고, 1940년 몽장위원회의 주장판사처(駐藏辦事處)가 라사에 설립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14세 달라이 라마 등극이 이후 티베트와 중국관계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티베트의 제국주의 문제는 1959년까지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30년대부터는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광산 개발을 명목으로 티베트에 진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현재는 가장 중요한 망명정부의 후원자가 되어 있다. 티베트의 제국주의 축출은 민국정부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과제가 되었다. 중국 영토에서 마지막으로 제국주의와 그에 협력한 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간해서 잊혀질 수 없는 기념비적 사실이 되었다.

3. 티베트·티베트 문화권

우리는 앞에서 정치사적 서술을 통해 중국인에게 티베트가 갖는 의미를 중국 근대 민족주의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당시의 대체적인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티베트 문화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13년 심라회의에서 티베트측은 티베트 문화권을 영토로 주장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었다. 만약 섬서성 난주(蘭州)와 사천성 성도(成都)가 서부 변경도시가 된다고 상상하면 어떠한가?

물론 신강성과 몽골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파급효과를 생각한다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달라이 라마 정권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일까?

1) 티베트의 어의와 그 지리적 개념

우리는 지금 ‘티베트(Tibet)’라는 단어를 지역의 이름인 동시에 민족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라는 말은 서구에서 사용되기 시작해서 전세계로 보급되었을 뿐, 정작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봇드(bod)’라고 부른다. 티베트의 어원에 대해서는 ‘척발(拓拔)’이 와전되어 전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명확하지는 않다.

현재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분포하는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의 남록·네팔 서부·시킴·부탄·중앙 티베트 고원·청해성·사천 서부·운남 북부·감숙성 남부와 감숙·청해성 교계지역 등에 걸쳐 있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티베트 즉, 중앙 티베트 고원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 이른다.

따라서 만약 티베트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을 ‘티베트’라고 한다면, 이것은 중앙 티베트 고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서장(西藏)은 서장장족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를 의미하므로 광범한 의미의 티베트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민족명인 장족의 경우는 중국 영내에 거주하는 티베트 민족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비슷한 개념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거주지를 암도(a-mdo: 감숙·청해·사천의 장족 지역), 캄(khams: 티베트 고원의 동남부), 위(dbus: 라사 일대), 짱(gtsang: 시가체 일대), 아리(mngav-ris: 티베트 고원 서부) 등으로 구분해서 불러왔다. 비록 티베트 민족은 같은 문자를 사용하지만, 지역에 따라 그 읽는 방법에 차이가 있으며, 각각 독자적인 방어권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환경도 차이가 커서 유목에 적합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캄에서는 포도나 차도 생산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토번(吐藩) 왕국의 후예’라는 것과 모두 ‘달라이 라마의 신도’라는 사실이다.

2) 토번 왕국과 티베트 민족의 형성

7세기 초 티베트에 거주하던 장족의 조상들이 세운 정권을 우리는 토번이라고 하며, 토번의 시조로 불리는 냐디첸포(gnya’-khri btsan-po, 쉈?贊普)는 기원전 4세기 중엽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티베트 고대사를 기록한 문헌들 중 《왕통세계명감(王統世系明鑑)》에서는 당시 티베트 일대에 ‘44개의 소왕(小王)’ ‘12개의 소방(小邦)’ 등이 존재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당시 티베트의 조상들이 냐디첸포의 아륭(雅隆)부락을 중심으로 한 독립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티베트에는 아륭 이외에도 양원(羊園, 象雄)·소비(蘇毘)·백란(白蘭)·당항(黨項)·부도(附圖)·토곡혼(吐谷渾) 등의 정치세력이 있었다. 7세기 송첸감포(srong-btsan sgam-po, 松贊干布, 617년∼650년)가 티베트 고원과 그 주변의 제민족을 통합하고 토번 왕국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에 처음으로 통합된 정치 세력이 출현하였다. 당시 네팔과 당나라에서 각각 공주를 보내 화친을 맺은 것도 토번의 이러한 실력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송첸감포의 시대는 사실상 토번과 당이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650년 이후 송첸감포의 어린 손자가 등극하면서 토번의 정치는 갈이(?爾)ㆍ녹동찬(祿東贊)의 섭정기를 맞게 되는데, 이 시기 토번은 하서(河西)와 서역(西域)을 장악하면서 그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토번 팽창의 역사는 약 2세기 가량 지속되며, 당과 대등한 실력을 갖고 서역4진(鎭)을 경영하는 데 참여하였다.

당시의 역사는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현자희연(賢者喜宴)》 등 한(漢)·장문(藏文) 사서에도 전해지지만, 이들은 모두 이후에 저술된 것인 데 반해, 돈황(敦煌) 장문(藏文) 문서는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자료들은 7∼9세기 이 지역이 토번의 주요 활동 무대였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당시 토번의 언어·문학, 특히 산스크리트와 한문의 번역문학·마니교·경교·불교·티베트 원시종교인 본교(Bon Po) 경전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9세기 초, 토번 왕국은 와해되었다. 이로써 송첸감포에서 시작된 티베트의 통일세력 토번 왕국은 약 2세기에 걸친 번영의 시간을 뒤로한 채 분열기를 맞게 된다. 토번 왕국의 자취는 점차 사라져갔지만, 이를 바탕으로 티베트에는 장족의 모체가 되는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토번의 후예를 중심으로 새로이 정치세력화하는 움직임이 티베트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불교가 가세함으로써 오늘날의 티베트 문화권에 더욱 근접해 갔다.

3) 티베트 불교교단의 정치세력화와 5세 달라이 라마 정권의 출현

티베트 각지에서 과거 왕실과 그 신하의 후예들에 의해 소규모의 정권들이 탄생했다. 이 시기는 티베트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중국 학자들은 10세기를 전후해 각지에서 등장한 정치세력을 농노주(農奴主) 정권이라고 하며, 1959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완전히 해방시킴으로써 티베트에서 농노주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고 본다.

이러한 농노주 정권은 전근대 봉건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지만, 티베트의 경우는 이 봉건 정치세력들이 불교교단과 밀접한 관계를 갖거나, 불교교단 자체가 봉건 정치세력으로서 군림하였다는 사실이다. 티베트 불교의 역사는 토번(吐藩)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송첸감포 시대 불교의 전파는 다른 지역의 불교 전파가 모두 그렇듯이 왕실을 중심으로 지배층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그 전파 경로도 다양해서 인도·네팔·서역의 우전(于?), 동방의 당(唐) 등에서 파견된 승려들이 라사 등 티베트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랑다르마(朗達瑪)의 억불정책으로 티베트 중심부인 위짱 지역에서 축출된 승려들은 그 주변부인 서부의 아리, 그리고 동부 암도 지역으로 그 활동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흔히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논할 때, 전홍기(前弘期), 후홍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앞에서 언급한 송찬간포 시대의 불교 수입 시기를 전홍기라고 하고, 랑다르마 억불정책 이후 새로이 불교가 부흥하는 시기를 후홍기라고 한다. 진정한 불교의 발전은 후홍기에 가서야 가능했다. 세속 정치세력이 분열되어 티베트 전체를 정치적으로 주도할 만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각 지역에서는 대소 종파가 성립 발전하였다. 티베트 서부 아리 지역은 토번 왕조의 후예가 분할 통치하고 있었으나, 위짱 지역에서는 토번 왕조와 귀족 후예들의 통치가 쇠퇴해 가는 형세였다.

오히려 명망 있는 고승이 이끄는 교파를 중심으로 작은 세속 정치세력들이 모여드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토지와 인민·가축·재물을 교단에 시주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사원은 사속장원(寺屬莊園, 香火莊)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각 사원의 고승들은 자신의 친속(親屬)과 외생질자(外甥姪子) 등을 이용하였으며, 이들은 자연히 귀족 관원층을 형성하였다. 그 아래에 장원의 속민을 관리하는 하급관원을 두었는데, 특히 이들 관리의 일부는 승려가 담당하였다. 이로써 종교 수장과 지방관원의 직능이 결합된 행정기구와 유사한 조직이 출현하였다.

실력 있는 주요 교파는 각 지방에 모사(母寺)와 연계된 지사(支寺) 조직을 가지면서 그 세력을 확대해 갔다. 당시의 주요한 사원 조직으로 지공파(止貢巴)·살가파(薩迦巴)·파목죽파(?木竹巴)·채파(蔡巴)·아상파(雅桑巴)·달륭파(達隆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본거지는 주로 위짱 지역에 위치하였으나, 동부 암도나 서부 아리 지역에도 지사를 두어 그 세력은 전 티베트 지역에 미치고 있었다.

카담파(bkav-gdams-pa, ?當派)는 수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나, 정치세력과의 연계에 주력하지 않은 결과, 이후 정치세력화하지는 못했다. 원대(元代)의 사캬파(sa-skya-pa, 薩迦派), 원말명대(元末明代)의 카르마카규파(karma-bkav-brgyud, ?瑪?擧派)의 뒤를 이어 달라이 라마의 겔룩파(dge-lugs-pa, 格魯派)가 티베트의 최대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달라이 라마 정권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티베트 문화권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모든 교파가 그렇듯이 겔룩파 또한 성립 초기에 전 티베트 불교계의 존경을 받는 조사(祖師)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쫑카 지역 출신의 쫑카파 즉 나상찰파(羅桑?巴, tsong-kha-pa, 1357∼1419년)이다. 우리는 쫑카파라는 이름에 익숙해 있는데, 이는 곧 ‘쫑카 사람’이라는 뜻이다. 쫑카파는 살가(薩迦)·택당(澤當)·납정(拉頂)·내당(納塘) 등 여러 교파의 주요 사원을 돌면서 현밀교(顯密敎) 경전을 착실히 수학했다. 그의 종교계의 권위를 바탕으로 1409년 라사 기원대법회가 창립되었는데, 이는 파죽(?竹)정권을 비롯한 티베트 승속 각계의 후원 아래 거행되는 티베트 최대 규모의 법회였다.

이후 철방(哲蚌)·색납(色拉)·감단(甘丹)·찰십륜포(?什倫布) 등 겔룩파의 4대 사찰이 건립됨으로써 겔룩파가 그 발전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비록 승려로서 쫑카파의 명성은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정권으로서 겔룩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점차 겔룩파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기존의 교파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것을 흔히 역사서에서 ‘홍황(紅黃)의 대립’이라고 하는데, 기존 교파를 대표하는 카르마카규파와 신흥의 겔룩파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파죽정권이 약화되자 티베트는 혼란에 휩싸였고, 표면적으로는 홍황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3세 달라이 라마가 청해·사천·몽골 등지로 전교를 위해 떠났던 것도 이러한 티베트 내부의 상황, 특히 겔룩파의 위기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4세 달라이 라마(1589∼1616)가 몽골에서 전세(傳世)한 것은 당시 겔룩파와 몽골 사이에 상호협조를 위한 유대관계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겔룩파가 티베트의 통치 정권으로서 등장한 것은 1642년 5세 달라이 라마(1617∼1682) 때였다. 소수의 신흥 교단이었던 겔룩파는 쫑카파의 명성과 3세 달라이 라마(1543∼1588)의 포교 활동에 힘입어 마침내 몽골의 투머트부(部)·할하 투셰트부(部)·오이라트 호쇼트부(部)·준가르부(部) 등을 그의 열렬한 시주(施主)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 중 오이라트 몽골의 일파였던 호쇼트부는 부족 전체가 청해로 이주하여 청해를 거점으로 겔룩파에 그 군사력을 제공함으로써 반겔룩파 세력은 겔룩파의 티베트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티베트 전역에 겔룩파 사원이 급속히 증가하였고, 달라이 라마는 전체 티베트 문화권뿐만 아니라 몽골, 만주 등지에도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를 두고 티베트 인들은 달라이 라마 정권이 토번의 정치체제를 계승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티베트 민족의 정권으로서의 양자의 계승관계를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5세 달라이 라마 시기 성립된 티베트의 겔룩파 정권은 200여 년 후 독립을 시도했던 20세기 초 티베트 인들에게는 독립의 역사적 근거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중국은 왜 원대(元代) 이래 티베트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물론 정치적인 문제이지만 일부 역사적 진실을 그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원명청조(元明淸朝)는 티베트의 시주(施主)인가, 통치자인가

1987년 9월 라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그 이듬해 중국의 대표적 티베트학 잡지인 〈중국장학(中國藏學)〉에 티베트 세속정부의 수반 아포드·악왕지그머드(nga phod ngag dbang vjigs med)가 티베트 역사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사 이래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은 역사적 왜곡이다.

그러나 원대 이래 티베트는 분명 중국의 일부이며, 정치적 예속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악왕지그머드의 정치적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또한 이전보다는 상당히 유연한 자세로 역사를 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원대 티베트 통치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고, 그것이 명청대에 그대로 계승되는가?’이다. 우리는 또다시 근대 국가의 통치개념을 가지고 전근대 사회를 분석해야만 하는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1) 후빌라이 칸과 팍파

우리는 원대의 세계 제국 속에 티베트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잘 안다. 양주(凉州)를 담당하게 된 오고데이 칸의 아들 쿠단(Ku촥an, 闊端)은 당시 몽골 통치자 중 가장 처음 티베트 불교 교단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양주는 현재 내몽고 아납선(阿拉善)·감숙·청해 서녕(西寧)을 잇는 교통로에 위치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는 강족(羌族)의 공격을 대비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양주를 담당하게 된 활단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는 토번 왕국의 후예들을 어떻게 몽골의 통치하에 편입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티베트에서는 마침 사캬파 관씨(款氏) 가족이 성장하고 있었다. 사캬파는 현재의 살가현(薩迦縣)·납자현(拉孜縣)·앙인현(昻仁縣)·시가체를 그 주요 거점으로 하여 후장(後藏)을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사캬파의 지도자 살가반지달(薩迦班智達) 공갈견찬(貢?堅贊, 1182∼1251)은 관씨 가족 중에서 최초로 비구계를 받고 출가한 인물로 그의 조카 팍파(vphags-pa, 八思巴, 1235∼1280)와 더불어 사캬파 성장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팍파와 사캬파의 성장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후빌라이 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장사집(漢藏史集)》 《낭씨가족사(郞氏家族史)》 등 장문(藏文) 사료에 의하면, 당시 티베트의 여러 교파는 몽골의 성장이라는 시대변화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교파는 쿠단(闊端) 이외에도 몽케한, 후빌라이, 아리부하 등 실력 있는 몽골 귀족과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후빌라이가 등극하기 전까지만 해도 당시 몽골의 실력자들은 각자의 군대를 자신과 관계가 밀접한 티베트의 각 만호(萬戶)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후빌라이가 등극하게 되면서 급변하게 되었다. 즉, 몽골의 계승분쟁에서 사캬파는 후빌라이 편에 섰고, 그가 승리함으로써 원조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티베트 내부에서 원조의 대리인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원조는 티베트를 13개의 만호로 구분하고, 만호장을 임명하였으며,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역참을 두어 교통로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매년 일정량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후빌라이는 팍파의 요구에 따라 사원에 대해 면세를 해 주고, 군대가 사원에 주둔하지 않도록 했으나, 티베트 내부의 사법권과 군사권, 역참 관리에 관해서는 원조가 직접 관리했다. 중국사는 이 시기가 처음으로 티베트가 중원의 왕조에 직접통치를 받은 시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학계가 티베트가 중국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원조의 힘을 빌어 사캬파는 1세기 가량 티베트의 최대 세력으로서 군림했다. 그러나 지공파(止貢巴), 파목죽파(?木竹巴) 같은 기타 정치세력과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1354년 당시 사캬파의 본관(本欽) 갑규상포(甲だ桑布)가 양위함으로써 파죽 정권의 집권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티베트 내부의 정치구도에 원조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원조가 책정한 세금이 상납되고 원조에 반대하는 군사행동을 조직하거나 참여하지 않으면 그로써 족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몽골인의 통치방식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이 시기 사캬파는 원조라는 시주를 얻어 티베트를 통치할 수 있었고, 티베트 불교 교단은 어떤 경우에도 ‘지배를 받는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가 순수한 시주이건, 통치자이건 그는 복전(福田)의 시주, 교권의 수호자일 뿐이었다.

2) 명대 조공체제와 티베트

1372년 이후, 오사장(烏思藏) 섭제사(攝帝師) 남가파장복(촪加巴藏卜)을 시작으로 과거 원조로부터 관직을 받았던 티베트의 승속 지배자들은 명조로부터 새로운 칙인(勅印)을 받게 되었다. 명조와 티베트 제 정권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상당히 미묘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명조는 한번도 티베트에 세금을 요구하거나 군대를 파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명조의 티베트 정책에서 우리는 명조가 원조의 제도를 계승함으로써 조정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음에 주의해야 한다. 명조는 티베트 각 교파의 영수들을 자주 초청하여 양자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우리에게 익숙한 조공(朝貢)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명조가 티베트 교파의 영수들에게 내린 봉호와 조서의 정치적 의미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양자간에 활발히 진행된 문화교류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1594년 만력제(萬歷帝)는 대장경의 두 부분인 칸주르(bkav-vgyur:석가모니의 어록과 그 번역문), 탄주르(bstan-vgyur:석가모니 敎義에 대한 논술과 注疏의 번역문) 전체를 인쇄하여, 대장경의 북경판(北京版)이 완성되었는데, 이것의 교정은 카르마파 6세 홍모활불(紅帽活佛) 췌지왕축(chos-kyi dbang-phyug, 1584∼1635)이 맡았다. 또한 현재 북경 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티베트 불교 계통의 불상들 중에는 명대에 만들어진 명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명조의 정책과 황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3) 6세 달라이라마 선출을 둘러싼 분쟁과 청조의 티베트 통치 확립

5세 달라이 라마가 겔룩파 정권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변의 정치세력들이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조도 직접 군대를 티베트에 보낼 여력이 없었고, 몽골 초원은 칭기스칸의 후예들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이들은 티베트를 압박하기보다는 달라이 라마의 시주가 되고, 그로부터 봉호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당시 달라이 라마의 시주 중에는 할하의 투셰투한, 처천한, 오이라트 갈단 보쇽투한 등등 당시 몽골의 실력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동부에서 청조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면서 달라이 라마는 청조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5세 달라이 라마가 1652년 북경에 이르러 순치제(順治帝)를 만난 사실을 다른 번부(藩部)나 외국의 사신이 황제를 배알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당시 달라이 라마의 북경행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라사와 북경 간에 사신이 왕래했으며, 순치제는 자신이 몽골 어느 지역까지 달라이 라마를 마중하러 가야 할지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만큼 달라이 라마의 지지를 얻는 시주가 된다는 사실은 당시 세속 군주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티베트측의 정치적 위상은 5세 달라이 라마의 원적(圓寂)과 함께 시련을 맞이했다. 6세 달라이 라마 선출을 둘러싸고 준가르와 라사의 세속 정권, 청해 호쇼트, 청조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1717년 준가르가 라다크를 거쳐 라사로 진주해 왔다.

이때 청조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청조는 티베트 통치를 위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청조의 티베트 정책은 달라이 라마 정권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집중되었다. 청해 호쇼트부에 맹기제(盟旗制)가 시행됨으로써 청해는 청조에 직속되었고, 사천성의 경계는 바탕(巴塘) 이서(以西)로 이동했다.

주장대신(駐藏大臣)과 청조의 군대가 티베트에 상주하게 되었고, 티베트 고원 안에서도 판첸 라마와 권력을 나눠 가져야 했다. 또한 청조는 달라이 라마 이외의 활불계통, 즉 장갸·제브준단파·툽관 호톡토 등의 세력화를 도움으로써 5세 달라이 라마가 구축했던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권위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달라이 라마 정권은 왜 이렇게 힘없이 무너진 것일까? 우리는 달라이 라마 정권의 내부적 요인과 청조의 친겔룩파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청조의 정책이 성공한 데는 그들의 군사력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만, 친겔룩파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청조가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을 우려하고, 이것을 축소시키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겔룩파 교단 자체를 공격한 적은 없다. 오히려 겔룩파는 청조라는 거대한 시주와 인연을 맺음으로써 겔룩파의 안정적이고 광범한 발전을 약속받았다.

사실 현재 몽골이나 청해에 남아 있는 겔룩파 사원은 대부분 강희(康熙) 연간 이후 주로 건륭(乾隆)·가경(嘉慶) 연간에 세워진 것들이며, 겔룩파 계통의 활불들이 각지에서 성장했던 것도 청조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당시 청조의 티베트 정책은 문제의 핵심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고, 티베트는 청조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요인과 무관하게 달라이 라마 정권 자체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만약 5세 달라이 라마에게 청해 호쇼트의 군사력이 없었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티베트 문화권 전체에 겔룩파가 전파되고, 달라이 라마가 정교(政敎)의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을까?

달라이 라마 정권은 군사적으로, 재정적으로 몽골과 청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3세에서 5세 달라이 라마에 이르는 시기, 복전과 시주 관계의 확대를 통해 달라이 라마의 영향권은 순식간에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고, 각지의 시주와 달라이 라마 정권의 이익이 일치하는 한 이 정치적 연합은 순조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정치적 연합이 하나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청조가 달라이 라마 정권의 장점과 단점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번부(藩部)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5. 중화대가정(中華大家庭)과 한장문화론(漢藏文化論)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이래 중국정부는 ‘오족공화국가건설(五族共和國家建設)’이라는 중화민국의 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고, 각 민족은 자치구를 조직하고 각자의 독자적 문화를 유지 발전시킬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각 소수민족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중화민족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였다.

오늘날 중화의 개념은 이렇게 확대되어 버렸다. 그러나 티베트의 경우는 조금 더 특별했다. 서장의 장족은 중화대가정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중원의 한족과 민족적·문화적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 중국인이 티베트를 보는 시각 즉, 한장문화론이다. 먼저 중국학계는 티베트와 티베트 이외의 중국, 즉 한족을 중심으로 한 동부 제 민족간의 관계를 살핌으로써 양자가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인류학·고고학·언어학 등을 통해 티베트와 그 주변에 거주하던 현재 장족의 조상들이 중원의 민족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보았다.

한족과 장족의 문화가 같은 근원에서 발생했으며, 역사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다고 보는 한장문화론은 특히 티베트가 중원 왕조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지 않았던 시대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이것을 문화적 종속론의 근거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것일까? 간략하나마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롭다.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갑골복사(甲骨卜辭) 중에 강(羌)에 관련된 복사가 다량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과 《국어(國語)》 《좌전(左傳)》의 기록을 바탕으로 강족이 화하(華夏)와 근원을 같이 한다고 보고 있다.

즉, 화하족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황제(黃帝), 염제(炎帝) 중 염제가 강족(羌族)의 선조라는 것이다. 이들은 황하 상류인 감숙성(甘肅省) 임조(臨?), 청해성(靑海省) 황중현(湟中縣)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저족(?族) 경우는 하남성(河南省) 앙소(仰韶)문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한 민족관계가 철저하게 중원의 민족을 중심에 두고 설명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융(西戎) 또는 저강(?羌)이라고 언급된 민족과 그 분포지역은 황하 상류에 국한되어 있음에도 이것을 현재 장족의 주체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인 것이다.

실제로 강저를 포괄해서 일컫는 서융이라는 말은 특정 민족을 일컫는 말이라기보다는 한족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한장문화론의 일부 내용은 상당히 엉성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장문화론의 기원은 1930년대로 소급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티베트에 대한 지역조사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티베트 민족의 원류를 논하는 글이 다수 발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한장일원론’은 1930년대 중국 티베트학을 이끌었던 주요한 논점이었다.

앞서 몽장위원회가 성립되고, 서방(西防)회의가 열렸던 시기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1930년대 중국 티베트학의 발전은 이러한 정치적 변화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민족학, 언어학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견해는 이후 티베트의 문화가 역사적으로 한족문화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학술적 근거로 제시되었다.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티베트학 학자들은 더 이상 이 문제를 주요 과제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티베트를 보는 주도적 시각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았다. 거기에는 티베트가 중국이어야 하는 근거도 있었고, 티베트가 독립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우리는 신문보도를 통해 티베트의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중국정부와 국제기구간에 마찰이 있음을 알고 있다. 대외 개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으로서 이러한 인권문제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국제사회에서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분명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현재 티베트는 1959년 달라이 라마가 망명하고 인민해방군에 의해 접수되던 당시보다 분명 안정적인 발전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전역에서 가장 낙후한 곳을 꼽으라면 티베트를 빠뜨릴 수 있을까? 중국의 서부 개발은 티베트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만약 중국정부가 관광지로서의 티베트 개발에만 주력하고, 교육이나 기간산업 건설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티베트의 다음 세대는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하는가? 아직도 중화대가정에는 적서(嫡庶)의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는가?

사실 인도 망명 정부도 많은 내부적 모순을 안고 있다. 봉건적 신분구조와 그 잔재를 어떻게 현대에 맞게 개혁하는가, 개혁할 수 있는가가 분명 문제이다. 어찌되었든 지금 우리는 양자의 소리를 모두 귀기울여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끝>

김성수
연세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현재 중국 남개대학 역사계 박사과정 재학중. 논문으로 〈17세기 蒙藏세력권과 淸朝의 대응〉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