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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통일운동의 현 단계 / 조병활
불교신문 기자
[5호] 2000년 12월 10일 (일) 조병활 불교신문 기자
1. 90년대 이후 북한 불교(종교)정책 변화

80년대 초부터 서서히 지각변동을 보이기 시작한 북한사회는 90년대 들어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 사후 필요성이 대두된 김정일 국방위원장 후계체제 확립,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몰락, 깊어가는 경제난 등이 북한을 변화하게 만든 내·외적인 주요 동인으로 꼽힌다. 일상생활에서도 변화의 조짐들은 실제로 감지된다. 인민복이 주된 복식(服飾)인 생활에서 양복과 양장을 입도록 허용된 것, 설과 추석을 명절로 정하여 공휴일로 한 것, 골프장을 건설토록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북한 종교계 역시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70년대까지 북한은 ‘북한엔 종교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종교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1994년)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체제 확립 과정에서, 김위원장은 지도자로서의 ① ‘정치적 명분’뿐만 아니라 ② ‘실질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이유가 생겼다.

특히 김일성 가문의 ‘정통성’을 보다 강조해야 할 필요성(정치적 명분)이 두드러졌다. 때문에 단군에 대한 연구와 단군릉의 발굴·복원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는 자연스럽게 북한 ‘천도교’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이어졌다1)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한편으로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김위원장의 능력’을 보여줄 필요도 생겼다. 이로 인해 대다수 문화재들과 관련이 있는 ‘불교·유교’ 등의 종교에 대해, 북한 권력이 제한적이나마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현재 남한 불교계의 큰 관심거리인 ‘신계사지·마하연사지·장안사지·영통사지 복원’ 등을 북한이 나름대로 추진하는 것의 뒤에는 이런 필요성이 깔려 있을 수 있다. 여기에다 ‘가중된 경제·식량난’ ‘외교적 고립’ 등이 북한을 다른 국가들과 부단히 접촉하게끔 강제했다. 식량지원과 관련된 남북의 교류 추진, 외국의 자선단체들과의 접촉 등이 90년대 중반 이후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바로 그러한 대외 접촉에 북한 종교계(불교 포함)가 적극 나서고 있다.

남한의 종교단체들 역시 한편으로는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의 식량난을 도와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포교나 선교 등 ‘종교적 목적’ 달성을 위해 북한 종교계와 접촉을 해왔다. 북한 종교계가 90년대 들어 특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에는 이런 원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불교는 가장 매력적인 종교일 수 있다. 불교는 남북한에 공히 존재하고, 우리 나라 역사와 1천6백 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해왔으며, 남북한 전역에 문화유산이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 북한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종교 단체가 해방과 함께 1945년 12월 26일 결성된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다. 조선기독교연맹이 1946년 11월 28일,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가 1947년 2월 14일, 조선천주교인협회가 1988년 6월 30일, 조선종교인협회가 1989년 5월 30일에 각각 결성된 것을 고려하면 조불련의 출범은 북한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불련이 상당히 일찍 출범하게 된 원인(遠因)은,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북한문화재의 상당수가 불교문화재이고, 불교가 비교적 북한 주민들에게 친숙한 종교였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현지 지도로 평양 광법사가 복원됐고, 고려대장경의 역경이 이뤄졌으며, 남북한 불교지도자들이 해외에서 합동법회(1991년 LA 달마사)를 다른 종교에 앞서 거행할 수 있게 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 성도재일 등의 행사를 매년 치르고 있는 조불련은 남한의 불교단체들과 교류에 응하는 등 대외 활동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대표단을 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90년대 이후 북한 불교정책은 변했고, 지금도 그 변화는 진행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종교(불교 포함)정책의 변화는, 만나는 인물들이 예전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는 사실에서 우선적으로 발견된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 종교계가 만난 남한의 인물들은 주로 반체제 인사들이었다. 급진적이거나 반정부·진보적인 종교단체들이 주된 만남의 대상이었다면, 90년대 들어와서는 종전의 선별적 교류를 지양하고 경제적 지원에 도움이 되면 어떠한 종교 단체와도 관계를 맺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2)

심지어 남한의 보수적인 종교 단체나 인사들의 방북까지 허용되고 있는 상태다. 또, 종교 전반에 대한 북한의 인식이 변했다는 것은 철학사전의 ‘종교’ 항목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1년 출간된 《철학사전》의 종교 설명은 “……종교는 본질에서 일종의 미신이다.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그것은 모두 현실이 인간의식에 환상적으로 왜곡되어 반영된 것으로 그 내용은 전체가 허위적이다.……”로 돼 있다.

그러나 1992년에 발행된 《조선말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사회적 인간의 지향과 념원을 환상적으로 반영하여 신성시하며 받들어 모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그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 ‘신’이나 ‘하느님’과 같은 거룩한 존재를 믿고 따르며 그에 의지해서 살아갈 때만 온갖 소원이 성취될 뿐만 아니라 래세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설교한다.

원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수많은 종교와 크고 작은 유파들이 있다.” 종교 일반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상당히 많이 탈락됐음을 알 수 있다.

2. 불교통일운동 분석을 위한 ‘시론적 틀’

북한불교계의 이러한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해방 이후 ‘남한불교계’의 통일운동을 분석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때문에 ‘불교통일운동’의 개념정립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데, 이 글에선 “민족의 통합·화해·통일을 위한 남한 불교계(조직·개인)의 노력이나 활동(교류 포함)”을 ‘불교통일운동’의 개략적인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물론 불교통일운동을 “민족과 불교의 분단 및 그것의 공고화를 저지하거나, 민족과 불교의 재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불교인들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노력”3)으로 파악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통일운동을 위에서 말한 대로 이해한다면, 해방 후 불교통일운동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① 불교사상을 탈락시키고, ‘민족의 재통합’(50년대의 우(右)편향적인 북진·반공·멸공통일론 등이 여기에 속함. 편의상 이를 ‘민족우위통일운동론’으로 부르겠음)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것과 ② 민족 개념은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채, ‘불교의 재통합’(북한지역 사찰에 주지를 임명하는 것 등. 편의상 이를 ‘불교우위통일운동론’으로 명명함)에 우선적 목표를 두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①과 ②를 합한 형태의 운동, 혹은 ①과 ②의 목표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목표도 명확하게 띠지 않는 형태의 운동이 있을 수 있다. 때문에 ①과 ②가 강하면서도 적절하게 조화·결합된 운동을 ‘민족불교통일운동론’(평화통일론은 여기에 속할 수 있음)으로, ①과 ②의 목표 중 어느 하나도 강하게 띠지 않는 형태를 ‘현실안주형 불교통일운동론’으로 각각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우위통일운동론’은 사실상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를 전제로 한다. 그럴 경우에만 북한불교계를 포함한 남북불교계가 하나의 총무원 밑에 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남한에 있는 조계종 총무원이 일제시대 본사였던 북한 사찰에 주지를 임명해 관리하게 하는 형태가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이는 통일이 이뤄져야만 가능한, 그러면서 직접 민족통일을 바라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불교포교에 대비하는 준비론적인 성격이 강하다.

‘불교우위통일운동론’은 때문에 ‘준비론적 불교통일운동론’으로도 명명(命名)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교통일운동의 형태는 민족불교통일운동론·민족우위통일운동론(右편향적인)·불교우위통일운동론(준비론적 불교통일운동론)·현실안주형 불교통일운동론(현실을 따라가는 형태)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3. 불교통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

1) 1945∼1954 : ‘민족불교통일운동론’에서 ‘민족우위통일운동론’으로


불교통일운동은 사실 해방되던 그 해부터 시작됐다. 해방이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이뤄지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갑자기 다가왔기 때문’이다. 해방공간(1945. 8. 15 ∼ 1948. 8. 15)이라는 속성상, 친탁·반탁이라는 일반 사회의 흐름이 불교계에도 그대로 흘러 들어왔고,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론’을 들고 나온 이후, 강화되는 듯한 단독정부 구성에 불교계의 혁신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것이 해방공간 속에서 불교통일운동이 제기될 수밖에 없게 된 주변적 요인이었다. 해방공간 속에서 민족통일문제를 맨 먼저 제기한 불교단체는 1946년 12월 3일 결성된 ‘불교혁신총연맹’4)(이하 총연맹)이다.

해방공간 속에서 기존 총무원 세력과 불교혁신 방법과 속도를 놓고 이견(異見)을 보이던 혁신세력들은 1946년 11월 28일 선리참구원(선학원)에서 연합체 결성을 위한 모임을 불교혁신총연맹준비위원회 주최로 개최했다. 선리참구원·불교청년당·혁명불교도동맹·선우부인회·조선불교혁신회·재남이북승려회 등 7개 단체 대표 25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총연맹 결성에 필요한 제반 준비가 이뤄졌다.

각 단체 1명씩 7명으로 준비위원을 선임하고, 총연맹 결성을 46년 12월 3일 열기로 결정했다. 가맹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2월 3일 총연맹 대회가 선학원에서 마침내 열렸다. 불교청년당 유성갑의 개회사로 시작된 대회에서는 집행부 의장에 통도사 경봉 스님, 서기에 곽서순 등이 피선됐다. 선언·강령 등이 통과됐고, 중앙집행위원 25명도 선출됐다. 산고 끝에 총연맹이 출범한 것이다.

우리가 불교통일운동을 다루면서 총연맹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내세운 선언과 강령 때문이다. 《대중불교》 1호(1947. 1. 1)에 실린 ‘불교혁신총연맹선언강령’에 의하면 “총연맹은 대중불교의 실현으로써 불국토를 건설하고 민족완전통일과 균등사회건설을 목표로 하야 우리 오백만 불교도는 결속 궐기하야 교단의 인습과 폐투(幣套)를 일소하고 대자평등의 이념과 무아화합의 무기로써 불퇴전을 서원하고 총진군하려 한다.”고 적혀 있다. 이들이 ‘선언’에서 밝힌 민족완전통일은 ‘강령’에서도 확인된다.

-. 우리는 현 교단을 혁신(革新)하야 대중불교 실현을 기함.
-. 우리는 무아화합의 정신을 체(體)하야 민족통일완수를 기함.
-. 우리는 대자평등의 이념에 즉(卽)하야 균등사회 건설을 기함.


물론 강령 실현을 위해 총연맹이 내세운 ‘당면주장 10개조’ 속에도 ‘민족통일완수’는 적혀 있다. 총연맹의 노선 및 이념 그리고 제반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10개조인데,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교화운동에 전력하야 국가대업에 공헌하자.” “불편부당을 맹지(盟旨)로 하야 민족통일을 기하자.”는 9·10번째 주장이다. 민족통일을 기하자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선언·강령 등을 종합해보면 총연맹은 “해방이 되었으나, 국토의 분단과 정계의 분열로 인하여 민중들이 도탄에 처할 정도로 민족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하고 있다.”5)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인식 위에 총연맹은 “불교계는 우리 민족이 국난에 직면하였을 때에 그를 극복한 전통을 되살려, 국난으로 이해되는 해방공간에서도 독립국가 건설의 초석이 되겠다는 사명의식을 기해야 한다.”고 못박고 “그 사명완수는 곧 불교계가 대중불교를 실현하여 민족의 통일 및 균등사회 건설을 성취하는 것.”(강조는 필자)으로 이해했다.

총연맹에 의해 선언·강령으로 제정·채택되고 구체적인 운동으로 표출된 ‘민족불교통일운동론’은 그러나 해방 당시 불교혁신계 내부의 분열과 혁신인사들의 월북 등으로 운동 주체들이 분산되자, 허위에 그치고 만다. 당시 사정은 이렇다. 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후, 남북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뾰족한 안을 내놓지 못하고 남한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 되자, 김규식은 남북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제안하고, 김구와 합작하여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같은 취지의 서한을 발송(48. 2. 16)한다.

여기에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가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 반대,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채택(48. 3. 25), 남북협상이 시작된다. 불교혁신세력 또한 이 협상에 참여·활동하게 된다.6) 불교청년당 소속 일부는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47. 7. 20 결성)과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문학가동맹과 함께 단선반대결의를 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불교혁신총연맹의 후신 단체인 전국불교도총연맹의 일부 세력 역시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고, 남북협상에 참가할 것을 신청했다. 한편, 유엔소총회의가 ‘총선 가능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하라.’는 내용의 조선 문제 해결 방안을 결정(48. 2. 25)하자, 북조선에서 김구·김규식에게 남북협상 개최에 관한 서한이 전달된다. 이어 남북전조선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48. 4. 19 ∼ 23)가 열린다.

연석회의에는 남북의 각 정당·사회단체 56개와 대표자 6백59명이 참가했다. 여기에 불교청년당의 김해진·장상봉·곽서순·이부열 등 5인과 전국불교도총연맹의 김용담 등 6인이 참석하고, 북한에 남게 된다. 이들은 48년 5·10총선 직전 잠시 월남했다. 남조선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48. 6. 29 ∼ 7. 5) 때 다시 월북한다. 이후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48. 8. 21 ∼ 26)에 참석하며, 8월 25일 해주 인민회담에서 열린 선거에 입후보하여 청년당 2명(김해진 등)·전국불교도총연맹 2명(김용담 등)이 남조선불교를 대표하여 회의에 참여, 북한에 남는다.

혁신계 인사들이 대거 월북하자 남한 혁신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됐고, 민족불교통일론의 불꽃 역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월북한 혁신세력들이 한국전쟁 때 남하하지만, 서울에서 그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일시적인 활동에 그치고 말았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불교계의 주도권은 혁신세력 탄압에 앞장섰던 기존 총무원(원장 김법린) 세력에게 완전히 돌아갔다.

혁신방법과 속도를 두고 경쟁하던 사이인 혁신계가 월북 등으로 거의 전멸하자, 사상적으로 우파적 경향이 강한 비구승들이 일부 있긴 했지만, 대처승 총무원 세력이 전권을 장악하고 친일파를 기반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 정부와 ‘협력 관계’로 돌아서고 만다. 남한단독정부 수립 후 약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고, 전쟁은 과거 친일행적으로 전전긍긍하던 불교계 내 대처승 세력들에게 부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전쟁은 또한 전쟁에 대한 ‘객관적 인식’보다는, 다시 말해 “전쟁 과정에서 군인과 국민들은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국민을 버린 이승만 정권 등)는 무엇을 하였는가.”보다는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발발).” 하는 문제7)에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집착’하게 만들어 통일운동 자체에 대한 싹을 잘라버리는 역할을 했다.

전쟁중에 제기된 ‘북진통일론·멸공통일론’ 등이 일반 사회의 대세가 되자, 불교계 또한 여기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게 됐고, 소위 북진통일론으로 대표되는 우(右)편향적인 ‘민족우위통일운동론’이 불교계 내에 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적어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전까지 계속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정부수립 당시엔 대처승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던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이 끝나자(54년 5월경) 돌연 비구승들을 지원하는 듯한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점이다.

2) 1954∼1980 : ‘현실안주형 불교통일운동론’ 지배의 시기

불교계 내에선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뚜렷한 통일론이 독자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불교계가 ‘내부 정비’에 시달린 시기였던 것이다. 정화운동이 70년 태고종 창종(創宗)으로 일단락되고, 반면 이때부터 조계종 내부에서는 본격적인 ‘내부 정비’(도제양성·역경·포교)에 매달렸다. 정화운동8)(=제2차 불교혁신운동)은 주지하다시피 일제시대부터 누적된 대처승 정리 문제, 해방공간 속에서 해결하지 못한 불교혁신(교도제 시행 등. 제1차 불교혁신운동), 왜색불교 잔재 미(未)청산 등이 중요한 원인이 돼 1954년 8월 24일부터 시작된다.

물론 한국전쟁 후 쏟아지는 비난과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이 정화운동 과정에 일정 정도는 개입했다고 보여진다. 어찌 됐건 54년 8월 24일부터 시작된 정화운동은 1954년 9월 28∼29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회, 비구승들의 태고사(조계사 전신. 54. 11. 5) 진입으로 이어진다.

54년 12월 7일 조계사에서 전국비구승니대회 개최,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 구성(55. 1. 26), 승려자격 8대 원칙 확정(55. 2. 4), 문교·내무장관 명의의 사찰정화대책 실시요령 발표(55. 5. 18), 전국승려대회의 종헌 개정·선포(55. 8. 12)를 통해 정화운동은 일단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어진 대처승측의 소송제기, 대처승측의 불교계 각종 재단·회사·학교 등의 인수 인계 거부, 서울지방법원의 ‘종헌 등 결의 무효확인에 관한 판결’(56. 6. 15. 대처승측 승소), 서울지방법원의 태고사 명도 가처분 결정 대처승측 승소(56. 7. 27), 서울고등법원의 비구승 승소 판결(57. 9. 17), 4·19혁명과 이승만 퇴진(1960. 4. 19), 대법원 판결 및 6비구 대법원 사건(60. 11. 24), 군부등장(61. 5. 16)과 법원에 계류중인 불교계 소송 70여 건 일체 중지 발표(61. 12. 8), 불교재건위원회 구성(61. 12. 8) 등이 연달아 계속됐다.

불교재건위원회 구성 등에 비구·대처 양측이 62년 1월 18일 동의·합의하자, 1월22일 비구·대처 양측의 대표자 5인이 역사적인 제1차 불교재건위원회 회의를 개최했다. 62년 2월 12일 불교재건비상종회가 개원됐으며, 비구·대처 각 15인으로 구성된 비상종회는 2월 20일 종헌의 골격을 완성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문 19장 116조로 된 종헌이 2월 28일 재건비상종회를 통과했으나, 대처측이 ‘주지자격 문제’ 등을 이유로 반발하자 문교부는 비구·대처·사회인사 각 5인씩으로 구성된 종회를 새로 구성토록 했다. 3월 22일 새로 구성된 종회에서 종헌이 통과되고, 3월 25일 종헌이 마침내 확정·공포됐다. 새로 공포된 종헌에 의해 종정추대 조례, 총무원법, 종무원법 등이 제정되고, 4월 1일 비구·대처측의 불교재건비상종회의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종정(이효봉)과 총무원장(임석진)이 선출됐다.

이런 곡절을 겪고 마침내 62년 4월 11일 역사적인 통합종단이 출범했다. 통합종단이 출범한 지 4개월 지난 8월 초 ‘종회의원 구성 비율에 문제 있다’는 이유 등으로 대처측이 반발했으나, 8월 20일 문교부회의실에서 비구·대처 종회의원 구성비율을 32 : 18로 하기로 결정됐다. 이즈음인 62년 8월 22일 각령 제939호로 전문 102조의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공포되자, 문교부는 이 법에 의거 통합종단을 승인하고, 대처측의 대응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처측은 그러나 세간법에 의한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62년 10월 4일 ‘종헌 무효 확인 및 종정 부인 확인’ 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제소했으며, 서울 서대문 충정로 2가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라는 독자적인 간판을 걸었다. 65년 6월 11일 서울민사지법은 대처측이 낸 소송의 판결에서 대처승 승소를 결정했으나, 3개월 후인 9월 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비구승측의 승소로 전환되고 만다. 마침내 69년 10월 23일 대법원은 대처측이 낸 소송의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 통합종단의 출범이 합법임을 확인했다.

이에 70년 5월 8일 한국불교태고종이 문교부에 종교단체로 등록함으로써 불교계 내부 정비는 정리된다. 정화운동에 대한 긍정·부정적 평가를 떠나 당시 이런 상황에 있던 불교계였기에 남북문제와 민주화운동 등 사회현실에 눈 돌릴 경황이 거의 없었다. 다만 해방공간 속에서 타오른 ‘불교혁신’의 기운은 70년대 중반에 가서야 조금씩 살아오기 시작한다. 여익구·고준환·고은 등이 75년 ‘민중불교회’를 구성, 민중의 아픔에 동사섭(同事攝)하기로 결의한 것이 시초였다.

이즈음 당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던 전재성 역시 학생불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불교인 의식구조 조사연구보고’를 통해 청년불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었다. 전재성은 특히 조사연구보고를 토대로 한 ‘민중불교론’을 《월간 대화》 77년 10월 호에 발표해 큰 주목을 받았다. 이 글에서 그는 “물질적 정신적 고해에 허덕이는 중생은 정신적 고통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생과 구별된다.”며 중생 일반과는 구별되는 민중을 설정하고 “진정한 보살행은 이 억압당하고 있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일기 시작한 불교혁신의 기운은 그러나 75년 5월 13일 발표된 ‘긴급조치 9호’라는 강풍에 의해 위협받게 되었다. 정부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인되지 않고, 심지어 정부를 비판하는 문서를 갖고 있든가 그 내용을 말로 전하는 행위 일체까지 처벌하는 가혹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긴급조치 9호였다. 때문에 이 시기 불교계는 여전히 ‘독자적인 통일운동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현실안주형 불교통일운동론’에 앉아 있을 때(時)였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 중반 이후 ‘민족’과 ‘불교’에 대한 진보적인 인식이 조금씩 싹트긴 했지만, 불교와 민족을 상생·조화시킨 ‘민족불교통일운동론’을 만들어내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인 그런 시기였다고 보여진다.

3) 1980∼1990 :‘현실안주형 불교통일운동론’서 ‘민족불교통일운동론’으로

80년대의 일반 사회가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시작됐다면, 불교계의 80년대는 ‘10·27법난’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제6대 중앙종회를 구성해 출범한 화합종단은 나름대로 종단의 발전과 화합을 위해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80년 10월 27일 새벽 신군부 세력은 “분규만을 일삼는 조계종단은 더 이상 자체 정화의 능력이 없으므로 부득이 타력으로나마 정화하지 않을 수 없다.”며 조계종단의 주요 간부들을 강제로 연행·고문했다.

당시 총무원장이던 월주 스님은 강제로 사퇴했으며, 18명의 스님이 구속되고, 32명의 스님들은 강제로 승적을 박탈당했다. 자주적인 종단 발전을 도모하던 조계종의 노력은 좌절되고 만 것이다. 10·27법난은 당시 불교계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청년 학생불자들은 냉엄하게 분석하기 시작했고,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곱씹었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청년불자들은 사찰이 불교운동의 기본적 토양임을 재인식하고, 81년 가을 무렵부터 ‘여래사(如來使) 운동’(혹은 寺院化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운동 주체들은 기관지 《청년여래》 창간호(81년 가을 창간) 서문에서 “불교가 중생교화의 본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아울러 사회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중생을 인식해야 한다. 하화중생의 구체적인 방법론의 모색과 그 실제 적용을 위한 사회와 민중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함께 엮어 명실공히 젊은 불자들의 전열을 정비하여야 한다.

이렇게 만난 동지들을 여래사라 하며 여래사들의 재도전을 여래사 운동이라 한다.”9)고 밝히며 민중불교운동의 단초를 열기 시작했다. 이들의 운동은 그러나 82년 초 중단된다. 여래사 운동의 중심인물인 법우 스님, 최연, 신상진 등이 구속되고, 많은 스님과 학생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과 고초를 받고,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 즈음 젊은 스님들이 주축이 된 제1회 ‘청년승가육화대회’가 81년 7월 열렸고, 이런 노력들이 합해져 승가와 재가의 조직체인 ‘청년불교도연합’이 결성된다. 청년불교도연합은 83년 7월 17일 범어사에서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법회’를 열고, 불교운동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대학생불교연합회도 70년대부터 연례행사로 해왔던 ‘화랑대회’의 성격과 명칭을 82년 여름부터 ‘한국불교 1,600년 대회’로 바꾸고,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70년대 말에 제기된 ‘민중불교론’을 확산·발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84년 봄부터 학원과 공장의 민주화 시위가 본격화됐으며, 85년 ‘2·12 총선’이 야당의 승리로 굳어지면서 사회 전체 분위기는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불교계도 이때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비상종단(83. 9. 15 ∼ 84. 8. 1) 당시 만들어졌던 불교사회문화연구소와 청년승가회 인사들이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84년 11월 이후 불교의 민중화를 위한 조직건설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가졌고, 이들은 85년 5월 4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한글회관에서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을 창립하게 된다. 민불련은 창립선언문을 통해 “초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조국은 민족의 총체적 발전을 저지·파괴하며 반민중적 권력집단이 자행하는 폭력과 비민주적 제도는 민중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유린하고 있다.”며 “민중운동연합은 척박한 이 땅에서 불타에, 정법에, 승가에 귀의하여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10)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민불련은 “1, 우리는 민중의 참된 자유와 진정한 평등이 보장되는 불국정토를 건설한다. 1, 우리는 민족의 의지를 결집하여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한다. 1, 우리는 불타의 정법을 수호하여 주체적인 민중불교를 확립한다.’를 강령으로 내걸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한다.”는 부분이다. 1946년 12월 3일 결성된 불교혁신총연맹이 민족통일완수를 강령으로 내건 지 39년 만에 자주적 평화통일 달성이 불교계 통일운동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과 불교가 공히 발전하는 형태의 통일인 ‘자주적 평화통일운동론’, 북진통일론·멸공통일론을 극복하고 불교사상과 민족적 관점에서 통일운동의 방향을 정립한 ‘민족불교통일운동론’의 출발을 알린 귀중한 선언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민불련은 특히 기관지 《민중법당》 창간호에 수록된 ‘민불련의 운동방향과 과제’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에의 적극 동참”을 천명했다.

“민중의 고(苦)가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은 민중의 해방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은 곧 민중해방의 기반을 마련해 주기 때문”11)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민불련은 이후 《민중법당》을 통해 줄기차게 ‘한반도의 민족통일과 불교’를 논하게 된다.

《민중법당》 2호에 수록된 〈민족모순과 종교인의 대응양식〉(김종찬) 〈화쟁사상과 통일의 논리〉(목우 스님), 《민중법당》 4호에 실린 〈민족해방과 실천적 신앙〉(강명하), 《민중법당》 5호의 〈조국통일투쟁〉 〈통일운동과 88올림픽〉 등이 바로 그런 글들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민불련은 ‘5·3인천사태’ 주도, 86년 초부터 제기된 민주헌법 개헌 투쟁 동참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은 《민중법당》의 제호(題號)가 《민중불교》로 바뀐 이후에도 지속된다. 민불련에 의한 통일운동이 계속되는 한편에선 승가독자조직인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의장:청화, 부의장:진관, 지도위원:지선)가 스님 2백21명의 발기로 86년 6월 5일 공식 출범한다.

‘이 땅의 불국정토 구현을 위하여’ 출범한 정토구현전국승가회(86. 6. 5 ∼ 92. 8. 30)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이제 불자들은 새롭게 다듬어진 불법과 보살정신과 역사의식으로 무장하여 민족의 자주화, 민주화, 민중해방투쟁 전열에 나서야 한다.”며 “민족자주화운동, 민중해방운동, 민족통일운동, 민주화운동, 정토구현운동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한다. 이에 앞선 86년 5월 9일 불기 2530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승려 1백52명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여기서 “민족적 염원인 통일은 자유로운 논의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12)고 천명했다. 불교통일운동이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80년대 중반 새롭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셈이다.

대학생조직인 대불련, 청장년불자조직인 민불련, 승가조직인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는 서로 단결해 한국민주화운동의 큰 분수령인 87년 6월항쟁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13)하게 된다. 민주화와 남북통일 등 사회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게 된 불교계는 87년 6월항쟁중 민주헌법쟁취불교운동본부(의장:청화·지선)를 발족시키며, 스님들이 앞장서 법당과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구국법회를 개최했다.

민불련 창립 등으로 이어진 불교계의 이런 열기는 88년 3월엔 대승불교승가회(회장:송산, 상임집행위원장:명진) 결성으로 이어진다. 대승불교승가회는 88년 부처님 오신날 ‘조국통일을 위한 대승보살의 다짐과 선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을 직접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체제와 이념, 제도와 사상, 종교와 정치적 입장 등도 대승정신으로 극복되어 도도한 통일조국의 물결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88년 5월 19일엔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 창립으로 연결된다. 정토구현승가회·승가대학생회·대한불교청년회·동국대석림회 등 10개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출범한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추진본부)는 ‘제24회 국제올림픽 대회에 대한 애국 불교도의 입장’이란 성명서에서 “통일논의 독점 말고 남·북회담 공개하라, 한핏줄 한민족이 분단올림픽 웬말이냐, 분단올림픽 분쇄하고 공동올림픽 쟁취하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자주 없이 통일 없다 민족자주 쟁취하자.”14)고 주장하게 된다.

추진본부는 같은 해 6월12일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염원하는 애국불교도 선언’을 발표하며,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 등 40여 개 단체로 구성된 ‘통일염원 범국민 평화대행진 추진위원회’도 88년 7월 4일 ‘조국통일을 위한 공동결의문’을 채택한다.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는 또 7월 21일 ‘조선불교도연맹에 보내는 2차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불자공동기원법회 남한준비위원회’ 명의의 ‘억압을 딛고 분단을 넘어 민족해방과 불교중흥의 신새벽을 열자.’는 성명서도 7월29일 발표된다.

88년 8월 5일엔 대승불교승가회 주최로 강화 전등사에서 민족통일기원법회가 봉행되는데, 이 자리에서 대승불교승가회 민족통일위원회 위원장 종태 스님은 취지문을 통해 “민족통일기원법회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대승보살의 원력으로 마련됐다.”며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의 그날까지 모든 불자의 용맹정진이 있어야겠다.”고 천명하게 된다.

정토구현전국승가회도 동년 8월 8∼10일까지 봉선사에서 ‘민족을 부여안고 정토의 세계로’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는데, 당시 발간된 자료집엔 ‘한국 사회운동과 통일운동’(조진경)이 실리기도 했다. 그해 8월 15일엔 민족불교학당 학우회 명의의 성명서인 ‘불자여! 불교의 찬란했던 광명을 되찾자 - 8·15 남북불자 공동기원법회에 부처’와, 봉암사 희양선원 조실 서암 스님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불자 공동 기원법회에 부처’라는 성명서가 잇달아 발표됐다.

같은 날 오후 3시 조계사에서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불자 공동기원법회가 봉행됐다. 이처럼, 80년대 말에는 통일운동이 불교계의 공동목표로 제기됐으며 이러한 공동투쟁의 성과는 88년 12월 4일의 ‘민족 자주·통일 불교협의회’(의장·지선. 통불협) 창립으로 질적 비약을 경험하게 된다.

통불협은 89년부터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불교계 반미운동 주도, 핵철거·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불교도 서명운동 전개 등을 앞장서 이끌었다. 그리고 90년 8월에는 통일문화제 개최를 통해 자주적 통일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기했다. 한편으로는 통일학교를 개설하여 활동인력을 발굴하고, 전국청년불자지도자간담회를 마련하여 불교운동의 전국적 연대와 내용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15)

한편 대승불교승가회는 89년 6월 1일부터 89년 8월 15일까지 전국 비구·비구니 6백53명을 대상으로 ‘한국 승가의 의식 및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통일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반드시 통일은 이루어진다(49.3%), 분단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19.6%), 통일은 불가능하다(18.8%), 생각해 보지 않았다(12%)로 조사결과가 나타나 당시 승가는 통일에 대해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될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민족해방과 통일을 위하여’ 89년 1월 30일 창간된 무크지 《민족불교》(동광출판사)의 등장이 그것이다. ‘민족자주와 통일을 위하여’ 4호까지 나온 《실천불교》를 계승한 《민족불교》는 민족문제의 핵심적 과제인 분단의 극복과 통일을 위해 사상적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만든 잡지였다. “민족문제와 불교는 서로 무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민족불교》 머리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민족불교》는 창간호에서 ‘민족자주통일운동과 불교’를 특집으로 마련해 주목받았다.

이상에서 보듯, 80년대 들어 불교통일운동은 이론적 실천적 토대를 구축하고 대중성·내용성까지 담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60·70년대의 ‘현실안주형 불교통일운동론’에서 벗어나, ‘자주적 평화통일운동론’(민족불교통일운동론)을 확립한 시기였다.

4) 1991∼현재 : ‘민족불교통일운동론’ 시기

90년대 초반은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이에 따른 국내 진보진영의 전반적인 쇠퇴로 시작됐다. 때문에 사회변혁운동 또한 새로운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80년대 왕성한 운동을 펼쳤던 불교계 또한 대중운동의 침체라는 위기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반면 남북불교계는 90년대 들어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남북불교계가 90년대 처음으로 교류한 것은 1991년 LA 달마사(이하 LA법회)에서 개최된 ‘한민족 불교지도자 연석회의’를 통해서다.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의현 스님과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 박태화 위원장이 분단 이후 최초로 10월 29∼30일 이틀간 만나, 남북불교교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첫 만남이었기에 남북불교 대표자들이 체제와 사상을 달리한 두터운 벽을 허물기엔 역부족이었지만, ‘불교인’이라는 연결고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남북간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회의였다. 당시 의현 스님은 “만남 자체가 큰 성과”라고 말했고, 박태화 위원장 역시 “부처님의 화해와 화합정신에 따라 민족의 대 단결로 조국의 평화와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이번 회담에 적극 참여하려고 한다.”16)고 밝혔었다.

92년 7월 22일엔 북한 김달현 부총리가 불국사 석굴암을 방문하고, 조국통일의 속(速)성취를 위해 토함산 통일대종을 3회 타종하기도 했다. 88년 12월 4일 결성된 통불협은 90년대 들어와서도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91년 10월 16일엔 ‘한민족불교지도자연석회의에 대한 통불협의 입장 1’을, 10월 29일엔 ‘한민족 불교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통불협의 입장 2’를, 11월19일엔 ‘전시접수국지원협정 체결을 결사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각각 발표하고 지속적으로 민족불교운동을 펼쳤다.

92년 7월14일에는 ‘108인 북한방문신청서’를 통일원에 접수하고, 8월 22일부터 25일까지 방북한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앞서 ‘남북불교자주교류’(신문) 1호를 92년 7월 12일 창간, 배포하는 등 불교통일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었다. 92년 10월 1일 창립된 실천불교전국승가회, 93년 7월 31일 출범된 전국불교운동연합 등도 남북불교교류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민족불교통일운동론이 맹렬히 전개되던 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돼, 남북교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합의서의 주된 내용은 7·4 남북공동성명을 재확인한다,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특수한 관계다, 양쪽은 평화통일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 등 세 가지였다. 세 가지 전제를 실현하기 위해 25개 조항이 마련된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합의서가 91년 체결된 것이다. 남북관계의 이러한 흐름 속에 통불협은 특히 92년 8월 24일 동국대 정각원에서 ‘남북불교자주교류의 성사와 조국통일을 위한 기원법회’를 열었으며, 통불협이 발행하는 《불교운동》 제6호(92. 7)에는 ‘최근 남북관계와 불교자주교류운동’이 초점 특집으로 실려 주목받았다.

92년 2월 12일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불교로 이룬다.”는 모토를 내걸고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가 창립됐다. 평불협은 이후 한민족의 통일 이념 발굴 및 교류협력, 북한 불교와의 인적 물적 교류, 남북한간의 불신해소와 일체성 회복을 위해 필요한 사업들을 중점적으로 추진해 왔다.

92년 6월 8일에 통일원에 사회단체 등록을 마치고 99년 10월 20일 통일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제75호)를 받은 평불협은 89년부터 7차례 방북한 법타 스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통일을 위한 이론적인 연구를 담당하는 북한불교연구소를 개원했다. 또한 매년 불교통일학당, 남북불교세미나, 통일연수원 참가교육 등 교육사업과 남북불교회의 및 북한방문의 교류사업, 인권 및 평화통일을 위한 연대사업, 북한 문화재의 복원과 국수공장 지원을 위한 협력사업, 예술행사 개최를 통한 문화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북한불교총서(91년 《북한의 불교와 절》, 94년 《북한불교연구》, 94년 《북한불교답사기》) 간행과 회보 〈하나로〉를 매월 발간하고 있다. 평불협은 특히 북한불교연구소(94. 4. 8) 외에 금강국수공장후원회(98. 4. 17), 고(故) 윤이상 선생 명예회복 추진위원회(98. 6. 8), 금강산 신계사 복원 추진위원회(98. 12. 26), 금강산관광지정대리점(98. 12. 26), 평불협 지역본부(해외 : 평불협 미주본부, 국내:인천 등 7개소) 등을 산하 조직으로 두고 있다.

게다가 평불협은 금강국수공장 후원(97년 12월 29일부터 현재까지 14차례 지원, 매달 20톤 밀가루 제공, 세 달에 60톤씩 제공중에 있음), 북한동포 의류보내기(1차 : 99. 12. 30 1만6천 벌, 2차 : 2000. 2.), 조불련 및 금강국수공장 자전거 지원(1·2차에 걸쳐 자전거 총 1백 52대 지원), 조불련 불교용품 지원(1차 : 향로 및 촛대 등 각각 30기) 등 대북 지원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으로 평불협은 95년 이후 남북불교간의 부처님 오신 날 봉축 공동발원문의 채택·발표, 남북불교가 직접 교류 할 수 있는 토대 마련, 금강국수공장의 설립과 지속적 지원으로 조불련의 참여 유도, 국내의 불자 및 일반인들의 평화통일 운동에 참여 유도 등에 공로가 크다고 평가받고 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소속 전 종단과 조계종 교구본사 등이 참여한, 불교계 단일 통일운동기구인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불추위) 역시 통일운동에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된다. 본래 조계종 등 종단협의회 산하 전 종단과 교계 내외의 신행단체 등이 총망라된 ‘북녘 동포 돕기 불교추진위원회’로 97년 5월 6일 출범한 불추위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이사회 공식결의(97. 5. 31), 조계종 교구본사주지회의 동참결의(97. 5. 19), 조계종 중앙종회 결의(97. 6. 9) 등 전 종단과 중요 스님들의 동참결의가 이어지면서 눈부신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다 98년 8월경 단체 명칭이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불추위는 특히 북녘 어린이 살리기 어깨동무 대행진, 민족화합 통일정토를 위한 전국순례법회, 북녘동포 돕기 불교추진위원회 옥수수 2000톤 기증, 북녘동포 의약품 보내기 기금마련 전시회, 민족화합주간소식지 발행, 통일을 준비하는 불교정책 워크숍 진행, ‘한반도 평화군축을 촉구하는 200인 선언’ 동참(98. 5. 21), 민간단체 통일담당자 정책간담회 참석, 불교지도자 통일포럼 ,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대축전 불교단체간담회, 조불련과 북경에서 회담 등의 활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해 왔다.

최근에 와선 활동력이 상당히 위축된 상태다. 90년대 가장 주목되는 불교통일운동 조직은 2000년 6월 8일 조계종 통일기구를 출범한 ‘민족공동체추진본부’(상임집행위원장:명진·양산)라 할 수 있다. 조계종 통일종책 수립, 북한불교 연구조사, 남북불교교류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민족공동체추진본부는 산하에 정책기획위원회, 남북교류위원회, 조사연구위원회를 두고 있다.

결성되자마자 민족공동체추진본부는 불교신문과 공동으로 ‘남북화해시대 불교의 역할’ 주제의 금강산 순례 선상(船上) 학술세미나 개최(2000. 10. 14 ∼18), 종단협과 함께 조선불교도연맹 및 북한동포들에게 겨울생활용품 지원(2000. 11. 10), 북한에 겨울용품 2콘테이너 분량 지원(2000. 12. 15) 등의 활동을 펼쳤다. 민족공동체추진본부(종단협·진각종 대표단과 함께)는 특히 2000년 12월 13∼14일 중국 베이징에서 조선불교도연맹 대표단과 ‘남북불교도 통일토론회’ ‘남북불교교류 사업’ 등에 대해 논의하는 등 조계종 대북 교류사업에 획기적 발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밖에 남한불교계의 대북 교류사업을 아우르기 위해 98년 8월 11일 결성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산하 ‘남북불교교류위원회’도 주목되는 불교통일운동 조직이다. 90년대에 불교통일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통일은 기본적으로 민족 내부의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남북한 민중의 힘으로 이뤄져야 함을 불교통일운동은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때문에 90년대 들어, 민족통일과 그에 따른 남북불교 발전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던 상황은 거의 극복되고, 불교계의 노력이 남북한 불교뿐 아니라 민족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동력이 됨을 불자들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할 수 있다.

4. 최근 불교통일운동의 문제점

최근 불교통일운동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99년 6월 8일부터 15일까지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진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불추위)의 방북이다.

이는 남한 불교계의 첫 북한 공식 방문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는데, 당시 불추위는 보현사에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고, 99년 8·15에는 남북이 동시에 평화통일기원법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2000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특히 남북공동발원문을 남북한이 함께 발표하기도 했다. 불교계의 이런 자체적인 활동에, ‘6·15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으로 형성된 남북화해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남북불교교류는 현재 가히 백가(百家)가 다투는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불교는 우리 나라에서 오랫동안 터잡고 왔기에 문화·문화재적인 방면에서의 교류가 많으며, 종교특성상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교류나 대북 지원도 적지 않은 편이다. 조계종이 금강산 신계사지 복원을, 진각종이 금강산 장안사 복원을, 천태종이 개성 영통사지 복원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가 금강산 마하연사 복원을 각각 추진하고 있거나 계획중이다.

2000년 6월 8일 발족된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가 현재 북한 문화재 현황조사를, 태고종 남북불교교류협력추진위원회가 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단청기술 등 전수를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생필품 지원’도 적지 않게 이뤄졌다. 의약품·식량 등의 지원이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불추위), 평불협, 진각종 등의 창구를 통해 진행됐고, 조계종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각종 차량과 생필품 등의 지원(2000년 11월 6일 트럭, 2000년 11월 10일 방한복·방한화·치약·비누 등 생필품 1콘테이너)도 최근에 있었다.

조계종은 특히 2000년 12월 15일 2천5백여 벌의 담요와 겨울외투 등 컨테이너 2대 분량의 생필품을 인천항을 통해 남포항에 전달하기도 했다. 생필품 지원방식도 초기의 ‘직접지원방식’에서 벗어나, 복지·교육시설 설립, 농업기술 전수 등의 보다 ‘근본적인 기술지원방식’으로 변화되고 있는 상태다. 기술지원방식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단체는 평불협과 JTS(Join Together Society)다.

평불협의 사리원 국수공장, JTS의 어린이 영양식공장 운영지원 등이 그 것이다. 이처럼 진행되고 있는 불교계의 대북 교류는 몇 가지 문제점과 함께, 다른 종교계의 교류보다 ‘비교 우위’인 측면이 있다. 주목되는 ‘비교 우위’는 남북한 공히 불교문화재를 민족문화의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고 있고, 불교를 민족종교의 하나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아직도 북한은 종교에 대해 그렇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 사회다. 서양종교계의 ‘물량적인 지원공세’에 북한이 표면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반면 불교는 우리 역사와 1천6백 년을 같이 해왔고, 그 과정에서 남북한에 공히 소중한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이를 매개로 남북한 불교계가 민족동질성 회복에 앞장선다면 적지 않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조계종을 비롯한 각 종단이 북한지역 사지(寺址) 복원에 앞다퉈 나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지역에 산재한 불교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은 ‘민족사 복원’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남북불교교류에는 타종교에 대한 ‘비교 우위’적 측면보다 ‘자기 살 갉아먹는 모습’이 더 많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진단일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일처럼 남한불교계의 대북 교류에는 문제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첫번째, 가장 먼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 건주의’ ‘한탕주의’다. “누가 북경에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식의 보도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해 언론에 보도됐다. 결론적으로만 말하면 연일 ‘자기 이름내기’나 ‘명예 드높이기’ 식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불교계 교류는 장기적으로 북측에 남한불교계의 신뢰도만 상(傷)하게 할 뿐이다.

금강산 A사찰을 복원한다고 했다가, 며칠 안 가 다른 B 사찰을 복원한다는 식으로 선전을 해대는 모습은 결코 남북불교교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북 불교교류는 사안이 무엇이든 간에 최대한 신중하면서, 서로간의 신뢰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런데 한가지 일을 하다가 제대로 안 되면 다른 일을 또 추진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일을 이것 저것 벌리기만 한다면 결국은 남한불교 전체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역으로 북한불교계가 보기에 남한은 ‘통일된 안’도 없고, 종단마다 서로 주장이 다르고, 선전·선동하는 사람들만 있는 줄 알게 될 것이다. 둘째, 대북 교류에 있어 더 큰 문제는 ‘상(相)내기’다. 반드시 “내가 들어가야 대북 불교교류가 잘 된다.” “불교 교류하면 바로 나인데……” 식의 태도를 이제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 불교교류가 현재 어디까지 와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나를 소외시키고 일을 한다.”고 다른 교류를 비방하는 태도 역시 이제는 사라져야 된다.

상을 떠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인데, 불교계 대북 교류에 상(相)을 내세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셋째, ‘대북교류 전체를 컨트롤할 기구가 없다’는 점도 적지 않은 문제로 지적된다. 다양한 민간교류가 지금까지 사회·불교계 대북 교류의 큰 동력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계의 경우 너무 ‘자기 팔 자기 흔들기’ 식으로 대북 교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하나 하나의 대북 교류를, 역할 분담해 추진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교류가 가능할 것이다. 넷째, 불교계 대북 교류논의에서 간과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론의 천착과 준비’가 부족하고, 북한불교에 대한 정확하고 확실한 자료가 적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불교통일론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매우 희박하다. 그저 ‘원융’ ‘화쟁’ ‘화해’만 외친다.

1천3백여 년 전 원효 스님의 화쟁사상이 지금 시대에도 완전히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와 상황은 매우 많이 변했고, 대북 불교교류는 냉혹한 이성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불교통일론 정립’과 ‘이에 입각한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기존 불교계 대북 교류운동의 한계, 남북한통일론 등을 진지하게 모색하면서 하나의 운동기구나 새로운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일반의 화해분위기에 편성해 대북 교류를 하려는 듯한 태도는 바로 ‘이런 점에서’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항상 다른 종교 단체나 일반 사회조직의 뒤를 따라가는 형태로만 대북 교류가 이뤄지는 것도, 중구난방식의 교류가 되풀이해 나타나는 듯한 현상도 근본적으로는 남북불교통일운동에 대한 탄탄한 이론적·논리적 틀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탄탄한 ‘이론적·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하나 하나의 대북 교류를 하며, 동시에 거시적인 큰 틀 속에서 민족과 불교문제를 논의하는 태도가 이제는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불교문화재는 남북한에 공히 다 있으니깐, 이것을 복원한다고 하면 북한불교계도 좋아하겠지’라는 생각만으로 시행하는 교류를, 이제는 지양해야 될 시점에 왔다고 생각된다. 남북불교교류가 일천한 지금,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해야 될 준비 가운데 하나가 ‘통일을 위한 불교사상의 정립’일 것이다.

불교는 과거 삼국통일 당시 민족을 하나로 묶은 ‘역사’가 있고, 임진왜란 등 민족이 어려울 때 내부의 대립과 분열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 온 ‘경험’이 있다. 이러한 역사와 경험, 그리고 불교사상 자체의 ‘화쟁 정신’은 체제와 계급을 넘어 온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상적 토대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 사상들이 현대적으로 업그레이드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섯째, 동시에 남한 불자들의 북한에 대한 의식을 점차적으로 개선시키는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남한은 그 동안 어찌됐든 분단 고착상태의 오랜 지속에 따른, ‘근거 없는 대북 비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종단협 사무국장 법현 스님이 제기한 “남북한 기본합의서, 통일방안 등을 불교적 시각으로 검토하는 일, 통일불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역사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통일장전 결집”17) 등은 시도해 볼 만하다.

통일장전에는 물론 경전 속에 나오는, 갈등을 화해로 돌리는 교리내용을 정리해 남북관계에 적용하는 그런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 것이다. 불자 개개인들이 북한 스님들을 상대로 승복 등 불전 일용품 공양하기, 북한 신도들에게 단주 만들어 보시하기, 통일을 위한 기도문 작성 및 정기적 발원실천하기 운동 등을 펼치면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여섯째, 현재의 대북 교류를 좀더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교류와 교류 속에 ‘이해’와 ‘민족적 정’이 싹트고,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기운 또한 여기서 생긴다. 민간부분의 교류가 남북신뢰 구축에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더구나 종교교류는 대단히 큰 상징성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남북을 하나로 묶어주는 ‘전통성’ ‘역사성’에서 불교는 다른 종교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와 입장에 있다. 특히 남북불교 재통합과 관련해 북한불교의 존재를 미미하게 인정하고 남한불교의 주도성만을 강조하는 이른바 ‘재건주의 노선’이 자리잡기 전에, 남북불교가 서로 돕고 협력하는 ‘수평적 협력주의’가 정착되도록 남북한 불교계간의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남북불교계는 ‘활발한 상호접촉과 교류’를 펼쳐야 되는 것이다. 교류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법요식의 통일, 교리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 극복, 승려의 교육지원 등에 관해 토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동시에 공동 학술세미나 개최, 불교관련 연구성과 상호 교환, 불교문화재 상호 교환 전시, 역경사업 성과 공유, 불교용어의 통일, 불교학당의 설립, 교리교재의 발간지원 등도 가능해질 수 있다.

이런 교류는 불교계 내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지만, 민족적 차원에서도 중대한 상징성을 담지(擔持)하고 있다. 작지만 무척이나 큰 교류라 아니 할 수 없다. 어찌됐든 한반도의 진보 그리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평화의 차원에서 생각할 때 남북통일은 21세기 한반도의 최대과제이다.18)

때문에 남북통일을 향해 ‘사상적 측면에서 어떻게 준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역시 한국의 지식인·종교인들에게 부과된 가장 큰 과제 가운데 하나다. 불교계에도 이 문제는 이미 ‘반드시 풀어야 될 화두’로 다가와 있다. 남북통일은 기본적으로 민족 내부의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남북한 민중의 힘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남북한 양쪽의 중생들이 분단으로 해탈되지 못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분단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교도의 의무이자 사명일 수밖에 없다. <끝>


조병활
경북대학교 영문과 졸업. 현재 불교신문 기자. 논저서로 〈논쟁 부재와 긴장된 글쓰기〉 《한국불교 기도성지》(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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