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 경향신문 기자

1. 글에 앞서서

필자는 경향신문사 한민족문화네트워크 연구소에 재직하면서 지난 98년 이래 3차례에 걸쳐 방북했다. 98년 8월 초와 이 해 10월 초에 각각 8일간 북한 문화재를 답사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호락호락하게 이것저것 살필 겨를을 주지 않았다.

박물관에 들르거나 보현사, 광법사, 성불사, 정릉사 등 몇몇 사찰을 찾아보고 문화재 전문가, 행정가, 역사학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으나 북한불교의 전체적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용이치 않았다. 세번째 방북은 지난 11월 11일부터 18일까지 이루어졌다. 이때는 임권택 감독 등 영화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남북영화교류를 논의하기 위해 들어간 터여서 불교계의 모습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니 필자 자신의 방북 경험이 이 글쓰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다만 필자가 오랫동안 북한불교에 관심을 갖고 수집한 각종 자료와 북한을 방문했던 인사들의 증언을 비롯해, 법타 스님의 박사학위논문인 《북한불교연구》(민족사, 2000)와 필자가 편저한 《한국사찰사전》(불교시대사, 1996)을 참고하고, 필자의 방북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쓴다.

2. 북한 사찰의 기능

사찰은 본래 수행자들이 안거 기간 동안 공동으로 거주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건립됐다. 기원전 6세기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에 인도에 존재했던 죽림정사와 기원정사가 바로 이러한 이유로 건립된 불교 역사상 최초의 절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찰은 수행자들의 공동 거주 공간은 물론이고 부처님께 예배하고 법회를 열며 수행자 자신의 허물을 대중 앞에 참회하는 포살(布薩), 자자(自恣)를 정기적으로 행하는 공간이 되었다.

또 이러한 역할에 합당한 조형예술이 사찰건축과 법구(法具) 등에 도입되어 찬란한 불교 문화유산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북한의 사찰이 이처럼 기능하고 있는 진정한 종교적 성소로서의 사찰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필자는 회의적이다.

방북시마다 사찰에 들려 승복을 입은 사찰 관리인(남한측 방문자들은 이들을 스님이라고 호칭하고 이들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지만, 필자와 동행한 북한측 관리들은 ‘중선생’으로 호칭하면서 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을 만났지만 수행을 하거나 정기법회를 봉행한다는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대신 이들은 공통적으로 필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겠다고 제의하면서 염불 실력을 은연중 드러냈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승려들이 평양에 모여 염불 등 의식을 공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역으로 아직도 사찰이 본래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찰 관리자들이 근근히 승려로서의 외형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에 불과했다.

8·15해방 뒤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자 북한의 종교정책은 명분상의 종교 허용에 불과할 뿐 토지개혁과 노동정책을 통해 탄압과 행정적 간섭을 심화하는 등 결과적으로는 종교 말살정책으로 일관했다. 1946년 3월 발동한 토지개혁법령으로 사찰과 교회의 토지를 몰수해 종교는 재기할 수 없는 치명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승려들은 사찰에서 살 수 없게 되고, ‘일하지 않고는 먹지 말라’고 하여 노역장으로 가게 되었다.

자연히 사찰은 휴양소·사무실·노동자합숙소로 전용되고, 고찰에 한해 관리인이 상주하여 문화재를 보호·관리하거나 하는 등의 종교 외적 업무에만 종사하게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제한적으로나마 이루어지던 종교활동조차도 불가능해졌다. 종교인들이 인민군 또는 인민자위대로 대거 전장에 동원되었다.

1950년 7월 15일 북한의 불교도들은 불교신앙협회, 불교청년사, 여성불교도회가 모여 연합회의를 열고 1,300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자위대에 참가했다. 더욱이 사찰에 군 입대를 기피한 청년들과 공산당을 반대하는 자유투사들이 은신하여 투쟁하게 되자, 휴전 후에는 삼엄한 감시와 강도 높은 탄압이 뒤따랐다. 특히 패전 책임을 종교인들에게도 전가하여 목사와 선교사, 신부를 미제 스파이로 몰아붙여 대숙청을 단행했다.

또 전쟁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종교인 출신을 반동분자로 지목하여 여행과 진학, 장학금 수여, 공직사회 진출 등에 제재를 가했다. 이 조치는 196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72년 사회주의헌법으로 개정하면서 “모든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함으로써 각 종교단체의 중앙조직이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화재 보호’와 ‘주체건축’이라는 이름 아래 1980년 중반부터 사찰 복원이 활성화되고, 사찰에는 과거 승려 생활을 했던 사람을 전문관리자로 임명했다.

궁색한 조치임이 분명하지만 이는 사찰을 승려 출신에게 맡겨 종교적 기능 회복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는 다른 사회적 대접이었다. 1986년부터는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종교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고, 제한적이나마 해외 동포 등이 참석하는 종교의식이 거행되기 시작했다. 법타 스님은 이러한 현상을 북한 당국이 “주체사상 중심의 북한 종교가 크게 재생한다거나 체제에 큰 위협이 없다고 진단”하였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히려 “종교의 자유를 부분적이며 제한적인 측면에서 보장하는 것이 정략적으로 더 효용이 있다고 판단, 종교 정책상의 괘도를 수정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내다봤다. 남한이나 구미 각국의 종교단체들과 교류하며 대남전략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위한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조치는 설법이나 설교 등에 순수 종교 내용을 포함시키게 되고, 그 활동도 일정 부분 종교적 성향을 갖추게 되어 그 자체만으로도 종교계의 입장으로서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인정하지 아니 할 수 없다.

하여튼 현재 북한의 사찰 기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건축술 연구 대상 및 문화재로서의 기능이다. 1946년 김일성 주석은 안변 석왕사를 방문하여 “이 절간을 가지고 불교를 선전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들의 슬기로운 건축술의 전통을 후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사찰이 건축술 연구 대상으로서 우선시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일화이다. 둘째, 휴식공간으로서의 기능이다.

사찰을 ‘봉건통치배들의 유락지’로 보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이를 인민들에게 돌려 준다는 명분 아래 ‘근로인민들의 문화휴식터’, 또는 ‘소년단 야영지’로 삼고 있다. 실제로 성불사나 보현사, 광법사 등도 정방산이나 묘향산, 대성산 휴양지의 일부로 활용되고 있다. 셋째, ‘불교의 반동성’을 일깨우기 위한 반불교 선전 학습장소로서의 기능이다.

1946년 김일성 주석이 안변 석왕사를 방문했을 당시 그는 “(이 절간을 가지고) 불교의 반동적 본질을 까밝히는 학습장소로 이용할 것”을 지시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아직도 북한 주민 대부분은 종교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이른바 ‘통일일꾼’으로 남북회담 등에 북측 대표로 활동하는 관리들조차도 불교를 믿고 사찰을 참배하는 필자를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넷째, 관광자원으로서의 기능이다.

묘향산의 보현사, 금강산 내 사찰, 대성산의 광법사, 정방산의 성불사 등이 그 대상이 되어 현재 내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보현사는 국제친선전람관(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물 전시관)으로 묘향산과 연계 관광토록 되어 있고, 광법사는 혁명열사릉으로서 대성산 유원지와, 성불사는 신천박물관(6·25전쟁 중 미군의 신천주민 학살 박물관)으로서 정방산 유원지와 연계 관광토록 되어 있다.

다섯째, 불교가 존재한다는 대외선전용으로, 남한 종교인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대남전략용으로의 기능이다. 매달 정기법회나 일요법회는 특별히 없으나, 1988년 5월부터 부처님 오신 날, 성도절, 열반절 등 불교 명절에 일부 사찰에서 법회가 열리고 있다. 이밖에도 시국의 변화에 따라 조국통일기원법회가 열리거나 남한 인사가 방북할 경우 합동법회가 열리는 등 특별법회가 개최된다.

그러나 모든 사찰이 법회 등 종교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북한의 사찰은 북한 주민에게는 종교적 성소로서보다는 관광지, 휴양지, 문화재로서의 기능이 강하다. 다만 대외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상징으로 사찰을 활용하면서 일부 종교적 기능이 외형상 되살아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종교적 순기능의 확장 폭과 깊이가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질 것인지,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를 것인지는 현재로서 속단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북한이 대외개방의 길에 들어선다면 점차 그 확장 속도에 가속이 붙을 것이라는 점이다.

3. 북한 사찰의 현황

1945년 8·15해방 전 우리 나라의 사찰 수는 31본사에 1,200여 개에 이르렀다. 이 중 북한 지역에는 9개 본사에 403여 개의 사찰과 1,600여 명의 승려, 38만 명의 신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는 60여 개 사찰에 300여 명의 승려(또는 승복을 입은 불교행정가, 사찰 관리자), 1만 명의 신도만이 존재할 뿐이다.

6·25전쟁과 종교말살정책이 미친 결과이다. 북한은 특히 6·25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대찰들이 전소하거나 대파됐다. 건봉사(강원도 고성군), 유점사(강원도 고성군), 패엽사(황해남도 안악군), 보현사(평안북도 향산군), 표훈사(강원도 회양군), 정양사(강원도 회양군), 석왕사(강원도 고산군) 등이 전소됐고, 양천사(함경남도 고원군), 쌍계사(함경북도 영안군), 자혜사(황해남도 신천군), 성불사(황해북도 사리원시), 원명사(황해북도 금천군) 등이 대파됐다.

1953년 휴전 직후부터 파괴된 사찰과 자연 훼손된 사찰을 북한은 일부 복구했지만 그 실적은 대단하지 않다. 양천사, 쌍계사, 법흥사(평안남도 평원군)를 복구한데 이어 1957년에는 성불사를 복구하고, 1961년에는 자혜사를 보수했다. 보현사, 표훈사, 정양사도 1976년부터 1985년 사이에 복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보현사의 경우 대웅전이 중심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대웅전 오른쪽 건물들이 복원되지 않아 경내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는 흠이 있다. 성불사는 다행스럽게도 연탄 심원사의 보광전, 박천 심원사의 보광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로 손꼽히는 응전전이 파괴되지 않는 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는 다른 시기보다 사찰의 복구에 더욱 많은 힘을 기울여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외동포들이 북한을 자주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동포 종교인들과의 협력이나 관광자원의 확보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된 까닭으로 풀이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남한의 종교인들이 공식적으로 방북하기 시작하면서 그 필요성은 더 커졌다. 1980년대 초에는 1920년대에 창건된 작은 사찰인 용화사(평양시 모란봉구역)를 법당과 사무실 등 2동의 건물로 복구해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사무소로 일시 사용했다. 1983년에는 보현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보존고를 신축했다.

이어 1991년 2월에는 6·25전쟁중 대부분 소실되었던 고구려 시대 사찰 광법사(평양시 대성산구역)를 대웅전과 일주문, 요사채의 규모로 복구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광법사 복구 현장을 시찰하면서 “이러한 역사유적과 유물들은 인민들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아 주는 귀중한 유산이므로 잘 보존 관리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용화사가 너무 협소해 외부 인사의 방문이나 행사 개최를 위한 평양의 대표격 사찰이 필요하던 차에 광법사를 복구하고, 여기에 용화사에 있던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와 중흥사(양강도 삼수군)에 있던 승려교육기관 불교학원을 옮겨와 북한 불교의 총본산으로서 기능하도록 했던 것이다(그러나 1998년 필자가 광법사를 방문했을 때는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는 평양시내로 별도 사무실을 잡아 나갔고, 불교학원도 다른 데로 옮겨 간 상태였다.). 정릉사(평양시 역포구역)는 1993년 복원되었다.

고구려시대 동명왕릉의 능찰이었던 이 절은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부터 동명왕릉과 함께 복원 공사에 착수됐다. 8각석탑을 중심으로 중금당(보광전), 동금당(용화전), 서금당(극락전)이 옛터의 동편 일부에 신축됐으며, 사방으로 회랑을 둘러 울타리를 삼았다. 김일성 주석이 국가적 사업으로 주도한 이 복원사업에는 동명왕이 고구려의 시조임을 들어 북한이 고구려를 계승한 역사적 적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배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사찰로서는 전혀 기능하지 않고 동명왕릉 참배객들에게 보여 주는 관광자원에 불과한 형편이다.

물론 승려도 존재하지 않고, 조선불교도연맹도 이 사찰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6·25전쟁중 전소된 고려시대 사찰 안화사(개성시 송악산)가 1992년 복원되어 대웅전과 오백성전, 칠성전이 들어섰다. 최근에는 신계사(강원도 고성군)와 영통사(개성시 용흥리)의 남북협력을 통한 복원이 논의되고 있으나, 아직 착수되지는 않고 있다.

4. 북한의 불교 문화재 현황

1993년 말 현재 북한에는 국보 50점, 보물 53점, 사적 73개소, 명승지 19개소, 천연기념물 467점 등 총 712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필자는 1998년 8월과 10월 방북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리정남 학예연구실장과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박진욱 박사,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손영종 박사, 문화보존총국 리의하 부총국장, 문화보존연구소 주영헌 박사 등 내로라 하는 북한 문화재 관계자들에게 누차 최신판 문화재 목록을 요구했으나 결국 협조를 받지 못했다.). 이 중 불교문화재는 국보 19점, 보물 28점, 사적 3점 등 총 50점이다.

이는 남한의 국보 303점, 보물 1,302점, 사적 423점 등 국가지정문화재 총 2,821점(2000년 11월 현재)에 비하면 1.77%에 불과할 정도로 현격히 적다. 이처럼 북한의 문화재 숫자가 근본적으로 적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민족문화 건설’이라는 기치 아래 민족문화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화하는 데 앞장섰다.

주체성의 원칙, 인민성(대중성)의 원칙, 현대성(반복구주의)의 원칙, 역사주의(유물사관)의 원칙에 입각한 사회주의 이념에 배치되는 문화재를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배격한 반면,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유산만 선별하여 발굴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유산의 다수를 차지하는 불교나 유교 유물이 소홀히 다뤄진 측면이 있다. 대체로 불상이나 경전 등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둘째, 문화재 관리방법상의 차이가 크다. 북한에서는 문화재를 포괄적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보현사 내에 있는 문화유물 하나 하나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현사 내 문화재 전부를 단지 ‘보현사’라는 하나의 문화재 명칭으로 국보 제22호로 지정하고 있다.

국보나 보물, 사적으로 지정된 사찰 문화재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문화재의 발굴조사 연구사업은 사회과학원 산하 고고학연구소와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비롯 각 지방에 설치되어 있는 역사박물관에서 담당하고, 문화재의 보존·관리·복원·개보수사업은 내각 문화성 산하의 문화보존총국과 각 지방의 문화유적관리소가 담당한다. 그러나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에서 관장하는 사찰 문화재인 경우에는 해당 사찰의 승려에게 관리가 위임되는 것이 일반적인 예로 보인다.

분단 이후 사찰 문화재들이 원래의 위치를 옮겨 보존되고 있는 경우가 북한측 기록이나 전언에 의해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 11월에 보현사에 들렀을 때도 이 절의 ‘안내강사’(유명 사적지 등에는 반드시 사적지 안내를 전공한 해박한 전문 안내원인 여성 ‘안내강사’가 있다. 대체로 김형직사범대학 사적과를 졸업했다.)는 “경내의 조선시대(1469년) 범종은 1984년 유점사터에서 옮겨왔고, 고려시대 다리니석당은 1986년 불정사에서 옮겨왔다.”고 확인해 주었다.

개성의 고려박물관(옛 성균관)에도 개성 인근 절터에 산재해 있던 많은 사찰 문화재들이 옮겨져 있다. 불일사 5층탑, 영통사 5층탑과 서3층탑, 현화사 비와 7층탑, 흥국사탑(일명 강감찬 탑), 개국사 석등 등이 그것이다. 평양 평천동의 흥복사터에 있던 흥복사 6각7층탑(보물 제5호)과 고려시대의 석사리함은 용화사에 옮겨져 있다. 1999년 8월에는 1970년대의 북한의 문화재 발굴성과가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북한측은 일부 문화재의 사진과 동영상을 CD롬에 담아 필자에게 보내 왔는데, 이 중에서 신라 말 고려 초의 금제미륵보살좌상과 신라 7세기 전반기의 금동석가여래입상, 고려 11∼12세기의 금동11면8비관음보살입상이 1970년대의 발굴품으로서 최초로 남한에 전해진 것이었다. 금제미륵보살좌상은 1974년 9월 금강산의 만폭동 금강대에서 금동불상 10점과 불상집 2점, 불상받침대 등과 함께 발굴된 것이다.

이 불상은 고려불상에서만 볼 수 있는 높직한 관을 쓰고 원통형 받침대 위에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고려시기의 전 기간에 찾아볼 수 없는 선행시기의 양식에 새로운 특징을 더 갖춘 순금불상으로서 고려시기 불상의 특징을 반영한 국보적 유물”이라고 북한측은 설명했다.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출토지 미상의 금동석가여래입상은 1977년에 발굴된 것으로 신라시대 7세기 전반기의 것이며, 1978년에 평양시 서성구역 와산동에서 출토된 금동11면8비관음보살입상은 고려 11∼12세기의 것이었다.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는 석탑이나 석비 등 대형석조물들이 거의 없다. 박물관 앞뜰이 대형 정치적 행사를 자주 여는 김일성 광장의 일부로 활용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불교 유물을 ‘과거 봉건통치배들의 잔재’로 여겨온 북한의 역사 인식도 한 몫 한 듯하다.

김일성 광장을 사이에 두고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마주하고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에도 불교 유물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박물관의 유물전시에 특이한 점은 모조품 전시가 많다는 것이다. 원본은 수장고에 보존한 채 만수대 창작사 등에서 정교한 모조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으며, 관람자들의 문화재 연구를 돕기보다는 교육적 효과를 더 중시하고 있다고 필자를 만났던 문화보존총국 관계자는 전했다.

5. 맺는 말

결론적으로 북한은 사찰과 문화재조차도 체제 유지와 선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 일가의 행적과 관련된 지역이나 기념물들조차도 사적으로 호칭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찰과 문화재도 분명 우리의 기존 개념과 다를 수밖에 없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결사옹위’의 수단에서 제외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순수 종교가 수단이 되고 있는 이상 형식적이나마 ‘종교 인정’이라는 씨앗이 배태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잘 자라 주기를 우리는 소망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이 있다. 코끼리 발 한 짝을 만져보고 코끼리 전체를 그리려 한 우가 이 글에 담겨 있다. 필자는 곧 네번째 방북을 하게 된다. 북한의 지인들이 이 글을 보고 필자의 무지에 대해 핀잔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 <끝>

이정
동국대 승가학과 졸업. 현재 경향신문 한민족문화네트워크연구소 부소장 겸 주식회사 민족네트워크 대표이사. 편저로 《한국불교인명사전》 《한국불교사찰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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