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상의 지평에서본 선불교와 주자 / 신규탁

1. 이 책의 구성

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
윤영해 지음 | 민족사
《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는 크게 2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에서는 〈주자와 중국불교〉라는 제목하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겪었던 전통사상과의 상호교환을 비롯하여 불교 전반에 대한 주자와 그 주변인물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적극 수용하여 주자가 선불교를 비판하게 된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제2부에서는 〈주자의 불교비판〉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이 책의 본문에 해당한다. 제2부는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인생관 비판이고, 제2장은 존재론 비판이고, 제3장은 심성론 비판이고, 제4장은 공부방법론 비판이고, 끝으로 제5장은 사회윤리비판이다. 그리고 제1부의 앞에는 이 책 전체의 〈서론〉이 붙어 있고, 제2부의 끝에는 〈결론〉이 붙어 있다.

이상이 순수 연구 부분이라면, 부록으로 실려있는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석씨(釋氏)〉편의 원문과 번역은 자료 부분이다. 이렇게 하여 순수 연구 부분이 13쪽에서 358쪽까지이고, 359쪽부터 457쪽에 이르는 99쪽은 자료 부분이다.

2. 이 책의 제목에 대하여

이 책은 제목이 《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이다. ‘주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에 중국 송나라에 살았던 유학자 주희(朱喜, 1130∼1200)의 존칭으로 ‘주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모시》 《상서》 《주역》 《예기》 《주례》 《의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춘추좌전》 《논어》 《효경》 《이아》 《맹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13경을 강의하고 토론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들의 저서와 그리고 역대의 역사서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둘러싸고 그네들은 모였던 것이다. 주자의 써클은 이것을 바탕으로 그가 살았던 현실 문제를 고민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주자가 제자들과 토론한 내용을 거기에 참석한 제자들이 기록하여 하나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은 《주자어류》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이 책은 여정덕이라는 학자가 주자 죽은 지 70년이 지난 1270년에 편집하였다. 이 책은 토론한 주제별로 정리했는데 그 실례를 크게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태극에 관한 논의’ ‘귀신에 관한 논의’ ‘인성에 관한 논의’ ‘어린이 교육에 관한 논의’ ‘독서에 관한 논의’ ‘행동거지에 관한 논의’ ‘유교 경전에 관한 논의’ ‘과거 유학자들에 관한 논의’ ‘제자들에게 훈계한 이야기’ ‘노자·장자·열자에 관한 논의’ ‘불교에 관한 논의’ ‘역사에 관한 논의’ 등이다.

이렇게 해서 총 140권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 ‘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1권의 분량이다. 가장 중심으로 이루었던 이야기거리는 유교 경전에 관한 것으로 약 80권 분량에 달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불교에 관한 부분은 1%도 안 된다. 게다가 불교 중에서도 선불교에 한정된 논의이다. 필자인 윤영해 박사가 책 제목을 《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라고 ‘선불교’라는 한정어를 둔 것도 이런 까닭에서 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주자에 관한한 매우 ‘전문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주자어류》의 분량 중 1%도 안 되는 영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다.

그렇다면 윤박사의 이 연구성과는 주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1%밖에 기여를 못하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왜 그렇다고 서평자는 생각하는가? 이 점이 바로 이 저서가 가지는 의의를 드러내는 열쇠라고 생각된다. 주자는 선불교의 비판을 통해서 ‘동아시아’ 사상사 위에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찍으려 했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그 첫째는 유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다른 어떤 사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성을 천명한 것이었다. 주자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세계는 필자의 말대로 “초월과 현실 사이에 있어서 일종의 완전한 통일과 일치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한다.”(《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 117쪽)는 것이다. 유교만이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주자의 확신이다.

선불교는 ‘초월’만을 일삼아 ‘현실’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 주자의 확고부동한 체험이자 이론이다. 《주자어류》에서 양으로 보면 불과 1%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주자의 철학이 모두 선불교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혹은 반동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윤영해 박사의 이 책은 주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그 핵심을 제대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주자가 이해한 선불교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선불교의 입장에서 주자의 잘못을 비판하는 이른바 ‘호교론적인 입장’이란 윤박사의 이 책에는 발붙이지 못한다. 주자가 선불교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선불교의 비판을 통해 불교적인 세계관을 청산하고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유학사상을 재창조하는 일의 시도였다. 위에서 서평자는 ‘동아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서평자가 임의로 쓴 용어이다. 주자가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주자에게는 ‘천하(天下)’라는 말이 걸맞을 것이다. 그는 ‘천하’를 걱정하고 거기에 살고있는 인민들의 삶을 가꾸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19세기 말 서양의 동양 침략이 계기가 되어 ‘천하’가 ‘동아시아’라는 이름으로 ‘The World’ 즉 ‘세계’에 편입된 것이다.

주자는 모든 유학자가 그렇듯이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보기에 ‘초월’을 일삼는 불교 그 중에서 선불교를 청산하고, ‘초월’과 ‘현실’을 조화.통일하는 새로운 유학 사상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서의 훈고를 일삼는 과거의 유학에 주자는 만족할 수 없었다. 새로운 유학이 아니고서는 새 중국의 건설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주자의 이런 정신과 노력은 원나라와 명나라와 그리고 청나라에 들어서 결심을 맺어 이 지역 인민들의 생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사회제도를 만들고, 경제 및 법 질서를 확립시키고, 중화주의에 입각한 대 외국 관계의 초석을 놓았다.

이러한 주자의 지적인 활동을 후세의 연구자들은 신유학(新儒學)이라고 ‘새신자(新)’를 붙여주었다. 중앙 집권적이면서도 지방의 분권을 수용하는 거대한 제국이 운영되는 기본 틀을 만들었던 것이다. 《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는 이 점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근거 있고 명료한 이해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다. 이 책이 주자의 불교 비판을 논구의 대상으로 삼은 첫번째 이유는 주자의 불교 비판에 관한 이해가 동아시아의 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한 불가결의 요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그의 불교 비판이 지금까지 시도된 것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종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주자 이후에도 불교 비판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이 그를 모방한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 14쪽) 이렇게 보면, 《주자어류》의 1%에도 못 미치는 분량의 선불교 비판이지만, 주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주자가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주자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당시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주자는 생각했는지, 나아가 주자 당시의 불교계가 어떠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주자어류》의 〈석씨〉편만한 자료가 없다. 이 점을 간파한 윤박사의 학문적 안목은 학계에 공인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3. 주자의 불교 비판을 정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주자가 선불교 비판하는 것이 동아시아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위에서 보았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일어났던 불교 비판도 내용을 보면 주자의 것을 들여온 부분이 많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도 따지고 보면 윤박사의 말처럼 ‘아류’에 불과하다. 주자가 선불교를 비판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동아시아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임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지금의 연구자가 요약·정리·분석하는가가 남았다.

이제부터 윤박사의 저서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기로 한다. 중국의 철학사상을 이른바 학문적 객관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기부터이다.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유교적인 사회의 몰락과정에서, 선교·호교·수양 등의 입장에서 벗어나, 철학사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의 선두 주자 중의 하나가 제국주의하의 일본이었다. 이들이 유학을 연구하고 기술하는 방식으로 내놓은 것 중의 하나가 본체론·인성론·수양론이라는 관점이었다. 이 관점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세계 식민지 경영을 꿈꾸던 당시의 유행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소개·확산되었다. 지금도 이 관점이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유학을 본체론·인성론·수양론의 세 측면에서 재구성하면 그 이전의 어떤 방법보다 유학에 관한 많은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 측면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럽, 그 중에서도 독일 관념론을 수용한 일제하의 학문이 그 배경이다. 여기에는 동양(특히 중국)은 후진되었고 낙후되었다는 문명사적 관점이 깔려 있다. 유럽 철학의 전통에서 논의되어 온 형이상학·인식론·윤리학의 관점으로 중국의 사상을 분석한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피아노라는 악기로 궁중 제례 음악을 연주하는 꼴이다. 피아노가 참으로 훌륭한 악기임에는 분명하지만, 궁중 제례 음악의 본 음색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본토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유학계는 여전히 전가의 보도처럼 본체론·인성론·수양론의 관점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관점으로는 다양한 유학의 역동적인 기능을 밝히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윤영해 박사의 《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윤박사는 과거의 틀의 장점을 잘 살리면서 그 단점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제2부의 제5장 ‘사회윤리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주자의 사상을 정리하고, 주자의 그런 입장에서 선불교의 단점을 비판한 것이다. 일상의 사회윤리적 실천을 통해서 유학은 초월을 구현한다.

그들은 윤리와 초월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윤영해 박사는 유학의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주자가 선불교를 비판하는 근거나 입장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종교와 사상이 인간의 보편성을 각자의 철학 체계에 논하고 있지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언제나 특수한 요소나 차별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본래성만 강조하다 보면 현실성 내지는 특수성에 소홀하기 쉽다. 주자의 유학에서는 본래성과 특수성에 대한 균형 있는 조화를 늘 강조한다. 이런 주자의 입장에 서서 본다면 ‘당시 선불교의 종교형태’는 극복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 선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주자가 선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자는 당시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윤박사도 밝히고 있듯이 주자의 불교이해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 비판적 학문의 성과 위에서 그와 같은 수준의 불교이해를 주자에게 기대하거나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에서 오는 잘못이다.”(《주자의 선불교 비판 연구》, 147쪽)

4. 맺음말

이 책은 애초부터 특정한 철학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은 아니다. 필자도 말했듯이 “이 연구는 종교학적 연구로서 철저하게 객관성을 유지하는 현상학적 입장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종교학의 기본 입장인 ‘공감적 이해’를 통해 주자의 불교 비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에만 주력했다.” 호교적인 입장에서 선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승려들이 그렇지만, 선불교를 비판한 주자를 자신의 입장에서 재비판하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상사 연구를 하는 우리들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드러내는 것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윤박사는 이런 입장을 ‘종교학적 연구’을 통해 드러낸다. 특정 종교 내지는 철학의 입장에서 상대를 비판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 학계가 윤박사의 이런 객관적인 종교 사상 연구의 입장을 쉽게 수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혹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입장도 하나의 입장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서평을 하는 필자도 이런 소수에 속한다. 호적 박사의 말대로 “일곱을 보고서 열을 말해서는 안 된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있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있어야 할 것이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졸업. 동경대학교 대학원 중국철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연세대 철학과 부교수. 저서로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 《선학사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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