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선객: 조사서래의가 뭡니까?
성철: 오매일여가 되는가?
후학: ․․․․․․안 됩니다.
성철: 아직 멀었으니 돌아가라!
후학: @#$%^&!


위의 대화는 한국의 대표적 선승이었던 성철 스님(이하 성철)과 그의 지도를 받으러 온 한 후학과의 대화를 필자가 꾸며 본 것이다. 보통 선사와 선객의 대화는 법거량(法擧量)이라고 부르는 선문답을 하고 나서 끝난다.

그런데 성철의 경우에는 선문답을 하기 전에 오매일여 여부를 가지고 상대를 재단해 버리니 한 수 겨뤄 보려고, 혹은 한 수 지도를 받으려고 찾아간 후학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후학들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분통을 터뜨리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철의 입적 후 약 15년이 되어 가는 지금 윤창화 선생(이하 윤창화)이 당시에 당한 후학들의 한(?)을 풀어 주려는 글을 발표했다. 윤창화는 《불교평론》 2008년 가을호에 실은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이란 논문에서 성철이 주장하는 ‘자면서도 화두를 드는 오매일여’는 불가능하고, 오매일여의 의미는 ‘분별심을 갖지 말고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철은 열반송에서 "평생 동안 사람들을 속였다."라고 했으니 오매일여도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윤창화의 주장대로 "숙면 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와 다름없이 화두를 놓치지 않고 망각하지 않고 참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후학들뿐만 아니라 성철 자신도 오매일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철이야말로 자오오인(自誤誤人)의 대죄과(大罪過)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과연 대중에게 "자기를 속이지 마라."던 성철이야말로 자기를 속이고 있었던 것일까? “내 말에 속지 마라!”고 하더니 오매일여도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필자는 윤창화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창화가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등의 해석을 보고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아전인수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등의 내용은 성철이 주장하는 오매일여의 근거로 충분히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윤창화의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해석은 대부분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어긋났을까? 윤창화가 어긋나게 된 이유는 그가 한 잘못된 분석 때문이다. 성철의 주장에 금테를 두르고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게 하는 교조주의적 태도도 문제지만 잘못된 주장으로 성철이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그러니 지금부터 윤창화의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자!

2. 성철의 오매일여론

오매일여에 대한 성철의 언급은 그의 저서인 《선문정로》(해인총림, 1981년)에 많이 나온다. 윤창화는 성철의 오매일여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이 언급들을 인용하고는 “《선문정로》〈오매일여〉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오매일여란 ‘실제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낮(깨어 있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밤에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를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2007년 장경각에서 펴낸 《옛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를 보면 《선문정로》의 내용에 대해 성철이 한 육성(肉聲) 법문을 ‘강설’이라는 이름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8. 오매일여>의 강설 부분들을 보면 성철이 주장한 오매일여의 뜻이 한층 명확해진다.

아무리 대단한 지견을 얻고 휘황한 경계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 경계가 꿈속에 일여한지 깊은 잠이 들었을 때도 일여한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망상의 인연으로 나타난 경계이지 바른 깨달음이 아님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옛 조사스님들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몽중일여 오매일여를 반드시 점검했다. 설사 오매일여의 깊은 경지에 들었다 해도 다시 공안을 들어 크게 깨치는 것이 우리 선문의 바른 공부이다. 그러니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부끄럼이 없이 공부를 해야지, 오매일여도 되지 않은 6식의 사량분별로 함부로 지견을 휘두르지 마라.
.....몽중일여 숙면일여라 하면 까마득히 먼 경지로 생각할 수 있다.

허나 고불고조와 다름없는 장부의 몸을 타고났으니 노력하지 않는 것이 장애일 뿐 지극한 마음으로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

.....태고 스님도 오매일여를 거쳐 대오하고 인가받았던 것이다.

철저히 깨쳤더라도 오매일여가 되는지 점검해야 하며, 또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정안종사를 찾아가 점검받는 것이 우리 종문의 철칙이다.

......천하 선지식들이 증명하였듯 오매일여를 거쳐 성취한 대각이 아니면 견성이 아님이 명백한데 그것을 어떻게 달콤한 거짓말로 가릴 수 있겠는가? 양심을 속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반드시 오매일여가 된 뒤에 크게 깨쳐야 한다.

위의 문장들에는 ‘화두’나 ‘화두참선’, ‘화두수행’ 등 화두와 관련된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옹집(懶翁集)’의 인용문에 대한 주해에서 󰡒선문의 정안종사치고 이 오매일여의 현관을 투과하지 않고 견성이라고 한 바는 없으며,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개오하였으니 구경각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한 부분과 <9. 사중득활>의 ‘대혜록(大慧錄)17’에 대한 강설에서 "완전한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다시 공안을 확철히 깨쳐야 병이 완전히 없어진 대조사라 할 수 있다."라고 한 부분을 감안하면 윤창화가 한 성철의 오매일여에 대한 정의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필자가 정리한 성철의 오매일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매일여는 ‘깨어나 있을 때 얻은 경지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도 같은 것’이다.

둘째, 오매일여는 몽중일여와 구경각 사이에 있는 단계다. 즉 ‘몽중일여→오매일여→구경각’이다.

셋째, 오매일여는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단계다.

넷째, 오매일여에 도달한 뒤에는 반드시 화두참구를 통해 구경각을 얻어야 한다.

다섯째, 오매일여는 숙면일여다.(이는 아래의 주해 부분들의 비교에서 증명됨)

성철은 이러한 자신의 오매일여론을 증명하고자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등의 구절들을 인용했다. 먼저 8-1(<8. 오매일여>의 제1절)에서 ≪현사사비어록≫의 원문 구절을 인용하고,

여하(如何)히 대오하고 지견이 고명한 것 같아도 실지경계에 있어서 숙면 시에 여전히 암흑하면 이는 망식의 변동(變動)이요 실오(實悟)는 아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반드시 오매일여의 실경(實境)을 투과하여야 정오(正悟)케 된다.

라고 주해를 달았다. 또, 8-3에서 ≪서장≫<답향시랑>의 원문 구절을 인용하고,

오매항일(寤寐恒一)은 수몽중(睡夢中)과 숙면시(熟眠時)의 양종(兩種)이 있는데, 몽중위(夢中位)는 제6식의 영역이니 교가(敎家)의 7지(七地)에 해당하고 숙면위(熟眠位)는 제8리야(第八梨耶)의 미세에 주착(主着)한 8지 이상의 자재보살들과 이야미세(梨耶微細)를 영리(永離)한 불지(佛地)의 진여항일(眞如恒一)이니, 지금 대혜(大慧)가 말한 바는 몽중일여(夢中一如)이다.

라고 주해를 달았다. 또 8-5에서 ≪능엄경≫<상음변마>의 원문 구절을 인용하고,

제6식의 추중망상(麤重妄想)은 소멸하여도 제8의 미세망상이 상존(尙存)하니 오매항일(寤寐恒一)은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에 다 통한다. 그리하여 몽중일여는 7지, 숙면일여는 8지 이상에 해당한다.

라고 주해를 달았다. 그런데 윤창화는 역시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의 해당 구절들을 인용하고 해석함으로써 성철의 오매일여론을 비판했다. 따라서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등에서 인용된 구절들을 살펴보면 시비를 가릴 수 있는데 우선 윤창화의 오매일여론에 대해 알아보자.

3. 윤창화의 오매일여론

1) ≪서장≫<답향시랑>에 대한 분석

윤창화는 먼저 ≪서장≫<답향시랑>의 긴 내용을 소개하고는 오매일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간화선을 대성‧체계화시킨 대혜종고와 그의 스승 원오극근의 말에서도 오늘날 《선문정로》의 해석과 같이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오매일여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분별 망상으로 파악하여 크게 경계하고 있다.

≪서장≫<향시랑>에 대한 윤창화 주장의 핵심은 ‘오매일여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다.’에 있다. 하지만 이 핵심은 물론이고 다른 주장들도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뒤에 필자가 소개하는 ‘4.《서장》<답향시랑>에 대한 필자의 분석’ 에서 일일이 보여 주겠다.

2)≪능엄경≫<상음변마>에 대한 분석

≪능엄경≫<상음변마>에 나오는 말은 오매일여가 아니라 오매항일(寤寐恒一)이다. 윤창화는 이 오매항일을 오매일여와 동의어로 보고 있는데 성철은 약간 다르게 보고 있다. 앞(2.성철의 오매일여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철은 오매항일을 몽중일여와 숙면일여로 나눈 다음 숙면일여를 오매일여로 보고 있다. 아무튼 윤창화의 논문에서 오매항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부분을 원문, 해석, 분석 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원문: 阿難, 彼善男子, 修三摩地, 想陰盡者, 是人, 平常夢想消滅, 寤寐恒一, 覺明虛靜, 猶如 晴空...
해석: 아난아, 선남자가 삼마지(삼매)를 닦아서 (그 결과) 상음(想陰, 생각=분별/망상/번뇌) 이 다 없어지면 그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없어져서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항상 한결같게 된다(오매항일). 또 깨달음은 맑고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아서…….

분석: 《능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매항일’ ‘오매일여’란 생각이 다 없어지면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을 자도 꿈이 없다고 하여 잠을 잘 적에 꿈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낮에는 번뇌가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가 오매항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밤에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낮 동안에 생각(번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밤에 꿈이 없어야만 비로소 상음(생각)이 다 소멸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화두 참구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낮에는 생각이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 즉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여 맑게 갠 하늘과 같은 상태를 오매항일, 오매일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계환(戒環)의 주해에도 “번뇌 망상은 낮에는 잡념(생각)으로 발전하고 밤에는 꿈으로 발전하여 본성품을 혼란케 하여 순일할 수 없고, 각명(覺明)을 요동시켜서 고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음이 다한 자는 몽상(夢想)이 소멸하고 오매항일해서 각명이 허정(虛靜)함이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다.”라고 하여 번뇌 망상이 제거되면 낮에는 생각이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 오매일여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위의 문장들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원문의 몽상(夢想)에 대한 해석’이다. 윤창화는 몽상을 ‘꿈과 생각’으로 봤는데 몽상에 대한 계환의 주해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필자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윤창화나 계환뿐만이 아니고 제법 이름 있는 학승들도 몽상을 ‘꿈과 생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몽상을 이들처럼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서장≫<답향시랑>에 나오는 대혜의 견해를 폐기처분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이 점을 파악한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한 성철의 주해를 다시 살펴보니 "오매항일(寤寐恒一)은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에 다 통한다."라며 슬쩍 넘어갔고 강설도 아예 없다. 만약 성철이 남의 말이나 읊조리는 창도사(唱道師)였다면 여기서 분명 허방다리를 짚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몽상을 건드리면 대혜를 쳐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모른 척하고 넘어감으로써 ≪서장≫<답향시랑>에 나오는 대혜의 오매항일을 자신의 오매일여론을 지지하는 근거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기막히게 딜레마를 피해 간 성철이 얄밉기는 하지만 이는 문장의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니 과연 정안종사의 노련한 안목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윤창화는 문장의 자구에 얽매여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는 바람에 몽상에 대한 해석은 물론이고 ‘꿈이 없는 상태’를 오매항일로 봄으로써 오매항일에 대한 해석마저 대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즉, 대혜가 보는 오매항일과 윤창화가 보는 오매항일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렸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뒤에서 ≪서장≫<답향시랑>에 나오는 대혜의 견해에 대한 분석과 연계해서 설명하겠다.

3) ≪현사사비어록≫에 대한 분석과 필자의 비판

≪현사사비어록≫에서 인용한 부분은 오매일여나 오매항일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이는 독립된 하나의 주장인지라 윤창화의 분석을 소개하면서 필자의 비판도 곁들인다.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은 성철의 오매일여론의 근거가 될 수도 있고 윤창화의 비판론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윤창화의 논문에서 해당 부분을 원문, 해석, 분석 순으로 소개하고 그의 분석을 비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원문: (1)更有一般(便說). 昭昭靈靈 靈臺智性, 能見能聞, 向五蘊身田裏, 作主宰, 恁麽爲善知 識, 大賺人. (知麽). 我今問汝. 若認昭昭靈靈, 是<僞>汝眞實, 爲什麽瞌睡時, 又不成昭昭靈靈. 若瞌睡時不是, <爲什麽有昭昭時. 汝還會麽>. 遮箇(喚作)認賊爲子, 是生死根本, 妄想緣氣.
(2)汝欲識此根由麽. 我向汝道. 汝昭昭靈靈, 只因前塵, 色聲香等法 而有分別, 便道此 是, 昭昭靈靈. 若無前塵, 汝此昭昭靈靈, 同於龜毛免角.

해석: 또 문득 똑같이 말하기를, 소소영영한 영대지성(심의식)이 있어서 (그것이) 능히 보고 들으며 오온신(우리의 육체) 속에서 마음대로 주재(컨트롤)한다고 말하나니, 이런 말로 스스로 선지식인 양 자처한다면 이것은 크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가 만일 소소영영함을 그대의 진실(본성)을 삼는다면, 어째서 잠잘 때에는 소소영영함이 작용하지 않는가?(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가?) 만약 밤에 잠잘 때에 소소영영함이 없다면 어째서 낮에는 소소영영함이 있는가?(만일 이 소소영영함을 그대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번뇌 망념이 기멸(생사)하는 근본이요, 망상을 일으키는 기운(氣運)이다.

그 이유를 알고 싶은가?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너의 소소영영은 다만 전진(前塵)의 6경(境)인 색성향미촉법에 의하여 일어나는 분별 의식일 뿐이다. 말해 보라. 이것이 바로 (그대가 말하는) 소소영영함인가? 만약 전진(前塵)의 6경인 색성향미촉법이 없다면 (그대의 소소영영도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대의 소소영영은 거북이 털이나 토끼 뿔과 같은 것이다(허황된 것이다.).

분석: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선사는 소소영영함 자체를 지각심과 분별 망상으로 보고 있다. 숙면 속에서도 잠들지 않는 주재자 즉 소소영영함이 있어야 한다면 사실 이것은 아트만설과 유아론에 가깝다. 그런데 《선문정로》에서는 뜻밖에도 현사의 글을 인용하고 나서 “여하(如何)히 대오하고 지견이 고명한 것 같아도 실지경계에 있어서 숙면 시에 여전히 암흑하면 이는 망식의 변동(變動)이요 실오(實悟)는 아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반드시 오매일여의 실경(實境)을 투과하여야 정오(正悟)케 된다 (《선문정로》, 109쪽).”라고 하여, 오히려 소소영영함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즉 현사가 혹평하는 분별/지각을 오매일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 선에서는 소소영영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그놈이 무엇인지 찾아보라."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문제는 이미 육조혜능의 제자 남양혜충(?~775)도 《전등록》 28권 <혜충> 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소소영영한 영대지성이나 견문각지하는 주재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불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성(神性)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현사사비어록≫에서 인용한 문장들에 대한 윤창화의 해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의 분석에는 역시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은 현사의 의도에 관계되어 있으므로 ① 현사의 견해와 ② 성철이 현사의 견해를 자신의 오매일여론에 대한 증거로 내세우는 과정에 대한 필자의 분석을 병행하면서 살펴보자.

첫째, 현사의 의도는 소소영영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잘 때는 사라졌다가 깨어 있을 때는 나타나는 소소영영’을 엉터리라고 한 것이다.

둘째, 위와 같은 맥락에서 현사는 ‘6경에 따른 분별일 뿐인 소소영영’을 허황된 것이라고 한 것이지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한결같은 소소영영’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셋째, 따라서 현사의 주장을 뒤집어 보면 ‘소소영영은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한결같아야 한다’는 명제에 대한 반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각도로 보면 현사와 성철은 같은 주장을 반대 방향으로 전개한 것이 된다,

넷째, 만약 앞과 같이 보면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충분히 성철의 오매일여론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윤창화는 앞과 같은 전개를 막을 요량으로 현사사비의 《벽암록》 4칙에 대한 평창을 거론한 것 같은데 평창에 있는 추담월영(秋潭月影)을 ‘소소한 상태’로 보고 정야종성(靜夜鐘聲)을 ‘영영(靈靈)한 상태’로 본 것은 너무 억지스럽다.

여섯째, 성철은 현사의 견해에 대한 주해에서 소소영영함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황상 소 소영영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철이 "오매일여도 되지 않은 6식의 사량분별로 함부로 지견을 휘두르지 마라"고 한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윤창화의 주장처럼 ‘현사가 혹평하는 분별/지각을 오매일여로 보고 있는 것’ 이 아니라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한결같은 소소영영을 오매일여로 보고 있는 것'으 로 봐야 한다.

일곱째, 견문각지, 선니외도, 불성, 신성 등에 관련된 남양의 견해는 전체 문장을 보면 ‘의지나 감각 지각 등을 불성이라 여기는 견해’를 논파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 소소영 영, 영대지성 등과는 상관없다. 전체 문장의 주제는 남양이 사이비 남방 종지를 배운 선객을 지도해 그가 올바른 불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덟째, ‘아트만설이나 유아론 운운’은 무엇을 아트만이나 유아로 보느냐에 따라 윤창화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므로 판단을 보류한다. 그리고 선니외도는 자이나교가 아니라 ‘심의식(心意識)을 주장하는 바라문’을 일컫는 말이다.

또, 윤창화가 성철이 일부러 누락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보인 11자, 즉 "爲什麽有昭昭時. 汝還會麽"는 삽입할 경우 오히려 전체 문장의 의미가 더 명확해지므로 성철에게 불리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성철이 일부러 그 구절을 누락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4. 《서장》<답향시랑>에 대한 필자의 분석

대혜는 임제종의 선사이면서도 조정의 고관들과 활발하게 교유를 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 38세에 송(宋)은 금(金)에게 양쯔강(揚子江) 이북의 영토를 내주고 남송(南宋)이 되는데 대혜는 북방 영토 수복을 주장하는 주전파여서 당시의 실권자이자 주화파인 진회의 모함을 받아 17년 동안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사대부들은 불교를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나 고급 취미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참선(參禪)에도 관심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대혜의 지도를 받았다.

향시랑(향백공: 向伯恭)도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대혜가 <답향시랑>의 말미에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니 글자 하나하나가 지극히 정성스러워서, 선에 대하여 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따지는 말도 아니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향시랑은 불교에 막 입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향시랑이 질문에서 사용한 ‘몽여교일(夢與覺一)’이라는 용어도 불교의 전문용어라기보다는 도교 계통의 것으로 보이며 단지 알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대혜도 답변을 하면서 선사들의 선문답에 관한 일화나 임제종 스타일의 간결한 즉답을 피하고 ‘꿈 이야기’, ‘경전의 가르침’, ‘도교 계통의 가르침’, ‘자신의 경험담’ 등을 들어 설명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대혜는 ‘향시랑에게는 이런 식의 설명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향시랑이 한 질문 자체도 삼교(三敎)에서 모두 다룰 수 있는 주제이며 특히 선불교에서는 핵심인 깨달음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결코 아무나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대혜가 어떻게 향시랑의 질문을 요리했는지 분석하고 윤창화의 분석은 어떤 점이 잘못된 것인지 지적해 보기로 하겠다. 《서장》<답향시랑>에서 인용한 원문에 대한 윤창화의 번역이 대부분 올바르고, 이 번역에 근거한 그의 주장에 대해 비판할 것이므로 필자는 윤창화의 번역문을 발췌하고 이를 평어체로 바꾸어서 사용한다.

①번역문 원문: 편지에 언급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悟與未悟), 꿈과 깸이 하나입니까(夢與覺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필자의 분석: ‘오여미오 몽여각일(悟與未悟 夢與覺一)’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중의 구조로 되어 있다. 우선 ㉠ ‘오(悟)와 미오(未悟)는 같은 것인가?’, ㉡ ‘몽(夢)과 각(覺)은 같은 것인가?’라는 두 개의 질문이 발생한다. 그런데 ㉡은 깨달음에 관한 문제이므로 ㉠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 ‘깨달은 상태에서 보면 몽과 각은 같은 것이지만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보면 몽과 각은 다른 것인가?’라는 질문이 하나 더 만들어질 수 있다. 향시랑의 질문은 이런 구조이므로 ㉢에 대한 답변을 하면 ㉠과 ㉡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향시랑이 이런 사정을 알고 질문했는지 모르고 질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점을 간파한 대혜는 먼저 ⓐ ‘망집의 상태에서 보면 진리도 망집일 뿐이다.’와 ⓑ ‘깨달은 이들에게 꿈이라는 것은 없다.’는 답을 제시하는데 ⓐ와 ⓑ는 각각 ㉠과 ㉡을 해결한 것이다. 그런 다음 ⓒ ‘깨닫고 보니 오매항일(寤寐恒一)이더라’는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함으로써 ㉢도 해결한다.

그러니 대혜가 ‘몽여각일’에 대한 답변만 한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절묘한 방법을 사용해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모두 답변함으로써 질문의 이중성을 파해해 버린 것이다. 이 점을 미리 알고 있어야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정확해질 것이므로 여기서 미리 언급한다.

②번역문 원문: 붓다도 “반연(攀緣, 망상 분별)하는 마음으로 법(法)을 듣는다면 이 법도 반연(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고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無夢)."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없다’는 것은 ‘있다, 없다’의 ‘없다’가 아니다.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황금북(金鼓)을 꿈꾸고 고종(高宗)이 꿈에 부열(傅說)을 만나고 공자(孔子)가 꿈에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은 것도 ‘꿈이다, 꿈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세상사를 돌이켜 보면 모두가 다 꿈속의 일과 같다(猶如夢中事)."라는 경전의 말씀도 있다. 오직 꿈은 모두 망상(妄想)인데도 중생은 전도(顚倒)된 생각으로 매일 대하는 눈앞의 현실을 실제로 여기고 있다. 모두가 다 꿈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허망한 분별심을 일으켜서 망상심으로 생각을 매어서(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실제의 꿈이라고 여기고 있으니(*원문은 ‘實夢’인데 윤창화는 ‘꿈을 참으로 여기고 있으니’라고 번역함)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꿈속에서 꿈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전도 중에서도 더욱 전도된 것임을 전혀 모르는 소치다. (......) 그러므로 모든 꿈도 곧 실제며 모든 실제도 곧 꿈이어서(*원문은 ‘全夢是實 全實是夢’인데 윤창화는 ‘그러므로 꿈도 곧 진실이고 진실도 곧 꿈이니’라고 번역함) 어느 하나를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지인에게는 꿈이 없다(至人無夢)는 뜻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필자의 분석: 대혜는 향시랑의 질문을 ㉠ 오(悟)=미오(未悟)? ㉡ 몽(夢)=각(覺)?, 두 개로 나눈 다음, 悟와 未悟의 문제는 ‘깨닫지 못한 상태(망집의 상태)에서 보면 진리인 붓다의 가르침도 망집이 되니 ‘悟≠未悟’가 된다는 취지로 ㉠ 에 일단 답변을 했다.

다음으로 대혜는 ㉡ 몽=각?에 대해 대답하려고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無夢)."라는 도교 계통의 문장을 언급한다. 대혜는 이 문장의 무(無)를 유무(有無)의 무(無)가 아니라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뜻이다‘라고 해석한다. ‘夢=非夢’이 되면 굳이 꿈과 꿈 아님을 나눌 필요가 없다. 따라서 붓다, 고종, 공자 등 지인의 꿈들도 그것이 ‘꿈이다, 꿈이 아니다’라고 나누어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夢=覺?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안 되었다. 그래서 대혜는 "이 세상 자체가 꿈속의 일이므로 우리가 꿈을 꾼 다음에 그것을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속에서 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생시, 즉 覺도 꿈(夢)이고 夢도 꿈(夢)이니 ‘夢=覺’이 된다. 현란하지만 'A=C이고 B=C이면 A=B'이므로 논리적으로 이 결론은 이상이 없다.

윤창화가 (......)로 생략한 부분은 ‘붓다가 중생으로 하여금 꿈과 꿈 아님이 모두 환상임을 깨닫게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깨닫고 나면 깨닫기 전에는 실제로 여겼지만 환상에 불과했던 것들(예를 들어 세상이나 꿈)이 비로소 실제(깨달은 수준에서 보는 실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全夢=實’이 되는 동시에 ‘全實=夢’이 되므로 꿈과 실제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이런 것이 바로 ‘지인에게는 꿈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혜는 ‘夢=覺?’에 대한 대답을 ‘夢=覺’로 한 것이다.

③번역문 원문: 편지 속의 질문은 바로 내가 36세 때의 의문점이었습니다. 편지를 읽으니 나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는 느낌이었다. 나 역시 일찍이 이 문제를 가지고 스승 원오 스님에게 여쭌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원오 선사께서는 다만 손을 저으며 말씀하시기를 “그만두게/ 그만두게/ 망상을 쉬게/ 망상을 쉬게(住住, 休妄想, 休妄想).”라고 말씀했다.

*필자의 분석: 대혜도 향시랑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대혜가 이때 가졌던 의문은 ‘夢覺一如?’가 틀림없다. 윤창화는 "대혜도 36세 이전에는 오매일여를 실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물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지만 당시의 용어는 오매항일인데 ⑤의 처음에 나오는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믿지 않았다.(初聞亦未之信)"라는 구절을 보면 윤창화의 주장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또, 만약 대혜가 오매항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오매항일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거나 최소한 오매항일을 언급했을 것이다. 여하튼 원오는 대혜의 질문에 대해 ‘망상을 쉬라’고 한다. 이 망상이 무엇인지는 ④에 대한 필자의 분석에서 밝히겠다.

④번역문 원문: 나는 또 “제가 잠자지 않았을 때에는 부처님께서 찬양하신 것(선행)은 잘 실행하고 부처님께서 꾸짖은 것은 절대로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여러 큰스님의 보살핌과 또 스스로 공부하여 조금 얻은 것을 깨어 있을 때에는 전부 마음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침상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할 때에는 이미 저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主宰, 컨트롤) 못하고, 꿈에 황금이나 보물을 얻으면 한없이 기뻐했고, 꿈에 사람이 칼이나 몽둥이를 들고 나를 해치려 하거나 여러 가지 나쁜 경계(일)를 만나면 두려워 겁에 벌벌 떨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이 몸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단지 잠 속에서는 저 자신을 주재(컨트롤)할 수가 없으니,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흩어져서(죽을 때) 갖가지 고통(죽음의 고통)이 치성하면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면 마음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나의 이 말을 들으시고 원오 선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네가 말하는 허다한 분별 망상이 다 없어질 때가 되면 그대는 저절로 자나 깨나 항상 하나가 되는 경지(寤寐恒一處)에 도달하게 될 것이네.”

*필자의 분석: 대혜는 "낮에는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는데 잠이 들면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 고통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면 당황이 된다."라고 하면서 재차 구제해 달라고 조른다. 이에 원오는 대혜가 말한 허다한 망상들이 모두 사라지면 저절로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하나가 되는 단계’, 즉 오매항일처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윤창화는 "원오의 관점은 오매일여에 대하여 부질없이 망상을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화두참구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분별 망상이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원오가 지적하는 대혜의 ‘허다한 망상’은 ‘꿈이라는 것이 있다는 망상, 꿈 안에서 기뻐하는 망상, 꿈 안에서 두려워하는 망상, 기타 꿈속에서 하는 망상들’이다. 이는 뒤에 대혜가 스승과 선문답에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꿈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을 보면 명확해진다.

드디어 여기서 오매항일이 나오는데 원오가 오매항일을 언급한 것은 대혜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꿈을 꾸면’이 아니라 ‘잠이 들면’ 통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대혜가 꿈 이야기를 하기 전에 ‘침상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할 때부터’ 통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종합하면 대혜는 ‘꿈을 포함해서 자고 있을 때 통제가 안 되는 병통’을 고쳐달라고 한 것이다.

대혜는 낮에는 통제가 잘 된다고 하면서 잘 때 통제가 안 되는 병통을 고쳐달라고 했으니 결국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통제가 잘 되게 해 달라!’고 한 것이니 이는 바로 성철이 주장하는 오매일여이다.

또, 원오는 “그대는 저절로 자나 깨나 항상 하나가 되는 단계(寤寐恒一處)에 도달하게 될 것이네.”라고 했는데 이는 ‘오매항일이 도달할 수 있는 단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윤창화가 주장하는 "원오의 관점은 오매일여에 대하여 부질없이 망상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고(원오의 의도가 그것이었다면 아마 대혜에게 직접 ‘오매일여에 대하여 부질없이 망상 피우지 마라’고 말했을 것이다.), 앞 문장에 이어서 나오는 "화두 참구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분별 망상이라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완전히 윤창화의 상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답향시랑> 장의 전체 문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 시점에서 대혜가 오매일여가 될 정도로 화두 참구를 했다는 정황이 없으며 원오 역시 대혜에게 뭘 가지고 참구하라고 하기보다는 대혜가 가지고 있는 망상들(꿈이라는 것이 있다는 망상, 꿈 안에서 기뻐하는 망상, 꿈 안에서 두려워하는 망상, 기타 꿈속에서 하는 망상들)을 쉬라고 지도했을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윤창화가 이런 주장들을 하는 것은 그의 논문 결론 부분에서 밝히듯이 ‘오매일여나 오매항일은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는 명제를 전제와 결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창화는 이 전제 겸 결론인 명제를 참(T)으로 성립시키고자 여러 문장들을 아전인수식으로 분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상력까지 동원하게 된 것이다.

⑤ 원문의 해석: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고는 늘 생각하기를 '날마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깨어 있을 때(寤)와 잠들어 있을 때(寐)가 분명히 둘로 나누어지고 있는데(하나가 되지 못함), 어떻게 감히 선(禪)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부처님께서 (능엄경에서)말씀하신 ‘오매항일’이 망어(妄語)라면나의 이 병은 제거할 필요도 없겠지만, 진실로 부처님께서 사람을 속이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내가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것이다.'라고.

그런데 훗날 원오 선사께서 제시하신 “제불의 출신처, 훈풍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라는 말에서 문득 가슴에 걸려 있던 것이 내려갔다(의심 해소 즉 깨달음). 그리하여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진실한 말이며, 그대로의 말이며, 망어가 아니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말이며, 참된 대자비의 말씀이었다. 몸을 가루로 만들고 목숨을 버리더라도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

가슴 속의 응어리가 풀리고 나서야 비로소 밤에 꿈을 꿀 때가 바로 깨어 있는 때이며, 깨어 있는 때가 바로 꿈을 꾸는 때라는 것을 알았으며,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늘 하나(寤寐恒一)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도리는 꼭 집어내어 남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으니 꿈속의 경계(일)와 같아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아니다.

*필자의 분석: ㉠ 스승인 원오에게서 오매항일의 경지에 대해서 들은 대혜는 ㉡ 오(寤)와 매(寐)가 둘로 나누어져 있어 ㉢ 선(禪)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기는 병에 걸려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런 다음 ㉣ 붓다가 언급한 오매항일이 거짓말이라면 자기 병은 치료할 필요가 없고 ㉤ 붓다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면 자기는 아직 오매항일의 경지에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대혜의 이런 태도는 자기가 모르는 오매항일의 경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것인데 무작정 ‘오매항일은 엉터리다.’라고 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이다.

그렇게 정리한 다음에 스승과의 선문답을 하던 중에 발생한 대혜의 경험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혜: 여하시제불출신처(如何是諸佛出身處)?
원오: 훈풍자남래 전각생미량(薰風自南來 殿閣生微凉).
대혜: 아!

원래 ‘여하시제불출신처(如何是諸佛出身處)’는 원오가 제자들에게 참구하라고 준 화두인데 여기서는 대혜가 원오에게 묻고 원오가 대답하고 있다. 여하튼 스승의 대답으로 화두가 타파된 원오가 한 통찰이 바로 ‘꿈을 꿀 때가 바로 깨어 있는 때이며, 깨어 있는 때가 바로 꿈을 꾸는 때’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夢=覺’, ‘覺=夢’이니 여기서 다시 향시랑의 질문인 ‘몽여각일(夢與覺一)?’에 대해 답변을 한 것이다.

더불어 깨닫기 전에는 몽여각일임을 몰랐는데 깨닫고 난 다음에는 알았으므로 결국 ‘悟≠非悟’이니 이로써 향시랑의 첫 번째 질문 ‘오여비오일(悟與非悟一)?’에 대한 답변도 한 것이다. 대혜가 ②에서 한 답변이 이론적이었다면 여기서는 경험적인 답변을 해 이론을 뒷받침했다고 할 수 있다.

성철은 이런 대혜의 경지를 오매일여 가운데 몽중일여로 정의한다.사실 오매항일은 향시랑의 질문인 몽여교일과는 차이가 있다. 즉 몽여교일이 ‘꿈과 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오매항일은 ‘(꿈을 포함하고 있는) 잠과 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매항일은 몽여교일보다 범위가 큰 범주다. 그래서 성철은 오매항일을 몽중위와 수면위로 나눈 것이다(《옛 거울》, pp.194-195, p197 참조).

여하튼 원오는 오매항일의 단계가 있으며 실제로 그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고, 대혜는 그 단계를 경험했으니 두 사람은 ‘오매일여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성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원오, 대혜, 성철은 이구동성으로 오매항일 혹은 오매일여가 실제로 증득할 수 있는 경지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⑤에 대한 윤창화의 주장들과 그 허구성을 살펴보자.

ⅰ.그 후 원오(圜悟) 선사가 제시한 화두에서 깨닫고 나서 비로소 오매일여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것인데, ‘무슨 뜻인지 알았다.’라는 것은 ‘오매일여에 대하여 분별, 망상하지 말고 일심으로 참구하면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혜가 알았다는 것은 ‘夢=寤, 寤=夢, 오매항일을 알았다’라는 의미이므로 윤창화의 주장은 문맥을 완전히 무시한 억지 주장이다.

ⅱ.원오가 대혜에게 한 말은 물론이고 대혜 선사가 향시랑에게 보낸 편지 역시 부질없이 ‘오여미오(悟與未悟)’, 그리고 ‘오매일여’나 ‘오매항일’에 대하여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원오는 대혜에게 오매항일처가 있다고 했고 대혜는 향시랑에게 자신이 오매항일을 경험한 것을 알려 줬지 ‘오여미오(悟與未悟)’, ‘오매일여’, ‘오매항일’ 등에 대해 분별해서는 안 된다고 한 적이 없다. 윤창화의 위 주장은 문맥상으로도 그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상상일 뿐이다.

ⅲ.오매일여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다.

원오는 물론이고 대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그런 뉘앙스를 풍긴 적도 없다. 원오가 말한 망상은 앞에서 필자가 밝혔듯이 전혀 다른 것들이다.

윤창화의 주장이 이런 허구성을 가지게 된 것은 성철식의 오매일여가 타당성이 없음을 주장하고자 고인(故人)들의 주장을, 문맥이나 근거 등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임의적으로 왜곡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좋은 또 하나의 실례인데, 윤창화는 논문의 초반부에 성철의 주장에 근거가 되는 진술들이라며 몽산덕이의 《몽산법어》<시총상인>, 나옹혜근의 《나옹어록》, 태고보우의 《태고어록》<답방산거사> ․ <시소선인> 등을 소개하면서도 "사실이라면 이분들의 사상적 근간을 의심케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라고 하여 성철식 오매일여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면 성철의 오매일여론에 근거가 될 수 있는 글을 남긴 고인(古人)들의 선(禪) 사상까지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몰아붙이려고 한다.

필자는 ‘과연 윤창화의 수준이 선의 종장들의 사상을 재단할 수 있을 정도로 고명한가?’라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그에게 ‘이분들의 사상적 근간을 의심케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⑥원문 번역: 당신이 편지를 통하여 나에게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가 같은가, 다른가(悟與未悟)?” 하고 질문한 것을 대하고 나도 모르게 진실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니 글자 하나하나가 지극히 정성스러워서, 선에 대하여 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따지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옛날 의문점을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컨대 거사(居士)는 방거사(龐居士)가 말한 “모든 있는 것을 비워 버릴지언정, 간절히 없는 것을 진실로 여기지 마라.”라는 말을 참구해 보라. 먼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그날그날의 일을 분명히 꿈이라고 이해한 뒤에, 다시 꿈속의 일을 현실의 일로 옮겨서 대비시켜 본다면, 부처님이 꿈에 금고를 꿈꾼 것과 고종이 꿈에 부열을 얻은 것과 공자(孔子)가 꿈에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은 것이 결코 꿈이 아닐 것이다.

*필자의 분석: 여기서 우리는 대혜가 향시랑이 한 ‘오여미오일(悟與未悟一)?’에서 ‘悟’와 ‘未悟’가 각각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향시랑의 질문은 ‘깨닫기 전의 상태와 깨달은 후의 상태는 같습니까(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습니까)?'인데, 이는 사람들이 오도(悟道)에 대해서 가지는 가장 일반적인 질문이다. 그러므로 대혜는 향시랑에게 ‘당신의 질문은 선에 대하여 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따지는 말도 아니므로 내가 한 오도 경험을 들려 주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 다음 대혜는 방거사의 게송 한 구절을 소개하는데 윤창화가 "모든 있는 것을 비워 버릴지언정, 간절히 없는 것을 진실로 여기지 마라."라고 번역한 원문은 ‘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다. 이 구절만 따로 놓고 보면 윤창화의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혜가 이 구절을 언급한 것은 그 구절에 ‘상대적인 개념을 세우지 마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라는 구절이 《서장》<답향시랑>에서 가지는 의미는 ‘일체의 유(有: 형상 있는 것)를 비우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반대 개념인) 일체의 무(無: 형상이 없는 것)를 참다운 것으로 여기지는 마라’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유와 무는 대립되는 개념이므로 사람들은 어느 한 쪽을 부정해 버리면 다른 쪽을 긍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꿈을 헛된 것이라고 부정해 버리면 생시를 참된 것이라고 보게 된다. 대혜는 향시랑에게 이런 관점을 버릴 것을 권하면서 방거사의 게송을 소개한 것이다.

따라서 윤창화가 방거사의 게송을 오매일여와 연결시켜 "여기서도 대혜종고는 '오로지 있는 것을 비워 버릴지언정 없는 것을 실재(實在)로 여기지 마라.'라고 하여 오매일여를 실제로 보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고 한 것은 뜬금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방거사의 게송은 ‘상대적인 개념을 세우지 마라’는 의미이므로 이를 굳이 오매일여와 연결시키자면 ‘오(寤)와 매(寐)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가지지 마라’는 정언 명령이 도출되어야 한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방거사의 게송을 소개한 대혜는 (방거사의 충고대로 생시와 꿈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을 버리고) "생시를 꿈, 꿈을 생시라고 한다면" "붓다가 본 금으로 된 북, 고종이 부열을 만난 일, 공자가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은 일이 결코 꿈은 아닐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붓다, 고종, 공자에 관한 원문을 보면 ‘則佛金鼓, 高宗傅說, 孔子尊兩楹’이다.

이를 편지의 초반에 나온 ‘則佛夢金鼓, 高宗夢傅說, 孔子夢尊兩楹’과 비교해 보면 모두 ‘夢’자가 탈락되어 있다. 이는 세 가지 일이 모두 꿈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대혜의 안배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佛夢金鼓, 高宗夢傅說, 孔子夢尊兩楹’을 ‘不可作夢與非夢解(‘꿈이다 꿈이 아니다’고 풀면 안 된다)’고 했다가 마지막에 ‘則佛金鼓, 高宗傅說, 孔子尊兩楹’은 ‘決不是夢矣(결코 꿈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에 대한 윤창화의 해석인 "부처님이 꿈에 금고를 꿈꾼 것과 고종이 꿈에 부열을 얻은 것과 공자(孔子)가 꿈에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은 것"에서 ‘꿈’은 모두 빠져야 올바른 해석이 되는 것이며 향시랑에게 "몽여교일(夢與覺一)이다!"라고 대답을 한 대혜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5.《능엄경》<상음변마>에 대한 필자의 분석

필자는 앞(3. 윤창화의 오매일여론의 2) ≪능엄경≫<상음변마>)에서 ‘몽상(夢想)’의 해석이 관건이라고 했는데 이제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원문: 阿難, 彼善男子, 修三摩地, 想陰盡者, 是人, 平常夢想消滅, 寤寐恒一, 覺明虛靜, 猶如晴空…….

위의 원문에서 ‘몽상(夢想)’에 대한 해석은 ㉠ ‘꿈과 생각’, ㉡ ‘꿈속의 생각’, ㉢ ‘헛된 생각’ ㉣ ‘꿈이라는 생각’의 네 가지가 가능하다. 그런데 앞에서 필자가 분석한 대로 《서장》<답향시랑>에서 대혜는 꿈이 없는 것을 오매항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생시가 꿈이고 꿈이 생시임을 알고’ 오매항일임을 알았으므로 그는 ‘꿈과 생시가 같은 것’을 오매항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대혜가 생각하는 ‘평상몽상소멸 오매항일(平常夢想消滅, 寤寐恒一)’에서 ‘夢想’은 우리가 평소에 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인 ㉣ ‘꿈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을 넣어서 해석해 보면 ‘평소의 (꿈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선입견인) 꿈이라는 생각이 사라져 생시와 꿈이 하나가 되리라’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구절에 대한 대혜의 해석이다.

한편, 몽상을 ㉠ ‘꿈과 생각’으로 보는 윤창화는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없어져서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항상 한결같게 된다(오매항일)."라고 해석하므로 윤창화의 오매항일은 ‘꿈이 없는’ 오매항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 ≪능엄경≫<상음변마>에 대한 윤창화의 해석을 살펴볼 때 ‘夢想’에 대한 해석에서 "대혜가 보는 오매항일과 윤창화가 보는 오매항일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꿈을 인정하는 대혜의 입장에서 볼 때, "≪능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매항일’ ‘오매일여’란 생각이 다 없어지면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을 자도 꿈이 없다고 하여 잠을 잘 적에 꿈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낮에는 번뇌가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가 오매항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밤에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낮 동안에 생각(번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밤에 꿈이 없어야만 비로소 상음(생각)이 다 소멸된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분석한 윤창화의 주장은 뚱딴지같은 소리가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하면 ‘夢想’을 ㉠ ‘꿈과 생각’으로 보고 ‘꿈이 없어야 오매항일이다’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윤창화의 위와 같은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夢想’을 ㉣ ‘꿈이라는 생각’으로 보고 꿈을 인정하는 대혜의 오매항일론은 폐기처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혜의 안목이 타당하다면 당연히 윤창화의 주장은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나아가 《서장》<답향시랑>에 대한 윤창화의 분석과 그 분석에 근거한 주장도 모두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윤창화가 빠진 딜레마인 것이다.

한편, 성철의 경우도 ‘夢想’에 대한 대해의 해석을 인정하면 곤란해질 수 있다. 대혜는 "생시가 꿈이고 꿈이 생시임을 알고 오매항일임을 알았다."라고 했으므로 그는 단순히 ‘꿈과 생시가 같은 것’이라는 이해만으로 ‘오매항일’을 파악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대혜의 오매항일은 성철이 주장하는 ‘잠잘(꿈꿀) 때도 깨어 있는 오매항일’이 아니라 단순히 ‘대혜 머릿속의 이해로 파악한 오매항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꿈과 생시’에 대한 대혜의 해석은 장자의 그것과 닮아 있으므로 ‘도교적이다’라는 지적도 같이 수용해야 한다. 성철의 입장에서는 ‘夢想’에 대한 대혜의 해석을 부정해 버리거나 대혜의 해석이 그런 것이 아님을 해명하려면 다시 복잡한 설명과 근거 제시가 있어야 하므로 성철 입장에서는 ‘夢想’을 ‘몽상’이라고 하고 넘어가는 것이 딜레마에 빠지지 않는 가장 좋은 선택인 것이다.

그렇다면 《능엄경》<상음변마>의 해당 구절은 성철이 주장하는 오매일여론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성철은 해당 구절을 자신의 저서 <오매일여> 편에 넣고는, "제6식의 추중망상(麤重妄想)은 소멸하여도 제8의 미세망상이 상존(尙存)하니 오매항일(寤寐恒一)은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에 다 통한다. 그리하여 몽중일여는 7지, 숙면일여는 8지 이상에 해당한다."라고만 했다.

성철의 주해를 그 위에 실은 본문 "想陰이 盡者는 是人이 平常에 夢想이 消滅하여 寤寐恒一하야 覺明이 虛靜하야 猶如虛空하야 無復麤重前塵影事니라."와 비교해 보면 《능엄경》<상음변마>에서 표현한 오매항일을 몽중일여로 봄을 알 수 있다.

성철의 주장에 따르면 오매일여는 몽중일여의 다음 단계인 숙면일여에 해당하는데 대혜가 몽중일여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제시하여 《능엄경》<상음변마>의 해당 구절이 성철의 오매일여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다시 말해 해당 구절과 성철의 오매일여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夢想’을 ㉠ ‘꿈과 생각’, ㉡ ‘꿈속의 생각’, ㉢ ‘헛된 생각’ ㉣ ‘꿈이라는 생각’의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즉, ‘夢想’을 ‘꿈과 생각’으로 보고 그런 몽상의 소멸에 의해 오매항일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오매일여를 경험한 것은 물론이고 그 경지 위에 있는 구경각을 이루었다는 성철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당장 ‘夢想’에 대한 해석의 문제만 봐도 해당 부분만 본 윤창화는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지만 전체적으로 고려한 성철은 잘 피해 갔다. 비유하자면 두 사람의 주장은 각각 유클리드 공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리만 공간까지 이해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데, 윤창화는 유클리드 공간에 대한 이해로 리만 공간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많은 허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6.나오는 글

앞에서 우리는 《서장》<답향시랑>, 《능엄경》<상음변마>, 《현사사비어록》등에 대한 윤창화의 분석과 그에 근거한 주장이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윤창화는 자신의 논문에서 성철의 오매일여가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오매일여는 실제경지가 아니다.
②오매일여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③오매일여 하는 주재자가 있다면 무아에 어긋난다.
④오매일여는 문학적 표현일 뿐이다.
⑤오매일여라는 깨달음은 깨달음의 정의와 어긋난다.
⑥오매일여는 성철만의 주장이다.

하지만 위의 근거들 역시 모두 반론(반증)이 가능하다.

①에 대한 반증
*대혜는 실제로 오매항일을 경험하고 붓다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원오, 몽산, 태고, 나옹 등도 오매일여(혹은 오매항일)에 도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②에 대한 반증
*깨어 있을 때만 화두를 들면 되고 잠잘 때는 화두를 들지 않아도 된다면 화두 참구는
두뇌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두뇌 활동이 없는 숙면 시에 화두를 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깨달음도 결국 두뇌 활동 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철의 깨달음은 물론이고 붓다의 깨달음도 두되 활동의 소산일 뿐이다.
*깨달음이 두뇌활동의 소산이라면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므로 유물론의 범주를 뛰 어 넘을 수 없다.
*하지만 붓다는 당시 아지타 케사캄발린(6사외도 중의 한 명)의 유물론을 부정했다.
*두뇌 활동으로 얻는 것은 모두 6식의 소산이므로 6식의 망념을 여의려면 두뇌가 활동 을 멈추는 숙면 시에 화두 참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③에 대한 반증
*무아를 체득하는 과정에 거쳐야 하는 단계가 오매일여이므로 무아의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성철이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몰랐을 리가 없다.

④에 대한 반증
*개인의 자내증인 깨달음의 상태는 비유에 의할 수밖에 없으므로 오도송이나 열반송의 경우 ‘金烏夜半徹天飛’나 ‘日月無光大地沈’처럼 소위 문학적인 표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매일여는 깨달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므로 굳이 문학적인 수사를 동원해 그것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오매일여나 오매항일을 주장한 고금의 도인들치고 오매항일이나 오매일여가 문학적 표 현이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⑤에 대한 반증
*‘번뇌 망상을 제거하여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는 윤창화의 주장은 옳다.
*그런데 오매일여를 통해야만 그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성철의 주장이다.
*‘오매일여 하는 그 상태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윤창화의 착각이다.
*따라서 ⑤는 성립하지 않는 명제이며 진리값은 당연히 거짓(F)이다.

⑥에 대한 반증
*성철뿐만이 아니라 원오, 대혜, 몽상, 태고, 나옹도 오매일여(오매항일)를 주장했다.
*경봉, 구산 등 동시대 선문(禪門)의 거장들이 성철의 오매일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성철이 “화두 참구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깨달은 상태”라고 했다는 것은 윤창화의 주장일 뿐이다. 성철은 "참선 오도에는 오매일여의 통과를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만일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오도(悟道)가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쓴 논문의 앞부분에 해당 구절을 인용하고서도 오매일여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은 윤창화가 오매일여나 성철 혹은 양쪽 모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매일여는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절대적으로 참(T)이 되어야만 하는) 가설을 세운 다음 그 가설이 참으로 증명되는 방향으로만 자료들을 분석하다 보니 허점이 생기고, 딜레마에도 빠지고, 허구적인 주장까지 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성철은 오매일여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후학들에게 오매일여라는 과정을 거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과정, 예를 들어 염불이나 진언, 간경이나 기도 등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다면 오매일여 대신에 다른 방법을 제시했을 것이다.

오매일여는 깨달음을 위한 조건, 특히 화두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단계일 뿐이지 그 자체가 ‘깨달은 상태’는 아니다. 성철의 경우 오매일여를 거쳐서 깨달음을 얻었고 지도를 받고자 찾아오는 후학들도 화두참선 수행자들이었기 때문에 오매일여가 상대방의 수준을 점검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철이 한 실수라면 상대방에게 오매일여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원오와 대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성철이 만약 자상하게 후학들을 이끌어 오매일여를 체득한 사람들이 소수라도 생겨났더라면 오늘날 이런 비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성철의 그런 점들이 더욱 그를 신뢰하게 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가 만약 사람들을 기만하는 엉터리 선사였다면 좋은 평판을 유지하려고 적당하게 선문답을 해 주고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발언들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철은 남들의 평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매일여가 안 되었다’고 하면 사정없이 쫓아내 버렸다.

오매일여를 도교적 신비주의 정도로 폄하하고, 잠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어 가며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머지않아 이 땅은 ‘도인만천하(道人滿天下)’의 상태가 될 것이다. "화두에 대한 생각이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상태, 화두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오매일여이다."라고 본다면 꿈을 꿀 때나 잠을 잘 때도 화두가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국의 사찰에, 시민선방에 참선을 하는 선객들이 수천 명이나 되지만 수십 년이 가도 도인이 나오기 어려운 것도 성철의 주장대로 오매일여가 되는 사람들이 드물어서일 것이다.

우리는 오매일여를 주장하는 성철을 비난하기 전에 붓다처럼 뛰어난 자질을 가졌던 분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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