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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다시 응용불교학을 위한 변명 / 이혜숙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이혜숙 hesookl@korea.com

1. 시작하는 말

《불교평론》은 좋은 저널이다. 매번 참신하고 가치 있는 주제를 기획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에 글을 내는 사람들은 통상의 학회지에서처럼 박제된 언어를 구사하지 않고, 자연스럽고도 깊이 있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응용불교적인 주제를 논의하는 글들이 필자로서는 무엇보다도 반갑다. 불교학과 출신인 필자는 불교가 현실에 적용되는 국면들을 주로 관찰하고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응용불교학이라는 그 분야는 동국대 불교학과 대학원 과정에서 이미 하나의 전공 영역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응용불교 전공의 공식적인 출범 이후 지난 10년 동안의 성과는 무엇일까? 마침 이정훈 교수는 2006년도에 본 《불교평론》의 지면을 통해서 응용불교학의 실태를 살짝 지적하였고, 같은 시기 《문학 사학 철학》에서 좀 더 자세한 비평을 하고 있다. 그의 비평은 상당 부분 공감이 되었고 특히 불교 사회복지 영역을 지적해서 말할 때 필자로서는 매우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변명과 해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정훈 교수의 지적을 비롯하여 다시 한 번 응용불교학의 학적 타당성, 방법론 등을 포함한 정체성 문제를 검토해 보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 개인적으로 필자에게는 《불교평론》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2000년도 겨울호에 ‘한국불교학, 그 반성과 전망’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가 당시 동국대 총장께 불려갈 뻔하였고(총장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다시 총장께서 시간이 없으니 불교대학원장을 만나라는 연락이 왔더랬다), 불교대학원장에게서 다짜고짜 꾸지람을 들었다.

당시 불교대학원장께서는 나의 글을 읽지도 않았다고 하셨다. 아마 총장도 그러셨을 것이다. 필자는 그 사건의 이유를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혹시 누구든 궁금하시면 그 사건의 발단인 제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내용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거의 변함없는 동국대 불교학과의 교과목 편성 실태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응용불교학 지망자로서 응용불교학을 할 수 있도록 과목을 보충하고, 졸업생들이 불교계 안팎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실용적 전망을 포함한 불교 교육과정을 갖춰 주기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쯤 뒤에 동국대학교 내에서 ‘불교학 발전(?, 정확한 제목은 잊었다.)'을 위한 세미나 같은 것들이 몇 차례 열렸는데, 그 내용은 주로 응용불교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미나의 주제들을 볼 때마다 필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앞서 주장했던 필자는 왜 비난을 들어야 했을까? 그런가 하면, 저들의 세미나에서는 비난은커녕 대단히 발전적인 제안처럼 관심을 끄는 장(場)이 되는 것은 왜일까? 짐작건대 그것은 그저 정치역학의 산물이었던 것 같다. 불교학 세계에는 정치역학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전의 필자처럼 너무 단순 무지한 사람이거나 혹은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하간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변방민(邊方民)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2. 응용불교학의 출생 배경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응용불교학 전공이라는 분야를 나눌 때 실제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공공연한 정보가 없는 관계로 원로 교수님들께 문의해 보았다. 공식 출범은 1998년 대학원 모집 요강에 명시된 것이라 하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전통적인 교학이나 사학이라 하기에 곤란한 포교·서지(書誌)·사회복지·여성 등의 주제를 포괄하는 분야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정통 교리학이나 역사학이 아닌 것들을 뭉뚱그려 응용불교학이라고 정한 것이므로 그 분야의 연구 방법론과 같은 것이 자세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 물론, 모든 학문이 처음부터 방법론이나 대상 영역을 확정하고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응용불교학은 더욱 애매한 출발이었던 것 같다.

불교학계의 그런 태도에 비하면, 일반 불교계에서는 이미 좀 더 사회적인 불교, 실용적인 불교에 대한 기대와 반성이 나타나 있었다.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시기의 ‘민중불교’ 운동이나 1990년대 조계종 종단 사태에서 촉발된 재가불자 중심의 신행 운동과 사회복지서비스 참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세계화, 생태환경, 시민사회 NGO 활동 등의 이슈가 불교계에서 활발해진 것이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위와 같은 각종 쟁점이 논의될 때 현장 활동가 외에 대개의 불교학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흔히 불교학은 실천학이요, 실용학이라고 말하여 왔으니, 필자 개인적으로는 도무지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안옥선 교수는 불교학의 실용성을 세 차원으로 설명하였는데, 첫째가 불교학자 자신이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 둘째로는 불교인의 불교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고 올바른 신행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점, 셋째는 불교를 신앙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인류사회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 등에서 실용성이 있다고 하였다.

불교를 적용하는 영역이 불교학 당사자 개인에서 가까운 반연(絆緣) 그리고 먼 반연에 이르기까지 확대될 수 있고, 또 확대되어야 한다는 기본적 생각에 공감한다. 단, 이런 확대가 반드시 불교 신앙의 포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학에 대해서 이 같은 세 가지 차원의 실용성에 동의한다면, 한편으로 각 차원의 실용성에 부응하도록 불교학은 다양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불교학은 다양한 방법을 제대로 구사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생긴다. 불교학이 어떤 방식으로 불교학 당사자의 개인적 삶에 성찰과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일까? 불교학이 어떤 방식으로 불교인들에게 올바른 신행을 도울 수 있는 것일까?

더욱이 불교학은 어떤 방식으로 불교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에게조차 불교적 관점과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관련해서 필자는 ‘응용불교’라는 명제를 다시 정의하여, 응용불교는 누군가(불교학 당사자/불교인/ 비불교인)가 각양각색의 현실과 차원에서 불교 원리를 적용하려는 노력의 틀·방식·규칙·기술 등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생각한다. 고로 응용불교학은 그러한 응용불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체계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고영섭 교수는 응용불교학에 대해서 “불학이 본래 실천 속에서 형성된 이론”이므로 그 자체에서 보면 ‘순수’와 ‘응용’의 구분은 사실상 의미가 없으며, 당연히 불학은 당대의 현실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새롭게 정체성을 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필자의 생각도 원래는 굳이 응용불교학이라는 범주를 나누지 않아도 불교는 실천을 필수로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과거의 불교계에서는 그것이 정언(定言)이요 공리(axiom)와 같이 여겨졌겠지만, 오늘날은 지나치게 문헌해석 위주의 불교가 되었고, 실제로 불교의 현실 적용이나 실천 성과를 보여 주는 연구물과 그런 연구를 하는 불교학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다 보니 ‘실천’ 혹은 ‘응용’이라는 특정 개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것이 응용불교학 태생의 배경이다.

김응철 교수는 응용불교학에서도 여러 범주를 나누고, 특히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가 부족하고 불교학자 중에서도 사회과학을 포괄하는 학제적 연구자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응용불교는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영역에서도 논의될 수 있다. 국내외 정신과학자·물리학자·생물학자들의 경험과 저술이 그것을 입증한다.

김용표 교수에 따르면 응용불교학이란 “불교의 기본 사상과 세계관을 현대의 사회·교육·정치·경제·문화·예술·역사 등의 제 분야에 어떻게 응용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원리와 방법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 구제의 원리와 방법을 가르쳐 주는 지침이고,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방향을 제시하며, 종단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불교학 전공자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열어주며 불교의 현대화를 위한 해석이 담겨있다.

불교 사회운동과 같은 실천적 기능은 불교학의 보조적 학문이 아니라는 기무라(木村泰賢)의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그 방법론의 개발을 위해서는 현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상황적 이해가 필요하며 교리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다. 나아가 학제 간 연구로서 둘 사이를 연결하는 응용 패러다임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3. 응용불교학의 성장 조건

이상과 같이 ‘응용불교’라는 이름을 먼저 얻고 나서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정의하게 된, 어찌 보면 순서가 다소 뒤바뀐 과정을 거쳐서 응용불교학은 오늘에 이르렀다. 몇 년 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는 응용불교 연구자를 전임교수로 선발하여 전공 영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계획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비록 어떤 이유로 중단되어 버린 계획이기는 하지만, 주류(?) 불교학자들이 응용불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합의하였던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같은 응용불교학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필자는 중요한 이슈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연구의 주제를 선정하는 문제 둘째,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 셋째, 연구의 성과와 활용의 문제를 들고자 한다.

1)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문제

필자는 응용불교학의 연구 주제가 무한대로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에서 어떤 주제가 더 가치가 있고 어떤 주제가 덜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좋은 주제의 선정보다는 주제에 대한 깊은 연구와 높은 질(質)이 더 중요한 문제다. 하긴 때때로 학회에서의 발표 주제나 연구 프로젝트들을 보면 거기에도 트렌드(trend)가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삶의 현장이 다양하고 맥락이 다양하고 이해가 다양하기 때문에 연구할 주제는 매번 유일하고 새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무한정이다. 초기불교가 부파불교를 낳고 대승, 소승의 차별적인 이해를 낳게 된 역사를 보거나 수많은 수행 논서들의 집적(集積)을 보더라도, 불자들에 의한 불교의 실천과 적용은 언제나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각자의 개인적인 근기에 따르고 상호연(相互緣) 하는 삶의 조건에 따라서 불교를 실천하는 현실의 노력에도 각각 차별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차별상은 불자 개개인이 불교를 적용하는 과업 수행의 미시적 수준(micro level)에서 연구할 주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불교인들이 집합적으로 보여 주는 적용의 양상과 집단적 상호작용은 거시적 수준(macro level)의 연구 주제가 되고 그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에서 불교계의 속성·역할·지위·권한·권력 등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법에 대한 이해와 신념은 공통되게 가지도록 동일한 불교 텍스트를 가지고 배우기는 하지만, 각 개인(집단)이 자기의 소양과 여건에서 불교 교리를 재해석하고 나름의 실행 방식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게 다양한 현실의 연구 주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전통적이고 정형화된 교리 탐구와 문헌 해석 방법만을 최고·최선의 연구라고 본다면, 그것은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 실증주의적 관점이라고 할까, 심하게 말하면 불교 근본주의에서 연역적인 연구 관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근본주의가 기독교 역사에서 태어난 말이기는 하지만, 종교 교의에 대한 신자들의 수용 태도는 대체로 절대적이고 근본주의적이기 쉽다. 다시 말해서 특정 교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신자로서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였는지를 제대로 알기 전에, 교의가 가진 예정된 결론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종교인들의 신행에는 어느 면에서 그처럼 괴리와 허구가 있다.

그러니까 각기 신행의 경험적 특성과 변화 등을 통찰해야 한다고 강조하려는 것인데 문득, 상상으로나마 옛날 옛적 부파불교 시대의 불교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적 차이를 엄밀하게 성찰하고 설명할 수 있었던 매우 역동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이 시대에 그런 활발하고 분방한 성찰과 토로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느 정도 확립되고 고정된 연구 영역에 목을 매고 있는 주류학자들의 정치역학 때문에 후학들의 다양한 문제의식 자체가 자라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정훈의 지적에 따르면 “불교학자의 역할은, ……순수 불교학에 매진하는 것이다……. 지눌·원효의 사상과 같이 새로운 사유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사상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여 그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이 사명이며, 이 결과물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서 재가공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p. 96)”라고 반문한다. 또한 “서구에서 이미 심도 있게 논의된 내용이 있음에도, 그 내용조차 소화하지 못한 채, 조야한 문제의식으로 맥락 없이 불교적 사유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 서구에서 이미 있었던 논의에 뒷북치는 일과 다름없다(pp.94-95).”라고 지적한다.

그에 대해서 나는 두 가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불교학자들은 ‘새로운 사유의 토대’를 조성하고, 타 분야 전문가들이 그 사상을 적용하도록 재가공하게 한다는 논리에 이의가 있다. 타 분야 전문가의 ‘불교해석 재가공’은 그의 관점과 그의 분야에서 필요한 것일 뿐이고, 분명한 점은 응용불교학자의 연구 목적과 관점으로 재가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같은 불교계 소재를 택한 연구라 하더라도 각자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혹자는 불교학이란 문헌학을 통한 정보 습득과 철학 하는 훈련을 통해서 사상적 해석을 하는 것이며, 문헌학과 철학을 잠시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불교학의 그런 방법론에 따르면 지눌이나 원효 스님의 사상을 문헌적으로 해석하고 철학 하는 것이 불교학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철학 한다’는 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결과 혹은 철학에 따라서 행동하는 과정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불교학이 어떻게 실천학이 될 수 있을까. 넓게 보아도 그것은 문헌해석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 사상은 타 분야 전문가에 의한 적용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응용불교학자에 의해서도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 솔직히, 오늘날 타 분야에서 그들이 불교 해석을 받아서 재가공을 시도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둘째로, 서구에서 이미 논의가 되었던 주제이거나 설령 뒷북을 치는 경우라 하더라도, 서구 사회와 맥락을 달리하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다시 논의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동안의 우리 사회는 문화적·교육적 식민주의라고 할 정도로 서구 중심의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알고 보면 불교가 서구 사회에 들어가 영향을 미친 사조(思潮)까지도 역수입된 후에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히려 불교학보다도 기타 분야 연구자들의 콤플렉스를 광범위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이 동일한 또는 유사한 개념의 용어라도 서구의 적용과 우리 사회의 적용이 다를 수 있음을 연구자는 상정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연구에서 중요한 ‘맥락(context)’의 이슈다.

아마도 위 지적의 핵심은 응용불교학 연구자가 타 분야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이 마구 아는 척을 하거나, 그야말로 맥락 없이 불교가 ‘다 좋다’고 말하는 원시적 태도를 지적하는 거라고 본다. 거기에 대한 비판은 필자도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응용불교 연구자의 자질과 수준에 관한 문제이지, 그렇다고 응용불교의 연구 주제를 제한해야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 학회에서 발표되는 주제들도 서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많은데, 서구에서 다룬 것은 우리가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이 어떻게 나온 것일까 궁금하다.

2) 연구 방법에 대한 문제

응용불교학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연구 방법론일 것이다. 앞서 응용불교학의 연구주제가 무한정으로 널려 있다고 말했을 때 모든 주제를 다 잘 다루고 연구해 낼 방법이 서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불교학자 개인의 성찰과 성장을 돕는 불교학이라면 자신의 생리적·심리적·사회적·정신적 경험과 그 속에서 변화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다.

 또는, 불교인들의 불교 이해와 신행을 돕는 불교학이라면 대중의 각 분야 생업과 기타 활동의 특수성과 여건들을 감안하여 그 속에서 불교와 함께하는 독특한 경험(장점·약점) 등을 읽고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혹은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인의 삶에서 불교적 관점과 해법을 제시하고 적용하는 불교학이라면, 무엇보다도 일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안들에 민감해야 하고 그 해법에 관한 정보를 불교 안에서 찾아내고 적절한 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각의 목적과 대상자, 대상 문제 등에 따라서 다른 실천 방법과 연구 방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편 이정훈의 지적은, 예를 들어 사원(寺院)경제를 연구한다고 할 때 굳이 응용불교학이라고 하지 않아도 불교사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이고, 경제학 이론 부분에서 불교적 시각으로 새롭게 비판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경제학자에게 맡기는 방법이 옳다는 것이다.

응용불교학자가 경제학·사회복지학 등의 핵심 논의에 참여할 수 없으면서, ‘불교경제학’ ‘불교사회복지학’ 등의 간판만 달고 폐쇄적인 구조 속에 있는데, 고로 불교계와 한국 사회 어디에도 존재 가치가 불분명한 연구자를 배출하는 일은 불교계의 손실이며 사회적 손실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연구자의 생존을 위해 사회과학도 아니고 불교학도 아닌 자칭 ‘차별화된’ 연구를 계속할 것인지 반문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응용불교학 지망자들에게 상당히 공격적이고 또한 모욕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지적이지만, 나는 어쨌든 선의의 충고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그의 지적은 그간에 나온 응용불교 계통의 연구물들이 질적으로 매우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바탕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것은 필자를 포함하여 관계되는 연구자들이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문제점이다. 하지만, 불교학 출신자 중에서 응용불교 전공자들은 대부분 어떻게 연구에 접근해 가야 하는지를 별도로 배워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독학생처럼 공부하는 그들로서는 연구 주제의 선정이나 접근 방법 등 모든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응용불교학의 후진 실태를 지적하고자 한다면 개인 연구자의 자질 문제보다 먼저 (응용)불교학의 시스템에 대해 평가를 해 주기를 바란다. 여기서 시스템이란 불교학과의 교육 과정이나 불교계와 불교학계의 상호 피드백 체계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응용불교학의 대학 내 여건은 열악하고 매우 비체계적이었다.

학부에는 여전히 응용불교 개념이 분명하지 않고 대학원의 응용불교학 수강 과목들도 절대 부족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불교 지도를 할 만한 선행 연구자들이 많지가 않다. 이 같은 학계 시스템을 알게 되면 어느 연구자도 아직은 생존을 위해서 응용불교학을 택하지 않을 것임을 알 것이다. 불교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차피 생존 문제는 말할 처지가 아니고, 그들은 오직 현실 세계에서 불교 적용의 확장에 대한 의욕이 무모한 정도로 많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학문의 두 영역을 연결 짓는 연구 방법은 때때로 학제 간 연구들에서도 문제가 될 이슈이다. 연관된 학문이 서로 소통되지 않고 ‘폐쇄적으로’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더 이상 학제 간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학제 간 연구는 기본적으로 삶의 요소나 상황이 독립·분절되어 있지 않다는 전체론적(holistic) 인식의 토대 위에서, 연구 주제가 종래의 단선적 틀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로 발견되고, 자연히 분야 간의 협동을 요구하는 측면이 생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학문이 가진 역량을 통합하여 상승효과를 얻고, 학문적 외연을 넓히고자 하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자면, 학문적으로 상호 간 소통과 이해가 어느 정도로 필요한 것인지를 외부에서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예컨대, 불교사회복지학이라는 분야에서 연구자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이고,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기준을 말할 수 있겠는가?

혹은 이 연구자가 사회복지학회에서 몇 번 발표하고 불교학회에서 몇 번 발표하면 폐쇄적인 정도를 벗어났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누군가가 학자로서 존재 가치가 분명해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대한민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수들·강사들·연구원들 등등은 자신의 분야에서 학자로서 존재 가치를 확보하였는가? 그렇다고 볼 수 없다면 그들의 분야도, 응용불교학처럼 없애야 할 것인가? 학자들이 자기 분야에서 핵심 논의에 참여한다는 것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 묻고 싶다.

응용불교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타 분야(경제학, 사회복지학 등)에 불교 적용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안고 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앞서도 이미 말했지만, 타 분야의 해석과 적용은 응용불교학의 입장에서 하려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연구의 방법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그래서 얻어진 결과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정훈 교수의 지적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견고한 어떤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가령, 사원경제를 연구 소재로 삼았을 때 경제학자가 주제로 삼고 알아내려는 내용과 불교학자의 그것이 동일할 수 없을 텐데도, 그런 경우 단연 경제학자가 하는 연구 작업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 생각이다.

또 한 가지는, 불교학자가 불교적으로 기타 학문의 논점을 이해하고 개입하여 연구하는 수준에 비해서 기타 분야의 학자가 자기 연구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수용하여 다루는 수준이 단연 더 우수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조금 원색적으로 요약해서 질문하자면, 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소위 사회과학, 자연과학이라 하는 것들을 알아들을 능력이 아예 안 되고, 다른 분야 사람들은 불교를 새롭게 만나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연구에 적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잘 알다시피, 문외한들은 어쨌거나 불교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타 분야의 전문가가 불교를 가까이 접하며 연구에 끌어들일 수 있기까지 우리는 오직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고영섭 교수의 인용에 따르면, 두 사상에서 ‘비교’란 교섭이나 영향이 실제로 있고 혹은 있었다고 확인되는 동일한 및 상이한 문화권 간의 사상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대비’는 상호 간의 교섭 관계가 설정되지 않은 것들, 교섭이나 영향에 의지하지 않은 유사점의 비교 연구를 말한다.

대비 연구는 궁극적으로 종합을 지향하기 때문에 대조하는 것들 사이에 유사점과 동일성을 추구하지 않으며 안 된다. ‘대결’은 ‘비교’와 ‘대비’의 한계를 넘어서, 두 가지 사상을 대결시키는 자체가 사상을 단순하게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 자신의 주체적 자각의 발로이자 주체적 대결이다.

응용불교학의 연구 방법에서도 불교와 기타 학문의 주제를 비교· 대비· 대결의 수준으로 각기 다르게 접근할 수 있고, 마침내는 연구자의 주체적 자각의 대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어느 분야에서든 자기 방식의 학문적 관행을 가장 당연시하고 심지어는 강요하는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불교계에서는 응용불교학의 고유한 방법이 제자리를 얻고 본래의 연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때까지 격려하고 지도해 주었으면 좋겠다.

3) 연구 성과와 활용의 문제

지금까지 응용불교학의 성과가 전혀 없다고 보며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비판자들에게 이런 제목 자체가 무리한 것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응용불교학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심이 없고, 다만 우리 개개인의 연구 방법론과 연구 수준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현재 응용불교학의 연구물들이 대체로 함량 미달이라는 평가를 최대한 받아들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응용불교학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논리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응용불교학이란 무엇인지 돌아보자. 쉽게 말하면, 불교를 이론으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개개인이 실생활에서 적용해 가는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또한, 불교적 관점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쟁점들을 거시적인 수준에서 다루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면 불교의 관점에서 정치 문제를 다룬다고만 말해도 될 텐데 왜 굳이 ‘불교정치학’이라고 큰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긴 그렇다. 필자도 본인의 주관심사인 사회복지 관련 글을 쓸 때 종종 불교사회복지론이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대개가 짐작하듯이 ‘~ ~론’이 아니고 ‘~ ~학’이 되려면 아주 많은 연구 성과들이 쌓여야 한다. 적지 않은 연구물들이 흩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학문적 토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간에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사회복지학과에서 쏟아져 나온 석사 논문과 인근 행정대학원 사회복지 논문들을 합하면 시간상으로도 20년 전후가 되니, 적어도 이 분야가 그리 얕은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닌 셈이다. 그런 역사와 결과물을 가지고서도 학문적 체계화가 되지 않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엄정한 평가와 피드백이 부족하였다.

또 필자의 소견으로는 응용불교학 연구자들의 사명감이 부족하고, 좀 더 학구적인 사람들은 조직화와 정치력을 과소평가하는 탓이 아닌가 싶다. ‘불교사회복지회’ 비슷한 이름의 조직이 동국대 불교대학원 내에서 생긴 적이 두어 차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대학원 학생들이 모두 학구적인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 또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응용불교학을 택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대학원생이기 쉬운데, 그들에게 좀 더 학문적인 훈련을 시킬 방도와 의지가 필요하다. 대학 차원에서 다시 응용불교학에 대한 논의를 정식으로 열어 갈 길을 제시해 주기 바란다.

필자는 지난 여름방학에 미국에서 한 세미나에 초청을 받았다. 세미나 참여의 주축은 한국인과 미국인 학자들이었고,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World Forum〉이다. 올해는 "Positive youth development & welfare through Strengths & Spirituality"라는 제목이었는데, 나는 우리 불교계 아동청소년복지의 영성 개념을 소개하였다.

불교는 하나의 종교로서가 아니라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복지 서비스를 하면서 갖추면 좋을 긍정적 관점과 실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원천으로 설명하였다. 국내의 사회복지학회에서는 다루지 않을 주제들이지만 미국 연구자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때때로 그런 작은 경험들을 통해서나마, 불교가 필요한 응용 분야를 찾아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그렇지만 정작 불교계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불교를 적용해 보려는 시도가 너무 부족하다. 이론가는 이론을 구상하지만, 법인이나 기관의 운영자들은 불교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공모하고 현장에서 적용하고 평가하기를 반복하여 불교 사상이 기관 운영의 실질적인 지침이 되고 전문 서비스 기술이 될 수 있게 하는 노력과 애정이 절실히 필요하다.

응용불교학 가운데 아마도 사회복지 관련 분야가 가장 많은 연구가 있을 것 같은데, 실은 동국대에서만 관련 연구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임상심리치료나 정신치료 분야에서 마음챙김· 화엄 사상 등의 교의를 응용하고 있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 불교 사상이 서구 학문에 적용되고 영향력을 갖게 된 역사는 1970년대 전후의 신세대운동(New Age Movement)에서 시작된다. 동서양의 다양한 종교와 비종파적인 신비주의적 경향,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적 사고 등이 혼합되어 영적 영향력이 여러 분야에서 큰 관심사가 되었다.

신경정신 의료를 포함한 자연과학계, 심리학계 등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 부분이 있었고, 특히 사회복지 실천의 장에서 동양의 참선 등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종교, 무종교에 상관없이 영적인 관점(Spirituality)을 수용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추세는 서구 사회의 다민족·다문화 소수자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사업에서 적절히 반응해야 할 필요성 등과 함께, 1990년대에 들어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간단히 서구 사회복지 분야에서 불교의 기여에 대해 소개하였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모든 분야의 응용불교 연구자들이 더 적극적인 문제의식과 연구 의욕을 가질 수 있고, 또 그것들을 학문적으로 공론화하는 장이 많아진다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기여도를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학문에는 당연히 시간과 역사가 필요하다. 인류사를 보면 얼마나 오래전부터 학문 영역이 생겨서 세분되고 결합되고 혹은 사라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응용불교학이 더욱 반듯한 학문체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다 모여서 서로 격려하며 학업을 이어가기 바란다. 그것은 학회 활동이나 전용 저널을 만드는 일을 포함할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연구 발표를 많이 하고 그에 관련된 분야의 논평과 피드백을 많이 받으면 질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4. 맺는 말

몇 년 전에 응용불교학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 후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반성하면서, 그리고 마침 엄중한 비판적 관점을 보여 준 한 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비평은 정말 좋은 스승이다. 더욱이 현재로서는 비주류 학문인 응용불교학을 지향하는 우리에게는 타인의 비평과 피드백이야말로 부실하던 스승의 몫을 톡톡히 대신 할 것이다.

아직은 튼실하지 않은 학문적 체계화를 위해서는 여기 《불교평론》과 같이 응용불교적 정향이 있는 지면들을 많이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본 글에서는 어느 면 공감하고 어느 면 이의를 제기하였던바, 응용불교학의 성과물 수준이 질적으로 좋지 않다는 평에 대해서는 반성하며 공감하였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수준이 낮다고 해서 응용불교학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다는 점도 설명하였다.

동일한 연구 소재를 갖더라도 불교학자와 기타 분야 학자가 중시하는 연구 주제나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불교학은 연구자(불교인/일반인)가 문헌 해석을 통해서 불교를 이해하고 마침내 스스로 불교를 삶에 적용하는 실천학이며 실용학이라고 한다. 응용불교학은 불교학이 참으로 불교학답게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

이혜숙
1956년생. 동국대 불교학과 철학박사.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현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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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수(1)  

2009-04-26 13:00:35
무엇에대한 응용인지 그것부터가 불투명 합니다
불교응용과 new age 운동은 관계가 없습니다 new age 운동은 그들이 필요한것이고
그 운동이 있으므로 응용불교가 생명력을 얻은것도 아님니다
new age 운동이 뭔지 그것 부터 공부를 하셨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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