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⑩-마지막 회

지난 회에는 20세기 중반에 생겨난 그리스도교 신학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리스도교의 오늘과 내일을 조망하면서,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그동안 그리스도교를 역사적으로 살펴본 우리의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모두 끝내려 한다.

그리스도교는 구시대의 유물인가

그리스도교 역사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숭고한 종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도 하고, 동시에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 갈릴레오 박해 등 여러 가지 역사 발전에 발목을 잡는 해악이 되는 일도 많이 했다. 명암의 경중이 어떠하든, 현재 서양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계속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전통을 존중하여 교회에 계속 다니는 사람들, 여러 가지 가치관이 혼란하고 복잡한 세상에 확고부동한 ‘절대 진리’를 말해 주는 근본주의적 성격의 교회에서 확신을 얻으려고 다니는 사람들, 이민이나 도시화로 뿌리가 뽑힌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편의와 소속감 때문에 다니는 사람들, 질병이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신유(神癒)나 기적을 강조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메마른 세상에서 뭔가 시원하고 화끈한 것을 원하는 사람들 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점점 더 많은 지성인이나 의식 있는 사람들에게 “반지성적, 문자주의적, 독선적, 스스로 의로운 척, 우익 정치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된(anti-intellectual, literalistic, judgmental, self-righteous, uncritically committed to right-wing politics)” 종교 집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이런 식의 그리스도교는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고, 더욱이 여러 가지로 말썽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그리스도교에 계속 머물 수 없다고 느끼고, 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서양에서 이른바 주류(mainline) 그리스도교는 점점 쇠퇴하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도 그리스도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의 숫자가 1970~8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 성장세가 멈추거나 감소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한다.

손쉽게 최근에 나온 캐나다의 통계를 보면, 1985년 조사에서 매주 종교의식에 참여한다는 사람의 비율이 3명 중 1명(30%)꼴이었으나 2005년에는 5명 중 1명(21%)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청소년층이나 청장년층의 종교의식 참여율은 단 16%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나온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교회에 다니던 미국 학생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69%에서 94%가 교회마저 졸업하고 만다는 것이다.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는 미국에서 제일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the church alumni association)’라는 재치 있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런 추세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목사나 신부나 수녀가 되려는 지원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현재 그리스도인 숫자가 늘어나는 곳은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다. 한국은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를 다루는 책 어디에나 나오듯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기적을 이룬 나라이다.

지금 미국 주요 신학교에는 한국 학생들이 없으면 운영이 곤란할 정도로 한국 학생들이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적어도 숫자상으로 보아 이제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서양 종교’라 할 수는 없다. 유럽 국가 중에는 교회 출석률이 전체 인구의 2% 정도에 불과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교가 서양 지성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고, 또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비근한 사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최근 서양 독서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책으로 옥스퍼드대학교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정신신경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샘 해리스(Sam Harris)의 󰡔종교의 종말󰡕, 보스턴에 있는 터프스대학교 인지과학자 다니엘 데네트(Daniel Dennett)의 󰡔마술을 깨다󰡕 등이 있다.

 이른바 반종교 이론의 ‘기수(騎手) 4인방(Four Horsemen)’으로 불리는 이들은 모두 나름의 입장에서 종래의 종교가 얼마나 반지성적이고 독선적이고 맹목적이고 파괴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려 하고 있다. 이처럼 종교를 반대하는 책이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최근에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로 일반 독서층에 널리 펴지고 깊이 파고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금년 10월에는 종교 문제를 주로 다루는 미국의 코미디언 빌 마헤르(Bill Maher)가 만든 󰡔Religulous󰡕라는 영화가 나와 현재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이 제목은 ‘종교’라는 뜻의 ‘Religion’과 ‘웃기는, 어처구니없는’이라는 뜻의 ‘ridiculous’를 합쳐 만든 합성어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고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성실하다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폭로하는 영화다.

셋째, 비록 현재 종교에 속한 젊은이라도 종교적 가치가 실생활에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다시 미국 어느 통계를 인용하면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청소년들과 비그리스도인 청소년들을 비교한 결과,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 일상적인 윤리 생활에서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다. 심지어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가 흥왕할수록 여러 가지로 사회적 문제가 더욱 커진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은 이른바 제1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제일 많은 나라지만, 󰡔소유의 종말󰡕 등의 책을 쓴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에 따르면, 아직도 사형 제도를 고집하는 등, 그리스도교가 유럽 국가에 비해 그리스도의 정신이 실사회에서 적용되는 정도가 가장 낮은 나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국가들이 잘 사는 국가들이라는 일부 개신교 성직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독자들에게 이런 통계숫자를 소개한 어느 보수주의 목회자 자신도 젊은이들이 ‘놀라운 숫자로’ 교회를 떠나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의 젊은 세대가 결국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마지막 세대(the last Christian generation)’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제3의 길

그러면 서양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하여 그리스도교를 떠난 사람들 모두가 종교와 무관하게 살고 있다는 뜻인가? 많은 학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현재 서양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I am not religious, but I am spiritual.” 혹은 “I am 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자기는 비록 전통적인 기성 종교의 설명 체계나 종교 예식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이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삶의 영적 차원이나 가치를 거부하거나 거기에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영적 가치에 대해 더욱 큰 관심과 열의를 나타내고 있지만, 전통적인 종교는 자기의 영적 추구에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자기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종교 심층에 깔린 종교성이나 ‘영성(spirituality)’이지 그리스도교나 기타 전통 종교가 형식적으로 지켜오는 제도나 교리로서의 종교(religion)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교 전통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취급되다가 결국 그 명을 다하고 말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 신부는 󰡔그리스도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라고 하는 베스트셀러 책을 냈다. 그리스도교가 변화하지 않으면 죽지만, 변화하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옛날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에 입각한 문제나 그 문제에 대한 믿음은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는(irrelevant)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우리만이 가지는 문제가 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천착해야 한다. 비근한 예를 들면 옛날, 바다에 끝이 있다고 믿고 있을 때에는 육지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을까, 얼마 이상 가면 물살에 빨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가, 그 많은 물은 어디로 떨어지는가 하는 등의 문제들이 그들의 사활에 관계될 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알면 이런 질문이 하등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종교적 필요에 부응하는 그리스도교의 등장이 필요하다고 믿고, 또 실제로 이런 식의 그리스도교가 새로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새로이 등장하는 그리스도교를 ‘새 그리스도교(a New Christianity)’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the newly emerging Christianity)’ ‘뜨는 그리스도교(the emergent Christianity)’ ‘새 세계 그리스도교(a new world Christianity)’ ‘개명한 그리스도교(Enlightened Christianity)'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더러는 이런 변화를 제2, 혹은 제3의 ‘종교개혁’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

필자도 몇 년 전에 낸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새로이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에서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소개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필자는 글로즈토드랜크가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패러다임 변화를 예거했다.

➀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➁ 상하구조에서 평등구조로 ➂ 저 위에 계신 하느님에서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➃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➄ 죄 강조에서 사랑 강조로 ➅육체 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➆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➇ 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➈ 분열에서 연합으로 ➉ 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넘어간다는 이야기였다.

미국에서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를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마커스 보그 교수는 현재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이전(earlier)’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새로 등장하는’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갈라져 있다고 하고, 외형적으로 보아 이 두 그룹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로 여성 목회자 안수, 동성애, 이웃 종교에 대한 태도 등을 예시했다.

물론 이전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여성 목회자에게 안수를 줄 수 없고, 동성애는 죄이므로 동성애자들은 독신으로 살든지 이성애로 돌아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리스도교만이 절대 진리 종교로서 이웃 종교는 안 된다고 믿는 반면, 새로 등장하는 패러다임에 근거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성도 안수를 받을 수 있고,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할 뿐 아니라 심지어 동성애자들의 목회자 안수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적/표피적으로 읽느냐 영적/심층적으로 읽느냐 하는 차이이다. 성경을 문자적/표피적으로 읽으면 여성 안수도, 동성애도, 타 종교도 모두 안 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영적/심층적으로 읽으면 성경의 더욱 깊은 원칙에 따라 이런 문제들을 여러 가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문자적/표피적으로 읽는 사람들의 수가 1963년에는 65%였던 것이 2001년에는 27%로 줄었다. 옛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세속화나 타락으로 여겨지고, 새로이 등장하는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환영할 만한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 침례교 목사로서 하버드대학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찰스 킴볼(Charles Kimball)도 󰡔종교가 사악해질 때󰡕라는 책에서 종교가 사악해지는 경고 증세로 다섯 가지를 든다. 1) 자기만이 절대적 진리를 독점했다고 주장할 때, 2)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할 때, 3) 앞으로 현실 삶의 문제를 무시하고 이상적인 시대만을 바라보라고 강조할 때, 4)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할 때, 5) 종교적인 목적이라면 전쟁도 불사한다고 할 때 등이라고 했다. 9·11 사태 이후 많은 사람은 지금의 종교가 이런 증세를 더욱 많이 보이는 것은 아닌가 물어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그리스도교도 이런 증후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괄목할만한 정도로 벗어나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에 나타나는 흐름이다. 이것은 동시에 논자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바라는바, 변화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흐름 중 필자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네 가지다. 1) 문자주의를 극복하므로 성경의 표피적인 뜻이 아니라 심층적 의미를 캐려는 노력, 2)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하는 경향, 3) 저 위에 계시는 신이 아니라 내 속에 거하시는 신을 찾으려는 마음, 4) 이웃 종교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신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려는 자세 등이다. 처음 세 가지 흐름에 대해서는 󰡔불교평론󰡕 31호(2007년 여름)에 대략 논의했기에 되풀이하지 않고, 여기서는 넷째 종교적 배타성을 극복하는 문제, 특히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와 협력 가능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다원주의/수용주의의 등장

점점 많은 신학자가 ‘내 종교만’이라는 독불장군식 태도를 지양하고, 현 세계의 다종교(多宗敎)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웃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 종교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신학의 한 분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를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이라 한다. 현재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신학자의 하나로 폴 닛터(Paul F. Knitter)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근 저서 󰡔종교신학 입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간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보이는 네 가지 기본 태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  이웃 종교는 어차피 그릇된 종교이기에 이를 내가 가지고 있는 참된 종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대체론(Replacement model)
  •  이웃 종교에도 부분적으로 진리가 있지만 아직도 충분하지 못하기에 그 모자람을 내가 가진 참된 종교로 채워 주어야 한다는 충족론(Fulfillment model)
  •  종교 간 서로의 공통이 있기에 이런 공통점을 찾고 그 공통점을 인해 같이 기뻐하고 협력하자는 상호론(Mutuality model)
  •  종교들은 당연히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이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다름에서 서로 배우자는 수용론(Acceptance model).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주로 첫째와 둘째 태도를 견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대립 관계나 경쟁 관계를 청산하고 이웃 종교와 대화하며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주어진 사회,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웃 종교와 대화를 통해 나의 영적 성숙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Max Müller)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이웃 종교와 대화하고 그들의 종교를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 화해와 협력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리스도교가 다시 활력을 찾는 길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앞으로 신학 발전은 오로지 이웃 종교와 진지한 대화의 결과로 이루어질 것이라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라이몬 파니카(Raimon Panikkar)도 현재 그리스도교가 기진맥진한 상태라고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은 처방을 제시했다.

거의 자명한 사실은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우리 시대에 의미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하지만, 이제 진이 다 빠진 듯, 심지어 말기 현상을 보이는 듯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종(異種)교배(交配)나 수태(受胎) 작업을 통해서만이, 그리고 오로지 현재 [서양의]의 문화적, 철학적 울타리를 넘어섬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은 창조적이고 역동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이런 사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기진맥진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운명을 비극적으로만 보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이웃 종교, 특히 동양 종교와의 접촉과 대화라는 특단의 조치가 있을 때 새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가톨릭 사상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동방에서 온 ‘황금과 몰약과 유향’이라는 귀한 선물이 그리스도교 발생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묘사된 것처럼,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활력으로 되살아나려면 동양으로부터 다시 선물이 와야 하는 데, 그것이 노장사상이나 선불교와 같은 동양의 깊은 정신적 유산이라고 하였다.

특히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위에서 닛터가 제시한 다원주의/수용주의적 태도를 함양하면서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화와 협력의 대상으로 불교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는 미래의 역사가들이 20세기에 일어난 일들을 기억할 때, 컴퓨터나 인공위성 같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나 공산주의의 흥기와 몰락 같은 사회적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의미 있게 만나게 된 사건일 것이라 예견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이 한국에서보다 더 중요한 나라가 세계 어디에 또 있겠는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이제 논의의 범위를 좁혀 한국에서의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와 협력 문제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 현재 한국의 양대 종교라 할 수 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아름다운 관계를 맺은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3·1 운동 당시 두 종교 간의 협력을 생각할 수 있다.

최근 가톨릭 수녀와 불교 비구니와 원불교 정녀들이 모여 여러 가지 사회 활동과 종교 활동을 함께하고, 불교와 가톨릭 및 개신교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국적인 장기(臟器) 기증 운동을 함께하기도 했다.

지난 2월 중순 이후 ‘대운하 반대 100일 순례’에 불교,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성공회의 몇몇 지도자들이 함께 참석하여 강을 따라 걸었다. 이번 가을에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함께 53일간 오체투지 순례를 통해 마음과 뜻을 모았다. 뜻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촉진시키는 학술 대회도 열린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훌륭한 사례에도, 이 같은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고 간헐적일 뿐,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불교․그리스도교 간의 관계는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더 많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 한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근에는 정부의 그리스도교 편향이라고 여겨지는 정책에 불교에서 대대적으로 항의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템플대학교의 레너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교수는 종교 간의 충돌이라는 가공할 재난을 피하려면 “자기 중심주의적인 독백의 심성에서 벗어나 타 종교들을 우리의 독백에서 투영된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그들과의 대화로 들어가고자 노력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종교 간의 이런 대화적 동반자 관계가 긴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려고 “미래는 두 가지 선택을 제공할 뿐이다. 죽음이냐 대화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폴 모제스(Paul Mojzes)도 종교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전쟁, 적대, 무관심, 대화, 협력, 그리고 종합의 관계까지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현재 서양의 그리스도교 지성들은 이웃 종교들과 관계에서, 특히 불교와 접촉에서 죽음보다는 대화를, 전쟁이나 적대 관계보다는 대화와 협력 관계를 택해야 할 것이라 믿는 이들이 점증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현재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논의되는 것을 종합하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한 바를 간단히 제시해 본다.

첫째 ‘함께 일하는 것’이다. 오늘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어느 한 종교가 사회의 모든 문제에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모든 종교는 이 시대의 도전에 응하려면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도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입각해서 함께 자기가 속한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종교적 병리와 불의에서 사람들을 구해 내는 데 협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 그렇게도 만연한 자연 훼손과 환경 파괴에서 오는 생태적 문제를 경감하는 데도 물론 힘을 합할 수 있다.

둘째,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이렇게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사회․윤리적인 공동과업에서 건설적으로 힘을 합해 함께 일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적 관심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즉, ‘함께 일하는 것’ 외에 ‘함께 생각하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우선은 사상적 영역에서의 근본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토의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과정신학으로 유명한 미국인 신학자 존 코브(John Cobb, Jr.)가 지적한 것처럼 현재 그리스도교 신학은 “불교와의 만남으로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영향으로 ‘상호 변혁(mutual transformation)’이 이루어져 불교의 사상적 지평도 그리스도교와 대화를 통해 넓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깨침을 위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깨침을 위해 함께 힘쓰는 것’이라 본다. 두 종교가 ‘궁극 변화’의 차원, 불교에서 ‘깨침’이라고 하고, 신약성서의 용어로 ‘메타노이아’라는 ‘의식(意識)의 변화’ 혹은 ‘특수인식능력의 활성화’ 차원에서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뿐 아니라 어느 종교 간의 대화든 결국은 이 ‘의식의 변화’, ‘특수인식능력의 활성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논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차원의 대화를 필자는 일단 ‘메타노이아 중심(metanoia-centric)’의 접근이라 부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불교는 ‘깨침’을 위한 종교다. 불교에서 깨침을 빼면 그야말로 ‘빛과 열이 없는 태양’과도 같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의 중심은 그가 공중 전도 사업을 처음 시작하면서 외친 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라고 했을 때의 ‘회개’이다.

여기서 회개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의 명사형은 ‘메타노이아’로서, 어원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한국말의 회개(悔改)나 영어의 ‘repentance’와 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 자체를 의미한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기원 4세기까지 그리스도교에서 읽히다가 이단으로 낙인이 찍혀 폐기처분당한 복음서들이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복음서들 중 특히 󰡔도마복음󰡕은 ‘깨침(gnosis)’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내 속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그 신성이 바로 나의 ‘참나’, ‘본마음’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도마복음󰡕의 기본 가르침과 불교의 깊은 가르침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하는 것은 미국인 리처드 베이커(Richard Baker)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보스턴에서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밑에서 선 수행을 하고 선사(禪師)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선원(禪院)의 주지가 되었는데, 하루는 󰡔도마복음󰡕을 전문으로 하는 프린스턴대학교 일레인 페이젤스 교수와 이야기하다가 “제가 󰡔도마복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구태여 불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20세기 가톨릭 최대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침을 강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미국 유니언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도 최근에 펴낸 그의 책 《Silent Cry》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n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장했다.

만약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이런 의식의 변화를 각각의 종교 생활에 공통의 목표로 삼고, 가능한 한 많은 불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에서 이런 의식의 변화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토의하는 진지한 대화에 임한다면, 그리고 이런 토의가 앞으로 더욱 활성화된다면, 이런 의미 있는 대화야말로 두 종교를 위해 더없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가면서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은 예수와 붓다는 ‘한 형제’요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인류 역사에 핀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10회에 걸쳐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연재한 것도 결국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염원에서였다. 이 글을 통해 불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가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이런 글을 기획하고 꾸준히 연재해 준 󰡔불교평론󰡕 편집진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 이 글을 계속해서 읽으신 독자들이 계신다면 그런 독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며,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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