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기획특집
     
현대사회의 불교윤리 / 박병기
특집1 생명공학과 불교윤리
[20호] 2004년 10월 10일 (일) 박병기 bkpak15@hanmail.net

1. 우리 사회에서 윤리를 바라보는 이중적 관점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 윤리 과잉의 사회이다. 누구나 윤리를 말하면서 세상을 개탄하거나 비판하고, 윤리를 회복해야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회복해야 하고, 경제난을 회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도 역시 경제인들의 도덕성 회복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학교 교육이 처해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학교를 인성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출발점으로 교사들의 도덕성 회복을 외치기도 한다.이런 주장들을 접하다 보면 마치 우리 사회는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윤리만 회복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 사고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다른 한편에서는 윤리를 철저하게 경시하거나 무시하면서 출세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썩은 단무지를 넣기도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한 사람이라도 일단 그 자리에 오르면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혼란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온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갈등 정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그 갈등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당위적 영역에 관한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할 경우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다. 누구나 동의하는 방향의 당위라면 현실은 그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합의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상황은 그 당위에 관한 합의 또는 인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대 윤리학의 역사 속에서 이 주제는 대체로 윤리적 상대주의의 문제로 다루어져 왔다.

보편적인 가치를 전제로 하고 그것에 대한 가치평가의 상대성만을 인정하는 현상학적 가치윤리학에서부터 모든 가치 판단을 감정적 판단의 위장으로 파악하는 정의주의 윤리설에 이르기까지 윤리적 상대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지만, 확실한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 상대주의에 대한 지지가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강화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의 과정에 어려움을 가중시켰고 우리의 상황은 그것에 전통적 가치와 서구의 근대적 가치 사이의 충돌이 더해져서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상황에 대한 윤리학적 분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 사이의 연계성이나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상황 분석 자체의 어려움과 함께 그 바탕에 서양 윤리학적 분석틀의 한계가 전제되어 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중요한 원리인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근거한 현대 서양의 계약론적 윤리학이나 담화적 이성의 보편화 가능성에 근거한 담화윤리학적 틀로 분석하는 우리 사회의 윤리적 상황은 대체로 그 공정성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거나 보편적 담화 대신에 감정에 근거한 '목소리 높이기'가 횡행하는 후진적인 상황으로 나타나곤 한다.

문제는 이렇게 높여진 목소리가 그다지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각각의 윤리학적 분석이 지니는 나름의 논리성과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이 온전한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체로 두 가지 해답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덕 문제 자체의 구조적 복합성에 근거한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들의 도덕 감정과의 일정한 거리감에 근거한 설명이다.

이러한 두 차원의 난제는 서로 일정 부분 연계되어 있다. 우리의 도덕 감정이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 구조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온 전통적 도덕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재는 각 가정의 문화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 양상을 달리하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서나 그 혼재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혼재로 인한 각 개인들의 윤리적 판단의 혼란은 구체적인 응용윤리 문제로 옮겨오면 더욱 구체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내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상반된 도덕 기준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판단 불능의 상태에 빠지거나, 아예 도덕적 판단을 배제하고 경제적 이익을 판단의 준거로 삼는 비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거기에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생명공학과 윤리 문제는 이전에 직면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로 다가와 혼란을 가중시킨다.

2. 불교윤리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1) 불교에서 당위의 의미와 근거 문제

윤리 문제를 바라보는 이러한 이중적 시각은 바로 그것을 이유로 윤리에 관한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그 혼란의 양상을 직시하는 혜안(慧眼)을 요구한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혜안의 한 준거틀로서의 불교윤리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불교윤리라는 개념은 그 외연이 넓은 개념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불교의 계율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포괄하는 불교의 윤리적 관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전자의 경우에도 사분율(四分律)에 근거한 이른바 소승계와 주로 범망경(梵網經)에 근거한 대승의 보살계로 나뉘고, 우리의 승가는 이 둘을 모두 포섭하여 행동의 기준과 준칙으로 삼는 전통을 축적해 오기도 했다. '불교의 윤리적 관점'의 경우에도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불교의 도덕적 기준 또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고, 불교 철학에 근거해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는 불교윤리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윤리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된 정의를 전제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그 작업을 윤리학의 핵심 질문인 도덕적 당위의 불교적 근거를 찾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윤리학이 여러 가지 하부 주제를 갖고 있지만, 윤리학 자체가 당위를 지향하면서 그 당위의 근거를 묻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역시 그 질문에서 출발하여 모든 다른 주제들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당위는 한편으로 현실과의 밀접한 연계성 속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차원에서는 그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과정과 노력 속에 존재한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불교적 패러다임인 연기법(緣起法)은 한편으로 인간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책임의 소재를 인연의 법칙에서 찾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이것은 심재룡은 연기법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운명론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열반으로의 자유를 둘 다 아우르는 독특한 불교적 인과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심재룡, '윤리와 열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엮음, [철학사상], 1호, 1991, 15쪽. }}

공(空)의 다른 설명이라고 볼 수 있는 연기법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지만, 윤리적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할 경우에는 이러한 연기법의 본질에 대해서 먼저 분명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공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에 흔히 품게 되는 윤리적 질문 중의 하나가 '일체가 공하여 선악조차 없다면 굳이 선을 행할 이유도 없지 않는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김성철은 세속제(世俗諦)로서의 세속 윤리의 필요성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개념을 공 개념에 적용하여 전자는 공성을 터득하기 위해 지켜야 할 윤리로 후자는 공성을 터득한 이후에 나타나는 윤리라고 해석하고 있다.{{ 김성철, '공(空)과 윤리', 고려대장경연구소, [공과 연기의 현대적 조명], 1999, 113-115쪽 참조.}}

연기의 공성에 주목하지 않았던 초기불교에서도 온갖 인연으로 말미암은 탐진치의 소멸을 도덕적인 삶의 모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러한 삶은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든지 그 핵심 관건은 마음의 정화, 즉 탐진치 성향을 무탐진치의 성향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수행을 통한 이러한 자기 전환을 안옥선은 덕윤리학적 관점에서 '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성품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안옥선,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초기불교윤리에의 한 접근], 불교시대사, 2002, 8쪽.}}

불교윤리가 서양윤리학의 오랜 전통 중의 하나인 덕윤리학으로 온전히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여지를 남기지만, 확실한 사실은 불교윤리가 덕윤리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 때의 덕은 자신에게 남겨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교윤리의 공리주의적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학자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키온(D. Keown)이다.(D. Keown, ,Hampshire: Palgrave, 2001). 물론 그도 불교윤리가 온전히 공리주의적 특성만 지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덕윤리학과의 유사성에도 유의하는 열린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같은 책 7, 8장 참조. }}

불교의 윤리적 측면에 대한 고찰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국내 학계의 상황 속에서 초기 불교의 윤리적 측면에 주목하는 안옥선과 중관사상의 윤리적 측면에 유의하고자 하는 김성철의 노력은 모두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우리 불교가 지니고 있는 선불교적 전통 속에서 윤리적 차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는 극히 부족하다. 그것은 아마도 선불교가 윤리적 차원조차도 뛰어넘는 깨달음을 지향한다거나, 불교 자체가 인간의 윤리적 차원 보다는 오히려 심리적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임상심리학자로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의 가와이 하야오는 "일신교의 종교는 신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면서 윤리에 치중하지만,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는 관점에서 심리를 중시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윤리에 관한 정의를 지나치게 좁게 내리고 있는 데서 비롯된 편견이라고 판단된다. 윤리는 단순히 명령을 지킬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의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불교에 근거한 심리학은 윤리학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가와이 하야오 외, 김옥희 옮김, [불교가 좋다], 동아시아, 2004, 60쪽.)}}

그러나 선불교적 전통 속에서도 윤리가 근본적으로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조 혜능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곧 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의 구체적 표현으로서의 계율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모든 경전에서는 계율을 중시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지관, [南北傳 六部 律藏比較硏究], 가신불교문화연구원, 1999, 20-21쪽 참조.}}

특히 출가 승단의 경우에는 보다 엄격한 계율을 받아 지키는 전통이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우리 승가의 면면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이 소승 사분율의 경우 당시의 승단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석가모니 부처가 내린 결과적 금지율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대 상황에 맞는 맥락적인 해석이 요청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보살계의 경우는 그와는 달리 마음의 법과 기준을 세우는 원리적 차원의 계율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폭넓은 해석의 여지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여 온전히 구현하고자 하는 성품 또는 성향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더 중시될 수 있고, 그것은 서양 윤리학의 덕윤리적 전통과도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윤리에 관한 여러 해석들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해낼 수 있는 불교적 당위의 세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우리 삶의 바람직한 모형은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하여 모색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탐진치의 집착을 극복하고 자신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공성의 본질을 깨달아 걸림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에서의 최선의 윤리적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위적 지향점은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수행을 요청하고, 이 요청 속에는 계율을 제대로 지켜내는 것이 당연히 포함된다.

2) 인간의 자율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인연
서양 윤리학이 주도해온 현대 윤리학의 주된 관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윤리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인간의 개체적 고립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이기적 욕구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본주의 이론은 이전까지의 도덕 논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단지 그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 정도의 최소 도덕만을 인정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정착된 개인주의 문화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개인주의 문화는 대체로 이전의 공동체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전통적 도덕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다. 기존의 공동체적 인간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주의적인 삶의 도덕적 전제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개인주의 문화와 기존의 도덕에 대한 총체적 불신에 대해서 이진우는 '사회의 탈도덕화'와 '개인 중심의 도덕화'라는 개념으로 해석해내고자 한다. 개인화는 회피할 수 없는 현대인의 운명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현대 사회의 특징인 유동화(流動化)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진우, '도덕의 절대화는 오히려 도덕 위기를 초래한다-전통의 도덕적 엄숙주의와 미래의 개인윤리-',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새로운 우리 철학의 모색-회고와 전망],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0, 39쪽.}}

이러한 지적이 얼마나 옳은가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상당한 정도의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인주의 문화에 부합해서 작동할 수 있는 윤리는 아직 온전히 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서양 윤리학의 이기주의 윤리설이나 공리주의 윤리설, 그리고 계약론적 윤리설 등이 각 개인의 이익이나 고립성을 일정 부분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어서 일부 통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진우의 지적과 같이 사회 전반의 탈도덕화로 인한 도덕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이중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도덕에 대한 무관심은 생각 없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고, 도덕에 대한 이중적 인식은 흔히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비판받기도 하는 도덕적 엄숙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인간 존재성의 본질을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느냐, 아니면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느냐는 현대 윤리학과 정치학의 오랜 쟁점이기도 했다. 그 논쟁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공동체 또는 공동체적 자유주의 등의 절충적 시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현재 확실해진 사실 중의 하나는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공동체도 바람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공동체성을 온전히 무시하는 극단적 자유지상주의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든지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성을 그 최소한의 정도까지 인정하는 지점까지는 수렴된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어 공동체주의 윤리학자에 속하는 맥킨타이어(A. MacIntyre)는 '인간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이 독립으로 가는 열쇠이다.' 라고 강조하면서 의존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자율성과 공동체성의 연계를 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A. MacIntyre, Dependent Rational Animals-Why Human Beings need the Virtues(Illinois: Open Court Publishing Co, 1999), 85쪽.}}

이러한 현대 윤리학자들의 노력은 불교윤리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된다. 인간의 존재성을 연기와 공으로 설명하는 불교윤리의 기본 전제에서 자율성과 공동체성문제는 그 자체로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연이라는 틀은 인간을 억압하는 특정한 공동체를 설정하지 않으면서도 관계성이 곧 존재의 근원이라는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고, 동시에 각 주체가 그 연기의 법칙을 깨달을 수 있는 주체성과 독자성을 지닌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윤리는 더 나아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채택하는 이기성의 원칙이 결국 자신의 이익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귀결을 바탕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공동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관계성을 중시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미래적이다. 물론 이러한 미래적 설정은 윤리 이론 자체가 현실 사회에서 작동하게 되는 순간에 이미 그것은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서 그 사회와 문화의 맥락 속으로 들어서 있는 맥락주의적 전제를 요청한다.

불교윤리는 고대 인도사회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로 전해졌고, 현대에 들어서는 서양에까지 전해져서 일정 부분 살아 작동하고 있는 전통윤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양에 전해진 불교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찰의 한 예로 프레드릭 르누와르, 양영란 옮김, [불교와 서양의 만남], 세종서적, 2002를 들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서양의 불교를 '불교적 인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서양의 기술 발전 위주로 개가를 올려온 현대 문명의 정점에서 인간 정신의 두 극점, 즉 논리적이고 추상적이며 분석적인 면과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면의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또 외부 세계로 향한 행위와 자신의 내부로 향한 행위 간의 균형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같은 책, 319-320쪽. }}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불교윤리가 현대인의 삶이라는 맥락에서 보아도 그다지 낯설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주된 도덕적 원리로 작동했던 구조적 맥락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거리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도 중시되어야만 한다. 특히 각 문화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정착한 여러 유형의 불교에 근거한 계율의 경우 그러한 맥락의존성에 대한 관심을 더 강하게 요청할 수밖에 없다.

3. 응용윤리로서의 불교윤리: 생명복제와 유전공학 문제에 대한 불교적 입장 탐색

1) 불교윤리는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가?

응용윤리학은 현대 윤리학의 핵심 영역으로서 뿐만 아니라, 규범윤리학의 부활을 가져온 실천적 계기로서 작동함으로써 윤리학자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 또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초기의 응용윤리에 관심은 주로 기존의 윤리 이론을 현실적인 윤리 문제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모아져 있었지만, 현재의 응용윤리학자들은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면서 기존의 윤리 이론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윤리학 자체가 지니는 강한 실천적 성향 때문에 이론윤리학과 응용윤리학, 실천 윤리학을 온전히 구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초점이나 관심, 방법론의 차이를 근거로 구분짓는 일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기도 하다.

응용윤리학은 흔히 '특정한 도덕 문제의 해명을 시도하는 윤리학의 한 분야'로 정의된다.{{ A. Pieper & U. Thurnberr, Angewandte Ethik(M nchen: Verlag C. H. Beck, 1998), 10쪽.}}

특정한 도덕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윤리 이론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때로는 그것으로 규명되기 어려운 과제들이 등장할 수 있고 그럴 경우에 응용윤리학자들은 새로운 윤리 이론을 만들어내는 일에 종사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점에서 응용윤리학은 이론 의존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오늘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생명복제와 유전공학의 윤리적 쟁점의 경우도 그러한 새로운 이론의 필요성을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윤리 문제이다. 그러나 윤리 이론에서 이전의 것들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은 어렵다. 윤리 문제가 대체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들이고, 새로운 윤리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언젠가 윤리사상사에서 한번쯤 고민해 보았던 문제이거나 그와 유사한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문화적 차원이나 역사적 차원의 전환이 일어난 경우 윤리적 패러다임의 전환 차원에서 기존의 이론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주도권을 잃고 있었던 이론을 복권시켜 다시 새롭게 논의하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근대 이후의 역사적 전개 국면에서 주도권을 행사해온 윤리이론은 주로 서양 윤리학의 전통에 근거해서 시민사회의 구조에 맞게 재구성된 것들이다. 그 대표적인 근대윤리학 이론은 주지하다시피 칸트 윤리학과 공리주의 윤리설이고, 현대의 그것은 계약론적 윤리설과 담화윤리설이다. 이러한 윤리설들의 내포와 외연이 각각 다르고 그 전개 과정도 다르지만 하나 공유하고 있는 점은 인간의 이성(理性, reason, Vernunft)에 대한 깊은 의존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서양윤리학적 해석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는 온전한 세계를 따로 설정하고 그 온전함을 열망하는 실천적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세계에서 이상 세계, 즉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이상향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계산 능력으로서의 이성이다. 이 두 가지 이성 개념이 온전히 살아 있는 윤리 이론은 물론 칸트 윤리학이지만, 공리주의 윤리설이나 계약론적 윤리설의 경우에도 계산 능력으로서의 이성 개념에 깊이 의존하고 있고 담화윤리학은 인간의 의사소통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실천적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이후의 서양 윤리 이론들이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특성은 인간 중심주의이다. 인간을 윤리 문제의 중심에 두는 정도를 벗어나 대부분 인간만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인간 중심성은 도덕적 책임의 주체라는 측면에서는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도덕적 책임을 돌리는 일은 인간의 집합체인 공동체 자체의 책임을 묻는 일 외에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 이외의 주체가 도덕적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졸고, <사회윤리에 있어서 책임의 주체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4, 미간행)를 참조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윤리 문제는 이미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애완견들이 어떤 경우에는 인간보다도 더한 도덕적 배려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서양 윤리학이 주도하고 있는 현대 윤리 이론이 갖고 있는 한계는 한편으로 그 이론적 차원에서 정의적 차원의 도덕성에 대한 관심과 페미니즘 윤리학에 대한 관심, 공동체주의적 덕윤리학의 새로운 도전 등으로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전통에 근거하지 않는 새로운 윤리이론 또는 윤리학의 요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요청은 최소한 윤리 이론을 다루면서 서양적 전통에 속하는 것 이외의 것들을 어느 정도는 다루어야 한다는 압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현대의 대표적인 응용윤리학자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피터 싱어가 편집한 '윤리학의 길잡이' 시리즈에서는 윤리의 뿌리 중의 하나로 '고대 근동의 윤리'를 포함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윤리학의 전통들'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인도윤리, 불교윤리, 중국 고전 윤리, 이슬람 윤리 등을 포함시켜 논의하고 있다. 대체로 1990년대 이후에 서양윤리학계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다. 피터 싱어 엮음, 김미영 외 옮김, 《윤리의 기원과 역사》(철학과 현실사, 2004) 제 1부 및 2부 참조.}}

현대 윤리학의 주된 흐름이 한편으로는 서양 전통 이외의 것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응용윤리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불교윤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지는 셈이다. 즉 새로운 윤리 이론으로 재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고, 응용윤리 문제가 봉착하고 있는 여러 난점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응용윤리적 가능성도 주목받을 수 있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양의 불교학자들이 불교윤리를 응용윤리에 적용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들이 출간되고 있기도 하다.{{ 그 한 예로 P.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t Ethics-Foundations, Values and Issues(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불교윤리의 핵심 개념을 먼저 정리한 후에, 경제 문제와 안락사, 성 차별, 전쟁과 평화의 문제 등을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고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응용윤리로서의 불교윤리의 가능성은 이미 확인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응용의 과정에서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하는 지점이 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적되어야 하는 점은 불교윤리를 바라보는 관점들 사이에 최소한의 보편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초기불교와 선불교적 전통에서 바라보는 윤리적 관점의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 공성에 대한 자각을 전제로 하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과정에서의 선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불교적 전통에서도 계율로 대표되는 윤리성에 대한 최소한의 중시는 필수적이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국 불교의 경우 이러한 최소한의 중시는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문제라고 판단된다. 다만 그 계율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마음으로 지키는 내면적 준수를 강조해온 원효적 전통을 되살려 현대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윤리의 응용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하는 지점은 경전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특히 율장의 경우에는 그 시대의 상황과 석가모니 부처가 고려한 각자의 상황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의식될 필요가 있다. 율장의 결집 과정, 특히 2차 결집의 과정에서 이미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백 년경에 바이살리 성에서 이루어진 2차 결집의 동기는 1차 결집과 마찬가지로 계율의 문란을 예방하는데 있었다. 불타가 제정한 계율이 지나치게 세밀하거나 번잡하여 실행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상황에서 석가모니 부처 스스로 '교단 화합을 위해서는 소소한 계를 버려도 좋다.'고 말했다는 아난다 존자의 전언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결집이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경전은 《장아함경》 《유행경(遊行經)》인데, 여기서는 이지관, 앞의 책, 31-32쪽에서 재인용했다.}}

이러한 율장 결집의 역사는 일정하게 상황적 추론의 가능성과 함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장치로 해석될 수 있다. 율장의 자구 하나하나에 의존하여 그 범위 안에서의 응용만을 허용하는 원전주의의 입장이 지니는 장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적 상황 변화를 고려하는 상황적 추론을 이미 석가모니 부처가 허용하고 있음을 감안하여 보다 개방적이고 진전된 응용의 자세가 보다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물론 원전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불교적 또는 불교윤리적이라고 말하는 정도의 차원은 넘어서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졸고, <원전주의와 상황적 추론의 변증법>(가산학회, [가산학보] 8호, 1999) 124-130쪽 참조. }}

2) 생명의 본질과 인간 개입의 정당화 문제
현대사회는 시민의 사회이다. 이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시민윤리는 이전의 최대 도덕이 아닌 시민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의 도덕이다. 이 최소 도덕의 핵심은 경쟁의 공정성(Justice)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Care)이다. 우리 사회도 이미 대부분의 영역에서 시민사회적 속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현실적 맥락을 고려하는 윤리학적 논의라면 이러한 시민사회적 구조와 속성을 일단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윤리의 구체적 내용을 이루는 계율 중에서 현대 시민사회에 온전히 들어맞는 계율을 찾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아라한이나 보살을 전제로 하고 그가 스스로 준수하는 계율을 보살계 등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최소 도덕의 범주가 아니라 최대 도덕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대 도덕 적용의 난점에 대해서는 졸고, <보살과 선비, 그리고 우리 시대의 시민>(한국시민교육학회, 《시민교육》 창간호, 2004. 8) 참조.}}

그러나 시민사회가 더 이상 최소 도덕으로 유지되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나 미래의 비전을 위해서는 최대 도덕 논의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시각을 감안하면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윤리적 논의의 맥락에 충분히 유의하면서 전개해야할 필요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생명 복제와 유전자 조작 등의 유전공학의 발달이 가져온 윤리적 쟁점들을 불교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를 정리한 후에 그 생명의 차원에 인간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불교의 생명관에 관한 이해는 그다지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기본적인 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면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생명에 관한 현상적 이해의 배경에 담겨져 있는 당위의 영역, 즉 윤리적 계기를 생명 복제나 유전자 조작 등의 생명공학의 차원으로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있다.

우선 불교의 생명관을 먼저 정리해 보도록 하자. 불교의 생명관은 생명의 본질적 속성을 공과 깨달음의 가능성으로 규정하는 불성론(佛性論)과 각 생명의 외면적 층차를 설명하는 업설(業說)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두 설명은 모두 연기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초기불교의 입장은 분명하다. 12연기설이 그것인데, 무명(無明)에서 행(行)이 발생하고 행에 의해 개체가 발생하면 식(識)이 생기고 식을 연하여 명색(明色)이 있게 된다.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고 그것은 촉(觸)으로 이어지며 다시 수(受)와 애(愛), 취(取)로 이어지며 드디어 유(有, bhava)가 생기고 이 유가 바로 생사하는 존재자 자체를 의미한다. 이 유에 연하여 자연스럽게 생(生, j ti)이 나타나고 생한 것은 반드시 늙고 병들어 죽고, 그에 따른 고통과 슬픔을 감내해야 하는 연기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12연기설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정확한 설명으로 여기서는 고익진의 것을 택했다.(고익진, [불교의 체계적 이해], 새터, 1998, 44-46쪽 참조.)}}

12연기설에서 생명의 등장 과정이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고 인간의 생명도 우선적으로 그와 같은 생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생명이 이런 과정을 겪어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생명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업설에 의해 설명이 가능해진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생명은 업보 그 자체이기도 하고 동시에 과정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이중표는 생명을 업의 관점에서 이해하여 '생명이란 업보의 과정 내지는 삶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이중표, '불교의 생명관', 범한철학회, [범한철학], 20집, 1999, 242쪽.)}}

자신이 누세에 걸쳐서 쌓은 업에 따라서 각각 다른 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거주하는 세계는 욕계와 색계, 무색계 등의 세 개의 층으로 나뉘는데 인간은 그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인 욕계에 존재하는 생명으로 앞으로의 업의 의해 이후의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그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자신을 얽매이고 있는 인연의 법칙을 깨달아 그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불교적 세계관의 핵심 내용이다.

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불교적 생명윤리관을 끌어낸다면 생명의 복제나 유전자 조작과 같은 인위적인 생명 관련 행위는 각각의 생명이 갖는 인연과 업보의 과정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것이라고 일단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또 다른 업을 쌓는 것이 되고, 그 업이 선업인지 악업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작업이 불교윤리의 핵심 쟁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율장의 어딘가에 이런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면 문제 해결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현대 과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차원의 것들이어서 단순한 대입을 통한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주로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행위들에 대한 결과적 규제인 사분율 보다는 대중적인 포용성이 더 넓은 보살계로부터의 상황적 추론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보살계는 원효의 표현과 같이 '큰 율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삿됨을 버리고 바른 것을 얻는 핵심적인 문'이다.{{ "菩薩戒者 返流歸源之大律 去邪就正之要門也" (원효,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範要記)], 한불전 권1, 581쪽 상.)}}

이러한 보살계 중에서 신라 시대 이후로 우리 민중들의 삶을 규제하는 도덕 원리로 정착한 것이 바로 오계(五戒)이며, 그 각각은 살생과 도둑질, 음란한 행위, 함부로 하는 말을 금하는 본래적인 계(性戒)와 음주하지 말라는 방어적 계(遮戒)로 다시 나뉜다. 그런데 음주와 관련된 계에 대해서는 범망경 주석서를 남긴 원효와 승장, 의적, 태현 등이 모두 약으로 술을 마시는 경우는 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융통성 있는 주석을 달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최원식, [신라보살계사상사 연구], 민족사, 1999, 241-242쪽.}}

그 중에서 원효는 불음주계의 구체적인 적용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준을 술을 파는 경우를 상정하여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첫째는 오직 복이 될 뿐 죄가 되지 않는 경우인데, 중생의 근기에 통달한 달기보살이 술을 파는 경우이다. 둘째는 죄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복도 되지 않는 경우인데, 약으로 쓰기 위해 술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파는 경우이다. 값을 받았기 때문에 복될 것도 없지만 약에 쓰기 위한 것이므로 죄가 될 것도 없다. 셋째는 가벼울 뿐 무겁지는 않은 경우로 다른 물건을 팔면서 술을 끼워 파는 것이고, 넷째는 매우 무거운 죄가 되는 경우로 진짜 술을 파는 경우이다.{{ "一唯福非罪 達機菩薩 二非罪非福 謂爲藥作酒 與他人取價 取價故非福 藥酒故非罪 三者唯輕非重 此我中兼立似酒等 四者唯淫非輕 此戒中正所立眞酒等" (원효, [梵網經菩薩戒本私記 券上], 한불전 권1, 600쪽 중-하.) }}

동일한 계일지라도 구체적인 적용 상황으로 넘어오면 이와 같은 네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원효의 시대가 아닌 현대 한국의 경우에는 그 이상의 경우를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불음주계의 적용 사례에서 우리가 유추해낼 수 있는 윤리학적 의미는 계를 지키는 중심은 마음에 있고 상황에 따라 계를 어겼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서 계를 지키고자 노력했다면 최소한 그 책임이 경감될 수 있다는, '마음의 윤리'이다. 물론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일정한 영역에서는 외적인 준수의 필요성이 남아 있겠지만 그럼에도 깨달음의 지향이라는 계의 본래적 의미에 유의하면서 마음으로 계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자세는 관습적 도덕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윤리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윤리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지속적인 자세와 태도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그것은 깨달음의 과정에서 지녀야 하는 덕, 즉 '깨달음의 덕'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해볼 수 있다. 결국 불교윤리의 핵심은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전제로 해서 외적인 수준의 타율적인 율과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부여하는 자율적인 계를 지키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자신의 품성 속에 내면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깨달음의 덕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윤리 이해를 생명공학의 문제에 적용하는 문제는 불교 응용윤리의 새로운 과제이고 또 핵심적인 과제임에 틀림없다. 생명에 대한 불교적 이해, 즉 인연의 산물로서의 생명과 연기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초월할 수 있는 불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생명이라는 생명관에 토대를 두고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행위가 어떤 업을 가져올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는 실천 행위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그것은 단순히 관련된 사람들과 국가의 이익을 계산하는 공리주의적 차원을 넘어서서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 이익을 고려하는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태도여야 한다. 또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생명의 독자적인 존엄성만을 강조하는 유일신의 창조물로서의 생명관이 지니는 고립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했던 많은 보살들의 살신성인이 오늘날 과학자들의 이익추구와 관행적 연구 자세에 대한 큰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동일한 행동처럼 위장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모든 인연 속의 생명과 존재들에게 곧바로 이어지는 행동일 수밖에 없다는 연기적 사고에 근거한 행위와는 근원적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는 복제 인간이 출현시키는데 기여하는 과학자들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우선 그 과정에서의 수많은 생명 살상 가능성과 자연스런 인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악업의 가능성 여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복제 인간이 출현한 경우에는 어떤 과정을 거쳤든지 그 인간에게도 동일한 불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교리적 근거를 고려하면서 이루어져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을 보다 심각한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그 때의 윤리적 관점 중에서 인연과 업, 생명 자체의 소중함을 중시하는 보살계 중심의 불교윤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박병기(朴柄基)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전주교대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을 수료한 후 현재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으로 있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윤리학과 도덕교육1,2] 등이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