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동-서 비교철학, 특히 불교와 서양철학의 비교철학적 접근이 시작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지난 수세기 서구철학의 주류를 이루어온 형이상학적 전통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형이상학적 전통과 마찰을 일으켜온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좀더 서로에게 다가서게 되었다고 보고, 그 비교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동-서 간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학자들에 의해 동-서 비교철학의 지평은 꾸준히 넓혀져 왔다.

그 동안 비교 사상을 통한 동-서간의 대화의 시도는 계속적으로 증가 추세를 보여 왔다. 이제 불교와 해체철학의 비교, 나아가 불교와 서양 철학과의 비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낯선 주제가 아니다.

이 글은 불교와 서구의 본격적 만남이 시작된 시기인 19세기의 근대 유럽정신과 불교의 만남의 내적 구조를 살펴보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다. 19세기 이전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불교가 서구사회에 간헐적으로 전해지기는 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고 불교학이 성립되지도 못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 지성은 불교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럽 학자들의 불교해석은 타자에 대한 서구의 불신임을 반영한다. 그 불신임의 근저에 당시 유럽의 정치, 사회, 사상적 배경이 존재함은 물론이다. 식민지 지배자인 유럽과 식민지의 종교·철학인 불교의 만남, 근대의 '생각하는 자아'와 불교의 무아의 만남, 그리고 유럽의 형이상학적 전통과 불교의 반형이상학적 태도의 대비를 통해 불교와 서구가 만나는 모습과 그 성격을 살펴본다.

2. 불교와 근대 유럽의 합리주의

{불교와 서양의 해후}(1952)의 저자 앙리 드 루벡은 1800년대 유럽에 등장하는 불교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서구인들에게는 거의 불식간에, 동양의 위대한 종교가 드디어 구름 밖으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고 묘사하고 있다.{{) Henri de Lubac, La rencontre du bouddhisme et de l'Occident, Paris: ditions Montaigne, 1952, p.151.}}

루벡은 이어 오거스트 드샹 수도원장의 말을 빌어 "불교가, 우리시대를 규정짓는 탐구정신과의 최초의 만남에 있어서, 그 심연과 같은 무정체성과 오랫동안의 침묵 속에서 얼마나 급작스럽게 나타났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Henri de Lubac, 앞의 책, p. 151.}}

유사한 맥락에서 유럽 지성 앞에 돌연히 그 모습을 나타낸 불교의 모습을 {서구의 깨침(The Awakening of the West)}(1994)의 저자 스티븐 베처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40년까지 부처는 인도의 신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신화적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고는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부처는 예수와 놀랄 정도로 유사성을 지닌 역사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와 더불어 교회는 당시에 자체 내에서 자라나고 있는 교회에 대한 불신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온 이 완벽한 적수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Stephen Batchelor, The Awakening of the West, Berkeley: Parallax Press, 1994, p. 244.}}

유럽세계에 불교가 등장한 모습은 드샹이나 베처러가 묘사한 것만큼 그렇게 극적이지만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가 유럽 학계에서 동양과 불교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시기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유럽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의 뒷면에는 당시 유럽세계의 역사적 정신사적 상황이 놓여 있다. 유럽의 근대는 인간의 발견으로 시작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7)이라는 미술품이 상징적으로 암시하듯이, 인간의 육체에 대한 탐미만큼이나 강렬한 인간의 정신에 대한 탐구심은 인간의 이성을 인간정신사의 중심에 심어 놓으면서 이성주의에 입각한 계몽주의 철학을 탄생시킨다. 이와 더불어 중세 철학의 주요 주제였던 신의 논쟁이 철학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과학의 등장과 더불어 교회의 종교적 권위 역시 약화된다. 여기에서 비롯된 힘의 공백은 유럽의 종교-사상계에 비기독교적 전통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베처러는 '이성주의적 계몽주의의 등장, 종교적 권위의 쇠퇴, 그리고 식민지주의의 강화'라는 상황을 19세기 유럽에 불교학이 탄생하게 된 주된 배경으로 지적하고 있다.{{) Stephen Batchelor, The Awakening of the West, p. 231.}}

이것은 또한 드샹이 "우리시대를 규정짓는 탐구정신"이라고 표현한 19세기 유럽의 지적 상황이기도 하다. 계몽주의와 근대화 작업의 주요 요소인 합리주의는 유럽의 불교학 형성에 이중적인 상황을 형성했다. 기독교의 권위가 과학과 합리주의의 영향하에서 위축되면서 학문의 다원화가 가능해지고, 기독교 이외의 종교처럼 전통적으로는 금기시되었던 학문 분야도 이성적 탐구의 대상이라는 명목으로 허락되었다. 따라서 이성주의(혹은 합리주의)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가 학문적 연구의 분야로 인정받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경향은 제 1세대 유럽 불교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한 예로 당시 유럽 불교학의 권위자였던 유진 버노프(1801-1852)의 공적을 "불교를 유럽의 과학적 지식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앞의 책, p. 242.}}

불교를 과학적 지식의 대상일 수 있게 한 요인 중의 하나는, 불교의 언어인 산스크리트가 유럽의 언어와 동일한 군에 속한다는 것을 윌리암 존스(1746-1794)가 암시함으로써 본격화된 불교의 문헌학적 연구였다.
윌리암 존스는 1783년에 당시 새로 형성된 벵갈의 대영제국 정부의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1784년에 존스는 벵갈 동양학회를 창립해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한다.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인도로 가기 전에 이미 다양한 유럽어뿐만 아니라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그리고 약간의 중국어 지식까지 갖고 있었던 존스는, 동양의 언어가 모두 희랍어에서 파생된 언어라는 18세기 유럽언어학계의 주장을 깨뜨리고, 페르시아어는 희랍어가 아니라 유럽언어와 그 조상이 같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A. L. Basham, The Wonder that Was India. Third Revised Version (1967), New Delhi: Rupa & Co., 2001, p. 5}}

그는 당시 동인도회사의 벵갈 지역 경영자였던 차알스 윌킨스(1749-1836)를 만난다. 윌킨스는 산스크리트에 뛰어났고, 1784년 11월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의 최초 영역본을 완성한다. 이후 윌킨스는 주요 인도 고전을 산스크리트에서 영어로 번역해 내었고, 이를 계기로 산스크리트 연구와 인도학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간다.

산스크리트와 유럽언어가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존스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비교문헌학은 유럽에서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 영향하에서 시작되는 유럽의 불교학은 철저한 문헌학적 연구의 성격을 보이게 된다. 이처럼 유럽 불교학은 당시 유럽 지성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학문의 방법론이 백분 발휘되면서 시작된다.

또한 과학성과 합리주의는 식민지인 동양에 대비되는 유럽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유럽 자신을 질서와 이성으로 규정짓는 반면, 유럽의 타자 즉 식민지인 동양은 혼돈과 비이성의 세계로 투영하였기 때문이다. 베처러가 말하듯, 이들 유럽 지성에게 동양은 "모든 어둡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 여성적이고, 관능적이고, 억압된, 그러면서 언젠가 폭발할 것 것은 서구 무의식의 암호"처럼 표현되어졌고,{{) Stephen Batchelor, The Awakening of the West, p. 234.}} 그러한 동양의 종교와 철학은 유럽인에게 비유럽 문화의 열등하고 불합리한 것이었다.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은 이성을 통해 미신과 신화적 사고에 갇혀 있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해방의 논리를 펴고 있었다. 동일한 견지에서 유럽인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유럽이 언어학적 분석과 문헌의 영구를 통해 불교를 이성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혼돈스럽고 비합리적인 불교를 교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교 서적의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유럽의 불교학이 시작은 되었지만, 유럽인들이 공감하기에는 불교는 너무도 비유럽적이고 비형이상학적이었다.

1세대 유럽불교학자들에게 불교는 '끔찍한' 종교였다.{{) Guy Richard Welbon, The Buddhist Nirvana and its Western Interpreter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8, p. 73.}}

유진 버노프는 불교의 궁극을 니르바나(涅槃)로 보고 니르바나를 'utter annihilation(완전한 滅絶)'이라고 번역했다.{{) See Andrew P. Tuck, "Nineteenth-Century German Idealism and Its Effect on Second-Century Indian Buddhism," Comparative Philosophy and the Philosophy of Scholarship: On the Western Interpretation of Nagarjun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pp. 31-53.}}

그에게 불교는 '최고의 존재, 혹은 공으로의 흡수에 의해 개인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즉, "열반은 개인의 존재상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완전한 멸절"이라고 버노프는 말한다.{{) Eug ne Burnouf, Papier d'Egu ne Burnouf conserv s la Biblioth que Nationale, Paris: np, 1899. Guy Richard Welbon, The Buddhist Nirvana and its Western Interpreters, p. 62에서 재인용.}}

버노프의 학생이었던 막스 뮬러(1823-1900) 역시 열반과 주체의 전적인 사라짐을 동일시한 그의 스승의 해석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에서의 열반의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버노프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즉, 불교의 최종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善)은 완전한 무(無)[absolute nothingness]이다."{{) William Peiris, The Western Contribution to Buddhism, Delhi, India: Motilal Banarsidass, 1973, p167-8.}}

여기서 우리는 유럽 불교학자들이 말하는 '개인의 사라짐', '공(空)', '무(無)'의 개념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나 '무아(無我)'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바차(婆蹉)의 '나'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은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흔히 『유아경(有我經)』이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에서 바차는 불교의 무아의 개념에 의심을 품고 붓다에게 묻는다.

"어떻습니까? 세존이시여, '나'라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붓다는 침묵을 지킨다. 바차는 세 차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붓다는 계속 침묵을 지킬 뿐이다. 붓다의 침묵에 실망한 바차는 붓다가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려고 한다. 이때 붓다의 곁에 있던 아난다가 부처에게 묻는다.

"세존이시여, 바차가 세 번이나 질문하였는데, 세존께서는 어찌 답하지 않으십니까? 저 바차가 삿된 견해를 증가시켜 사문(沙門)께서 자신의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에 대해 붓다는 답한다.

"만일 내가 '나' 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차가 원래 가지고 있던 그릇된 견해를 증가시키는 일일 것이다. 만일 내가 '나'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원래 있던 '나'가 이제 와서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니 그의 의심에 의심을 더하게 하지 않겠는가? 만일 '나'가 원래 있었다고 하면 이는 상견(常見)이 되고, '나'가 이제 단멸 되었다고 하면 이는 단견(斷見)이 될 것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떠나 중간에 서서 법을 설한다. 즉,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 이 일이 일어나기에 저 일이 생겨난다."{{) {雜阿含經}, {大正新修大藏經} vol. 2, no. 99, p. 245b.}}

여기서 우리는 19세기 유럽불교학자들이 붓다가 단견이라고 말한 '나'의 단멸이라는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지난 이천 년 동안 유럽의 사고를 지배해온 실체론적(實體論的) 입장의 철학체계를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구 철학은 세계의 궁극적 근원에 영원불변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 즉 인간 존재와 우주, 나아가 인간의 지식, 도덕성의 근원이 궁극적 실체에 기인한다는 명제 하에 철학적 사고를 전개시켜 왔다. 따라서 '나'의 존재 역시 변하지 않는 '실체'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러한 나는 [유아경]의 바차가 생각한 것처럼 '있거나' 아니면 '없는' 것이지, 붓다가 말한 것처럼 타자에 기대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수는 없다.

이에 비해 불교는 붓다의 '중도적(中道的)' 설명에서 보듯이 비실체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종교이며 사상이다. 즉 A의 존재는 A의 독자적 실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타자 즉 A가 아닌 것으로 형성될 뿐 아니라, A와 A가 아닌 것의 관계를 연기로 보는 면에서 사실상 A와 A가 아닌 것의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간략한 비교만으로도 19세기 유럽인들이 왜 불교가 '끔찍한' 종교이며 비도덕적 종교라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불교가 유럽인에게 '끔찍한' 종교인 이유는 불교 자체에 기인한다기보다 유럽 사상과 불교 사상체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사고 양식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전체를 통해 유럽 대륙으로 이식된 불교는 당시 유럽 철학계를 지배했던 형이상학적 전통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비교철학과 학문의 철학: 용수에 대한 서구의 해석에 대하여}에서 앤드류 턱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 불교학자의 '절멸(annihilation)', '소멸(extinction)', 또는 '허무주의(nihilism)' 같은 표현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강박관념과 존재론적 문제를 간과하는 사상체계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나타낸다. 버노프의 주요 관심은 개인이 궁극적으로 존재의 초월적 근원 안으로 흡수되느냐 아니면 열반에서 소멸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버노프 이후의 모든 학자들에게 불교가 말하는 열반은 사실상 무(無)라는 것, 즉 현상의 장막 뒤에는 어떠한 존재의 영역도 있지 않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고, 이는 유럽인들이 불교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버노프, 셍-힐레어, 그리고 뮬러는 불교에서 개인의 절멸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칸트가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ego)'라고 부른 것의 부정이며, 헤겔의 '절대정신(Geist)'의 부정이었다.{{) Andrew P. Tuck, Comparative Philosophy and the Philosophy of Scholarship: On the Western Interpretation of Nagarjuna, p. 35.}}

유럽 대륙 지성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당시 유럽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유럽 대륙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영국, 그리고 미국에 불교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형이상학적 철학전통에서 불교를 본 유럽인들이 불교에서 자아(혹은 무아) 개념과 초월적 현실(혹은 열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면, 영국의 학자들은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의 종교사회학적 의미에 관심을 보였고, 북미 대륙에서는 불교가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 종교인가 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필립 알몬드는 {영국의 불교의 발견}에서 18세기말 19세초에 영국에 불교가 소개되었을 때 영국 사회의 반응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불교의 창시자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영국 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반응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들은 붓다를 힌두교의 한 신이라고 보기도하고, 마틴 루터같은 종교 개혁가로 규정짓기도 하고, 또한 카스트제도의 계급사회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붓다를 칼 맑스와 같은 혁명가로 보기도 한다. 영국인들이 이처럼 붓다의 정체성에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의 사회적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다. 알몬드가 말하듯, "역사적 존재로 붓다가 서구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1850년대는 영국에서는 천주교에 반대하는 세력이 특히 맹렬했던 시기"였다.{{) Philip Almond, The British Discovery of Buddhism,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p. 73.}}

그런 상황에서 붓다를 종교개혁가 혹은 사회적 혁명가로 투사하는 것은 일정한 사회 정치적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고 판단한 영국인들은 '붓다는 이상적인 빅토리아 사회의 신사'라는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내린다.{{) Philip Almond, 앞의 책, p. 79.}}

영국인들은 붓다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질 중에서 '자비'와 '공감'이 가장 소중하다고 자신들의 결론을 방어한다.

북미 대륙의 상황은 또한 유럽 대륙이나 영국에서의 그것과 다르다. [서구에서의 선(禪): 1893년 종교 회의의 역사적, 철학적 의미]라는 글에서 레리 페이더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국제 종교회의에서 선불교가 미국에 공식적으로 입국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당시 미국학자들은 그때까지 유럽에서 거론되었던 불교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당시 미국인에게 '이교도'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진 불교에 대해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페이더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시카고 국제 종교회의 이후 미국학자들 사이의 '불교에 관한 논란'은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불교는 과학적 발전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불교는 이성적 종교로,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에 적격이라는 것이다.{{) Larry A. Fader, "Zen in the West: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Implications of the 1893 Parliament of Religions," The Eastern Buddhist, vol. 15, no. 1 (Spring 1982): 122-145. }}

1893년 이후 선불교가 서서히 이기는 하지만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배경에는, 미국에서는 유럽 대륙에서처럼 불교학자와 철학자들이 불교의 사상과 갈등을 일으킨 형이상학적 전통의 짐을 지고 있지 않았고, 영국의 국교회와 같은 종교적 상황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개인의 이민의 경우처럼 종교와 사상의 이민에서도 유럽에서보다는 신대륙 쪽에서 더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3. 데카르트적 자아와 멸절의 불교

19세기 유럽지성이 불교에 대해 느낀 거리감의 중심에 데카르트적인 근대 서구 자아 개념의 유산이 자리 잡고 있다. 유럽사상의 근대는 신의 자리를 빼앗은 인간이 '생각하는 자아'라는 형태로 재탄생 되면서 시작된다. 이 맥락에서 르네 데카르트(1596-1650)의 {방법서설(方法 說)} (1637)과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省察)}(1641)은 인간 사고의 판단의 근거가 신에게서 인간으로 이동되면서 형성되는 근대적 인간의 탄생 과정을 보여준다.

이전까지의 종교적 권위, 기존 질서와 가치관에 대한 총체적 비판으로 시작된 근대의 문턱에서 데카르트는 이 비판정신을 십분 발휘하여,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존재의 근거에 대한 부정과 회의로 그의 철학을 시작한다. 회의에 의한 부정은 물론 그 회의를 넘어서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그의 탐구를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근본 원칙을 찾는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 데카르트는 스스로 구 년 동안의 지적 망명을 시도하며, 이 시간 동안 유럽을 떠돌면서 인간사의 여러 면을 관조하게 된다. 이처럼 삶에 대해 중립을 지키면서 데카르트는 최소한의 의심이라도 야기 시킬 수 있는 모든 사고를 제거하고, 회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회의를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존재의 흔들 수 없는 확실한 근거에 도달했다고 믿게 되는데, 그 근거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생각'이었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내가 전에 증명을 위해 취했던 모든 논거를 거짓으로 보고 부정하였다. (중략) 그렇게 한 후 곧, 내가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부정하고자 해도,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나는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바로 이 진리는 너무도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기에 어느 회의론자가 얼마나 기발하게 추론을 해도 이 진리를 흔들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나는 이를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내가 지금까지 찾아온 철학의 제 일의 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Ren Descartes, Discourse on the Method, bilingual edition, trans. George Heffernan,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4, p. 47.}}

{방법서설}에 이어 {성찰}에서도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의 확실성을 자신이 '생각한다'는 점으로 정의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도 자신은 회의하고 있으며 따라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곧, '생각함' 자체가 자신의 존재의 근거이며 성격이라는 말이 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생각하는 것은 존재한다. 이 점은 결코 나로부터 분리되어 질 수 없는 점이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분명한가? 내가 생각을 하는 동안은 분명하다.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동시에 존재하기도 멈추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바로 '생각함' 그 자체이다."{{) Ren Descartes,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trans. Donald A. Cress,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93, p. 19.}}

생각하는 주체의 확실성을 스스로 확인한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의 확실성에 근거해 같은 방법을 통해 육체적 존재와는 분리해서 존재하는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낸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그 본질이 사고함에 있는 실체다. 나의 실체는 존재하기 위하여 어떤 장소, 혹은 어떤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나', 즉 '내'가 '나'이게 하는 영혼은 육체와는 전적으로 구분되며, 육체보다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이 육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혼은 영혼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Ren Descartes, Discourse on the Method, p. 53.}}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자신이 사고하는 존재라는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한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 증명 역시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신의 관점은 신 자신에 그 원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며, 이것이 그의 신의 존재 증명이다.{{) Ren Descartes,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p. 9.}}

신의 존재에 대해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매우 분명하고 명확히 인지하는 것은 신이 있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은 완벽한 존재이며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왔다는 그 이유로만이 확인될 수 있다."{{) Ren Descartes, Discourse on the Method, pp. 57-59.}}

데카르트의 논리는 이렇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한자인 신이 유한자인 인간에게 그 개념을 심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 즉 무한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고의 아이러니는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 존재의 기반인 신을 '생각하는 자아'의 부산물로 창조해 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신은 사고하는 자아를 지켜주는 자로 전락한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동시대인이었던 철학자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의 전 철학 체계는 신 없이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바로 그 한번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신에게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는 신은 데카르트에게는 더 이상 아무 소용도 없었다."{{) Blaise Pascal, Pens es, trans. A. J. Krailsheimer, Penguin Books, 1966, p. 355.}}

이처럼 간단한 데카르트적 자아 개념의 개관에서도 우리는 왜 불교가 19세기 유럽인에게 쉽게 이해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다. 불교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으면서 학문의 한 분야로 시작을 했어도, 유럽인들에게 불교가 진정으로 이해되어지기에는 정치-사회 역사적 상황과 더불어 철학적 문제가 가로 놓여있었다.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식민지의 종교인 불교는 제국주의 유럽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고,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데카르트적인 '사고하는 주체'가 세계와 존재의 이해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 중심적 관념론이 지배하는 사상체계에서 불교의 무아의 세계는 인정될 수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궁극은 결국 존재의 소멸, 나아가 절멸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소멸시키는 종교는 자살의 종교이며, '끔찍한' 종교이다.

그러나 19세기 유럽 불교학자들이 주장한 불교의 절멸이론이 '끔찍한' 것은 불교철학의 성격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유럽인들이 형이상학의 잣대로 불교를 판단했다는 증거라는 턱의 지적은 불교와 서구의 만남의 적절한 평가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유럽의 형이상학적 맥락과 불교의 근본 철학이 이처럼 대립적 입장에 있다면, 존재와 세계에 대한 서구의 사고 양식과 불교사이의 차이를 해결할 방법은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동-서 대화는 여기에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는 것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불교의 태도를 살펴보자.

4. 유럽의 형이상학과 불교의 반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무제(無題)의 저서에 기원전 1세기 철학자가 제목을 단 것으로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는 '형이상학'이라는 단어는 이후 이천여 년 동안 서구 철학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형이상학(形而上學)은 말 그대로 현상계/형상계 너머의 세계를 다루는 철학이었다. 그 너머의 세계(meta-physics)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시대에 따라, 철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형이상학이 우리의 세계와 존재의 근원에 영원불변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 근원의 체계를 밝히고자 한다는 데서는 유사점을 지닌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불교철학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초월의 세계에 대한 추구를 배제하는 철학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불교의 형이상학적 담론의 거부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예로 자주 쓰이는 것이 {중아함경 (中阿含經)} [전유경 (箭喩經)]에 나오는 만동자와 붓다의 대화,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독화살 비유다.

만동자는 "세존께서는 세상은 항상됨(常)이 있는가, 항상됨이 없는가. 세상은 한정(底)이 있는가, 한정이 없는가. 목숨은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라는 이러한 소견들은 다 제쳐 두시고 전연 말씀하지 않으신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으며, 그것을 허용할 수 없다."{{) {中阿含經}, {大正新修大藏經}, vol. 1, no. 26, p. 804a}}고 생각한다.

만동자는 마침내 붓다에게 가서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을 말하고, 붓다가 세계의 유무한성, 목숨과 신체의 관계, 그리고 여래의 영원성 등에 관해 분명한 답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 {방법서설}과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 자신이 결코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존재의 근본의 세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로 '생각하는 존재'로써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며, 둘째로 이 존재는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로 이 존재의 근원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주관성, 이성주의, 그리고 이들의 근원으로써 신의 존재의 증명은 데카르트에게는 인간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증명이었으며 동시에, 인간 지식의 객관성, 명증성의 증명이기도 했다.

붓다의 시대에 데카르트였을 만동자 역시 데카르트처럼 존재의 분명한 근원을 알기를 원했고, 붓다가 이를 확인해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만동자의 이와 같은 도전적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은 데카르트적 존재 정의의 정 반대에 불교를 놓는다.

붓다는 묻는다.

"만동자여, 내가 이전에 혹 너를 위하여 세상은 항상됨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너는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는가?" 만동자는 물론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 붓다는 잘 알려진 독화살의 비유를 든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화살을 뽑아 생명을 건지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화살을 뽑기 전에, 화살을 쏜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 혹은 화살이 만들어진 나무의 종류에 대해서, 또는 화살촉의 제재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의 생명을 건지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영원하든 그렇지 않든, 목숨과 신체가 동일하든 안 하든, 그리고 심지어 여래가 무한하든 유한하든, 그 질문의 답과 상관없이 인간은 태어나서 고통 속에서 살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고, 슬픔과 울음, 근심, 번뇌를 겪고, 이렇게 하여 순전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중략)고 말하는 자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고, 슬픔과 울음, 근심, 번뇌를 겪고, 이렇게 하여 순전한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기느니라."{{) {中阿含經}, {大藏經}, vol. 1 no. 26, p. 805b.}}

만동자와 붓다의 이 대화는 흔히 불교는 형이상학적 담론, 그리고 이론화나 논리적 설명을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고 보고, 논리와 이론의 우회를 거부하고 직접적으로 삶의 고통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행을 통해 열반으로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고 말해져 왔다. 철학적 담론, 언어적 이론화에 대한 불신은 선불교에 오면 그 모습을 더 분명히 한다고까지 주장되어 왔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담론과 부처와 만동자의 대화를 대비시키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불교가 형이상학적 논의를 불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는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붓다는 영혼, 우주,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 죽음의 의미와 사후의 문제 등의 질문에 대해 표면적으로 대답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러나 불교는 정말 이들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가?

사실상 불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무아'의 이론은 영혼에 대한,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불교적 설명이며, 불교의 '연기'의 이론은 우주와 세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불교적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한 불교적 해석이다. 다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탐구심을 발동시킨 만동자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단지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인간 삶의 현실을 지적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말했을 뿐이지만, 이 사성제 자체가 사실은 만동자의 질문에 대한 불교적 답인 것이다.

붓다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형이상학적 문제라고 불리는 문제들이 불교와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교수행의 '전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서구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적 근원의 탐구를 인간존재와 세계 이해에 대한 근본, 시발점이라고 보았고, 형이상학적 문제의 탐구는 철학함에서 우선 순위 일위라는 특권을 누려왔지만,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형이상학적 문제가 꼭 인간과 세계 이해의 근간일 필요도 없고, 삶과 존재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특권을 누릴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분명 붓다는 형이상학자라기 보다는 실용주의자였다. 붓다가 가르치는 고집멸도의 사성제는 인간이 어떻게 현실을 살아야하는가 하는 인간 존재 현실 내에서 가장 실용적인 문제를 다루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형이상학이 없는가, 아니면 실용주의는 형이상학을 간과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실용주의 철학은 형이상학이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에 대해 반형이상학적 태도를 취한다. 불교의 입장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불교는 형이상학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입장이 반형이상학적일 뿐이다. 자아의 존재를 유무(有無)로 규정하는 것 둘 다를 한계로 보았던 것처럼 붓다에게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답 역시,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하면 상견(常見)일 것이고, 없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는 이후 근대 서구 철학에서 칸트의 초월적 자아, 헤겔의 절대정신 등으로 전개된다. 이들은 모두 [전유경]의 만동자처럼, 혹은 [유아경]의 바차처럼 존재와 세계의 근원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에서 시작하여, 그 갈망에 대한 답으로 삶의 근원에 존재하는 실체의 구조를 밝혀내고자 했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불교와 유럽 근대철학의 차이의 근저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내용'만큼, 그 주제를 접하는 '태도'가 철학하기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태도'라고 부른 것은 철학적 탐구를 행하는 데 있어서 철학자 혹은 개인이 유지하는 기본적 가정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데카르트를 '생각하는 자아'의 창조자로 만들고, 그로 인해 그 이후 삼백여 년 동안 유럽 형이상학이 데카르트적 자아에 근거해 철학을 전개해 온 것은 사실상 그의 논리의 명증성이나 확실성에 근거한 것만은 아니다.

데카르트 자신은 나름대로 모든 회의를 거쳐서 얻었다고 하는 그가 제시한 '나'의 존재 증명, 영혼의 불멸성, 그리고 신의 존재 증명은 그가 주장하는 것만큼 분명하지도 않고, 논리적인 것도 아니다. {방법서설}과 {성찰}을 읽으면서, 그의 논리를 수긍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철학에 대한 입장에 따라 데카르트의 논리에 모순이 있으며, 데카르트가 결국 인간, 영혼, 신의 존재 중 어느 것도 증명해 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를 데카르트로 만드는 것은 따라서 그의 철학의 '내용'만큼, 그 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기인한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를 밝히겠다는 그의 의지와 욕망은 데카르트에게 자신의 논리의 모순을 덮고 생각하는 자아를 존재의 근거로 밝히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만동자는 자신의 질문에 반드시 답을 찾겠다는 욕망을 데카르트와 공유한다. 어떠한 질문이 이러한 욕망에 근거해서 제시되었을 때, 질문을 한 자는 이미 자신의 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질문은 의문형이지만, 그러므로 외면적으로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개방되어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질문들은 이미 의문형이 아닌 평서문의 성격을 띈다. 정답은 이미 있는 것이다.

바차와 만동자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고 양식의 닫힘을 지적하는 불교의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는 이원적 세계에 대해 부정과 긍정 모두가 결국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이야기라는 붓다의 태도는 형이상학적 문제 자체에 대한 긍정하거나 부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방식을 근원적 위치에서부터 끌어내리는 반형이상학적 철학을 제시한다.

5. 나아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의 형이상학적 태도와 불교의 반형이상학적 태도에는, 그리고 데카르트적 생각하는 자아와 불교의 무아사상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를 가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일단 두 사상을 각자의 사고 양식 안에서 이해하려 하면, 우리는 각각을 철학사에 등장하는 실체론과 반실체론의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또한 중심과 질서를 원하는 구심력적(求心力的) 사고 양식과 개방과 자유를 강조하는 원심력적(遠心力的) 사고 양식의 차이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 구심력과 원심력의 관계처럼, 인간 사고양식에서 역시 이 둘은 서로 상반되는 듯하면서도 서로를 비판하고, 서로를 경계하며, 또한 상대방의 한계를 보완하며 새로운 사상의 방향을 제시하여 왔다. 그러기에 반실체론적 사고를 주장하는 불교사에서도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 유식사상(唯識思想),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등 중심이 '있음'을 강조하는 종파와 중관학파(中觀學派), 반야사상(般若思想)등 중심의 분산, 즉 '없음'을 드러내는 사상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타난다.

그러나 서구의 형이상학과 불교의 반형이상학적 사고를 어느 한 쪽의 시각에서만 보면, 분명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따라서 부족하고 열등하며 나아가 끔찍한 사상이자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19세기 유럽 불교학자의 불교에 대한 평가에서 우리는 이 모습을 본다. 또한 19세기 유럽 불교학자의 불교에 대한 평가는 사상(思想)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한 사상의 내용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 속한 집단의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19세기에 이루어진 불교의 서구 진출은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정치적 힘의 불균형을 온 몸에 짊어져야 하는 행군이었다. 그러나 근대 유럽 사상 내에서도 구심력을 원하는 마음 뿐 아니라, 원심력으로 향하고자 하는 갈망은 존재하고 있었고, 개방성을 원하는 사고양식의 서구 철학 자체 내에서의 발현은 불교와 서구의 만남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가고 있었다.

박진영
미국 아메리칸 대학 철학과 교수. 편저로 {불교와 해체철학(Buddhisms and Deconstructions)} (근간), 논문으로 <선과 선의 언어철학 (Zen and Zen Philosophy of Language)>,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선의 언어: 보조 지눌의 화두선의 경우 (Zen Language in Our Time: the Case of Pojo Chinul's Huatou Meditation)>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