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언

인도 역사에서 대표적인 불법왕(佛法王)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하르샤는 아쇼카나 카니쉬카와는 달리 우리에게 상당히 생소한 인물이다.

아쇼카와 카니쉬카는 그 행적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고 그들의 불교에 대한 기여 역시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7세기 경의 인물인 하르샤 왕은 그 중요성에 비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르샤 왕은 대표적인 구법승이자 역경승인 현장 법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그는 현장 법사의 구법행(求法行)을 계기로 중국과 교류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현장 법사가 우리에게 아주 많이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하르샤 왕에 대해서는 그 행적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은 하르샤 왕이란 인물을 소개하는 데 있다.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은 특정 역사 시대의 인도불교를 이해하는 우리 시각의 편향성을 지적하는 데 있다. 불교학계에서 연구되어 온 인도사의 불법왕(佛法王)들 예를 들면, 아쇼카와 카니쉬카에 대한 논의의 중심은 '그들의 개인적 종교' 또는 '불교신자인 그들의 행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불교라는 종교와 관련된 아쇼카 또는 카니쉬카라는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한국과는 판이한 인도의 사회적 성격, 종교적 상황 때문에 타당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불교도나 자이나교도에게는 유감스럽지만, 불교문헌 속에서는 이론적으로 난타당하는 힌두이즘이 인도 역사의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우월적 지위를 내준 적이 없다. 이 사실은 특정 역사시대의 불교를 이해하는 우리의 시각이 편향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본 논문에서는 불법왕(佛法王)이라 불려진 하르샤 왕과 불교 내지는 하르샤 왕과 현장(玄 ) 법사의 관계를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또 첫머리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하르샤 왕 시대에 이루어진 인도와 중국 간의 교류는 현장(玄 ) 법사의 구법행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장 법사를 중심에 놓고 바라본 아전인수적 시각이 개입되어 있다. 논자는 당시 하르샤 왕조와 중국 간의 교류에서 현장 법사의 역할이 적지 않기는 하지만, 현장 법사의 구법행이 교류의 직접적인 계기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논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르샤 왕과 현장법사의 인연 및 당시의 인·중 교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르샤 왕의 정복전쟁과 통치구조

하르샤의 궁정시인이었던 바나 바따(B a bha a)의 『하르샤전기(Harsha charita)』에 따르면, 하르샤 바르다나 가문의 근거지는 동 빤잡의 스탄비슈와라(Sth v vara) 지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바나에 따르면 수도인 스탄비슈와라는 사라스와띠(Sarasvat )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인도와 중국문헌을 비교해보면 하르샤 가(家)의 왕국은 서쪽으로는 삿루즈(Satluj) 강으로부터 동쪽으로는 강가 상류에 걸쳐 있었던 듯하다.

바르다나 왕조의 기원과 실체는 확실히 알기 어려운 데, 바나의 언급에 따르면 아마도 초기굽타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했었던 소왕국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굽타왕조의 사무드라 굽타의 등장으로 빤잡의 체납(Chenab) 강 동쪽의 모든 왕국들이 굽타왕조의 지배 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뿌쉬야 부띠(Pushyabh ti) 즉 하르샤 가문의 선조들은 왕국을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훈족의 침입으로 이들 소왕국들은 굽타 왕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훈족은 모든 인도 왕들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굽타 왕조뿐만 아니라 말라바(M lava) 왕국의 야쇼다르만(Ya odhaman) 왕과 하르샤의 부왕인 쁘라바까라 바르다나(Prabh kara vardhana)도 그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바나는 쁘라바까라 바르다나를 "훈족이라는 사슴 앞의 사자와 같았다."고 묘사하였고, 반스케라(Ba skhera) 비문은 "그의 명성은 사해에 걸쳤으며 용기와 자애로 다른 왕들을 복속시켰다."고 적고 있다. 쁘라바까라 바르다나는 또한 신두의 왕, 그리고 구르자라스(Gurjaras)의 왕, 간다라의 왕과도 결전을 벌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태양신의 숭배자였다고 전해지는데 하르샤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왕은 타고난 수리야 숭배자였다. 날마다 해가 뜨면 목욕재계하고, 하얀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하얀 천으로 감고 동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B a, Harshacharita, p. 123.}}

쁘라바까라 바르다나는 많은 왕비들을 거느렸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왕비가 하르샤 왕의 어머니인 야쇼바띠(Ya ovati)였다. 바나가 《하르샤 전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녀는 유력한 왕국 출신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녀는 대단히 높은 지위를 누렸다. 왕도 그녀에게서 자식을 보기를 원해서 '새벽, 한낮, 저녁에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태양신에게 기도했다.'고 전하는 데, 후에 세 명의 자녀를 갖게 되었다. 쁘라바가라 바르다나의 왕비이자 하르샤 왕의 어머니인 야쇼바띠는 남편이 죽은 후에 사라스와띠 강변에서 장례식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590년 6월 4일에 하르샤가 태어났을 때,{{ Journal of the Bombay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ⅩⅩⅣ, pp. 252-4.}} 거의 여섯 살이 다 되었다는 언급으로 볼 때, 하르샤의 형인 라쟈 바르다나(R jya vardhana)는 586년경에 태어난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르샤의 여동생인 라쟈슈리(R jya r )가 592년에 태어났다.

이들 왕자들은 어려서부터 강도 높은 무예훈련(궁술, 검술 기타)을 받았으며, 라쟈 바르다나는 그의 나이 18세에 훈족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그의 군사적 재능을 떨쳤다. 그리고 부왕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라쟈 바르다나는 고다(Gau a)의 왕인 샤샹까( a ka)의 계략에 말려 죽임을 당하게 된다.『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권 5의 갈야국도국( 若鞠 國) 장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르샤의) 형의 이름은 갈라도벌탄나(曷邏 伐彈那)이다. 그는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은 뒤에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동인도의 갈라나소벌랄나( 羅拏蘇伐剌那)국의 설상가(設賞迦) 왕은 항상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옆 나라에 어진 군주가 있어서 우리나라의 화근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만나기를 청한 뒤에 그 왕을 살해하였다.{{『大唐西域記』, 大正藏 第 51卷, p. 894 中. }}

하르샤의 비문은 "그의 형이 약속에 집착하여 적에 소굴로 들어가 생명을 빼앗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르샤의 여동생인 라쟈슈리(R jya r )는 성장하여 당시의 4대 왕국 중 하나인 모카리스(Maukharis)의 그라하 바르만(Graha varman) 왕에게 출가하였으나 말라와(M lava) 왕국의 침공으로 남편을 잃게 되었다. 하르샤는 이 일이 있은 후 여동생을 그 곁에 항상 가까이 두고 각별히 돌보았다고 전해진다.

하르샤는 서기 606년에 즉위하여 41년 동안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의 두 축은, 하나는 소왕국들에 대한 군사적 병합이고 다른 하나는 병합된 왕국들을 포용하는 보시정책이다. 하르샤는 재위기간 동안 서쪽으로는 빤잡의 자란다르(Jalandhar)로부터 서북쪽의 캐쉬미르, 네팔, 구자라트의 마이뜨라까스(Maitrakas), 동쪽으로는 벵갈 지방과 동남쪽의 오릿싸 지방을 병합하였다.

원래 하르샤 가문의 왕국은 동 빤잡 지역에서 지역 맹주로 할거하던 소왕국이었다. 하르샤 왕이 광범위한 정복전쟁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벵갈 지방의 샤샹카 왕에 의해 그의 형이었던 라쟈 바르다나가 암살되고, 모카리스의 왕이었던 누이동생의 남편이 전사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를 계기로 소왕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전쟁들의 폐해를 가족사의 불행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하르샤는 사해정복(dig vijaya)의 길에 나선다.

『대당서역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형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하였고 이웃 나라들은 복종하고 있지도 않다. 이렇게 하다가는 끝내 오른손으로 밥을 먹을 기회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 모든 관리들은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자." 그리하여 손수 나라의 병사들을 이끌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大唐西域記』, 大正藏 第 51卷, p. 894 中.}}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초의 정벌 대상이 된 것은 형을 살해한 샤샹카 왕의 고다(Gau a)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후 '사해 정복'을 계속했던 것을 개인적인 동기 때문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는 당시 인도 분열로 인한 폐해의 가장 큰 피해자였고, 소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는 인도의 정치적 통일은 왕으로서의 그에게 가장 큰 과제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르샤는 첫 번째 전쟁에서 북인도 중부까지 점령했던 샤샹카 군을 격퇴하여 원래 그들의 영토인 벵갈 지방으로 몰아냈다. 이 전쟁은 하르샤의 '사해정복'의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그는 샤샹카 왕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강가 유역의 여러 소왕국의 영토를 통과하여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샤샹카를 격퇴한 후 돌아오는 길에 이들과 정치적인 동맹을 맺고 하위의 왕으로 복속시켰으며, 강가 유역 동쪽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하르샤는 영토병합 과정에서 정복한 왕국의 지배자들을 폐위시키거나 하지 않고 여전히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왕국들을 통치하도록 했다. 이는 하르샤의 영토병합 과정에서 일관된 정책이었다.

하르샤의 '사해정복'의 두 번째는 인도 서쪽의 빤잡과 라자스탄에 이르는 지역의 소왕국들이 대상이었다. 이것은 그의 치세 초기에 이루어졌다. 618-627년에 걸쳐 하르샤는 빈번한 정복전쟁을 치렀고 이 전쟁들은 그에게 인도 서부의 신드지방과 벵갈 지방의 사마따라(Sama tat ), 땀라 립띠(T mra lipti), 까르나 수바르나(Karna suvar a) 지역을 하르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630년 북인도의 4개의 주요한 왕국 중 하나인, 현 구자라트 주에 위치했던 마이뜨라까(Maitraka)와 전쟁을 벌여, 이 왕국에 대한 데칸 지역 찰루키아(Chalukya) 왕조의 뿌라께쉰(Pula ke in) 2세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복속시켰다. 그런데 이 왕은 하르샤에게 대패의 경험을 안김으로써, 하르샤는 북인도만을 통일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의 '사해정복'의 세 번째는 캐쉬미르 정복이다. 이 곳의 왕은 두르라바 바르다나(Durlabha vardhana)로 하르샤의 지시에 의해, 현장의 귀국길을 호위하고 편의를 제공한 인물이다. 현장은 631-633년에 이곳에 체재하였고, 이 곳의 유명한 스투파를 방문하여 붓다의 치아사리에 참배했다고 한다. 이 붓다의 치아사리는 캐쉬미르 정복 몇 년 후인 635년 하르샤에 의해 그의 왕국으로 옮겨졌다.

하르샤의 다음 '사해정복'은 인도 동부의 오릿싸(Orissa) 지역이 대상으로, 637년에 시작되어 642년까지 계속되었던 듯하다. 640년에 하르샤는 북 오릿싸 지역인 오드라(Odra)를 손에 넣었다. 이후 하르샤는 남쪽의 꽁고다(Ko go a)를 점령하였는데, 이곳이 하르샤가 정복한 가장 남쪽 지역이었다. 오릿싸를 점령함으로써 하르샤는 중요한 해상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이때 하르샤 왕은 당시 명성을 떨치던 불교 논사인 자야세나(Jaya sena)에게 오릿싸의 토지를 하사하였다.

하르샤의 '사해정복'의 마지막은 네팔이라고 주장되는 데, 7세기에 네팔을 통치했던 암슈바르만(A u varman) 왕의 비문들에 606년부터 시작되는 하르샤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네팔의 연호 표기방식의 문제 등, 여러 문제로 인해 신뢰하기 쉽지 않다. 바나(B a)의 《하르샤 전기》에는 '눈으로 뒤덮인 산악에 있는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으로부터 하르샤 왕이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근거로 제시되는 데, 눈으로 뒤덮인 지역은 네팔 이외에도 캐쉬미르를 생각할 수 있기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개인적으로 하르샤는 근면한 왕이라고 전해진다. 현장에 의하면, 그는 하루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시간을 사용하였다. 첫 번째는 정사를 돌보는 시간, 나머지 두 부분은 종교적인 일과 관련한 일을 보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종교적인 일들도 국정과 관련된 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병원이나 교육기관 설립, 나라의 주요 도로변에 무료 숙박소 건립, 과일나무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나무 심기, 철학적 논쟁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 윤리적인 주제를 가진 연극상연, 보시 등이다. 현장은 하르샤 왕의 근면함에게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는 선정을 베풀기 위해 침식을 잊고 정사를 돌본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한다. 그에게 하루는 너무도 짧다."{{ T. Watters, On Yuan Chwang's travels in India, vol, Ⅰ, p. 344.}}

하르샤 왕은 자신이 정복전쟁으로 얻은 영토에 대한 순행(巡行)을 계속했다. 하르샤는 그의 치세 후반부의 대부분의 시간을 순행캠프에서 보냈으며, 순행 중에 결코 영구적인 거처를 만들지 않았으며 말의 안장을 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임시 거처에서 해당 국사를 처결하였다. 이 거처는 나무, 끈, 천 등과 같은 임시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며, 떠날 때 이를 불태웠다. 하르샤는 이러한 순행을 통해 대중의 여론을 들을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행정을 감독할 수 있었다.{{ D. Devahuti, Harsha, p. 175.}}

정치적으로 하르샤의 제국은 다른 복속된 왕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독립적으로 다스렸고, 마우리아 왕조와 같은 중앙집권식의 단일한 통치구조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바라문뿐만 아니라 일반관리들에게까지 월급 대신 토지 하사가 이루어지면서 왕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방의 행정조직이 독자적으로 기능하는 구조로, 아쇼카의 중앙집권적 행정조직과 판이한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구조로 볼 때, 하르샤의 영토 순행은 그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자, 체제의 한계로 볼 수 있다.

3. 하르샤의 화합정책과 불교

하르샤 정치의 또 다른 한 축은 그의 보시를 통한 화합정책이다. 이것은 문헌에 보이는 그의 개인적인 관대함과 어울려 군사적 정복을 통해 얻어진 자신의 제국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르샤가 5년에 한 번씩 쁘라요가(Prayoga, 현재의 알라하바드로, 힌두 4대 성지 중 최고의 힌두성지)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한 무차대회이다. 이곳에 참석하는 인물들의 면면과 그 규모와 내용을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종교성 집회가 아니었다.

혜립(慧立)의 『삼장법사전(三藏法師傳)』에 의하면, 쁘라요가 무차대회에는 하르샤 왕과 그에게 복속한 왕들이 자신들의 신하들과 해당국의 유명한 종교수행자를 대동하고 참석한다. 이 정기적인 무차대회는 복속된 왕국의 왕들에게 하르샤의 패권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위치도 확인하는 기회를 정기적으로 제공하였다.{{ S. Beal, The Life of Hiuen Tsiang, p. 186.}}

하르샤는 복속한 왕들에게 적절한 예의를 갖추고 그들을 존중하였다. 까마루빠의 꾸마라 왕에게 보인 그의 태도는 하르샤 왕국과 그에게 복속한 국가간의 정치적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 만하다. 바나가 언급한 내용을 보면, 하르샤는 복속국 장군들의 상징인 소라고동을 빼앗았지만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는 복속한 왕의 명예를 빼앗아 갔지만 그들을 고난에 처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복속국의 독립성을 인정해 복속국의 왕이 그대로 통치하도록 했다. 하르샤 정치의 특징은 최대한 복속국의 재량을 허용하는 관대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정기 무차대회는 성격상 종교적 형식과 내용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다종교 국가이면서 종교가 생활의 많은 부분을 규정하는 인도에서, 활발한 보시와 대접으로 복속국의 권위 있는 종교수행자를 대한다는 것은 민심수습과 직접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종교적 구성에 있어서도 바라문, 사문 등 모든 종교수행자를 포함하고 있고, 붓다·태양신·쉬바 등의 상을 모심으로써 당시 대중의 민심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인도인의 정서로 보면 가장 큰 선행인 가난한 자와 고아와 독거노인을 위한 보시를 가장 긴 시일 동안(1개월) 하고 있다. 지금도 인도정치인들이 선거철이 다가오면 수행자와 가난한 이, 고아와 노인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의 성의를 표하는 데, 하르샤의 행위도 같은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르샤는 문학적인 재능도 보이고 있는 데, 세 편의 희곡, 한 편의 문법서, 그리고 두 권의 경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R. K. Mookerji, Harsha, pp. 148-159. }}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세 편의 희곡인, 《라뜨나발리(Ratn val )》, 《끄리야다르쉬까(Priyadar ik )》, 《나가난다(N g nanda)》이다.

이 중, 앞의 두 편은 힌두교의 쉬바·비슈누·인드라의 은총을 비는 전통적인 문체로 쓴 희곡들이다. 그리고 《나가난다》는 불교 주제의 희곡으로 하르샤가 희곡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나가난다》는 앞의 두 편의 희곡에서 보인 종교적 태도-즉 쉬바 신 등 힌두교 신들에 대한 귀경과 은총을 구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담고 있다. 이 희곡은 붓다에 대한 귀경게로 시작되어, 보살사상과 불살생의 교의를 설하고 있다.

또 힌두 여신인 가우리(Gaur )가 은총을 베푸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것은 그가 하나의 종교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5년마다 열리는 쁘라야가 무차대회에서도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이 같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재위 후반기에는 좀더 불교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 희곡 중 마지막에 지어진 『나가난다』나 그의 재위 기간 중의 마지막 무차대회였던 쁘라야가(Pray ga) 무차대회-현장이 참석했던-에서 발생한 암살사건의 원인이 불교에 편중된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大唐西域記』, 大正藏 第 51卷, p. 895 下.}}

마지막으로 하르샤에게 붙여지는 불법왕(佛法王)이라는 이미지와 관련하여 그의 행적에 나타난 몇 가지 관련 사실들을 지적하기로 한다. 관련학자들은 다음의 사실을 들어 그가 불교를, 특히 대승불교를 개인적 신앙으로 하는 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 하르샤는, 불교승려이며 여동생의 남편인 그라하바르만(Grahavarman)의 친구인 디바까라미뜨라(Divakaramitra)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하르샤는 그를 초청하여 자신과 여동생과 더불어 지내도록 했으며, "나의 과업이 완수되면 나도 승복을 함께 입을 것이다."고 했다. 하르샤 전기의 번역자인 코엘과 토마스는 하르샤가 불교에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은 전기에 자주 나타나며, 불교에 경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 하르샤의 불교사상은 그의 희곡인 『나가난다(N g nanda)』에 반영되어 있다.{{ G. S. Chatterji, Harshavardhana, p. 252.}}

3)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까노즈의 대신들이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을 때 관세음보살상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였다. 이는 그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불교를 받아 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L. M. Joshi, Studies in the Buddhist Culture of India, p. p.33.}}

4) 하르샤는 캐쉬미르에 있었던 붓다의 치아사리를 강제로 빼앗아 까노즈의 승원에 모셨다. 이것은 현장을 만나기 이전의 사건으로, 현장을 만나기 이전부터 불교에 심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B a bha a, Harshacharita, p. 165.}}

5) 하르샤는 현장을 만나기 이전에 오릿싸의 소승논사를 논파하기 위해 나란다의 저명한 논사들을 보냈다. 이 또한 그가 현장을 만나기 이전부터 대승불교를 받아 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S. Beal, The Life of Hiuen Tsiang, pp. 159-161.}}

6)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르샤는 강가유역에 위치한 붓다의 유적지에 수천 개의 탑과 승원을 세웠다.{{『大唐西域記』, 大正藏 第 51卷, p. 894 下.}}

7)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최고의 관용을 실천하였으며 寢食을 잊을 정도로 공덕을 쌓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동물의 도살을 금지하였으며, 자신의 왕국 안에서 육식을 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도시와 촌락에 이르는 도로에는 음식과 마실 것을 갖춘 숙소가 지어졌으며, 의사가 배치되었고, 여행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제공되었다.{{ ibid, p. 894 下.}}

위의 사실 중 하르샤를 불교도로 규정지을 수 있는 사실들은 1, 2, 3, 4, 5번 항목이다. 6, 7번 항목은 왕의 개인적 종교와 상관없이 인도 고대 왕들의 덕목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3. 5번 항목은 하르샤와 대승불교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것인데, 오릿싸에 보낸 논사 중에 현장이 포함되어 있다.{{ S. Beal, The Life of Hiuen Tsiang, p. 160.}}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하르샤 왕은 즉위하기 직전에 관세음보살에게 의지해 자신의 진로에 대한 해답을 구하였다고 전하는데, 개인적으로 하르샤가 어떤 계기와 인물에 의해 대승불교에 접하였는지에 관해서는 현존 문헌에 전하고 있지 않다. 만약 하르샤가 현장을 만나기 이전에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다면, 여동생의 남편인 그라하바르만(Grahavarman)의 친구인 승려 디바까라미뜨라(Divakaramitra)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디바까라미뜨라는 하르샤가 현장을 만나기 이전에 하르샤와 그 여동생에게 설법을 하던 인물이고 하르샤도 "자신의 과업이 완수되면 승복을 입겠다."고 한 내용이 하르샤 전기에 언급되고 있다.

현장과의 만남이 하르샤가 대승불교를 접한 첫 계기는 아닌 듯하다. 다만 하르샤가 현장과의 만남을 통해 대승불교에 대한 신념을 보다 확고히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4. 하르샤 왕과 현장의 만남

하르샤와 현장의 첫 만남에 관해서는 『하르샤전기』와 『대당서역기』에 전하고 있다.

현장은 인도에 유학하면서 학문적 명성을 떨친 듯하다. 때문에 당시 인도의 왕들로부터 초대를 받게 된다. 당시 까마루빠(K mar pa, 현 인도 동북부인 아쌈(Assam))의 왕인 바스까라바르만(Bh skaravarman)이 하르샤에 앞서 현장을 만났다. 그러나 두 번에 걸쳐 현장이 초대에 응하지 않자 세 번째는 "나란다 대학을 초토화 시키겠다."는 까마루빠 왕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하게 응한다.{{ ibid, pp. 169-171. }}

현장이 가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많은 관리들과 더불어 현장을 맞이하고 많은 환영의식을 개최하였으며 매일 음악과 연회를 베풀었다. 이렇게 한달 여가 지났을 때 꼰교다(Kongyodha, 현 오릿사)국을 정벌하고 돌아오던 하르샤 왕은 매우 놀랐다.

"나는 여러 번 그에게 오라고 하였지만 오지 않더니 어떻게 지금 그곳에 있단 말인가?"

그는 꾸마라 왕에게 사자를 보내 즉시 중국 사문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 왕이 답하였다.

"그(하르샤)가 나의 목은 취할 수 있지만 법사를 취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하르샤는 격노하였다. 다시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의 목을 보내라. 사자가 이곳에 도착하면 내가 즉시 취할 수 있도록."

꾸마라 왕은 놀라서 자신의 군대를 갖추고 현장 법사와 함께 하르샤왕을 맞이하러 떠났다. 꾸마라 왕은 하르샤를 만났고, 하르샤는 그에 대해 이전의 위협적인 언사는 더 이상 하지 않고 중국 사문의 거처를 물었다. 그날 밤 초야에 하르샤는 현장의 천막을 방문하였다.{{ ibid,, pp. 172-173.『大唐西域記』도 현장과 하르샤의 만남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慧立의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서와 같은 현장초대와 관련된 편지내용들은 담고 있지 않다. 大唐西域記, 大正藏, p. 894, 下.}}

하르샤와 현장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위의 인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르샤는 이미 현장을 만나기 이전에 현장의 명성을 듣고 있었던 듯하다. 커닝햄은 이 만남이 기원 후 642년 10월에 이루어졌고, 이들은 7개월 여를 함께 보내고 643년 5월에 헤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A. Cunningham, The Ancient Geography of India, 부록 2.}}

하르샤와 현장이 첫 만남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혜립(慧立)의『삼장법사전(三藏法師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속가 제자인 제가 전에 대사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저의 청을 들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현장이 답하기를, "저는 불법과 특히 《유가사지론》을 배우기 위해 먼 곳에서 왔습니다. 왕의 초청 소식이 저에게 도착하였을 때 저는 이 《유가사지론》을 배우는 것을 마치지 못하여 왕을 만나러 바로 오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왕은 물었다. "대사께서는 중국에서 오셨습니다. 제가 듣건대 중국에는 '진'이라는 왕이 있고 그의 명성은 노래로 찬미되며 춤과 음악으로도 찬미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진'왕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그의 뛰어난 덕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S. Beal, The Life of Hiuen Tsiang, pp. 173-174. }}

하르샤는 개인적 질문과 함께 중국에 관하여 현장에게 질문하고 있다. 『신당서(新唐書)』는 하르샤의 사신이 서기 641년에 당나라에 처음 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현장과 하르샤가 만난 시점은 서기 642년 후반부로 전해지고 있다.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 당 태종은 진왕의 지위에 있었고 하르샤는 당 태종에 관하여 질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르샤의 질문은 진왕과 당태종이 동일 인물임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하르샤가 중국에 대한 일정정도의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만남 후 하르샤는 현장과 함께 수도인 깐야꾸브자(K nyakubja)로 돌아와 연회를 베풀었다.

왕은 연회를 마친 후 현장에게 물었다.

"나는 법사께서 사악한 논을 물리치는 논을 지으셨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어디 있습니까?"

왕의 물음에 현장은 그 논을 보게 하였다. 왕은 현장이 지은 논서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그 누이동생 또한 법사의 대승법문을 듣고 크게 기뻐하고서는 인도전역의 모든 사문 바라문을 초청하여 대승의 뛰어남을 보이기 위해 무차대회를 열기로 했다. 여기에는 18국의 왕들, 3천 명의 대소승 사문, 3천 명의 바라문과 자이나, 천 명의 나란다 승원의 비구들이 참석했다. 여기서 현장은 대승의 가르침을 칭송하고 논의 주제를 발표하였다. 그는 덧붙여 이치에 반하는 단 하나의 명제라도 발견된다면 자신의 목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 ibid, pp. 175-180. }}

왕은 현장이 지은 논서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태양이 떠오르면 작은 불빛들은 사라지고, 천둥이 치면 망치와 정소리가 침묵한다고 들었다. 법사께서 펼치시는 교의로 다른 모든 이들의 교의가 논파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올바른 해탈을 논의하는데 있어 다른 이들은 한마디로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하리라."{{ ibid, p. 175.}}

현장은 대승교의에 대해 확신에 찬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현장의 성격의 일단을 드러내는 편지들을 소개함으로써 '현장이 하르샤의 종교적 신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아래의 편지는 현장이 귀국 10년 후 보드가야의 마하보디사원의 쁘라즈냐 데바(Praj deva)의 편지에 답한 것이다.

"……우리가 불법의 진리를 얻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가르침의 근본이 대승의 가르침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나의 심정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사께서는 '염소와 양이 끄는 수레(소승)'에 속하는 것을 믿으려 하고 '흰 소가 끄는 큰 수레(대승)'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산수정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에메랄드를 던져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가장 빛나는 지혜로 칭찬받을 만한 대사께서 그러한 실수에 스스로 빠지시는 것을 허락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여기 행해야 할 바른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진리의 사고로 장식하십시오."{{ S. R. Goyal, Harsha and Buddhism, p. 66-67.(쁘라즈냐 데바비구에게 보낸 현장의 편지).}}

위의 편지에서 보듯이 현장은 대승교학의 우월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지금 이 편지에서는 계현 문하에서 동문수학할 당시에 만났던 소승 논사에게 대승으로의 전향을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현장은 인도에 있는 동안에도 종교집회나 개인적인 만남에서 대승교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 현장이 하르샤를 만난 7개월 간의 까노즈 생활 동안, 대승교의의 우월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하르샤에게 설파하였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마지막 무차대회에서 하르샤의 불교 편들기에 다른 외도들이 반발하였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현장의 그림자를 느끼게 된다. 마지막 무차대회에서의 하르샤에 대한 암살미수사건과 『나가난다』를 통해 볼 때, 하르샤가 치세 후반기에는 확실히 불교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은 확언할 수 있을 듯하다.

하르샤는 모두 6번의 무차대회를 개최하였다고 하는데, 현장과 함께 참가한 집회가 마지막 무차대회인 듯하다. 현장이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무차대회가 열렸고, 때문에 그 시기는 아마도 643년이 될 것이다. 또 무차대회는 5년마다 열렸는데, 648년 중국사신이 인도에 왔을 때 하르샤가 최근 죽었다는 사실을 접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643년의 무차대회가 하르샤 치세 기간 중의 마지막 무차대회가 분명하다.

쁘라야가의 집회가 끝난 직후 현장은 자신의 귀국의사를 하르샤 왕에게 전했다. 하르샤 왕은 더 머물기를 원했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결국 현장은 동의를 얻게 된다.

"중국은 여기서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최근에야 붓다의 법을 들었습니다. 비록 중국이 불법을 받아들였지만 아직 완전한 진리로 불법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합니다. 때문에 나는 그 차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배우러 여기에 왔고, 이제 그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중국의 식자들이 얼마나 간절히 제가 확인한 불법의 깊이까지 알기를 갈구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경전에 이르기를, 불법의 전파를 방해하는 자는 대대로 장님으로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저의 귀국길을 막으신다면 셀 수 없이 많은 불제자들이 불법으로 얻을 복덕을 상실케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시력을 잃는 참상에서 벗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하르샤 왕은 현장이 귀국하는데 필요한 금화와 필요한 물건들을 제공하고, 여러 소왕국을 통과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서찰을 써주었다. 그는 수집한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중국을 향했다. 이들의 이별 모습을 혜립의 『삼장법사전』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왕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수십 리까지 현장을 배웅하고 돌아갔다. 마지막 작별을 할 때 그들은 쏟아지는 눈물과 한숨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귀국길에 현장이 수집한 경전과 불상은 북인도의 우디따(Udhita) 왕의 호위를 받았는데, 그 여행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하리샤 왕은 나중에 3000의 금화와 10000의 은화를 실은 코끼리를 여행경비를 위해 보냈다. 이 왕과 헤어진 후 꾸마라 왕과 뜨루와바따 왕과 더불어 수백 명의 경기병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현장에게 큰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고 하르샤는 4명의 관리를 현장의 호위에 동반케 했으며, 하얀 면으로 된 천에 편지를 쓰고 붉은 밀랍으로 봉인하여, 현장이 지나는 모든 나라의 관리들에게 현장 일행을 호위하게 하였으며, 이들 나라의 왕자들은 끝까지 탈 것과 운반수단들을 중국 국경까지 제공하였다.{{ S. Beal, The Life of Hiuen Tsiang, pp. 187-190.}}

5. 7세기 인도와 중국의 교류 관계

인도와 중국의 교류사에서 7세기만큼, 양국이 역동적인 관계를 가진 예를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서기 648년 하르샤에게 보내진 중국 사신은 하르샤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며, 왕위를 찬탈한 인도 왕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키고, 왕과 왕비 및 왕자를 포함한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의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하르샤의 사망연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642-643년에 현장과 함께 지냈으며, 중국사신을 맞았다는 기록을 통해 643년까지는 그의 생존이 확인된다. 그리고 648년 왕현책이 사신으로 인도에 왔을 때 사망을 확인했다. 이로 보아 그의 사망연대는 643년에서 648년 이전에 걸친 시기일 것이다. 그리고 하르샤는 그에게 복속된 하위 왕에 의한 권력찬탈의 과정에서 사망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7세기의 인도와 중국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중국 측 자료들이 유일하다. 중국문헌에 따르면 7세기의 인도와 중국의 외교관계의 출발은 하르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당서(唐書)』천축전(天竺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정관(貞觀) 15년 서기 641년, 실라디뜨야( l ditya, 하르샤 왕)는 마가다 왕이란 칭호로 조공을 바치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태종은 성은을 베풀어 옥새가 찍힌 편지를 보냈고 실라디뜨야 왕은 성은에 감격하여 신하들에게 묻기를, "일찍이 중국에서 사신이 온 적이 있는가?"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는 꿇어 엎드려 천자를 서찰을 받았다.

중국 측 문헌에 보이는 두 국가의 주종관계를 시사하는 표현들은 단지 중국의 전통적인 서술 스타일의 문제이다. 인도와 중국은 직접적으로 군사 정치적인 주종관계를 형성할 만한 관계에 있지 않았다. 양국이 외교관계를 맺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인도와 중국과의 관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과 달리 정치적 군사적 관계가 중요한 요인이 되지 않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양국 외교관계의 중심은 문화와 문물 교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르샤가 당 왕조와 외교관계를 연 시점은 하르샤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그의 영향력은 북인도의 서쪽과 동쪽 끝까지 걸쳐 있었으며 남으로는 오릿싸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 시기는 그에게는 정치적인 야심과 지적 정열, 모든 정치 군사적 활동의 조건들과 백성의 복리에 대한 자신감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먼저 중국과의 교류를 시작한 배경에는 이러한 하르샤의 자신감이 밑받침되어 있었을 것이다.{{ D. Devahuti, Harsha, p. 254.}}

많은 학자들은 7세기의 인도-중국의 외교관계가 하르샤가 현장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문헌상의 기록은 하르샤와 현장의 만남이 642년이고, 하르샤가 첫 번째 사신을 당나라에 보낸 것이 641년이어서 1년여의 시간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인도-중국관계와 하르샤와 현장의 만남의 직접적 연관성은 문헌상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하르샤는 현장과의 만남과 상관없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시작할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가?

《수서(隋書)》는(610년 완결) 사료로 이용된 문헌의 목록을 담고 있는데, 이 속에는 인도의 천문학, 수학, 의학에 관한 서적들의 이름들이 보이고 있다. 이는 현장의 구법 이전에도 인도와 중국 사이에 상당한 공식·비공식 교류가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현장 이후에도 의정(673-685)이 인도에서 12년을 체류하였는데, 그의 기록에는 상당한 분량의 인도 의학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 664년 인도에 도착한 중국승려는 황제의 명으로 인도의 약초를 수집하고 유명한 인도의 의사들과 접촉하였다. 또 인도의 천문학자가 중국의 천문을 다루는 부서에서 일하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N. J. Needham, and Wang Ling,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 Ⅰ, p. 212.}}

《수서》에서 보이는 중국의 인도학문에 대한 열의는 7세기와 8세기에 걸쳐서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하르샤 왕조가 어떤 특별한 동기와 필요에 의해 중국과 교류하였는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중국문헌들이 전하는 '조공'을 위해 사신을 보냈다는 언급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 두 나라는 정치 군사적으로 종속적인 관계를 가져본 경험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외교관계는 정치 군사적이기 보다는 문화적 측면이 강한 듯하다. 당 왕조가 불교와 인도학문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듯이 인도 쪽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중국과의 교류로 도교가 인도에 전해져 인도 딴뜨릭 불교에 영향을 주었고, 현장은 서기 638년 아쌈의 바스까라 바르만 왕이 지은 당나라 시대의 음악을 들었다고 전한다.{{ ibid, pp, 425-430.}}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르샤 왕조와 당 왕조의 외교관계는 하르샤와 현장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인도-중국의 교류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하르샤는 정복전쟁이 거의 마무리되어 그의 제국이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641년에 기존 인도-중국관계의 기반 위에서 그의 공식적인, 첫 외교사절을 당 왕조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6. 결어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하르샤는 북인도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루었음에도 인도봉건제라는 당시의 정치 경제적 한계로 인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정치적 격변에 희생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르샤는 국내정치에 있어서는 관용과 보시 정책으로, 병합한 왕국과 그 대중들을 포용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빈번한 외교사절의 교류를 통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현장과의 만남을 통해 대승불교도로서 개인적 신앙도 확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왕이자 문인으로서 그가 말년에 지은 불교희곡에서도 보이듯 그는 자신의 왕국과 백성의 복리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인도 역사상 전륜성왕의 이상에 가까이 다가갔던 또 한 명의 불법왕(佛法王)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르샤를 불법왕(佛法王)이라고만 평가하는 것은 일방적인 시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도의 제왕들에게는 다양한 종교를 모두 포용해야 한다는 관습적인 덕목이 강조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아쇼카나 카니쉬카의 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르샤를 포함한 불법왕(佛法王)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좀더 유보적인 입장에서의 접근해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당시의 인도와 중국의 교류에 관해서도 객관적인 사료 평가 없이 현장 법사를 중심축에 놓는 성급한 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현장 법사의 존재가 당시의 하르샤 왕조와 당(唐) 사이의 교류를 활발하게 만드는 촉매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구법 승려 한 명이 계기가 되어 국가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 평가 역시 불교의 입장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강조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류가 아닐까 한다.

앞으로 하르샤는 물론 아쇼카나 카니쉬카에 대해서도 좀더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객관적인 시각에서가 아닌 불교의 입장에서 시대 상황을 재단하는 일방적인 논의가 지양되기를 기대한다.

공만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후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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