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쯔모토 시로(松本史朗) 지음 / 이태승 옮김

티베트 불교라고 하면 오늘날 일본에서는 신비적이고 밀교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예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미국의 히피 세대 사이에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가 유행한 것에 발단하고 있지만,1) 1981년 《무지개 다리―티베트 밀교의 명상수행―》2)이라는 책이 평하출판사에서 간행되었을 때 저자는 이러한 경향이 일본에 수입되었다고 느꼈다.

티베트 밀교를 무비판적으로 예찬하는 경향은 아마도 《무지개 다리》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인 나카자와 신이치(中澤新一) 씨가 일종의 이론적 리더가 되어3)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욱 성행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989년에 가와사키 신죠(川崎信定) 씨에 의해 《티베트 사자의 서》가 원전 번역되고,4) 나아가 1993년 가을에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제목이 붙은 NHK의 일련의 TV 방영5)이 이루어졌을 때 티베트 밀교의 유행이 절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흐름에 대하여 일본의 티베트 불교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필자 자신도 이미 1984년에 일반인을 위해 쓴 소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극히 최근에 티베트 불교에 관한 실로 개탄스러운 오해가 다시금 만연하게 된 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티베트 불교를 완전히 ‘밀교’라고 규정하여 한결같이 그 신비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선정(禪定) 기술을 절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에 밀교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후기 인도불교 그대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 전체를 ‘밀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티베트 불교란 먼저 첫 번째로 학문(學問) 불교이며, 고도로 지적(知的)인 학승들의 불교이다.6)

또 1989년에도 거의 동일한 취지를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최근 서구의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티베트 불교를 무비판적으로 예찬하는 경향이 일부 보이고 있지만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 한탄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향은 대부분의 경우 티베트 불교의 밀교적 측면만을 평가하고 그 선정〔명상〕 기술을 절대시하는 것이지만, 밀교와 선정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실재론〔이것을 나는 ‘여래장 사상’이라 부르지만〕이야말로 총카파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 생애에 걸쳐 적대시한 대상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7)

저자로서는 이러한 말로써 티베트 밀교를 무비판적으로 예찬하는 경향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고를 보낸 것이지만, 물론 저자의 논술이 실제적인 효과를 가져올 리는 없었다. 또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 씨는 1988년 〈위불교(僞佛敎)를 배척한다〉8)와 1989년 〈중택신일(中澤新一) 비판―현대의 마하연(摩訶衍)〉9)이라는 논문에서 나카자와 씨의 불교이해를 비판했지만, 앞의 원고는 야마오리 데츠오(山折哲雄) 씨를 편집고문으로 하는 법장관(法藏館)의 잡지 《불교》에 게재가 금지되었다.

더욱이 1989년 가와사키 씨에 의한 《티베트 사자의 서》의 원전 번역에 대한 서평에서,10) 티베트 불교 게룩파 출신의 학승으로 현재 오오타니(大谷) 대학 교수인 시라다테(白館戒雲, 출팀케상) 씨는 《티베트 사자의 서》 즉 닝마파의 매장서(埋葬書, gter kha)인 《중유(中有)에서 청문(聽聞)에 의한 해탈(Bar do thos grol)》에서 잘못 이해한 부분을 지적하고, 나아가 이 책은 티베트 불교 최대의 종파인 게룩파에서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닝마파 사자의 서》라고 불러야지 《티베트 사자의 서》라고는 부르지 말 것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티베트인 학승의 성실한 학문적 양심을 느끼게 하는 말로서 그 결론 부분은 극히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보기로 한다.

나는 본서의 번역으로 티베트에 관심을 지닌 일본의 독자가 티베트 불교 전부를 닝마파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절실히 기대한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으로 본서에 의해 닝마파의 비불교성을 이해하고 본래의 불교 모습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여 마지않는 일본과 일본 불교계에도 착실한 학문연구를 경시하고 세속적으로 안이한 사상에 만족하려는 풍조가 깊이 뿌리 박혀 있고 그것이 자라나 갖가지 사이비적인 종교의 만연을 조장하는 한 원인이 되는 것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11)

또 일본의 티베트학을 대표하는 야마구치 즈이호(山口瑞鳳) 박사는 일찍부터 나카자와 씨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보였으며,12) 1993년 가을 <티베트 사자의 서>가 NHK에서 방영된 다음해에 “《티베트 사자의 서》는 불전(佛典)이 아니다”라는 논설13)을 《매일신문》에, 나아가 “나카자와 신이치 씨와 NHK가 거론하는 《티베트 사자의 서》는 거짓 불전”이라는 논설14)을 《제군(諸君)》에 발표하였다. 앞의 논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이 책은 학계에서는 명백한 위서(僞書)로 알려진다. 위작한 것을 미리 땅 속 등에 묻은 뒤 고대에 감추어진 보물이라고 하여 사람들 앞에 꺼내 보이는 ‘매장서’의 하나이며, 티베트인 자신도 불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이 논설도 앞서 하카마야 씨의 《불교》의 원고와 동일하게 다른 큰 신문사로부터는 게재가 거부되었다.

이렇게 티베트 밀교 예찬의 안이한 풍조에 대한 티베트 불교학자로부터의 비판은 국내의 언론매체에 의해 대부분 무시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거부되었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본의 티베트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티베트 사자의 서》는 불전이 아니라고 논하는 것도 또 나카자와 씨가 추천하는 족첸(rdsogs chen) 교의를 신봉하는 닝마(r쁍i? ma)파〔古派〕가 티베트에서는 비정통파로 간주되어 온 것도 전혀 알 리 없었다.

단지 TV에서 방영되는 티베트인의 오체투지의 모습과 괴이한 티베트 밀교 회화를 보고는 ‘신비의 나라 티베트’, ‘밀교의 나라 티베트’의 인상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리하여 티베트 밀교의 명상수행을 무비판적으로 예찬하는 위험한 경향은 마침내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티베트 불교의 본질은 그 지적·학문적 전통 즉 그 불교철학에 있다. 그러면 그 티베트 불교철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또 그것을 배우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티베트 불교철학의 본질을 ‘공의 사상’ 혹은 중관사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학자들도 인정할 것이다. 즉 8세기 후반에 티베트에 들어가 티베트 불교철학의 기초를 닦은 샨타라크쉬타(큆칊ntaraks.ita)와 카말라쉴라(Kamala큦칕la) 이래 티베트에서는 나가르주나(N칊g칊rjuna, 2-3세기)의 《근본중송(根本中頌, M칤lamadhyamakak칊rik칊)》이라는 논서에 의거하는 중관파(中觀派, M칊dhyamika)의 ‘공사상’ 즉 “일체의 법(法, dharma, 성질)은 공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설하는 중관사상이라는 것이 불교철학의 모든 사상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승불교 가운데서 이 중관파에 대립하는 것이 유가행파 또는 유식파로, 그들은 중관파가 주장하는 ‘일체법의 공’을 ‘악취공(惡取空; 잘못 이해된 공성)’으로서 배척하고 “인식(식)만이 실재한다”라는 ‘유의사상’을 설하였다.

그러나 중관과 유식의 대립에서 대승불교의 사상적 전개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식사상의 형성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유가행파 사상의 근저에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라는 것이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래장 사상이란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익숙한 말은 아니겠지만, 일찍이 불성사상(佛性思想)이라는 말로 불린 것이다. 이 여래장 사상이란 대승경전의 하나인 《여래장경(如來藏經)》의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다.”라고 하는 설15)과 동일하게 《열반경(涅槃經)》의 “일체중생은 불성을 가진다.”라고 하는 설에 근거하는 사상이다. 《열반경》의 유명한 “일체중생은 불성을 가진다.”라는 경전의 내용은 “일체의 살아 있는 것은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거나 나아가 불교 평등사상의 선언이라고까지 해석된 적이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없는 문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열반경》에 다수 나타나는 “일체중생은 불성을 가진다.”라고 하는 내용 뒤에는 반드시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를 제외한다.”라는 말이 붙어 “일천제라 불리는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다.”라고 하는 차별적인 입장이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16)
저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반대로 여래장 사상을 차별(差別) 사상이라고 생각하며, 그 배후에는 인도의 토착사상인 힌두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불교의 개조인 석존은 ‘연기(緣起)’를 설한 것으로 다시 말해 불교는 연기설이라는 것이 필자의 이해이지만, 이 연기설이란 힌두교의 아트만(칊tman, 我:영혼) 사상을 근본으로부터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 연기설로부터 무아(無我)·무상(無常)의 설이 도출되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징이 된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아(我)·상(常)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여래장 사상으로, 《열반경》에는 “불타란 아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아는 영원불변의 실재이다.”라고 명기하고 있다.17) 따라서 여래장 사상인 ‘아의 사상’, ‘유의 사상’은 불교의 연기설·무아설과는 완전히 반대 입장에 있는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여래장 사상은 불교(연기설)가 아니다.”라고 논하는 것이다.

유가행파의 유식설이라는 것도 이 여래장 사상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 유식사상을 설한 유가행파 사람들은 동시에 또 여래장 사상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식 사상과 여래장 사상의 차이는 어디에 있으며 공통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당면의 문제가 된다. 이것에 대하여 저자는 여래장 사상과 유식 사상에 공통하는 근본논리로서 기체설(基體說, dh칊tu-v칊da)이라고 하는 것을 상정했다.18) 기체설이란 현상적인 것들의 존재는 무상이며 무아이지만, 그것들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는 기체 그 자체는 상이며 아이며 실재라고 설하는 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이 기체설이라는 것을 여래장 사상의 근본이론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불교 이전부터 존재한 힌두교의 근본이론이며,19) 이것을 부정한 것이 불교의 연기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면 여래장 사상과 유식 사상이라는 ‘기체설’ 혹은 ‘유의사상’이 나가르주나가 설하는 ‘공의 사상’에 대한 반대명제로서 4·5세기의 힌두교 복고주의적인 굽타(Gupta) 왕조기의 인도사회에 환영받았던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즉 기체설이란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의 근본논리이며, 이 논리에 의거한 여래장 사상은 달리 말하면 ‘불교 내부의 힌두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사상의 역사적 발전이란 극단적으로 말하면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는 과정 혹은 불교가 힌두교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불교·부파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밀교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여기에 기본적으로 ‘불교로부터 힌두교’라는 변천 즉 힌두교의 ‘유’와 ‘아’ 사상의 부정으로서 성립한 불교가 점차 그 ‘유’와 ‘아’의 사상에 접근하고 동화하여 마침내 흡수되는 과정이 보인다.20)

원시불교의 ‘법무론(法無論)’에 의거하는 연기설이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철학에서 ‘법유론(法有論)’으로 해석되고 그것이 대승불교 《반야경》의 ‘법무론’, ‘법공론(法空論)’에 의해 부정되어 다시 원시불교의 올바른 입장이 회복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올바른 이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승불교는 모두 공의 사상을 설한다.”라고 결론지으면 그것 이상으로 오해도 없을 것이다.

대승불교라고 하는 것이 힌두교의 강한 영향 아래에 성립했다고 보는 것은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량의 대승경전을 창작한 것은 불교적 교양을 가진 사람, 즉 출가자이었을는지도 모르지만 경전을 읽는 대상으로서는 재가신자가 강하게 의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인도에서 재가신자란 기본적으로 힌두교도인 것이다. 그들은 불교의 출가자에게만 보시한 것이 아니라 자이나교나 다른 종파에도 구애되지 않고 출가자에게는 보시하여 사후의 생천(生天)을 구하며 일상생활에서는 힌두교의 생활규범에 따라 생활하는 힌두교도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재가자를 독자 또는 청중으로서 강하게 의식한 대승경전에 힌두교의 영향이 보인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이는 예가 대승경전에서 주문(呪文), 주술(呪術)을 수용한 것이다.

“석존은 주술을 금지했다.”라는 전승이 다수의 율장에서 인정되어 주술부정이 원시불교의 기본적입장이라고 생각되지만,21) ‘공의 사상’을 설한다는 대승경전 《반야심경》의 말미에도 ‘아제아제(켨諦켨諦, gate gate)’ 운운의 주문이 있고, 이것을 《반야심경》 자체에서는 ‘주’(呪; mantra)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주’로 번역된 만트라는 일반적으로는 ‘진언(眞言)’으로 한역되는 말로서 본래는 힌두교 최고의 문헌인 베다성전 본집(本集)의 성스런 구절을 의미한 것이다. 즉 《반야심경》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든가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같은 경문(經文)으로 “일체법은 공이다”라고 하는 ‘공의 사상’을 설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그 말미의 부분에서는 힌두교의 만트라라고 하는 주술세계에 전면적으로 몰입하고 있다.

또 《반야경》이 ‘공의 사상’을 설하고 그것이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반야경》의 ‘공’이 순수하게 부정적인 것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일순간의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반야경》 자신이 ‘진여(眞如)’나 ‘법성(法性)’ 그리고 ‘무분별(無分別)’과 같은 긍정적인 것을 설하기 시작한 것이다.22) 저자의 견해로는 이들 세 용어는 단일(單一)하게 실재하는 기체 즉 dh칊tu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대승불교가 보다 발전하게 되면 힌두교의 아트만론을 적극적으로 공언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 나타난다. 그것이 앞서 서술한 여래장 사상이다.

이렇게 대승불교 사상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공으로부터 유’라는 비불교화·힌두교화의 길을 걸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로 도달한 곳이 완전히 ‘힌두교 그 자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밀교(密敎)이었던 것이다.

석존의 가르침인 연기설을 순수하게 지적(知的)인 것으로 생각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석존이 주술을 부정했다.”라는 전승은 불교의 지성주의(知性主義)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본질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대승불교는 앞서 서술했듯이 주문·주술을 인정하고 ‘잡밀(雜密)’이라 불리는 갖가지 다라니(陀羅尼) 경전을 제작했다. 또 힌두교의 다양한 신들도 대승경전 가운데 자유로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어떠한 대승경전이라도 힌두교의 주술적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법화경》을 예로 들더라도 나집(羅什)에 의해 한역된 《묘법연화경》의 제26품은 다수의 주문을 포함하는 <다라니품(陀羅尼品)>이며, 제25품은 관음보살에 대한 신앙을 설하는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다. 관음의 이름을 염(念)하게 되면 모든 현실적 고(苦)로부터 즉시 해탈한다고 설하는 관음신앙이 주술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리하여 불교의 주술화, 힌두교화가 진행되어 그 최후에 도달한 곳이 7세기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의 편찬으로 드러난 순수한 밀교 소위 ‘순밀(純密)’의 성립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밀교가 ‘불교의 힌두교화’의 정점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상적으로 보아도 밀교가 아트만〔我〕의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다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밀교의 근본성전인 《대일경》에는

내심묘백련(內心妙白蓮) 태장정균등(胎藏正均等)…… 종차화태중(從此華台中) 대일승존현(大日勝尊現)〔大正, 18卷, 6下〕

이라고 나타난다. 이것은 ‘내심묘백련’ 즉 백련(白蓮, pun.d.ar칕ka)과 같은 형상을 가진 심장(心臟, hr.daya) ― 이것을 밀교에서는 ‘심련(心蓮)’이라 칭한다 ― 에 대일여래가 나타난다, 즉 존재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아트만은 심장 속에 존재한다.”23)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심장 내의 여래란 아트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밀교의 사상적 기반이 무아설이 아니라 아설 즉 아트만론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해될 것이다.

아(我)인가 무아(無我)인가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불교가 무아설인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그렇다면 아설은 불교가 아니게 된다. 티베트 불교철학의 본질은 중관파의 ‘공의 사상’에 있지만, 이 ‘공의 사상’을 정확히 배움으로써 우리들은 아설과 무아설의 대립 특히 불교 내부에 있어서 아설(여래장 사상)과 무아설(중관 사상)의 근본적 대립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티베트 불교철학을 배우는 최대의 의의가 있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곧 “불교가 무아설이며, 힌두교가 아트만을 인정하는 아설인 것은 예로부터 알려진 것으로 특히 티베트 불교철학의 의의로서 크게 내세울 정도의 것은 아니다.”라고.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불교 내부의 아설(여래장 사상)과 무아설(중관 사상)의 대립에 있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이 대립에 대한 이해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티베트 불교를 배우지 않고는 분명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티베트 불교와 중국불교 그리고 한국·일본을 포함한 중국 계통 불교의 사상적 상위(相違)에 대하여 설명하여야만 한다. 즉 결론을 말하면 인도 중관파의 ‘공의 사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에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중국 계통의 불교에는 ‘공의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은 확실히 청목(靑目, Pi ?gala)의 주석을 동반한 형태로 나집에 의해 5세기 초에 《중론》으로 한역되고, 이 《중론》과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의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삼론종(三論宗)이라는 유력한 학파를 형성하여 그들이 소위 중국에서 중관사상, ‘공의 사상’의 계승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삼론종 사람들의 ‘공’의 이해는 근본적인 오해를 가지고 있어 그로 인해 인도 중관파의 ‘공의 사상’은 중국에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 오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첫째는 그들의 ‘공’이해가 근본적으로 노장사상(老壯思想)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들이 여래장 사상이라는 ‘유’의 사상에 근거하여 ‘공’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첫 번째의 것이 두 번째의 근거가 되고 있다.

즉 노장사상의 구조란 ‘도(道)’ 또는 ‘이(理)’라고 하는 단일의 실재가 근원이 되어 만물이 생긴다고 하는 발생론적 일원론(一元論)이며, 구조적으로는 여래장 사상의 근본 논리를 이루는 dh칊tu-v칊da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24) 따라서 노장사상의 영향으로부터 마지막까지 벗어날 수 없었던 대부분의 중국불교 사상가는 여래장 사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 시점을 가짐이 없이 쉽게 이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놀랍게도 인도 중관파 ‘공의 사상’의 계승자라고 할 삼론종의 대성자인 길장(吉藏, 549-623)조차도 여래장 사상을 적극적으로 용인하고 dh칊tu-v칊da 라고 하는 ‘유의 사상’을 설한 것이다.25)

따라서 사상적으로 보면 중국 계통의 불교에서는 여래장 사상이라는 ‘유’와 ‘아’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티베트 불교에서는 중관 사상이라는 ‘공’과 ‘무아’의 사상이 중심을 이루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교 내부에서의 아설(여래장 사상)과 무아설(중관 사상)의 대립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중국불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한 양자의 대립·모순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했듯이 중국불교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중관 사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티베트 불교철학의 중관 사상 즉 ‘공의 사상’을 올바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극히 일반적인 설명으로서 ‘불교란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가진다는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은 일본불교라고 하는 것이 여래장 사상을 주류로 하는 중국불교의 완전한 영향아래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조금의 의문이나 비판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1986년 일본인도학불교학회에서 저자가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발표를 하고 또 같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 일본의 불교학계가 약간의 자극을 받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의 여래장 사상 비판 및 하카마야 씨의 본각사상 비판27)은 역시 티베트 불교철학에 대한 연구 없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여래장 사상에 대하여 전혀 비판적이지 않았던 일본의 불교학계에서 야마구치 즈이호 박사만이 극히 일찍부터 여래장 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점을 가지고 그것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야마구치 박사는 이미 1973년에 ‘삼예의 종론’의 의의에 대하여 “필자는 중국불교의 여래장 사상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것이라고 본다.”28)라고 명확히 밝혔던 것이다. 저자는 당시 박사가 ‘삼예의 종론’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연구가 박사에게 여래장 사상에 대한 비판적 시점을 명확히 하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1984년에 야마구치 박사가 발표한 〈티베트학과 불교〉29)에서는 여래장 사상과 중관 사상이 명확히 구별되고 도원(道元)의 사상은 후자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위상이 정립되고 있다. 이러한 이해가 하카마야씨의 1986년 논문 〈차별사상을 만들어 낸 사상적 배경에 관한 사견(私見)〉30)으로 계승되어 본각 사상 비판의 중심적인 원리가 된 것은 확실하다.

이와 같이 보면 ‘삼예의 종론’에 관한 사상적 연구가 여래장 사상 비판과 본각 사상 비판을 만들어 낸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예의 종론’이란 티베트 불교의 소위 ‘본질적인 사건’이었다. 즉 그것은 8세기 말 티베트에 있어 그 후의 티베트 불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의미로서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티베트인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 사상적(思想的)인 ‘사건’의 의미를 계속하여 생각하였던 것이다.

‘일체법은 공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집착인 것일까. 모든 집착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좋은 것일까. 그러나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기절한 상태나 돌덩이 등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갈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닐까. 티베트인 불교도는 끊임없이 이 문제를 생각하여 마침내는 “일체법은 공이라는 사고방식은 아집(我執)을 없애는 좋은 분별이기 때문에 그것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라는 총카파의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총카파에게 ‘삼예의 종론’의 문제가 결정적이었던 것은 총카파 스스로 이변중관설(離邊中觀說) 비판을 마하연설(摩訶衍說)에 대한 비판이라고 명확히 위상 정립을 하고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31)

이렇게 티베트 불교철학을 배우는 것의 의의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공사상에 의한 여래장 사상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삼예의 종론’과 그것을 명확히 사상화(思想化)한 총카파의 ‘공의 철학’을 배우는 것에 의해 ‘불교’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서는 여래장 사상에 의거하는 티베트 밀교가 아니라 공 사상에 의한 티베트 불교철학의 진정한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

 

마쯔모토 시로(松本史朗) / 일본 고마자와(駒澤) 대학 불교학부 교수. 논·저서로 《緣起と空-如來藏思想批判》 《禪思想の批判的硏究》 <Ratn칊kara큦칊ntiの中觀派批判><佛敎論理學派の二諦說> 등이 있다.

이태승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석사) 및 일본 고마자와(駒澤) 대학 불교학과(박사)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위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논·저서로 《을유불교산책》《인도철학산책》 <즈냐나가르바의 이제설> <무아에 관한 중관파의 해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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