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 윤회, 사실인가 믿음인가

1. 삼세양중인과론과 그 토착화

중국불교역사를 통해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사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삼세양중인과설이라 말할 수 있다.

중국 불교사에서 명멸했던 숱한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불교이론을 개발했지만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을 위한 불교에 불과했으며, 그들이 영향력과 실용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삼세양중인과설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무신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선종이나 번쇄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 역시 그 저변에는 삼세양중인과설을 배제하면 대중성을 상실하고 만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대중성을 지향하면 할수록 교묘하게 삼세양중인과설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종파 중에서도 정토종은 삼세양중인과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하며, 특히 참회법의 등장과 발전, 그리고 밀교의 작법 등은 인과설의 대중화와 함께 다양한 중국불교문화를 산출하게 된다. 즉 제사, 천도제, 구병시식 등 중국의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민중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세양중인과설이 중국인의 심성 속에 뿌리 내리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불교는 발복(發福) 내지 구복(求福)의 수단으로 생각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중국불교 전래초기의 신앙양태를 알려주는 초왕 영의 신불(信佛), 명제(明帝)의 감몽구법설, 환제(桓帝)의 신불, 착융( 融)의 사찰 건립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불교와 도교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부처가 신과 동일하게 생각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초왕 영에 관한 기사를 약간 살펴보기로 하자.

후한의 명제와 이종형제인 초왕 영은 일찍이 41년에 초나라의 왕으로 봉해졌다. 이후 51년에 초나라에 부임하였는데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많은 빈객들과 교유했다. 이런 것을 빌미로 그는 모반죄로 무고를 당하여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형인 명제는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영평 8년인 65년에 특별한 칙령을 내렸다. 그것은 사형을 당할 죄인도 비단을 바치면 속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초왕 영은 비단 30필을 벌금으로 물고 사면을 받게 되었다. 이에 명제는 비단 30필을 초왕 영에게 돌려주면서 "초왕은 황노(黃老)의 미언(微言)을 독송하고, 부도(浮屠:부처님)의 인사(仁詞)를 숭상하며 결재(潔齋)를 3개월 간 하고, 신과 맹세하여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다. 그 속(贖:벌금)을 돌려주니 이포새(伊蒲塞:우바새)와 상문(桑門:사문)의 성찬(盛饌)을 도우라."(<<후한서>>권42, 초왕영전)는 조칙을 내렸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초왕 영이 믿었던 불교는 민간 종교인 도교와 동일시되고 있었다는 점과 석 달간 결재하며 신께 맹세를 했다는 점에서 부처를 길흉화복을 주제하며 현세이익과 불로장수를 줄 수 있는 주체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로는 황제(黃帝)와 노자를 말한다. <<열선전>>에 의하면 황제는 온갖 귀신을 부리는 신비적인 존재자로 등장한다. <<신선전>>에서는 노자가 천신의 가호를 받아 모든 신선들에게 사사하는 득도자로 묘사되고 있다. 모두 초월적 능력을 가지고 인간의 길흉을 주재하는 신으로 보는 것이다.

이 시기에 유행했던 종교로는 불교 이외에 도교의 방선도(方仙道)와 황로도(黃老道)가 있었다. 황로도는 황로학과 방선도가 결합하여 발생하며, 대략 전국시대의 중기에 제나라에서 생긴 것으로 밝혀져 있다. 서한 초기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모두 황로도의 청정지술(淸淨之術)로 세상을 통치했으며, 이로 인해 이후 황로의 도가사상은 주된 정치학설이 되어 유행하게 된다. 황로도와 방선도는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교의나 종교이론이 없었으며, 구체적인 종교조직도 결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이론과 신앙은 노자의 도에서 근거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황로도는 방선도의 신선사상까지 흡수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노자의 도에 교묘하게 결부시켰다. 이후 민간신앙이나 방술(方術)은 도를 기초로 그 외연을 넓히게 된다.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신선방술사상은 전국시대에 지금의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인 연나라와 제나라의 신선방사(神仙方士)사상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신통력을 지니게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불사약을 단련해낼 수 있고, 신선이 되어 허공을 비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선사상은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어 <<장자>>의 <소요유>편이나 굴원의 <<초사>>에 언급되어 있다. 진나라의 시황제와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로를 소망했으며, 따라서 신선방술에 대해 각별한 신임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기 때문에 이들 사상은 이 시기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

<<후한서>> 환제본기에 의하면 환제는 166년에 황로를 탁룡궁(濯龍宮)에 모셨다는 기록이 보이며, 동시에 "환제는 음악을 즐기고 금생(琴笙)을 잘하였으며 원림(園林)을 가꾸고 탁룡궁을 세워 화개(華蓋)를 만들어 부도(浮圖)와 노자를 모시고 제사 지냈다. 이는 신에게 청함이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해에 산동의 학자인 양해가 낙양에 가서 환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상소문 안에 불교의 신앙 형태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즉 "궁중에 황로와 부도의 사당을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도는 청허하며 무위를 존중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해를 미워하고 욕망을 버리게 하고 사치를 떠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기욕(耆欲)을 버리지 못하고 살생이나 형벌은 도에 넘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 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어찌 행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인용문에서 양해는 환제에게 불교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환제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은 구복적 요소였다. 열렬하게 신선사상에 빠져 있었던 그는 불교를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황로의 신앙과 동일하게 간주하고 부도에게도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불타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불교 전래초기 불교의 신앙형태가 어떠했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 중에 착융( -195)이란 사람이 불교사찰을 건립한 내용이 있다. 이것은 <<삼국지>>권49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동으로 사람을 만들고 황금을 몸에 발랐으며,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다. 동반(銅槃)을 아홉 겹으로 내렸으며 아래로 이 중의 누각과 전각의 길을 만들어 3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불경을 독송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집집마다 욕불(浴佛)을 하고 대부분 술과 밥을 준비하여 자리를 길에 펼쳐서 수십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규모의 사찰이 축조되었으며, 동반을 아홉 겹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륜(相輪)으로 장식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중의 누각 즉 층탑이 건립되었으며, 누각 옆으로 회랑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도금한 금불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불상에게 비단 옷을 입혔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사찰에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불경을 독송하였으며, 욕불회와 재회의 원형이 이미 이 시기에 시작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재회 때 술과 밥을 준비하여 대접하고자 자리를 길에 펼쳤으며, 그 자리의 길이가 수 십리에 이루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규모가 성대하고 참석자들이 매우 많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재회를 베풀어 보시를 행했던 것은 선업공덕을 지음과 동시에 소원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불교 전래초기 중국인들은 불교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와 신선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부처를 신과 같이 생각하여, 부처에게 기도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복신앙이다. 이러한 두 가지 불교관은 당대 이전의 승려들이 신선이 되기 위해 출가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민 대중들은 주로 구복신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부처를 믿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불교가 중국에 토착화하기 위한 포교의 전략이라 말할 수도 있다. 불교를 믿어 현실적인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대중들의 욕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러한 포교전략을 구사하게 된 이면에는 중국불교 전래 초기 포교의 대상자들이 주로 서민대중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어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되는 데는 4백여년의 시간이 걸리며, 특히 312-316년 사이에 발생하는 '영가의 난' 이후에야 전반적으로 귀족 내지 상층 지식인들이 불교를 신앙하거나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서민대중들이 주로 불교에 의지하고 있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서민대중들이 불교에 의지한 것이 단순히 구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전술한 바가 있듯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이미 황로도나 태평도 등 도교 계통의 민간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민들이 불교에 귀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 학자들은 불교의 삼세양중인과론에서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 바로 윤회설에 그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중국고대는 계급사회였다. 불교가 유입된 후한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제후-공-경-대부-사-농-공-상-노예라는 계층 구조 속에서 사(士:선비), 혹은 농민 이상은 신분 이동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그 이하 계급은 천형처럼 자신의 계층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전쟁 등의 사회적 혼란 내지 특별한 천재지변 등의 급격한 변혁기를 제외하면 신분이동이란 거의 불가능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에 따라 자신의 삶과 미래가 결정되어 버렸기 때문에 신분의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불교는 중국에 유입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서민대중들의 현실적 불안과 계급모순이라는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계급모순의 해결은 급선무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삼세양중인과설이었다. 현실사회의 다양한 모순, 신분이동에 대한 갈망, 안락한 삶에 대한 희구 등에 대해 이 보다 적절한 방편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현실이란 과거의 결과이다.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내생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즉 현세에 선업공덕을 많이 쌓은 결과 내생에는 원하는 계급으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왜 불교가 보다 적극적으로 일체는 모두가 평등한 것이기에 선천적인 계급이란 있을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그처럼 불합리한 제도가 있으면 그것을 극복하도록 대중들을 유도하지 못했느냐는 지적이다. 오히려 불교는 현실을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대중들의 저항의지를 꺾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중국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는 보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역사발전에 저해요소가 되었다는 비판은 현대 중국의 역사학자 내지 사상사가들의 공통 입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 왕권 사회였던 당시 중국에서 상류층 내지 지도층은 불교를 거부하고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계급모순을 해결할 논리도 개발하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견강부회라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상과 같은 비판이 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포교현실 혹은 불교의 내적인 역량의 부재로 밖에 변명할 길이 없다. 산발적으로 들어온 이국 승려들이 전제왕권과 직접 대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극적이지만 현실에 순응하고 내생을 기약하라고 유도하게 되며, 그나마 유교나 도교와 달리 계급모순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였기에 서민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북조시대를 거치며 불교계의 역량이 커지면서 불교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 등장한다는 점, 이후 중국사회의 변화를 획책한 혁명가들의 사상적 근거가 불교에서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삼세양중인과론을 통해 당시 서민들의 한계를 해결해 주려고 했던 점은 타당한 선택이었다고도 생각된다.

2. 신멸신불멸론(神滅神不滅論)의 전개

이상에서 중국에 유입된 초기 불교신앙의 양태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으며, 그 핵심에 삼세양중인과론이 있다고 말했다. 삼세양중인과론은 윤회설을 기초로 전개되는 이론이다. 윤회의 당체가 있어서 끊임없이 윤회하며, 각각의 생존기간 동안에 지은 선악 업에 따라 다음 생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비판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정신도 사라지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윤회의 주체, 즉 육체는 소멸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궁극적인 실재를 신식(神識), 혹은 식신(識神)이라 부르든가 혹은 정신, 영혼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논쟁은 상당기간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게 된다. 여기서는 우선 그 전개과정과 주장의 핵심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신(神)이란 영혼이나 정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신의 지속 여부는 윤회의 문제와 결부되어 일찍부터 중국 내부에서 많은 사람들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현실중심적이고 내세관이 명확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에게 윤회를 가르치는 불교는 매우 이질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래 초기의 이러한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이혹론>>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모자가 저술한 이 책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이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태어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하고 묻자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되는 것이며, 귀신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자는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 다만 육체만이 썩어질 뿐이다. 육체는 예컨대 오곡의 뿌리나 잎과 같은 것이고, 영혼은 오곡의 씨앗과 같아서 뿌리와 잎은 나오면 반드시 시들지만 씨앗은 끝이 없다. 그처럼 도를 체득한 사람도 육체는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라 말한다. 이어서 "도를 닦아도 죽고 닦지 않아도 죽는다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하는 질문에는 "도를 얻으면 설사 육체는 죽더라도 영혼은 천당으로 가지만 악한 일만 행하였다면 죽은 후에 영혼은 재앙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인과응보설을 응용하여 이러한 질문을 이끌어 내고 있다.

모자의 시대에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이후 불교의 보급에 따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불멸이 가능한가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영혼의 불멸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불교이며, 불교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상가들 내지 종교에선 영혼의 소멸을 논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4세기초 축승부의 <<신무형론(神無形論)>>이 출현하고, 여산의 혜원스님은 <<사문불경왕자론>>에서 <형진신불멸론(形盡神不滅論)>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가 되면 정신의 멸불멸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가열된다.

유송시대에 이 논쟁에 불씨를 지핀 사람은 혜림(慧琳)이라는 스님이다. 그는 <<백흑론(白黑論)>>을 지어 영혼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더불어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혜림 스님이 지은 <<백흑론>>은 전하지 않는다. 당시 혜림 스님은 다른 스님들의 배척을 받았는데 유송의 문제가 도움을 주어 바라이죄를 면하게 되었다. 이 무렵 하승천이란 고관이 종병이란 학자에게 편지를 보내 <<백흑론>>에 대한 평가를 당부했다. 종병은 이 글을 읽고 <<난백흑론>>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홍명집>>에 남아 있어서 혜림의 사상적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종병의 글에 의하면 혜림 스님은 "죽음의 이치는 인간세계의 일만으로 다할 수가 없다. 주공과 공자는 이 도리를 의심하였지만 밝히지는 못하였고, 석가모니는 말을 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니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영혼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그 논리의 바탕은 본래공무(本來空無)의 론이다. 연기적 실상의 세계에선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가 규정되지만 그것이 흩어지면 영혼이라 할 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종병은 호교적 입장에서 혜림의 주장은 불교가 중국에 필요치 않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공격하면서 공이나 무(無)라고 하더라도 연기법 자체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람의 몸은 매우 조잡한 것이나 사람의 정신은 실로 미묘한 것이다. 몸은 정신에 종속되며 결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거나 "최상의 밝은 지혜와 가장 오묘한 뜻을 가지고 성심으로 그 신명을 다한다면 감응하여 신체를 받고 칠보정토(七寶淨土)에 태어나는 것이 어찌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인가"라 말하며 영혼의 불멸과 윤회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또한 종병은 <<명불론>>에서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지무(至無)한 도(道)에 돌아가는 것이니 모두 같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연에 따라서 변천하고 유전하여 조잡하거나 미묘한 의식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근본정신과 함께 불멸이다. 예컨대 순 임금은 고( )에서 태어났지만 순 임금의 정신은 역시 순임금 자신이 양육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들 상균의 정신 역시 순 임금이 기른 것은 아니다.

생육 이전에 처음부터 조잡하거나 미묘한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근본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성립된 것이므로 죽은 뒤에도 불멸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불멸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구별되며, 이지(理智)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나 성스러운 자나 생사를 되풀이 하는 가운데서도 불멸의 부분만은 변함이 없다."라고 말한다. 종병은 <<서응본기경>>의 영향을 받아 정신에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도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생사와 그 속에서의 수행을 지탱해 주는 것으로서 정신의 불멸을 주장하는 것이다.

종병은 정신을 성불론과 결부시켜 정신이 불멸이므로 숙연의 작용으로 마침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부처 자체를 나타내는 법신에 대해서는 "정신이 지극하면 형체를 초월하여 정신이 홀로 있게 된다. 형체가 없이 정신만 있다는 것이 법신상주의 의미"라 말한다. 종병이 자신의 영혼불멸설에 법신사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이 당시에 불성론 내지 법신론이 중국에 원시적인 상태나마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8천송반야경>>에서는 법신에 대해 "불타, 세존은 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결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신체를 부처의 신체로 생각해선 안 된다. 비구들이여 나를 법신의 완성으로 알지어다."(4장)라거나 "실로 여래는 색신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여래는 법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야부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법신은 반야바라밀을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직 여래장 사상에서 말하는 법신사상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종병의 뒤를 이어 신불멸론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정도자가 있다. 정도자는 현실 속에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정신의 본체는 빛으로 가득하고 미묘하게 신체를 통괄하며, 신체는 호흡에 의지하여 활동하고 정신을 깨달음에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가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정신은 지극히 미묘한 삶의 본원이므로 육체가 소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나아가 정신을 현학에서 말하는 태극에 견주기도 한다.

양대에 들어와 불교의 영혼불멸설에 반기를 들고 신멸론을 주장한 사람은 범진(范縝:450-515)이다. 그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정신과 육체는 상즉하는 관계라 설명한다. 그의 <<신멸론>>에 의거해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신이 소멸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정신이 바로 육체고, 육체가 바로 정신이다. 그래서 육체가 존재하면서 정신도 존재하고, 육체가 없어지면 정신도 없어진다." 또한 "육체는 지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정신은 지각이 있다. 지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별개인데 어떻게 상즉한다고 하는가?" 하는 질문에 "육체는 정신의 본질이며, 정신은 육체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육체는 본질을 말하며, 정신은 작용을 가리킨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여 정신과 육체의 불가분리성을 주장한다. 또한 감각의 위치 문제를 놓고 "육체가 정신이라면 손들도 정신이며, 손들도 생각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아픔이나 가려움 들을 지각하는 작용은 있지만 시비를 판단하는 사려는 없으며, 깊고 얕음의 차이는 있다"고 대답한다. 나아가 "육체가 소멸하면 정신도 소멸한다면 왜 <<효경>>에선 '조상을 위하여 종묘에서 제사를 함에 귀신이 흠향한다'고 하는 것인가?"하고 묻자 범진은 "성인의 교화가 그러한 것이다. 효자의 마음을 따라서 인정이 야박한 것을 꾸짖기 위함이다.

<<주역>>에서 '귀신이 그것을 밝혀준다'고 한 것은 이것을 지칭하는 것이다."고 대답한다. "<<주역>>에서 '귀신의 마음과 모습을 알아야 천지와 더불어 서로 비슷하고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귀신이 가득 넘쳐 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사람이 되고 귀신이 되는 것은 어둠과 밝음의 차이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귀신이 사멸하여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범진은 <<답조사인>>이란 글에서 사후에 영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설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서민을 교화하고 그들에게 효자의 마음을 심고 길러주어 조금이라도 경박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회윤리적인 차원에서 성인과 서민을 구분하고 있는 데 이것은 유교적 관점의 계급의식이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남북조시대를 통해 전개되었던 신멸신불멸론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은 신멸론자들은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 내지는 이교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반면에 불교도들 내지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윤회설 내지 성불론과 영혼불멸을 결부시켜 불교를 대변하는 것처럼 분리되었다.

신멸론자들의 논리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논리의 전개상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神)에 대한 해석이 다의적인 만큼 치밀한 논지의 전개가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정신의 소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신의 개념이 막연하고, 주창자의 입장에 따라 그 개념이 다르게 사용되며, 특히 중국 고전을 인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 내지 증명함으로써 중국적인 사유에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정신을 인과응보라는 차원에 한정하여 파악하는 단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정신 자체의 공성이나 연기성에 대한 사유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근본불교의 무아설에 의하면 불멸의 근원적인 실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연기성에 입각하여 현실을 파악하고, 해체론에 입각하여 무아설을 전개한다. 이것은 인도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혁파하고, 가장 인간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염원의 발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에서 전개되는 신멸신불멸 논쟁은 근본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내에서도 삼론종은 4구분별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신불멸론을 4구분별에 의거해 보자면 상견(常見)에 해당하고, 신멸론은 단견(斷見)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모두 타파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에 대한 언급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자신의 교양과 호오에 의지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3. 논쟁의 문화적 배경

중국불교사에서 전개된 신멸불멸의 논쟁이 지니는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수당 이래 존재의 궁극적 실체에 대한 논란은 종식되게 된다. 신불멸의 입장에서 이후의 중국불교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초기 인도불교는 연기론의 입장에서 무아설을 제창하게 되지만 초기불전들, 즉 <<아함경>>에서도 영혼불멸을 언급하고 있는 등 이중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인도사회의 통속적인 윤회설을 수용하고 있다. 이런 점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전통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던 영혼불멸의 관점에서 불교의 윤회설을 수용한 결과이며, 따라서 불멸의 영혼을 윤회의 주체로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을 선양한 대표적 인물들이 바로 동진의 혜원과 남조의 양무제라 말할 수 있다.

혜원은 <<신불멸론>>을 찬술하고, 양무제는 <<입신명성불의기>>를 저술하여 사람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으며, 신성(神性)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들은 많은 반론에 부딪히지만 영혼과 불성의 일치, 영혼과 태극 내지 도의 일치, 영혼과 법신의 일치라는 일련의 융합과정을 통해 인도불교와 중국의 전통사상이 교묘하게 결합하여, 민중 속에 새로운 관념으로 보편화시키게 된다. 숱하게 등장하는 응보설 내지 영험설화의 논리적 기반이 이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영혼불멸설의 고착화와 그 문화적 배경에 대해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몇몇 불교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혜원의 주장과 그 문화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혜원은 그의 <<사문불경왕자론>>이라는 논문에서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고 있으며, 주장의 논거를 <<장자>>나 <<주역>> 등 중국의 고전에서도 찾고 있다. 그는 불변의 법성(法性){{ 일체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법성이라 한다.

결국 불변의 궁극적 본질이 모든 사물에 내재한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을 주장하는 데서 출발하여 사람의 정신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불멸의 영혼이 윤회응보의 주체이자 성불의 근거로 본다. 일반인들은 생사유전 속에 놓여져 있으며, 이것을 순화(順化)라 표현한다. 불교의 종지는 '근본을 돌이켜 근원을 찾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정신이 되돌아가야 할 곳과 법성이라는 본체가 서로 교묘하게 결합했을 때 열반의 경계에 진입하게 되며, 정신이 법신으로 전환하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좌선을 통해 법성과 합일하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를 "생각도 없고 인위적인 움직임도 없으나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는(無思無爲而無不爲)"{{ 혜원의 <<여산수행방편선경서>>(<<출삼장기집>>권9)}} 경지로 묘사하며, 명신절경(冥神絶境)의 열반경지에 진입했다고 본다. <<불영명(佛影銘)>>이란 책 속에서 혜원은 법신을 '신령스러운 감응'의 소재처로 간주하고 있으며, 또한 법신을 홀로 존재하는 정신으로 파악한다. 혜원의 제자인 종병은 혜원의 법신에 대해 "육신이 없이도 정신을 보존하니 법신을 말한다."{{ 종병, <<명불?gt;>(<<홍명집>>권2)}}거나 "형체는 없으나 정신은 존재하는 것이니 법신상주를 말한다."{{ 종병, <<답하형양>>(<<홍명집>>권3)}}고 평하고 있다.

영혼불멸에 대해 혜원은 '불과 장작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사문불경왕자론>> 중에서 "불이 장작에 전달되는 것은 정신이 형체에 전달되는 것과 같다.

불이 다른 장작에 전달되는 것은 정신이 다른 형체에 전달되는 것과 같다. 앞의 장작이 뒤의 장작은 아니지만 손가락으로 다하는 기술의 오묘함을 알 수 있다. 앞의 형체는 뒤의 형체가 아니지만 감정이 헤아리는 느낌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다. 미혹한 사람은 일생을 통해 형체가 낡아지는 것을 보고 정신과 감정이 함께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하나의 나무에서 불이 다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혜원의 <형진신불멸론> 속에서.}}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국고대의 전통사상과 인도불교와의 만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선진시대의 장자 역시 일찍이 '장작과 불의 비유'를 언급한 적이 있다. 즉 "손가락의 다함이 앞의 장작과 같아서 불이 전달되는 것이니 그 다함을 모른다."{{ <<장자>> 양생주. "指窮于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여기서 窮과 盡은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며, 爲薪은 猶前薪으로 해석. 중국 중화서국간행의 <<장자집석>> 참조. }}고 말한다.

장작은 다 탈 때가 있지만 불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전달되어 끝남이 없음을 의미한다. 혜원이 <<장자>>에 나오는 '불과 장작의 비유'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의 비유는 <<장자>>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불경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설일체유부의 나선 비구는 일찍이 불이 장작에 전달되는 것을 비유로 윤회를 설명하고 있으며, <<법구경>>은 참새와 그릇, 불과 장작의 비유를 통해 형체와 정신의 분리를 설명하고 있다. 혜원 역시 이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불과 나무의 비유도 근원이 불경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다만 올바른 전승을 잃었기에 유현한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미묘한 말도 마침내 세속적 가르침에 잠겨버려 말하는 사람이 의심하게 했다."{{ 혜원, <형진신불멸>(<<홍명집>>권5)}}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나 노장 모두 '장작과 불의 비유'로 형체와 정신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웅변하며, 혜원은 불교적인 요소와 중국 고대 전통사상의 유관 자료를 적절하게 융합하여 그의 신불멸론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숭불황제로 알려졌으며, 달마와의 문답으로 불교 역사상 유명해진 양나라 무제는 <<입신명성불의기>> 등의 저술 속에서 신명(神明)론을 주장한다. 즉 무제는 신명은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언제나 존재하는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신명은 단절하지 않음을 정신으로 삼고, 정신은 반드시 미묘한 깨달음으로 돌아간다."{{ 대정장52, 54b. 神明以不斷爲精.精神必歸妙果}}고 말하거나 "마음이 작용의 근본이며, 근본은 하나이지만 작용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닌 작용에는 자연 흥망성쇠가 있지만 유일한 근본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상동, 何者夫心爲用本.本一而用殊.殊用自有興廢.一本之性不移}}고 말한다.

특징적인 것은 양무제는 하나의 근본에 무명과 신명(神明)의 두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을 연상시키는데 무명이 바로 생멸하는 현상을 드러내는 신명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양무제는 근본이란 용어 대신 마음이란 개념을 활용하기도 한다. "마음으로 그 근본을 삼으니 일찍이 변한 적이 없다. 작용의 근본이 단절하지 않기 때문에 성불의 이치가 분명하고, 대상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생사를 모두 밝힐 수 있다."{{ 心爲其本.未曾異矣. 以其用本不斷故.成佛之理皎然.隨境遷謝故.生死可盡明矣.}}고 말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양무제 역시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영혼이란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는 불교의 불성론 내지 유식사상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전래의 영혼설과 쉽게 상통할 수 있는 길을 이론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멸신불멸의 논쟁에서 혜원과 양무제가 형체는 사라지더라도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므로 수많은 비판과 논란에 휩싸이게 되며, 이러한 논란의 진행과정은 전술한 바가 있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할 것은 이 논쟁의 핵심에 '인과응보'의 가능여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북조시기 불교계는 인과응보론과 중국전통의 영혼불멸설을 결합시켜 중국특유의 인과응보설을 탄생시키게 되며, 이것은 불교의 토착화와 중국의 불교화라는 거시목표를 위한 전술이기도 했다.

중국에는 불교의 인과응보설과는 별도로 화복응보(禍福應報)의 사상이 있었다.{{ 賴永海, <<中國佛敎文化論>>(중국청년출판사,1999), p.50 참조.}} <<주역>>에서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으며, 악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증자는 일찍이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아직 오지는 않았더라도 재화로부터 멀어진다. 사람이 악을 행하면 재화(災禍)가 아직 오지는 않았더라도 복으로부터 멀어진다."고 가르쳤다. 이상의 실례 이외에도 화복응보와 유관한 민간전설이 무수히 남아 있다.

다만 중국의 화복응보사상은 불교의 인과응보론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불교는 업보설에 입각하며, 업보란 업 자체의 응보인 것이다. 따라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중국고대의 응보사상은 옥황상제나 귀신의 권선징악에 의거하여 실현된다. 두 번째는 응보의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불교에선 응보의 주체로 푸드갈라 내지는 식신(識神)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전통 관념에서 바라보는 응보의 주체는 불멸의 영혼이다. 셋째 불교의 인과응보론은 논리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번쇄(煩 )한 분석과 논증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윤회응보와 윤회의 주체 유무를 둘러싼 논리적 모순을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다. 반면에 중국 전통의 응보설은 경험적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여기에는 착한 사람이 단명하고 궁핍하게 살거나 악한 사람이 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등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라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업보응보설 혹은 화복응보설이 지니고 있는 모순점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사상가 내지 운동가들은 신불멸론에 입각하여 업보가 나타나는 유형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다. 혜원의 '삼보론(三報論)'을 비롯해 도생의 감응론, 수대 천태의 감응론 등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산혜원과 양무제의 신불멸론의 등장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신멸신불멸의 논쟁은 축도생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축도생은 중국 전래의 노장사상, 혹은 주역사상의 핵심개념인 도, 태극, 리(理)라는 개념을 불교의 반야사상 내지 불성론에 교묘하게 결합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축도생은 반야학을 기초로 불성론을 주장했다. 이전의 학자들이 주장했던 영혼설과 달리 반야실상학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의 반야학은 소상절언(掃相絶言)을 특징으로 노장사상의 득의망언의 사상과 융합하게 되며, 현학에서 태극(太極), 역(易), 도(道), 리(理)라 표현되고 있었던 언어를 초월해 존재하게 되는 본질적인 그 무엇을 불성아, 대아(大我), 진아(眞我)라 부르게 된다.

축도생은 이러한 사상을 근거로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불성론을 수립하게 되며, 나아가 불성은 나눌 수도 단절할 수도 없다는 발상에서 돈오성불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것은 중국전통의 현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본체론의 입장에서 불교의 불성론을 수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면을 들여다본다면 영혼불멸설의 입장에서 불성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전통의 영혼설과 불성론을 결합하여 하나의 방향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心性을 본체로 삼고 있는 수당 이래의 각 종파와 완전히 중국화된 불교학설들이다.

4. 맺는 말

이상에서 신멸신불멸논쟁의 전말과 그 과정, 문화적 배경에 대해 육조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영혼이라는 실체의 유무, 윤회와 업보의 주체 등에 대한 문제는 이미 초기불교 이래의 논란거리였다. 공간적 배경을 달리해 중국불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중국의 불교사상가들은 영혼불멸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것은 이론의 정합성 문제 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국화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문화적 배경을 달리하는 사상이 특정한 문화권에 진입하여 토착화하는 과정에는 다양한 조건이 구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남북조시기 중국불교사상가들이 형체는 다해도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집한 것은 포교와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선택의 여파로 후대 중국불교가 미신화의 함정에 빠질 여지를 남겼다는 점은 예외로 해야 할 것이다.

윤회의 주체문제에 대해 중국인들의 결론은 그 주체를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수행론까지 체계화하게 된다. 그러나 불교사상의 근본적 입장에서 윤회의 주체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의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듯 하다. 이 논문 역시 그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초기불교의 근본경전들, 즉 <<아함경>> 등에서도 이미 서로 다른 이론이 엄연히 함께 등장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논리는 편의적인 불가지론에 불가하다고 판단해야 마땅한 것인가?

본론의 주제는 아니지만 관계가 있기에 소견을 밝히자면 이러한 논쟁은 불교의 본질을 깊히 파악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불교의 무아설이 실체를 부정한 것은 사실이며, 그로 인해 인도사회의 고질병인 계급모순, 직업선택의 자유, 자유의지의 존중과 현실 인정이라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무아설을 주장함으로써 도덕부정론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비판에 직면하여 고심하게 되며, 그렇기에 상속설과 푸드갈라설, 신식설 등 다양한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체의 유무를 둘러싼 논쟁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윤회의 주체가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이 불교가 처음부터 추구했던 것이며, 그것을 위해 제기된 방법의 하나가 수기설법이라는 형식이다. 결국 수기설법이란 듣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설법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 정합성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유경>>에 나오듯이 독화살을 뽑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지 그 이외 원인을 찾는 것은 법에 상응하지 않고, 열반에 상응하지 않으며, 범행에 상응하지 않고, 요의경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4구논리에 의해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때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반야사상가들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 삼론종의 승랑이 주장한 이제합명중도론이나 길장의 사제중도론 역시 열반의 획득을 위해 주체의 유무에 구애받아선 안 됨을 밝히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점들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차단한 채 원론적인 주체의 유무문제만을 거론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불교교리에는 논리적 정합성을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다. 그렇다고 그것을 방치할 수 없는 것 역시 현실이다. 가능한 범위까지 다양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학자들의 본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의 가르침이 이론 보다는 실천에 비중을 두고 그렇게 유도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절대선이란 열반 이외에 없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중국불교 역시 이러한 점을 유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과 일반 서민을 상대로 한 이론에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본론의 주제는 아니었지만 필자의 견해를 피력했다. 현실은 여하튼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종, 천태종, 화엄종 등의 이론은 이미 일원화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는 유신론화 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중국전통의 영혼설, 현학에서 말하는 도(道), 대승불교의 힌두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본다. 특히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신사상과 현학에서 말하는 도의 개념은 유사한 사유 구조를 지니고 있었기에 쉽게 융합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멸불멸 논쟁은 단순한 윤회의 문제, 만물이 지니는 궁극적 실체의 존재유무를 떠나 중국불교사상의 본체론화를 부추겼으며, 그 영향은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차차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저역서로 <구도자의 나라>(공저)<불교상식백과>(공저)<중국불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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