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기획특집
     
윤회 없는 불교는 불가능한가 / 최은영
특집 2 - 윤회, 사실인가 믿음인가
[20호] 2004년 10월 10일 (일) 최은영 517600@hanafos.com

1. 세간도의 법

불교는 크게 세 가지의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첫 번째 범주는 세간도로서 설명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갖고 있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으며 마음의 덮개 즉 번뇌의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세계가 나타나게 된다.

세간도에서는 마음이 이미 여러 가지의 장애와 업에 의해 덮여지고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나타나는 세계와 현상도 번뇌만큼 나타나게 되고 번뇌가 사라지면 사라진 만큼의 세계와 현상이 펼쳐진다.

불교의 교리로 배대하면 5온(蘊) 12처(處) 18계(界)가 그 속에 포함되고, 순관(順觀)의 12연기 또한 그러하고, 번뇌가 흐르는 유루(有漏)와 작용하는 바가 있는 유위(有爲)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 세간도에 포함되는 유루와 유위의 세계는 번뇌가 존재하고 번뇌에 의한 유위의 작용이 끊임없이 현행하기 때문에, 일정한 것은 전혀 없어서 항상 마음은 누수를 겪으며 변화하고, 그에 따라서 의지하고 귀의해야 할 아(我)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과 정신의 화합체인 '5온(五蘊)은 고(苦)요 공(空)이요 무상(無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주체인 안·이·비·설·신·의와 그 대상인 색·성·행·미·촉·법 12처의 우리가 아는 일체 또한 번뇌가 항상 누수하고 뭔가의 작용이 있는 유루와 유위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마음의 덮개에 의하여 마음의 때[垢]의 저장된 정도에 따라서 그 나름대로의 법칙성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윤회의 법칙이다.

원래 윤회는 불교 고유의 사상은 아니고 인도 전통의 사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윤회 사상을 불교에서 채택한 이유는 마음의 번뇌에 따라서 그 생사를 거듭함이 세간도의 법칙과 일치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불교에서는 윤회가 펼쳐지는 세간도에 욕계·색계·무색계의 3계와 태생·난생·습생·화생의 4생(生)과 천·인·수라·아귀·축생·지옥의 6도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윤회의 세계는 고정된 개념에 의하여 시설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에 의하여 시설된 것이므로 고정불변의 세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불교의 세간도에서는 윤회를 인정하지만 윤회 그 자체가 과거의 업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과거의 업도 무상성(無常性)을 담보하고 있고 고정불변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수행과 타인의 도움[他音]으로 제도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인과의 변화성을 중시한다.

또한 단계도 상하개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평면적인 관계임을 설정하고 있다. 생사를 거듭하면서 현생은 과거의 업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미래 태어날 환경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그 하나하나가 완성된 삶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상하의 기준이 아니라 평면적인 나열의 관계로 보고 있다.

그러면 윤회도상에 있는 3계 4생 6도를 평면적 관계로 살펴보자.

욕계란 그야말로 욕심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색계는 욕심은 많이 벗어났지만 물질은 남아 있는 세계이며, 무색계는 욕심이 거의 남이 있지 않아서 물질은 벗어나고 고도의 정신만이 남아있는 세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심의 세계인 욕계를 벗어나면 반드시 그 다음의 세계인 색계로 가는 것은 아니다. 욕계에서 색계로 갈 수도 있고 무색계로 갈 수도 있으며 3계를 벗어나서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난·습·화의 4생의 관계도 태생에서 태·난·습·화생의 각각으로 태어날 수도 있지만 번뇌가 다하여 생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난생과 습생과 화생의 경우도 위의 경우를 벗어나지 않는다.

천·인·수라·축생·아귀·지옥의 6도의 경우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천에서도 인·수라·축생·아귀·지옥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모두 열려 있는 것이다. 간혹 경전에서는 천상의 존자들이 낡아지고 변화하는 쇠손(衰損)을 견디지 못하여 다음 계(界)인 인간이나 수라로 떨어지지 않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천의 존재들은 번뇌가 엷고 엷어서 그에 상응하는 천계에 태어나지만 주어진 상황이 좋은 만큼 그 반대로 그 상황의 변화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화관에 티끌만한 때가 묻었다고 해서 분노를 일으켜서 바로 화탕지옥으로 빠지는 천자들의 모습에서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깨끗한 곳에 살기에 조금의 더러움과 변화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자들이 분노를 일으키면 인간으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어떠한가?

천자와 인간의 스승이신 천인사(天人師) 부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셨어도 인간의 희론과 업을 극복하셨기에 인간보다 상층에 존재하는 모든 천의 세계를 지도하신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인간은 고정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중동분(衆同分){{ 동일한 유정(有情)의 개념을 생기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의 습(習)을 많이 익혔으면 동일한 개념의 인간의 부류에 포함되기 쉽다. 중생들이 자기가 살았던 그 세계의 모습과 같은 과보를 얻게 되는 원인(因)을 의미한다.
}}이 있어서 인간은 인간과 유사한 행동과 가치를 익히기 때문에 그에 상당한 인간계로 태어날 확률이 높겠지만 마음의 업과 번뇌를 다 극복하면 천상은 물론 타섭계(墮攝界){{ 타(墮)란 3계(界)를 벗어나 섭속(攝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가 아닌 어떤 곳에도 매이지 않는 비타섭계(非墮攝界)인 해탈계과 열반의 상태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6도의 어느 것도 미래를 고정적인 관계로 설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귀는 피고름을 맑은 강물로 본다고 한다. 자기의 인식의 정도에 따라서 전도적으로 대상을 본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인간을 극복하고 인간 안에 존재하는 6도의 군상(群像)을 제거했을 때, 인간 안에는 인간의 업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6도의 어떤 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초기불교경전인 『아함경』에서는 대체로 윤회도상에 있는 세간의 존재를 부정한다. 세간의 존재를 인정하면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고 고해(苦海)라는 윤회의 바다에서 헤어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함은 세간이 출세간과 연결되어 있고 이 번뇌의 고통이 열반과 둘이 아님을 알면서도 고통의 현실보다는 열반을 강조하고 이욕(離欲)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아함경』의 교설은 현실탈피적인 것을 주요 덕목으로 삼는 경향도 강하다. 재가보다는 출가, 소유보다는 무소유, 윤회보다는 해탈, 번뇌보다는 열반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인도라는 특정지역의 교화 대상의 중생의 상태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출가와 무소유와 해탈과 열반을 중시하지 않으면 그 세계에 매몰되어서 다음 세계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교설의 특징은 대기설법을 주요한 가르침의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이욕한 중생이 많은 곳에서 교화했다면 부처님의 설법은 어떠했을까? 현대의 문명과 과학이 발달된 정보화 사회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더라도 과연 현실을 저버리라고 했을까?

스스로 대답을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출세간도의 법

두 번째 범주는 출세간도로서 번뇌의 물듦에서 벗어난 세계이며 공의 세계이고, 진여와 반야가 드러나는 세계이다. 세계라고 해서 현실적이거나 가시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언어가 끊어진 세계이며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세간과는 서로 상즉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있으며 생사윤회가 없는 세계이다. 분별이 존재하고 상하와 좌우의 개념이 있고 물질과 정신의 합성이 이루어진 세계와는 같지 않으며, 시비분별이 존재하지 하지 않으며, 무한대의 공이다.

언어의 분별이 떨어진 이 세계는 희론( 論)이 펼쳐지는 3계 4생 6도의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으며,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부를 뿐 세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不可得)이라고 하며, 3계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비타섭계(非墮攝界)라고 하며, 번뇌로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불계(不繫)라고 하며, 작용하거나 끊임없이 생주이멸의 변화를 겪지 않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하며, 번뇌의 누수현상이 없기 때문에 무루계라고 하며, 분별이 떨어졌기 때문에 진여의 반야만이 인정된다.

『아함경』에서는 이러한 세계를 찾기 위하여 또한 알기 위하여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세계 아닌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아(我)를 부정해야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설법에서 무아(無我)를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이다. 실로 세계를 벗어난 인식범위를 벗어난 세계를 초월한 그 세계는 나[我]라는 존재의식과 내것[我所]이라는 소유의 개념이 있으면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무아와 무소유를 강조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세계는 끊임없는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 있다.

초기불교의 아함이나 대승불교 다양한 경전들에서 무수하게 등장하는 내용들의 핵심은 윤회의 세계를 이루는 유위와 유루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윤회를 벗어나고 윤회를 초극하는 이 세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번뇌와 괴로움이 상대적으로 항상 존재하고 변화와 전도가 시시때때로 이어지면서 부처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 세계 이면의 또 다른 세계라고나 할까. 말로 이해할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는 세계가 바로 세계 아닌 이 불가득의 세계일 것이다.

윤회의 세계에서는 태어남이 있으면 그 상대적인 죽음의 세계가 있으며, 하나가 존재하면 그 하나가 다름으로 변화하며, 일정함과 끊어짐이 존재하며, 오고 감의 상대적인 개념이 존재하지만, 윤회를 벗어난 세계는 모든 상대적인 개념을 벗어난다. 상대적인 개념의 세계는 둘로 나누는 분별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생멸(生滅)과 일이(一異)와 단상(斷常)과 거래(去來)가 존재하지만 윤회를 벗어난 절대적인 세계는 인식의 분별은 다만 희론( 論)일 뿐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너와 나를 분별하는 순간에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윤회의 도상에 떨어지며 윤회는 시작되는 것이다.

분별이 떨어진 무분별이 바로 유식불교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무분별지(無分別智)이며 삼성설(三性說) 가운데에서는 원성실성(圓成實性)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무분별 그 자체에다 지혜의 지(智)를 붙여서 무분별지라고 하는 것이다. 윤회의 도상에 떨어지는 근본원인은 분별의 희론이 결정적이며 각각의 윤회의 다양한 모습은 정(淨)과 부정(不淨)의 업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한다. 지혜가 없고 번뇌에 뒤덮인 중생은 끊임없이 희론이라는 분별을 짓고 그에 상당한 결과를 취한다는 것이다. 분별의 모습은 수많은 언어와 단어와 말과 문장으로 대변될 수 있다.

불교의 가장 큰 축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출세간도를 중시한다. 미망 속의 중생은 가려진 구름만을 보고 비바람의 고통과 두려움을 즐거움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구름을 벗어난 맑은 청공 같은 하늘을 보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통이요[一切皆苦], 작용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것이 없음이요[諸行無常], 언어와 생각으로 이루어진 모든 개념은 진정한 나가 아니요[諸法無我], 오직 번뇌가 끊어진 열반만이 공적할 뿐이다[涅槃寂靜]'라고 불변의 인장을 찍으신 것이다.

불교의 교리의 범주 가운데에 중관론자들이 자주 쓰고 있는 이제설(二諦說)이 있다.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속제(世俗諦)의 2제 중에 제일의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윤회가 끊어진 열반에 해당하며 무분별지에 해당한다. 중관론자들은 제일의제에 해당하는 불교의 논리도 철저히 타파하고, 세속제에 해당하는 번뇌가 흐르는 윤회의 유루계는 철저히 무시한다. 왜냐하면 번뇌가 흐르는 윤회계는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잡고 그 모습을 그려내는 것과 같은 형상이기 때문이고, 반대의 공(空)도 영원불변의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당시 부처님께서는 윤회 그 자체 보다는 윤회를 벗어난 세계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탐(貪)·진(瞋)·치(痴)의 3독심을 벗어날 것을 강조하셨으며, 3독을 벗어남의 행법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특히 출가자에게는 이미 생명의 이어짐을 끊고 세계를 등졌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보다는 천상 위의 해탈과 열반의 세계를 강조하신 것이다. 당시의 인도의 실정에서 그러한 환경에서 재가를 유지하면서 이욕(離欲) 하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보셨기 때문이다. 재가자는 다만 출가자에게 보시하고 5계만을 지킴으로 천상에 태어나길 바랄 뿐 출삼계(出三界)는 어렵다고 본 측면도 없지 않다. 이미 이욕을 결심한 출가비구 대중에게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오온의 무상성과 존재하는 모든 것의 부정으로 일관하신다. 왜냐하면 윤회 보다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에 중점을 두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는 열반이나 해탈의 제일의제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3. 중도(中道)

불교의 세 가지 범주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은 세간도와 출세간도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상즉관계로 보는 중도설(中道說)이다.

희론의 분별에 의하여 윤회에 떨어지며 정(淨)과 부정(不淨)의 번뇌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띠는 세간도는 분별을 떠나고 윤회를 벗어난 출세간도와 상즉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태자시절 최고의 즐거움을 누렸음[樂邊]에도 불구하고 출가하여 6년 고행으로 고통의 끝[苦邊]을 체득하시고 마지막으로 보리수 아래에서 수련을 통하여 깨달으신 것이 바로 고락의 두 끝은 서로 통한다는 중도의 진리였으며 2변(邊)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緣起]이었다. 양 끝은 결국 하나로 회통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아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도의 이치이며, 불완전의 윤회의 세계는 바로 완전의 열반의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중도의 으로 형성된 구조임을 아신 것이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세계, 유위와 무위의 세계, 번뇌와 열반의 세계, 윤회와 해탈의 세계, 괴로움과 즐거움, 하나와 둘, 항상함과 달라짐이 같은 것임을 아신 것이다. 그래서 분별이 있는 모든 것은 고(苦)라고 표명하고 있더라도 그 심층의 의미는 바로 공(空)과 상즉(相卽)되어 있으며 반야의 진여와도 상즉되어 있음을 아신 것이다.

그래서 최초기의 불교로부터 후기 대승에 이르기까지 중도의 논리는 불교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다만 초기불교는 당시의 깊은 윤회의 늪에서 중생을 빼어내기 위한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방편으로 열반을 강조한 것이다. 방편적인 현실의 부정이지 절대적 부정은 아니다.

대승불교는 이보다 더더욱 적극적인 방식을 취한다. 번뇌가 무성한 차안에서 피안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를 젓는 행위를 해야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보시를 해야 하고 실제로 계율을 지켜야 하고 자타를 인정하여 받아들어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하고, 번뇌를 제거하려 하고, 보면서 계합하려고 다가가야 하며, 지혜를 닦아야 한다는 6바라밀의 정신이다. 차안에서 피안에 가는 것은 그냥 저 산이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야 한다는 논리이다. 현실에서 노를 저어대며 가려고 고생도 하고 그 속에서 락도 있음을 알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가야만이 드디어 고해의 바다에서 나와 일미의 그 바다의 맛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모두 연기로 이어져 있는 자타불이의 중도를 핵심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모두 윤회는 벗어나야 할 대상이며 윤회를 벗어난 피안은 획득해야 할 세계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상하 기준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평면적인 관계에서 말할 뿐이다. 인간의 언어 자체가 분별을 띠고 있고 상하와 좌우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언어문자로 표현된 의미는 그 안의 절대성을 분별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중도의 논리를 담기는 어렵다.

부처님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이 무엇이었던가? '자등명 법등명'. 자신을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라 아니었던가!

번뇌에 덮이고 自他의 상대적인 개념이 있는 자신이 아니라 아(我)의 존재를 벗고 자타불이의 무아인 스스로의 본성에 의지하고 그 본성이 그대로 법이(法爾)로서 흐르는 개념 없는 그 자리[法]에 의지하라는 말씀이 아니었던가?

왜 유언시 부처님께서 '나는 한 말도 설한 적이 없다'라고 하셨을까

말은 이미 쏜 화살에 불과한데도 중생은 부처라는 상을 세우고 그 말씀을 분별의 척도로 삼고 말을 고정화시켜서 시대와 공간과 대상에 따라서 변화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조차도 무상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여래와 중생을 끊임없이 차별하여 여래의 말씀은 고정화하고 중생의 말은 무시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와 절대의 만남과 불완전과 완전의 일치를 중국의 선불교에서는 한층 발전시킨다. 화두의 논리를 보면 한결같이 불가능한 관념이 가능한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주선사는 '개에는 불성이 있는냐?'는 제자의 질문에 '무(無)'로 대답하고 있지 않는가?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데, 스승께서 없다고 하시니 그 제자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화두선의 묘미는 초기불교에서 보이는 이욕하여 번뇌를 하나하나 닦아서 열반에 이름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열반과 번뇌의 상즉의 논리를 아는 데에 힘을 실고 있다. 이 논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음이 상즉하는 것이므로 세상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기에 불가득이라고 하며 유무(有無)가 같다고 보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갖고 있다.

선불교의 체계로 들어가면 '윤회니 해탈이니' 하는 식의 논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의 논리에 의하면 어떤 선상에 있건 우위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 순간이 있을 뿐이다.

인식이 과거에 묶여 살면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지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며 과거로써 현재를 볼 뿐이며. 인식이 미래를 추구하면 미래를 사는 것이지 현재를 잘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의 묶임을 떨쳐버리고 모든 기준과 편견의 늪에서 벗어난 연기의 실상을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러할 뿐임을 인정하는……. 인정 아닌 인정이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디에 매이지 않고 그 순간을 살 뿐이다. 법의 이치는 그러하다.

선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떤 곳에 매이지 않고 현실의 그 순간에 연기적으로 일어나는 사물과 마음의 실상을 여실히 직관하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서로의 연기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계를 분별에 의하여 판단하는 그 자체는 오류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윤회하는 세간도 결코 무시할 대상이 아니며 모든 법계의 화합에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오욕칠정에 빠져서 사는 중생은 열반을 성취하여 오욕락을 벗어난 여래와 둘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불교는 윤회와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을 중도적으로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윤회가 펼쳐지는 세간은 항상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어 선인(善因)에 선과(善果)가 악인(惡因)에 악과(惡果)가 있다고 하지만 선인 그 자체도 고정된 것은 없어서 어떤 연(緣)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과의 법칙도 고정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용수보살은 <중론송(中論頌)>에서 모든 인과의 법칙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인과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회를 인정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은 전생에 지은 업보에 따라서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는 세간도라고 할지라도 그 적용률이 일정하지 않다. 악인도 의식의 잠재력으로 있다가 타연(他緣)을 잘 만나면 홀연히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거나 미래의 고정된 결과에 대하여 매우 금기시 하셨다. 왜냐하면 고정된 결과는 없기 때문이다. 세간이 형성되는 데에 존재하는 윤회도 선악의 기준을 뛰어넘는데, 출세간의 도리는 물론 윤회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윤회도 없지만 윤회가 성립할 오염된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식(識)의 사상이 등장하는 중기대승불교에 이르면 일체중생에게는 모든 불성이 있다는 선언적인 명제를 내린다. 중생은 윤회에 빠져서 그 괴로움을 받고 살지만 그 괴로움은 즐거움과 둘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윤회는 탈윤회의 법칙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깨달을 수 있는 씨앗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간의 다양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윤회사상이 중시되는 것이지, 불교사상의 핵심은 윤회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바다와 같은 심연이 파도가 인다고 해서 문제될 것 없고 이미 바다라고 하면 파도는 저절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윤회하는 세상이나 윤회를 벗어난 세상이나 모두 한 몸을 이루는 것인데, 불교는 제일의제에 해당하는 무위 진여 열반 해탈만을 강조하였을까?

중생이 현실을 고통스러워하고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 속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도 중생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현실의 도구도 인연도 마음도 100%를 완성하고 있다. 이미 완성된 100%를 현실을 살아가는 중생들이 인정하지 않았기에 역설적인 논법이 적용된 것이다. 항상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은 자타 상하 시비선악을 가르는 기준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인식 안에는 항상 불완전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초기불교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인식을 변화하는 수행을 기본 모토로 한다. 너무 많은 분별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편견과 가식으로 덮인 마음의 덮개를 부수어내고 나에 대한 집착과 나만의 견해와 나에 대한 아만과 무지가 타파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윤회의 사슬이 끊어짐을 보는 것이며 현상의 연기적인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적인 관계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것도 우위에 있는 것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을 인정할 뿐이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의 신수심법의 관찰을 위주로 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몸을 받은 중생은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 열반 길에 오르지 못한다고 보아서 이를 위하여 몸의 부정을 관하는 부정관과 백골관과 골쇄관을 시설하셨고 몸의 느낌과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릴 것을 강조하셨다. 몸에 대한 관찰이 이루어지면 호흡을 관하는 수식관을 통하여 몸의 안팎을 관하게 하셨으며 몸과 마음의 관계는 느낌을 통하여 제도하도록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마음의 번뇌를 관하여 제도하여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님을 법의 이치로서 관하게 하셨다.

사념처(四念處)로 대표되는 초기불교의 관법수행은 몸과 마음을 제도하고 모든 번뇌의 사슬로부터 이욕(離欲)하여 법의 이치를 알도록 하고 있다. 결국 윤회하는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에 관계하는 나의 몸과 마음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함으로써 모든 것은 비어있음을 체득하도록 한 것이다.

초기불교 뿐만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다양한 경전에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세를 물거품에 비유하여 허망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윤회의 사슬에 있는 현실은 바로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윤회의 현실을 바로 반전하면 그 자리가 바로 물거품이 꺼진 법성의 자리이며 분별이 떨어진 일미(一味)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는 윤회와 해탈을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분별의 희론과 업에 의한 윤회의 세계는 항상 고통을 수반하므로 벗어나야 할 세계라고 보고 있으며, 분별이 떨어진 무분별의 지혜와 열반과 해탈의 세계는 성취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 세계는 연기적인 관계로 그 끝은 하나로 연결되어 중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의 분별에서 떨어질 때 두 세계는 다름에서 결국 하나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계는 해탈계의 이면으로 둘의 관계는 동체대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윤회계를 불교에서 벗어나야할 세계라고 본 이유는 해탈과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당장 주어진 이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탐진치를 키우면서 괴로움과 모자람에 허덕이는 중생이 아픔을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반쪽만을 알고 반쪽의 현실에 나[我]를 고정되게 묶어놓고 내 것[我所]을 고집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 없기에 부처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셔서 나머지 반쪽을 제시한 것이다.

두 반쪽을 연결시켰을 때의 완전함은 중도로써 표현되며 모든 상대적인 두 극단은 하나로 통하게 됨을 의미한다. 나와 너도 연(緣)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옳고 그름도 연(緣)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생멸과 불이와 거래와 상단과 상하도 고락도 연(緣)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위대한 연기의 도리가 붓다의 진의이며 법성의 도리이고 자연의 법칙이거늘 어찌 윤회를 윤회로만 분별하겠는가?

최은영
고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박사. 현재 한국전통문화학교, 고려대 강사. 논문으로 <천태지의의 불신관 연구>가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