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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바닥에서 불교를 만나다 / 고인환
[20호] 2004년 10월 10일 (일) 고인환 계간 <문학과 경계> 편집위원

불교는 나에게 거창한 종교로 인식되기보다는 구체적이고 일상적 삶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물론 이것이 신앙심 깊고 투철한 종교 활동의 심화에서 우러나오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자연스러운 경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라는 거대담론 이전의 그 어떤 것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데,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면 불교를 꼽곤 한다. 내가 살아온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불교와 관련된 일화는 세 개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첫째, 생시(生時)와 꿈, 비몽(非夢)과 사몽(似夢), 삶과 죽음(제사),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넘실거리는 스님의 이미지다. 이는 어린 시절 제사 체험과 관련된다. 제사를 지내면 흰 쌀밥과 여러 가지 나물을 간장에 비벼 맛나게 먹곤 했다. 이 제삿밥이 너무 맛있어 매일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다고 졸랐다가 부모님께 야단맞는 일도 잦았다. 새벽 1시에 지내는 제사 시간을 기다리다 결국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든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제삿날이면 으레 스님 한 분이 오셔서 맛나게 밥을 비벼먹고 가시곤 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스님이 한 분 계시다고 했다.

어쩌다 졸음을 이겨내고 제사에 참석하면 스님을 만날 때가 있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틀에 박힌 당부가 아니라,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라는 이 침묵의 전언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그때 나는 스님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스님의 고행과 고독, 그리고 외로움이 묻어 있는 그리움의 언행이었으리라 판단된다.

둘째는 문학과 현실, 절과 집, 노동과 수행 사이에서 '아우라'를 발하던 스님들의 이미지다. 이는 중 · 고등학교 시절의 방학과 관련된 에피소드다. 부모님들의 교육열에 이끌려 나는 중 ·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다. 고향을 등지고 서울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객지 생활은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곧장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으레 책을 싸들고 절로 들어갔다.

스님이 고향 인근의 절에 주지로 와 계셨기 때문이다. 절에서의 생활은 힘들고 외로웠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부모님들은 교과서나 참고서를 싸들고 절로 들어간다고 무척 기뻐하셨지만, 실은 소설책을 한 보따리 가지고 들어간 것이다. 그 읽기 힘들었던 염상섭의 《삼대》나 채만식의 《탁류》같은 작품은 이 시절 절에서의 생활이 아니었다면 독파하지 못했으리라.

스님은 가끔씩 불러 차를 끓여주기도 하면서 생활을 다잡아 주셨다. 노동과 동떨어진 삶은 지양(止揚)해야 한다며, 사찰의 일을 찾아 도와가면서 생활하라고 하셨다. 스님이 권해주신 책도 수십 권이나 된다. 지금도 나의 책꽂이엔 그 때 스님이 사 주신 책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높은 암자에서 수행하는 스님에게 양식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작은 연못에서 팬티만 입고 동전을 줍기도 했다.

스님 몰래 10여 리를 내려가 술을 추렴해 먹기도 했다. 절에서의 생활은 승려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속세와 함께 하는 구도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특히, 고시공부를 하던 형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던 비구니 스님들의 투명한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셋째는, 수행과 포교, 도량과 농촌,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길항(拮抗)하는 스님의 이미지다. 최근 한 젊은 스님을 만났다. 문예잡지를 만드는 모임에 참석하고 우연히 합석하게 된 자리에 스님 한 분이 오셨다. 겉모양만 스님이었지 모든 것이 보통 사람들과 비슷했다. 곡차도 드시고 담배도 태우셨다.

특히 식사를 많이 하셨다. 그날 스님과 원효에서부터 마르크스 그리고 종교와 오리엔탈리즘까지(때로는 담담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때로는 격앙된 목소리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평등을 실천하는 공동체의 도량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했다. 이 절에 가서 안식과 휴식을 구하려 한다면 큰 코 다친다고 주위의 사람들이 말했다.

누군가가 절 밖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더 편하다고 덧붙였다. 이 도량에서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 우리들은 얼마나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스님이 주신 명함을 다시 꺼내보니 '수행(禪農一致 · 禪敎一致)과 포교(지역농민과 함께하기)의 실천도량입니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꽂혔다.

흔히 종교의 문턱이 너무 높다고들 한다. 너무 초월 쪽에 강조점을 두기 때문이 아닐까. 종교의 문은 일상의 삶과 거룩한 세계가 교섭을 갖는 장소이다. 세속적인 것에서 거룩한 곳으로, 그리고 거룩한 세계에서 속된 현실로 전이를 가능하게 하는 유동적인 장소인 것이다.

문제는 종교의 지향점이 초월성의 경험을 거친 뒤에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회귀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꿈꾸는 문학의 운명과도 닮아 있다. 인간은 초월을 꿈꾸지만 결코 일상을 벗어날 수 없는 모순적 운명을 지녔다.

나는 그래서 일상의 바닥에 스며든 불교, 그리고 문학이 좋다. 초월성은 인간의 세속적 삶을 성찰하기 위한 거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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