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종교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의 정의와 특질에 대해 보아왔다. 이것은 이른바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종교학은 주로 위에서 본 종교적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종교적인 현상이 이렇다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하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종교에는 인간의 다른 부분의 삶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교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신앙을 지키고, 동북아의 불교도들은 목숨을 내놓고 인도 순례길을 갔던 것일까와 같은 질문에 선뜻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또 다른 질문들도 이어진다. 지구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교 혹은 종교적 현상이 있는데 이들 현상들은 전부 다른 것일까? 아니면 그 다양함을 꿰뚫을 수 있는 어떤 원리나 공통점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 수많은 종교들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등등의 질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면 이렇다. 나는 종교를 처음 공부할 때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론 종교와 불교와 같은 비유일신론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 때문에 작지 않은 혼란에 빠졌었다. 그 이유야 자명하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불교에서는 대체로 그런 신은 없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이 두 주장은 전혀 상반된 것이 되니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게 된다. 따라서 신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한 가지 경우에만 해당될 수 있다.

이런 정황이 나에게는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불교나 기독교(그리고 이슬람 등)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두 종교를 신봉했을 터인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반은 거짓을 믿어왔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붓다나 예수 같은 성자들이 전혀 다른 말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현들에게는 일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는 법인데 이 두 분이 상반된 주장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런 데도 그 종교 안에서 별 생각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이상하게 보였다. 이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만이 확실한 진리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 신자들은 하느(나)님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반면 불교도들은 기독교의 신은 육도 윤회에서 천신 급에 해당하는, 다시 말해 윤회의 굴레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지구상에는 종교가 부지기수로 많다. 따라서 교리도 무척 다양하다. 기독교에만 해도 교파가 2만 개는 더 된다고 하니 그 다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수많은 종교들은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전부 나름대로의 교리만 주장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종교를 만든 우리들은 다 같은 인간이다.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면 우리에게는 어떤 공통된 특질 혹은 조건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된 특질 때문에 종교라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현상이 이같이 다양한 것은 그 종교가 생겨난 각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모든 표현은 문화적인 것이고, 문화적이라는 것은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다양한 종교적 현상 밑에 흐르고 있는 원리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다시 말해 인류에게 종교라는 현상이 왜 생긴 것인지, 혹은 인간의 어떤 조건 때문에 종교가 생겨난 것인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보기로 하자.

1) 인류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왜 인류 역사에는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었을까?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류에게는 종교나 그와 비슷한 현상이 없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선사 시대는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정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종교 의례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보고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 네안데르탈인과 관계된 것일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에게서도 종교의례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유적 중에 어린 아이의 시신을 놓은 자리가 있고 그 시신을 중심으로 돌을 원이 되게끔 둥글게 나열해 놓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꽃가루 같은 것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마 그곳에는 꽃을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단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아마 죽은 아이에 대한 일종의 사령제(死靈祭)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인류도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세계관 속에서 죽은 이에 대해 애도하고 장례를 치러준 것으로 보인다. 죽음에 대해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독특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어떤 동물이 동료의 시체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의례를 행했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종교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심도있게 논의하겠지만 여기서는 그 많은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사실만 밝히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비슷한 정황은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대가 다소 밑으로 내려와 청동기 시대의 유적 가운데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 꽤 보인다. 지척에 널려 있는 고인돌{{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전 세계 고인돌의 40%에 달하고 있다.}}은 말할 것도 없고 울주에서 발견된 반구대 유적도 종교·주술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이 유적에는 고래나 사슴, 물고기, 호랑이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조각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런 동물들이 많이 잡혔으면 하는 바람을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중론이다. 이른바 풍요주술이라고도 하고 종교인류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방 주술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주술적 행위는 전형적인 종교적 행위이다. 유례를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청동기 시대는 제정일치의 사회이다. 이것은 이미 종교가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아마도 꽤나 주술적이었을 샤머니즘이 주된 종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의 다양한 종교 행태는 대체로 이 '원시적인' 샤머니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 다음을 보면 어떤 인류 사회이든 종교적인 요소들이 없는 때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대종교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불교(힌두교), 유대·기독(이슬람)교, 유교 등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체제 종교 시대를 맞이한다. 불교나 기독교 혹은 이슬람교가 이 세계를 재패한 뒤에는 전 세계적으로 명멸했던 수많은 국가 가운데 국교로서 종교를 표방하지 않은 나라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되었다. 굳이 예외를 찾아본다면 현대에 들어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소련이나 동구 같은 나라들밖에 없을지 모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어느 정도 보았으니 여기서는 약술(略述)하도록 하자.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나라에서 종교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주장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 말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시각에서는 맑시즘과 종교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앞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종교, 특히 기독교와 맑시즘은 서로가 그렇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닮은 점은 교조적인 면이다.

기독교가 약 이천 년 동안 '기독교 외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했듯이 맑시즘에서도 '맑시즘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이 두 집단에서는 아주 강한 태도로 응징하곤 했다. 엄청난 용기가 없다면 기독교 집단이나 맑시스트들에게서 이탈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 기독교에서 최후의 심판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처럼 맑시즘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끝나고 유토피아가 오는 것도 구조 상 너무 닮았다. 그래서 맑시즘이나 공산주의를 은밀한(covert)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종교화 되는 가장 적나라한 예를 우리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 숭배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종교에 대해서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한 것으로 유명하다. 샤머니즘은 거의 궤멸되었고 교회나 절들도 과시용으로 한두 개 남아 있을 뿐이지 실제로 신앙에 사용되는 종교시설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북한이 사실은 김일성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국가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한참 앞에서 이미 자세하게 보았는데, 이 관점에서 보면 북한은 김일성 유일신 숭배 국가 이외에 다르게 보일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죽은 김일성이 부활해 달에서 유훈통치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종교이지 세속적인 정치 형태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학자들이 북한 정치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들의 이론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은 북한이 종교국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맥락에서 북한을 신흥종교 집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볼 때 벌써 망했어야 할 국가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종교 집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괴이한 신흥종교 집단이 그 어불성설의 교리나 마수적인 행태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고 기이해 하는데 북한도 꼭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를 가장 억압했으면서 사실은 종교국가 그 자체가 된 북한의 현실은 아이러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인류사에는 종교가 없었던 때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인류사에는 종교나 혹은 그 유사 현상이 없는 때가 없었던 것일까? 인간의 어떤 조건이 종교적인 행위를 하게 만들었을까? 또 동물에게서는 왜 종교와 비슷한 현상이나 행태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동물학자들은 동물도 마음이 있고 지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동물들이 왜 종교적인 행위는 전혀 하지 않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점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 현상을 만들게 했을까?

아니,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기나 하는 걸까? 만일 있다면 그것은 질적인 차이일까(different in kind) 아니면 정도의 차이(different in degree)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여러 질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한꺼번에 다 답할 수는 없다. 우선 도대체 종교는 인간의 어떤 부분을 다루기에 인류와 역사를 같이 했을까 하는 질문부터 접근해보자.

2)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과 그 해결책을 제시

앞에서 우리는 종교의 정의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지만 한 마디로 종교를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까?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 가운데 종교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마도 '궁극적(ultimate)'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총체적인 삶 가운데 종교가 담당하는 부분은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국면이 있다. 먹고 배설하고 성관계를 하는 일차적인 것부터 예술과 같은 고도의 추상적인 행위까지 수많은 국면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먹고 자고 옷을 입고 운동을 하는 따위의 일상적인 행위를 놓고 궁극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일차적인 것이라 다른 동물들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기초적인 조건이 충족되면 삶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인간의 죽음과 죽음에 대해 갖는 공포
이와 같이 의미를 찾기 시작하다 인간들은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여실히 느끼는 국면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 국면이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궁극적인 한계에 다다른다. 이것은 바로 어느 인간이든 자신이 죽는다는 절대적 명제에 다다른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런 명제는 아니지만 어떤 인간이든 죽음 앞에서는 절대적인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권세가 높은들, 또 아무리 돈이 많은들, 아무리 명예가 많은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돈이 아무리 많은들 죽은 뒤에 십 원 한 장 갖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아무리 많은들 자기 땅 가운데 한 평이라도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죽음과 관련해서 인간이 부닥쳐야 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불안과 공포에 직면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에 비하면 그 어떤 것도 별 것 아닐 수 있다. 아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겪는 모든 공포의 밑바닥에서 근본 공포로서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밤길에 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람은 저도 모르게 오줌을 싸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공포에 질려 주저앉아 버린다고 한다. 자율 신경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 것인데 인간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은 자기 제어능력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직접 체험할 수는 없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소설가였던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보면 전쟁터에는 신병들만 걸리는 정신병이 있다고 한다. 신병들은 치열한 격전상황에 겁에 질린 나머지 그 공포를 참지 못하고 안전한 참호에서 뛰쳐나간다는 것이다. 레마르크는 그 다음의 처절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뛰쳐나가자마자 날아오는 포탄에 맞은 신병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뒤에 있는 큰 바위에 흩뿌려졌다. 바위 위에는 신병의 몸에서 나온 피와 살과 뼈가 뒤섞여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병들에게 죽음의 공포는 그렇게도 컸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그것인데, 이 영화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앞부분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륙작전의 극사실성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전쟁 영화 가운데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모선에서 수륙 양용선으로 갈아탄 병사들은 1-2분 뒤면 해안에 도착해 적군의 기관단총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병사들은 '1-2분 뒤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실제로 해안에 도착해 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병사들은 총탄에 픽픽 쓰러져 간다. 이때부터 스필버그의 생생한 촬영이 시작되는데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배안에서의 병사들의 태도이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병사 가운데 어떤 이는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고 어떤 이는 심한 구토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연신 뭔가를 외우면서 기도를 한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다지도 막대한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왜 그리도 클까?
기독교의 《신약》에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는 다시 사망을 낳는다"고 말하면서 죽음이 인간의 부정적인 성향 때문에 초래되는 두려운 결과처럼 묘사하고 있다(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죽음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한다). 죽음은 이같이 대부분의 종교전통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소스라치게 두려워하는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유가 인간을 가장 두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죽은 후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멀쩡하게 여기 있는 내가 (조금 있으면) 더 이상 여기에 없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을 절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확실한 생각을 죽을 때까지도 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우리가 모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만은 죽지 않고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관성처럼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가볍게 믿어버리고 만다. 그런 까닭에 내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절박한 심정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에 맞부딪치면 어마어마한 공포에 어쩔 줄 몰라 한다. 내가 없어지는 게 너무나 두렵고 허망하다. 내가 없으니 이 세상도 아무 의미가 없다. 또 이 세상은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갈 것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허탈감도 든다. 어찌 됐든 이와 같이 내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공포를 가져온다.

두 번째는 죽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두렵다. 가족처럼 항상 함께 지내왔던 중요한 타자들과 헤어져 나 혼자만 떠나니 그 슬픔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별은 나중에 다시 만날 기약이 있어도 슬픈 것인데 죽음으로 갈라지는 이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지(死地)로 가는 것이니 그 공포와 비통함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나의 쉼터가 되고 의지처가 됐던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기반이 없어지는 것이 되니 얼마나 두려운 체험이겠는가.

이러한 고통은 바로 세 번째 이유로 연결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상황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런 것 가운데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나 사물에 대해 갖는 공포는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본성상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인식 체계에 구분 배치해놓는데, 그 체계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면 매우 큰 공포를 느낀다. 우리가 UFO나 귀신과 같은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런 사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뒤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가 체험한 것이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기 곤란하다.

따라서 죽은 뒤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미지이자 무지의 세계이다. 혼자 길을 떠나는 것도 고통스럽고 무서운데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니 그 고통과 공포는 몇 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아마존의 정글 한 가운데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어디인지도 전혀 모른다. 그때 느끼는 공포는 굳이 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바다에서 표류되어 혼자만 남은 사람은 굶주림보다는 외롭고 두려운 것 때문에 빨리 죽는다고 한다. 그만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가 큰 것이다.

죽음은 일단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았다. 너무 큰 문제이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궁극적 문제'라는 명제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제목을 '일단은' 죽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물론 죽음이 인간의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죽음이 그렇게 인식되게 되는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사고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종교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게 된다.

죽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는 것은 여러 종교가들의 체험담에서 귀동냥할 수 있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구한말의 거승이자 괴승이었던 경허의 경우를 들고 싶다. 경허는 본격적으로 참선을 수련하기 전에는 유명한 강사였다고 한다. 《화엄경》 같은 경만을 강의하던 강사였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어떤 마을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휩쓸고 간 적막한 마을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절박한 명제에 부딪히게 된다. 죽음이라는 절대 허무와 상봉한 것이다. 그는 이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까지 가르치던 경전을 다 버린다. 그리고 용맹정진을 하는 맹렬한 참선 수행으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 다음 이야기야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관심은 경허가 부딪힌 문제에 있다. 종교학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경허가 궁극적 관심에 걸렸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말하는 궁극적 관심이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뜻한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말 그대로 그야말로 인생에서 궁극적인 문제로 '사람은 왜 살아야 하나?', 혹은 비슷한 질문이지만 '삶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등등의 문제를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이런 문제에 잘 부딪히지 않는다.

내면적으로는 무의식중에 인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면서 애써 이런 궁극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이렇게 외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 성정적(性情的)으로 별로 예민하지 않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은 감성이나 이성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만이 던질 수 있다. 하루하루를 대충 사는 사람들에게는 들지 않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질문을 외면하는 그 다음 이유는 이런 질문이란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침잠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몰두하는 것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갖고 있는 심각성도 사람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외면하게 만든다.

이런 문제는 일단 봉착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너무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출가라도 단행해야 한다. 그런데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출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정리하고 처리할 게 너무 많다.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느니 차라리 이 문제를 외면하고 모르는 체 하면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대강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대부분 궁극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극소수의 인류만이 이 문제를 천착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절묘하게 묘사해 놓은 주장이 있다. 그런데 그 주장자는 동양종교 전공자가 아니라 서양 기독교 신학 전공자라 관심을 끈다. 주인공은 20 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 틸리히는 그의 저서 『신앙의 역학(Dynamics of Faith)』에서 믿음에 대해 대단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신의 아들인 예수가 구세주임을 믿고 그가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것을 믿으며 그 때문에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틸리히는 이런 신앙의 정의를 깨끗이 날려 보낸다. 그에 의하면 믿음이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자. "Faith is not a belief in something, but a kind of state, being grasped by an ultimate concern."}}

그러니까 예수가 구세주라느니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사로잡힌 상태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불교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붓다가 출가를 단행한 것도 바로 이 궁극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죽음과 더불어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 삶-악과 고통의 문제와 함께
죽음과 삶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이다. 따라서 죽음이 문제가 된다면 삶도 당연히 문제가 된다. 죽음의 문제는 앞에서 본 것처럼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데 우리의 오감이나 이성의 범위 내에서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문제를 일단 접어둘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문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삶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와 같은 문제이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내가 대관절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 역시 매우 궁극적인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질문들이 궁극적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답을 구할 수가 없는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모르듯 삶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생전(生前)과 생후(生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사는 동안'에 관한 것이다.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궁극적인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질문은 '왜 사는가?'와 같은 의문일 것이다. 내가 살긴 살고 있는데 우연히 부모들의 성관계로 인해 내가 태어난 것인지 등부터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또 나는 왜 금생에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났는지{{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행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에 부모와의 인연 문제는 개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등등 자신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즉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 유명한 화두인 '부모에게서 나기 전의 나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와 같은 것도 사실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문도 죽음과 삶의 문제처럼 답을 얻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와락 달려들어서 모든 것을 걸고 진력(盡力)을 해도 답을 얻을까 말까 하는 그런 난해한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유예적인 태도가 된다. 종교적인 문제는 이래서 힘들다.

그런데 삶에는 종교가 아니면 어느 정도라도 설명을 해줄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악과 고통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에서 악과 고통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우선 이 세계에는 어찌 됐든 악이라 부를 수 있는 부정적인 힘이나 사건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악으로서, 서로 간에 미움이나 탐욕으로 점철되다 급기야는 서로를 살육하고 가진 것을 뺏고 뺏기는 전쟁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악의 문제에 대해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역시 종교의 할 일이다. 악은 시초에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야말로 종교가 아니면 대답을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모든 종교들이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문제가 많은 종교는 기독교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들일 것이다. 이들의 교리에 의하면 이 세상은 절대적 선의 입장에 선 신이 창조주로서 창조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튀어나온다.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은 왜 이리도 철저한 악이 만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에덴동산의 신화로 설명하려 한다.

이 신화에서는 세상에 악이 생기게 된 원인을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신에게 불복종한 데에서 찾는다. 원래는 신과 함께 최고의 상태에 있었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신께 불충해 유토피아에서 쫓겨나서 고통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른바 원죄론이다. 이 신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통찰력이 넘치는 신화인데 보다 확실한 분석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다만 여기서는 이런 신화 역시 종교가 아니고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점만 지적하자. 이런 설명은 종교에서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불교도 이 문제에서는 그리 자유롭지는 않다. 불교(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악의 근원을 보통 무명으로 돌린다. 우리 중생들은 이 무명만 제거하면 바로 성불이다. 우리가 부처가 못되는 것은 이 무명 때문이다. 이 무명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착심이 생긴다.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좋은데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은 이 악과 고통의 근원인 무명이 어떻게 생겨났느냐이다.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성에는 무명이 있을 수 없다. 무명이 있으면 불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명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면 이 무명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불성에는 무명이 없다고 했는데 이 무명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한 생각이 홀연히 생겼다고 표현하는데 그 다음 질문은 그럼 그 한 생각은 어디서 생겨났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유교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유교-공맹이 중심이 된 '원시' 유교-에서는 그다지 악이나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둔 것 같지 않다. 인간이 왜 악해지느냐에 대해 공자는 별 언급이 없었고 맹자에 와서야 인간은 처해진 환경 때문에 악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런 설명은 너무나 일차원적이라 깊이를 별로 느낄 수 없다. 한 마디로 인간의 악이나 고통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언급했지만 중국인들은 인간의 깊은 심성이나 내세 같은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천착하지 못하다가 불교가 들어온 다음에야 궁구(窮究)하기 시작한다. 사정이 어찌됐든 악의 문제는 종교에서 최고의 난제임에 틀림없다.

이 악의 문제와 더불어 난제 중에 난제로 꼽히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에 예기치 않게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데 어떤 고통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어떤 고통은 너무 우연적이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은 이런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어떤 남자 대학생이 지방 도시로 답사를 갔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다방에 갔다 마침 탈영병이 들어와 인질로 잡혀있다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우연의 연속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가 그 다방에 들어가서 인질범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매일 다니던 다방도 아니고 답사 갔다 우연히 들렀던 다방인데, 왜 하필이면 그때 탈영병이 그 다방에 들어왔느냐는 것이다. 또 들어와도 잘 해결될 수도 있었는데 돌발적으로 죽게 되었다. 이런 사건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는 이 고통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아들이 예기치 않게 일찍 죽어서 큰 고통을 받을 정도로 죄를 많이 지은 것 같지 않은데 왜 이런 일이 생겼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시키고 슬픔에 싸인 당사자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종교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다른 부문, 즉 정치나 경제 등으로는 결코 위안을 주지 못한다. 슬픔에 싸인 부모에게 군대 체제가 잘못 됐다든가 경찰의 테러 대응 태세가 잘못됐다고 말한들 통할 리가 없다.

이런 경우에 종교에서는 그들의 종교 전통에 맞는 설명을 제시한다. 가령 기독교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에서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 우리들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신께서 그 아들을 더 중한 데에 쓰실 일이 있어 일찍 불러갔다느니 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업보설의 챔피언답게 업보이니 받아들이고 망자의 극락 천도를 빌자고 위로할 것이다. 그런데 각 종교가 제시하는 이런 설명들은 상식적으로는 전혀 검증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의 신자들은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1980년대 초반에 유대교의 랍비였던 해롤드 쿠스너가 쓴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책을 거론할 만하다. 쿠스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아들이 조로증(早老症)에 걸리게 된다. 조로증은 말 그대로 남들보다 나이를 훨씬 일찍 먹는 병이라 쿠스너의 아들은 16세 때 70세 노인이 되어 죽는다. 이 아들을 보면서 쿠스너는 처음에는 아주 괴로워하면서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이 생기는가?"라고 자문했다.

자신이 그때까지 살면서 유대교를 통해-직접적으로는 경전이나 선현들을 통해- 그에게 계시됐던 신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고 항상 윤리적으로 살았는데 왜 이런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 자기에게 생겼는가 하고 되물었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왜 내가(Why me)'라는 질문은 사건의 해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신 그가 해결책으로 생각해낸 것은 우선은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신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도 이 경우에는 무력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는 신께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하느님, 저에게는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이미 일어난, 다시 말해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신과의 대화를 통해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한다면, 이런 불가항력적인 고통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마도 종교만이 그 해결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 1-영혼과 내세의 긍정

위에서 우리는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가 분석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즉 죽음에 대해서 보았다. 이제 다음 단계는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대해 볼 차례이다. 죽음이 가장 큰 문제였으니 이것만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해결책은 사람은 안 죽는다고 하면 된다. 어떻게 안 죽을 수 있을까? 이때 등장하는 것이 내세이다. 인간이 죽을 때 사라지는 것은 육신일 뿐이고 또 다른 몸의 형태인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남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면에서 대체로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부 사항으로 가면 꽤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영혼의 상태를 획득하려면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 예를 들어보자.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면에서-용어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기독교와 불교는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같은 점은 그뿐이고 그 다음부터는 별로 비슷하지 않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죽은 뒤 이른바 '영생'을 얻고 행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천당으로 가려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어떤 신조를 마음속으로 깊이 받아들인다고 고백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이 신조를 요약해보면, 하느(나)님{{ 사실 한국어 문법으로 하면 하느님이 맞는 철자이고 하나님은 틀린다. 하느님은 아마도 하늘님에서 ㄹ이 탈락한 것일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신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용어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하나'가 아니라 '한'이 되어야 한다.

한국어에서는 '한 사람'의 경우처럼 '하나'가 관용어가 될 때에는 '한'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으로 써왔기 때문에 관례를 따른다.

}}이 존재하고 그분의 아드님이 인간으로 내려와 인간의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대속한 다음 다시 부활해서 승천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교리를 추호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평생 동안 교회도 열심히 출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구세주인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선행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지락의 근원인 천당에 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이른바 '영생'을 얻어 천당에 갈 수 있게 되며 그곳에서는 한없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이에 비해 불교는 죽음 뒤에 인간이 다른 몸(이른바 중음신)의 형태로 계속 존재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죽은 다음 영혼의 상태로 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다. 또 불교에서는 어떤 교리를 특별히 신실하게 믿을 것도 없다. 절에 다니는 여부 역시 영혼의 진급을 결정하는 변수는 아니다. 불교 종파 가운데 기독교와 가장 비슷하다는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위해 반드시 불교도가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극락 가는 것이 불교의 마지막 목표도 아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교리들이 전통 불교에서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그런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불교도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 2 -- 궁극적인 행복의 획득

세속적인 해결법의 문제점 그런데 죽어서 영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할 때 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는 답처럼 평범하면서도 적절한 답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생을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한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행복을 얻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령 나를 위해 돈이나 권력 등과 같이 세속적인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소유물을 더 많이 만들수록 행복해지리라는 것이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제일 조건은 돈이 아닐까? 사람들은 보통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점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다.

누구든지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주는 직장으로 가려고 탐색을 거듭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지옥에라도 갈 태세다. 그러다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끝없는 욕심의 대열 속으로 들어간다. 욕망은 끝이 없다. 백만 원을 벌던 사람이 자신은 앞으로 천만 원만 벌면 더 이상이 원이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렵게 노력해서 천만 원을 벌면 기쁜 것은 잠시뿐이고 이제는 1억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목마를 때 짠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가령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어서 목이 굉장히 마르다고 하자. 그런데 이때 마실 물이 없다고 짠 바닷물을 들이키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바닷물도 물이니까 아주 잠시는 시원할지 모르지만 곧 더 많은 물이 먹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바로 이런 식이다. 욕망을 채울수록 더 많은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은 다른 욕망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이 더 많이 하면 할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성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성교에서 겪을 수 있는 오르가즘 체험은 워낙 강렬해-인간이 약과 같은 외부적인 것의 도움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강렬할 체험일 것이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그 체험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흔히들 더 많은 이성과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이것은 특히 남자들의 경우가 더 그렇다고 여겨진다.

남자들은 더 많은 여자들과 성관계를 하면 더 많은 쾌락을 얻게 되고 그래서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내가 될 여자와 그렇게 환장하도록 좋아해서 결혼을 했건만 몇 개월 만에 싫증을 느끼고 다른 여자를 찾는다. 이런 대표적인 예로 희대(稀代)의 바람둥이였던 카사노바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1700명인가 하는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데 상대가 어떤 여성이든 항상 곧 싫증을 느끼고 다른 여자를 찾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를 자주 바꿨건만 그는 외려 애정의 고갈 상태에 빠져 나중에는 인생에 대한 큰 회한을 갖게 된다. 가까이 했던 여자의 수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았건만 질적인 면에서는 바닥이었던 것이다.

다른 욕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이나 명예와 같이 극히 세속적인 욕망들을 추구하는 것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사람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해서 자기가 목표로 삼았던 자리에 올라갔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럴 때 만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구청장이 되면 서울 시장이 되고 싶고 서울 시장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싶은 법이다. 그러다 진짜 대통령이 되면 성취했다는 만족감은 잠시뿐이고 곧 허탈감이 강하게 밀려온다. 정상에 서면 내려올 일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욕망에는 끝이 없고 적당하게 만족하는 일이란 결코 없다. 거꾸로 말하면 욕망의 추구는 막다른 골목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욕망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은 한시적이다. 욕망을 추구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찰나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붓다도 깨친 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자신이 출가하기 전 궁궐에서 온갖 감각적인 쾌락을 즐길 때 만약 그 세속적인 쾌락이 영원히 지속되었다면 자기는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쾌락의 속성이 이런 데도 우리는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해, 또 더 자주 같은 쾌락을 얻기 위해 맹목적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불경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온 우주가 보석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전부 소유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결코 만족해하지 않는다고.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해도 그 갈증, 공허함은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밀랍으로 만들어진 이카루스가 결국 자기 몸이 다 녹아 없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게 우리 인생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세속적인 쾌락 혹은 권력, 돈, 명예 등을 획득하려고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 결실이 없는 허망한 것임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 있다. 이 책은 종교적으로 무거운 책이 아니라 뜻밖에도 그림책이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애벌레인데 그의 앞에는 높은 기둥이 있고 기둥의 꼭대기는 구름 같은 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다른 애벌레들이 보이지 않는 기둥 꼭대기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둥을 올라간다. 이 애벌레들은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밑에 있는 애벌레를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악착같이 저마다 기둥에 붙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우리의 주인공도 베일에 싸인 기둥 위가 궁금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구름을 뚫고 나무 끝에 올라가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우화를 통해 세속적인 욕망이나 쾌락에 대한 추구는 아무 끝도 없을 뿐만 아니라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궁극적인) 행복 획득법 이렇게 보면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세속적인 욕망의 추구를 통해서는 획득할 수 없다는 게 자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세속에서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는 방법으로 행복을 획득하라고 권유하는데 이 시도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같은 목적을 위해 정반대의 시도를 권한다.

세계의 종교들은 이 면에서 대부분 일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진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은 물론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에서 제시하는 것과는 완전 반대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남을 먼저-혹은 다른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간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혹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만을 생각하면 결국 전 세계가 싸움터가 될 것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신에 세계인들이 모두 남을 먼저 생각한다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유토피아가 될 것이 그리고 이것이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들이 제시하는 행복의 진정한 완성이다.

이런 삶의 국면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가 불교에서 발견된다. 불교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보면, 지옥과 천당의 차이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옥과 천당에서는 젓가락이 사람들의 팔보다 길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의 젓가락을 가지고는 음식을 자기 입속에 넣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젓가락을 가지고 자기 입속에 음식물을 넣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 반면에 천당에 사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자신만이 먹겠다는 생각이 없다. 대신 그 긴 젓가락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그리고 자기도 남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다.

서로를 위해서 좋고 배부르게 먹어서 좋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자기만 위하면 다 망하고 남부터 위하면 다 살 수 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도 이와 비슷한 말을 남겼다. 중생은 자기만 위하면서 사는데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다. 그 반면에 보살은 남만 위해 살려고 하는데 남도 좋게 될 뿐 아니라 결국은 자기도 이롭게 된다고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각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대·기독 전통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불교가 주장하는 자비, 또 유교에서 가르치는 인 등은 모두 진정한 행복이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 때만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의 가르침은 이렇듯 역설적이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다른 사람이 '오 리(五里)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어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바로 제기되는 반론은 '그렇게 다 주고 나면 난 어쩌란 말이냐'는 것과 같은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고 지금은 왜 내가 바로 여기서 남을 위해 살지 못하는지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다 주면 예수가 역설하는 사랑이 완성된다. 사랑에는 자신이 남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교훈이 있는 것인데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해야 될 것이다.

이 점은 불교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하고 있다. 가령 진정한 보시가 되려면 주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이 주는 행위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남에게 자기의 것을 몽땅 주는 것으로 하면 붓다를 능가할 사람도 많지 않다. 붓다의 전생록인 『본생담(자타카)』을 보면 붓다는 깨치기 위해 수많은 전생에서 상상을 절할 엄청난 수행을 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매를 피해 전생의 붓다 품으로 들어온 작은 새(비둘기?)의 이야기일 것이다. 매가 그 작은 새를 달라고 하자 붓다는 대신 작은 새와 같은 무게의 자신의 살을 도려내 매에게 주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모이다. 이런 사랑의 실천 없이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게 이 가르침의 교훈이다.

그럼 종교에서는 왜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일까? 앞에서도 계속 이야기된 것이지만 종교에서는 최고의 행복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을 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간의 행복은 강도나 순도 면에서 이 종교적인 행복을 능가할 수가 없다. 세속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순식간에 바꿀(transform) 수 없다.

그러나 종교 체험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을 한 순간에 탕아에서 성자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순도 역시 매우 높다. 세속의 행복은 지순한 종교적인 행복에 비해 탁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만족)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의식이 들어가면 언제나 욕심이 앞서고 따라서 탁할 수밖에 없다. 그럼 대관절 종교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은 어떤 것일까? 어떻기에 그렇게 강렬하고 지순하다고 하는 것일까? 우리 범인들은 이렇게 수준이 높은 종교 체험을 할 길이 없다. 대신에 우리는 생활하면서 겪은 일들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종교 체험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떨어지지만 비교가 가능한 그런 일상적인 체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종교 체험과 관련해서 일상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성격이 다소 비슷해 비교가 가능한 것은 연애(戀愛) 체험이라고 늘상 말한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연애는 많은 연애 가운데에서도 초기의 연애를 말한다. 초기 연애 체험이란 게 무엇일까? 내가 어떤 여자를 너무나도 좋아했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여자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눈에서는 그때부터 불꽃이 튀기 시작하고 엄청난 열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매일 같이 있는 것도 부족하고 뭐든지 그와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좋은 것을 보아도 그와 함께, 좋은 음악을 들어도 그와 함께 하고 싶은 등등 낮은 수준에서 상대방과 하나 되는 체험이 시작된다. 이때의 체험은 매우 강렬해서 공중에 붕 뜬 느낌을 받는다.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종교 체험과 비교된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애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절정 체험(The Peak Experience)』을 보면 미국 대학생들은 절정 체험의 전형(典型)으로서 이 연애 체험을 든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대학생들이 평소에 가질 수 있는 체험 가운데-마약류를 하는 것은 제외하고- 이성과 연애하는 것이 가장 강렬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연애 초기에 격렬한 사랑이 시작되면 자신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해진다. 이 체험은 겪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일상적인 체험과는 많이 다르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하기 전에는 달이 저렇게 밝은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고 나뭇잎이 저렇게 푸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또 하늘은 왜 저리도 푸른지. 게다가 한 사람을 사랑하니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다. 자신이란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같고 한없이 겸손하고 싶어진다.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나 좋고 감사하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내 목숨까지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데 왜 환희와 기쁨은 쉴 새 없이 밀려올까? 나를 위해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데 왜 그리 좋을까? 이게 바로 종교적인 체험에 가까운 면이다.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체험도 나를 신이나 붓다 혹은 이웃에게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내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이 수행이 올바르게 되면 우리는 연애할 때와 비슷한-아니 훨씬 상하고 깨끗한- 환희 체험을 한다. 이상스레 자신을 포기하면 할수록 기쁨은 배가된다. 세속적인 행복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록 행복진다고 하는데 종교 체험은 정 반대이다.

그런데 연애 체험은 아무리 강렬해도 세속적인 체험이다. 세속적인 체험의 가장 큰 특징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연애 초기에 느꼈던 그 강렬한 체험이 스러지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익숙해져 신선도가 떨어지면 밑에 숨었던 자아가 서서히 밀고 올라온다. 사랑하기 전에 항시적으로 작동 중에 있었던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사랑에 눈 뜨면서 잠깐 동안 한정적으로 기운을 잃는다. 그러나 사랑이 일상화 되면서 다시 이 자아 개념이 치밀고 올라오는 것이다. 다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가?' 혹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따위의 불만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애 초기의 그 생생했던 체험들은 사라져 가고 둘 사이에는 갈등이나 다툼이 생겨난다. 이제부터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더 이상 없다. 그 다음부터는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기술한 것처럼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사랑해야 하는 단계가 된다.

위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위할 때보다 자신을 내놓을 때 더 큰 행복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큰 행복 혹은 궁극적인 행복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나 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궁극의 경지가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절정의 종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온전한 자기 포기의 정신을 온 몸으로 보여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붓다나 예수 같은 성인들이었다.

그러면 이것으로 종교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의 분석이나 그 해결책에 대해 다 언급한 것일까? 이것으로는 좀 미진하지 않은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이렇게 쉽게 분석될까? 이렇게 쉬운 문제를 가지고 인류 최고의 천재였던 붓다나 예수가 목숨까지 내놓고 다년간 수련하고 그 법을 설교하고 다녔을까? 사실 우리는 이제 대강만 본 셈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분석은 이제 시작이다. 지금까지 분석한 대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고 하는 죽음, 혹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를 면밀하게 궁구해야 한다. 왜 인간만 죽음을 인식하는 것일까 하는 등등의 문제가 우리가 다음에서 분석할 주제가 된다.

최준식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국제한국학회장, 한국문화표현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콜라독립을 넘어서》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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