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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폭주에 대한 불교적 진단
술락 시바라크사 지음 / 김미숙 옮김
[20호] 2004년 10월 10일 (일) 김미숙 ashoka@hanmail.net
이 글의 원본은 다음과 같다. Sulak Sivaraksa, "Economic Aspects of Social and Environmental Violence from a Buddhist Perspective", Buddhist-Christion Studies, Vol 22,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2.

필자는 사회적, 환경적 폭력에 대한 경제적 측면들에 관하여 불교적 관점에서 고찰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실, 이러한 제안은 선택의 범위가 너무 넓지만, 내게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아주 일반적이고도 간명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지금의 경제적 현실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신(新)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서, 인간 복지와 환경 보존의 측면에서 이익을 축적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분명히 세계 사회를 조절한다거나 조직하는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추세는 자본의 주체와 단체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손을 갈수록 더 많이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과 매우 불공정한 제도의 주요 수익자들은 변함없이 다국적 법인 단체들(어떤 비판자들은 그들을 다국적 압제자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지만)과, 대규모의 재정 투자자들,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다. 오늘날 세계 무역거래로 알려진 것 가운데 대략 2/3는 단순히 회사 내부 간의 거래이거나 회사 상호 간의 무역이다. 그들이 실제로는 지금 '우주의 지배자들'이며, 갈수록 인류에 대한 특별한 권리와 영향력, 힘 등을 축적해 가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세계 인구 중 가장 부유한 20퍼센트가 세계 전체 소득의 8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세로 볼 때 더 이상 놀라운 일이라거나 도덕적 침해라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인류의 진보에 공헌할 건전한 현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더군다나 밑 빠진 독이 되어가고 있는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환경은 약탈되고 있다.

필연적으로 이 문제는 각 나라의 국내뿐 아니라 나라들 간에 이층 구조를 만들게 된다. 부유한 극소수는 절대 다수의 고통과 가난 위에 그들의 성을 세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기회도 없는 자유를 누리고, 굶어 죽을 자유는 있지만 가난에서 해방될 자유는 누리지 못한다. 매일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간단히 예방할 수 있는 질병으로 인해 죽어 가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영양 부족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 대해, 우리는 불교적 관점에서 사회적, 환경적 폭력에 대한 경제적 측면들 중 몇 가지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 * *

먼저 자본가의 요인(要因) 중에서 생산적 측면을 다루어 보자. 그 주된 추진력과 가치 체계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들은 사회 조직과 환경에 영향을 주는가? 부인할 수 없이, 자본가의 엔진을 계속 돌아가도록 유지하는 연료는 바로 이익이다. 다시 말하면 더 많은 이익, 더 나은 이익이라 할 수 있다. 논의를 이어보자. 회사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고서더라도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려고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창출된 이익은 언젠가는 모든 인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조금씩 흘러나올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용한 증거가 다른 측면에서 지적되고 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그 체제의 부산물들을 그다지 의도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강연에서는, 이윤이란 단지 기업가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지적 도덕적 소화 불량에 중탄산소다를 처방하는 것과 같은 발상이다. 실제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장 쉽고 값싼 방법은 산림을 개발하거나, 사회로부터 추방시키는 것이다. 전자는 보전하거나 조성함으로써 풍요로워지고, 후자는 직접적이든 다른 방법이든 가난해지는 경우이다. 그때 지배자들은 세계 경제를 최대로 이용하고 그 나머지는 배분한다는 거의 실현할 수 없는 가정(假定)에서 위안을 찾는다.

더구나 환경은 국제 자본주의의 하부 구조로 여기지만,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자본가의 기계 바퀴에 윤활유를 치기 위해서 환경은 약탈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보자면, 자본주의에 의해 유지되는 이윤을 위한 한없는 추구는, 사람과 환경의 복지에 대해서 단지 탐욕과 증오, 도덕적 무감각과 부당한 범죄적 무관심 등을 반영한다. 그 게임이란 사회 계층의 맨 꼭대기까지 오르기 위해서 다른 것들의 비용까지도 감수하게 한다. 누구나 어떤 서점에 자주 간다면, {분배와 법칙(Divide and Rule)}과 {시장 지배(Colonizing the Market)}와 같은 흥미로운 제목을 가진 상업 관련 책들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발칙한 공격성은 주류적 용어로는 '자유 경쟁'이라는 완곡한 말로 알려져 있다. 정상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유능하다'고 칭송 받는다. 사람들을 단단히 사로잡도록 허용한다면, 이러한 가치들은 분명히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반사회적인 환경 약탈자들로 이루어진 기괴한 사회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자유 시장 체제의 기초를 세운 창시자, 아담 스미스 자신은 "인류의 지배자들의 무가치한 행동 원리"인 소유욕, 이기심, 탐욕 등을 조롱했다. 물론 이것은 계몽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제 불교와 이윤으로 눈을 돌려보자. 자본주의는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경제적 체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도덕성은 매우 의심스럽다. 관대하게 보더라도 자본주의의 도덕성은 그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소위 자본주의의 승리는 20세기 후반에 사실상 도덕적 세계를 폭발시켰는데, 모든 도덕적(그리고 점차로 합법적인) 억제를 이윤의 축적으로 옮겨 놓고야 말았다.{{ 본문에서 이탤릭체로 된 부분은 원문에서 강조하기 위한 표시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달리, 불교는 감각 있는 모든 존재들의 권위를 존중하고 인정하지만, 육체적 실체가 없는 회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또한 불교는 엄밀하게 볼 때, 이기주의·탐욕·자기 강화 즉 지배자들의 혐오스런 행동 원리에서 비롯된 것들을 참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다르다. 불행하게도 지배자들의 혐오스런 행동 원리들은, 예를 들면 교육 기관이나 대중 매체보다 더 우월한 지배력을 얻고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비인간적인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 더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불교는 탐욕을 비난하고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을 침해와 증오, 한마디로 말하면 고통이라는 나쁜 길로 이끈다고 보기 때문이다. 탐욕은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결코 만족으로 이끌어 줄 수 없다. 그래서 불교는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켜서 만족할 수 있는지, 자기 수행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염려하고, 증진시키고, 이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을 단지 반(半) 인간으로 취급한다. 즉 경제적인 측면(예컨대, 탐욕, 증오, 이기심)은 다른 고려들을 배제하도록 장려된다. 불교는 인간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접근한다. 정신과 마음을 수행해야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회적 관계와 인간 관계가 여러 가지로 강조된다. 사람이란 "상호간에 존재하는, 즉 인간(人間, interbeing)"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그 중에서도 특히, 네 가지 뛰어난 주처(住處, 四無量心){{ 역주: 원어는 브라마 비하라(Brahma Vihara)이며, 일반적으로 범주(梵住)라고 번역한다.}}를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메타(Metta, 慈),

즉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친절. 그렇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열망하고 그렇게 할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계율과 명상을 실천함으로써, 여러 가지 상태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마음의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이 바로 행복한 상태이다. 그것은 악의도 없고 성냄과 경쟁이라는 적의(敵意)도 없이 도움과 이익을 준다. 일단 누군가 평온하고 행복하다면, 이러한 점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2. 카루나(Karuna, 悲),

즉 동정심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그러한 고통을 끝까지 없애 주고자 애쓸 때만이 길러질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가난한 사람의 불행한 상태에 대해서 무관심한 부유한 사람은 이러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그, 또는 그녀가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지독하게도 불공정한 세상 가운데서, 상아탑 안에 자신들을 가둔 그 모든 사람들은 동정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대승 불교에서는, 사람들은 보살이 되기를 서원하고, 모든 중생들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자신의 열반을 미룬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무관심한 채로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되도록 최대한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거나 완화시켜야 한다. 그러한 원칙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어떤 건전한 공동체 내지 사회의 필수적인 특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 조직의 매개 수단으로서 동정심을 보다 더 잘 조율함으로써, 우리는 공동체를 포용할 수 있다.
3. 무디타(Mudita, 喜),

즉 동정에서 우러난 기쁨이란, 여러 가지로 다른 이들이 행복해 하거나 성공적일 때, 진실로 기뻐하는 정신적인 상태를 말한다. 경쟁 상대가 성공했을 때조차도 질투의 불꽃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이다.

4. 우펙카(Upekkha, 捨),

즉 평정을 뜻하는데, 마음이 평등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공평무사하게 될 때까지 수양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성공이나 실패에 직면하든지, 행운이나 불운에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그것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 *

이러한 네 가지 뛰어난 주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간다. 누군가 완전하지 않다면, 이러한 목표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자신 또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해로울 수도 있다. 세속적인 성공과 물질적 발전보다는 오히려 행복과 평안을 향해 행동한다면, 불교도는 그 또는 그녀의 공동체, 즉 가족, 이웃, 마을 등등을 발전시키기 위한 어떤 위치에 비로소 서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 의해서 일깨워진 개인은 푸리소드야(Purisodya)로 불린다. 일단 이러한 자각은 차츰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특질을 포함하여 그로 인해 야기된 위협들에 대하여 온 나라가 일깨워질 것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도덕적 비상 시대에는 네 바퀴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자본주의라는 해로운 가치에 대한 유용한 방어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레가 네 바퀴를 쉼 없이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전은 네 가지 담마(dhamma, 四攝法), 즉 나눔, 기분 좋은 말, 발전적인 행위, 평등 등에 달려 있다.

1. 나눔(dana, 布施)은 자기가 가진 것, 즉 물건이나 재화(財貨), 지식, 시간, 노동 등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격언을 지지한다. 강력한 다국적 회사들은 음식, 약품, 과학 기술과 같은 필수적 재화(財貨)에 접근하는 것을 통제한다.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유용하며, 당연히 고비용(高費用)을 위한 것이다. 광범위하게, 다나는 아직도 대부분의 마을 문화 속에서 실행되고 있다. 우리는 다나라는 개념을 강화시켜야 하며, 자본주의의 침입과 경쟁이라는 특질을 분배에 의해, 또한 보다 덜 상업화된 생활 방식에 의해,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다나를 널리 보급시켜야 한다.

2. 기분 좋은 말(piyacaca, 愛語)은 공손한 말뿐만 아니라 진실하고 진심이 담긴 말을 의미한다. 그 기본적 가정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소비주의나 자본주의의 문화는, 아래서 더 많이 다루겠지만, 보다 덜 상업화된 생활 방식은 열등하다고 가정한다. 사람들은, '수준 높은 생활'이라는 명목으로 정말 필요하지도 않는 상품과 서비스들을 소비하기 위해서 현혹될 것임에 틀림없다.

3. 발전적인 행위(atthacariya, 利行)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 점은 또한 회사의 역동성과는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회사는 그 종업원이나 회사가 자리한 고장이나 도시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다수의 주주(株主)들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 작동할 뿐이다. 예를 들면, 매번 회사는 '소형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당 가격은 급상승할 것이다. 그 때문에, 주거 지역의 복지를 위해 높은 액수를 내놓은 투자자들이 어떻게 보상받는가에 대한 새로운 법률들이 공표되어야 한다.

4. 끝으로 평등(samanattata, 同事)은 불교가 계급, 즉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한 집단을 지지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세계 경제는 소수의 '승리자' 카스트와 '실패자'라는 대다수의 무리를 만들어 낸다. 승리자는 모든 것을 가지며, 그들의 행동은 '자유 무역'과 '자유 경쟁'이라는 기치 아래 완전히 합법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 무역이 아니라 '공정한 무역'을 시급히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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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고통의 근본 원인으로서 세 가지(三毒), 즉 탐욕·증오·망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바로 그 세 가지는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마음을 솔직하게 여는 것, 동정심, 책임감, 이 세 가지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데, 이 셋은 불교적 개념으로서의 자유의 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불안전한 요소들과 위험들, 예컨대 가난·질병·기아 등등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 둘째, 사회적 자유이다.

모든 사람들은 인간적 억압과 착취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상태는 인내, 결속, 박애 등을 가정한다. 그리고 끝으로, 내적인 삶의 자유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속의 부도덕한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며, 온갖 종류의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일깨워준다. 그러한 상태를 얻기 위해서는 다나(dana, 나눔, 관대함), 쉴라(sila, 도덕적 계율), 바바나(bh vana, 명상수행)는 필수적이다.

나눔의 실행을 살펴보자면, 주는 것은 받거나 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주는 것은 우리의 의식 구조를 개조시킨다. 예를 들면, 이기심에서 이기심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게 한다. 더욱이 우리는 단순한 생활 방식에 만족해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부(富)를 축적하는 데 사로잡히지 않는 생활 방식을 말한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지적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검소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보다 덜 행복한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기꺼이 우리들의 재화(財貨), 지식, 재능, 시간 등을 나누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보다 더 겸손하고 덜 이기적인 마음이 되도록 우리의 마음 구조를 개혁하고, 보다 더 공정하고, 평화롭고, 환경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 구조를 바꾸기 시작할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나눔은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도덕적 계율의 실천은 아직도 자아와 사회의 개혁에 유용하다. 다섯 가지 계는 다음과 같다. 생명 있는 것의 생명을 끊는 것을 범하는 것, 그리고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또한 성적(性的)인 부정행위와 그릇된 말, 정신을 흐릿하게 하는 술을 삼가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최소한 앞의 두 계율에 어긋나는 점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형태에서 생활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충동으로서 해탈을 이해한다면, 그 때 불교적 아힘사(ahimsa, 불살생) 개념은 사회적 해탈과 세계 평화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평화를 조성하고,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폭력을 배제하거나 최소한 축소시켜야 한다. 첫째 계율은 직접적인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구조적인 폭력도 포함시킬 수 있다. 구조적인 폭력은 "제도화된 폭력의 형태, 예를 들면 여성들, 어린아이들, 소수 집단들, 저소득 국가들, 그 밖의 것들을 포함한다."라고 정의된다. 그것은 탐욕, 증오, 망상의 절정이다. 비록 눈에 덜 띄고, 따라서 책임은 더 적을지라도, 구조적인 폭력은 직접적인 폭력을 위한 기초다.

폭력은 직접적인 대립을 필요하지 않는다. 세계 경제 기구들은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개발과 억압, 예컨대 반드시 생명의 파괴를 내포하는 행동들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기구들은 가난한 자들과 환경을 침탈하는 지배자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어느 정도는 부여받은 이득이 있기 때문에,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은 이러한 기구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폭력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기구들이 권리를 회복하고 합법화하는 것이라든지, 진보와 발전 등을 돕고자 하는 수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점차로, 무역법들은 다국적 회사들의 착취와 약탈을 합법화해 나가고 있다.

더군다나, 세계 경제 기구들은 재화와 자본금, 그리고 특히 지배자의 손에 있는 자산(資産)의 집중을 수월하게 하지만,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러한 행동을 일반 서민들에게 허용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둘째 계율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소비주의가 고의적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라고 인지하고 나면, 또한 그릇된 말을 만들어서 세계 경제를 비난할 수도 있다. 현대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학생들의 정신을 다룰 뿐 마음을 다루지는 않는다. 가장 능력 있는(예를 들면, 공격적인, 경쟁적인 등) 자가 인정받고 보상받는데, 그들은 도덕적 관념에서 '선할' 필요도 없고, 사회악을 알고 있을 필요도 없다. 정말로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 중 대다수는 불행하다. 직접적으로 또는 다른 방법으로, 높아진 그들의 지위는 대중들의 가난과 생태 환경적 폐허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어느 정도 무지(無知, avijja) 또는 망상(moha)의 결과이다. 무지 또는 망상의 위협을 자각하기 위해서, 불교는 바른 기억의 수양을 장려하고, 내적 평화와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고양된 인식으로 직접적으로 이끌어 준다.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는 것과 함께 내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은 명상수행(bh vana)을 닦는다. 이것이 자유를 성취하기 위한 불교적 요소 중 셋째이다. 대개 명상이라고 부르는 바바나는 '수양' 또는 '자기 수련'으로 보다 쉽게 이해된다. 민간 신앙과는 달리, 그것은 단순히 혼자서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내적인 명상의 어떤 특별한 형태와 관련된다. 바바나는 정말로 묻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향해서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신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하면, 일상 속에서 되도록 기억을 집중시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으로 바바나의 첫째 단계는 평정(samatha, 止)을 얻고, 내부에 평화의 씨들을 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둘째는 정신 물리적 구조와 그 세계의 실제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위파사나(vipassana, 觀), 즉 통찰 명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과 관계들 또는 문제 해결 방법에 의해서 분석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도구로 더 한층 발전될 수 있었다. 자아가 분리됨에 따라, 그것은 지혜의 내적인 요소가 된다. 비판적 자기 인식은 이기심이 없는 곳으로 이끈다.

붓다는 평정이란 자기 수행과 자아 비판, 그 자신의 참된 이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했다. 이해한다는 것은 지적인 지식과는 다르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과 정신, 둘을 통해서 걸러내기 때문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 또는 그녀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겸손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사랑스런 친절과 동정심을 더욱 증진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 개인은 더 나은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도록 돕는다.

물론, 누군가 고통의 원인을 해결하고자 매달려 있을 때, 특히 가혹한 사회 제도 속에서는, 대체로 상처를 받게 된다. 이때 바바나는 억압하는 자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위험을 이해하는 것도 돕는다. 억압적인 제도는 혐오의 대상이고 파괴될 것이지만, 억압자는 결코 경멸 당하지도 않고 처형되지도 않는다. 만약에 사람이 자신의 분노를 알아챘다면, 그 때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그것을 덮을 수 있고, 그 때문에 그것을 동정심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틱 낫 한(Thich Nhat Hanh)은 분노는 닫혀진 꽃과 같다고 말한다. 그 꽃은 바바나의 햇빛에 의해서 깊숙이 스며들 때만 피어날 것이다. 동정과 이해라는 지속적인 빛은 언젠가는 분노도 녹초로 만들 것이며, 그 깊이와 뿌리도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더구나 바바나는 탐욕, 증오, 망상이라는 꽃봉오리를 만개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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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단지 자본주의 체제 가운데 생산적 측면에서 본 불교의 견해를 제시했다. 나는 (물론, 피상적이겠지만) 지배자들의 확립된 관심, 지성, 가치 체계 등을 조사함으로써, "무엇이 지배자를 만들까?"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였으며, 그들이 사회와 환경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소극적 영향들을 분석했다. 그리고 불교와 자본주의를 대조하면서, 나는 일상 생활에 어떻게 담마(dhamma) 내용을 적용할 것인지,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병폐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든지 집단적으로든지 해탈을 성취하는 것에 대한 몇 가지 제안들을 하였다.

이제 그 중 한 요인, 소비라는 후반부로 돌아가 보자. 지배자의 야비한 행동 원리는 아직도 자본주의에서의 소비의 성질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했던 불교 평론은 여기서도 역시 관련된다.) 결국, 생산과 소비는 부도덕한 사이클을 이룬다. 으스대며 말할 것도 없이, 문맥은 조금 달라질지라도, 소비는 또한 탐욕, 물욕, 이기심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소비주의 또는 만족을 모르는 한없는 소비는 궁극적인 행복과 자유, 자기실현과 동일시된다. 영국 불교도인 데이비드 아놋(David Arnott)은 이렇게 말한다.

구매(購買)이라는 성사(聖事)에 참여함으로써, 돈을 희생하고, 우리는 물건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성시하는 이미지들의 체계 속에서 어떤 장소를 정하게 되는 이미지들의 중심으로서의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한때 우리는 자동차를 살 때, 힘과 명성, 성적(性的) 능력과 성공을 함께 샀으며, 광고는 그와 같은 것들을 자동차 또는 상품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런 것들과 동일시하는 데 성공했다. 소비주의는, 우리 모두가 마음 깊숙이 가지고 있는 불만족 또는 결핍(dukka, 苦) 의식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물건을 생산해 내는 역할을 한다.

만약 다국적 회사들이 보다 많은 이득을 얻고자 하는 탐욕을 줄일 수만 있다면, 소비자들은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쪽 다 이득을 얻을 것이다. 훌륭하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탐욕이란 어떤 경우일지라도 오직 고통만 낳을 뿐이다. 더 나아가, 극심한 압력 즉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가 환경에도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경제적 세계화 문화와 마찬가지로, 소비주의는 비정한 다국적 기업의 무한정한 탐욕을 더욱 더 조장할 따름이다. 이러한 결과를 피하는 것이 바로 뛰어난 능력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비에 의존하고 강력한 기업들에 의해서 통제되는 시장은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수요는 교묘하게 조작되거나 창출될 것이다. 소비자의 무의식은 구매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세계화의 정치 경제적 중요성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특히 빈곤층이 사회적 주류에서 뒤로 처지게 되는데, 소비주의는 모든 계층의 적극적인 참여를 얻고자 노력한다. 탐욕이 그러하듯이, 소비주의는 개인적 해탈로 이르는 길을 어둡게 한다.

여러 가지 점에 있어 소비주의는 현대 사회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 왜냐하면 각 개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상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자원과 일자리를 서로 협력하여 분배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공동체 의식은, 인류를 지배하는 자들의 야비한 행동 원리에 의해 대체되고 있고, 또한 이웃 사람들의 비용으로 사람들이 물건을 습득함으로써 야기되는 분노라든지 경쟁심에 의해서도 대체되고 있다. 요컨대, 소비주의는 사회 경제적 관계를 통제하고자 탐욕과 폭력을 행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볼 때, 소비주의는 그 지속적 힘을 자율적이고 개성적인 자아가 현혹된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아란 본성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와 인간적 관계들과는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 개개인은 세계 속으로 내던져진다. 붓다의 관점에서는, "자아"란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들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경험들이 그렇듯이 실체성이나 영속성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초월적인 논제를 추구하는 데 빠지기 십상이며, 경험을 정의하는 어떤 것은 그 경험을 넘어서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권유받지만 이와 같은 이원적 체계 속에서 '자아'는 경험을 초월한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 불교도의 경우에는, 이처럼 현혹된 자아 상태가 고통의 근본 원인이다.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들의 경험들과 소원해지게 되는 양상을 띤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 주체성이라는 의미 있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받는다.

자기 주체성은 물건을 획득하는 과정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제시함으로써,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거짓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소비주의이다. 달리 보면, 소비주의는 개인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 식 명제처럼 그릇되고 필연적 결과이다. 요컨대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 소비주의란 마력적인 종교와 같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방식이 각 개인이 원천적으로 자멸적인 행동 주기에 빠져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품에 대한 한없이 탐욕스런 욕망은 궁극적으로 절망이나 권태로 이끈다.

그렇지만 바른 기억이라는 불교 수행 방법은 각 개인이 "나는 숨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서서히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바나(bh vana)는 우리의 마음과 머리를 일치시켜 줄 것이다. 중요한 결과는 더욱 더 큰 지적 능력이 아니고, 도덕과는 무관하고 구분되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도리어, 우리는 실재적인 이해력, 즉 프라갸(prajna, 般若)를 얻을 것이다. 우리가 보다 덜 이기적일수록, 우리의 프라갸는 더욱 더 깊이 카루나(karuna, 悲), 즉 동정심과 결합될 것이다. 프라갸와 카루나는 우리가 택해야 하는 삶의 방식, 즉 소비주의를 극복하도록 이끌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두 가지 영성(靈性)은 우리 자신들과 사회 및 자연 환경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생겨나며 공동으로 작용한다. 번갈아 가면서, 이것은 사회 정의, 우애, 생태 환경적 균형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중요한 사회·경제·정치 제도처럼 사회의 타락은 현대 세계에서 소비주의의 원인과 결과가 된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전통적 사회는 이러한 종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존재들과 책임 사이의 상호 관계의 인식에 기초를 둔다. 산업화는 전통적 사회가 구성되었던 조건들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많았다. 이 점은 산업화되고 있는 세계의 각 곳에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와 소유(즉 탐욕, 증오, 망상 등의 합법화)를 증대시키는 것은 종종 그러한 사회의 붕괴를 야기한다. 그 결과, 사회 속에서 고립된 개인은 단체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목적 의식에 희망을 건다.

시장 자본주의 아래서, 개인과 단체는 상품과 서비스를 위해 전적으로 시장에 의지하게 되며, 끊임없이 늘어나는 많은 양을 계속해서 소모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더욱 더 많이, 보다 더 좋은 것을 소모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새로운 텔레비전, 모두를 위한 새로운 자동차 등등. 결국 부유하다는 것은 '더 많이 갖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하지만, 그와 반대편에 있는 환경적인 관련 또한 명백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경제적 성장은 이와 같이 의존적인 생활 방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시장 의존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고도의 성장률을 가질 기회도 더 커진다.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조절 관리는 시장과 기술 관료들에게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당신은 자신의 식품을 재배해서는 안 된다. 재배는커녕, 당신은 슈퍼마켓(즉 다국적 기업들을 키워주는 곳)에서 쇼핑을 해야만 한다. 식품의 구입 가능성은 사람들이 그들, 즉 그 또는 그녀 자신에 의해 모든 사람들을 살 수 있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일한 자유는 소비의 자유뿐이고, 반대로 말하면, 그것은 굶어 죽을 자유와 같다. 이러한 새로운 행동 양식에 따라서 일련의 새로운 태도들이 생겨나는데,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며 상보적이다.

사회 조직이나 관계는 필연적으로 단편적이며, 개체적이고, 폭력적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개인 소유물들을 축적하려는 사람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불공정한 제도로 인해서 '손해를 본 사람들'이라든지 자연 환경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어질 것이며, 다국적 기업의 가혹한 행위에 도전하기 위해서 협력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적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사람이 믿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경제적 세계화는 분열 상태, 즉 무관심이나 동정심의 결핍을 토대로 하여 확장된다. 분열 상태는 단일 문화주의를 발전시키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는데, 정신과 마음의 분열 상태의 경우도 그러하다. 불교적 관점으로 보자면, 이 점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해탈을 위해 전혀 좋은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재부(財富)란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것은 별개의 독립된 개체처럼 집합적으로만 이해되거나, 영성(靈性)에만 중점을 두고 다루어질 수는 없다. 불교의 정신적 집단은 상가(sangha, 僧伽)로 알려져 있다. 상가는 규모가 작고, 자치적이며, 지방 분권적이어야 한다. 상가의 목적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사회와 더불어, 우리의 자연 환경과 더불어서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중생(衆生) 모두를 착취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상가의 구성원들은 평화의 씨를 뿌려서 경작하고, 비판적인 자기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자신이 지닌 최상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은, 차례로,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도록 해 준다. 추구되는 생활양식은 간소하고,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며, 자립적이며, 동정심이 많고, 관대하고, 매사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러한 특성들은 자기 의식을 개혁시키고, 탐욕, 증오, 망상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자발적으로 간소한 생활과 자립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크게 소비주의에 위협적인 것이 무엇일까?

상가의 기본 철학은 현대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치 단체에 대한 간디의 비전은 붓다의 상가와 매우 유사하다. 더구나 최근에는, 전망이 밝은 '지속적이고 자립적인 사회 운동'이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그것은 폭력적인 국제 경제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라는 강력한 상징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렇지만 부자들의 클럽 회원들의 안목으로는 통 속에 든 썩은 사과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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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담마(dhamma)와 유사한 경우와 불교적 자유와 행복이 실제로 어떠한지 살펴보도록 하자.

사이암(Siam: 태국)에서, 비종교적이든 그렇지 않은 경우든, 자립적이고 지속적인 단체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몇몇 운동들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아마도 빈민 회의(Assembly of the Poor)의 운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억제하고 오래도록 억누르는 것, 바로 그것은 태국의 지배 계층인 엘리트가 일반적으로 빈민들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빈민 회의의 출현은 잘못된 그들의 가정을 입증해 주었으며, 지배 계층은 비록 협박을 받지는 않았지만, 불쾌하고 실망스럽게 느꼈다. 하층 계급 사람들은 더 이상 행동을 억제하지 않는다. 빈민 회의가 그랬듯이, 우리는 "선거 게임에서 값싸게 환호하는 군중에 불과한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빈민 회의는 정부의 개발 정책과 경제적 세계화로 인한 불법 부당함과 형식주의에 대해 저항해 왔다. 예를 들면, 댐 건설이나 산업공해라든지, 거대 농기업(農企業)에 의해 뿌리 채 뽑히고 있는 소규모 농민들의 늘어나는 부채 때문에 상응하는 보상도 없이 강제로 재배치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아마도 빈민 회의는 사이암에서 그 유례가 없는 운동일 것이며, 동남아시아에서 비폭력적 대중 민주주의가 대두하게 된 밝은 신호탄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에 최초로 가시화되기 시작하여 계속 유지된 대중 운동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기원은 1980년대 초반에 뿌리를 두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빈민 회의는 일곱 종의 전혀 다른 조직들의 혼합체이며, 사이암의 거의 모든 지역을 대표하고 있으며, 50만 명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빈민 회의는 도시와 농촌의 소규모의 농민들과 수공업 종사자들이 중심을 이룬다. 그들은 그 운동에서 절대 다수를 형성하고 있다.

무정부적 조직과 환경주의자들, 책임 있는 지식 계급, 학생들, 상업적 단체에 속하는 개개인 등이 빈민 회의의 자금을 튼튼하게 해 주었다. 간단히 보자면, 그 운동은 계급과 지역적 구분도 뛰어넘는다. 중간 계층이 주로 하는 역할은 전통적으로 부유층과 빈민층 사이의 완충자였고, 상류층과 불공정한 체제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지금은 빈민층의 복지를 위해서 지원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서, 그들은 불평불만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요 정책에서 빈민층의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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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다고 하여 문제점들이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빈민층이 스스로 억업자가 되거나, 서로 부당하게 착취해 봄으로써 물질적 정신적 고충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누군가는 더 약소해지기 마련이다. 그 대신에, 그들은 평화적이고 집단적으로 정의를 위해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서로의 복지 증진에 관심을 가지고 더욱 증진시키고 도움이 되도록 하여, 스스로 참고 견디며 의무를 다하기로 하였다. 아마도, 억압받는 자들이 억압하는 자들로 바뀌게 되었을 때, 착취 체제가 끔찍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잔인한 체제는 죽는 순간까지 이어져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을 함께 묶고 있는 것은 사회 경제적 변화와 환경적 악화, 다시 말해서 '급속한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다. 예를 들면, 제10차 유엔 무역 개발 회의(UNCTADX)를 마치면서, 다른 계층의 조직들과 더불어서 빈민 회의는 '인간 선언'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우리의 목적은 빈민층이 정부의 정책적 수단에 의해서 극심한 피해를 당해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었다. 그러한 정책들은 우리의 천연 자원 기반을 보존하거나 우리 문제들을 대변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역의 이익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회의를 통해서 모든 정부의 대표자들이 우리 문제들을 알게 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긴밀히 협력할 수 있도록 우리의 호소가 전해지기를 바란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호소에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핵심적인 회원들은 현대화와 세계화에 대한 압력을 오래도록 극심하게 받아 왔다. 예를 들면, 수많은 가족들이 강제적으로 떨어져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생태학적으로 파괴적인 댐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의 자원은 수출을 위해 약탈당하고 있는데, 그러한 행위는 경제적 성장을 증진한다는 미명으로 정당화된다. 물론, 이러한 희생은 보상을 요구하며, 특정 지역의 자원들을 그 지역의 복지와 발전을 위해서 사용할 권리가 강조된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할 모든 권리를 가진다. 그렇지만 아니다. 그들은 본래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으며, 결정적인 것은 주류에서 자주 제외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훨씬 더 민주적이고 지속적인 사회라는 전망에 이끌리게 된다. 예컨대, 보다 더 공정하고, 참여적이고, 꾸밈없이 솔직하고, 동정심 많고, 협동적이며, 자연 환경을 존중하는 것 등의 경우를 뜻한다.

빈민 의회에서는 무엇을 척도로 받아들이는가? 무정부적인 조직들과 사회적 활동가들이 한데 모여서, 조직적인 단체를 수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그들은 대체로 자립적이고, 자급자족하며, 참여적이다. 또한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살며, 자발적으로 단순한 생활양식을 영위하고, 자신의 문화와 주체성, 그리고 (훨씬 더 적합하다고 밝혀진) 생활양식 등에 만족하며, 지방적 국가적 국제적으로 공정한 정의와 관련된 광범위한 문제들을 염려하고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행복에 대한 빈민 의회의 생각이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사는 것'에 중점을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재부(財富)란 '잘 가지는 것(well having)'이 아니라 '잘 사는 것(well being)'을 뜻한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무정부적인 조직들과 활동가들 간의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민 의회의 중심적인 회원들은 서로 공생 관계에 놓여 있다. 빈민 회의의 지도자와 고문들은, 사람들의 운동을 강화시키고, 지속적이고 자립적인 단체들을 세우기 위한 활동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매우 긴밀히 협력하여 일한다. 전자는 후자를 알도록 소개해 준다. 예를 들면, 지속적이고 대안적인 농업, 공동체 사업과 조직들을 시작하기 위한 지식을 비롯하여, 사회적 자원을 이용하는 법, 공동 작업과 협동적인 일을 증진시키는 법, 재정 관리와 회계 기술, 이해가 대립하는 경우의 해결 방법, 사회적 정치적 분석 방법 등에 관한 지식 등을 알려 준다.후자는 타고난 지혜와 전통적인 가치, 단순한 생활양식 등으로 전자 집단의 경험과 지식을 풍부하게 해 준다.

동남아시아의 농촌에서, 만약에 지방 단체들이 권한을 부여받고, 보다 많은 부분에서 자립과 자족(自足)을 성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한다면, 빈곤은 많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고, 착취도 감소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빈곤층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풍부한 자원과 기술을 통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다면, 지구(地球)의 자원을 적합하게 분배하여 이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대량 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가 말하듯이, "대량 생산은 오로지 생산 제품만 중요시하는 데 반하여, 대중에 의한 생산은 생산 제품과 생산자, 생산 과정 등을 모두 중시한다."

사실상, 자립은 동남아시아 사회와 불교 교단의 특징 중 하나였다. 시장 의존과 소비주의 외에 다른 선택의 방도를 찾는 것은 누추한 곳에서 살고 먹기 위해 뿌리까지 파먹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지속적인 지역 공동체적 경제 모델로서 강조되는 것은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소비를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생산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용 조합이나 협동조합 점포, 또는 적절하게 설계되어 소득을 산출하는 사업 등을 들 수 있다. 돈은 가능한 한 해당 지역에서 유통되어야 하며, 그 지역에서 유통되는 화폐로 사업이 이루어져 한다. 수출을 하거나 도시 지역의 부유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역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지역에서 필요한 것만을 환경으로부터 얻어내야 하므로, 결국 자연적 농업에 중점을 두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모델은 참여적인 경영을 위한 연구 없이는 실현될 수 없으며, 지역 사회 안에서 공동 이익과 협동, 공동 작업 등을 육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지속적인 사회를 조성하기 위한 명확한 청사진이 없는 경우에 유의해야 한다. 많은 것이 지역 문화와 지역 자원의 다양성과 유용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빈곤층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뒤에 처진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기까지, 힘의 불균형은 줄어들어야 한다. 강하고, 자립적이고, 자급적인 사회 조직의 발전은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지배에 대하여 반드시 필요한 방호벽이 될 것이다. 따라서 빈곤층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서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으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착수 기반을 제공해야만 한다. 직접적인 부산물로서는, 시민 사회가 강화된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빈민층이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보다 더 의미 있는 참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적으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작년에는, 소규모 농업 경영자들이 빈민층을 위한 대학을 세웠고, 최근의 환경 및 사회 경제적, 정치적 관심사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의 경험을 듣고 배우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빈민 대학은 야간 대학과 연계되어 있는데, 치앙마이 대학에 근무하는 진보적인 교수 몇 사람이 제창하여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필자도 관여되어 있는 무정부적 조직인 교육 운동에 그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팍문 댐(Pak Moon Dam) 근처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빈민 회의 회원들이 서로 교대하면서 오래도록 모여 있었고, 그 결과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세웠다. 빈민 회의는 여기서 수년 동안 항의해 왔지만, 댐 건설을 중단시키려던 이전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나중에는 그들의 생계 수단을 잃는 대신에 그에 합당한 보상을 얻을 수도 없었다. 정부는 이주하는 많은 가족들을 위한 보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결 방안은 자립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의 경우에 서서히 시도되고 있는데, 그로써 그 곳에서의 삶의 질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에 언급하고 있는 시도들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다.

1. 전통적 건강 센터를 운영하기 위해서 결성된 그룹에서는, 거주민들에게 약초 사우나와 전통적 마사지, 약초 등을 제공한다.
2. 몇 가지 사회 사업도 등장했다. 그들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 생산하고, 단지 잉여 산물만 판매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지역 공동체에서 흘러나가는 금전의 총액을 감소시킨다.
3. 젊은이로 이루어진 환경 모임이 결성되었다.
4. 자원 봉사 교사들이 운영하는 취학 전 아동을 위한 센터가 세워졌다.

요약컨대 불교적 맥락에서 보자면, 만약 사람들이 자연적인 거주 환경에 둘러싸여서, 자그마한 지역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면, 자유롭고 지속적인 생활양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동체 속에서 인간적 자유를 성취하는 것은, 각 개인의 관심사가 구성원 전체의 관심사와 조화를 이룰 때에 가능하다. 비구 붓다다사(Buddhadasa)가 그에 대해서 잘 말하고 있다.

우주 전체가 협동적이다. 태양, 달, 별들이 마치 협동조합처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 점은 인간과 동물, 나무와 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신체의 각 부분들도 서로 협동하여 기능을 다하고 있다. 세계는 상호적이고, 서로 의존적이며, 협동적인 기업과 같으며, 인간은 태어나서 나이가 들고 고통받고 죽어 가는 과정 속에서 서로가 모두 친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마침내 우리는 마치 천국과 같이 숭고한 환경을 건설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생명이 이러한 진실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쇠멸하고 말 것이다.

세계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이득은, 억압에 시달리고 사회적 진보에서 뒤 처진 사람들이 분투 노력하는 것을 세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으며, 다국적 기업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혹한 행위를 자행하는 다국적 기업의 힘과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저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신(新)자유주의는 무거운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있으며, 명목뿐인 정치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널리 만연되어 가고 있다. 바른 기억과 연민은 없지만, 이 결합은 사회적 경제적 파괴 행위 또는 불안정 상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된다. 담마(dhamma)적 예민함으로 볼 때,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가능하다. 즉 경쟁에는 반대하고, 협동에 기초를 둔 세계화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원대하고 건설적인 변화를 위한 기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관련된 세계 시민으로서, 먼저 국제 사회뿐만 아니라 각각의 시민 사회와 마음들을 개선시켜야만 한다. 그 모두가 탐욕과 증오, 망상에 의해 오래도록 속박되어 왔다.(예를 들자면, 탐욕으로는 소비주의, 이득, 자본 등이 해당하고, 증오에는 폭력, 대중적 참여에 대한 불신, 권력의 집중화, 비밀주의, 군비 확장주의 등이 해당하며, 망상은 전문적 지식, 과학자적 태도, 개인주의, 경쟁 등이 해당한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할 만한 어떠한 단독적인 행위도 없다. 오히려, 그 흐름을 거스르고자 노력하는 데 협력해야만 한다. 세계 경제에 대한 반대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선택은 또한 계획하여 준비하거나 시도해야만 한다. 개혁이나 변화는 개인적,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자면, 다국적 회사의 활동은 조심성 있게 면밀히 조사되어야 하고 대중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 무역 또는 투자자의 권리 계약의 형태로, 숨겨져 있는 다국적 자본가 계층의 비망록들은 끊임없이 폭로되고 타도되어야 한다. 정부는 공공복지와 환경 보존을 위해서 시장을 통제하는 역할을 강화해야만 한다. 대중과 환경은 다국적 과점(寡占)들의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에 의한 민주적 참여가 적극적으로 장려되어야 하며,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은 결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선택된 미디어는 하위 그룹의 관심사를 대신 표현해 주어야만 한다. 경제의 지역주의에 대한 실험들은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 경제로부터 자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한 생활양식, 즉 자발적인 단순한 생활양식은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이 파괴되지 않도록 소비주의와 투쟁하기를 추구하고 장려해야만 한다. 시간, 즉 통제되지 않은 자본은, 500년 전에 그것이 출현한 이래로, 그것은 정치, 사회, 경제, 지리적 장벽을 성공적으로 허물어뜨렸던 것처럼, 모든 문화들도 동질화시킬 것이다. 21세기에, 문화와 자본 사이의 충돌은 소위 문명의 충돌보다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동정심, 바른 기억, 자기만족, 이기심이 없는 것, 협동 등과 같은 가치들은 이기심, 망상, 물질적 욕망, 경쟁심, 증오 등을 바꾸어 놓았다. 기타 등등.

단결뿐만 아니라 인내와 근면, 동정심으로써, 우리가 비록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할지언정, 강력한 다국적 기업과 세계은행, 세계 무역 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국제 통화 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등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착취 행위에 대해서 방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공이 적지 않다. 그들을 위한 최선이자 가장 전망이 밝은 일이고, 그들은 가장 최신의 기술들을 익혔다. 게다가, 대중 매체는 날마다 우리들을 소비주의라는 마력적인 종교로 이끌고 유혹한다. 그리고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우리에게 심어 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강력한가, 우리는 바른 기억이라는 불교 수행을 통해서, 허위로서 허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며, 자본주의의 허위 속에서 진실을 볼 것이다.

요약하자면, 경제 자유주의의 기본 철학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불교의 기본 원칙들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에 대한 기본적 가정, 인간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행동 준칙들, 자연에 대한 태도 등이 다르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은 각기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물질적인 복지 면에서는 절도를 지켜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재부, 권력, 인정(認定), 감각적 쾌락 등은 모두 해로울 수 있으므로, 그러한 것들은 지나치게 많거나 너무 적어도 좋지 않다고 본다. 우리들은 개인을 위해서든 집단을 위해서든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지(無知)는 항상 우리에게 이러한 세속적인 네 가지를 더욱 더 많이 축적하라고 속삭인다. 현대 경제학은 이러한 무지를 극단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탐욕, 증오, 경쟁심, 이기적인 개인주의, 이기적인 집단주의와 같이 도덕적으로 해로운 욕망들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도덕적으로 유익한 삶의 질, 관용심, 동정심, 침착성, 지혜 등은 더욱 계발해야 한다. 몸에 해로운 욕망들은 불행의 근본 원인이 된다. 인정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욕망이 먼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고 억압한다는 것이며, 결국 다른 것들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빈민층과 부유층 모두가 불행하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전제에서, 우리는 좋은 사회란 도덕적으로 유익한 삶의 질을 높여 주는 사회적 환경도 포함하는 사회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절제하면서 단순하게 생활하며, 부와 권력을 분배하고, 경쟁심이나 억압, 그리고 현재의 경제 제도에 의해서 조장되는 착취 대신에 협동 정신으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불교적 경제 원리에 따르면, 화학적 살충제와 화학 비료, 무기의 생산과 무역 등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도 명백히 해 둔다.

불교적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인간적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관용과 동정심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 존재를 뛰어넘어서 모든 생명체까지 확장된다. 죽이지 말라는 계율은 우리들을 물 수도 있는 곤충까지도 포함하여 적용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주를 본다.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가치를 공유할 때, 우리는 또한 달과 태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 모든 것들과 함께 그 가치를 공유한다.

바람직한 생활양식이란 절제하는 단순성에 있듯이, 이 또한 우리가 우리의 자연 환경과 더불어서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최소한의 것만을 자연으로부터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다른 아시아인들과 토착 문명의 경우처럼, 불교 문명에서도 숲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이상적인 삶이란 절대적인 기본 필수품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자연에 가까운 숲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숲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후로 그는 남은 삶을 숲에서 숲으로 오가면서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보냈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적절히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현대 경제가 기초하고 있는 깨달음의 기본적 전제들과 원리들 중 많은 것을 비판적으로 선택하고 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들의 의식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과 함께 적절하게 순차적으로 우리 사회의 현재 구조를 철저하게 변화시켜야만 한다.

김미숙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공저로서, {붓다의 깨달음}, {불교사의 이해} 등이 있으며, [연기설(緣起說)에서의 시간과 인과의 문제], [자이나교의 영혼설에 대한 불교의 논박], [자이나의 식생활 원리와 그 철학적 배경] 등의 논문이 있다. 현재 동국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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