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일반 시스템 이론 (서울: 불교시대사, 2004) J. 메이시 저, 이중표 역

불교와 일반 시스템 이론
(서울: 불교시대사, 2004)
J. 메이시 저, 이중표 역
웰빙(well-being) 바람이 불고 있다. 음식, 집, 요가, 명상 등을 말할 때 으레 적용하는 것이 바로 이 웰빙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풍조는 아마도 그 동안의 도전적인 몸집 부풀리기에 대한 반성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양보다는 질, 외양보다는 내적 충실, 바쁨보다는 느림이 미덕이라는 그런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언제부턴가 나도 그런 풍조를 타게 되었다. 그래서 명상을 배워보자고 결심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급한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독재 체제 아래 학교의 일과 사회참여활동에 관계하느라고 심신이 지치게 되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간이 나는 대로 깨우침을 얻었다고 소문난 스님과 도인들을 찾아뵙고 배움을 청했다. 그리고 선원에 들어가 참선도 했다. 우리 대학 철학과에서 근본불교를 가르치는 역자를 알게 된 것은 그러는 과정에서였다.

나는 역자로부터 불교의 기본 개념과 이론 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분한테서 많은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배우게' 됐는지 어떤 지는 잘 모르겠다. 아리송한 점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역자가 내게 명상을 잘 하기 위해서는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열망에 불을 붙인 것만은 분명하다. 석봉래 씨가 번역한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은 그런 열망에 활활 타고 있었던 1997년 가을의 일이었다.{{ Varela, Thompson, and Rosch, The Embodied Mind (Cambridge, Mass.: MIT Press, 1991).}}

그 책에서 얻은 강력한 인상은 인지과학이라는 첨단과학의 연구에 종사하는 분들이 그 과학의 발전 가능성을 불교의 공사상에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공사상의 서구적 수용이라 할 만한 일이다. 인지이론에서 실증주의가 대표하는 극단적 객관론과 현상학이 대표하는 극단적 주관론의 양극단을 배제하는 새로운 이론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서 규정된다는 중도적 인지이론이 그것이다.

그 이론에서 인지란 주어진 외부대상에 충실한 의미를 주관적인 마음에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행위를 거쳐서 인지대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지는 마음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 인지의 진화는 주관과 객관의 상응관계가 아니라 주관과 객관이라는 환경이 얽힌 결합의 관계라는 의미다. 행위가 환경을 변화시키고 환경이 다시 행위를 변화시키는 체화적 과정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최첨단의 중도적 인지이론이 '구식이고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불교이론에 연관된다는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고, 명상 공부에 대한 내 열망을 더욱 달구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그 책이 아닌 다른 책이다. 이중표 교수가 최근에 번역 출간한 《불교와 일반시스템 이론》이다.{{ 원본은 J. Macy, Mutual Causality in Buddhism and General Systems Theory (New York: SUNY Press, 1991)이다.}}

앞에 언급한 책과 같은 해에 출간되어 주목을 끌었던 명저다. 가히 서구지성사의 한 경향을 드러낸다고 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메이시는 서구의 과학사상이 실재(reality)를 고정된 실체로서 파악하려던 입장에서 역동적 일반 시스템적 과정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입장의 변화에 불교의 연기적 사고가 관련돼 있다고 말한다. 일반 시스템 이론가들의 주장, 즉 세상은 선형적 인과율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인과율의 규정을 받는다는 주장이 2500년 전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인과율을 믿고 있는데 그 인과율은 다름 아닌 선형 인과율이다. 원인에서 결과가 일방향으로 규정된다는 인과율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선형인과율인 것이다. 그 인과율은 본질적으로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두 개의 개념에 근거한다.

세상의 모든 변화하는 것에는 반드시 불변한 무엇이 있다는 자기 본질의 동일성이다. 그러한 자기 본질의 동일성은 고정된 실체를 존재를 전제로 하며, 이러한 실체와 실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며 그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선형인과론의 특징이다. 선형인과론은 궁극적으로 제일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을 낳는다. 가령 제일원인이 창조주인가 혹은 원자인가 하는 것이 그 예다. 그런 형이상학적 관념은 소모적이고 아전인수적 논쟁을 불러온다. 제일원인을 입증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소모적이고 아전인수적인 논쟁을 종식하고 좀더 과학적이고 실속 있는 논의의 진전을 도모하는 것이 현대의 일반 시스템적 사고라 할 수 있는데, 그 일반 시스템적 사고에서는 자연과 세계를 서로 연결된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물망 속에서 특정한 패턴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인식해내는 일은 인간인 관찰자와 그의 인지과정에 달려있다고 본다.

양자물리학이 입증해 주듯이 우리가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직물 속에 나타난 어떤 패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은 실체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선형인과율과는 구별되는 상호인과율이다. 상호인과율적 사고를 대표하는 일반 시스템적 사고에서 우리는 실체 그 자체보다는 큰 연결망 속에 묻혀있는 관계들의 연결망에 관심을 집중한다. 일반 시스템적 사고에 의하면 실체는 없고 관계만 있으며 이 관계들의 그물망은 부분과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계의 그물망은 실체를 가정할 필요도 제일원인을 가정할 필요도 없다.

메이시는 자신이 주장하는 일반 시스템이론은 경영학과 공장에서의 효율성과 통제에 응용되고 있는 시스템적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과 철학적 윤리적 함의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일반 시스템 이론은 인공두뇌학(cybernetics)과 생물학에 기초한 철학이론이다. 메이시는 일반 시스템 이론과 붓다의 연기론이 설사 목적과 방법을 달리하는 인간기획이기는 하지만 서로 사상체계상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의존하여 함께 발생한다."는 붓다의 연기론은 일반 시스템 이론과 함께 상호 인과율을 이해하는데 풍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명상을 공부하면서, 특히 불교명상을 공부하면서 이해하기 제일 어려운 개념이 무아다. 그런데 무아의 개념은 불교가 불교임을 자랑하는 가장 특색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것을 부정하면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번의 번역서는 바로 이 무아의 개념을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과 일반 시스템 이론의 주장하는 상호인과율은 모두 현상의 무상성, 변화성을 강조한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반 시스템 이론은 모든 것의 변화는 피할 수 없고 변화는 모든 것에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며 세계는 사물들(things)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흐름과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며, 존속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들을 맺고 있는 패턴들이지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도 자아를 상호의존적 발생으로 보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상호관계 속에 존재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의 '자아'는 결코 고립되지도 고정되지도 않는 것이며 실상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으로서 나는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 하는 가운데 감각기관에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이미지,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 등의 현상이라는 연료를 공급받아 이것이 일깨운 욕망에 의해 조종되는 과정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자아'란, 사실은 마음의 역동적인 관계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자아를 이렇게 유동적인 구조물이라고 볼 때 초자연적인 실체나 절대자를 가정할 수는 없다. 반대로 인간의 괴로움은 인간이 내가 만든 것이고, 속박도 두려움과 탐욕을 통해 내가 만든 것이고, 그러므로 내가 그것들로부터 해탈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반 시스템적 이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경험은 경험하는 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있다는 급진적인 제안을 한다. 이에 대해 메이시는 레즈리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경험을 분석할 때 주관과 객관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거부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는 경험을 끊임없는 사건들의 연결고리 속에서 유기체와 환경을 연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독단이 아니라면 그 가운데 어느 한 실체를 뽑아서 '유기체'라고 부르고, 다른 것은 '환경'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유기체는 환경과 더불어 지속되며, 유기체의 경험이란 유기체-환경 연속체를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교류를 말한다.(p. 187)

이러한 논리는 인간의 정신 활동을 인지 시스템이 환경의 지도를 만들고, 변화에 순응하고, 정보를 얻고, 해석적인 구성물들을 전개하고 투영하는 것과 같은 심적 사건들의 흐름이라는 결론을 유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생물학자는 자신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인 것 같다."라고 고백한다. 이 논리에서 시스템은 내용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형체를 유지하는 하나의 패턴이라고 설명하고 그것을 불꽃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아도 그런 것이라고 하겠다. 상호인과율에 비추어 볼 때 사고와 행위의 주체로서 '나'는 실제로 환경과 상호작용 하고 있는 행동의 동적 패턴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를 내가 겪는 일상의 경험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게서 '나'란 명사적 사물이 아니라 관계의 동사적 패턴이라는 이해는 불교 서적보다는 일반 시스템 이론에서 명확하게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붓다의 말씀을 일반 시스템 이론이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나를 더없이 매료하였다.

목적과 방법이 다른 동서양의 사고방식이 실재는 역동적 과정이라는 데서 일치한다는 점은 불교에 대한 나의 이해를 더욱 깊게 하였다. 특히 메이시는 상호인과율의 논리에 따라 지각하는 자는 어떻게 그가 지각하고 있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일까, 현재적 정체성은 어떻게 과거의 행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의 계속성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마음은 몸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선형 인과율과 상호 인과율에서의 윤리와 도덕은 어떤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등을 세세히 분석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책의 내용에 매료되어 읽다가 마침내 책을 덮게 되었을 때 남는 의문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저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저자 메이시는 1929년 5월 2일생이며 미국 뉴욕 주에서 장로교의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프랑스계 외국어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후, 웰리슬리 대학에서 성서역사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1세 때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 가서 실존주의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1953년 결혼하기 전 2년 반 동안 미정보국에서 일한 바 있으며,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 1964년부터 1966년까지는 피스코의 일원으로 인도, 티베트,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달라이 라마 14세를 알현하면서 '옥수수가 불에 닿으면 팝콘'이 되듯이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40세가 되던 1969년에 미국 시러큐스 대학원에서 불교와 일반 시스템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번의 번역서는 바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불교학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녀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치열한 사회적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50대 초반에는 스리랑카의 불교적 사회개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58세 되던 해에는 티베트에 불법적으로 잠입하였으며, 1990년대부터는 반핵 운동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현재는 '절망 넘어서기' 프로그램의 지도자, 생태환경운동가, 그리고 핵 방지 활동가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에는 30회 이상의 국내외 모임의 기조 강연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삶은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한 상호 인과율에 근거한 과정적 자아상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 이론에 대한 철저한 공부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삶이다. 그러면서 만약 그녀가 불교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라는 우문도 함께 해 본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자아가 상호연기적이라는 것을 나도 메이시처럼 철저히 깨달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은 아직 아닌 것 같다. 이는 아직도 공부가 부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천지향점이 무엇인가는 알았다고 할까? 자기기만의 늪 속에 허우적거림을 본다. 이제 이중표교수의 3여년에 걸친 노고의 결실인 이 책의 일독을 독자들에게 권하면서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에고의 집착은 명상에 의해서만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행동을 통해서도 약해진다. 도덕적 행위가 자주 요구하는 위험을 무릅쓴 행위와 용기는 개인적 이기주의의 구성물 너머로 우리를 날려보낼 수 있다. 우리는 낡아빠진 자아의 벽이 허물어진, 그리고 모든 형태의 생명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에 선명하게 초점이 맞추어진, 보다 넓은 공간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p. 336)

고형일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학사 및 석사 졸업.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현재 전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동 대학교 카운슬링센터 소장, 한국교육사회학회장이며, 정념무학 명상모임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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