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것은 불교가 지니고 있는 가장 커다란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방편품(方便品)에도 명확하게 여래(如來)가 이 세계에 출현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을 열어[開] 보이고[示], 깨달아[悟] 들게[入] 하기 위함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불교사(佛敎史)에 보이는 모든 종파들도 그 중심적인 교의(敎義)에서는 차별이 나타나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두 '깨달음'에 집중되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 깨달음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서한(西漢) 말, 중국에 전입되기 시작하여 동한(東漢)의 황로도(黃老道)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수입되는데, 형성 초기의 중국불교 역시 그 깨달음에 대하여 방법과 내용상에 있어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러한 관심의 결과 중국불교에서는 인도불교와는 다른 독특한 관점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이다.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돈오(頓悟)를 주장하고, 그에 따라 돈·점의 논쟁을 불러일으킨사람은 바로 도생(竺道生, 약 372∼434)이다.

중국불교학계에서는 인도로부터 전래한 불교를 그 본의를 잃지 않고 가장 중국식으로 해석하여 불교의 중국화를 이룬 선구자로서 도생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한 인정은 바로 도생이 제시한 돈오성불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도생의 '돈오론'은 이후 일부 종파에 적극적으로 채택되고, 나아가서 중국불교의 귀숙(歸宿)이라고 할 수 있는 선종(禪宗), 특히 조사선(祖師禪)의 가장 핵심적인 선리(禪理)로 주장되고 있다.

만약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주지(主旨)가 깨달음에 있다면, 불교의 깨달음은 과연 돈오(頓悟)인가? 아니면 점오(漸悟)인가? 앞의 가정에서 출발한다면, 이 문제는 불교에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돈오론'과 같은 주장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물론 반야부 경전인 『유마경(維摩經)』 등에서 돈오의 사상적 경향이 보이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돈오론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한다면, 돈오론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중국사상의 특수한 요소와 서로 결합하여 인도불교와의 차별을 보이게 되는 새로운 교의(敎義)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불교는 그 전래 초기부터 중국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돈·점의 문제는 중국불교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불교사를 통하여, 또한 최근까지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에 따라 본고에서는 중국불교에서 나타난 돈·점 논쟁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돈오(頓悟)란 무엇인가?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頓悟)인가 점오(漸悟)인가를 논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과연 '돈오'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야만 한다. 물론, '돈오론'이 중국에서 제창되고, 그에 따라 돈·점 논쟁이 발생하였다는 것으로부터 전통적인 교의에서는 이른바 '점오'의 입장을 가진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근본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담보하는 『아함경(阿含經)』에서는 "부처님께서는 점차적인 설법을 하신다. 이익과 즐거움을 주는 가르침을 보이는데, 시(施)와 계(戒), 생천(生天)을 논하신다(佛漸爲說法. 示敎利喜, 施論·戒論·生天之論)."라는 것으로부터 오온(五蘊)·사제(四諦), 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의 차제(次第)적인 법문을 설하여 "점차로 다가간다(漸次來至)"는 구절이 도처에 나타난다. 이러한 입장은 대승불교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최종적으로 깨달음의 단계를 설하는 보살의 '열 가지 단계[十地]'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불교에 있어서도 이러한 교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정리하고 있다. 중국불교학에서 깨달음의 단계를 논하는 '십지'는 각각의 근거하는 경전과 종파에 따라 명칭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에 대한 논의는 본고의 주제를 넘어서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중국불교사에서 '돈오'를 제시한 것은 역경으로 유명한 지루가참(支婁迦讖)과 도안(道安)이다. 하지만 그때의 돈오는 제칠지(第七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생(無生)'의 도리를 깨닫게 되어 점차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수대(隋代)의 석법사(碩法師)가 『삼론유의의(三論游意義)』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돈오(小頓悟)'를 쓰는 법사는 육가(六家)로서 승조(僧肇), 지도림(支道林), 진안수(眞安 ), 사통사(邪通師), 이산원사(理山遠師), 도안(道安) 등이다. 이들은 칠지(七地) 이상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축도생(竺道生)은 '대돈오(大頓悟)'의 뜻을 사용하였다.{{ [隋]碩法師, 『三論游意義』(『大正藏』45, p.121, 下.)"用小頓悟師有六家也; 一肇師, 二支道林師, 三眞安 師, 四邪通師, 五理山遠師, 六道安師也. 此師等云: 七地以上悟無生忍也, 合年天子竺道師, 用大頓悟義也."이외에 도생의『법화경소』권1, 길장의『이제의(二諦義)』권하, 혜달의『조론소(肇論疏)』권상, 승우(僧祐)의『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권12, 15 등에 관련 기사가 나타난다.}}

이로부터 '대돈오'와 '소돈오'의 구별이 있으며, 그 차별은 바로 칠지(七地)로부터 활연대오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가 아니면 십지 이후에 얻는가 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당시에 명승(名僧)으로 유명한 지도림, 도안과 특히 도생과 함께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제자로 유명한 승조(僧肇)까지도 소돈오에 거명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소돈오가 일반적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도생에 의하여 제시된 '대돈오'는 어떠한 사상적 내용을 갖는 것일까? 도생의 돈오론을 고찰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당시의 사상적 배경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도생의 '돈오론'의 제창에는 당시의 사상적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도생의 생존연대는 동진십육국(東晋十六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의 초기에 이르는 시기로 중국역사상 가장 복잡한 시대에 걸쳐있다. 이른바 난세(亂世)라고 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은 바로 사상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혼란을 예상할 수 있다. 더구나 동진십육국시대는 한족(漢族)을 주축으로 하는 동진(東晋)의 남하(南下)와 북방의 이민족(異民族)을 지배계층으로 하는 16국의 분립(分立)으로, 중국대륙을 크게 남방과 북방으로 나누는 사상적 차별을 초래하였다.

북방 민족의 발흥(勃興)은 불교에 있어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의 변화는 서역의 교통로가 북방 민족의 발흥으로 보다 활발한 왕래가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서역에서 유행하고 있던 아비달마불교와 당시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 특히 용수(龍樹)·제바(提婆) 계통의 중관반야학(中觀般若學) 등이 전래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보의 대량유입은 각각 남방과 북방의 불교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남방으로는 소승교학(小乘敎學)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동진의 사상적 주류는 여전히 현학이었고, 현학이 지니고 있는 '의리(義理)'적 성격이 소승교학과 유사하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진의 '강남불교'의 대표로서 여산 혜원(廬山 慧遠, 334∼416)을 꼽을 수 있다. 혜원의 불교사상은 도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혜원의 불교사상을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법성론(法性論)'이라고 할 수 있다. 『고승전(高僧傳)』 혜원전(慧遠傳)의 기재에 따르면 당시 일반적으로 '열반(涅槃)'을 수명(壽命)의 '장구(長久)'로 보는 것을 한탄하고, 『법성론』을 찬술하여, "지극(至極)은 불변(不變)으로서 성(性)으로 삼고, 득성(得性)은 극을 체득하는 것[體極]으로서 종(宗)으로 삼는다."{{ [梁]慧皎撰,湯用 校注, 『高僧傳·慧遠傳』卷六, p.218."至極以不變爲性, 得性以體極爲宗"}}고 하였다.

다시 말하여, 혜원이 논하는 '법성'은 열반의 '당체(當體; 性)'로서, 만약 '불변'의 법성을 얻는다면 또한 열반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혜원은 『아비담심서(阿毗曇心序)』에서 "자기의 성(性)을 자연에서 정하는 것이 바로 지당(至當)에 통달하여 극(極)이 있음이다."{{ 慧遠撰, 『阿毗曇心論序』, [梁]釋僧祐撰, 蘇晋仁·蕭鍊子點校, 『出三藏記集』卷十, p.378."己性定于自然, 則達至當之有極."}}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여, 일체법(一切法)의 자성(自性)은 스스로 천연(天然)을 얻으며, 바꾸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다만 '불변의 성(性)'을 체득한다면 비로소 능히 '지당(至當)의 극(極)'에 통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 그 사유양식의 바탕에 일종의 실체(實體)적 견해가 배어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관련된 자료를 통하여 본다면, 혜원이 말하는 법성은 『아비담심론(阿毗曇心論)』의 '법체항유(法體恒有)'와 『삼법도론(三法度論)』의 '승의아(勝義我; 人我)' 등의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 짐작되고, 또한 그 매개적 작용은 현학의 사유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다시 혜원(慧遠)이 제시한 '신불멸(神不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승전(高僧傳)』 혜원전(慧遠傳),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등에서 혜원은 '신(神)'을 바로 윤회의 주체이고, 만물을 생육(生育)시키며, 조화의 근원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혜원은 '열반'을 '명신절경(冥神絶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혜원의 관점은 사실상 불교적인 이해라기보다는 현학적인 이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역시 농후한 불교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북방의 소수민족을 지배계층으로 하는 16국에서는 통치이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화(中華)에 뿌리를 두지 않는 것으로부터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이미 중국에 전래된 것과는 다른 새로운 불교를 부흥시킴으로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인 대다수의 중국민족과의 문화적 이질감을 해소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에 따라 때마침 북방에 유행하던 대승불교 반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한 북방의 불교학의 대표로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을 들 수 있다.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구마라집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우선 그는 역경(譯經)에 있어서 그 이전의 '격의(格義)'적 방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데, 이는 그 이전부터 조직을 갖추어 역경하였던 중국불교의 자체적 역량이 축적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은 그가 역경한 불전(佛典)들에 의거하여 중국불교의 여러 학파와 종파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는 반야학의 핵심적인 논서인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대지도론(大智度論)』과 『백론(百論)』을 번역하여 중국인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용수와 그의 제자 제바가 창립한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中觀學派), 즉 대승반야공종(大乘般若空宗)을 접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라집이 중국인들에게 이해시킨 '반야'에 대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라집은 용수·제바 계통의 중관논서를 번역하고 있고, 또한 그는 단순한 역경가가 아니라 영향력 있는 사상가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그에게는 『실상론(實相論)』등의 저술도 있다고 하는데,{{ [梁]慧皎撰,湯用 校注, 『高僧傳·鳩摩羅什傳』卷二, p.53.}} 관련된 저술을 통하여 본다면 라집이 중국인에게 이해시켰던 '반야'는 '실상(實相)'적인 이해가 다분히 존재하였다.{{ 본고에서는 지면관계로 이점에 대한 논증을 생략한다. 졸고, 『佛學與玄學關系硏究』(中國 南京大學 博士學位論文, 2001.) 第4章 玄佛合流和中國般若學完成 第1節, 第2. 羅什的般若思想 p.96-100 참조. }}

물론 이러한 실상적인 반야의 파악은 지극히 방편적인 것이었고, 『대지도론』에 근거한 것이지만,{{ 龍樹造,[后秦]鳩摩羅什譯,『大智度論·初序品中緣起義釋論』卷第一(『大正藏』25, p.57, 下.) "一切實一切非實, 及一切實亦非實, 一切非實非不實, 是名諸法之實相." 참조.}} 이후 전체적인 중국 불교학에 있어서 반야의 이해에 대한 하나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라집이 반야를 실상적으로 파악한 것에 상당히 중요한 사상사적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도생이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을 제시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도생이 활약하던 시대의 현학의 흐름과 불교학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흔히 남방의 '의리불학(義理佛學)'과 북방의 '성공지학(性空之學)'이라고 칭하고 있듯이 크게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방의 강남불교에는 여산 혜원을 중심으로 현학적 바탕에 영향 받은 '법성론'이 제시되고 있었고, 북방에서는 구마라집을 중심으로 한 반야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생은 혜원과 구마라집의 문하에서 수학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것은 그의 '돈오성불론'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도생이 혜원의 문하에서 아비달마 교학에 바탕을 둔 법성론을 수학하다가 북방의 구마라집 문하에서 반야학을 접하였을 때, 상당한 충격을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혜원의 법성론은 가장 심층적인 근원을 실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반하여 구마라집은 실상(實相)적 파악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실체'와 '실상'의 차이는 단순한 용어의 차별이 아니라 근원적 사유의 충돌을 유발시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도생이 충돌의 지양점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남방불교의 전체적 성격을 특징짓는 '이치[理; 義理]'라고 본다. 도생에게 있어서 '이치'는 그의 모든 철학을 구성하고 있는 구심점이며, 본고에서 다루는 '돈오성불론'의 핵심적 근거이다.

도생의 '돈오성불론'은 무엇보다도 '불성론(佛性論)'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實有佛性]'는 전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돈오(頓悟)'의 의미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도생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처[佛]'를 다음과 같이 '이치'로 해석하고 있다.

부처(佛)는 이치[理]를 깨달은 체(體)로서 그 역(域; 境界)을 초월한다.{{ 僧肇撰,『注維摩詰經·弟子品』卷第三(『大正藏』38, p.360, 上.)"佛爲悟理之體, 超越其域."}}

부처는 연기(緣起)로부터 원인이 되고, 부처는 이치[理]를 연(緣)하여 생하는데, 이치에는 원래부터 둘이 없으니, 어찌 삼(三)을 허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일승(一乘)일 뿐이다.{{ 道生,『法華經疏』(卍續藏 150, p.400, 右下.)"佛種從緣起, 佛緣理生, 理旣無二, 豈容有三, 是故一乘耳."}}

부처는 일극(一極)이 됨이니, 일(一)을 드러내어 나타난 것이다. 이치에는 진실로 삼(三)이 있으니, 성인(聖人) 또한 삼을 삼아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치 가운데 삼이 없고, 오직 미묘한 일일 뿐이다.{{ 앞의 책 (上同, 左下.)"佛爲一極, 表一而出也. 理苟有三, 聖亦可爲三而出. 但理中無三, 唯妙一而已."}}

이러한 예문들로부터 부처를 '이치'로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도생의 사유에 있어서 그 중점은 바로 '이치'에 있음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다시 '열반(涅槃)'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이치[理]를 관(觀)하여 성품[性]을 얻었다면 바로 속박이 다하여 니원(泥洹; 涅槃)이 감응할 것이다. 만약 반드시 니원(열반)을 귀하게 여기고 그를 취하려 한다면 곧 다시 니원에 속박될 것이다. 만약 번뇌를 끊지 않고 니원에 들려는 자는 곧 니원과 번뇌가 다름을 보지 못할 것이니, 바로 속박이 없다.{{ 僧肇撰,『注維摩詰經·弟子品』卷第三(『大正藏』38, p.345, 中.)"旣觀理得性, 便應縛盡泥洹. 若必以泥洹爲貴而欲取之, 卽復爲泥洹所縛. 若不斷煩惱卽是入泥洹者, 是則不見泥洹異於煩惱, 則無縛矣."}}

여기에서는 바로 '이치'를 관하여 '성품을 얻음[得性]'을 열반의 원인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반야사상의 특질인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중생즉불(衆生卽佛)'의 사유가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도생의 '이치'에 대한 중시가 바로 '돈오성불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대열반경집해(大涅槃經集解)』서경제(序經題)에서 도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다운 이치[理]는 스스로 그러하여[自然]하여 깨달으면 그윽이 부합(符合)한다. 진리는 차등이 없으니, 깨달음에 어찌 변화[易]를 용납할 것인가? 변화가 없는 체(體)는 담담히 항상 비추지만, 다만 어리석음을 따라 근본에 어긋남으로 깨달음이 내게 있지 아니할 뿐이다. 진실로 능히 이르러 구한다면, 바로 미혹을 되돌려 극(極)으로 돌아간다.{{ [梁]寶亮等撰, 『大般涅槃經集解·序經題』卷第一(『大正藏』37, p.380, 下.)"夫眞理自然, 悟亦冥符, 眞則無差. 悟豈容易, 不易之體, 爲湛然常照, 但從迷乖之, 事未在我耳. 苟能涉求, 便反迷歸極."}}

여기에서 도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로 진리와 깨달음에 어떠한 단계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眞理)'는 이른바 '변화가 없는 체[不易之體]'이고 '담담히 항상 비춤[湛然常照]'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답게 수행한다면 단번에 '미혹을 되돌려 극으로 돌아갈[反迷歸極]'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법화경소(法華經疏)』에서 '이치[理]'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치[理]와 어그러지면 미혹이 되고, 미혹은 반드시 만물을 다르게 한다. 반대로 이치를 깨달으면, 이치에는 반드시 둘이 없으니, 여래의 도(道)가 하나이다. 물(物)이 어그러져 삼(三)이 되고, 삼(三)에서 물정(物情)이 나오지만, 이치는 곧 항상 하나이다. 마치 구름과 비는 하나이지만 초목은 여러 가지로 다름과 같고, 초목이 여러 가지로 다르다고 하여 어찌 비와 구름이 그러하겠는가?{{ 道生,『法華經疏』(卍續藏 150, p.405, 右下.)"乖理爲惑, 惑必萬殊, 反而悟理, 理必無二, 如來道一, 物乖爲三, 三出物情, 理則常一, 如雲雨是一, 而藥木萬殊, 萬殊在乎藥木, 豈雲雨然乎."}}

이로부터 본다면 도생이 말하는 '이치'는 바로 '이체(理體)'로서 현상을 담보하는 '제법성공(諸法性空)'과 같은 '담지체(擔持體)'인 것이고, 그의 성격은 당연히 '무이(無二)', '상일(常一)'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치'의 '무이'·'상일'·'변화가 없는 체[不易之體]'·'담담히 항상 비춤[湛然常照]'의 성격은 바로 '돈오'의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혜달(慧達)은 『조론소(肇論疏)』에서 '돈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도생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돈(頓)'이라 하는 것은, 이치를 나눌 수 없음[理不可分]을 밝힌 것이고, '오(悟)'는 지극히 비춤[極照]을 말한다. 불이(不二)의 깨달음으로 나눌 수 없는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치와 지혜가 함께 아우러짐을 돈오(頓悟)라고 한다.{{ 慧達, 『肇論疏』(『卍續藏』150, p.425, 左上.)"夫稱頓者, 明理不可分, 悟語極照. 以不二之悟符不分之理. 理智 釋, 謂之頓悟."}}

이는 도생의 '돈오론'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문구인데, 돈오의 근거가 바로 '이치'의 '나눌 수 없는' 성격이고, 또한 그것은 '불이(不二)'의 깨달음과 부합함으로 '돈오'를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이치'는 나누어 이해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이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깨달음[悟]'은 '궁극'에 대한 비춤[照]인데, 결국은 그 대상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우주의 궁극을 비춘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대상과 내용은 반드시 전체적인 인식과 깨달음만으로 가능하다는 말로서 그것이 바로 '돈오'라는 것이다. 이 점은 다시 『대열반경집해(大涅槃經集解)』 순타품(純陀品)에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극(極)에 머묾에서 말한다면, 부처는 항상되기 때문에 능히 사람들에게 항상됨을 베풀어 보살들에게 논한다. 체(體)의 흔적이 아직 극에 이르지 못함에는 조화시킴이 필요할 것이지만, 어찌 거친 형상으로부터 홀연히 얻겠는가? 묘한 상(常)을 문득[頓] 이룰 뿐이다.{{ [梁]寶亮等撰, 『大般涅槃經集解·純陀品』卷第四(『大正藏』37, p.391, 中-下.)"居極而言, 佛是常故, 能施人常, 就菩薩爲論. 體跡未極, 交是有須. 何得忽從 形, 頓成妙常耶."}}

이것은 바로 극(極), 즉 '이극(理極)' 혹은 '이체(理體)'에 이른 상태에서야 비로소 '돈오'를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도생이 말하는 돈오는 그 깨달음의 완성에 있어서 단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아직 극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가르침[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다시 『법화경소(法華經疏)』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참답게 깨달아 얻은 무리들이 어찌 말[敎]을 필요로 하겠는가? …… 아직 이치[理]를 보지 못한 때는 반드시 언진(言津; 교학(敎學)을 필요로 하겠지만, 이미 이치를 보았다면, 어찌 말을 쓰겠는가? 올가미와 통발을 얻어서 물고기와 토끼를 구하지만, 물고기와 토끼를 이미 잡았다면 올가미와 통발을 어찌 베풀겠는가?{{ 道生,『法華經疏』(卍續藏 150, p.410, 右上.)"得無生法忍, 實悟之徒, 豈須言哉. …… 夫未見理時, 必須言津, 旣見於理, 何用言爲. 旣獲筌蹄以求魚 , 魚 旣獲, 筌蹄何施."}}

이미 '무생법인'을 얻었다면 다시 어떤 수행이나 노력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지만, 아직 이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바로 필수적으로 '언진(言津)', 즉 교법(敎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생의 돈오는 일반적인 상태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길장(吉藏)의 『이제론(二諦論)』에서 도생의 '대돈오의(大頓悟義)'로 인용하는 다음의 구절을 살핀다면 보다 분명해진다.

과보(果報)는 바뀌고 달라지는 것이고, 생사(生死)는 대몽(大夢)의 경계이다. 생사로부터 금강심(金剛心)에 이르기까지 모두 꿈이며, 금강(金剛) 이후의 마음에서 활연히 대오(大悟)하여 다시 보는 바가 없는 것이다.{{ 吉藏, 『二諦論』卷下(『大正藏』45, 111, 中.)"果報是變謝之場, 生死是大夢之境, 從生死之金剛心, 皆是夢, 金剛後心, 豁然大悟, 無復所見也."}}

이로부터 도생의 돈오는 바로 '십지(十地)' 이전까지는 깨달을 가능성이 없는 '대몽(大夢)'의 경계이고, 십지 이후에서 얻는 '금강심(金剛心)'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능히 활연대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생의 '돈오론'은 당시 중국불교학에서 일반적으로 논해지던 '돈오'와는 상당한 차별이 있다.

앞에서 석법사(碩法師)의 『삼론유의의(三論游意義)』에서 도생 이외에 거의 모두 칠지(七地) 이상의 계위(階位)에서 무생법인을 깨닫는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도생의 돈오론에 입각하여 본다면, 사실상 그러한 '소돈오'는 이미 '점오(漸悟)'가 되어 버리고, 틀린 이론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교의(敎義)가 출현한 것이다. 또한 이후의 '돈오'는 모두 도생의 돈오를 지칭하게 된다.

3. 돈점(頓漸) 논쟁과 돈오론의 전개

전통적인 불교학이 모두 깨달음에 대하여 '점차적 접근'을 논하고, 중국 땅에서 '돈오'의 이론이 제시된 이후에 다시 그에 대한 본질적인 차별이 지닌 돈오론이 나타났다면 필수적으로 그에 대한 반발이 나타날 것이다. 더욱이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깨달음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아주 치열하게 그 논쟁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도생이 돈오성불론을 제시한 것에 대하여 최초로 반박한 이는 바로 도생과 같이 혜원(慧遠) 문하에서 수학하고, 함께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문하로 유학한 혜관(慧觀)이다. 특히 『고승전(高僧傳)』 혜관전(慧觀傳)에서는 그에 대하여 승조(僧肇)와 함께 법에 대한 이해가 정밀하고 논쟁에 뛰어남을 당시 사람들이 인정하였음을 언급{{ 『高僧傳·慧觀傳』(『大正藏』50, p.368, 中.) "時人有謂: 通情則生(道生)·融(道融)上首, 精難則觀(慧觀)·肇(僧肇)第一."}}할 정도로 라집 문하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이교오시(二敎五時)'의 교판(敎判)을 최초로 제창하여 후대 '오시교판(五時敎判)'의 원형을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돈오론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지는 『변종론(辯宗論)』과 『논돈오점오의(論頓悟漸悟義)』를 저술하여 후대에 전해진다{{ 앞의 책."著辯宗論·論頓悟漸悟義及十喩序贊諸經序等, 皆傳於世."}}고 서술하고 있지만, 모두 현존하지는 않는다.

승우(僧祐)가 찬술한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12권에 따르면, 당시 돈점논쟁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령운(謝靈運)의 『변종론(辯宗論)』, 법백륜(范伯倫)의 『여도생혜관이법사서(與道生慧觀二法師書)』, 혜관의 『점오론(漸悟論)』, 담무성(曇無成)의 『명점론(明漸論)』과 작자미상의 『사문축도생집돈오(沙門竺道生執頓悟)』, 『사강낙령운변종술돈오(謝康樂靈運辯宗述頓悟)』, 『사문석혜관집점오(沙門釋慧觀執漸悟)』 등등의 문헌이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이 유실되고, 사령운의 『변종론』이 당(唐)대 도선(道宣)이 편집한 『광홍명집(廣弘明集)』권18에 게재되어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료에 따르면 당시 돈점논쟁은 아주 치열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특히, 도생의 제자인 도유(道猷) 등에 의하여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는데, 결국은 유송(劉宋) 문제(文帝)의 재위기간(424∼453)에 황제에 의하여 돈오와 점오 사이에 그 승부를 가리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돈오론이 승리하게 되어 마침내 논쟁이 종식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광홍명집』권1에 수록된 『송문제집조재논불교(宋文帝集朝宰論佛敎)』에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道宣, 『廣弘明集·宋文帝集朝宰論佛敎』(『大正藏』52, p.100, 中.)"時有沙門竺道生者, 秀出群品英義獨拔. 帝重之, 嘗述生頓悟義, 僧等皆設巨難. 帝曰: 若使逝者可興, 豈爲諸君所屈. 時願延之著離識論. 帝命嚴法師辯其同異. 往返終日. 笑曰: 公等今日無愧支許之談也. 云云."}}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도생과 치열하게 논쟁을 전개하고 『점오론』을 찬술한 혜관의 제자인 법원(法瑗) 등도 후에 '돈오론'을 제창하고 있음을 관련된 사료에서 발견할 수 있어 쟁론 이후에는 돈오론이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관련된 자료의 소실로 인하여 보다 구체적인 돈점논쟁의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출삼장기집』9권에 기재된 유규(劉 , 437∼495)의 『무량의경서(無量義經序)』에 따르면, 그 대체적인 논쟁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점오'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언급한 '소돈오'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철저하게 돈오의 입장에 있는 것으로, 그의 평가에 따른다면 점오론은 허교(虛敎)이고, 돈오론은 실교(實敎)라고 한다. 어쨌거나 중국의 도생으로부터 비롯된 돈점논쟁은 이미 인도로부터 발원한 불교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미 중국화된 불교의 교의논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점은 도생과 동시대의 유명한 문인으로 혜관의 『점오론』에 대응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는 『변종론』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서두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설에서 성도(聖道)는 비록 멀지만, 배움이 쌓이면 능히 이를 수 있고, 쌓임이 다하면 생(生)을 비추므로 마땅히 점오(漸悟)가 아닌 것이다. 공자(孔子)의 교설에서 성도(聖道)는 이미 미묘하여 비록 안회(顔回)가 가깝다[殆庶]고는 하지만, 그 체(體)는 두루 비춤이 없어 이치[理]는 일극(一極)으로 돌아온다. 새롭게 논하는 도사가 있어, 고요히 비춤이 미묘하여, 단계[階級]를 허용하지 않고. 학(學)의 쌓임은 끝이 없는데 어찌 스스로 끊겠는가? 지금 석가모니의 점오를 버리고, 그 능히 이르는 것만을 취하고, 공자의 가까움[殆庶]을 버리고 그 일극을 취한다.

일극은 점오와는 다르게 능히 가깝지 않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치가 나아가는 바는 비록 각각의 논지를 취하여 합하였지만 공자와 석가모니의 본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두 가지 논으로 이치를 찾아 말하는 것은 도가(道家)에서 제창하는 득의(得意)의 설이니, 감히 이러한 절충을 스스로 인정하여 신론(新論)으로 삼는 것이다.{{ 謝靈運,『辯宗論·諸道人王衛軍問答』, [唐]道宣,『廣弘明集』卷第十八(『大正藏』52, p.224, 下- 225, 上.)"釋氏之論, 聖道雖遠, 積學能至, 累盡鑑生, 不應漸悟. 孔氏之論, 聖道旣妙, 雖顔殆庶, 體無鑑周, 理歸一極. 有新論道士, 以爲寂鑑微妙, 不容階級. 積學無限, 何爲自絶? 今去釋氏之漸悟, 而取其能至. 去孔氏之殆庶, 而取其一極. 一極異漸悟, 能至非殆庶. 故理之所去, 雖合各取, 然其離孔釋矣. 余謂二談救物之言, 道家之唱, 得意之說, 敢以折中自許. 竊謂新論爲然." }}

이러한 사령운의 말에는 유(儒)·불(佛)·도(道) 삼가의 융합이 두드러진다. 다시 말하여, 도생의 돈오론은 '적학(積學)'을 반대하여 '단계를 허용하지 않고[不容階級]', '가까움을 버리며[去殆庶]', 이치에 있어서는 그 '일극(一極)'을 취함이 바로 유가와 비슷하고 도가의 '득의(得意)'와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도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령운의 이러한 평가는 도생의 저술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유실된 현재로서는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사실에 부합된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사령운은 다시 도생의 돈오를 가장 중국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변종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인들은 이치[理]를 보는데 익숙하고, 가르침[敎]을 따르는데 어려우므로 그 누학(累學)을 폐(閉)하고 그 일극(一極)을 열었다. 이인(夷人; 인도인)들은 가르침을 따르는데 익숙하고, 이치를 보는데 어려우므로 그 돈(頓)을 폐하고 그 점오를 열었다.{{ 앞의 책(上同, 225, 上.)"華人易於見理, 難於受敎, 故閉其累學而開其一極. 夷人易於受敎, 難於見理, 故閉其頓了而開其漸悟."}}

이어서 그는 비록 '권(權)·실(實)'은 같지만 그 '용(用)'에 있어서는 다르고, 또한 공자는 이른바 '성학지로(聖學之路)'를 폐하여 어리석은 민중을 따르게 한다고 비판하며 참답게 성인(聖人)을 배우는 것은 바로 '육경(六經)'의 '돈해(頓解)'에 있음을 강조하고, 석존(釋尊)이 비록 '점오(漸悟)'를 열었지만 '은밀하게 돈해를 세웠다[密造頓解]'고 말하고 있다.{{ 앞의 책(上同, 225, 中.) 필자 요약정리.}}

이로부터 사령운의 도생에 대한 지극한 존중을 엿볼 수 있다. 바로 '돈오'에 대한 극단적인 찬양인 것이다. 이는 물론 '점오'의 반박을 의식한 것이지만, 그의 『변종론』에서는 도생이 인도로부터 전래한 불교와 중국 전통적인 사유양식을 완벽하게 회통하였다는 적극적인 긍정의 평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도생이 제창한 돈오론은 이후 중국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주류로 형성되는데, 천태지의(天台智 , 538∼597)가 제창한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상판석(敎相判釋) 가운데 '화의사교(化儀四敎)'에서 '돈(頓)·점(漸)·비밀(秘密)·부정(不定)'으로 포섭되면서 완전한 정법(正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

4. 선종(禪宗)의 돈점논쟁

'돈오'가 중국불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종(禪宗)에서도 적극적으로 돈오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하택 신회(荷澤神會, 668∼760)선사이다. 하택 신회는 당시 중국불교의 일반적이었던 불성론(佛性論)과 반야(般若)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선사상을 구성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돈오'를 설명하고 있다.

사(事)는 모름지기 이지(理智)가 함께 아우러짐을 돈오(頓悟)라 한다. 계위(階位)와 점법(漸法)의 해석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 돈오의 뜻이다. 자심(自心)이 본래 공적(空寂)한 것을 돈오라 한다. 마음이 얻을 바가 없는 것을 돈오라 한다. 마음이 바로 도(道)라는 것을 돈오라 한다. 마음이 머무를 바가 없는 것을 돈오라 한다. 법에 대하여 깨닫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얻은 바가 없는 것을 돈오라 한다. 일체법(一切法)이 일체법임을 아는 것을 돈오라 한다. 공(空)을 듣고 공에 집착하지 않으며, 불공(不空)도 취하지 않는 것이 돈오이다. 아(我)를 듣고 아(我)에 집착하지 않으며, 무아(無我)를 취하지도 않는 것이 돈오이다. 생사(生死)를 버리지 않고서 열반(涅槃)에 드는 것이 돈오이다.{{ 『南陽和尙問答難徵義』(石井本), {荷澤神會語錄} (中華書局, 1996年版) p.80"事須理智兼釋, 謂之頓悟;  不由階漸而解, 自然是頓悟義; 自心從本以來空寂者, 是頓悟; 卽心無所得者爲頓悟; 卽心是道爲頓悟; 卽心無所住爲頓悟; 存法悟心, 心無所得, 是頓悟; 知一切法是一切法, 爲頓悟; 聞說空, 不着空, 卽不取不空, 是頓悟; 聞說我不着我, 卽不取無我, 是頓悟; 不捨生死而入涅槃, 是頓悟."}}

신회의 이러한 설명은 앞에서 인용한 도생의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사(事)는 모름지기 이지(理智)가 함께 아우러짐을 돈오라 한다[事須理智兼釋, 謂之頓悟]", "스스로 그러한 것이 돈오의 뜻[自然是頓悟義]"의 두 구절은 도생이 돈오를 설명하는 구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도생이 불성론(佛性論)을 바탕으로 하여 '돈오성불론'을 제창하고 있는데, 신회 역시 철저하게 불성의 '본유(本有)'를 바탕으로 '반야'의 논리로서 돈오를 이끌고, 최종적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제창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유사성은 도생의 작용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신회선사는 바로 이러한 '돈오'에 입각하여 이른바 혜능(慧能)의 '남종현창운동(南宗顯彰運動)'을 일으키는 데, 이때 다시 '돈점논쟁'이 나타난다.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논쟁으로, 혜능(慧能) 계통의 남종은 '돈오'이고, 신수(神秀) 계통의 북종은 '점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남돈북점'의 용어는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에서 북종을 폄하하기 위한 것으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타나는 혜능과 신수의 게송(偈頌)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대운사(大雲寺) 활대(滑臺)의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남종의 신회 선사와 북종의 숭원(崇遠) 법사에 의하여 선종의 정통성을 정하기 위한 논쟁을 벌이는데(732), 그 가운데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돈점'의 문제였고, 그로부터 '남돈북점'의 용어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러한 '무차대회'의 상황은 독고패(獨孤沛)에 의하여 기록되어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의 제목으로 전해오는데, 그에 따르면 신회 선사는 북종의 선사상을 "마음에 머물러 깨끗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추고, 마음을 다스려 안으로 증득한다[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는 것으로 규정하고, 달마(達摩) 선사 이후의 육대 조사들은 "하나하나 모두 단도직입을 말하였고, 곧바로 요달하여 성품을 보며, 점차를 말하지 않았다[一一皆言, 單刀直入, 直了見性, 不言階漸]"고 하여 북종을 "사승은 방계이고, 법문은 점오이다[師承是傍, 法門是漸]"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북종의 선사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왜곡된 부분도 있지만 보다 철저한 '돈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활대에서 논쟁의 결과는 신회 선사의 철저한 승리로 끝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활대의 '무차대회'의 신빙성과 북종 대표로 나왔다는 숭원 법사가 실제 인물이었는가? 또한 '무차대회'가 실제로 개최되었고, 숭원이 실제 인물이었다면 과연 그가 당시 북종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는가? 등등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신회어록』에 수록된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의 논쟁은 후대에 남종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에 의하여 기정사실로 확정되고 있다. 그 후 신회 선사는 다시 천보(天寶) 4년(745)에 『현종기(顯宗記)』등을 저술하여 이른바 '남돈북점'과 남종의 정통성을 확정시키고 있다.

신회 선사에 의하여 발생한 활대의 '남돈북점' 논쟁은 이후 철저하게 '돈오'를 현실적인 '깨달음'에 적용시킨 '조사선'의 등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조사선에 있어서는 '돈오'의 이론과 내용이 상당히 달라지지만, 신회선사의 적극적인 '돈오'에 대한 선양은 이론적인 돈오를 보다 현실적이고 활달한 돈오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5. 결어

앞에서 '중국불교의 돈점논쟁'이라는 제목으로 논술하였는데, 논술의 내용이 돈점논쟁보다는 오히려 도생의 '돈오론'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고, 오히려 본문의 주제인 돈점논쟁은 너무도 간략하게 처리한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도생이 돈오론을 제시함으로써 나타난 돈점논쟁과 선종의 돈점논쟁과의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가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은데 기인한 까닭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돈오'를 이야기하면서도 보다 구체적인 '돈오'에 관한 사상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있기에, 이 지면을 빌려 도생이 창도한 '돈오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필자의 의도가 개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생이 창도한 '돈오론'은 바로 동시대의 사령운이 『변종론』에서 평가한 바와 같이 인도로부터 발원한 불교를 가장 중국인들의 정서에 맞는 '중국식'으로 개량하였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중국식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불교 교의에 입각한 '점오론'의 반박은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돈오론'이 참다운 석존(釋尊)의 불교와 일치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여지는 남는다.

더욱이 도생이 접한 불교는 이미 상당히 중국화되어 있는 것이었고, 앞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돈오론'에는 불교적 요소 이외에 유가와 도가의 사유양식이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생의 '돈오론'은 이미 인도불교와 상당한 차별을 지니는 중국불교를 중국불교답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따라서 그것은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되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한다.

사실 '돈오론'이 지니고 있는 사상적 가치는 무궁하다고 할 수 있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진행되어 온 부분에 대한 심화연구에 대하여, 최근에 일어난 전체는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야만 참답게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전일주의(全一主義)'의 반론이 바로 '돈오론'의 입장임을 생각한다면, 돈오론이 지니는 뛰어난 논리성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반론이 이미 5세기에 도생이라는 천재적 불교인에 의하여 제창되었던 것이다.

김진무
동국대 선학과, 동대학원 선학과 석사과정졸업,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현재 선학과 강사. 박사학위논문으로 『佛學與玄學關系硏究』(中文), 역서로 『불교와 유학』『선과 노장』『조사선』『분등선』이 있으며, 이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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