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확 한신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새로운 천 년의 시작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던 때의 일이다. 내가 살던 아파트 앞으로 흐르던 개천의 여울에서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수많은 붕어 떼가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홍수로 인해 일시적으로 불어난 물이 급격히 줄어들자,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인근의 하천으로 미처 회유하지 못한 물고기들이었다. 그 순간, 난 그나마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젖은 바 있다.

전혀 물고기가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던 썩고 오염된 개울에서 뜻밖에도 붕어 떼를 만났듯이, 20세기를 지배한 폭력과 야만을 종식시킬 진정한 평화와 화해 역시 바로 이런 것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동안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한반도 대운하’ 계획에 관련해서 나는 이 붕어 떼와 더불어 어린 시절의 한 풍경을 떠올린 적이 있다. 연일 장맛비가 내리자 미꾸라지가 마당까지 거슬러 오르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암탉이 쪼르르 달려가 그 미꾸라지를 잡아먹던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당시 내 고향집이 강에서 가깝다거나 근처에 그럴듯한 개천이 흐르는 지역에 위치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엔 거의 건천(乾川) 상태로 물고기들의 서식지와는 거리가 먼 지대의 주거지였다.

그럼에도 장맛비의 물줄기를 따라 우리 집 앞마당에까지 미꾸라지가 거슬러 올라왔던 것인데, 다름 아닌 그것은 당시의 생태계가 그만큼 건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한반도 대운하’의 목표가 무슨 물류이동이나 관광일 수 없었다. 전혀 엉뚱한 상상력일지 모르지만, 다시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 미꾸라지가 마당에서 파닥이는 것을 보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였다. 그리고 만일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면,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설득해서라도 대찬성을 표했으리라

돌이켜 보면, 그러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혁명은 산으로 배가 다니고 바다 밑으로 자동차가 달리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수의 힘으로 불의와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는 정치적 혁명도 아닐 것이다. 그보다 쉬울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혁명이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한 적이 있던 세계로의 귀향, 붕어와 미꾸라지가 뛰노는 강과 마당을 복원하는 일이다.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 있던 생태계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실천하기 힘든 혁명이 되어 버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용 가능하고 이익창출의 도구로 보는 실용주의 시대는 실상 이명박 정부 출범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그것들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해 온 ‘능률과 실질의 숭상(국민교육헌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곧 오늘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속물성과 통속성은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다. ‘부도덕해도 좋다.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된다.’라는 몰염치와 부도덕성은, 과연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를 질문하고 반성해 보지 못한 한국적 근대화의 업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적으로 수치화하고 화폐가치로 환원하는, 보이거나 드러나는 것만을 중시해 온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부작용일 뿐이다.

그러나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고 해서 우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눈앞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은 분명 그 보이지 않는 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당장의 성과나 이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무용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삶과 세계의 한 단면만을 보는 근시안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실용의 잣대에 들어오지 않는,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무가치하며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달리 말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껏 계속되고 있는 혼란과 갈등의 주된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것은 아직도 추진 여부가 명확하게 결정되지 않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보여 주듯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시적이고 실용적인 결과와 가치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우리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웬 붕어, 미꾸라지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수로를 시멘트로 정비하고 도시하천을 하수구로 만들어 오는 동안, 얻은 것 이상으로 잃은 것 또한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오직 이익창출을 위해 함부로 다뤄도 되는 물건이나 재료인 양 취급해 오는 동안, 우습게도 인간 자신들의 존재 자체의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질이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치들, 이를테면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가뭇없는 연민이나 연대감, 겨우 존재하는 보잘것없고 가난한 사람과 사물들 간의 사랑과 우정 등이 지닌 무한의 가치를 상실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 어떤 꿈과 희망보다 클 수 있기에 그만큼 실현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구원은 바로 그것이다. 예전처럼 다시 가까운 삶터에서 붕어나 미꾸라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자연이 적대나 착취의 관계가 아닌 친교와 공생의 관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근대적 경제생활에서 상호 호혜와 공존의 탈근대적 삶의 양식으로의 존재전환을 뜻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쓸모없고 무가치하다고 폐기처분하거나 외면해 버린 것들 속에, 오늘의 삶의 위기와 불투명한 미래에 희망을 던져 줄 메시지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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