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생명과 자연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현대철학은 독특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서양의 철학 조류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의 생명과 자연 이해와도 다르며, 동아시아의 전통 철학은 물론이고 불교나 다른 종교의 생명ㆍ자연 이해와도 많은 차이를 지닌다.

철학적으로 고찰한다면 현대 세계는 전적으로 근대 철학의 토대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문화는 근대정신의 구현으로 이해된다. 17세기 이래 근대 철학자들은 중세의 체계를 넘어 인간을 이성의 존재로 이해하고, 존재자의 중심으로 설정하여 자연을 객체적인 실체로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 계몽주의 혁명과 산업혁명의 철학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것을 거칠게 이성 중심의 사유와 자연을 실체(實體)로 이해하는 세계관으로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세기에 이르러 구체화된 근대 서구의 문화는 무엇보다도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문화와 세계가 근본적으로는 존재에 대한 이해, 구체적으로 자연 이해가 변화함에 따라 달리 규정되는 것이기에 자연에 대한 관계 맺음과 이해의 틀은 시대와 문화가 변하는 표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자연 이해의 변화가 근대 자연과학을 낳는 뿌리가 되었으며, 자본주의의 철학적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제 그 이전 시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더불어 있는, 창조된 존재로 이해했던 틀을 벗어나 근대의 철학은 인간을 자연보다 월등히 우월한 존재,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정의하게 된다. 그 이전의 문화세계는 인간은 비록 피조물 가운데 으뜸일지언정, 그는 창조된 자연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대는 인간을 그 자신이 지닌 능력, 이성에 따라 자연에 군림하는 존재, 존재의 목자가 아니라 존재의 주인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제 근대의 이상적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이성의 능력으로 인간을 주인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근대의 자연철학은 인간을 자연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고, 이 지식을 통해 자연을 장악하고 정복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자연은 다만 인간 이성의 대상이거나 지식, 필요와 욕구의 객체, 그 대상으로 자리하게 될 뿐이다. 근대철학과 과학의 토대를 닦은 철학자 프란츠 베이컨은 이러한 생각을 새로운 자연 이해에 대한 저서 《신기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자연에 대해 '아는 것이 힘'이며, 그 힘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그 힘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것이다."

해방 이래 이 나라의 근대화론자들은 근대를 다만 이러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근대의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의 이성에 대한 이해와 존재의 의미를 읽는 데에서도 맹목적이다. 근대 이성의 기획이 존재를 사물화할 때, 그래서 근대화를 다만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규정하는 근대는 야만과 폭력을 초래할 것이다. 근대에 기반한 현대문화는 자연과 역사, 인간 존재를 자본과 과학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로서 근대를 이해하는 개발론자들은 생명의 터전인 산과 강을 다만 개발과 자본의 수단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근대를 다만 자본주의로 이해하는 자들은 자본의 성공을 위해 FTA를 추진하고 이를 위해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 생명의 귀중함, 그 의미를 내팽개치고 광우병 위험에 가득한 쇠고기 수입에 목숨을 거는 저급함을 보여 주고 있다.

대운하 사업은 생명과 자연의 원리에 근본적으로 반하는 것이다. “국민이 원하면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지 않겠다.”라는 대통령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개별 부처에서나 기업, 또는 지자체에서는 아직도 대운하 사업의 추진에 대해 미련을 지니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린다. 광우병 쇠고기와 대운하를 추진하는 정책은 논의가 불필요할 정도로 반생명적이며 반인간적이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게 진행되는 시민의 소리에 일관되게 모르쇠로 강행하는 현 정부의 독선과 불통, 자본과 개발에 대한 맹신은 반민주주의적이기 이전에 반생명적이며 반인간적이다. 생명의 원리와 존엄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행위를 다만 자본주의를 극대화하고 경제란 괴물에 사로잡힌 인간의 욕망과 추악함에 매몰되어 이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근대의 정신, 근대의 원리를 망각하고 근대화를 설명하는 어리석음, 자본의 성공과 경제성장, 산업과 개발, 실용과 그에 따른 결과만을 전부인 줄 알고 있다.

근대는 욕망을 기호화하고 욕망을 타자화한다. 그 욕망이 자연과 생명, 나아가 인간의 존재 자체에까지 미칠 때 타자화된 욕망은 인간을 파멸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욕망을 거부하거나 마치 없는 듯이 행동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타자화되고 기호화된 욕망에 굴복하여 자신의 존재를 위한 필요를 타자화된 욕망에 일치시키는, 배반의 행위일 뿐이다.

타자화된 욕망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내재화하고 욕망을 절제하며, 욕망을 초월하는 존재론적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에 기호화된 욕망에 찌든 포스트모던적 문화를 넘어 탈근대의 문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욕망을 초극하는 문화를 이룩해 가야 한다. 일면적 근대화가 근본적으로 생명과 인간의 의미, 존재 의미를 저버리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 세계를 내재화하고 초월하는 근본적인 성찰의 존재론적 결단이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면 무엇보다도 탈근대 담론, 근대 이성의 기획에 대한 초월적 극복을 논의하는 담론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정신, 시대의 표징을 읽지 못하고 여전히 일면적 근대에 매몰되어 있는 근대개발주의자들, 자본의 논리를 인간의 경제적 삶과 동일시하는 맹목적 근대주의자들이 우리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죽음의 문화를 부추기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맹목적 근대의 한계와 그를 극복할 성찰의 시간이며, 이를 통해 생명을 존중하고 사람을 살리는 문화를 이룩할 진지한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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