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불교학 - 김보리

1. 머리말

인도 사상의 변화와 발전의 주요한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논쟁이다. 특히 인도 사상이 철학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던 고전시대(5~13세기경)에 논쟁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 시기 동안 크게 불교, 힌두 육파(六派)철학, 자이나교 등을 비롯한 다른 전통을 가진 학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논쟁들은 그 자체로 각 사상이 영향을 주고받은 역사를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저술된 주석서나 논서는 자기 학파의 학설을 보완하고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논쟁의 과정과 결과를 자기 학설의 변화에 일면 유동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개방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이러한 인도 사상의 특징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꾸마릴라 밧따(Kumārila Bhaṭṭa, 7CE)의 고전 미망사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힌두 6파 철학 중 불교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일 수 있는 이 학파가 벌인 자재신(自在神) 논쟁에서, 힌두 전통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불교의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꾸마릴라의 역작 󰡔슐로까와릇띠까(Ślokavārttika)󰡕의 15장 「삼반다끄셰빠빠리하라(Sambandhākṣepaparihāra)」를 통해서 읽어 낼 수 있다. 베다(Veda)의 절대적인 권위를 방어하기 위해 나머지 힌두 정통학파들을 비판하고 있는 꾸마릴라의 입장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주목할 만한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론(中論, Madhyamakakārikā)󰡕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는, 인과론에 입각한 자재신 비판의 흐름을 따르면서 후대의 자재신 논쟁에 영향을 준다. 둘째, 이 세계의 시작과 끝을 부정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관을 견지하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생명체의 다양성을 오직 행위(karman)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끝으로 셋째는 자재신 비판의 논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불교 쁘라마나(Pramāṇa)학파와의 상호 영향이다.

「삼반다끄셰빠빠리하라(Sambandhākṣepaparihāra)」의 자재신 비판에서는 기존 미망사의 전통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관념들을 읽어 낼 수 있다. 이는 아직 철학적 체계를 정립하지 못하였던 자신의 전통을 다른 학파들의 논리적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역으로 외부의 이론을 폭넓게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2. 고전 미망사학파와 꾸마릴라

1) 고전 미망사의 형성 배경


고전 미망사는 그간 국내에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리 친숙하지 않는 이 사상의 형성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망사학파는 다른 정통 학파들, 상키야(Sāṃkhya), 니야야-와이셰시까(Nyāya․Vaiśeṣika), 베단따(Vedānta)와는 달리, 약 6세기경까지도 철학적 체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다의 무오류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그때까지 주로 베다에서 명령되는 제사에 관련된 문제들만을 해석하고 탐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망사학파는 타 학파들의 사상적 발전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속에서 베다와 다라마샤스뜨라(Dharmaśāstra)를 부정하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도전에 맞서야 했을 뿐 아니라, 상키야나 니야야-와이셰시까, 불이론 베단따에 대응해야만 했다.

미망사의 철학적 역사는 육파철학의 원전 중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망사수뜨라(Mīmāṃsāsūtra)󰡕에 대한 주석과 함께 전개되지만, 꾸마릴라의 등장 이전까지 그 이론은 제사에 관한 과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꾸마릴라 당대의 인도에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성행하였음은 물론, 전통 내에서도 베다의 제의적 측면과는 무관한 신화나 우빠니샤드(Upaniṣad)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당시 다른 정통 학파들의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뿌라나(Purāṇa)나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와 같은 서사시 속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펴져 있던 세계 창조에 대한 믿음은, 베다가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한 것이라는 미망사 사상의 대전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꾸마릴라는 󰡔슐로까와릇띠까󰡕의 서문에서 이 논서의 서술 목적이 당시 유물론 학파의 위상으로까지 떨어졌던 미망사의 권위를 되살리고 확립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

고전 미망사는 사실상 미망사 철학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꾸마릴라는 󰡔미망사수뜨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샤바라스와민(Śabarasvāmin, CE 5)의 󰡔미망사수뜨라브하샤(Mīmāṃsāsūtrabhāṣya)󰡕에 대한 복주를 저술하면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미망사의 철학 체계를 최초로 완성하였다. 그 대표작은 샤바라 브하샤의 1장 1절에 대한 주석을 담고 있는 󰡔슐로까와릇띠까󰡕로, 이는 동시대의 사변적 사유들을 일람하고 있는 인식론과 변증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전문이 정교한 슐로까(śloka)로 이루어진 그 서술의 논쟁적인 특징은 꾸마릴라가 미망사학파를 정통 힌두철학의 중심부로 끌어오기 위해 애썼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2) 꾸마릴라 밧따

꾸마릴라 밧따는 고전 미망사의 철학을 정립하면서, 고전 인도시대에 정통 힌두이즘을 부활시키는 데 앞장섰고, 다른 학파들과 논쟁하면서 미망사의 철학뿐만 아니라 인도 사상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슐로까와릇띠까󰡕로 대표되는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베다에서 말하는 제사나 명령들을 무효하고 공허한 것으로 만드는 브라흐만(Brahman) 중심적이거나, 관념론적인 이론들에 맞섰다.

또한 세계의 실재성과 외부 대상의 인식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했고, 전지자(全知者, sarvajñā)나 요가행자의 초월적 인식에 대해 비판하였다.

󰡔슐로까와릇띠까󰡕에서 꾸마릴라가 비판했던 주요 논적은 바로 불교였으며, 특히 인식론과 관련하여서는 주로 불교의 딕나가(Dignāga, 陳那)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활동했던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불교논리학의 거장인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法稱)와 동시대인으로서 7세기의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보다 분명하게는 꾸마릴라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딕나가 이후, 그를 인용하고 있는 제자 만다나미슈라(Maṇḍanamiśra) 이전에 활동했던 것으로 본다. 특히 다르마끼르띠와의 연관성은 그들의 저작에서 추측할 수 있는 상호 영향과, 둘의 만남에 관한 일화를 다루고 있는 문헌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일화는 다르마끼르띠와의 논쟁에 관한 것으로 꾸마릴라가 한때 불교 승려였음을 전하는 이야기이다. 티베트의 역사가 따라나타(Tāranātha)는 꾸마릴라를 7세기에 티베트를 통치했던 손챈감포(Srong-tsan-Gampo, 627~650)와 동시대인으로 소개하며, 꾸마릴라와 다르마끼르띠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에 관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다르마끼르띠는 노예로 변장하고 당대의 외도(Tīrthika)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던 꾸마릴라를 찾아간다. 꾸마릴라에게서 힌두 철학의 정수를 배우게 된 다르마끼르띠는 이후 힌두 철학자들을 초대하여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 논쟁에 참가한 꾸마릴라는 다르마끼르띠에게 패하였고, 결국 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또한 마다와(Mādhava)의 󰡔샹까라딕위자야(Śaṅkaradigvijaya)󰡕에서도 변장한 다르마끼르띠가 꾸마릴라와 함께 공부했다는 진술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일화와 더불어, 꾸마릴라가 그의 저작에서 불교를 심오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후대의 평가는 그가 미망사의 사상적 체계를 새롭게 확립하면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정에 일말의 신빙성을 더해 준다.

3. 자재신 논쟁

1) 쟁점: 베다 VS 절대자


󰡔슐로까와릇띠까󰡕의 15장 「삼반다끄셰빠빠리하라」에서 꾸마릴라는 미망사 사상 최초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으며, 기존의 미망사 전통 내에서 그 관심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이는 해탈이나 윤회에 대한 관념을 미망사의 철학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미망사수뜨라 1장 1절 5송에 대한 샤바라의 브하샤를 꾸마릴라가 주석한 것에 해당하는 이 부분은 베다의 절대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세계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다른 학파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장이다. 꾸마릴라는 이 논서를 통틀어 15장에서 유일하게 윤회를 전제로 한 행위(karman)와 해탈의 문제를 언급한다.

샤바라는 자신의 주석에서 니야야학파의 입장으로 추정되는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단어와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 간의 결합이 특정한 작자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고, 또한 그 작자가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하기 위하여 베다를 창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꾸마릴라는 먼저 단어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간의 결합이 본래적인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베다가 창조된 것이라는 견해를 부정하면서 세계의 창조를 받아들이는, 사실상 미망사를 제외한 나머지 힌두 정통 철학들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삼반다끄셰빠빠리하라」에서 전개되는 논쟁의 쟁점은 각 학파에서 무엇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망사학파에서 절대적인 것은 베다이다. 미망사학파는 베다를 작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꾸마릴라는 이 세계가 만들어지거나 파괴되는 것이라는 다른 학파들의 관점을 비판해야만 했다.

세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미망사학파에게 실재하지 않는 세계와 무관하게 베다가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미망사학파가 베다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절대 또는 영원(nitya)의 의미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실재하는 것(pravāha-nityatā)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작이 없으므로 원인이 없고, 원인이 없으므로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고전 니야야-와이셰시까에서는 자재신을, 상키야에서는 순수의식인 뿌루샤(Puruṣa)를, 베단따에서는 브라흐만(Brahman)을 각각 절대자로 취한다. 초기에 순수 자연철학적 입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이는 와이셰시까학파에는 고전 시대 빠르타사라티미슈라(Pārthasārathimiśra)에 의해 본격적으로 신의 개념이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베다를 포함한 이 세계의 창조자로 그려지는 신은 그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꾸마릴라 당시 인도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신화나 서사시 속의 창조신의 역할과 유사한 것으로 미망사의 위상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한편 상키야와 불이론 베단따의 뿌루샤나 브라흐만은 비인격적 실재라는 점에서 와이셰시까의 그것과 차이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이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유일의 절대자(絶對者)들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절대성에 대한 나머지 학파들과 미망사의 차이점은 이 학파들이 현 세계를 시공간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라 보고, 그 한정을 넘어서는 초월적 실재(kūṭa-stha-nityatā)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우 유일의 절대자와 별개의 것인 베다는 절대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며, 동시에 베다가 시작 없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해진다.

이에 대항하는 꾸마릴라의 입장은 세계가 무시무종인 반면, 모든 존재들은 원인에 의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는 베다 내의 세계 창조에 대한 구절들은 제사에 관한 명령들을 칭송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단지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약 베다의 그러한 진술들을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대표적으로 니야야-와이셰시까의 견해와 같은 그릇된 이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창조와 파괴에 대한 관념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존재들의 생멸의 순환에서 착안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꾸마릴라가 베다와 이 세계가 무시무종의 것이라는 전제를 내세우고 나서, 도공이나 항아리 등과 같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존재들은 물론, 우리의 경험 밖에 있는 다른 학파들의 절대자들까지 생성과 소멸의 관계에 내재되어 있는 인과의 원리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2) 무원인 비판

자재신이 세계와 베다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꾸마릴라는 ‘모든 것은 원인으로부터 생기한다.’라는 전제하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불교에서 󰡔중론󰡕 이후 이어져 왔던 유신론 비판 흐름의 반영이라 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삥갈라(Piṅgala, 靑目 CE 3~4), 브하바비베까(Bhāvaviveka, 淸辯 CE 5~6), 짠드라끼르띠(Candrakīrti, 月稱 CE 6~7) 등에 의한 󰡔중론󰡕의 주석에서 지적되었던 자재신의 존재에 결여되어 있는 원인의 문제와 더불어, 특히 신의 신체가 증명되지 않는 데서 발생하는 무한소급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신체에 대한 비판은 우다야나(Udayana CE 11~12)에 의해 이 문제가 니야야-와이셰시까 내에서 해결되기 전까지, 신이 세계의 통제자라는 관점과 관련하여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니야야-와이셰시까의 창조론에서 구체적인 신의 역할이 논의된 것은 󰡔니야야와릇띠까(Nyāyavārttika)󰡕에서 웃디요따까라(Uddyotakara CE 5~6)에 의해서이다. 웃디요따까라는 신을 인간들이 행한 행위(karman)를 통제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질료인 원자를 활성화시키는 효과인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자아가 결과를 일으킬 수단, 즉 감관 등의 신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대상을 인식하는 등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신의 신체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비판의 쟁점이 되었다.

꾸마릴라에 의하면, 신의 신체는 그것이 바로 신체라는 사실에서 우리의 몸과 같이 생성의 원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원인이 증명될 수 없다는 점에서 세계 창조에 필요한 또 다른 원인 역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최초의 창조 이전에 세계의 질료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더불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신의 의도를 일으키는 원인 또한 설명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우선 그것이 신 스스로의 유희를 위한 것이라면 니야야-와이셰시까가 주장하는 자재신의 전능성에 위배될 것이다. 또한 외부 대상을 향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첫째, 최초의 창조 이전에는 자재신 외부에 인식 대상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며, 둘째로 신체 없는 자재신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감각기관과 인식대상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이 창조의 욕망(icchā)이라는 직접지각적 인식을 일으킬 수 없다는 비판은 꾸마릴라의 직접지각에 대한 관점에 근거한다. 미망사학파의 직접지각론의 기본 조건은 니야야-와이셰시까의 그것과 유사하다. 인식 주체와 현존하는 인식대상과 감각기관의 접촉(saṃprayoga)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꾸마릴라는 세계 창조 이전에는 그 신체가 증명되지 않는 신에게 창조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한 두 조건 모두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

미망사학파에서 직접지각의 문제는 미망사수뜨라 1장 1절 4송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꾸마릴라 이전부터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불교 쁘라마나학파의 딕나가는 󰡔쁘라마나사뭇짜야(Pramāṇasamuccaya)󰡕의 첫 장, 「쁘라띠약샤빠리체다 Pratyakṣapariccheda」에서 이 문제에 대한 꾸마릴라 이전의 미망사 논사들의 해석을 중점적으로 비판하였다.

꾸마릴라는 󰡔쁘라마나사뭇짜야󰡕의 해당 장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슐로까와릇띠까󰡕의 4장에서 딕나가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미망사학파의 직접지각론을 정립하였다. 특히 이 문제는 꾸마릴라 이후 미망사학파와 불교 쁘라마나학파 사이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요가행자의 증지(證知, yogipratyakṣa)에 관한 논쟁과도 연결된다.

3) 존재 논증 비판

「삼반다끄셰빠빠리하라」의 자재신 비판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바로 74송에서 다뤄지는 자재신 존재 논증 비판이다. 이 부분에서 동시대에 활동했던 불교 쁘라마나학파의 논사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가 󰡔쁘라마나와르띳까(Pramāṇavārttika)󰡕 2장 「쁘라마나싯디(Pramāṇasiddhi)」에서 논의하고 있는 자재신 존재 논증 비판과의 깊은 관련성을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꾸마릴라는 미망사학파 최초로 생명체의 다양성의 원인을 오직 생명체들이 과거에 행한 행위(karman)로 제시하고 있다.

꾸마릴라는 「삼반다끄셰빠빠리하라」의 74송에서 니야야-와이셰시까 논사들에 의해 선행된 자재신 존재 논증을 제시하고, 이후 게송들을 통해 그 논증의 오류를 실례(dṛṣtānta)와 원인(hetu, 因)의 관계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있다. 실례와 원인의 관계는 인도 논리학에 있어서 불교 쁘라마나학파의 딕나가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완성된 ‘추론이 성립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因의 三相, Trairūpya)’과 관련이 있다. 꾸마릴라는 󰡔슐로까와릇띠까󰡕의 추론에 관한 장인 「아누마나빠리체다(Anumānapariccheda)」장에서 직접적으로 ‘추론이 성립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전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74송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당신이] 특별한 집합체(saṃniveśaviśiṣṭa)들인 신체들의 생성이 집, [항아리] 등과 같이, 어떤 [의도를 가진 존재]에 의해 통제받는 것임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saṃniveśaviśiṣṭānām utpattiṃ yo gṛhādivat, sādhayec cetanā 'dhiṣṭhāṃ dehānāṃ tasya cottaram. 󰡔슐로까와릇띠까󰡕, 15.74.)

여기서 신체들의 생성이란, 다양한 생명체들의 태어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게송에서 ‘[당신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신의 통제에 의해서 생명체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니야야-와이셰시까의 견해이다.
이 내용은 꾸마릴라 이전이나 동시대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니야야의 논사 아빗다까르나(Aviddhakarṇa)의 자재신 존재 증명과 유사하다. 그러나 󰡔니야야수뜨라브하샤(Nyāyasūtrabhāṣya)󰡕의 주석서로 알려져 있는 그의 저작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이 부분은 불교 유가행중관학파의 까말라쉴라(Kamalaśīla)에 의해 󰡔땃뜨와상그라하빤지까(Tattvasaṃgrahapañjikā)󰡕에서 아빗다까르나의 견해로 소개된다.
‘특별한 집합체(saṃniveśaviśiṣṭa)’라는 것은 특별한 속성을 지닌 원자들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논증의 요소 중 드러난 원인(sādhana, 能證), 즉 증인(證因, liṅga)에 해당하는 이 표현은, 몇 가지 다른 문헌을 통틀어 약간의 차이를 가진 세 가지 복합어로 쓰였다.

우선 아빗다까르나는 ‘부분들의 특별한 집합체(avayavasanniveśaviśiṣṭa)’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까말라쉴라에 의해 인용되고 있는데, 또한 이것은 그 이전의 인물인 쁘라샤스따빠다에 의해 󰡔와이셰시까수뜨라(Vaiśeṣikasūtra)󰡕에 대한 주석서 󰡔빠다르타다르마상그라하(Padārthadharmasaṅgraha)󰡕에서 먼저 쓰인 것이기도 하다. 한편 다르마끼르띠는 󰡔쁘라마나와릇띠까(Pramāṇavārttika)󰡕에서, 역시 ‘특별한 집합체’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형태의 복합어인 ‘saṃsthānaviśeṣa’를 사용하였다. 다르마끼르띠가 인용하고 있는 이 표현은 웃디요따까라가 무의식적 실체를 통제하는 창조신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니야야와릇띠까󰡕에서 사용한 것이다.

이 논증에 대한 꾸마릴라의 비판의 핵심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뒤에 언급될 󰡔쁘라마나와릇띠까󰡕의 「쁘라마나싯디」 9~13송에서 다뤄지는 다르마끼르띠의 자재신 논증 비판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다양한 생명체의 원인으로 증명되어야 할 속성(sādhyam)은 자재신이 아니라 생명체들이 과거에 행한 행위이다.

둘째, 논증에서 제시된 집, 항아리 등의 유사 실례에 증명되어야 할 원인(sādhayadharma)인 ‘신의 창조물’이라는 속성이 결여되어 있다.

셋째, 다른 실례로 ‘신의 신체’를 들 경우, 신의 신체에서 ‘특별한 집합체’라는 속성이 증명될 수 없다.

먼저 74송 이전까지 꾸마릴라는 자재신의 세계 창조 과정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이미 생명체의 다양한 양태가 그들이 과거에 행한 과거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웠다. 그러므로 75송에서 이것에 대해 ‘이미 증명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는 더 이상의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다.

두 번째 비판은 니야야-와이셰시까에 의해 제시된 유사 실례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드러난 원인이 반드시 증명되어야 할 원인에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두 원인의 필연적 수반관계(vyāpti, 遍充)에 근거한다. 즉, ‘특별한 집합체(드러난 원인)’가 반드시 ‘신의 창조물(증명되어야 할 원인)’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 항아리 등은 원자로 이루어진 특별한 집합체라는 점에서 드러난 원인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되어야 할 원인에 포함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항아리는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도공의 창조물’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꾸마릴라는 만약 항아리가 신의 창조물이 된다면 세계의 창조자는 신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본성을 가진 생명체 중 하나인 도공이 되고 말 것임을 역설한다.

세 번째 비판은 추론이 성립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因의 三相) 중, 다른 실례에 드러난 원인이 반드시 부재해야 한다는 세 번째 조건에 관계된다. 이 비판에 걸려 있는 문제는 신의 신체를 유사 실례와 다른 실례의 두 가지로 놓고 분석할 수 있다. 먼저, 신의 신체가 ‘특별한 집합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신 스스로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될 수 없다. 또한 신의 신체가 신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창조를 위하여 반드시 존재하는 다른 실례로 가정될 경우, 그 신체에는 ‘특별한 집합체’라는 속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추론이 성립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의 세 번째에 위배된다.

4. 다르마끼르띠와 꾸마릴라

다르마끼르띠와 꾸마릴라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기 때문에 서로의 저작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상적 교류가 두 인물과 저작의 연대를 고찰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에 관련하여 프라우발너(Frauwallner, E.)는 다르마끼르띠가 자신의 초기 저작 󰡔헤뚜쁘라까라나(Hetuprakaraṇa)󰡕에서 딕나가에 대한 󰡔슐로까와릇띠까󰡕의 비판을 담고 있고, 꾸마릴라는 그의 󰡔브리핫띠까(Bṛhaṭṭīkā)󰡕에서 다르마끼르띠의 관점을 자세히 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슈타인켈너(Steinkellner, E.) 역시 󰡔슐로까와릇띠까󰡕에 비해 󰡔브리핫띠까󰡕의 사유가 보다 성숙하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며, 󰡔슐로까와릇띠까󰡕 → 󰡔헤뚜쁘라까라나󰡕 → 󰡔브리핫띠까󰡕의 성립 순서를 지지한다. 하토리(Hattori, Masaaki) 또한 다르마끼르띠가 󰡔쁘라마나와릇띠까󰡕를 저술할 당시 이미 꾸마릴라의 󰡔슐로까와릇띠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테이버(Taber, John)는 󰡔브리핫띠까󰡕 → 󰡔슐로까와릇띠까󰡕의 순서를 지지하며, 󰡔슐로까와릇띠까󰡕에서 꾸마릴라가 다르마끼르띠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근거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슐로까와릇띠까󰡕가 다르마끼르띠의 󰡔쁘라마나와릇띠까󰡕 이전에 쓰였고, 다르마끼르띠가 󰡔슐로까와릇띠까󰡕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쁘라마나와릇띠까󰡕를 저술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크라서(Krasser, Helmut)는 자신의 한 논문(Dharmakīrti's and Kumārila's Refutations of the Existence of God: A Consideration of Their Chronological Order, 1999)에서 그 근거로 자재신 존재 논증 비판에 있어서 두 인물 간의 접점을 설득력 있게 조명하고 있다.

󰡔쁘라마나와릇띠까󰡕에 나타나는 다르마끼르띠의 자재신 논증 비판의 핵심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세 가지 모두 앞에서 언급되었던 꾸마릴라의 비판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첫째, 이미 증명된 것을 증명하고 있다.
둘째, 유사 실례(항아리)에 증명되어야 할 원인(신의 창조물)이 결여되어 있다.
셋째, 드러난 원인(특별한 집합체)에 의심이 남아 있다.

먼저 둘째, 셋째는 꾸마릴라가 지적했던, 항아리 등의 유사 실례에 증명되어야 할 원인(sādhayadharma)인 ‘신의 창조물’이라는 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만약 항아리를 신의 창조물로 인정할 경우 세계 역시 도공의 창조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꾸마릴라의 역설과 유사하게, 다르마끼르띠는 흰개미에 의해 만들어지는 둑 또한 도공의 창조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역설한다(󰡔쁘라마나와릇띠까󰡕, 2.13.).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다르마끼르띠가 꾸마릴라에 의해서는 따로 언급되지 않았던, ‘특별한 집합체’라는 속성 자체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연기와 눈(雪)에서 드러나는 ‘하얀색’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얀색’이라는 드러나는 원인이 둘의 공통적인 속성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산이나 인간의 신체는 그 생성에 있어서 도공의 창조물인 항아리 등의 그것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논증에 있어서 올바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첫 번째 비판이다. 다르마끼르띠는 니야야-와이셰시까의 논증의 오류 중 하나가 이미 증명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크라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쁘라마나와릇띠까󰡕의 다른 부분은 물론이고 다르마끼르띠의 알려진 어떤 저작에서도 확인되지 않음을 밝힌다. 다만 다르마끼르띠 이후의 주석가들이 꾸마릴라의 비판 내용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한다. 크라서에 따르면, 이 부분에 대한 증명은 다르마끼르띠 이전의 문헌들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다르마끼르띠의 주석가들이 설명을 위해 인용하고 있는 전거로는 󰡔구사론(俱舍論, Abhidharmakośa-bhāṣya)󰡕의 한 부분(4.1ab)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렇다면, 모든 면에서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된] 세계의 다양성이 말해지는 것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그러나 어떤 최초의 의식과 같은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세계의 다양성은 생명체들의 행위(karman)에서 생겨난다.

이 내용이 세계의 창조자를 부정하고,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다르마끼르띠에 의해서 언급된 ‘이미 증명된 것’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와수반두와 다르마끼르띠의 시대적 거리를 차치하고서도, 이것을 다르마끼르띠가 자신의 전 저작을 통틀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증명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다르마끼르띠의 주석가들은 ‘이미 증명된 것’을 생명체의 다양성이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증명이 바로 꾸마릴라의 자재신 비판에서 발견된다는 것, 그리고 꾸마릴라 역시 74송의 논증 부분에서 이 내용이 ‘이미 증명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르마끼르띠가 꾸마릴라에 의해 충분히 선행된 논의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크라서는 이러한 견지에서 󰡔슐로까와릇띠까󰡕의 성립 연대가 󰡔쁘라마나와릇띠가󰡕에 앞선다고 보고 있다.

꾸마릴라와 다르마끼르띠의 자재신 비판 논증의 접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꾸마릴라의 비판을 뒷받침해 주는 철학적 근거들의 대부분이 기존 미망사의 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두 인물의 같은 비판에 대한 바로 이러한 접점에서, 생명체의 생성과 소멸에 있어서 오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꾸마릴라의 견해를 불교의 입장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맺음말

꾸마릴라의 자재신 비판에서 읽어 낼 수 있는 불교적 요소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이 세계를 무시무종의 것으로 전제하고, 생명체의 다양성의 원인을 오직 그들이 과거에 행한 행위(karman)로 본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망사 철학에서 전혀 새로운 관념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다르마끼르띠와의 상호 영향과 관련하여 보았을 때 이것을 불교의 영향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자재신 존재 논증 비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다르마끼르띠와의 유사성은 함께 딕나가의 영향하에 있으면서 동시에 당대의 대표적인 논적(論敵)이었던 두 사상가가 동일한 비판 대상에 대해 거의 같은 논리를 폈음을 보여준다.

행위에 관한 꾸마릴라의 입장은 사실상 그의 해탈관과도 연결될 수 있다. 해탈 역시 꾸마릴라 이전의 사상가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주제이다. 꾸마릴라는 분별지(分別智)를 해탈의 원인으로 보는 상키야를 비판하면서 해탈을 언급한다. 그는 한 번 생겨난 행위는 그 결과를 일으킬 때까지 소멸하지 않는다고 보고, 행위의 결과를 받는 것을 통해 더 이상의 생을 일으킬 원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 해탈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도를 지닌 행위는 결과를 일으키고, 의도 없는 행위는 결과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불교의 무기업(無記業)을 연상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우연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분별지와 같은 지혜라는 것은 단지 의도 없는 행위를 가능하게 해 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해탈이라는 절대의 경지와 베다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윤회가 없음으로써 신체를 가질 수 없게 되는 해탈한 자아에게는 제사가 무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꾸마릴라는 윤회와 행위, 해탈 등의 문제를 그의 다른 저작들인 󰡔딴뜨라와르띳까(Tantravārttika)󰡕와 󰡔뚭띠까(Ṭupṭīkā)󰡕에서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것을 뚜렷하게 밝혀내기는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꾸마릴라의 해탈관과 행위 이론을 보다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면 고전 미망사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어, 불교의 이론을 차용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꾸마릴라 사상의 정체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보리
1981년 경남 진주 출생.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현재 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논문으로 <미망사 학파 꾸마릴라의 창조신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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