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현 티벳문화연구소장

1. 들어가는 말

해동이란 반도 출신의 젊은 혜초에게 중원대륙은 동경의 세계였을 것이다. 물론 혜초도 계림(鷄林)이란 울타리 속에서 그럭저럭님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가슴은 너무 뜨거웠다. 그렇기에 과감히 한반도라는 대문을 열고 나가서 한 줄기 바람처럼, 한 조각 구름처럼 온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하여『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불후의 여행기를 저술하였고 후반기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인 장안성(長安城)을 무대로 반백 년을 밀교승으로서 활동하였다.

사전적 지식에 의하면 혜초 화상의 생몰연대는 704~787년이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 우리는 혜초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중국으로 들어가서, 언제, 어디서 열반하셨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727년에 오천축국(五天竺國)을 순례하고 돌아왔고 780년에 중국 오대산에서 스스로 번역한 경전의 서문을 썼다는 것 이외의 나머지 생몰연대는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그만큼 혜초학(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다.

필자 역시 역마살을 타고났던지, 혜초 화상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그래서 20여 년 동안, 모두 8차에 걸쳐 1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임의 체취를 따라다녔다. 물론 그 작업은 워낙 방대한 것이기에 한두 번의 답사로는 무려 오만 리나 되는 전 코스를 주파할 수가 없었고 또한 옛날 혜초 화상은 자유롭게 갔던 곳이라도 현재는 국경선이라는 인위적인 편 가름 때문에 갈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우리에게 반백 년 동안 가려져 있었던 ‘죽(竹)의 장막’ 뒤의 붉은 중국이 그랬고, 러시아연방이 해체되기 전의 중앙아시아 제국이 그랬고, 탈레반 정권 시절의 아프가니스탄이 그랬다. 그럴 때마다 한 개인으로는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역사는 때로는 후퇴도 하나 보다고 자조 어린 푸념을 늘어놓으며 시절인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흐르는 물길을 막지 못하듯, 금세기 안에는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철문들이 점차로 열리게 되면서 필자의 작업도 부피를 더해 갔다. 그러나 뭔가 미진한 것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혜초 화상의 열반지로 알려진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 이하 보리사라 칭한다)를 찾아내어 그곳에서 분향재배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헤매었지만, 그곳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시간에 쫓겨서, '혜초의 마지막 체취가 스며 있는 보리사는 오대산 금각사(金閣寺)의 별칭이거나 혹은 그 말사 중의 하나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무거웠던 화두를 내려놓았었다.

그러나 결국 20년 동안의 기다림도 조급함이었던지 그로부터 3년 뒤인 현재, 필자 스스로 그 결론을 수정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찾을 수 없던 보리사가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럼으로 本稿의 요지는, 첫째로는 '건원보리사로 추정되는 보리암을 지도상에서 발견하였다.'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유지(遺址)로 여겨지는 몇 군데를 답사한 사진자료를 공개하는 답사보고서를 겸한 것이다.

2. 혜초 화상의 후반기 연보

1) 장안성에서의 50년 세월


혜초 화상은 천축국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728년 봄 마침내 제2의 고향 장안성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물론 704년 출생설이 유효하다면 말이다.

옛 장안성은 현재는 시안(西安)이라 부르며 산시성(陝西省)의 중심지로서 인구 3백여만 정도의 대도시이지만 당나라 때의 인구가 150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줄어든 감이 없지 않다. 시안은 이른바 북경, 남경, 낙양(洛陽)과 함께 ‘4대 고도(古都)’로 꼽히지만 어찌 보면 딴 곳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신화시대로부터 11개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중에서 당대(唐代)의 장안이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장안성은 동서 10㎞, 남북 8㎞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너비 150m라는, 거의 운동장만 한 대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로를 연결하여 바둑판처럼 109방(坊)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안에는 이런 방(坊)이란 주택가 외에도 세계 최대의 개방된 국제도시에 걸맞게 불교를 위시하여, 도교, 마니교, 회교, 경교, 배화교 등의 사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상점, 여관, 음식점들이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로 나뉘어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 성의 주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모여든 대상(隊商)들로 항상 법석을 이루었다. 이 당시의 장안성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과의 교류 중심지였기 때문에 특히 서역풍이 완연한 서시에는 수만 명에 이르는 귀화인들이 모여들어 거리 자체가 호풍(胡風) 일색이었다.

장안에 도착한 이후 혜초 화상은 만년에 오대산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무려 반백 년이란 긴 세월을 머물며 밀교승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러니까 장안성 곳곳에는 혜초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혜초는 궁중의 원찰(願刹)인 내도장(內道場)에서 중책을 맡아서 황제의 명에 의해 나라를 위한 축원을 하거나 기우제를 지내는 등 그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다. 또한 그의 3권짜리 순례기인 『왕오천축국전』에서 쓰인 단어들은 혜림(慧琳, 768~820)에 의해『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란 일종의 용어집에 수록되었을 정도로 그 방면에서도 인정받는, 말하자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대접도 받았다.

그러면 혜초 사문이 '서역에서 돌아와 어디에 여장을 풀었을까?'로 관심을 돌려 보자. 첫 번째로 천복사(薦福寺)라는 사찰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이유로 혜초가 천축으로 순례를 떠나기 전에 인연을 맺었던, 당시 중국 밀교의 태두인 두 인도승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hdi, 671~741)와 불공삼장(不空三藏 Amoghavajrag, 705~774)이 주석하고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해동의 승려들이 머물고 있었을 개연성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천축에서 돌아온 혜초는 집도 절도 없는 처지이고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전문번역가가 부족했던 두 스승은 이미 범어(梵語)실력이 많이 향상된 혜초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다시 사제의 인연을 이어 나갔으리라. 이는 무엇보다도 혜초 화상이 천축국에서 돌아온 후 6년 뒤인 733년부터 천복사에서 금강지삼장을 모시고 8년 동안 불경을 번역했다는 혜초 자신의 기록에서도 보이고 있는 사실이다.

천복사 경내에 있는 소안탑(小雁塔)은 유명한 순례승 의정(義淨)이 뱃길로 천축에서 돌아오며 많은 경전을 가져오자 황제가 천복사 경내에 전탑을 조성하여 보관케 하였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현재도 몇 차례 지진에 상륜부가 좀 무너지긴 했지만, 아직도 보면 볼수록 웅장하고 단아한 자태로 서 있는데, 혜초의 체취가 서려 있는 곳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당시 천복사와 또 하나의 대찰 대흥선사(大興善寺)는 중국 밀교의 일 번지였다. 밀교는 7세기 전후로 인도 사회에서 기존의 대승불교가 이론적 논리에 빠져서 민중을 도외시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새로운 사조로 이론보다는 의궤(儀軌)란 형식을 중요시하면서 깨달음으로 바로 들어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렇기에 현학적인 대승불교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당시 중국 밀교는 선무외(善無畏)와 금강지로 대표되는 두 종파의 개화기였다.

당시 성의 남동쪽 교외의 자은사(慈恩寺) 안에는 652년 현장법사가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7층 전탑인 대안탑(大雁塔)이 장안의 상징처럼 유명하였다. 그리므로 기존 불교는 자은사를 중심으로, 신사조인 밀교는 천복사를 중심으로 역경사업을 펴 나갔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혜초사문도 장안성에서의 긴 세월을 처음에는 천복사에서 시작하여 후에는 불공삼장의 주석처인 대흥선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당시 우리의 혜초 화상은 다시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다. 바로 현종(玄宗) 개원(開元) 21년(733)으로, 그가 천축국에서 돌아온 6년 뒤의 일이고 나이 30세(?) 되던 해였다.

혜초 화상은『대승유가천발대교왕경서(大乘瑜伽千鉢大敎王經序)』(이하『천발경』이라 칭한다)를 통해 “천복사에서 금강지를 모시고 밀교의 교법을 전수받고는 8년 동안 금강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하였다.”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740년 4월15일 현종이 천복사를 행차하였을 때 역경 건을 상주하여 5월 5일 황제의 윤허를 받아 그날 새벽부터 향을 사르고 번역에 착수하였다는 사연도 기록하고 있다.

이 긴 이름의 밀교경전을 금강지가 구술하면 혜초가 받아 적는 식이었는데, 그해 12월 15일에야 번역을 마쳤다고 한다. 말하자면 둘의 합작 번역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금강지의 죽음과 이어서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 마저 천축으로 가 버리자 번역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현재의 시안 시내 어디에서도 보이는 소안탑이 있는 천복사를 나와 시내 반대편으로 두 블럭을 가면 현재 중국밀교의 본산인 대흥선사가 나타난다. 바로 혜초 화상이 오래 주석하였던 곳이다. 이 사원 역시 근래 문화혁명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필자가 세 번째로 그곳을 찾았을 때는 계속된 발굴과 중건으로 옛 모양을 찾아가는 중이었고 수행하는 스님들도 많이 눈에 띄어서 천복사의 실정과 대비되고 있었다.

대흥선사의 건립은 수(隋)나라 때 이루어졌는데, 문제(文帝)에 이어 양제(煬帝)도 불교를 적극 장려하여 수도인 대흥성(大興城, 장안) 안에 대흥선사를 지어 전국 불교의 본거지로 삼았다. 양제는 ‘번경원(飜經院)’이란 불경 번역전문기관을 세워 천축불교의 중원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수나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당나라에 들어와서도 대흥선사는 국찰로서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불공삼장이 스승 금강지를 도와 역경에 종사하다가 스승이 입적하자 스승의 유촉대로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 실론의 옛 이름)으로 건너가 많은 밀교경전을 구해서 5년 뒤에 돌아오자 경전번역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이에 혜초 사문은 대흥선사를 무대로 이번에는 불공삼장을 모시고 다시 역경에 몰두하게 된다. 그 뒤 불공은 궁중에 법단을 세우고 관정의식을 베풀며 기우제를 지내는 등 제사(帝師)로서 활동하면서 현종, 숙종, 대종(代宗) 3대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중국 밀교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큰 공헌을 한다.

당시 ‘안사의 난(755년)’과 ‘토번의 침입(765년)’ 같은 전란으로 장안이 자주 유린되었던 시기였기에 호국불교란 이름 아래 밀교의 주술적인 신통력에 기대어 역대 황제들은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대흥선사지(誌)』를 보면 승려들에 대한 벼슬과 시주 물품의 하사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도 이런 배경을 뒷받침할 수 있다. 이렇게 불공삼장과 대흥선사는 중국 밀교의 근원지였다.

 불공이 제사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기에 대종 황제는 숙국공(肅國公)이란 벼슬과 식읍 3천 호(戶)까지 내렸으나 불공이 끝내 사양하고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자 황제는 크게 슬퍼하고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大辨正廣智不空三藏和上)’이란 시호를 내리고 3일간 국상에 준하는 추모기간을 선포하였다.

그날의 광경을 기록하고 있는 불공화상의 비석은, 마치 신념을 위해 머나먼 타향에서 중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한 인간의 초상이 이러하다는 것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일깨워 주려는 듯 지금도 대흥선사 경내에 쓸쓸히 서 있다. 불공의 유업인 역경불사는 ‘회창폐불(會昌廢佛)’ 이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는 한 세기 뒤에 역시 대흥선사에 머물며 금강계 밀교를 배워 돌아가 일본의 밀교를 정착시킨 엔닌(圓仁, 794~864)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도 잘 나타난다.

엔닌의 기록에 의하면 대흥선사나 천복사에는 번경원이라는 번역 전문기관이 있어서 밀교와 만다라 등을 연구할 수 있었다. 또한 금강지와 불공의 위상이 한 세기 후에도 대단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혜초 화상도 그만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는 뜻과 같다.

혜초와 불공의 연보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동년배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원으로 들어왔고 또한 각기 천축을 순례한 처지였고 그리고 둘 다 장수하여 거의 40여 년간을 대흥선사에서 함께 살았던 사이였다. 비록 스승 금강지와의 인연과 밀교의 전통 때문에 불공을 스승으로 대접은 했겠지만, 아마도 사석에서는 도반처럼, 사형제처럼 지내기도 했었을 것이다. 불공삼장이 입적하기 전에 발표한 유서(774년 5월7일)에는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 보인다.

내가 지금까지 밀교의 비법을 전수한 지 30여 년 동안에 문하에 제자가 자못 많지만, 그중 6명이 우뚝했다. (중략) 그러하 니 후학들은 수행 중에 의혹이 들거든 서로 일깨워주어서 정법의 등불이 끊이지 않도록 해서 은혜를 갚도록 하라.

이 유촉은 2천 명에 달했다는 불공삼장의 문하생 중에서 ‘6대 제자’를 선정한 대목이다. 그 첫째는 자신이 천축까지 데리고 다닌 심복 제자 금각함광(金閣含光)이었고 두 번째가 불공의 법통을 이어 대흥선사의 주지를 맡아 황실과의 가교를 이은 숭복혜랑(崇福慧朗)이었고 세 번째가 신라혜초(新羅慧超)였다. 위의 4자(字)는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혜초가 신라인이란 것을 객관적인 자료상으로 고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밀교에서 혜초 화상의 위치가 얼마나 당당하였었나 짐작하기 충분하다.

장안에서의 긴 세월에서 혜초의 주된 관심사는 물론 스승의 유촉을 받은 밀교경전의 역경사업이었지만, 그의 위치가 올라감에 따라, 궁중 내의 불당을 주관하는 지송승(持誦僧)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원래 내불당이란 황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불당으로 대명궁의 장생전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후에 당시 3대에 걸친 역대 황제들의 신임을 받은 불공삼장이 제사를 겸하고 있었기에 그가 주석하고 있는 대흥선사로 내불당을 옮기고 그곳의 소임을 맡을 7명의 밀교승을 선발하여 주관케 하였다.

혜초 사문은 당연히 상석을 차지하였는데, 그들의 역할 중에는 큰 가뭄이 들면 황제 대신에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공이 생존했을 때 나라의 중대한 기우제는 불공 자신이 지냈지만, 병이 들자 그 역할이 혜초 화상에게 돌아왔다.

겨울 가뭄이 심하던, 774년 1월 혜초 화상은 대종의 칙명으로 선유사 옥녀담에서 7일간 기우제를 지내고 그 결과를 황제에게 표문을 지어 알렸다. 그 표문에 의하면, 혜초가 야단법석을 쌓고서 만다라를 펼치고 향을 피우며 비밀의 주문을 외우자 산천초목이 이에 응답하여 갑자기 하늘에서 비단 같은 보슬비가 흡족하게 내렸다고 한다. 이어서 혜초는 그런 현상이 하늘이 황제의 정성에 감동했기 때문이라며 그 공덕을 회향하고 있다.

2) 오대산에서의 회향

774년 같은 스승을 모신 40여 년간의 도반이면서 또한 훌륭한 스승이던 불공삼장이 병마로 쓰러져 입적하게 되자 혜초 화상은 문득 무상을 느꼈다. 3대에 걸친 역대 황제들의 신임을 받으며 제사라는, 승려로서는 최고의 신분으로 모든 영광을 누렸음에도, 결국 ‘삶과 죽음의 길’은 이러하다는 듯 불공삼장이 떠났고 뒤따라 혜초 화상을 적극 후원해 주던 대종 황제 또한 붕어(779년)하고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더욱 그러하였다. 문득 혜초 화상은 자신의 육신을 돌아다보았다. 이미 자신이 5만 리를 걸어서 천축을 순례했던 철인 같았던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반백 년 동안의 장안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는 마침내 오대산으로 향했다. 장안에서 오대산까지는 이미 고희를 훨씬 넘긴 노구(老軀)인 혜초 화상에게는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그 길은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해가 뜨는 동쪽 하늘 아래에는 닭 울음소리 들리는 그의 고향 계림(鷄林)이 있겠지만, 그곳은 노구의 혜초에게는 너무 멀고 아득하였다. 해동의 고향으로 돌아간들 그 누가 있어 반겨 줄 것인가?

오대산(3,058m)은 중국 대륙 북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화엄경』에 의하면 문수보살이 거처하는 청량산과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오대산은 원래는 도교에 의하여 개산되었으나 5세기 후반 배위의 효문제에 의하여 불광사와 청량사 등이 세워짐으로써 불교성지가 되어 수(隨), 당(唐) 대에는 법화, 화엄, 천태, 정토 등의 전통 종파와 신흥 밀교의 고승들이 앞다투어 사원을 개창하였다.

오대산은 또한 우리 해동과의 인연이 깊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 자장율사가 청량사에서 47일 기도를 마치고 문수보살로부터 불사리와 금란가사를 받고 귀국하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탑을 세웠다는 설화 등과 연결고리가 있다.

780년 4월 15일 건원보리사에 도착한 혜초는 다시 번역에 착수하였다. 마침 그곳에는 자신이 오래전에 천복사에서 번역했던 책, 『천발경』(약칭)이 있었기에, 마지막 일대사라는 심정으로 그것을 한 자 한 자 필사하는 한편, 5문(門) 9품(品)으로 구성된 경전의 의미를 설명하고는 7언 20구절로 된 서문을 지어 부쳤다. 그『천발경』은 스승 금강지로부터 전수받은 이래 50년의 세월 동안 참구하였던 경전이었으니, 어찌 보면 그 경전은 혜초의 사상적 원천이었을 것이다.

평생 밀교를 수행하였던 혜초 자신에게 문수보살은 주존(主尊, [이담(Tib)])이다. 밀교경전은 대개 등장하는 불, 보살 그리고 수호존이 너무 많아 초심자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긴 제목만을 보아서는 이것이 본문인지 제목인지가 헷갈릴 정도지만, 혜초가 오랫동안 참구했던『대승유가김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길고 난해한 제목이지만 그 핵심 코드는 만주실리(曼珠實利, Manjushri), 즉 문수보살이다. 혜초는 이 긴 이름의 경전에서, 문수보살과 청량산에 관계를 집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덕을 말하자면 신령스러운 자취는 갠지스 강과 같고 성스러운 깨달음은 무한한 신통력을 일으켜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을 대비한 원력을 세워 깨달음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으니 더할 수 없이 존귀한 보살이시다. 스스로 황금빛 정 토에서 이 사바세계의 청량산에 오셔서 뭇 중생들을 이끌어 깨우치게 하시고자 밝은 등불과 자비의 구름으로, 때론 일만 보 살로 나투시기도 한다.

마지막 일대사를 마감하고 몇 년의 세월이 평화롭게 지난 어느 하루, 혜초 화상은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흰 사자를 타고 남대봉까지 친히 마중 나오신 문수보살의 손을 잡고서 열반에 드셨다. 극락조(Kalavinka)의 미묘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항상 연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다는 그곳으로 떠나갔다. 그날도 남대봉에는 낮에는 꽃비가 내렸고 저녁에는 찬란한 노을이 붉게 타올랐고 밤이면 며칠 동안 마치 무지개 같은 빛이 온 산에 감돌았다.

혜초 화상이 육신을 벗든 말든, 오대산이 주인을 잃든 말든, 세월은 또 어김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났을 때였다. 어느 하루 바다 건너에서 온 한 순례승이 불공삼장의 체취를 찾아 금각사를 방문하여 문수보살에게 경배하였다.

금각(金閣)은 우뚝하고 외롭게, 삼나무 숲 위에 서 있는데, 흰 구름은 그 발아래 떠돌고 있으며 푸른 지붕은 초연히 걸려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 다섯 불상에 예배했다. 이 불상은 불공삼장(不空三藏)이 당나라를 위해 만든 것이다. (중략) 또한 불 공의 제자 함광(含光)이 나라를 위해 칙명을 받들어 수도하던 곳이다.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혜초의 스승인 불공삼장과 그의 ‘6대 제자’ 중의 하나였던 금각함광의 흔적은 확인되고 있었다.

3) 건원보리사

오대산에 도착한 혜초는 780년 4월15일 건원보리사라는 곳에 바랑을 풀었다. 이것은 자신이 직접 쓴 기록인
"至唐建中元年 四月十五日 到 五臺山 乾元菩提寺 至五月五日 沙門慧超 首再錄"에 의해 분명한 사실이다. 위 원문에 보이듯이 ‘오대산 건원보리사’ 와 ‘사문혜초’ 란 글자가 뚜렷하다.

혜초 화상에게 오대산은 인연이 많은 곳이다. 왜냐하면 스승 불공삼장은 황제의 후원으로 오대산에 김각사를 건립하고 큰 상좌 함광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보내 나라와 황실의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금각함광(金閣含光)’ 이란 네 글자로 간단히 증명되는 일이다. 불공삼장의 제자들의 오대산행은 기록상으로도 빈번했다.

당연히 혜초 화상도 스승을 수행하여 도반들과 함께 오대산을 들락거렸을 것이다. 여기서 문수보살-금강지-불공삼장-금각사-함광-혜초를 연결하면 혜초가 오대산으로 들어온 정황이 쉽게 그려진다. 혜초 사문은 자기의 생을 회향하기 위해서, 자기 영혼을 주존인 문수보살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동문 사형제들이 머물고 있는 오대산에 들어왔을 것이다.

대종의 제사였던 불공삼장은 당시 전란으로 심신이 어지러운 황제에게 관정수계(灌頂受戒)를 주어 불심에 불을 지피고 국태민안을 위해 장안 대흥선사의 문수각과 쌍벽을 이루는 문수도량을 오대산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황제를 설득하여 조칙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인도 나란다에서 온 순타(純陀)와 도선(道仙)의 공동 설계에 의해 국제적인 감각의 거대한 사원을 짓고 천축 순례길을 함께 다닌 심복 제자 함광을 금각사의 주지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대종 대력(大歷) 4년(770년) 준공에 즈음하여 불공삼장은 공덕제를 올리려고 오대산으로 향했다.

이렇게 오대산이란 첩첩산중에다 거국적인 중창 불사를 벌린 이유는, 물론 당시가 변란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음으로 민심을 결집시킬 호국도량이 필요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불공삼장 개인적으로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신흥세력인 밀교의 정착에 부차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역할은 전통적인 선교(禪敎)보다는 실질불교를 지향하며 기우제 같은 초과학적 신통력을 중시하는, 금강계(金剛係) 밀교의 성격과 부합되기에 현종-숙종-대종을 잇는 3대에 걸친 황제들이 모두 기존 불교를 등한시하고 밀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주지로 임명된 금각함광은 스승의 유지대로 한 평생『호국인왕경』등을 외우며 나라와 황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금각사를 지켰다. 그러니까 세수 80에 가까운 혜초 사문에게는 스승의 유지가 서려 있으며 더구나 자신의 사형이 주지로 있는 금각사에 노후를 기탁하기 편했을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혜초 화상이 적어도 20일간 머물며 약칭『천발경』을 번역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 서문까지 직접 쓴 장소인 보리사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혜초 화상이 열반에 들었을 개연성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80(?)을 바라보는 노쇠한 혜초 화상이 교파가 다른 사원으로 주석처를 옮겼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정황에 근거를 둔 가설이다. 그렇다면 문중서열로 볼 때 ‘6대 제자’란 높은 배분으로 당연히 금각사 그 뒷산 어디쯤에서 다비식까지 치러졌을 것이며 또한 근처 어디에 소박한 부도탑도 하나쯤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우리나라 불교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의 하나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사실 그동안 불교계나 관계학자들의 노력에도 이 건원보리사를 찾지 못했다. 오리무중이었었다. 보리사의 유지(遺址)를 찾는 작업은 고사하고라도 문헌상으로도 혜초 스스로 쓴『천발경서(千鉢經序)』에 기록되어 있는 ‘건원보리사’란 다섯 자 이외에는 한 자도 더 찾지 못했다.

필자 자신도, 지난 20여 년 동안, 마치 화두처럼 변해 버린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오대산 골짜기를 수차례 답사하고 관계되는 국내외 도서관을 수없이 뒤졌으나 결과는 역시였다. 이런 상황은 혜초 사문이 머물렀을, 8세기의 오대산의 정황이 상세히 그려진 <오대산도(五臺山圖)>의 산 내 85개 사원 이름에서도, 또한 여러 종류의『청량산지(淸凉山誌)』를 비롯한 풍부한 문헌적 기록 어디에도 보리사란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필자 자신도 단행본 출판 마감이란 시간에 쫓겨 “혜초 사문이 입적한 것으로 알려진 건원보리사는 금각사의 별칭이거나 소속 말사의 하나일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건원(乾元)’이란 단어가 당나라 8대 황제인 숙종의 연호이기에 ‘건원보리사’ 는 고유명사라기보다 숙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라는 보통명사라고 볼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황제의 연호를 사원 이름으로 쓴 사례는 많이 있다.

봉건왕조 시대에서는 임금의 호칭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그렇기에 편년체적 기술이나 황제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주로 연호를 사용하였다. 예를 몇 개 들면 현종은 개원성상황제(開元聖上皇帝)로, 숙종은 건원광천문무효감황제(乾元光天文武孝感皇帝)로 부르는 식이다. 이런 실례에 의하면 ‘건원보리사’도 '乾元+菩提+之+寺'로 풀이하여 숙종 황제의 원찰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더구나 숙종은 진국금각사(鎭國金閣寺)라는 어필현판(御筆懸板)을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금각사와 인연이 깊었다.

둘째로는 ‘보리(菩提)’란 단어에서였다. 이 말은 사전적으로는 도(道), 지(智), 각(覺)으로 번역되어 '깨달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나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그 밖에도 지명, 인명 등으로 폭넓게 쓰이는, 가장 보편화된 불교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혜초 화상은 길지 않은『천발경』서문에서 무려 9번이나 ‘보리’ 라는 단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했다.

 이는 혜초가 이 단어를 특별히 즐겨 사용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보리’가 다양한 용례로 쓰였다면, 보리사는 넓게 해석해서 '당나라의 무궁함과 건원 황제의 명복을 기원하는 기원 도량'이라는, 숙종과 혜초의 관계 또는 대종이 아버지인 숙종의 명복을 비는, 효성이 담긴 용어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필자는 ‘건원보리사’ 가 정식 명칭 이외에 황제를 높이고 혜초 사문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의미로 쓰인 별칭이라고 해석하여 건원보리사는 금각사의 별칭이거나 또는 그 말사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었다.

4) 보리암 유지의 비정(比定)

그러나 시절인연이 무르익어서인지, 바로 그 유명한 돈황(敦煌) 막고굴(幕高窟) 제61호 벽화인 <오대산도(五臺山圖)>와 돈황연구원이 편찬한『돈황석굴예술』의「막고굴제61굴(五代)」이란 책자의 부록으로 붙어 있는 방제(榜題)에서, 우리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곳이 ‘보리지암(菩提之庵)’이란 이름으로 ‘수줍은 듯’이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 필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여기서 수줍다는 표현이나 과거형을 써서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과거에도 필자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이 <오대산도>를 보았지만, ‘보리지암’이란 네 글자는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네 글자로 말미암아 ‘건원보리사’를 찾는 일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또다시 오대산으로 달려가 먼저 지도상으로 ‘보리암’ 근처의 지명이나 사원 명을 하나씩 분석하는 방법과 현지를 꼼꼼히 답사해 보는 방법을 병행하여 보리암의 유지에 대한 위치 비정에 접근하여 보았다.
돈황 막고굴, 일명 천불동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본고의 주제 밖이어서 장황한 설명은 필요 없지만, 현재로서는 건원보리사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실마리는 바로 <오대산도>뿐이기에 간략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당(唐) 후기의 돈황은 토번의 점령 아래 있었다가 848년 장의조(張議潮)란 호족에 의해 수복되어 당으로 다시 귀속하여 이른바 귀의군(歸義軍) 시대를 맞게 된다. 그 뒤 후량(后梁, 910년)에는 조의금(曹議金)이란 호족이 대두하여 이후 130년간 조씨들에 의한 대리통치 시대를 맞는데, 이들 일가는 불교를 신봉하여 여러 개의 석굴을 개창, 중수하여 돈황의 석굴 개창 사업은 마지막으로 활기를 띤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947~951년 사이에 조원충 부부에 의해 개창된 제61호 굴이다.

이 석굴은 막고굴 남쪽의 중단 하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사방이 14m 정도의 대형 굴로 천정을 비롯해 사방벽면이 모두 정교한 벽화로 채워져 있다. 원래 중앙 불단에는 문수보살과 시종들의 소상이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다만 보살의 타고 다닌다는 사자의 앞발과 꼬리만 남아 있기에 일명 문수굴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 불단 뒤에 그 유명한 <오대산도>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13m×3.4m 크기의 장방형으로서 막고굴에서도 가장 큰 벽화로 꼽힌다. 이 <오대산도>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불광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과 지명과 설화들이 명기되어 있어서 당시 시대적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3년 돈황연구원장 단문걸(段文傑, Duan Wenjie)이 쓴 서문과 돈황연구소 연구원인 조성량(趙聲良)이 쓴 설명문인 <돈황만기예술의 석과(碩果)-막고굴 제61굴의 내용과 예술>(이하 <제61굴의 내용과 예술>로 칭한다.)에는 그림 이외에도 방제(榜題) 195조(條), 영이서현(靈異瑞現) 46조, 사원 85조(대소 사원 47, 난야 17, 암자 21), 탑 15조, 지명 32조, 송공인(送共人) 12조, 기타 5조를 확인, 기록하고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부차적인 설명을 꼼꼼하게 해 놓고 있다.

위의 <제61호 굴의 내용과 예술(약칭)> 12쪽에는 한 장의 지도(通往五臺山之路) 가 있는데, 이 지도에 의하면 오대산으로 가는 옛길은 하북도(현 河北省)의 진주(현 正定縣)-유천점(柳泉店)-용천점(龍泉店)-영창현(永昌縣)-석자관진(石觜關鎭)-청양령(靑陽岭)-하북도산문(河北道山門) 동남로-오대현(五臺縣)을 통하는 길과 또 하나는 하동도(현 山西省)의 태원(옛 北京, 현 太原)에서-태원 백양점(白楊店)-석령관-흔주(忻州) 정양현(定襄縣)-하동도산문(河東道山門) 서남로- 오대현을 통해 입산하는 길로 나누어져 있고 또한 ‘지리조(條)’에는 위 지도의 세부적인 내용이 붙어 있는데, 여기서 오대현은 오대산과 140Km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현재의 도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대산도> 방제의 순서에 의하면 河東道太原(#3)-太原白楊店(#5)-菩提之庵(#6)-降生之塔(#7)-光儼之□(塔)(#8)-大淸凉之寺(#9)- - - - - 大金閣之寺(#30)인데, 이들 중에 ‘6번 보리지암(菩提之庵)’이 바로 우리가 애타게 찾던 건원보리사로 비정되는 사원이다.

금각사와 청량사는 모두 오대산의 중심지인 타이화이찐(台懷鎭)이란 곳에 있지 않고 이른바 직행로인 서선(西線)상에 있는 ‘청량경구(淸凉景區)’란 구역에 모여 있다. 그리고 금각사에서 문수석(文殊石)으로 유명한 청량사는 지척이다. <오대산도>에 보이듯이 그 청량사 바로 앞에 보리암이 그려져 있고 선묘로 그린 방제시의도(榜題示意圖)에서는 보리암이(#6) 더욱 뚜렷하다.

청량사는 비교적 우리에게 친근한 사찰로 북위 효문제 연흥(延興) 2년에서 태화(太和) 17년 사이(472~493)에 창건되었는데, 당대(唐代)에는 국태민안의 진국(鎭國) 도장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한 『화엄경』에 의하면 원래 오대산의 별칭은 청량산이었고 청량사는 그 산속에 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보리암을 찾아내고도 한동안 어떤 의문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위에서 여러 번 강조한 대로, 금각사는 불공삼장-금각함광-(보리)혜초로 이어지는 밀교 도량이지만, 알려진 대로 청량사는 화엄종의 종찰이어서 혜초 화상과는 뭔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혜초 화상은 금각사 근처에 주석하지 않고 왜 하필 정통 선종 계열의 청량사 아래 보리암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었을까?

그러나 길은 도처에 있다는 듯이, 다음 기록에서 그 의문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공삼장이 대력 원년(766년) 황제에게 주청하여 청량사를 중수하였다. 이로 인해 청량사는 선종 총림과 정토 도장에서 밀종(密宗) 도장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 구절을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금각사의 창건 유래는 현종 대에 남방의 선승 도의(道義)와 관련이 있지만 금각사 불사의 완공은 대종 대력 4年(770년)에 이르러서였다.

현종에서 숙종으로 이어진 지지부진했던 불사를 8대 황제인 대종은 즉위하자마자(766년) 불공삼장에게 명하여 선황들의 유지를 잇게 하여 770년 마침내 준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대종 황제와 불공삼장은 금각사를 짓기 위하여 그 전초기지로 청량사를 중수하여 사용하였다는 의미로 위 구절을 해석할 수 있다.

혜초 화상과 인연이 깊었던 대종(762~779)은 어찌 보면 불운한 황제였다. 조부 현종이 양귀비로 인해 일어난 ‘안사의 난’으로 촉(蜀)으로 몽진(蒙塵)을 하면서 숙종에게 양위를 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황태자에 책봉되었다가 숙종에 이어 제8대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그 사이에 7년 동안 당나라를 어지럽힌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소요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태종(太宗) 이후에 한동안 처남 매부 관계를 맺고 휴전상태에 있었던 고원 위의 패자(覇者)였던 토번(吐蕃, 티베트)과의 불화로 인해 763년에는 토번의 기마병이 장안성을 점령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황제에 오른 대종은 국태민안을 위한 기원과 선황에 대한 효심과 자신의 어지러운 심신을 불교, 특히 금강지와 불공삼장으로 이어지는 신사조인 금강계 밀교에 의탁하여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혜초 화상은 대종 황제가 붕어한 다음해(780년)에 오대산에 완전히 입산하기 전에도 여러 번 오대산을 드나들었을 개연성은 많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불공삼장과 그의 제자들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청량사, 금각사, 옥화사 등의 건립을 위해 공식적으로 오대산을 드나들었고 또한 태원부에서 만인제(萬人祭) 같은 대규모 법회가 자주 열렸기에 불공삼장의 서열 세 번째 제자인 혜초 화상이 오대산을 들락거렸을 것이란 추정은 그리 무리하지 않은 논리이다.

그런 사례가 쓰인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불공삼장의 행장을 묶은『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에는 “오마자사(吳摩子寺)라는 사원의 이름을 ‘대력법화지사(大歷法花之寺)’로 바꾸게 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의 대력(大歷) 역시 대종 황제의 연호이니, 대종 대에 적지 않은 선종 사찰들이 밀종화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종 대력4년에는 천하의 모든 사원에는 대성(大聖) 문수를 상좌에 앉히고 보현과 관음을 양쪽에 모시라는 칙령까지 발표하는 등의 노골적인 밀교의 지원도 있었다.

이렇게 한때나마 밀종의 영향권으로 넘어왔던 사찰 중의 하나가 바로 청량사이다. 그러므로 불공삼장의 상수제자인 금각함광이 주지로 있는 금각사와 청량사 근처 보리암에 그 사제인 혜초화상이 주석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한 당시 혜초화상의 고령의 나이로 보아도 오대산 입구 근처에 주석하였을 개연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난제 뒤에 더 어려운 복병이 숨어 있는 것인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마자 또 다른 화두가 필자에게 다가왔다. 바로 그 많은 오대산에 관한 자료들에 '왜 보리암이 왜 빠져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오대산의 기록들은 당대 혜상(慧祥) 사문이 지은『고청량전(古淸凉傳) 2권』과 연일(延一) 사문이 지은『광청량전(廣淸凉傳) 3권』그리고 송대 장상영(張商英)이 지은『속청량전(續淸凉傳)』이 있다. 또한 이들을 참고하여 명대 석진증(釋鎭證)이 편찬한『청량산지』도 현재 그 영인본을 오대산 일원에서 구할 수 있어서 오대산의 옛 모습을 엿보는 데 어려움은 없다.

 예를 들면 가장 두터운『광청량전』에는 문수보살과 오대산의 설화를 비롯하여 도의 선사의 금각사 개창설화, 측천무후의 청량사 중수와 공양 기록과 이어진 현종과 숙종의 청량사에 대한 후원기 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기타 70여 개의 대소 사찰들의 이름이 보일 정도로 정확하고 상세하다.

그러나 명대에 편찬된『청량산지』와 그 근거가 되는 위의 3권의 고(古) 기록들은 이상하게도 건원보리사 또는 보리암의 기록뿐만 아니라 대종 황제 때 활동했던 밀교승들, 즉 불공, 함광, 혜초 등의 이름이 한 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혜초 화상은 그렇다 치고라도 60여 명이나 열거된 고승열전이나 기타 일화에서도 불공삼장과 금각함광에 관한 기록은 한 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왜냐하면 불공삼장은 당시 대종의 관정사의 신분으로서 대력 원년(766년)에 대종 황제의 칙명에 의해 청량사를 중수하였던 중요한 인물인데, 이런 중창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더구나 금각함광 역시 금각사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현재 금각사에도 그의 소상이 대종 황제와 도의 선사 옆에 있으니, 당연히 금각사의 역사에 기록되어야 마땅한데, 이 두 사람 모두『청량산지』를 비롯한 어디에도 한자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동시대의 다른 기록들, 예를 들면 대종 황제 시대에 편찬된 『불공표제집(약칭)』에 자주 보이는 불공, 함광, 혜초의 풍부한 기록과는 너무나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훗날로 미루지만, 필자의 한 가설로서는 불교계의 ‘선종과 밀종의 파워게임’의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현종-숙종-대종으로 이어진 밀교 편들기 시기에는 열세에 몰려 있었지만, 이후에 벌어진 ‘회창폐불(會昌廢佛)’ 이후에는 다시 기력을 되찾은 정통 선종 쪽으로서는 황제를 비롯한 조정의 편파적인 후원이 좋게 보였을 리가 없었기에 기록에서나마 백안시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마지막 사족 하나. 비록 보리암이 현 청량사 바로 코앞에 있었다 치더라도 보리암 유지를 비정(比定)하는 데 참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오대산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성량이 쓴 <제61호 굴의 내용과 예술> 16쪽에서도 행로상의 몇 개 문제점에 대한 부정확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자운중암은 지도상으로는 청량사 건너편에 솟아 있는 남대봉 아래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있는 중대 서남방 기슭 청량사 뒷산 꼭대기에 현재도 건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대와 중대, 북대봉이 나란히 겹쳐져 있는 식으로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오대산과 태원 간의 중요 역참이었던, 태원백양점은 실제로는 태원 인근에 있지만, <오대산도>에는 보리암 바로 아래에 그려져 있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같은 오류는 사방 5백 리나 되는 광대한 오대산 안의 수백 개의 대상체를 모두 한 장의 직사각형 평면구도에 축약하여 표기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오대산도>의 보리암 주위를 차분히 살펴보면 건원보리사는 천 수백 년 역사의 안개 속에서 나타나 우리 눈앞에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5. 맺는 말

요즘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한민족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진취적인 민족으로 변했다. 그것은 일찌감치 울타리를 넘어 넓은 세상으로 나간 선구자들의 음덕일 것이다. 그 정점의 바로 혜초 화상이 우뚝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임에게 갚아야 할 빚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꼭 20년 전이었던가? KBS-TV의 특집다큐멘터리 <신왕오천축국전 8부작>이 제작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국제정세로 인해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인도와 파키스탄만을 촬영한 반쪽짜리로 만족해야 했다.

우리가 혜초 화상을 위대하다고 칭송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로 맡겨 놓고 영원한 진리를 찾기 위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그것도 무려 1천3백여 년 전의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당시는, 땅과 바다가 평평하여 먼바다 끝이나 땅 가장자리에 잘못 들어서면 한없는 무한대의 절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우주관의 시기였으므로, 그런 도전 정신은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그토록 목말라하던, 혜초 화상의 열반지로 알려졌던 건원보리사를 찾아낼, 귀중한 '보물지도'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오대산 청량사 앞에 있었다는 그 보리암 유지로 보이는 3~4곳의 후보지를 발굴, 조사해서 그곳에 소박한 ‘해동사문보리혜초행적비(海東沙門菩提慧超行蹟碑)’라도 한 기 세웠으면 하는 바람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김규현
성균관대학교, 해인불교전문강원, 중국의 중앙미술대학, 라싸의 티베트대학에서 수학하였고 1997년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티베트 문화와 에 걸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에《혜초 따라 5 만 리(상, 하)》와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티베트 역사산책》, 《티베트의 문화산 책》, 《바람의 땅, 티베트(상, 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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