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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방경일 칼럼니스트
[36호] 2008년 10월 10일 (금) 방경일 illa21@empal.com

1. 들어가는 글

2008년 봄에 나는 지인과 함께 도봉산을 찾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앉아 점심도 먹고 그동안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지인: 70세까지만 살다가 가야지!
나: 우리의 황우석 박사님이 계시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언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지 모르는데 몸을 바꿔가며 한 3만 년은 살다 가야지!
지인: 고장 잘 나는 이런 몸으로 70세까지 살면 됐지 3만 년은 무슨…….
나: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안 봤어요? 그 주인공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몸으 로 바꿔서 계속 살면 되잖아요. 이 몸이 망가지면 정상적인 다른 생체에 기억만 옮 기면……. 잠깐, 이거 인간의 정체성이 ‘경험과 기억’이란 말인가?
지인: 그렇지?
나: 그럼 윤회는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거…… 붓다가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붓다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나의 의구심을 풀기 전에 <공각기동대(攻殼機動隊)>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보자. <공각기동대>는 오시이 마모루(押井守)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해졌지만 원래는 만화가인 시로 마사무네(士郞正宗)의 작품이다.

 과학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2029년의 일본이 무대인 이 만화(영화)에서는 주인공인 쿠사나기를 비롯해 전뇌화(電腦化)되고 의체화(醫體化)된 인간들이 등장한다. 전뇌화란 인간의 뇌와 컴퓨터가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의체화란 인체를 인간이 만든 몸으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쿠사나기는 어릴 때 사고를 당하여 몸 전체가 의체인 전신의체 인간이다. 전신의체이긴 하지만 최고급이고 쿠사나기의 강인한 의지로 인해 생체와 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이나 도약력 등등, 기능면에서는 훨씬 뛰어나다.

아무튼 테러 진압과 같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쿠사나기는 몸이 망가지게 되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똑같이 생긴 의체로 몸을 바꾸는데 이때 전신(前身)의 뇌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그대로 후신(後身)의 뇌에 전달되고 이를 통해 쿠사나기는 자아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몸을 바꿀 수 있으므로 결국 쿠사나기는 진시황이 그토록 바라던 영생불멸을 얻은 것이다.

쿠사나기가 몸을 바꾸는 것은 일종의 윤회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아정체성을 이어 가면서 몸을 바꿀 수 있다면 윤회는 고통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즐거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하는 복제기술이 일반화되어 한 인간이 경험을 통해 축적하는 모든 기억을 유지하면서 몸을 바꿔 갈 수 있다면 인생은 고해(苦海)가 아니라 낙해(樂海)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윤회는 근절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장려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신체적인 영생을 얻은 인간의 삶에 정신적인 번민이라는 변수를 대입한다고 해도 적어도 윤회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사실 물리적인 존재의 형태를 바꾸면서 경험과 기억을 전달하는 윤회 자체가 일종의 영생인데 우리는 붓다라는 눈먼 소경에게 이끌려 불구덩이나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다른 소경들이 아닐까? 과연 붓다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이런 불경스러운 생각은 ‘붓다의 육성으로 된 가르침에 뭔가 잘못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는데 해답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나는 2004년에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울산대 김진 교수에 의해 제기되어 일단의 불교학자들이 반박을 가한 ‘무아-윤회 모순론’에 대한 논쟁이었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는 김진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무아윤회’를 주창했는데 김진의 구상에 불교 쪽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동국대 윤호진 교수는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라는 그의 책에서 무아와 윤회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모순임을 주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무아와 윤회의 동시 주장은 모순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붓다가 가르침을 편 직후부터 시작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무아윤회라는 주장은 전적으로 궤변에 불과하지만 무아와 윤회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모순이기는커녕 무아와 윤회는 환상의 콤비처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진리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아-윤회의 모순을 주장하거나 그 모순을 극복하느라고 무아윤회를 주창(主唱)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모두 ‘전도된 몽상가들’일 뿐이다. 사고가 여기에 이르자 나의 뇌리에는 ‘거짓말을 한 이는 붓다가 아니라 이들 전도된 몽상가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어느 쪽이 거짓말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아-윤회의 완벽한 진리체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 보자.

2. 무아윤회는 궤변이다

1) 무아윤회와 그 근거인 업보윤회에 대한 주장

무아윤회와 업보윤회는 안옥선의 논문인 <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안옥선은 무아이지만 윤회할 수 있는 것은 업이 있어 윤회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업이 의식과 갈애를 만나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때 업은 전신(前身)이 한 행위뿐만 아니라 행위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브라흐만-아트만 윤회설(브라흐만에서 나온 아트만이 브라흐만으로 돌아가면 윤회는 끝난다는 주장)'에서 윤회의 실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므로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것들이야말로 윤회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윤회를 성립시킬 수 있는 절묘한 착안물들이다.

잡아함(13권 335)에 있는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는 주장은 이런 관점을 잘 대변해 주는 표현이다. 따라서 업보윤회는 무아윤회를 성립시킬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되는데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명쾌한 해결책이다. 그래서인지 안옥선은 ‘무아와 윤회’라는 표현보다는 ‘무아의 윤회’라는 표현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이

안옥선의 논문에 의하면 불교의 업보윤회설에서 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업은 윤회의 출발점이다. 업보윤회의 기본구조는 전생의 생명체가 만든 업이 후생의 생명체를 통해 그 과보를 형성시키는 것이므로 업이 있으면 윤회가 있고 업이 없으면 윤회도 없다. 따라서 업은 윤회의 출발점이 된다.

둘째, 업은 의식과 명색을 만들어 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녔다. 12연기에서 행(行)은 식(識)을, 식은 명색(名色)을 있게 하는데 행을 업으로 보면 업은 식(의식)과 명색(육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으로 구성된 업이 비록 사고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브라흐만-아트만 윤회설에서의 아트만의 역할, 즉 의식의 배후에서 의식과 육체를 지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업보윤회에서는 업이 사실상 실체적 자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셋째, 업은 인격이다. 안옥선의 논문에서 주장하는 업의 주요 구성물인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의 총합은 사실상 인격(Personality)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업에 의해서 차례로 나타나는 A, B, C, D가 사람이라는 생명체라고 가정하면 A의 인격이 B에게 전이되고, A와 B의 인격이 C에게 전이되고, A와 B와 C의 인격이 D에게 전이되는 식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중간에 동물이나 식물, 곤충과 같은 하등 생물의 몸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경우에는 그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전생으로부터 넘겨받은 사람으로서의 특징들은 발현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이상의 특징들을 고려하면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증일아함(23권 310)에 있는 "나는 어디서 무엇이었으며 이름은 무엇이었던가?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았던가?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나고,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난 인연의 본말을 모두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한 붓다의 경우를 고려해 볼 때도 업이 비록 의식의 배후에서 명색을 장악하는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윤회를 하는 한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3) 업보윤회의 모순들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없다는 업보윤회는 자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순점들을 잉태하고 있다.

첫째, 업의 상속 동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윤회한다는 것은 윤회하려는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업의 구성물인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가운데서 어떤 것이 윤회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사고한다는 것이므로 이는 아트만과 같은 실체적 자아가 되어 버린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윤회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업과 만나는 의식과 갈애가 되어야 한다.

둘째,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는 어디서 왔는가? 불교의 업보윤회에서는 생명체가 사망하면 의식이 멸절된다고 하므로 앞의 생명체가 남긴 업과 결합하는 의식은 앞의 생명체의 의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갈애 역시 마찬가지인데 앞의 생명체가 남긴 갈애가 아니라면 이 갈애는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연기의 구조에 의탁하여 의식과 갈애가 업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업은 의식과 갈애를 생산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윤회의 주체, 즉 ‘실체적 자아’가 되고 만다.

셋째, 업을 만든 생명체와 그 과보를 받는 생명체의 상이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업은 금생에 받기도 하고 내생에 받기도 하며 혹은 여러 생에 걸쳐서 받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금생의 생명체가 죽고 나면 의식마저 멸절된다고 하므로 바로 다음 생이나 여러 생에서 그 과보를 받는 생명체들과 금생의 생명체와는 별개의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해 현생의 A라는 생명체가 만든 업의 결과인 과보를 A와는 전혀 다른 생명체인 B, C, D, E, F, G…… 등등이 받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즉,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는 자가 서로 다른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모순이 해결되려면 A, B, C…… 등의 생명체들을 연결하는 업이라는 것이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넷째, 동일성이 없는 연속성이 윤회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A, B, C, D, E, F, G…… 등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업이라는 연결고리로 인해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윤회의 선상에 있는 생명체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연속적인 자식은 부모가 윤회한 생명체가 되어야 한다. 윤회는 한 생명체의 죽음과 다른 생명체의 탄생을 전제조건으로 하는데 동시에 살아 있는 두 생명체를 윤회로 연결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므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윤회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이렇게 ‘동일성은 없지만 연속성이 있으므로 윤회가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우므로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섯째, 무엇으로 윤회를 벗어날 것인가? 만약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없다는 주장을 진리라고 인정하면 무아이지만 윤회한다는 명제도 성립하게 되지만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명제도 성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탐구조차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만다.

여섯째, 업보윤회는 철칙인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한다면 붓다나 아라한들도 모두 그들이 지은 업의 과보를 받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하거나 그들의 업이 다른 의식이나 갈애를 만나 생명체를 탄생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붓다가 선언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거짓이 되고 만다. 따라서 붓다의 주장이 진실이 되려면 업보윤회에는 예외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업보윤회가 철칙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런 모순점들로 인해 업보윤회는 무아윤회를 설립시키는 근거가 될 수 없으니 유일한 근거를 잃어버린 무아윤회는 성립할 수 없다. 결국 무아윤회라는 주장은 궤변인 것이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윤회할 아무것도 없다는 무아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아이면 윤회가 없으므로 무아윤회라는 말은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처럼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3.윤회와 무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1) 업보윤회의 성립 시기

업보윤회는 붓다의 출세 이전에 이미 그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불교에 의해 업보윤회가 성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보다 오랜 전통을 가진 자이나교의 경전에 "자제와 고행에 의해서 과거의 모든 업을 소멸하고 최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면 붓다가 설한 ‘업과 의식과 갈애의 결합’에 의해 윤회가 전개된다는 사고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업이 윤회의 동력인자라는 인식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조준호는 일반적으로 붓다 이전에 나타난 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전변설(轉變說:우주자아인 브라흐만(Brahman)이 세상을 만든 후 스스로 세상 속으로 투사해 들어갔다는 주장)과 범아일여설(梵我一如說: 개별자아인 아트만(Ātman)이 우주자아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될 때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주장)을 붓다 이후에 만들어진 사상으로 본다.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은 한 쌍의 잘 짜여진 진리체계로 볼 수 있는데 그 중간에는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합일하지 못하면 업보에 의한 재생, 즉 업보윤회를 계속해야 한다는 연결고리가 있다.

전변설 → 업보윤회설 → 범아일여설
<도표1. 전변설, 업보윤회설, 범아일여설의 관계>

여기서 전변된 아트만들이 업을 극복하고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브라흐만과 합일하는 것이다.

→예 → 윤회의 종식
Ātman → Brahman과 합일--
→아니오→윤회의 지속

<도표2. 범아일여설의 구조>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에 대한 조준호의 주장이 옳다면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 업과 윤회의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인데 이는 ‘원래 바라문교나 힌두교에는 업과 윤회라는 개념이 없었다.’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업과 윤회라는 인식은 바라문교나 힌두교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것이었으며 붓다를 비롯한 사문종교의 고유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현생에 만든 업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된다.‘라는 업보윤회의 사상은 카스트제도에 의해 고정된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브라만 계급에게는 일종의 위협이다.

따라서 바라문교가 힌두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사문종교의 업보윤회 사상을 흡수하였다는 가정이 타당성을 가진다면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은 불교의 탄생 이후에 성립된 사상체계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업보윤회라는 개념의 성립 시기가 붓다 이전이라면 윤회와 무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2) 붓다 깨달음의 핵심 내용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 크고 작은 성과를 얻은 사문 고타마가 우루벨라 숲의 보리수 아래서 성취한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의 가르침을 통해 추론해 보면 연기와 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체가 인연생기(因緣生起)한 것임을 말하는 연기는 독립되고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다는 무아임을 보증하는 것이므로 결국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의 핵심 내용은 무아인 것이다.

연기 ---보증---→ 무아
<도표3. 연기와 무아의 관계>

게다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 붓다의 출가 동기를 생각해 보면 무아가 사문 고타마를 붓다로 만들었다는 데 더욱 확신이 간다. 사문 고타마가 극심한 고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행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에서 오는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자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정을 통해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무아를 깨닫고 난 즉시 생로병사의 고통이 사라졌던 것이다. 생로병사를 겪는 자아가 없다면 생로병사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3)무아의 의미와 역할

(1) 무아의 의미

무아는 산스크리트로 'Anātman'인데 ātman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 an이 붙어서 형성된 단어이다. 여기서 문제는 ātman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점이다. ātman에는 재귀대명사인 자기 자신과 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Ātman)의 의미가 있는데 붓다는 과연 어느 의미를 부정하기 위해 접두어 an을 붙였을까? 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를 부정하려고 했다면 당시에 이미 우주자아와 개별자아의 개념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을 고타마 붓다 이후에 형성된 사상으로 보는 조준호는 무아가 Ātman(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 ‘일반적인 자아개념이나 영혼’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준호의 주장은 초기불교의 경전과 우파니샤드의 문헌들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한 것이므로 상당히 타당성이 높다.

필자가 조준호의 주장에 동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후에 힌두교에서 출현한 진아(眞我)라는 단어의 개념 때문이다. ‘The Self’라는 영어로 번역되는 진아의 원어는 바로 Ātman인데 개별자아인 동시에 우주자아로 볼 수 있는 이 진아(Ātman)의 개념이 불교의 무아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붓다가 주창한 무아의 의미를 ‘우리가 평소에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없음’이라고 정의한다.

무아의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무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붓다는 나를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해체하여 살펴봄으로써 무아임을 증명하는데 이는 ‘자아해체’를 통한 ‘자기소멸’이다. 다시 말해 무아라는 불교의 가르침에는 자아해체를 통한 자기소멸이라는 방법론적인 측면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무아의 역할

무아는 불교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윤회와 관련된 역할은 윤회의 고리를 끊게 하는 것이다. 윤회의 기본전제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의 경우에는 자아 즉, 윤회할 주체가 없으므로 윤회라는 법칙이 아예 성립할 수가 없다. 안옥선과 같이 업보윤회를 통해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사람은 윤회의 기본전제는 업이므로 자아가 없어도 윤회가 성립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업을 성립시키는 것은 오온으로 성립된 임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아이므로 자아가 없는 쪽이 보다 확실하고 완벽하게 윤회를 단절하는 것이다. 업보윤회의 발생 과정이 '자아→업→윤회'이므로 최초의 단계인 자아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발생하지 않아 윤회는 자동적으로 단절된다. 다시 말해 무아는 업을 발생시키지 않으므로 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윤회는 당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무아이면 윤회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아를 체득한 붓다라 할지라도 그의 임시 자아가 만들어 내는 업은 의식과 갈애를 만나 윤회를 성립시키게 된다. 만약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가 업을 만드는 생명체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붓다는 갈애가 없고 사후 그의 의식은 단절될 것이므로 그의 사후에 그가 만든 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윤회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불교 수행자가 아닌 누구라도, 나아가 무아를 깨닫지 못한 생명체라도 갈애가 없는 사람은 결코 윤회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반대로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붓다도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갈애를 없애는 것 외에 특별한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문제가, 후자의 경우 아무리 수행해도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가 각각 발생한다. 따라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무아이면 윤회는 없다’는 명제를 인정하는 방법뿐이다.

4)무아와 윤회의 관계

윤호진과 조준호의 연구를 통해 볼 때 윤회라는 개념은 고타마 싯다르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생명체가 죽게 되면 재생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고통인지 행복인지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하더라도 윤회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진리체계로 자리 잡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나중에 불교에서 받아들여 체계화한 것으로 보이는 업보윤회 역시 마찬가지다.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파악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를 단절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는데 무아를 체험하고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물론이고 생로병사의 원인인 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붓다가 제시하는 무아는 윤회의 주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윤회의 발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자내증이란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 무아임을 깨달은 사람은 현재의 생을 마친 다음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 무아는 윤회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의 진리체계인 것이다.

이렇게 발생의 순서로 보나, 종교적인 교리체계로 보나 무아는 윤회라는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므로 둘 사이에는 어떤 충돌이나 모순도 발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진리체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무시하고 무아와 윤회를 두 개의 독립된 주장으로 본다면 충돌과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4. 무아와 진아의 관계

사문 종교, 특히 불교의 융성으로 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 바라문교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다. 불교를 적대시하던 바라문교는 오히려 불교를 포용하면서 힌두교로 변신을 추구했는데 그 결과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고 힌두교는 인도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대의 종교가 되었다.

그런데 현재 붓다가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힌두교 사원에서 모셔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업보윤회나 무아와 같은 불교의 많은 가르침이 힌두교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진아가 바로 불교의 무아라고 본다. 달리 말하면 불교의 무아 개념을 힌두교가 받아들여 진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힌두교의 전통 속에서 탄생한 성자들은 진아(眞我)를 찾을 것을 주장했다. 남인도 따밀 지역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자로 활동한 라마나 마하르시(1879~1950)는 진아를 찾을 것을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자아탐구라는 방법은 선종(禪宗)에서 제시한 화두와 비슷한 방법이라서 일부 불교도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보다는 그가 제시한 진아라는 개념이 불교에서 주장하는 무아와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이야말로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라마나 마하르시는 진아를 찾고 나면 진아는 무(無)임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으니 그의 진아는 결국 붓다의 무아인 것이다.

북인도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자인 마하라지(1897~1981)는 진아라는 개념도 방해물에 불과하다며 곧바로 무(無)를 찾을 것을 주장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마하라지가 주장하는 ‘아(我)도 세계도 모두 없는 절대 무의 경지’는 바로 붓다가 주장한 제법무아의 경지인 것이다.

라마나 마하르시의 전법제자들도 불교의 가르침들을 사용했다. 안나말라이(1905~1995)는 스승처럼 진아를 통한 무아의 발견을 제시했고, 파파지(1910~1997)는 언제 어디서나 무아임을 가르쳤고, 락슈마나(1925~현재)는 무심(無心)을 통한 진아의 발견을 가르쳤다. 보다 특이한 점은 락슈마나의 전법제자인 사라담마(1959~현재)의 경우 최후의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일체는 대공(大空)임을 체득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불교의 주요 가르침은 힌두교의 중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힌두교의 성자들을 힌두교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붓다들이라고 본다. 하지만 근본불교주의자들은 이들이 진아를 주장한다고 해서 외도로 몰아 버리고, 화두제일주의자들은 이들이 화두를 주창(主唱)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이 낮은 단계의 것이라고 폄하해 버린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근본불교주의자들이나 화두제일주의자들이 진아나 무아에 대한 종교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진인이라고 불리는 라마나 마하르쉬나 마하라지 등에게는 진아는 유아(有我)가 아니라 무아이다. 하지만 진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 즉 종교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진아는 또 다른 하나의 개체아(個體我)일 뿐이다.
5. 종교체험의 필요성

불교는 종교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인 면으로만 접근할 경우 가르침들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무아와 윤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붓다는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제자나 14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제자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붓다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아를 직접 체험하면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런 종류의 질문은 스스로의 종교체험을 통해 해결될 문제이지 남이 주는 대답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진이 무아와 윤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칸트의 요청이론을 적용한 것은 신선한 발상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무아에 대한 종교적인 체험, 즉 자내증이 없는 상태에서 관념론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무아와 윤회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는 진리체계이므로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김진의 해결책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굳이 칸트의 요청이론을 적용하자면 윤회 문제의 해결에 대한 요청으로 무아가 제시되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김진의 주장에 반대해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불교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들이 무아에 대한 종교체험을 했다면 무아윤회와 같은 궤변을 주창(主唱)하지는 못한다.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붓다의 직설로 알려진 니까야의 내용을 절대시하는데 이런 교조주의적 태도는 붓다의 진의를 알아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예를 들어 이들은 삼법인을 ‘제행이 무상하니 고이고, 고이니 무아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고가 아닌 것은 무아가 아니다.’라는 말인가? 자체모순을 내포하게 되는 이런 해석을 니까야에 실려 있다고 해서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무아와 업보윤회가 모두 니까야에 실려 있다고 해서 무아윤회를 주장하거나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나서 ‘홀로 고요한 곳에서 깊이 생각해 보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하라.’는 붓다의 교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폐쇄적인 교조주주의적 시각이 아니라 종교체험에 근거한 개방적인 시각으로 볼 때 사법인(四法印)은 붓다 교설의 핵심이다. 붓다는 자신을 포함한 세상이 선험적으로 연기하는 존재임을 통찰하고 제행무상을 깨달았으며 연기하는 존재인 나(我)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경험함으로써 제법무아를 깨달았다. 시간의 경과를 전제하고 있는 제행무상을 시간 축으로 하고 존재의 무화(無化)를 전제하고 있는 제법무아를 공간 축으로 한다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진리체계가 만드는 세계에서는 생로병사의 고통, 즉 윤회는 사라지고 열반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유상(有常)과 유아(有我)가 만드는 세계에서는 열반은 없고 생로병사의 고통, 즉 윤회만 있을 뿐이다.


제법무아
(공간축)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는
열반의 세계


----------------------------아(我)----------------------------------
제행무상(시간축)

생로병사의 고통이 있는
윤회의 세계


<도표4. 사법인의 진리체계>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원점에 서게 된 아(我)는 잘 생각해 보고 붓다가 제시하는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윤회의 세계에 머물 것인가를 선택하면 된다.

사법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12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12연기 체계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업이 없으면 행(行)과 그 이후의 단계가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을 없애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행, 즉 업이 발생하고 결국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무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무명은 ‘무아를 체험하지 못한 상태’이다. 개아가 자기해체를 통한 자기소멸, 즉 무아를 체험하게 되면 무명은 명이 되므로 다음 단계인 행(업)과 이후의 단계들은 발생하지 않게 되어 생로병사의 고통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종교체험은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니까야의 내용을 신성시하는 교조주의적인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니까야가 문자로 작성된 시점은 붓다가 열반하고 500년 정도 지났을 때인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붓다의 말씀이 구두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삭제나 수정이 되었을 것이란 점이고 둘째는 전달자나 기록자의 의도에 의해서 변형이나 편집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4법인과 12연기의 경우만 봐도 니까야의 내용은 순일 무잡한 붓다의 가르침이 아닐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필자는 니까야의 자구에 얽매인 교조주의적인 해석은 중지되고 나아가 폐기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불교학자들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니까야의 내용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종교체험에 근거한 재해석을 통해 붓다의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6.나오는 글

붓다는 무아를 체득함으로써 스스로의 윤회를 단절했으며 무아를 가르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무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했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무아와 윤회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아와 윤회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진리체계다.

무아와 윤회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무아와 윤회를 각각 독립적인 하나의 이론으로 파악하는 전도된 몽상가들의 착각일 뿐이다. 교조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 전도된 몽상가들은 윤회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무아가 제시된 것은 감안하지 않고 무아와 윤회가 모두 니까야에 실려 있는 점만을 감안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아와 윤회는 항상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들은 결국 ‘무아윤회’나 ‘무아와 윤회는 모순이지만 수용할 수밖에 없다.’라는 해괴한 해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거짓말은 붓다가 한 것이 아니라 이들 전도된 몽상가들이 한 것이다.

김진의 문제제기로 인해 무아와 윤회의 모순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을 때 “깨달음의 경험으로서만 궁극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것을 두고 ‘모순이다’, ‘아니다’라고 논쟁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한 조성택 교수의 주장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으로 불필요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붓다 가르침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다.

 불교는 철학이기 이전에 종교이므로 종교체험 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니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불교 교학을 배우는 동시에 종교체험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미로를 헤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붓다들을 비방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필자가 경험한 종교체험의 관점에서 볼 때 힌두교의 진인들이 주장하는 진아의 존재양식은 무(無)이다. 따라서 진아는 붓다가 가르친 무아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붓다가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냉혈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종교체험을 강조한 붓다는 열반할 때조차도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이룰 것을 당부했다. 이는 불교도들에게 스스로의 종교체험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경험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격이 방사하는 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웬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도 종교체험을 하기는 어렵지만 붓다는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 붓다의 이런 태도는 화두를 던져 주고 나서 깨닫고 못 깨닫고는 전적으로 제자에게 맡겨 버리는 선종의 스승들이 취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종교체험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또, 윤회를 단절해야 할 고통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지속해야 할 즐거움으로 볼 것인지도 역시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선택에 앞서서 최소한 무아와 윤회의 가르침에 관해서는 불교도이건 비불교도이건 명심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방경일
1987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89년 불교방송 조사기자. 1991년 MBC <PD 수첩> 조사역. 1992년부터 칼럼니스트와 저술가로 활동 중. 저서로 《선사들의 삶 과 깨달음》, 《마음을 밝혀주는 60가지 이야기》, 《전두환 리더십 노태우 처세 술》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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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수(133)  
방경일
2009-01-11 17:41:21
멸진당 선생님~
이쁘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멸진당
2009-01-09 15:42:54
우리 불교의 미래는 밝다(2).
을 살펴보시면 더욱 값진 견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5악견 중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수행계위가 어디인가를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방경일 선생님의 주장의 건립에 낱낱이 경(經),론(論),소(疎)를 인용하시어 반박하심에 찬사를 드립니다. 방경일 선생님! 정말 수고 많으셨음에 존경합니다. 멸진당(이종귀)가 박수칩니다.
멸진당
2009-01-09 15:22:32
우리 불교의 미래는 밝다.
두 분의 주고 받는 토론을 보니 참으로 흡족합니다. 마치 부파불교시대 사상의 차이를 보는 것같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누가 뭐래도 우리의 불교사상과 철학이 풍부한 것은 부파의 여러 쟁론에 의함이 많은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쉬은 것은 [지나가다]님께서는 너무나 고거(高擧) 심소의 작용이 뚜렷한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은 아치-아견-아만-아애의 심소가 차례대로 일어남이니 자신의 식의 체성과 행상(行相)
방경일
2009-01-03 02:07:43
지나가다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_()_
지나가다
2009-01-02 13:44:42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41
제의 닉네임은 '지나가다'죠.
닉에는 저의 의도가 들어있죠.

지나가다가 한마디를 던집니다.
논문형식으로 글이 인쇄화 되는 매체에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할수가 없죠.
이런곳에 글을 올리는 한 이유이기도 하죠.

제가 올리는 글은 알려져 있는 불교서적에서 볼수 없는 내용이 많을겁니다.
실참과 관련된 건 볼수가 없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님은 심사숙고 하시면서 답변글을 올리셔야 할겁니다.
지나가다
2009-01-02 13:31:30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40
일상의식에서 마음이 사라진 후의 상태를 기억을 못합니다.
그거 선정력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숙면상태에서 깨어 있다는 말은 뻥이죠.
요가에선 본연무상삼매가 되어야 숙면중에 깨어 있을수 있죠.

님이 오매일여에 대한 글을 불교평론 37호에 실었다고 하는데
심히 궁금합니다. 그 글이 이곳 사이트에서 공개되면 그때 불법에 맞쳐 평한 글을 올리죠.
지나가다
2009-01-02 13:18:54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9
자신이 경험한 "마음의 사라짐"이 무상유정처(無想定에 해당), 비상비비상처, 멸진정 이중 어딘줄도 모르는데, 오매일여, 숙면일여의 의미를 제대로 알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마음의 사라짐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경험할수 있지요.
선정력이 충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마음의 사라짐을 경험하면 깨어있지 못하죠.
그래서 깜깜합니다. 이런걸 無記라고 하죠.
지나가다
2009-01-02 13:05:58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8
남방불교(상좌부)와 북방불교(대승불교)의 큰 차이점을 간단히 말하면...

남방불교는 유위법만 다룹니다. 오온 6계, 12처, 18계를 다릅니다.

북방불교는 무위법과 유위법을 모두 다룹니다.
그러다 보니 북방불교에선 무위법에 해당되는 개념들이 등장합니다.
진제, 법신, 불공여래장, 불공진여, 일심, 진심, 진공 등이 등장하는 겁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무위법은 유위법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입장에서 전개되죠.
지나가다
2009-01-02 12:49:56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7
불교의 수행자는 자신이 경험한 현상을 바르게 이해합니다.
그런게 해심밀경에 적혀 있는 비파사나의 경계입니다.

님이 초기경 및 대승경전에 공히 등장하는 9차제정을 분별할수 있으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깨달음 체험담의 의미를 알수 있습니다.
이말은 요가의 유상삼매와 무상삼매도 분별할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론에 대한 건 해당 우파니사드나 불경을 읽어보면 알수 있어요.
지나가다
2009-01-02 12:39:33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6
지금 무슨 주장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글을 싣는 불교 잡지도 있으니...ㅉㅉㅉ

불교는 본래 깨달음 타령을 하지 않습니다.
님처럼 어떤 경계를 추구하는 힌두식 불교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때문에 현재의 한국 불교가 이꼴라지가 됐소.

님이 좋아하는 궁극의 깨달음은 불교와 힌두교 공히 해탈입니다.
근데 단어는 동일한데, 의미하는 바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겠지요~
지나가다
2009-01-02 12:29:43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5
님은 참 재미있습니다.

초기경, 대승경전에 공히 등장하는 9차제정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비추면서,
무상삼매를 말하는 마하리쉬의 진아의 깨달음을 무아라 같은거라 하시고 있으니...

님은 불교를 힌두교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제말이 이제 알아들을수 있겠죠?

님과 같은 불교이해가 현대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불자로서 마음이 아프지 않겠소?
지나가다
2009-01-02 12:21:58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4
쌍윳따의 무위편에서 인용한 용어를 보면...
해탈, 적멸, 사라짐은 동일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쉬는 내가 있다는 순수한 자각이 사라지지 않을때 해탈, 진아의 깨달음이라 한다고 했는데. 이게 불교에서 사용하는 해탈과 같은 의미입니까?
지나가다
2009-01-02 12:12:06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3
이부분을 설명해 드려야 딴소리 않하시겠지~

무상삼매는 형상없는 의식(식)인데, "나-나의 순수한 자각"이 드러날때 찾아온다고 하고 있죠. 그 화막이 영구히 드러나서 다시 사라지지 않을 때를 진아 깨달음, 해탈이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즉 '나-나의 순수한 자각"이 형상없는 의식으로 나타나 사라지지 않을 때를 해탈이라 한다.

마하라지의 언어로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드러나 사라지지 않을때를 해탈이라합니다.
지나가다
2009-01-02 11:43:35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2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꾸준한 수행으로 장애되던 생각들이 점차 소멸되어 '나-나'의 순수한 자각의 화막이 드러나는 때가 되면 그것이 찾아옵니다. 여기서 더 수행해 나가면 그 화막이 영구히 드러나서 다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아 깨달음이고, 해탈이며, 자연스럽고 애씀없는 상태인 본연삼매(sahaja samadhi)입니다.
지나가다
2009-01-02 11:41:10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1
마하리쉬의 설명이 계속됩니다.

무상삼매는 식識(chit), 즉 애씀없이 자연스럽고 형상 없는 의식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에 있어서, 어디서 공포가 찾아오며, 어디에 신비가 있단 말입니까? 과거(전생)의 오랜 수행에 의해 마음이 충분히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무상삼매가 물밀듯이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지만,
지나가다
2009-01-02 11:35:54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0
마하리쉬는 뚜리야를 무엇이라 설명했게요?
[삼매, 뚜리야 그리고 무상삼매는 같은 하나의 의미, 즉 진아에 대한 자각(awareness of the Self)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저는 님이 또다시 헛소리 하지못하게 불교경전과 우파니사드, 요가경 그리고 님이 성자로 보는 마하리쉬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교와 힌두교의 이론 및 종교체험적 차이점을 님이 알아듣을수 있게 쓰고 있습니다.
지나가다
2009-01-02 11:20:55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9
무상삼매는 본연무상삼매本然無相三昧(sahaja nirvikalpa samadhi)와 합일무상삼매合一無相三昧(kevala nirvikalpa samadhi) 이 두가지로.. 마하리쉬는 이를 설명하고 있는겁니다.

또 의식은 4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대낮의 의식, 꿈을 수반하는 수면중의 의식, 꿈이 없는 깊은 의식, 뚜리야 상태 입니다. 뚜리야는 의식이 완전한 상태로 모든 유한한 의식활동이 그친상태라 하죠.
지나가다
2009-01-02 11:09:24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8
무상삼매가 무언지 궁금해지죠..
파탄잘리의 요가경에는 유상삼매는 4가지 무상삼매가 2가지가 기술되어 있죠.

마하리쉬는 한말은...
지고의 상태를 착파하고 있는 것이 삼매입니다. 마음의 번뇌(mental disturbances)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으로 그렇게 할 때, 그것이 유상삼매입니다. 이러한 번뇌가 없을 때, 그것이 무상삼매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원초적 상태에 영구히 머무르는 것이 본연삼매(sahaja)입니다.
지나가다
2009-01-02 10:54:48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7
요가 기법을 통해 순수정신이 분리되어 드러나는 경계를 무상삼매라 합니다.
순수정신이 분리되어 드러나면 해탈했다합니다. 이를 유신해탈자, 유생해탈자라 합니다.

불교와의 이론적 차이점을 분명하게 알수 있을겁니다.

고통의 원인(집성제): 탐진치로 갈애의 취착 vs 순수정신의 대한 무지
고통의 소멸(멸성제): 탐진치의 소멸 vs 순수정신의 드러남, 무상삼매
지나가다
2009-01-02 10:40:46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6
실천적 수단으로서 요가는 이 순수정신을 드러나게 하는 기법입니다.
출발점은 순수정신은 육체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는 겁니다.
육체에는 오감각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감각기관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정신활동은 순수정신에 의한 활동이 아닌걸로 봅니다.
요가는 한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오감각기관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정신활동을 억제시킴으로써 순수정신을 분리시키는 실천적 수단인겁니다.
지나가다
2009-01-02 10:34:22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5
그러면 아트만은 어떻게 자각 혹은 의식하는가 궁금하겠지요.
아트만을 자각하는 실천적인 기법이 요가입니다.
요가철학의 핵심을 간단히 소개하면...

요가는 일체의 고통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실천수단입니다
고통은 왜 생기는가, 그건 정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으로 고통이 생긴다고 봅니다.
여기서 정신이란 존재는 절대적이며 인지되지 않는 하나의 실체로 봅니다.
이를 아트만, 푸루샤(상키야학파)라 합니다.
지나가다
2009-01-02 10:21:26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4
문다카 우파니샤드에는...
브라흐만은 "순수한 빛 중의 빛"이라 표현했다고 합니다.

무아에 대한 기술을 니까야에서 한번찾아보세요. 빛이라 언급된 한구절이 있는지...
니까야에 나오는 무아를 알기 쉽게 정리하면 이 한구절로 끝나는데...

"오온은 무아다"

힌두교의 아트만과 불교의 무아가 동일한걸로 본다는 주장은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 아시겠습니까?
지나가다
2009-01-02 10:15:18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3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의 위에서, 더 높은 것이 없는 가장 높은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은 사실 사람의 내면에서 빛나는 것과 동일한 빛이다.

"자신의 신체로 부터 벗어나 최고의 빛에 도달하는 이 맑은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아트만이다. 그것은 불사의 존재,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것은 브라흐만이다."

브리하드아라니야카 우파니샤드에는..
아트만은 "마음속의 빛"
지나가다
2009-01-02 10:07:17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2
님은 아트만, 브라흐만이 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 다음이..

"생명은 그의 신체이며, 그의 모습은 빛이며, 그의 영혼은 공간이다" " 심장안에 있는 나의 아트만은 밀알보다, 겨자씨보다 더 작은"것이며 "대지보다, 대기보다, 이 세계 전체보다 더 큰것"이다. '모든 행위, 모든 욕망을 포함하는 것... 이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것... 그것은 내 가슴속에 있는 아트만이다. 그것 역시 브라흐만이다.
지나가다
2009-01-02 09:55:13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1
Brahmasutra에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관계를 다루는 세가지 이론이 나오는데...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동일하다.
해탈하기 전까지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완전히 별개로 분리되어 있다.
아트만은 신적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라흐만과 동일시될수는 없다.

음.. 브라흐마경에 의하면..
마하라지의 불이일원론베단타학파는 첫번째 이론을 따르는 거네요.
지나가다
2009-01-02 09:47:27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0
마하라지는 advaita Vedanta(불이일원론 베단타)학파에 기반을 두고 있고, 마하리쉬는 정확히 어떤 학파인지 모릅니다. 님은 어떤학파인지 알고 있겠네요...
불이일원론 베단타학파의 핵심개념은 이렇습니다.

실재하는 건 신입니다. 브라흐만입니다... 브라흐만이 만물을 전개시켰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존재들은 브라흐만의 본질을 가진 것이 전개된것인데.. 그게 아트만입니다. 불이일원론... 브라흐만, 아트만은 하나다.
지나가다
2009-01-02 09:38:58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9
본글에서 인용된 현대인도성자라는 두분 마하리쉬, 마하라지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소개했습니다. 두분 가르침은 동일합니다.
마하리쉬는 ‘나는 존재한다’(I am) 하는 자각(Awareness),
마하라지는 '이사와라(isawara), "나는 이렇게 있다'는 의식(I am consciousness)이다'

참자아,진아의 자각, 의식함입니다.

본글에선 진아가 불교의 무아라는 황당한 주장이 있습니다.
지나가다
2009-01-02 09:24:31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8
'나는 이렇게 있다'는 의식(I AM consciousness)은 호흡을 아는데서 비롯된다. 모든 지식은 결국 신을 알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신"이란 "나는 이렇게 있다'라는 의식의 속칭일뿐이다. 그러므로 네가 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의식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곧 이사와라(isawara), "나는 이렇게 있다'는 의식이다.
지나가다
2009-01-02 09:22:21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7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저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고, ‘이것이 내 자신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말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당신이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고 지적해낼 수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당신은 다른 ‘무엇’일 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지각(知覺)할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없다면, 지각도 상상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가다
2009-01-02 09:19:44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6
마하라지의 글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감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을 이용하여 묘사하는 것이 지식인 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다
2009-01-02 08:51:08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5
마하리쉬의 글에서 인용합니다.

1. 나는 누구입니까?

일곱 가지 기질로 이루어진 이 거친 몸은 내가 아닙니다. 소리를 듣고, 감촉을 느끼고, 색을 보고, 맛을 느끼고, 냄새를 맡는, 다섯 가지 지식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말을 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행위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쁘라나 등 다섯 가지 생명 기운은 내가 아닙니다.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내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만 지니고 있을 뿐, 아무런 대상도 아무런 기능도 없는 무지 또한 내가 아닙니다.

2. 이것이 다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한 것들을 모두 ‘이것도 아니다’라고 부정한 뒤에 단 하나 남는, ‘나는 존재한다’(I am) 하는 자각(Awareness)입니다.

3. 그 자각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 자각의 본질은 존재-의식-지복입니다.

4. 언제 진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보이는 대상인 이 세계가 사라졌을 때, 보는 자인 진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나가다
2009-01-02 08:45:42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4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이구절은 열반경,법화경, 니까야에 나오는 구절이라 했습니다.
님의 논리대로 라면 적멸이란 불교술어는 열반경-법화경등의 대승경전과 니까야에 사용된 의미는 다르겠네요...

니까야에는 무위, 해탈, 적멸, 무루는 같은 의미로 되어있는데,
제가 인용한 열반경 구절에는 무위, 해탈, 무루는 있는데 적멸은 없네요.
열반경에선 적멸은 다른 의미로 쓰는가 본데 어떤 의미입니까?
지나가다
2009-01-02 08:30:46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3
초기경과 대승경에 나오는 위빠사냐의 의미가 서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사띠는 염으로 한역된것도 아시겠고, 초기경과 상좌부론서와 대승경론에 나오는 사띠의 의미역시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것도 모르고 사띠와 위빠사냐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제가 헤갈리는게 아니고 님의 빠롤과 맞지 않은 겁니다.
지나가다
2009-01-02 08:22:31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2
님이 파악한 이치대로 묘사된 불교경전이 없습니다. 님이 파악한 이치는 님이 "생각"한 불교의 이치겁니다.

님은 저하고 불교 교학을 토론할 수준이 못됩니다.
저는 님의 불교교학 지식수준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 댓글을 달아 왔는데 그걸 아셨습니까?

제가 단 댓글에서 사용한 불교 술어들은 님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한 술어들이 없죠.
위빠사냐를 비파사나로 한역한것은 아시겠죠.
지나가다
2009-01-02 08:07:09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1
님은 열반경의 나오는 "일체중생이 실유불성" 언급하면서, 이치에 합당하면 경전의 자구는 무시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인용한 열반경 구절을 읽어 보셨죠.
님의 불교 술어 "불성"에 대한 빠롤은 "일체중생이 실유불성"의 출전인 열반경의 자구를 무시한거라는 것 아실겠죠.
제 말이 맞죠. 님은 불교를 힌두교식으로 이해한다는...
님의 본글과 댓글에서는 님의 불교 교학에 대한 앎의 수준이 드러납니다.
지나가다
2009-01-02 07:51:52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0
2) 저는 일체중생이 실유불성이니 이치에 합당하면 경전의 자구는 무시해 버린다는 것이고
9) 이는 술어에 대해 어떤 빠롤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인데
10) 님의 경우 불교의 술어(제법, 적멸 등)는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개인에게 동일한 빠롤을 가진다는 전재하에
-------

먼저 님이 단 답글의 일부를 상기시키면서 비판글을 써가겠습니다.
지나가다
2009-01-02 07:40:41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9
<< >>부분에 해당되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무위, 궁극, 무루, 해탈, 구경, 열반, 섬, 귀의처, 무착, 적멸, 불사, 불로,진리, 피안, 극묘,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 견고, 비추어 봄, 볼수 없는 것, 무희론, 승묘, 지복, 안온(평안), 갈애를 부숨, 아주 놀라운 것, 예전에 없었던 것, 무재난, 무에, 사라짐, 동굴, 피난처
지나가다
2009-01-02 07:21:31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8
이제까지 열반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다음은 쌍윳따 무위의 모음편(SN IV, 359~373)을 인용해 보죠.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

쌍윳따 니까야의 무위의 모음편에는 << >> 부분에 들어가는 단어만 다르고 나머지 부분이 동일한 일련의 경들이 모아져 있다.
지나가다
2009-01-02 07:07:12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7
번뇌의 시끄러운 것을 멀리하였으므로 고요하다(寂靜)하고, 죽는 일을 아주 끊었으므로 병고가 없다하고, 온갖것이 없으므로 무소유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런 관찰을 할때에는 불성을 분명히 보게 되느니라.
지나가다
2009-01-02 06:56:23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6
선정의 모양은 공(空)삼매, 지혜의 모양은 무원(無願)삼매라 하고, 버리는(捨)모양은 무상(無相)삼매라 하느니라.
인연이 없으므로 무생이다 하고, 무위이므로 냄이 없다(無出)하고 짓는 일(作)이 없으므로 무작(無作)이라 하고 다섯가지 소견에 들어가지 아니하므로 집(옥택)이라 하고, 4폭류를 여의었으므로 섬(洲)이라 하고, 중생을 조복하므로 귀의할데라 하고, 번뇌의 도적을 깨뜨렸으므로 편안하다하고,
지나가다
2009-01-02 06:36:42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5
여덟은 멸진정 해탈삼매니라...
아홉가지가 있으니 곧 9차제정이니라, 4선과 4공과 멸진정삼매니라.
지혜에... 또 세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반야요. 둘은 비파사나요, 셋은 사나니라.
세가지 일을 위하여 사마타를 닦나니, 방일하지 않기 위함이요, 큰 지혜를 장엄하기 위함이요, 자재함을 얻기 위함이니라.
지나가다
2009-01-02 06:31:30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4
얽매임이 없다함은 집착이 없다고 이름하고, 집착이 없다함은 무루(無漏)라 이름하나니, 무루는 곧 선이요, 선은 곧 무위이요, 무위는 대열반의 항상함이요. 대열반에 항상함은 곧 나요, 나는 곧 깨끗함이요. 깨끗함은 곧 즐거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상락아정)은 곧 여래니라.
8해탈삼매니라... 넷은 공처해탈삼매,다섯은 식처해탈삼매, 여섯은 무소유처해탈삼매, 일곱은 비유상비무상처해탈삼매,
지나가다
2009-01-02 06:24:12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3
비상비비상삼매들도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뒤바뀐 마음을 내어 열반이라 생각하게 하느니라. 만일 이런 삼매들을 영원히 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을 닦는다 할것이니라.
무주(無住)라 함은 4념처를 닦는다 이름하나니.
무주라 함은 집이 없다(無屋宅)고 이름하나니.
무옥택은 무생이라 이름하고, 무생이면 죽음이 없다고 이름하고, 죽음이 없다함은 무상(無相)이라 이름하고, 무상이면 얽매임이 없다고 이름하고,
지나가다
2009-01-02 06:12:15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2
두소견은 중도라 이름하지 아니하니라.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음은 곧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니, 이것을 불성이라 한다.
'만일 12인연을 보는 이는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이는 곧 부처님을 본다 하였으니, 부처님께서는 곧 불성이니라.
불성은 곧 수릉엄삼매이니...
수릉엄삼매에 다섯가지 이름이 있으니.. 하나는 수릉엄삼매, 반야바라밀, 금강삼매, 사자후삼매, 불성이다.
지나가다
2009-01-02 06:03:30
불교와 힌두교도 분별하지 못하면서...1
저는 무식해서 "빠롤"의 의미를 모르는데.....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구절은 열반경에 나옵니다.
열반경에 사자후보살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나옵니다.

불성은 제일의 공이라 하고, 제일의 공은 지혜라 이름하느니라.
중도란 것은 불성이라 이름하나니..
불성이라 함은 곧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중도 종자니라...
중생들의 소견은 두가지가 있으니 상견과 단견이다.
방경일
2009-01-01 02:55:04
지나가다님께 재사 답변드립니다!-3
10)궁극의 깨달음이 과연 무엇인지 정의해 주시기 바라는데
11)선종과 대승불교, 근본불교에서의 정의와
12)제가 좋아(?)하는 힌두교에서의 정의 와의 차이점을 들어 전개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궁극의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중구난방인데 정리할 필요를 못 느끼세요?)
방경일
2009-01-01 02:46:05
지나가다님께 재사 답변드립니다!-2
5)불교평론과 같은 공개적인 곳에 발표해 주시면
6)경전이나 논서의 근거를 들어 만족하실 정도로 반론해 드리겠고
7)오매일여에 대한 님의 견해는 저와 같다고 여겨지며
(불교평론 37호에 실린 저의 글 참조~.~)
8)조박사님은 제가 아는 한 근본불교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며
(델리대학교에서 9년 동안 니까야 전체를 반복해서 보느라 개고생 했다고 함-.-;;)
9)님이 한국의 전통적인 선사(간화선사)라시니
방경일
2009-01-01 02:38:08
지나가다님께 재사 답변드립니다!
고견에 감사드리며~
1)위빠사나의 핵심은 사띠지만 님이 사띠의 정의를 여러 가지로 사용함으로써 위빠사나의 의미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2)저의 체험은 동기와 전개가 님이 추정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며
3)술어의 문제는 소쉬르의 빠롤에 대해 일견해 보시기 바라고
4)저의 힌두적인 성향이나 성철의 주장에 대한 문제제기는 논문으로 해 주시기 바라는데
지나가다
2008-12-31 14:05:49
오매일여는 과연 가능한가/(불교평론 36호)에 단 저의 댓글......
그런 상태가 있습니다.
의식이 깬 상태로 꿈을 꿀수 있습니다.
또한 의식이 깬 상태로 깊은 잠에 빠져 있을수가 있습니다.

숙면상태에서 의식이 깨어 있으면 얼마있지 않아 본성을 알게 됩니다.
지나가다
2008-12-31 14:02:18
인상적인 구절....
삼빠자나는 앞의 경문을 통해 볼 때 사띠와 달리 일체의 신체적 행위에 대한 ‘생생한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즉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과 같은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생생한 깨어 있음이 그것이다. ‘잠자는 동안’에도 잠자고 있음을 아는 상태이어야 한다는 점은 특히 주목된다. 이는 삼빠자나의 상태가 얼마만큼 높은 성성(惺惺)한 지경의 선정 상태임을 말해 주고 있다 / 삼빠자나를 통해 본 사띠의 성격
지나가다
2008-12-31 13:57:33
조준호박사의 위빠사냐 수행에 있어 사띠는 무엇인가/(불교평론)를 읽으니...
제가 사띠와 위빠사냐에 대한 헤갈린것이 없는 듯한데요.
제가 어떻게 헤갈렸는지 지적 부탁드립니다.
지나가다
2008-12-31 13:37:44
불교에 대한 왜곡4
님은 반론을 하려면 개인적인 의견말고, 경전과 논서의 전거를 들라 했는데 그러하지 않으십니다.

저도 선문정로는 읽었습니다. 그걸 레퍼런스로 드시다면, 전 선문정로에서 불학적으로 문제소지가 있는 부분을 비판할수 있습니다. 특히 사중득활에 대한 성철스님의 견해는 비판할수 있습니다.
조준호박사는 알지 못합니다. 그분이 무엇이라 했기에 제가 훼갈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그분의 견해가 심히 궁금하군요...
지나가다
2008-12-31 13:17:48
불교에 대한 왜곡3
숫파니타파와 같은 고경에 속하는 경에 법구경, 자설경이 있습니다.

법구경에 삼법인이 나옵니다. 일체행고,제행무상,제법무아.
일체, 제행으로 한역된 빨리어는 sankhara, 이며 제법으로 한역된 것은 dhamma입니다.

자설경에서는 열반이 정의됩니다. "조건지어지지 않는것,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있다"

아함부경전에는 연기를 중도로 묘사한 경이 있습니다.

즉 불교술어등은 빨리어,산스크리트어 출전이 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31 12:46:39
불교에 대한 왜곡2
불성은 열반경에서 "제일의 공"이라 되어 있습니다.

아함부경전에는 "제일의 공경"이 있습니다.

그경에선 제일의 공이 연기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고로 오래된 경으로 숫파니타파가 있습니다.

학계의 일설에는 불멸후 50년경이 지나 형성된 경이나 하는데, 거기엔 12지연기의 원형이라 할수있는 연기법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31 12:32:02
불교에 대한 왜곡1
이경숙씨나 도올선생 두분은 대표적으로 불교를 왜곡시키는 분들이죠.
그분들의 불교에 대한 글은 불교를 아는 사람들은 잘못된것임을 금방알수 있지만
불교를 모르는 분들에겐 잘못된 불교관을 심어 주죠.

님의 댓글을 보면 님도 그분들 못지 않게 그런 위험성이 보입니다.
지나가다
2008-12-31 10:34:26
제기랄....
한국불교의 제일문제점이 뭔지 아십니까?

님과 같이 "힌두화한 불교"입니다.
지나가다
2008-12-31 10:09:32
저는 한국의 전통적인 선객입니다 5.
님의 본글과 댓글에서 제가 느끼는 것은 이런겁니다.
님은 체험을 우선으로 합니다. 자신의 체험을 경전구절과 꿰맞추어 가는 듯 보입니다.

불교수행이 무엇을 추가하는가를 폭 넘은 교학공부를 통해서 먼저 세우셔야 할것 같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마음이란 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념들은 평소와 같이 생멸] 상념이 마음이거든요....

님의 수행방향은 단어만 불교용어를 사용하지 실상은 힌두수행입니다.
지나가다
2008-12-31 09:37:39
저는 한국의 전통적인 선객입니다 4.
이런말 않하려 했는데...
님의 본글과 댓글의 글들을 읽어보면 님은 불교와 힌두교간의 차이를 모르고 있으면, 그뿐아니라 불교를 힌두교의 관점으로 파악하고 있소. 심하게 말하면 불교를 힌두화시킨다 말이요. 불교잡지에 그런글이 올라왔다 말입니다. 부처님제자인 한사람으로 그거 볼수 없었어, 이렇게 시간을 들려, 댓글을 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나가다
2008-12-31 09:24:24
저는 한국의 전통적인 선객입니다 3.
불교의 수행과 힌두교의 수행의 차이는 뭔가?
간단하게 말하면 불교의 수행은 마음의 작용양상을 알아가는 겁니다.
마음의 작용양상이 연기거든요.
힌두교의 수행은 경계를 추구하죠.

님이 경험한 그런 것은 단전호흡 수련해도 경험합니다.
소주천정도만 해도 19)번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같은 인간들이기 때문이요. 같은인간이기에 같은 조건이 되면 같은 정신적, 생리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지나가다
2008-12-31 09:14:46
저는 한국의 전통적인 선객입니다 2.
후대유식계열의 논서에는 이런류의 현상을 '무심'으로 표현하는데 님도 성철스님의 선문정로를 보셨으니 아시겠지. 유정무상처, 비상비비상처, 멸진정, 요 세가지는 쳐주지요.
님이 경험한건 이런게 아니지.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 다음구절(19번)을 보면 알지요.
님이 한 경험을 전 "사마타체험"이란 단어를 쓰지요.
지나가다
2008-12-31 09:03:33
저는 한국의 전통적인 선객입니다 1.
님의 글을 보면서 대충 어떤 경험을 해서 이런 견해를 갖고 있겠다 감을 잡고 있었지요.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님이 경험한게 무아가 아니거든요.

외부세계가 사라지고, 나도 뽕 사라지죠. 정신차려보니 그 사이를 알수가 없었겠지.
저는 이런거 길가다 경험한 사람도 알고 있지요.

님은 그런걸 멋지게 "마음이 사라짐"이라 표현하셨는데....
방경일
2008-12-31 03:02:02
지나가다님께 또 다시 답변드립니다!-6
18)지난 동짓날(2008년 12월 21일) 오전 중에 갑자기 마음이 사라짐을 경험하자
19)가슴에서 뭔가가 녹아내리더니 비할 바 없이 시원해 졌는데 하루가 지나자 그 기운에 배에까지 미쳐서 지금은 가슴과 배가 통으로 시원한데
20)아무리 찾아도 마음이란 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념들은 평소와 같이 생멸하는데 이는 불교의 수행과 힌두교의 수행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요~.~
방경일
2008-12-31 02:55:56
지나가다님께 또 다시 답변드립니다!-5
16)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불교의 입장에서 전체 불교를 회통해 보려는 님의 주장은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를 갖추고 있으니 여기 불교평론에 논문으로 실어도 될 것으로 보이며
17)님이 스스로 근본불교의 수행에 정통하고 상수멸정을 경험해 봤다고 하고 불교와 힌두교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다고 하니 저의 경험이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판별해 주실 것을 의뢰하는데
방경일
2008-12-31 02:48:04
지나가다님께 또 다시 답변드립니다!-4
13)성철은 구경각을 기신론뿐만 아니라 단경이나 마조어록 능가경 등 여러 경전과 논서 등의 핵심사상을 원용했으며
14)반야심경의 핵심은 반야의 지혜 즉, 공검으로 삼법인과 사성제, 12인연 등 근본불교의 핵심사상들을 모조리 참하다 못해 마지막에 주문으로 태워버렸으며
15)님은 사띠와 위빠사나의 의미에서 헷갈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부분에는 조준호 박사의 논문과 선사상에 실린 관련 논문들을 참조하시고
방경일
2008-12-31 02:35:51
지나가다님께 또 다시 답변드립니다!-3
9)이는 술어에 대해 어떤 빠롤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인데
10)님의 경우 불교의 술어(제법, 적멸 등)는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개인에게 동일한 빠롤을 가진다는 전재하에
11)근본불교의 용어들을 사용한 단경의 돈오의 의미를 근본불교의 적멸과 동일시하는 착각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12)이는 선문정로에서 성철이 멸진정의 적멸을 사로 보고 이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오는 사중득활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위배되며
방경일
2008-12-31 02:28:28
지나가다님께 또 다시 답변드립니다!-2
4)제2의 붓다, 8종의 조사라 불리는 나가르주나의 중론도 앞의 팔불중도게를 제외하면 나머지 전체는 희언이라고 보며
5)6조혜능의 육조단경의 내용도 돈오돈수를 제외하면 군더더기라고 보죠~.~
7)단경의 해당구절의 해석은 님처럼 할 수도 있지만 저처럼 해도 되는데
8)마치 도덕경의 최초 2구인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을 도올식으로 풀던
이경숙식으로 풀던 다 타당성이 있다는 보며
방경일
2008-12-31 02:20:46
지나가다님께 또 다시 답변드립니다!
또 다시 주신 고견 감사드리고~.~
1)님은 경전의 근거(문자적 일치)가 없으면 불교에 관한 어떤 주장도 허위라고 믿는 것이고
2)저는 일체중생이 실유불성이니 이치에 합당하면 경전의 자구는 무시해 버린다는 것이고
3)님은 니까야의 말씀을 자구 그대로 신봉하지만 저는 열반 후 수백년 뒤에 문자화된 니까야나 또 수백년 뒤에 만들어진 청정도론 등은 자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나가다
2008-12-30 03:39:13
답변이...20
님께서 제 견해에 반론이 있으시면 다음의 두가지로 나누어서 해주세요.
실참의 측면, 이론적인 측면
실참의 측면에선 자신의 경험한바를 바탕으로 반론이 있으면 해주십시요.
이론적인 측면에서 불경과 논소를 전거로 들어 주십시요.
저는 힌두교와 불교를 정확히 분별할수 있습니다. 불교이외 인도사상에 대한 것도 가능하면 직접 원전을 전거로 들어 주십시요.
지나가다
2008-12-30 03:30:17
답변이...19
경과 론에선 두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멸진정에 든 상태와 멸진정에 들었다 의식이 일어나는 첫순간 이두상태를 표현합니다.
멸진정에 든 상태: 어떤 정신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적멸, 공성에 입했다, 공(성),불공진여, 불공여래장, 법신, 원성실성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 무상, 무염, 공, 무주, 공진여, 공여래장,의타기성
지나가다
2008-12-30 03:18:55
답변이...18
비상비비상처에서 일어날때와 상수멸에서 일어날때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수멸에 들지 보지 않았으면, 비상비비상처에 들었다 일어난걸 가지고 적멸, 곧 모든 정신활동, 사띠까지 멸해버렸다고 착각할정도로 여따 무색계선정과 차이가 있습니다. 상수멸에 들었다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림해보면 그때 다르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상수멸, 멸진정에 든 상태에선 어떤 정신활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멸이라고 이름한겁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3:09:41
답변이...17
청청도론에서 인용한 괴멸을 관하는건 사띠수행이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 사마타수행을 주로 해서 괴멸을 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분별이 어려움이 있는 부분이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입니다. 멸하는 순간을 알아차림(사띠) 못하면, 그게 비상비비상처인지, 상수멸인지 모릅니다. 사마타수행을 하면 멸하는 순간을 알아차림 못합니다.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림 합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3:03:27
답변이...16
무색계4선은 각각 상태가 다르다는걸 분별할수 있습니다. 사띠란 기억과 사유입니다. 무색계선정에서 사마디상태에 들때에는 일상의 의식활동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띠라는 정신활동은 일어납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 상태를 기억하는 것은 사띠라는 정신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사띠수행을 중점으로 하는가, 사마타수행을 중점으로 하는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것 같습니다. 전 사마타 수행을 중점으로 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2:58:04
답변이...15
어떤 한대상에 집중합니다. 집중해 들어가면 의식상태가 변화는 걸 알아차릴수가 있습니다. 색계선정에선 대상을 떠나 의식이한경계가 되는데,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공통된것으론 그상태에서도 생각을 할수 있습니다.예를 들면 내가 빛이 되는데, 빛이 된상태에서 빛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색계선정에선 그상태에선 전혀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상의식상태로 돌아와서 그때의 상태를 기억합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2:44:38
답변이...14
[문자에 얽매인 교조주의적 태도를 버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문자에 얽매였다고 보십니까?
자 그러면.. 실제로 생상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띠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요건 "기억과 사유"의 의미를 갖습니다(쌍윳따에 전거있음)
수행방식에서 두가지가 있습니다. 집중과 사띠. 집중은 사마타, 사띠는 알아차림, 관입니다. 사마타 수행 과보로 사마디를, 사띠수행으로 위빠사냐의 얻습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2:36:43
답변이...13
갈애에 취착되면 조작이 이루어집니다. 조건지어진다는 겁니다. 형성된다는 거구요. 그게 업입니다. 갈애에 취착하는 건 왜 일까요? 무명하기 때문에...
여기서 설명하는게 무엇입니까? 집성제이지요... 틀림이 없습니다.
무원, 무작, 무주 줄줄이 무자가 붙었습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조건지어지지 않는다.
그게 열반입니다. 멸성제입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2:31:00
답변이...12
그다음 무원(무작)입니다. 반야경, 니까야 같고 육조단경은 무주입니다.
맛지나 140경이 전거가 될수 있는데, [有나 無를 조작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세계도 취착하지않아 취착이 없이, 걱정하지 않아 걱정이 없이, 각기 열반에 든다]
願은 갈애를 의미하고 作은 지음즉 조작을 말합니다. 그러면 住는 취착이겠지요.
논리가 되죠.
지나가다
2008-12-30 02:18:12
답변이...11
마음이 일어날때 생상 있음을 알수없어 생상을 알았다는 건 곧 무염을 말한다.
육조단경엔 무염을 종으로 하고... 서로 같은거죠.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견성을 설명한 다음 구절에서 시작됩니다.
상수멸에서 처음 일어날때 의식의 특징이 공(없음, 비움의 의미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무념이지요. 반야경의 공삼매, 무상은 육조단경, 반야경, 니까야 모두 같죠.
지나가다
2008-12-30 02:06:58
답변이...10
반야경의 삼삼매와 초기경의 멸진정의 처음일어나는 의식의 특징과 동일합니다. 이상하죠?

다음 구절은 육조단경에서 인용합니다.
[人性自有利鈍. 迷人漸契. 悟人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先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무염, 무상, 무주가 보입니다.
대승기신론의 구경각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爲無念]
지나가다
2008-12-30 01:42:51
답변이...9
반야경에는 삼삼매가 나옵니다. 空삼매, 無相삼매, 無願삼매입니다.
맛지마니까야 44경 교리문답의 작은 경입니다. [상수멸의 성취에서 나온 수행승 에게는 세가지 접촉, 즉 비움의 접촉(공촉), 인상없음의 접촉(무상촉), 바램없음의 접촉(무원촉)이 경험됩니다]

초기경에 적혀 있는 상수멸(멸진정)에서 처음 일어나는 의식은 공, 무상, 무원이라고 하고 있는데 반야경의 삼삼매가 공, 무상, 무원(無作으로 번역한것도 있음)
지나가다
2008-12-30 01:22:56
답변이...8
성철스님의 선문정로에서는 견성을 대승기신론의 구경각이라 주장했습니다.
구경각에 대한건 아래 소개 했습니다. 상속식의 생상을 알아차림하는거라 말했습니다.

[一念相應覺心初起 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 心卽常住 名究竟覺]
요건 직접 해봐야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이구절 얼마 뒤에 다음의 구절이 나옵니다.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爲無念]
이구절은 마명대사도 경험했음을 보여줍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1:10:19
답변이...7
육조단경은 그게 경입니까? 논서죠.
견성이 육조단경에 나옵니다. 견성이 어떤겁니까? 말이야 쉽지 성품을 보는거거든요.
님은 간단히 대답할수 있을것 같은데요. 무아는 종교체험해야한다고 하셨으니 견성도 종교체험하면 되겠지요.
견성에대해 논한 논문 알고 있으면 저한테 가르켜 주세요.
지나가다
2008-12-30 01:03:40
답변이...6
견성, 돈오돈수에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다, 왜냐 일체법이 적멸했는데 또 무슨 법을 세울것이며 늦고 빠름이 있다고 할수 있겠는가. 늦고 빠름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제법이 적멸한것이 아니다. 즉 견성한것이 아니다. 제 말에 모순점이 있습니까?

[문자에 얽매인 교조주의적 태도를 버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거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십시요. 경전구절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고서 어떻게 부처님가르침을 알수 있겠습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0:52:34
답변이...5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vs [自性自悟.頓悟頓修.亦無漸次.所以不立一切法;諸法寂滅.有何次第 ]

여기봅시다. 시생멸법이 일체법입니다. 일체법은 유위법입니다. 일체법은 무상합니다. 일체법은 시생멸법입니다. 이건 불교의 가장 기본인 삼법인중에 제행무상을 말하는 겁니다.
생멸법이 멸이한 것이 적멸입니다.
지나가다
2008-12-30 00:34:32
답변이...4
님의 인용에서 빼먹은 자성자오는 견성을 말하지요. 다시써 보겠습니다. [(자성자오)견성은 돈오돈수이고 점차가 없다. 그래서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다. 일체법이 적멸하는데 어찌 차례가 있는가?] 님은 경전에도 없는 말을 유추해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가 없다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분명하게 적혀 있는 구절을 읽고 견성은 [일체법이 적멸한 상태]를 말하는지 해석이 않됩니까?
지나가다
2008-12-30 00:24:41
답변이....3
제3에선 점차계합하는것과 돈수하는 건 사람성품의 차이때문이 견성하는데는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7의 돈오돈수와 제3의 오인돈수는 같은 의미이지요. 돈오돈수하니 역시 점차가 없으니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다. 일체법이 적멸하니 어찌 차제(점차)가 있겠는가?
이구절이 님말대로 [돈오돈수에는 차례로 닦음이 없다는 증거로 '제법이 적멸인데 어찌 차례가 있겠는가']입니까?
지나가다
2008-12-29 23:58:58
답변이....2
2) 선불교의 견성은 어떤상태를 의미하는가 하는건 불학적으로도 다룰만한 주제이니 이에 대해 가능한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육조단경을 인용합시다.
정혜일체제3에 [人性自有利鈍. 迷人漸契. 悟人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
남돈북점품제7에 [自性自悟.頓悟頓修.亦無漸次.所以不立一切法&#8728;諸法寂滅.有何次第 ]
지나가다
2008-12-29 23:42:22
답변이... 1
1) 경과 론소의 전거를 갖고 자신의 논점을 전개하시라는 의미를 아직도 알아들으시는것 같지 않군요. 님께서 하신 답변 대부분은 전거를 찾을수 없는 자신의 생각을 쓰셨습니다. 이 잡지가 전문학술지는 아니니까 님의 생각에 대해 일일히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방경일
2008-12-29 21:52:01
지나가다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7
20)그것을 금과옥조시 하면 필시 언어적 개념의 범주에 갇히게 되므로
21)강을 건너 가고, 건너 왔으면 짊어질 필요가 없으며
22)그것들을 짊어지고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구차제정을 다 닦았다고 열심히 뛰고 있어봐야
23)그러면서 상수멸정 혹은 멸진정을 증득했다고 떠들어 봐야 윤회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니
24)문자에 얽매인 교조주의적 태도를 버리셔야 하지 않을까요~.~
방경일
2008-12-29 21:45:18
지나가다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6
17)<무상,고,무아의 통찰이 선불교의 견성이다>는 님의 주장에 대한 육조단경의 근거가
<南頓北漸品第七>의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不立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라면
18)육조는 돈오돈수에는 차례로 닦음이 없다는 증거로 '제법이 적멸인데 어찌 차례가 있겠는가'라고 했지 님의 주장처럼 돈오가 적멸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19)니까야나 아함경은 물론이고 육조단경 등 경전이나 논서의 사상은 땟목에 불과하니
방경일
2008-12-29 21:30:11
지나가다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5
13)피안에서 차안으로 다시 넘어 오는 땟목으로 나타난 것이 중관, 유식, 법화, 화엄의 사상들이며
14)밀교의 사상은 언어로 할 수 있는 그 극한 즉, 즉신성불을 주장한 것이며
15)선종은 사상적 접근이 아니라 정신을 긴장시켜 유도한 직관을 통해 차안에서 피안, 피안에서 차안으로의 이동이 한 순간에 동시에 완성되는 것이니
16)여실지견을 유도하는 근본불교의 구차제정(위빠사나, 사띠 등)의 점차적 스타일과는
다르며
방경일
2008-12-29 21:21:02
지나가다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4
11)사실 그 가르침들은 출가자들 사이에 비밀리에 우파니샤드(무릎을 맞대고 하는 가르침)스타일로 전해오다가 대승의 조사들이 이를 경전화(공개)시켜 버리자 출가자들은 현재 니가야의 가르침에 안착했는데
12)힌두교측에서 이 틈을 노려 우파니샤드를 가져가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며(11)과 12)는 순전히 저의 추정인 바 전문가들의 문헌적 추적을 기대함~.~)
방경일
2008-12-29 21:12:47
지나가다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3
8)무상, 고, 무아에 대한 님의 전개는 현재 근본불교 학자들이 정통으로 받아들이는 매우 고전적인 것인데
9)그것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인도하는 땟목일 뿐이므로 나가르주나, 아르야데바, 아상가, 바스반두 등 일대 천재들이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중관과 유식을 내놓았는데
10)중론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들은 붓다에게 최상의 예를 표했으니 이는 니까야에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가르침들이 있었다는 것이며
방경일
2008-12-29 20:52:31
지나가다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2
5)천년 이상 같은 시공간에 머물면서 불교와 힌두교의 사상적 교섭이 없었다면 본다면
대단한 넌센스이며
6)현재의 힌두교의 가르침들을 용어를 바꾸어 치환하면 현재 한국 불교의 가르침들과 거의 맞아 떨어지는데(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이니 직접 한 번 시도해 보시죠~.~)
7)현재 힌두교의 핵심 철학사상은 불교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며
(베단따의 아드와이따 개념이 대표적이며 여기에는 도교적인 요소도 있음)
방경일
2008-12-29 20:45:19
지나가다님께 다시 답변드립니다!
다시 고견을 주셔서 감사드리고,
1)불교평론은 열린공간이라 논점의 일탈이 없으면 저 같은 학사의 글도 실어주고
(이 점에서 편집진에 대단히 감사~.~)
2)구전되던 불경이 문자로 정착될 무렵 힌두교의 문헌들도 문자화 되었을 것이라고 보며
3)그 결과 현재의 니까야에는 신층과 중층, 고층이 혼재하는데 바라문 문헌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보며
4)바라문교는 불교사상을 받아들이면서 힌두교로의 변신이 성공햇다고 보며
지나가다
2008-12-29 11:47:43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14
이제는 제가 무상,고,무아의 통찰이 선불교의 견성이다고 한것 이해하시겠습니까?

다른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불교란 단어를 붙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된게 이런 전문적인 불교잡지에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도 제대로 모르는 분의 글이 실리는지 불자로서 안타까운 마음 뿐입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1:41:39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13
그래서 청정도론의 괴멸를 관하는 괴멸지인 공은 대승기신론의 8식의 생상을 관하는 구경각입니다. 괴멸지의 공은 초기불교의 선정론으론 멸진정에 해당됩니다. 멸진정은 상온과 수온이 멸한겁니다. 그래서 상수멸이라고도 하죠. 괴멸지 공입니다.
육조단경을 잘 읽어 보시면.. 견성이 적멸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입능가경에 일심은 적멸이라고 나옵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1:34:00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12
위빠사냐는 최고의 통찰지입니다. 무엇을 통찰하는가 무상을 통찰합니다.
니까야에서... 형성되는것은 무상하다. 무상한것은 고이다. 괴로운것은 나의 것,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즉 무상,고,무아입니다.
상좌부에선 찰나무상으로 접근했고 대승에선 상속무상으로 접근했습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상좌부에선 표층에서 심층으로 대승에선 심층에서 표층으로..
지나가다
2008-12-29 11:24:46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 11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 열반경, 법화경, 니까야에서도 여러군데 나오는 구절입니다. 무상에 대해 아래에 설명했습니다. 생멸 2상, 생 주이 멸 3상, 생 주 이 멸4상입니다. 니까야, 아함부경전에 전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위구절은 생멸2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생멸멸이- 괴멸해버렸습니다. 그게 적멸입니다. 요아래 청정도론의 괴멸지를 관하는 걸 공이라 한다는 구절을 소개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1:09:02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10
청정도론에는 초월지의 항목에서 전생의 기억에 대해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색계4선의 마음을 관한후에 전생의 마음을 관하는 걸로 묘사되었던걸로 기억합니다. 한생만 보는 건 전생의 마음을 관한걸로 쳐 주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전생의 마음을 관하는 방식은 두가지로 일인칭적 관점에서 재경험하는 형태와 삼자적 관점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형태가 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1:02:28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9
윤회의 종교적 체험은 사마타수행으로 드러납니다. 니까야에서 선정론은 크게 세가지 형태로 등장합니다.한가지 형태는 색계4선, 삼명(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누진통은 사성제로 기술됩니다. 두번째는 색계4선, 육신통 세번째는 색계4선, 무색계4선, 멸진정 입니다. 숙명통은 전생에 대한 기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0:55:47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8
상속식의 생,주,이,멸상 관하는 건 구사론에서 유위법의 생,주,이,멸상을 논의하는 부분에서 이론적 배경을 볼수가 있습니다. 기신론소에서도 생,주,이,멸상을 관하는 법은 소승의 논사들도 그러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0:51:04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7
대승에선 대승기신론과 대승기신론소에서 볼수 있는데, 여기선, 상속식의 생,주,이,멸상을 관하는게 나옵니다. 생상을 관하는게 구경각, 주상을 관하는게 수분각, 이상을 관하는게 상사각, 멸상을 관하는 건 범부각이라 했습니다. 원효스님은 이걸 유식과 대비해서 설명했습니다. 생상은 8식, 주상은 7식, 이상은 6식의 드러남으로 설명합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0:30:56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6
먼저 無常에 대해서, 니까야, 아함부경전의 전거는 유위법은 생 멸(2相), 생,주이, 멸(3상), 생,주,이,멸(4상)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기술된것은 찰나생멸을 관하는것에 대한 겁니다. 과정이 설명되어 있는데, 처음은 멸하는 순간을 알아차림합니다.깊어지면 상속이 깨지면서 무상(생, 멸 혹은 생,주이,멸相)이 드러납니다. 괴멸지의 항목에선 멸해서 무너지는 걸 관하는데 이를 공이라 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9 10:18:39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5
4)무아와 윤회의 종교적 체험은 사마타와 위빠사냐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겁니다.
무아의 종교적 체험은 위빠사냐수행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무아의 통찰은 무상의 통찰을 의미합니다. 무상의 통찰방법은 상좌부에선 청정도론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대승쪽에선 대승기신론과 대승기신론소에서 볼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9 09:59:01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4
3) 불교의 무아와 윤회를 논하면서 전거로 불경을 들어야지 되는 거 아닙니까? 불교평론은 제법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잡지입니다. 거기에 올리는 글에서 주장하는 바를 뒷받침 하기위해 니까야 등 경전이나 논서등을 전거로 들어야 되는게 아닙니까? 니까야와 청정도론에 사성제, 고, 무상, 무아가 어떻게 설명되어 져 있는가를 보세요. 사성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자구적해석 그에 따른 이론에만 매달리지말라]??
지나가다
2008-12-29 09:44:38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3
2)마르치아 엘리아데는 서구에서 인도사상을 널리 알린 분중에 한분입니다. 그분은 요가도 직접수행까지 한분이구요. [브라흐마나]은 BC800~1000년으로 추정되는 문헌인데, 아트만-브라흐만 동일성의 개념이 나온다고 되어 있고, [바가바드기타] BC 4세기경 추정하고 있더군요. 불교의 니야가 성립연대가 얼마로 추정합니까? BC 2~3세기경 아닙니까?
지나가다
2008-12-29 09:29:37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2.
삼법인에 하나인 일체개고가 요가경에 나옵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공의 의미도 초기불교, 중관사상, 여래장사상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분석한 논문을 일본의 불학자가 적은걸 읽어봤습니다. 니까야에도 공이 나옵니다. 소공경이 대표적인 건데, 거기 공, 공성이 나옵니다. 대반야경에도 공이 나옵니다. 18공이 나오죠. 거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지나가다
2008-12-29 09:14:23
지금논의되고 있는 것은.... 1
1) 논의 되고 있는 주제는 불교의 무아와 윤회입니다. 님이 다루는 주제가 힌두교등 다른 인도사상에서 보는 윤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의 이외의 인도사상에서도, 무명, 윤회개념이 있습니다. 종교체험방식으로 사마타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우파니사드를 읽어 보면 명색이라 용어도 나옵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그게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것은 고통이다" 요가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방경일
2008-12-27 19:03:39
지나가다님께 답변드립니다!-3
8)"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윤회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명제가 성립하려면
님의 주장처럼 무명이나 갈애가 있어야 하지만 무아임을 체득하면 무명은 타파되고 갈애는 사라지므로 윤회는 종식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날 길은 없지요~.~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열심히 달리는 것처럼!!!
9)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과 선불교의 견성이 같다는 것은 님의 실수같군요~.~
방경일
2008-12-27 18:54:16
지나가다님께 답변드립니다!-2
4)레퍼런스가 주장마다 학자의 반드시 첨부될 필요는 없으며
5)힌두교가 불교의 사상을 흡수한 것이 인도불교 소멸의 한 원인이며
(예: 샹카라는 각각 힌두교의 첩자나 불교의 첩자로 오해받았음)
6)현재의 힌두교에는 무아, 공 등의 일부개념만 남아 있다고 보며
7)이런 관계는 향후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보며


7)
방경일
2008-12-27 18:46:57
지나가다님께 답변드립니다!
먼저, 고견 감사드리구요~.~
1)마르치아 엘리아데는 유명하기는 하지만 총론적인 견해를 가진 분이고
조준호 박사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각론적인 견해를 가진 분이니
2)조준호 박사의 저서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경서원, 2004년)(특히 p35~43)을
참조하시면 최신 정보를 접하실 수 있고
3)니까야의 자구적 해석이나 그에 따른 이론에만 매달리지 마시고
4)무아와 윤회의 문제는 종교체험에 관한 것이므로
지나가다
2008-12-27 11:30:07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본글에서는...

초기경에 나와 있는 고, 무상, 무아, 12지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가 보이지 않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개념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함이 드러납니다.
지나가다
2008-12-27 11:07:21
[5.종교체험의 필요성]....계속2
[무아에 대한 종교체험]에 대해...
무아에 대한 종교체험은 초기경에 의하면... 사마타와 위빠샤냐의 수행을 말합니다.
상좌부와 대승에서의 사마타-위빠샤나 수행관에는 차이가 있는데. 이를 논하기엔 엄청글이 길어지고 본글의 주제와 좀거리도 있어 생략을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마타-위빠사냐 수행을 통해, 무상,고, 무아의 통찰입니다. 이를 선불교에선 견성이라 합니다.
지나가다
2008-12-27 10:56:51
[5.종교체험의 필요성].... 계속1
잡아함경 제34권. 유아경(有我經)이 있습니다.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하는 제자]의 전거가 되는 경이 유아경을 말하는 듯합니다. 유아경은 쌍윳따니까야의 전거가 있습니다(제가 읽어보았는데, 찾기에 시간이 걸려 생략합니다).

사실,14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나, 유아경에서 나오는 내가 있는가의 질문은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가 없다는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입니다.
지나가다
2008-12-27 10:38:29
[5.종교체험의 필요성]
십사무기(十事無記)는 14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10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입니다.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경전이 있습니까?

십사무기의 전거는 중아함 221.전유경, 맛지마니까야I. 426-432.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경입니다. 10가지 질문입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14불가기(十四不可記),혹은 14난(難), 14가지 질문이 나오는 경전은 모르겠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7 09:51:08
[4.무아와 진아의 관계].....
이부분에선 본글의 필자는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나가다
2008-12-27 09:46:09
[3.윤회와 무아는 모순없이 양립할수 있다].... 계속3
인도의 정통6파철학에 불교는 속해 있지 않습니다. 즉 불교는 이단이란 소립니다. 미루어 추즉해 볼때, 아트만의 개념이 불교의 무아에서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 오히려, 아트만을 비판하는 개념으로 무아가 사용되었을 거라고 보는것이 타당성이 높아보입니다.

나를 오온으로 해체해서 살펴보는 방법이 사띠수행에 기본인데, 아트만이 상온과 행온이라도 이미 아래 댓글에 적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7 09:32:29
[3.윤회와 무아는 모순없이 양립할수 있다].....계속2
철학적 관념의 연대를 확정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요컨대 브라만교의 전통에 속하는 종교 및 철학분야의 문헌이 붓다의 시대보다 몇세기 뒤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거기에 나타나는 개념이 불교가 발전했던 시대에 와서 비로소 명확해졌다고 말할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학자의 레퍼런스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7 09:26:45
[3.윤회와 무아는 모순없이 양립할수 있다].....계속1
세계종교사상사의 제17장 브라만교와 힌두교(II권, 63~100p) 중에서 "사상의 역사와 문헌의 연대"를 논한 부분이 있습니다. 초기의 우파니샤드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문헌들이 붓다의 설교이후에 만들어졌음을 말하고 있지만, [연대의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될것이다. 인도의 거의 모든 철학론은 그것이 편집된 시대보다 훨씬 앞서는 오래된 개념을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지나가다
2008-12-27 09:15:08
[3.윤회와 무아는 모순없이 양립할수 있다].....
아트만-브라흐만 설은 문헌상에서도 부처님 이전에 나타났습니다.
마르치아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1. 제9장: 고타마붓다 이전의 인도(329~375p)에 보면...붓다출생 이전에 성립된 문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장에서 아트만-브라흐만의 동일성, 비드야,카르만, 삼사라 등이 다 나옵니다.
조준호님의 주장은 붓다이후의 문헌들만 참고문헌으로 보았을거라 생각되는데....
지나가다
2008-12-27 08:29:12
3)주장은.... 계속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윤회에서 벗어날수 없다"라는 명제도 성립합니다. 무명과 갈애를 소멸하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초기경에 의하면 그렀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멸성제에서 설명됩니다. 무명과 갈애의 소멸... 멸성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는 선언이 초기경에 나오는 겁니다.
무명과 갈애.. 탐,진,치입니다.
탐,진,치의 소멸 이를 열반, 해탈, 무위라합니다(쌍윳따니까)
지나가다
2008-12-27 08:17:59
3)주장은..... 계속
초기경에 의하면 업의 상속동력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사성제의 집성제에서 이를 설명합니다. 경에 나오는 전형적인 갈애는....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어리석기(무명)에 갈애에 집착하므로써 조건지어집니다. 그게 업입니다. 12지연기의 유가 되는 겁니다. 유는 오온입니다.
원래 불교에선 실체적 자아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지나가다
2008-12-27 08:00:31
사실 윗글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참고문헌이 빈약합니다.

[2. 무아 윤회는 궤변이다]...
1),2) 부분에선...
안옥선의 논문에서 인용한 불교 업보윤회설의 설명은 니까야와 아함부경전의 레퍼런스가 있습니다.
니까야에선 식의 증장으로 12지연기를 설명합니다. 식의 증장은 오온의 집적의 바탕이 됩니다. 업을 인격으로 본걸 뛰어난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3)주장은...
삼세12지연기를 이해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지나가다
2008-12-26 18:42:59
그래서...
불교에선 "무아"와 "윤회"는 서로 어떤 모순도 없는 개념을 담는 단어입니다.
지나가다
2008-12-26 18:38:27
초기경에선...
현명한 사람은 오온을 나다, 나의 것이다. 나의 자아라 천명하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상온을 상온이라고 알고, 행온을 행온이라고 알아차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건지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나가다
2008-12-26 18:32:21
요가행자들은
어떤삼매의 경계를 푸류샤 혹은 아트만(진아)으로 움켜집니다.
불교의 초기경에선 이렇게 움켜진 것은 내가아니다라고 하는게 "무아"입니다.

좀 자세하게 살펴보면... 삼매의 경계를 진아로 취한 거이므로 동일시하는 정신작용과 의도가 개입 됩니다. 동일시는 상온에 해당되고 의도는 행온에 속하는 정신작용이겠지요.
즉 형성력을 갖게됩니다. 조건지어 진다고 표현하는데, 이게 업이라는 거구요.
지나가다
2008-12-26 18:16:15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초기경(니까야, 아함부경전)에 의하면 무아는 간단합니다.
오온은 무아(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입니다.
무명과 갈애때문에 색,수,상,행,식을 나로, 나의 것이라, 나의 자아로 움켜지게 됩니다.
그래서 존재의 무더기(오온)가 지속되는 겁니다(윤회).
지나가다
2008-12-26 18:01:38
불교와 힌두교 분별할줄 모르고는....
마하라지와 마하리쉬는 기본적으로 베단타철학을 따르는 요가행자들입니다.
마하리쉬는 아트만을 마하라지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말했지요.
종교체험으론 요가의 무상삼매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무아는 공입니다(아함경)
멸진정에 든 상태입니다.
요가의 무상삼매는 무색계선정이지요.....
방경일
2008-12-24 20:20:05
이선생님께-답변을 마치며
1)이상의 견해는 모두 저의 사견이므로 틀릴 수도 있습니다-.-;;;
2)아함, 중관, 유식, 법화, 화엄, 밀교, 선 등 어느 입장에서 견해를 전개하더라도 붓다의 진의를 왜곡하면 안된다고 봅니다~.~
3)답변이 늦어 죄송하구요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_()_
방경일
2008-12-24 20:12:35
이선생님께 답변드림니다-3
6)윤회는 본래 없는 것이지만 아뢰야식(불성, 진여, 법성)이 스스로 구르는(전변하는) 것이므로 동시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7)따라서 우리는 윤회하는 무엇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 무엇이기도 합니다.
8)결국, 윤회할 것인가 윤회를 종식할 것인가는 본인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9)그러니 윤회를 즐기려면 우주가 다할 때까지 즐길 수도 있고(불매인과) 열반에 들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방경일
2008-12-24 20:04:02
이선생님께 답변드립니다-2
4)말라식이나 아뢰야식을 윤회의 근본주체로 삼을 경우
-말라식(유위의 마음)은 아뢰야식의 그림자임을 알고 아뢰야식(무위의 마음) 역시 생멸하는 것(자아가 없는 것 즉 무아)임을 알면 윤회는 종식될 것입니다.
5)아뢰야식이 생멸하지 않은 불멸의 근본원인이라면 이 근본원인이 스스로 윤회하는 것, 즉 윤회는 아뢰야식의 유희(게임)이므로 윤회는 하나의 가상현실에 불과하므로 그 진실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방경일
2008-12-24 19:57:27
이선생님께 답변드립니다
1)위 글은 무아윤회(무아이지만 연기한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깨기 위한 것(무아이면 연기하지 않는다)이 목적이므로 종자와 습기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유식도 결국 업력이 갈무리되는 장소로 아뢰야식을 성립시킨 것입니다.
3)업력은 선생의 결과이면서 후생의 원인이므로 업력 없는 윤회는 없습니다.
이종귀
2008-12-22 17:34:03
어째서 무아와 윤회를 말하면서 - - -
윤회의 근본인 종자(이숙식)와 종자가 아닌 습기(習氣)에 대해선 전혀 언급한 바도 없고 고찰하지 않았는지요? 만약 윤회의 근본 주체를 업의 집착이나 갈애가 아니라는 주장을 건립한다면 반론을 할 수 있는 이론으로는 어떤 것을 주장하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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