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경일 칼럼니스트

1. 들어가는 글

2008년 봄에 나는 지인과 함께 도봉산을 찾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앉아 점심도 먹고 그동안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지인: 70세까지만 살다가 가야지!
나: 우리의 황우석 박사님이 계시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언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지 모르는데 몸을 바꿔가며 한 3만 년은 살다 가야지!
지인: 고장 잘 나는 이런 몸으로 70세까지 살면 됐지 3만 년은 무슨…….
나: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안 봤어요? 그 주인공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몸으 로 바꿔서 계속 살면 되잖아요. 이 몸이 망가지면 정상적인 다른 생체에 기억만 옮 기면……. 잠깐, 이거 인간의 정체성이 ‘경험과 기억’이란 말인가?
지인: 그렇지?
나: 그럼 윤회는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거…… 붓다가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붓다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나의 의구심을 풀기 전에 <공각기동대(攻殼機動隊)>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보자. <공각기동대>는 오시이 마모루(押井守)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해졌지만 원래는 만화가인 시로 마사무네(士郞正宗)의 작품이다.

 과학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2029년의 일본이 무대인 이 만화(영화)에서는 주인공인 쿠사나기를 비롯해 전뇌화(電腦化)되고 의체화(醫體化)된 인간들이 등장한다. 전뇌화란 인간의 뇌와 컴퓨터가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의체화란 인체를 인간이 만든 몸으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쿠사나기는 어릴 때 사고를 당하여 몸 전체가 의체인 전신의체 인간이다. 전신의체이긴 하지만 최고급이고 쿠사나기의 강인한 의지로 인해 생체와 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이나 도약력 등등, 기능면에서는 훨씬 뛰어나다.

아무튼 테러 진압과 같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쿠사나기는 몸이 망가지게 되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똑같이 생긴 의체로 몸을 바꾸는데 이때 전신(前身)의 뇌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그대로 후신(後身)의 뇌에 전달되고 이를 통해 쿠사나기는 자아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몸을 바꿀 수 있으므로 결국 쿠사나기는 진시황이 그토록 바라던 영생불멸을 얻은 것이다.

쿠사나기가 몸을 바꾸는 것은 일종의 윤회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아정체성을 이어 가면서 몸을 바꿀 수 있다면 윤회는 고통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즐거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하는 복제기술이 일반화되어 한 인간이 경험을 통해 축적하는 모든 기억을 유지하면서 몸을 바꿔 갈 수 있다면 인생은 고해(苦海)가 아니라 낙해(樂海)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윤회는 근절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장려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신체적인 영생을 얻은 인간의 삶에 정신적인 번민이라는 변수를 대입한다고 해도 적어도 윤회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사실 물리적인 존재의 형태를 바꾸면서 경험과 기억을 전달하는 윤회 자체가 일종의 영생인데 우리는 붓다라는 눈먼 소경에게 이끌려 불구덩이나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다른 소경들이 아닐까? 과연 붓다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이런 불경스러운 생각은 ‘붓다의 육성으로 된 가르침에 뭔가 잘못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는데 해답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나는 2004년에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울산대 김진 교수에 의해 제기되어 일단의 불교학자들이 반박을 가한 ‘무아-윤회 모순론’에 대한 논쟁이었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는 김진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무아윤회’를 주창했는데 김진의 구상에 불교 쪽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동국대 윤호진 교수는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라는 그의 책에서 무아와 윤회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모순임을 주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무아와 윤회의 동시 주장은 모순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붓다가 가르침을 편 직후부터 시작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무아윤회라는 주장은 전적으로 궤변에 불과하지만 무아와 윤회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모순이기는커녕 무아와 윤회는 환상의 콤비처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진리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아-윤회의 모순을 주장하거나 그 모순을 극복하느라고 무아윤회를 주창(主唱)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모두 ‘전도된 몽상가들’일 뿐이다. 사고가 여기에 이르자 나의 뇌리에는 ‘거짓말을 한 이는 붓다가 아니라 이들 전도된 몽상가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과연 어느 쪽이 거짓말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아-윤회의 완벽한 진리체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 보자.

2. 무아윤회는 궤변이다

1) 무아윤회와 그 근거인 업보윤회에 대한 주장

무아윤회와 업보윤회는 안옥선의 논문인 <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안옥선은 무아이지만 윤회할 수 있는 것은 업이 있어 윤회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업이 의식과 갈애를 만나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때 업은 전신(前身)이 한 행위뿐만 아니라 행위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브라흐만-아트만 윤회설(브라흐만에서 나온 아트만이 브라흐만으로 돌아가면 윤회는 끝난다는 주장)'에서 윤회의 실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므로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것들이야말로 윤회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윤회를 성립시킬 수 있는 절묘한 착안물들이다.

잡아함(13권 335)에 있는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는 주장은 이런 관점을 잘 대변해 주는 표현이다. 따라서 업보윤회는 무아윤회를 성립시킬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되는데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명쾌한 해결책이다. 그래서인지 안옥선은 ‘무아와 윤회’라는 표현보다는 ‘무아의 윤회’라는 표현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이

안옥선의 논문에 의하면 불교의 업보윤회설에서 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업은 윤회의 출발점이다. 업보윤회의 기본구조는 전생의 생명체가 만든 업이 후생의 생명체를 통해 그 과보를 형성시키는 것이므로 업이 있으면 윤회가 있고 업이 없으면 윤회도 없다. 따라서 업은 윤회의 출발점이 된다.

둘째, 업은 의식과 명색을 만들어 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녔다. 12연기에서 행(行)은 식(識)을, 식은 명색(名色)을 있게 하는데 행을 업으로 보면 업은 식(의식)과 명색(육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으로 구성된 업이 비록 사고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브라흐만-아트만 윤회설에서의 아트만의 역할, 즉 의식의 배후에서 의식과 육체를 지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업보윤회에서는 업이 사실상 실체적 자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셋째, 업은 인격이다. 안옥선의 논문에서 주장하는 업의 주요 구성물인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의 총합은 사실상 인격(Personality)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업에 의해서 차례로 나타나는 A, B, C, D가 사람이라는 생명체라고 가정하면 A의 인격이 B에게 전이되고, A와 B의 인격이 C에게 전이되고, A와 B와 C의 인격이 D에게 전이되는 식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중간에 동물이나 식물, 곤충과 같은 하등 생물의 몸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경우에는 그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전생으로부터 넘겨받은 사람으로서의 특징들은 발현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이상의 특징들을 고려하면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증일아함(23권 310)에 있는 "나는 어디서 무엇이었으며 이름은 무엇이었던가?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았던가?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나고,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난 인연의 본말을 모두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한 붓다의 경우를 고려해 볼 때도 업이 비록 의식의 배후에서 명색을 장악하는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윤회를 하는 한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3) 업보윤회의 모순들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없다는 업보윤회는 자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순점들을 잉태하고 있다.

첫째, 업의 상속 동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윤회한다는 것은 윤회하려는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업의 구성물인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가운데서 어떤 것이 윤회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사고한다는 것이므로 이는 아트만과 같은 실체적 자아가 되어 버린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윤회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업과 만나는 의식과 갈애가 되어야 한다.

둘째,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는 어디서 왔는가? 불교의 업보윤회에서는 생명체가 사망하면 의식이 멸절된다고 하므로 앞의 생명체가 남긴 업과 결합하는 의식은 앞의 생명체의 의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갈애 역시 마찬가지인데 앞의 생명체가 남긴 갈애가 아니라면 이 갈애는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연기의 구조에 의탁하여 의식과 갈애가 업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업은 의식과 갈애를 생산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윤회의 주체, 즉 ‘실체적 자아’가 되고 만다.

셋째, 업을 만든 생명체와 그 과보를 받는 생명체의 상이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업은 금생에 받기도 하고 내생에 받기도 하며 혹은 여러 생에 걸쳐서 받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금생의 생명체가 죽고 나면 의식마저 멸절된다고 하므로 바로 다음 생이나 여러 생에서 그 과보를 받는 생명체들과 금생의 생명체와는 별개의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해 현생의 A라는 생명체가 만든 업의 결과인 과보를 A와는 전혀 다른 생명체인 B, C, D, E, F, G…… 등등이 받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즉,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는 자가 서로 다른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모순이 해결되려면 A, B, C…… 등의 생명체들을 연결하는 업이라는 것이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넷째, 동일성이 없는 연속성이 윤회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A, B, C, D, E, F, G…… 등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업이라는 연결고리로 인해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윤회의 선상에 있는 생명체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연속적인 자식은 부모가 윤회한 생명체가 되어야 한다. 윤회는 한 생명체의 죽음과 다른 생명체의 탄생을 전제조건으로 하는데 동시에 살아 있는 두 생명체를 윤회로 연결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므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윤회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이렇게 ‘동일성은 없지만 연속성이 있으므로 윤회가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우므로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섯째, 무엇으로 윤회를 벗어날 것인가? 만약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없다는 주장을 진리라고 인정하면 무아이지만 윤회한다는 명제도 성립하게 되지만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명제도 성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탐구조차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만다.

여섯째, 업보윤회는 철칙인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한다면 붓다나 아라한들도 모두 그들이 지은 업의 과보를 받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하거나 그들의 업이 다른 의식이나 갈애를 만나 생명체를 탄생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붓다가 선언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거짓이 되고 만다. 따라서 붓다의 주장이 진실이 되려면 업보윤회에는 예외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업보윤회가 철칙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런 모순점들로 인해 업보윤회는 무아윤회를 설립시키는 근거가 될 수 없으니 유일한 근거를 잃어버린 무아윤회는 성립할 수 없다. 결국 무아윤회라는 주장은 궤변인 것이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윤회할 아무것도 없다는 무아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아이면 윤회가 없으므로 무아윤회라는 말은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처럼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3.윤회와 무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1) 업보윤회의 성립 시기

업보윤회는 붓다의 출세 이전에 이미 그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불교에 의해 업보윤회가 성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보다 오랜 전통을 가진 자이나교의 경전에 "자제와 고행에 의해서 과거의 모든 업을 소멸하고 최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면 붓다가 설한 ‘업과 의식과 갈애의 결합’에 의해 윤회가 전개된다는 사고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업이 윤회의 동력인자라는 인식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조준호는 일반적으로 붓다 이전에 나타난 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전변설(轉變說:우주자아인 브라흐만(Brahman)이 세상을 만든 후 스스로 세상 속으로 투사해 들어갔다는 주장)과 범아일여설(梵我一如說: 개별자아인 아트만(Ātman)이 우주자아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될 때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주장)을 붓다 이후에 만들어진 사상으로 본다.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은 한 쌍의 잘 짜여진 진리체계로 볼 수 있는데 그 중간에는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합일하지 못하면 업보에 의한 재생, 즉 업보윤회를 계속해야 한다는 연결고리가 있다.

전변설 → 업보윤회설 → 범아일여설
<도표1. 전변설, 업보윤회설, 범아일여설의 관계>

여기서 전변된 아트만들이 업을 극복하고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브라흐만과 합일하는 것이다.

→예 → 윤회의 종식
Ātman → Brahman과 합일--
→아니오→윤회의 지속

<도표2. 범아일여설의 구조>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에 대한 조준호의 주장이 옳다면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 업과 윤회의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인데 이는 ‘원래 바라문교나 힌두교에는 업과 윤회라는 개념이 없었다.’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업과 윤회라는 인식은 바라문교나 힌두교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것이었으며 붓다를 비롯한 사문종교의 고유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현생에 만든 업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된다.‘라는 업보윤회의 사상은 카스트제도에 의해 고정된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브라만 계급에게는 일종의 위협이다.

따라서 바라문교가 힌두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사문종교의 업보윤회 사상을 흡수하였다는 가정이 타당성을 가진다면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은 불교의 탄생 이후에 성립된 사상체계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업보윤회라는 개념의 성립 시기가 붓다 이전이라면 윤회와 무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2) 붓다 깨달음의 핵심 내용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 크고 작은 성과를 얻은 사문 고타마가 우루벨라 숲의 보리수 아래서 성취한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의 가르침을 통해 추론해 보면 연기와 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체가 인연생기(因緣生起)한 것임을 말하는 연기는 독립되고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다는 무아임을 보증하는 것이므로 결국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의 핵심 내용은 무아인 것이다.

연기 ---보증---→ 무아
<도표3. 연기와 무아의 관계>

게다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 붓다의 출가 동기를 생각해 보면 무아가 사문 고타마를 붓다로 만들었다는 데 더욱 확신이 간다. 사문 고타마가 극심한 고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행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에서 오는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자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정을 통해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무아를 깨닫고 난 즉시 생로병사의 고통이 사라졌던 것이다. 생로병사를 겪는 자아가 없다면 생로병사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3)무아의 의미와 역할

(1) 무아의 의미

무아는 산스크리트로 'Anātman'인데 ātman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 an이 붙어서 형성된 단어이다. 여기서 문제는 ātman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점이다. ātman에는 재귀대명사인 자기 자신과 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Ātman)의 의미가 있는데 붓다는 과연 어느 의미를 부정하기 위해 접두어 an을 붙였을까? 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를 부정하려고 했다면 당시에 이미 우주자아와 개별자아의 개념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을 고타마 붓다 이후에 형성된 사상으로 보는 조준호는 무아가 Ātman(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 ‘일반적인 자아개념이나 영혼’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준호의 주장은 초기불교의 경전과 우파니샤드의 문헌들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한 것이므로 상당히 타당성이 높다.

필자가 조준호의 주장에 동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후에 힌두교에서 출현한 진아(眞我)라는 단어의 개념 때문이다. ‘The Self’라는 영어로 번역되는 진아의 원어는 바로 Ātman인데 개별자아인 동시에 우주자아로 볼 수 있는 이 진아(Ātman)의 개념이 불교의 무아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붓다가 주창한 무아의 의미를 ‘우리가 평소에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없음’이라고 정의한다.

무아의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무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붓다는 나를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해체하여 살펴봄으로써 무아임을 증명하는데 이는 ‘자아해체’를 통한 ‘자기소멸’이다. 다시 말해 무아라는 불교의 가르침에는 자아해체를 통한 자기소멸이라는 방법론적인 측면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무아의 역할

무아는 불교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윤회와 관련된 역할은 윤회의 고리를 끊게 하는 것이다. 윤회의 기본전제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의 경우에는 자아 즉, 윤회할 주체가 없으므로 윤회라는 법칙이 아예 성립할 수가 없다. 안옥선과 같이 업보윤회를 통해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사람은 윤회의 기본전제는 업이므로 자아가 없어도 윤회가 성립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업을 성립시키는 것은 오온으로 성립된 임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아이므로 자아가 없는 쪽이 보다 확실하고 완벽하게 윤회를 단절하는 것이다. 업보윤회의 발생 과정이 '자아→업→윤회'이므로 최초의 단계인 자아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발생하지 않아 윤회는 자동적으로 단절된다. 다시 말해 무아는 업을 발생시키지 않으므로 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윤회는 당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무아이면 윤회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아를 체득한 붓다라 할지라도 그의 임시 자아가 만들어 내는 업은 의식과 갈애를 만나 윤회를 성립시키게 된다. 만약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가 업을 만드는 생명체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붓다는 갈애가 없고 사후 그의 의식은 단절될 것이므로 그의 사후에 그가 만든 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윤회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불교 수행자가 아닌 누구라도, 나아가 무아를 깨닫지 못한 생명체라도 갈애가 없는 사람은 결코 윤회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반대로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붓다도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갈애를 없애는 것 외에 특별한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문제가, 후자의 경우 아무리 수행해도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가 각각 발생한다. 따라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무아이면 윤회는 없다’는 명제를 인정하는 방법뿐이다.

4)무아와 윤회의 관계

윤호진과 조준호의 연구를 통해 볼 때 윤회라는 개념은 고타마 싯다르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생명체가 죽게 되면 재생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고통인지 행복인지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하더라도 윤회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진리체계로 자리 잡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나중에 불교에서 받아들여 체계화한 것으로 보이는 업보윤회 역시 마찬가지다.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파악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를 단절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는데 무아를 체험하고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물론이고 생로병사의 원인인 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붓다가 제시하는 무아는 윤회의 주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윤회의 발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자내증이란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 무아임을 깨달은 사람은 현재의 생을 마친 다음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 무아는 윤회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의 진리체계인 것이다.

이렇게 발생의 순서로 보나, 종교적인 교리체계로 보나 무아는 윤회라는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므로 둘 사이에는 어떤 충돌이나 모순도 발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진리체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무시하고 무아와 윤회를 두 개의 독립된 주장으로 본다면 충돌과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4. 무아와 진아의 관계

사문 종교, 특히 불교의 융성으로 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 바라문교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다. 불교를 적대시하던 바라문교는 오히려 불교를 포용하면서 힌두교로 변신을 추구했는데 그 결과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고 힌두교는 인도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대의 종교가 되었다.

그런데 현재 붓다가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힌두교 사원에서 모셔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업보윤회나 무아와 같은 불교의 많은 가르침이 힌두교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진아가 바로 불교의 무아라고 본다. 달리 말하면 불교의 무아 개념을 힌두교가 받아들여 진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힌두교의 전통 속에서 탄생한 성자들은 진아(眞我)를 찾을 것을 주장했다. 남인도 따밀 지역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자로 활동한 라마나 마하르시(1879~1950)는 진아를 찾을 것을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자아탐구라는 방법은 선종(禪宗)에서 제시한 화두와 비슷한 방법이라서 일부 불교도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보다는 그가 제시한 진아라는 개념이 불교에서 주장하는 무아와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이야말로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라마나 마하르시는 진아를 찾고 나면 진아는 무(無)임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으니 그의 진아는 결국 붓다의 무아인 것이다.

북인도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자인 마하라지(1897~1981)는 진아라는 개념도 방해물에 불과하다며 곧바로 무(無)를 찾을 것을 주장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마하라지가 주장하는 ‘아(我)도 세계도 모두 없는 절대 무의 경지’는 바로 붓다가 주장한 제법무아의 경지인 것이다.

라마나 마하르시의 전법제자들도 불교의 가르침들을 사용했다. 안나말라이(1905~1995)는 스승처럼 진아를 통한 무아의 발견을 제시했고, 파파지(1910~1997)는 언제 어디서나 무아임을 가르쳤고, 락슈마나(1925~현재)는 무심(無心)을 통한 진아의 발견을 가르쳤다. 보다 특이한 점은 락슈마나의 전법제자인 사라담마(1959~현재)의 경우 최후의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에 일체는 대공(大空)임을 체득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불교의 주요 가르침은 힌두교의 중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힌두교의 성자들을 힌두교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붓다들이라고 본다. 하지만 근본불교주의자들은 이들이 진아를 주장한다고 해서 외도로 몰아 버리고, 화두제일주의자들은 이들이 화두를 주창(主唱)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이 낮은 단계의 것이라고 폄하해 버린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근본불교주의자들이나 화두제일주의자들이 진아나 무아에 대한 종교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진인이라고 불리는 라마나 마하르쉬나 마하라지 등에게는 진아는 유아(有我)가 아니라 무아이다. 하지만 진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 즉 종교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진아는 또 다른 하나의 개체아(個體我)일 뿐이다.
5. 종교체험의 필요성

불교는 종교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인 면으로만 접근할 경우 가르침들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무아와 윤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붓다는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제자나 14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제자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붓다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아를 직접 체험하면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런 종류의 질문은 스스로의 종교체험을 통해 해결될 문제이지 남이 주는 대답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진이 무아와 윤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칸트의 요청이론을 적용한 것은 신선한 발상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무아에 대한 종교적인 체험, 즉 자내증이 없는 상태에서 관념론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무아와 윤회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는 진리체계이므로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김진의 해결책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굳이 칸트의 요청이론을 적용하자면 윤회 문제의 해결에 대한 요청으로 무아가 제시되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김진의 주장에 반대해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불교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들이 무아에 대한 종교체험을 했다면 무아윤회와 같은 궤변을 주창(主唱)하지는 못한다.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붓다의 직설로 알려진 니까야의 내용을 절대시하는데 이런 교조주의적 태도는 붓다의 진의를 알아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예를 들어 이들은 삼법인을 ‘제행이 무상하니 고이고, 고이니 무아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고가 아닌 것은 무아가 아니다.’라는 말인가? 자체모순을 내포하게 되는 이런 해석을 니까야에 실려 있다고 해서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무아와 업보윤회가 모두 니까야에 실려 있다고 해서 무아윤회를 주장하거나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나서 ‘홀로 고요한 곳에서 깊이 생각해 보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하라.’는 붓다의 교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폐쇄적인 교조주주의적 시각이 아니라 종교체험에 근거한 개방적인 시각으로 볼 때 사법인(四法印)은 붓다 교설의 핵심이다. 붓다는 자신을 포함한 세상이 선험적으로 연기하는 존재임을 통찰하고 제행무상을 깨달았으며 연기하는 존재인 나(我)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경험함으로써 제법무아를 깨달았다. 시간의 경과를 전제하고 있는 제행무상을 시간 축으로 하고 존재의 무화(無化)를 전제하고 있는 제법무아를 공간 축으로 한다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진리체계가 만드는 세계에서는 생로병사의 고통, 즉 윤회는 사라지고 열반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유상(有常)과 유아(有我)가 만드는 세계에서는 열반은 없고 생로병사의 고통, 즉 윤회만 있을 뿐이다.


제법무아
(공간축)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는
열반의 세계


----------------------------아(我)----------------------------------
제행무상(시간축)

생로병사의 고통이 있는
윤회의 세계


<도표4. 사법인의 진리체계>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원점에 서게 된 아(我)는 잘 생각해 보고 붓다가 제시하는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윤회의 세계에 머물 것인가를 선택하면 된다.

사법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12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12연기 체계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업이 없으면 행(行)과 그 이후의 단계가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을 없애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행, 즉 업이 발생하고 결국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무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무명은 ‘무아를 체험하지 못한 상태’이다. 개아가 자기해체를 통한 자기소멸, 즉 무아를 체험하게 되면 무명은 명이 되므로 다음 단계인 행(업)과 이후의 단계들은 발생하지 않게 되어 생로병사의 고통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종교체험은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니까야의 내용을 신성시하는 교조주의적인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니까야가 문자로 작성된 시점은 붓다가 열반하고 500년 정도 지났을 때인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붓다의 말씀이 구두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삭제나 수정이 되었을 것이란 점이고 둘째는 전달자나 기록자의 의도에 의해서 변형이나 편집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4법인과 12연기의 경우만 봐도 니까야의 내용은 순일 무잡한 붓다의 가르침이 아닐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필자는 니까야의 자구에 얽매인 교조주의적인 해석은 중지되고 나아가 폐기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불교학자들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니까야의 내용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종교체험에 근거한 재해석을 통해 붓다의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6.나오는 글

붓다는 무아를 체득함으로써 스스로의 윤회를 단절했으며 무아를 가르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무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했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무아와 윤회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아와 윤회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진리체계다.

무아와 윤회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무아와 윤회를 각각 독립적인 하나의 이론으로 파악하는 전도된 몽상가들의 착각일 뿐이다. 교조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 전도된 몽상가들은 윤회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무아가 제시된 것은 감안하지 않고 무아와 윤회가 모두 니까야에 실려 있는 점만을 감안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아와 윤회는 항상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들은 결국 ‘무아윤회’나 ‘무아와 윤회는 모순이지만 수용할 수밖에 없다.’라는 해괴한 해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거짓말은 붓다가 한 것이 아니라 이들 전도된 몽상가들이 한 것이다.

김진의 문제제기로 인해 무아와 윤회의 모순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을 때 “깨달음의 경험으로서만 궁극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것을 두고 ‘모순이다’, ‘아니다’라고 논쟁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한 조성택 교수의 주장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으로 불필요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붓다 가르침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다.

 불교는 철학이기 이전에 종교이므로 종교체험 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니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불교 교학을 배우는 동시에 종교체험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미로를 헤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붓다들을 비방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필자가 경험한 종교체험의 관점에서 볼 때 힌두교의 진인들이 주장하는 진아의 존재양식은 무(無)이다. 따라서 진아는 붓다가 가르친 무아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붓다가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냉혈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종교체험을 강조한 붓다는 열반할 때조차도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이룰 것을 당부했다. 이는 불교도들에게 스스로의 종교체험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경험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격이 방사하는 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웬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도 종교체험을 하기는 어렵지만 붓다는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 붓다의 이런 태도는 화두를 던져 주고 나서 깨닫고 못 깨닫고는 전적으로 제자에게 맡겨 버리는 선종의 스승들이 취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종교체험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또, 윤회를 단절해야 할 고통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지속해야 할 즐거움으로 볼 것인지도 역시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선택에 앞서서 최소한 무아와 윤회의 가르침에 관해서는 불교도이건 비불교도이건 명심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방경일
1987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89년 불교방송 조사기자. 1991년 MBC <PD 수첩> 조사역. 1992년부터 칼럼니스트와 저술가로 활동 중. 저서로 《선사들의 삶 과 깨달음》, 《마음을 밝혀주는 60가지 이야기》, 《전두환 리더십 노태우 처세 술》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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