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기획특집
     
종교문화로 본 육식과 채식
류제동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원
[36호] 2008년 10월 10일 (금) 류제동 tvam@ggu.ac.kr

1. 들어가는 말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 광우병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채식의 긍정적 가치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이는 물론 주로 건강상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는 종교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세속적 차원에서의 상황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이 세속적 차원과 별개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인들의 생활 전반에 대하여 일종의 규범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상황에 있어서도 모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채식을 하게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건강상의 이유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지닐 수 있겠지만, 전통적으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리고 그 전통이 관습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히 영양학적 가치로는 먹어도 별 지장이 없는데 종교적 터부로 인하여 먹지 않게 되는 것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건강상의 가치만으로 살기가 어려운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추구하는 것이 매우 복잡한 존재이다. 개체의 보존과 종의 보존, 자신의 유전자의 보존 외에도 추구할 것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그 추구는 이 지상에서의 온갖 것에 대한 추구를 넘어서 무언가 이 세계를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추구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모든 추구가 달성된다고 해도 그러한 초월적 추구가 성취되지 않는 한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초월적 추구가 다른 모든 세속적 추구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초월적 추구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추구로서 다른 모든 추구를 그 하위에 둘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육식과 채식에 관련하여 그 종교적 추구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세계적 종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그리고 도교에서의 채식 선택 논거를 살펴보고, 오늘날 불교에서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필자의 고민을 간략하게 제시해보고자 한다.

2. 유대교

유대교는 그 신자 수는 다른 세계종교들에 비해서 매우 적다고 할 수 있으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와 그에 버금가는 이슬람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세계종교를 거론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종교이다.

유대교에서 채식의 근거는 그리스도교에서 구약 성서라고 불리는 유대교의 성서의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이야기된다.

하느님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 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유대교에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자 통치자로서 하느님은 애초에 사람들을 채식주의자로 의도하셨다는 것이다. 유대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서주석학자로 이야기되는 라시(Rashi, 1040-1105)는 이 부분의 주석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피조물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오직 푸른 풀만이 그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전부였다고 풀이하며, 이러한 평가에 대하여 랍비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Rabbi Abraham Ibn Ezra, 1092-1167),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5-1214), 나흐마니데스(1194-1270), 그리고 랍비 요셉 알보(-1444)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서 주석학자들이 동의한다. 특히 나흐마니데스는 이러한 태초의 식사 규정의 근거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 사이의 친연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살아 있는 피조물들은 영혼과 일정한 영적 탁월성을 지니고 있어서 지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간)와 유사하며, 스스로의 안녕을 돌볼 능력을 지니고 있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달아난다.

15세기의 유대교 철학자 랍비 요셉 알보는, 동물들을 죽이는 데에 있어서 잔인함과 분노가 있고, 무고한 피를 흘리는 악한 습관에 스스로를 길들이게 된다고 덧붙인다.

유대교 성서에서는 사람들이 채식을 준수해야 한다고 서술한 뒤에 동물들마저도 서로 잡아먹지 않고 순수하게 채식에 의존하여 살아가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유대교와 채식주의에 관한 오늘날의 저명한 연구자인 리처드 슈워르츠(Richard H. Schwartz)는 나흐마니데스의 주석을 참조하면서, 성서의 창세기에서 대홍수 뒤에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여, 육식을 허락하는 것이 대홍수 이전과 이후에 인류의 수명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설명해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대홍수 이전에는 900 세를 넘기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홍수 이후에는 가령 아브라함 같은 사람도 175세를 넘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옛날에 900세가 되도록 실제로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고대 유대인들의 육식과 채식에 대한 태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유대교에서 널리 사랑과 존경을 받은 영적 지도자였던 랍비 아브라함 이삭 하코헨 쿡(Rabbi Abraham Isaac Hakohen Kook, 1865-1935)은 육식에 대한 허용은 단지 일시적인 양보였으며, 모든 피조물들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잡아먹기 위하여 동물을 죽이는 것을 영원히 허락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동적 이상의 진보가 영원히 방해받는 일은 없다. 전반적인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진전을 통하여 … 시기가 무르익으면 동물 왕국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잠재적인 열망이 공공연하게 될 것이다.

3.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에서의 채식주의는 앞에서의 유대교에서의 근거와 더불어 예수의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적용하는 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채식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드는 성서적 근거는 마태오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다음과 같은 언명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다만 그리스도교 채식주의자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더러 공격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의 서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에 근거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 들이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나는 무엇이든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더럽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고 또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음식 문제를 가지고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음식 문제를 가지고 형제를 망쳐 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러나 채식주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리처드 앤절린(Richard Angelin)은 이 부분이 아무 것이나 자유롭게 먹어도 좋다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먹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없는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말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 다른 채식주의 그리스도인 키쓰 에이커스(Keith Akers)는 이 부분에 대하여 바울의 입장이 채식주의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반드시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하지만 바울의 방식을 따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많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고, 구약의 율법을 뒤집어엎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키쓰 에이커스의 입장이다.

심지어 일부 채식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서 예수가 물고기를 먹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물고기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신비적 상징이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성서의 관련 본문들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교회의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채식을 권고하면서 “여러분들의 몸이 동물들의 무덤 노릇을 하게 하는 것보다는 행복하게 사는 것[채식하면서 사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형제인 동물들을 해치지 않는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첫째 의무이지만, 거기에 그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높은 사명이 있으니, 그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자비와 동정으로 보호하는 범위에서 하느님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제외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대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상에 사는 사람이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철저한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라서 성 프란치스코의 언명을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해버릴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 언명을 따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아주 뚜렷하게 동물에 대한 자비를 호소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4. 이슬람교

이슬람교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유대교의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을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의 특별한 일부로 간주해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의 성서인 『꾸란』에서 동물의 특별한 위치에 대하여 자주 인용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대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새들은 날개를 펴 찬미하고 있음을 그대는 보지 못하느뇨. 모든 것은 제 스스로 경배하고 찬미함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

땅위에 걷는 동물도 두 날개로 나는 새들도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일부라 그 성서는 빠뜨림이 없으니 그들 모두는 종말에 그들 주님께로 불리어 가노라

이슬람에서 동물들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이며, 하나님도 그들의 찬미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에서 적극적으로 동물들이 ‘공동체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유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동물에 대하여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부분이 명백히 있기는 하지만, 동물의 고기를 먹어도 죄악이 되지 않는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도 하다.

일러 가로되 내가 말씀으로 계시를 받은 것 가운데서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고기를 제외하고는 먹고자 하는 자가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을 발견치 아니했노라. 그러나 필요하여 또는 알지 못하여 금지된 것을 먹었을 경우에는 죄악이 아니거늘 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은혜로 충만하심이라.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육식을 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아니라고 채식 무슬림은 이야기한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오늘날 동물들의 사육환경의 비참함에 대하여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채식 무슬림의 관점이다.

닭들은 달군 쇠로 부리가 절단되고, 소들은 뿔이 절단되며, 거세되고, 낙인이 찍히고, 꼬리가 마취 조치도 없이 잘려진다. 젖소는 작은 우리에 갇혀서 인공수정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임신된다. 공장식 농장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공장식 농장의 과밀 사육은 많은 동물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하며, 그러한 스트레스로 인해 스스로의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등 자해행위를 하게 한다. 또한 그러한 과밀 조건하에서 만연하는 질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농부들은 주기적으로 농약을 살포하고 항생제를 주사한다. 그리고 빠르고 저렴하게 살을 찌우기 위해 성장 호르몬도 주사한다. 이러한 약품과 화학물질의 잔존물은 그 고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전이된다.
이러한 관행은 도살되기 전의 동물에게 어떠한 고통도 가하지 말라는 예언자[무함마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동물 사육을 막는 길은 채식이 최선이라는 것을 채식 무슬림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언자께서 가르치신 동물에 대한 친절이나 꾸란에 서술되어 있는 동물들의 특별한 지위는 현대의 식용 동물 사육 기법에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철저한 채식을 택하는 것(고기뿐만 아니라 유제품이나 달걀도 없는 식단을 선택하는 것)만이 무슬림에게 있어서 이슬람의 윤리와 환경과 건강에 관한 계율에 따르는 삶을 사는 가장 편안한 길이다.

5. 힌두교

오늘날 힌두교에서 채식이 일반적으로 권장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원래부터 힌두교가 채식을 주장해왔는가, 그리고 채식과 관련하여 불교와 자이나교의 힌두교에 대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힌두인들은 대부분 그러한 논란 자체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전통이 줄곧 채식주의를 옹호해왔다고 보고 있다. 경전적 전거를 베다에서부터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는 신이 주신 몸을 사용하여,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 무엇이든 신의 피조물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어떠한 살아 있는 존재도 죽이지 않음으로써, 사람은 구원에 적합하게 된다.

고기를 구매하는 자는 자신의 재산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고기를 먹는 자는 자신의 미각을 즐기면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죽이는 자는 실제로 동물을 묶고 살해함으로써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곧, 세 가지 형태의 살해가 있다. 고기를 가져오거나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보내는 자, 동물의 사지를 절단하는 자, 고기를 구매하거나 판매하거나 요리하거나 먹는 자 - 이 모든 이들은 고기를 먹는 자들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의 피조물로서의 동물에 대한 배려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기를 직접 먹는 자만이 아니라, 동물을 죽이는 자나 매매하는 자 모두 한 통속이라는 것을 뚜렷이 적시하고 있는 데에서 힌두교에서의 채식 권고가 매우 엄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힌두교의 바이블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힌두교의 최고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과 헌신으로 잎이나 꽃이나 과일이나 물을 봉헌한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힌두 채식인들은 여기에서 봉헌되어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전적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신에게 음식을 기꺼이 봉헌하는 사람들은 온갖 죄의 응보로부터, 그리고 물질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풀이하면서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바가바드 기타』의 언명을 제시한다.

주께 헌신하는 자들은 먼저 제사에 봉헌된 음식을 먹기에 온갖 죄로부터 해방된다. 개인적인 감각적 향락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다른 이들은 실로 죄만을 삼킬 뿐이다.

현대 인도의 위대한 인물 간디는 또한 인도에서의 각별한 암소 보호와 연관하여 동물 보호의 실천적 차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암소를 구하기 위한 힌두교도의 노력 배후에는) 불살생이라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다른 표현으로 보편적 자비심이라고 알려져 있다. …… 암소는 내게는 인간 이외의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 …… (따라서) 좀 더 섬세하고 정신적인 의미에서 암소 보호라는 단어는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의 보호를 의미한다. …… (그리고) 암소를 보호하는 힌두교도는 다른 동물도 모두 보호해야 한다.

6. 유교

유교에서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채식이나 동물 보호에 대한 주목이 덜 하다는 지적이 있곤 한다. 유교에서 일반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오륜에 있어서도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형제(兄弟), 붕우(朋友)의 관계 곧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이 언급될 뿐이어서, 유교는 인간중심주의에 국한된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특히 논어에서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씀은 동물애호가들에게는 달갑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로가 매월 초하루를 고하는 제사에 드리는 희생양을 폐지하려 하였다.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그 양을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예(禮)를 애석하게 생각한다.

분명히 공자는 양의 희생보다는 예(禮)의 준수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 또한 동물에 대한 배려를 않고 있는 공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구간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오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다쳤는가?” 하시고, 말에 관하여는 묻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온 로드니 테일러(Rodney L. Taylor)는 그러한 생각이 편협한 생각이라고 비판하면서 유교에서도 천(天)이 궁극적인 종교적 권위의 원천이며 천리(天理)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동물들뿐만 아니라 식물들에게도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이야기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곧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근본적 유사성을 긍정하는 가르침이기에, 유교는 단순한 인간중심주의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는 위의 인용문들보다는 동물애호적인 공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스승께서는 낚시질을 하시되 그물질은 하지 않으셨으며, 새를 잡으시되 자고 있는 새는 노리지 않으셨다.

이러한 공자의 모습에 비해서 맹자의 모습은 보다 더 채식주의자들의 입장에 가깝게 해석될 소지가 있는 듯하다. 맹자는 그 저서에서 양(梁) 나라 혜왕(惠王)과의 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은 호흘의 말을 들은 일이 있으니, 왕께서 당상에 앉아 계시는데, 소를 끌고 당하로 지나는 자 있더니 왕이 보시고 말씀하시되 “소는 어디로 가느뇨?”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 소는 종에다 피를 바르려는 것입니다.” 왕이 말씀하시되, “내버려 두어라. 그 소가 무서워하며 무죄한 것이 죽을 곳에 나가는 듯함을 차마 못 보겠노라”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러면 종에다 피바르는 것은 그만둡니까?” “어찌 그만두리오, 양으로 바꿔서 하라”고 말씀하시사 그런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면 족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으리이다. 백성은 모두 왕께서 소를 아까워한 것이라고 합니다만 신은 정말 왕께서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압니다.

맹자는 소가 죽을 곳에 나가는 듯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는 왕의 심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맹자의 태도는 유교에서, 특히 신유교(新儒敎)라고도 불리우고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 지배적인 이념이 되는 성리학(性理學)에서 핵심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맹자는 이어지는 부분에서 또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군자란 금수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서는 그것들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를 못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는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주방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훨씬 더 명확하게 채식주의자들의 입장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이슬람 부분에서 언급되었듯이 오늘날 동물들의 사육 상황을 고려할 때 맹자와 같은 심성을 가진 유교 신봉자라면 채식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7. 도교

도교에서 채식이 중시되게 된 것은 불교의 영향이라는 설이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도교 자체에도 채식을 택하게 하는 근거가 상당히 있다. 우선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장자(莊子)의 동명의 저서 『장자』(莊子)에는 동물들에 대한 우호적 우화가 상당히 많이 실려 있다.

“내 들으니 초나라에는 신구(神龜)가 있어서 죽은 지 삼천년이나 되었는데,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서 묘당 위에 간직해 두었다 하네. 그러면 그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중히 여겨지기를 바랐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기를 바랐을까요?” 두 대부(大夫)가 대답하기를, “물론 살아서 흙탕에서 꼬리를 끌기를 바랐을 것이오.”

『장자』에서의 이러한 일화들에 대하여 도교 연구자 정혜성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일화들은 물론 동물에 빗대어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장자가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각자가 처한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서 각자가 가진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약자나 동물에게까지도 적용되는 것이다.……

장자의 일화는 오늘날의 동물 해방론자들의 논의와도 상통하는 면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동물이 힘이 약하거나 능력이 모자란다고 해서 더 센 자가 함부로 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만물은 각자가 자기 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새에게도 거북에게도 돼지에게도 해당한다. 이들 또한 피터 싱어의 주장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며 탐 리건이 말한 것처럼 ‘삶의 주체’로서 각자의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혜성은 장자의 주장이 단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동물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뚜렷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에는 돼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우화도 실려 있다.

어떤 제축관이 제복을 입고 돼지막에 나아가 돼지에게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죽기를 싫어하는가? 나는 석 달 동안이나 너를 잘 먹여 길러서 열흘 동안을 계하고, 사흘 동안을 재하고는 흰 띠풀을 깔고 그 위에서 너를 잡아 네 어깨와 꽁무니를 예쁘게 장식된 그릇 위에 차려 신에게 제사하려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한다면 돼지를 위해 생각하는 사람은 “등겨나 찌꺼기를 먹고 돼지 울안에 갇히어 있더라도 사는 것이 낫다”고 할 것이다.

이 우화는, 사람들이 아무리 동물 사육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동물을 죽여서 잡아먹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발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8. 오늘날 불교에서 채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불교에서 채식은 앞에서도 잠깐씩 언급하였지만, 다소의 논란은 있지만 불자들만이 아니라 힌두교 신자들이나 도교 신자들의 채식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불교가 채식을 어느 정도로 권장하고 있는가는 다소의 논란이 있다.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다양한 입장의 변화가 관찰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역사적 붓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비교적 초기의 경전에서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되기도 하지만, 초기 경전 자체의 연대 확정 문제 등도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어서 쉽게 해결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물론 앞에서 다룬 종교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심스럽게나마 필자의 입장을 정리한다면, 불교는 무조건적인 채식을 규정하는 종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채식을 할 것을 권하는 종교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저명한 불교학자 슈미트하우젠(Schmithausen)은 인도에서 행해진 걸식의 전통에서는 살생과 식육의 문제를 분리시켜서 보았다고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걸식을 행할 때에는 설령 고기를 먹는다고 할지라도 몸소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살생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걸식은 살생과 분리되어 이루어질 수 있고 따라서 육식에 부과되는 죄를 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슈미트하우젠의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서재영은 이같은 논리가 식육을 살생의 문제에 국한시켰을 때에만 성립된다고 제한하면서, 식육 자체가 분노와 욕망을 자극해서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탁발된 고기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새롭게 문제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서재영의 입장에 대해서도, 과연 고기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수행에 방해되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지만, 서재영의 입장은 불자로서 걸식으로 받은 음식이라고 해서 고기를 자유로이 먹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생각해볼 것을 요청하는 의미가 확실히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각도에서는 불교의 역사 내에서 육식에 대한 관점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우리가 취해야 할 당위적 입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경전에서의 전거들 가운데 일부는 영원불변한 보편적인 언명으로 보기보다는, 그 시대와 상황에 적합한 것으로 제한해서 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 있어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불교의 첫째 계율이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것이다. 상황이나 여건이 허락되는 한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는 것이 불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공장식 사육이 보편화되어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탁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음식의 유통 과정을 의식하면서 탁발을 하는 것이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더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서, 이러한 맥락에서 문제를 고려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것이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죽음의 밥상』의 번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술회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얻는 결론은 결국 베건, 즉 고기는 물론 동물성 식품을 아예 먹지 않는 것이 최고의 윤리적 먹을거리 선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든 동물성 영양소가 식물성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해도, 그러려면 상당히 정교한 식단 선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식단 선택이 가능한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얼마 안 된다. 저자들은 베건 가족의 예로 파브 부부의 식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부부의 높은 생활수준, 재력과 시간의 여유가 왠지 눈에 밟히는 사람은 나뿐일까?

이러한 번역자의 고민이 채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교한 식단 선택을 하는 데 있어 다소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고민으로 느껴진다. 특히 채식문화가 오히려 서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보편화되지 않고 정말로 상류층의 문화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라고 여겨진다. 채식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해결해나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실질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류제동
서강대 종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원. 저서로 《하느님과 일심》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 이야기》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의 종교 종교의 사람》 등이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