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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정치학과 사회학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36호] 2008년 10월 10일 (금) 이도흠 ahurum@hanmail.net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1. 두 세계의 전장에서


꿈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꽃을 가꾸고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살아갔다. 이곳에 지도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고 그를 달성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가 사람들을 이끌었고, 사람들은 지도자를 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지도자 또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나 신, 자연과 더욱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뇌할 때를 빼고는 항상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고 무슨 일이든 모여서 이야기를 하여 정하였다. 사람들은 꽃을 키웠고 별을 바랐으며 그만큼 삶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했다. 밭 갈다 남는 시간일랑 모여 앉아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고 만들려 하였다.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풀과 곡식을 주로 먹었고 간혹 사냥을 하긴 했지만 신이 그들에게 보내 준 짐승만 잡았고, 모든 생명들이 자기네들의 몸과 깊은 연관이 있다며 그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밭을 갈아도 흙이 일러 주고 구름과 바람이 가리키는 대로 쟁기질을 하였기에 자연과 어긋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일을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여기었기에,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었기에, 일한다는 자체가 즐거움이고 놀이였다. 그리 풍족한 것 같지 않았지만, 내가 한 숟가락 덜 먹으면 이웃이 더 먹을 수 있고 내가 쟁기질을 한 번 더하면 동무가 한 번 덜 할 것이라면서 매사 다른 이들을 좀 더 자유롭게 하려 공들였기에, 사람들의 마음은 늘 풍요로워 삶과 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때로는 이를 그림과 조각으로 아로새겼다.

놀이를 할 때도 서로가 똑같이 이길 때까지 했고 놀이보다도 서로 모여 하나가 되는 의례를 더 좋아했다. 죽음과 고통이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이 있어 무한하지 않은 삶에 새록새록 의미를 채우려 하였고, 고통을 통하여 인간과 삶의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정녕 이곳엔 이곳 언덕 위의 꽃처럼 사랑이 흐드러졌고,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처럼 서로가 투명하였으며,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꿈을 꾸었으며, 온갖 강을 품은 드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한데 모아 하나를 이루었었다. 칼나라가 오기까지는.

칼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칼을 다듬고 욕망을 불태우며 살아갔다. 이곳에서 지배자가 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가장 칼을 잘 쓰는 자가 다른 이들과 싸움을 하여 지배자로 군림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갈망했고 두려워했다.

 지배자 또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땅과 재물을 얻고 자신의 힘을 키울까 고민할 때를 빼고는 항상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고 무슨 일이든 혼자 결정하여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사람들은 꽃을 바라보는 것보다 짓밟는 것을 더 재미있어했고 사냥감을 쳐다보기에도 바빠 하늘을 바라볼 틈이 없어선, 그만큼 아름다움이라든가 꿈이라든가 자연이라 하는 것들은 귀찮고 거추장스럽고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었다.

사냥이나 전쟁을 하는 때가 아니면 쇠를 두드렸고 칼을 휘둘렀다. 먹고 남는데도 가죽 깔개 장식을 위해 사냥을 했고, 갈지도 않는 땅을 빼앗는 것을 즐기고 몸과 마음의 향락을 위하여 생명을 죽이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였다. 일이란 것을 자신을 구속하고 쓸데없는 것에 몸을 소모하는 것으로 여기었기에, 홀로 일하여 모든 것을 홀로 가지려 하였기에 일한다는 것은 늘 고통이고 투쟁이었다.

항상 양식과 재물이 그득했지만, 사람들은 늘 불안해서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도 꿈을 꾸려고도 하지 않았다. 놀이를 할 때도 한 편이 이길 때까지 했고 내 것이 분명하지 않은 의례보다는 내기를 더 좋아했다. 죽음과 고통이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이란 짧은 삶을 화려하게 치장하려는 동인이었고, 고통이 있었기에 다른 이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분노를 늘 키울 수 있었다.

정녕 이곳엔 이곳 언덕 위 가시나무처럼 미움이 삐죽삐죽 솟아올랐고, 마을을 돌아 칭칭 감고 있는 짙은 안개처럼 서로를 감추었으며, 울타리 위 횃불처럼 야망을 활활 태웠으며,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질 대로 갈라져 서로가 싸웠다. 꿈나라를 치기까지는.

칼나라 사람들이 꿈나라로 갔다. 칼나라가 칼을 휘두르고 창을 던질 때 꿈나라 사람들이 던져 댄 것은 겨우 돌조각이었다. 칼나라는 쉽게 꿈나라를 아울렀다. 남자들은 어린아이고 노인이고 가리지 않고 대부분 죽여 버렸고, 여자들은 겁탈하고 노리개로 삼았다. 꿈나라 사람들이 만든 조각과 그림을 자기 집 벽에 장식했고 노래와 이야기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바꾸어 버렸다.

훗날 사가들은 기록한다. 먼 옛날 꿈나라라는 예술도 문화도 없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나라가 있었다고.

필자가 출간 준비 중인 정치우화집, 《짖지 않는 개》 중 한 편인 <세계사라는 것>이라는 제목의 우화다. 꿈나라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던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원주민 사회라면, 칼나라는 서양이다. 꿈나라가 미 대륙의 원래 주인인 인디언 부족이라면, 칼나라는 미 대륙에 건너온 앵글로색슨 집단이다.

이 글의 주제에 맞게 꿈나라를 채식집단으로 놓으면, 칼나라는 육식집단이다. 채식집단은 자연과 타자와 공존을 추구한다. 육식집단은 자연과 타자를 개발과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채식집단에서 남자와 여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육식집단에선 남자가 여자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보다 강한 권력을 갖는다.

 채식집단이 존재와 생성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육식집단은 소유와 지배의 삶을 살려고 버둥거린다. 채식집단이 평화와 공존을 추구한다면, 육식집단은 전쟁과 약탈을 바란다. 채식집단이 조화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육식집단은 승리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한다. 채식집단이 모두 하나가 되는 의례를 좋아한다면, 육식집단은 진자와 이긴 자가 분명한 내기를 좋아한다. 채식집단이 밭을 갈며 예술을 만들고 향유할 때, 육식집단은 사냥을 하고 무기를 만들었으며, 마침내 전쟁을 하여 채식집단을 정벌하였다.

그들의 총과 칼 뒤엔 ‘고기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 백인은 중서부의 목초지를 보자 수천 년 동안 자연과 이웃 부족과 공존하며 잘 살아가던 인디언과 버펄로를 학살하고 그 자리에 수억 마리 소를 키웠다. 그로도 성이 차지 않자 기업가들은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원시림을 38%나 불태워 버리고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여기서 키운 호르몬과 농약 덩어리의 쇠고기, 또 그것으로 만든 햄버거를 전 세계에 팔고 있다. 목초지와 삼림은 급속히 사막으로 변하고, 13억 마리의 소와 가축은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3분의 1을 먹어치우면서 배설물로 지하수, 강과 토지를 오염시키고 대략 6천만 톤의 메탄가스를 발생시켜 지구 온난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이것과 도시화와 산업화 등 다른 요인이 결합되어 지금 지구 환경은 치유가 불가능한 지경에 놓였다. 거의 10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축산기업에 땅을, 가축에 곡식을 빼앗겨 가난과 기아의 삶을 연명하고 있다.

고혈압, 심장병 등 성인병은 육식을 하는 이들의 공통의 질병이 되었다. 쇠고기와 햄버거를 먹으며 뚱뚱해져 각종 성인병에 걸림은 물론, 그에 함유된 호르몬과 잔류 농약 때문에 여성화가 촉진되고 백혈병과 암에 걸리며 기형아를 출산하고 최근에는 광우병마저 감염된다. 그럼에도, 축산기업의 로비를 받은 미국 농무부는 오히려 검사를 형식화하여 미국의 질병을 세계화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문화와 인터넷, 콜라와 함께 쇠고기와 햄버거는 전 세계를 미국 문화와 가치로 통일하고 있다. 맥도널드 햄버거는 2006년 현재 세계 119개국의 3만여 개의 매장에서 매일 5천만 명의 고객에게 햄버거를 팔고 있다. 선진국과 제3세계 어린이는 이를 먹으며 이에 담긴 미국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 생활양식은 물론 꿈의 양식마저 수용한다. 그들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미국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꿈을 꾼다.

하지만 채식집단의 저항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중심인 미국 안에서 내파가 일고 있고 외파의 파동도 크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언론과 지식인, 시민운동가를 통해 야만적인 도살과 가축에 축적된 농약과 호르몬에 대한 실상을 접하고서,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로, 친환경적이거나 친생명적인 세계관으로 변하면서 채식주의자들이 늘고 있다.

 미국 밖에서도 육식에 대한 성찰과 그에 도사린 다국적 기업과 미국의 ‘차가운 악’에 대한 저항이 서서히 일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100일 이상 계속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는 ‘차가운 악’에 대한 전 세계 차원의 저항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단지 광우병, 당위적인 선언과 주장의 차원이 아니라 육식에 내재한 정치적인 함의, 육식과 계급 및 젠더와 역학관계, 차가운 악의 실상과 그 사회적 의미에 대해 냉정하게 고찰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하리라.

2. 소가 신인 시대에서 소-기계의 시대로

소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위상을 달리한다. 고대 시대에 소는 신격이었고, 중세엔 신과 인간의 중개자였으나 현대에 들어 소는 상품과 기계로 전락했다.

1) 고대, 황소신(神)의 은총으로 세상을 지배하다

위대한 황소신 아피스(Apis)는 암소신 하토르(Hathor)와 함께 천상을 지배했다. 하토르는 태양을 낳은 것으로 전해지며 다산과 양육, 우주의 풍요를 상징했다. ……아피스는 젊음의 활력과 영원한 삶을 상징했다. 성소에는 아피스신이 육체화된, 실제 살아 있는 황소가 있었으며 사제가 이를 보살폈다.

아피스 황소는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정교한 제식(祭式)을 통해 도살되었다. 왕들은 살코기를 먹음으로써 그 짐승의 맹렬한 힘, 당당한 체력, 남성다움과 일체를 이루어 영생을 얻고자 했다. ……아피스 황소의 죽음에 임박하여 사제들은 후계자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새로운 황소가 발견되면 그 주인은 후한 보답을 받았으며 사제들은 그 즉시 황소를 격리시켰다. 격리 기간이 끝나면 황소는 신성한 거룻배로 황금빛 오두막에 수용되어 성스러운 도시 멤피스로 옮겨졌다. 아피스 황소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거대한 사원 프타(Ptah)에 모셔졌다. …… 희생제를 통해 도살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아피스 황소 고기를 일일이 나누어 먹었다. 그 유해는 미라로 만들어진 다음 50톤이 넘는 거대한 석관이 안치된 특별한 무덤에 묻혔다.

황소신은 엄청난 체력과 생식력, 전쟁과 정복에 대한 남성적인 정열을 뜻했다. 나르메르-메네스는 새로운 황소신의 은총으로 이집트를 지배했으며, 왕 역시 황소신으로서 백성의 숭배를 받았다. 이집트 제국의 위대한 왕조 통치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왕들은 ‘전능한 황소’ 또는 ‘천상의 황소’로 불렸다.

비단 이집트만이 아니다. 천상계와 지상계의 질서가 하나인 때, 성스러운 세계에 자아를 일치시키려던 때, 신과 이데아와 왕을 하나로 보려던 때, 소는 신이었다. 신으로 선택된 소는 가장 좋은 잠자리에 자며 성수로 목을 축이고, 특별히 선택된 풀을 먹었다. 희생제를 통해 공포와 고통을 줄이는 방식으로 도살하였고, 왕을 비롯한 사람들은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신과 일체감을 느꼈다. 그들은 고기를 먹음으로써 소가 가지고 있는 생식력, 정력, 풍요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는 죽어서도 미라로 모셔지거나 부조나 조각상으로 새겨져 영원히 신으로 남았다.

2) 중세, 소는 신과 인간의 중개자

성덕왕(聖德王, 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江陵, 지금의 명주)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여 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이를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종자(從者)들은, “거기에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고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이때 소를 끌고 길을 지나가던 노인이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가사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러나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덕왕 대(代)는 화엄이 꽃을 피운 시대다. 성덕왕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여러 사상과 가치를 통일할 수 있는 화엄사상을 기존의 사상과 결합하여 화엄만다라의 시대를 열었다. 이 세계관에서 보면,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절벽은 성스러운 세계이다. 그럼 ‘견우노옹(牽牛老翁)’은? 신라인은 소를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보았다. 《삼국유사》 ‘오대산 오만 진신’조에서 문수보살이 오대산 진여원에 이르러 36종의 형상으로 변하는 데 그 하나가 소이다. 즉 문수보살이 소로 화불(化佛)한다.

이는 ‘사복이 말하지 않다’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복을 연화장으로 이끈 암소는 문수보살의 화불이다. 꽃은 천화(天花)를 의미한다. ‘아도가 신라에 절터를 잡다(阿道基羅)’조에서 아도가 흥륜사에서 강독할 때 하늘 꽃이 떨어지듯, 천화란 부처가 불법을 수행한 인간에게 내리는 축복이다. 부처와 인간의 중개자, 견우노옹이 성스러운 공간인 사람이 감히 오를 수 없는 절벽에서 천화를 꺾어다 화엄만다라의 성소인 오대산을 지키러 가는 순정공의 아름다운 부인을 축복하는 것이다. 견우노옹의 중개에 의해 천화가 수로부인에게 전해지는 순간, 절벽 위와 아래, 성과 속, 부처와 중생은 하나가 된다.

불교에서 소를 찾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며, 도교에서 소를 타는 것은 도교적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유교에서도 선농단(先農壇)에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풍년이 들기를 빌면서 소를 희생(犧牲)으로 바친 후 이를 끓여서 나누어 먹었다. 주지하듯, 이것이 바로 설렁탕의 유래다. 이처럼 중세시대에서 소는 신과 인간의 중개자다. 신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때에도 아직 신성이 남아 있었다. 소는 성스러운 세계와 속한 현실, 신과 인간을 매개해 주는 자다.

신성이 사라진 뒤에도 소는 거의 인간과 같은 격으로 섬김을 받았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풍요와 생산을 보장해 주는 동물이다. 소에게 쟁기를 매달아 땅을 쉽게 갈게 된 인간은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생산의 혁신을 이루었고, 이는 청동기시대에서 시작하여 현대에까지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그 때문에 농부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소를 돌보는 일이었다.

농부는 매일 소에게 정성을 쏟았다. 가장 좋은 풀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거나 이를 베어다 먹였고, 외양간을 항상 부드러운 짚을 깔아 정결하게 유지했으며, 몸에 붙은 진드기나 등에를 잡아 주고, 가까운 냇가로 끌고 가 목욕을 시켰다. 소는 가축이 아니라 가족의 위상을 가졌고, 농부는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책무감을 가졌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아들의 교육과 소는 갈등과 번민을 일게 할 정도로 동격의 가치를 지녔다. 결국 소를 팔아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하는 쪽으로 결정하는 경우에도 농부는 판 소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3) 현대, 소는 도살 장치의 기계일 뿐

현대의 두 축은 합리성과 자본주의다. 소의 장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최대의 생산을 하여 가장 최대의 이윤을 획득하려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소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시장경제와 관료 행정의 영역과 결합하면서 합리화는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율성, 곧 목적적 합리성으로 변질되었다. 이 논리대로, 축산이 기업화하고 사육은 생산의 과정이 되었고 소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축산기업은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어 지방을 많게 하거나 상품의 가치를 증대하기 위하여 살이 빨리 찌게 하면서도 비용을 최소화하는 효용성을 중시하여 목초를 먹던 되새김질 동물에게 옥수수 등 곡물은 물론, 젤라틴, 접시쓰레기(레스토랑의 고기 요리 찌꺼기), 닭고기와 돼지고기, 닭똥, 닭 시체, 닭털, 닭이 먹다 남은 모이 등의 닭장 쓰레기, 도살장의 찌꺼기와 골분을 먹인다.

골분과 동물성 단백질이 광우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이를 금지하였으나 미국은 아직 허용하고 있다. 매년 약 100만 톤에 달하는 닭장 쓰레기들이 소의 사료로 처리되고 있으니 이는 미국에서 매년 새로 태어나는 3천6백만 마리의 송아지가 두당 66파운드의 닭장 쓰레기를 먹는다는 뜻이다.

지방과 근수를 늘리기 위하여 호르몬제도 투입하는데, 이것이 축적된 쇠고기를 먹은 사람에게 여성화를 촉진시키고 발기부전, 불임, 암을 일으킬 수 있으며, 미국에서는 5세 아이에게 벌써 음모가 나고 4세 아이가 거의 완전히 성숙한 가슴을 가질 정도로 그 폐해는 심각하다.

이렇게 살다가 근수가 상업적 가치를 지니는 무게에 달하면 소는 도살된다. 초기엔 야만적이었지만 소가 기계는 아니었다. 소의 머리를 때려 기절시킨 후 몸통을 찔러 죽인 뒤 부위별로 해체하였다. 축산기업은 효율성만을 추구하여 소를 기계로 만드는 대량도축기술을 개발하였다.

족쇄 장치가 소의 뒷다리를 걸어 올리면 모든 공정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전기충격기로 기절시킨 후 목을 찌르고 나면 체인과 궤도 장치에 매달린 채 순식간에 작업장의 각 구획을 거치며 부위별로 잘리고 나뉘고 가공되어 결국 생산라인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나온다. 이미 1894년에 4개의 절단기가 하루에 무려 1,200마리의 소를 처리할 정도로 이 시스템의 효율성은 높다. 전기 충격이 100%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에, 시민운동가들이 몰래 촬영한 비디오를 보면, 소들은 목이 잘리고 기관(氣管)이 끊긴 상태에서도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죽는다.

소의 해체 과정을 하는 노동자들은 소피를 온몸에 뒤집어쓰면서도 이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감정의 동요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해체하듯 기계의 한 부분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축산기업가들에게 동물에 대한 윤리는 없다. 거기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산출하는 효용성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신이었고 인간에게 존경을 받던 소는 상품으로 사육되다가 대량도축장치의 기계가 되어 순식간에 조각으로 분해되어 인간의 식탁에 오른다.

3. 육식, 부재의 정치학

1) 도살을 통해 동물의 생명과 죽음을 부재하게 한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아일랜드>를 보면, 메릭 박사는 메릭 바이오테크사를 설립하여 고객으로부터 5백만 달러 정도의 거액을 받고 복제인간을 만든다. 후원자라 불리는 고객에게 장기가 암과 같은 병에 걸릴 경우 복제인간의 장기를 적출하여 대체하여 준다. 복제인간은 장기를 적출당한 후 중요한 부품을 떼어 낸 폐자동차처럼 버려진다.

이 사실은 복제인간과 고객 모두에게 비밀이다. 복제인간인 링컨-6-에코는 이 사실을 알고 조던-2-델타와 탈출을 시도한다. 이들을 돕는 인간인 맥코드는 후원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조언을 한다. 후원자가 왜 이 사실을 모르느냐는 링컨의 질문에 맥코드는 대답한다. “사람들이 도살을 몰라야 고기를 잘 먹을 수 있는 이치와 같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에게서 심장을 적출한 후 그를 푸줏간의 고기처럼 버린 것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윤리적인 갈등 없이 그 심장을 달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동물의 경우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본질은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전 세계에서 매년 도살되는 동물의 수는 100억 마리인데, 도살을 통해 동물은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고기는 죽은 동물을 지시하기보다는 음식물만을 지시하게 된다. 우리가 가게에서 구입한 소고기 덩이가 현전(現前)하는 것이라면, 부재하는 것은 동물과 생명이다. 고기엔 그 동물의 숨소리, 음매 하고 길게 울던 울음, 맛난 풀을 먹던 긴 혀, 축축히 젖은 눈망울, 도살되기 직전의 공포에 떨던 모습이 없다. 죽으며 내던 단말마 소리와 샘솟듯 흐르던 피는 보이지 않는다.

육즙을 머금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진 검붉은 고깃덩이만 있을 뿐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저 현전하는 고기는 살아 숨을 쉬고 활동을 하던 구체적 동물 존재와 분리된 이미지가 된다. 나는 저 고기를 바라보며 적당히 구워져 좋은 향과 육즙을 내며 쫄깃쫄깃 씹혀질 이미지를 떠올린다. 난 그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 고기를 그리 요리할 것이고, 고기를 먹으며 이미지에 부합할 경우 맛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 먹은 후 고기조차 사라지고 다시 소고기에 대한 이미지만 남는다.

동물과 생명이 부재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살을 하여 피가 흐르고 숨을 쉬던 동물을 고기로 바꾸는 것이다. 다음은 명칭을 바꾸는 것이다. 소(cattle)가 도살되면, 소고기(beef)로 바뀐다. 셋째는 동물을 인간 경험을 묘사하기 위한 은유로 사용하는 것이다.

은유는 한 개념이나 대상을 다른 개념이나 대상과 견주어 양자 사이의 유사성이나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계열체적(paradigm)으로 유추(類推)하여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무엇으로 전이하거나 대치하여 비유하는 것이자, 담론 안에서 작동 시 수용자가 주어진 세계관과 문화 안에서 형성된 개념 체계와 상상력에 따라 원관념과 매체관념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이자 이 의미에 따라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실천양식이다.

창조의 장에서 보면, 티 없이 투명한 하늘을 무명(無明)이 사라진 깨달음의 세계로 유추하듯, 은유는 두 개념이나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계열체적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수사의 장에서, ‘반달’을 그와 모양이 유사한 ‘쪽배’로 대체하면 시가 되듯, 은유는 전이와 대체이다. 해석의 장에서, 경전을 읽으며 어느 부분에서 ‘달’을 그처럼 자비의 빛을 뿌리는 ‘관음보살’로 동일화하여 해석하듯, 이는 원관념과 매체관념 사이의 계열체적 동일화이다.

소통의 장에서, 촛불이 자신을 녹여 방을 환하게 밝히는 것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밝히고자 촛불시위에 나서는 것처럼, 은유는 상호작용을 통해 계열체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한 의미의 실천이다. 은유는 억압과 검열의 회피의 기능, 존재 개시의 기능, 인언견언(因言遣言)의 기능, 유희의 기능, 시적 기능, 의미의 공유 및 연대의 기능, 동일화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중 동일화의 기능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진리를 상정하여 유추적 사고를 통해 본질, 일반성을 지향하면서 물질, 실재, 삶, 현실, 역사로부터 벗어나 동일성의 세계를 함축하면서 개념이나 대상을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치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은유의 기능대로 고기는 흔히 여자의 살이나 몸의 은유를 형성한다. 남성들은 여자와 섹스를 한 것을 두고 “(여자의 살을) 먹었다.”라고 표현한다. 여성 앞에서 스테이크를 먹는다는 것은 남녀 모두에게 섹스에 대한 욕망을 뜻한다. 폭행의 희생자들 또는 구타당한 여성들이 “저는 저 자신이 고깃덩어리 같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한다.

이런 사례에서 고기의 의미는 고기 그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폭력에 희생된 여성이 자신에 대해 느낀 바를 지시한다. 이 은유는 동일화 기능을 수행하여,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며 여성으로서 인격과 향기를 갖는 몸을 추상화하며 이를 고기에 대한 상상으로 대체한다. 여성에게서 인격을 제거하고 고기처럼 먹거나 폭력을 가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이 은유는 차이를 녹여 동일성으로 만든다. 수많은 여성의 몸은 생김에서 그 몸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기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이를 갖는데, 이를 고기로 동일화하는 순간 ‘차이, 각자의 몸을 형성하였던 인격과 기질, 생명력’은 사라진다.

2) 고기엔 축산기업의 야만과 부조리가 현전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부재하는 것은 축산기업과 그들이 야기하는 야만과 부조리다. 기업화한 목축은 삼림과 초지를 파괴하고 가난한 자의 농토를 빼앗았으며, 지방이 많게 하기 위해 먹인 곡식은 10억 명이 먹어치울 양에 달하여 굶주리는 사람이 늘게 하는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울러 쇠고기의 지방만으로도 인간은 각종 성인병에 걸리고 있으며, 대량으로 단기간에 적은 비용으로 무게가 많이 나가고 지방이 많은 소를 생산하기 위하여 소에게 목초 대신 살충제가 남은 곡식과 동물사료, 쓰레기, 호르몬제를 먹이는 바람에 소는 온갖 질병의 근인이다.

부드럽고 육즙이 많은, 다시 말해 지방질이 많은 쇠고기는 풍요의 상징 기호이다. 바로 이 점이 소 생산과 곡식 생산을 새로운 공조 관계로 결합시켰다. 지방 많은 쇠고기를 원하는 영국인들, 평원의 황소를 구입할 돈줄이 필요한 서부 목축업자들, 잉여 옥수수를 먹어 치울 비육우를 원하는 중서부 옥수수 재배 농부들, 새로운 식민지의 투기적 사업을 이용하려는 영국 재정가들의 관심사가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신흥 유럽-미국 축산단지가 창출되었다.

영국이 평원의 공짜 목초와 중서부 곡창 지대의 잉여 옥수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1억 6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미국 농경 지대에서는 2억 2천만 톤의 곡식이 소를 비롯한 다른 가축들을 위해 재배되고 있다. 미국에서 가축들, 그것도 주로 소가 소비하는 곡물은 전 국민이 소비하는 곡식의 두 배에 육박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6억 톤의 곡식이 가축들, 그 대부분은 소의 먹이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축 사료가 아닌 인간이 직접 소비한다면 지구상의 10억의 사람들이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돼지나 닭을 차치하고 소 하나만 보더라도, 이 행성 전 인구의 1.5배에 달하는 87억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열량에 상당하는 식량을 소비한다.

열대우림이었던 지역의 경우, 개간 직후에는 3,000평이면 수소 한 마리를 키울 수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땅이 부식되고 나면, 수소 한 마리가 대략 14,700평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워낙 황폐해져서 수소 한 마리가 필요로 하는 목초지는 24,500평에 달하게 된다. 453그램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평균 9,450리터의 물을 쓰고 있다.

우리가 지금 쇠고기 한 조각을 먹는다는 것은 수십 ㎡에 달하는 삼림과 농토, 수천 리터의 물, 수십 킬로그램의 곡식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식탁에 오른 고기는 축산기업을 부재하게 하며, 축산기업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허비한 곡식과 물, 에너지를 현전하지 않게 한다.

3) 고기엔 수많은 질병이 부재함

우리는 광우병을 염려하지만 고기는 수많은 질병을 감추고 있다. 고기를 먹는 양과 순환계 질환과 심장병, 당뇨병에 걸리는 비율이 거의 비례한다. 현재 미국의 모든 비육장에서는 95%의 소들에게 성장 촉진 호르몬을 투약하고 있다. 1988년에는 1,500만 파운드 이상의 항생물질들이 미국의 목장에서 사료첨가제로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제초제의 80%가 육우와 다른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는 옥수수와 콩에 뿌려지고 있다. 전미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회(NRC)에서는 요즘 세상에 나오는 온갖 식품 중에서 쇠고기 살균제 오염 정도가 소비자들의 암을 유발시키는 전체 원인의 11%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17년 연합군이 독일 점령 지역인 덴마크에 해군 봉쇄망을 펼치는 바람에 정상적인 식량 공급경로가 차단됨에 따라 덴마크 정부는 사실상 육류를 제외한 감자와 보리의 소비에 중점을 둔 배급 프로그램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3백만 명의 덴마크인들이 채식주의자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몇몇 흥미로운 결과가 발생했다. 배급이 실시된 해에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무려 34%나 감소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와 기업이 연합 관계를 맺고 이런 모든 것을 감추거나 조작한다. 골다공증을 예로 들면, 우리는 골다공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유를 많이 먹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우유를 많이 팔아야 하는 기업과 이에 지원을 받는 연구단체가 만들어 놓은 신화다.

전국낙농위원회는 골다공증은 더 많은 우유를 마시고 더 많은 유제품을 먹으면 예방할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게 하는 데 몇천만 달러를 소비했다. 하지만, 유제품의 소비가 골다공증의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약간의 언질이라도 하고 있는 연구는 전국낙농위원회 자체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연구들뿐이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아프리카 반투족 여성들이 하루에 섭취하는 칼슘의 양은 350밀리그램에 불과하다.

그들은 일생 동안 9명의 아이를 배고 태어난 아이들마다 2년간씩 모유를 먹여 기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칼슘 부족을 경험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뼈가 부러지거나 이빨을 잃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전국낙농위원회가) 권장하는 1일 칼슘량이 1,200밀리그램인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하루 350밀리그램의 칼슘만으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들은 칼슘을 몸 밖으로 배출해 내지 않는 저단백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내 거주 반투족들의 골다공증 발생 빈도는 자신들의 이웃인 백인들과 똑같은 수준이니 유전적 요인이 아니라 식생활의 차이이다. 반면에 하루에 2,000밀리그램의 칼슘을 섭취하는 에스키모 원주민은 세계에서 가장 고단백의 식사를 하며 세계에서 골다공증 비율이 가장 높은 민족 중 하나다.

상황이 이럼에도 고기에 대한 검사 체계는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생산하는 기업의 로비에 의해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미국 농무부(USDA)와 일부 정육 포장 대기업들은 현대식 검사 시스템(Streamlined Inspection System)을 실험 중인데, 새로운 이 체계의 시험 단계에서 연방 검사관들은 더 이상 생산라인에 오른 쇠고기를 검사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포장 공장의 노동자들이 기껏해야 무작위 검사 - 때때로 1,000마리의 소들 가운데 단 3마리만을 검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 를 실행할 뿐이었다.

 회사들의 임의적인 검사에 의존하는 이 새로운 검사 과정은 연방 검사관들에게 대대적인 비난을 받았다. 어느 검사관은 이 새로운 제도를 “의사가 한 마을에서 1,000명의 환자 가운데 3명을 진료한 후에 그 3명이 건강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에 비유하였다.

자본은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이름 아래 맹목적이고 무한한 가치증식과 확대 재생산을 추구하였다. 근대 국가는 자본과 국민 사이에서 이를 어느 정도 제한하였으며, 노동자는 교육, 조직화와 연대, 민주제도의 발전 등에 힘입어 자본의 욕망에 제동을 걸었다. 이제 자본의 이런 탐욕이 생활세계, 지식과 정보, 개인의 몸과 무의식까지 침투하였으며, 국가가 자본과 결탁하면서 국가는 정당성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자본의 억압과 욕망이 개인의 몸과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고기의 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고기의 장에서 종적 합리성은 시장적 합리성으로 대체된다. 삶과 자연, 재생을 의미하는 번식력은 죽음, 문명, 소비를 뜻하는 생산성으로 전환된다. 축산기업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가축에게 호르몬제와 살충제가 축적된 사료, 항생제를 먹이며 그로 야기되는 질병을 숨기고 있고 검사 체제를 완화하고 있으며 육류 소비의 정당성을 조작하고 있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고기만 현전할 뿐, 동물과 생명, 질병, 축산기업의 야만과 부조리는 고기 속으로 숨는다.

지금 현전하는 것이 스스로 본질을 드러내거나 의미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식 사유의 소산이다. 데리다의 지적대로, 부재한 것에 따라 현전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는 달라진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지금 보이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낸다. 고기도 마찬가지다.

내 눈앞의 고기에서 ‘육즙이 뚝뚝 흐르며 부드럽게 씹히는 이미지’를 버리고, ‘도살, 축산기업, 동물들의 숨소리, 여성의 몸, 질병, 살충제’ 등 부재한 것을 드러내 고기를 바라보고 읽을 때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고기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4. 육식과 계급, 젠더 및 세계체제

1)육식과 계급: 자본주의 체제는 거대한 도살장이다

다국적 축산기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cattle)의 어원 자체가 동산(chattel)과 자본(capital)과 깊은 상관성을 가지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들, 야만주의를 알지 못하면서 야만주의를 탄식하는 사람들은 송아지를 잡아 본 적도 없으면서 송아지 고기를 먹으려 하는 사람들과 같다.” 브레히트가 잘 통찰하였듯,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거대한 도살장이다.

자동차 산업에 최초로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조립 라인은 사실 포드가 시카고-업튼 싱클레어가 직접 일한 도살장이 몰려 있는 곳-에 있는 여러 도살장의 동물 분해 라인을 견학하고 나서 얻은 착상이었다. 포드는 자신의 조립 라인이라는 아이디어가 각각 분리되어 있는 도살장의 작업 공정에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아이디어는 시카고의 포장업자들이 쇠고기를 포장하는 데 사용하는 천장에 매달아 놓은 운반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아이디어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실제로 도살장의 알레고리이다. 도살장의 작업부들은 소라는 생명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되어 버린 소의 일부분만 다룰 뿐이며 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도, 소를 자신의 목적대로 정형할 수도 없다. 그들은 작업 대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들도 자동차 등 상품의 한 부분만 취급할 뿐이며 상품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수 없으며, 자신의 목적대로 생산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은 노동 대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작업부들은 피를 뒤집어쓰며 일하며 동물에 대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돈 벌기 위해 일할 뿐이다. 노동은 더 이상 자기실현, 곧 진정한 자유를 구현하는 길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시스템 아래서 주어진 일만 기계적으로 행할 뿐이다. 노동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는 희열도, 자신의 도구를 통해 노동력을 발휘하여 자연을 변형하여 생산을 이루는 기쁨도, 또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열락도 없다. 그저 월급을 타기 위해 일할 뿐이다.

노동은 자기실현이 아니라 소외의 한 양식이다. 도살장 전체를 지배하는 법칙은 효율성이다. 이성이 있지만, 가장 적은 비용을 써서 가장 많은 소를 가장 빠른 시간에 도살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도구적 합리성일 뿐이다. 소가 고통이나 공포 없이 죽는지 전기충격으로 단번에 기절하지 않는 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사색은 없다.

소에 대한 종적, 윤리적 가치는 교환가치로 대체한다. 고통스럽든 말든 단말마를 지르는 소를 빨리 죽여 정형하여 고깃덩이로 포장하여 상품으로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고려사항이다.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지배하는 법칙은 목적적 합리성이다. 가장 적은 비용과 노동력을 투자하여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이윤을 확보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다. 이 체제 안에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한다.

이로 물화(物化)가 나타나고 물화한 개인은 소외를 경험한다. 인간마저 대상화하여 교환가치를 따지는 바람에 인간 사이의 인격적 교감과 소통은 사라지고 모두가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로 전락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쇠고기는 생일날이나 제삿날에나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였다. 대학에서도 남녀 대학생이 미팅할 때 레스토랑에 가서 고기를 써는 자는 일부 부유층 대학생이었고, 막걸리나 소줏집에서 나물이나 찌개를 안주 삼아 시국을 논하는 것으로 연애를 대신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얀 쌀밥과 고깃국’은 오랫동안 한국 서민의 꿈이었다.

고기는 권력이다. 권력을 쥔 자가 항상 고기를 먹었다. 고기 가운데서도 소는 부와 상류사회의 식문화를 의미한다. 쇠고기를 특별하지 않은 날에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중산층으로 진입하였음을 뜻한다. 거의 모든 지구촌 사회에서 상층일수록 쇠고기 소비가 많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하는 자메이카에서 쇠고기는 상위 25%에 속하는 부유층의 단백질 공급원 1순위였던 반면에 밀가루는 그보다 낮은 7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위 25%에 속하는 빈곤층에게는 이와 거의 반대되는 수치가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밀가루는 단백질 공급원 1순위였고, 쇠고기는 13위였던 것이다.

 1970년대에 OECD의 20개 회원국은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육류의 섭취로 인한 칼로리 비율이 35〜40%로 증가했다. 앞 장에서 지적하였듯, 쇠고기의 생산 단가가 곡물에 비하여 5배나 높았기에 상품으로서 쇠고기는 귀하였고 비쌌다. 이 바람에 쇠고기는 상류층이나 먹는 것이 가능하였고,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부와 상층 권력의 징표였다.

미국의 가축은 미국 인구 전체를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의 5배나 되는 곡물과 콩을 소비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작하는 옥수수의 80% 이상과 귀리의 95% 이상을 동물 사육에 쏟아 붓는다. 곡물과 콩, 약 14.5 킬로그램이 육우용 소 사료로 쓰이는 데 비해 우리가 돌려받는 것은 겨우 900그램의 고기뿐이다.

미국 농무부 통계에 따르면, 약 1에이커(1,224평)의 땅에서 대략 90.6톤의 감자를 키울 수 있는데 소를 키운다면 약 74.7킬로그램의 쇠고기밖에 생산해 내지 못한다. 육식가 한 사람에게 1년간 육류식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약 4,000평의 땅이 필요하고, 유란 채식가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약 620평이 필요하다. 그러나 완전 채식가라면 겨우 200평만이 필요할 뿐이다.

바꿔 말하면, 표준적인 미국식 식생활을 하는 사람 한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면 완전 채식하는 사람 2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매일 5만 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는 지구촌에서 기업형 가축 사육은 야만이자 범죄다.

도덕은 차치하고 시장논리로만 따져도 기업형 사육은 경제성이 없다. 1만 원을 은행에 맡겼는데 연말에 1천 원만 되돌려 받는다면, 은행에 돈을 맡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축을 사육한다는 것은 지구촌 전체의 경제로 볼 때 10%의 효율을 갖는 비효율적 낭비다. 이것이 유지되는 것은 다국적 축산기업, 이들과 연합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국가 때문이다.

축산기업들은 초기에 영국인들이 미 대륙에서 그랬듯, 남미의 열대우림 등 싼 목초지를 찾아 목장을 만들고, 원가를 줄이기 위하여 저렴한 곡물은 물론 쓰레기를 소에게 먹인다. 농민은 이들에게 싼 가격으로 곡물을 공급하고 비싼 가격으로 고기를 구매하면서, 헐값으로 농토를 빼앗기면서 더욱 가난해지고, 최하위층은 가축들에게 곡식을 빼앗겨 굶주리게 된다.

옛날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이 가난한 자의 식생활이었으나 축산기업은 자본주의의 확대 재생산 원리대로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또 고기를 고급 고기와 저급 고기로 나누어 가난한 자도 저급의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였다.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가를 낮추기 위하여 가축에게 쓰레기와 호르몬제를 먹이는 바람에 고기를 먹은 자들은 가난한 자조차 부자들이나 걸리던 비만증과 성인병과 각종 암과 백혈병 등에 걸리고 있다.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이어트와 병의 치료로 또 많은 비용을 치르며 이는 다시 상층의 주머니로 간다. 그럼에도 이 ‘차가운 악의 메커니즘’은 비난을 받기는커녕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세계화하고 있다.

2) 육식과 젠더: 고기는 남자고 곧 권력이다

고대시대부터 고기는 남성을 의미했고 권력이었다. 고기는 대개 남성들에게 분배되었으며 남성들만이 고기를 먹는 부족도 많다. 채식과 고기엔 여성 대 남성, 수동성 대 능동성, 하찮음 대 귀함, 주변 대 중심, 복종 대 지배의 이분법이 지배한다.

그리하여 채소나 곡식을 먹는다는 것은 수동적이고 하찮은 것이고 주변에 머무는 것이자 복종과 여성을 의미하고,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능동적이고 귀한 것이고 중심에 속한 것이자 지배와 남성을 뜻한다. 남성성이란 ‘강함, 정력, 활력 있음, 빠름, 거침, 능동적(공격적), 활동적’을 뜻하는데 이는 그들이 먹는 소나 돼지의 특성과 통한다. 여성성이란 ‘약함, 다소곳함, 느림, 부드러움, 수동성(방어적), 고착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주로 먹는 채소나 곡식의 특성과 같다.

원숭이의 뜨듯한 골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다든지, 사냥한 짐승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간을 날로 먹는다든지, 꿈틀거리는 작은 짐승을 통째로 삼킨다든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남성을 의미했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남성성을 상실함, 그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함을 뜻했다.

성서를 보면, “사제들은 제단 앞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와 숯을 이용해 매우 정성 들여 고기를 요리했다. 여자들은 고기의 맛을 볼 수 없었으며, 모세의 형이자 유대교 최초의 제사장인 아론의 아이들 중 사내들만이 맛을 볼 수 있었다.”

금기시되는 음식 대다수는 고기와 관련이 있고, 이런 음식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많은 제약을 가한다. 보통 여성에게 금기시되는 음식은 닭고기, 오리고기, 돼지고기다. 전근대 문화들에서 여성에게 고기를 금지하는 것은 고기의 위상을 드높이는 구실을 한다.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여성들은 자기 손으로 돼지를 기르지만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허락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성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경우는 남편이 먹던 것을 조금 남겨 줄 때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고기 음식은 남성의 전유물이다. 여성들은 축제 때나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이 경우에도 남자의 수에 따라 가족 단위로 분배된다. 따라서 분배 체계가 남성의 사회적 위상을 강화한다.

육식문화일수록 가부장적 권력은 강하다. 육식문화권에서 고기를 먹는 것이 남성의 특권인 지경을 넘어 성적 도살의 은유를 형성한다. 남성에게 고기를 먹는 것과 여성의 살을 먹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은유화한다. 여성에게 남성에게 고기를 빼앗기는 것과 먹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육식문화권의 정육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스터가 여성의 누드에 쇠고기의 부위를 표시한 그림이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은유는 성적 도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폭행과 여성 육체의 도살은 동일화한다. 여성을 성폭행하고 그 신체를 칼로 자르는 장면을 육식문화권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성적 만행의 한 정식이다.

칼이 페니스와 강간을 대신하고, 동굴이 자궁, 침대, 범행 장소를 대신한다.-그리고 범행 당사자는 살인으로 희생자의 힘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계속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성적 도살은 남성의 포르노그래피적인 성적 관심의 기본 요소다.

상대인 여자 배역을 실제로 죽여 버리는 악명 높은 스너프 영화(snuff movies)들은 포르노를 찍는 도중에 실제로 출연자인 여성을 영화의 마지막 몇 분을 남겨 놓고 살해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 주며, 이 여성 살해를 성적 행위로 고양한다.

인간에게 폭력을 가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동물에게 가학적이고 여성에게 폭력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폭력을 근본적으로 줄이려면 채식을 하고 여성성과 공존하는 문화를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앞 장에서 말한 대로 동물을 살해하고 먹는 행위는 동물의 활력과 능동성, 정력을 가짐을 뜻하고 고기를 먹은 후 이는 지배와 폭력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반면에 채소와 곡식을 키움은 생명의 존엄성과 공존과 조화, 유기적 통합을 의미한다. 농사를 짓고 채소를 먹는 행위는 어머니처럼 보호하고 양육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렇게 식사를 한 후 이는 조화와 공존의 이미지를 남긴다.

3) 육식과 세계체제: 고기를 먹는 중심이 채식을 하는 주변을 수탈하다

고기의 시장과 소통은 세계체제론이 제대로 적용되는 장이다. 중심이 주변을 착취하고 중심의 중심과 주변의 중심이 공조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중심의 주변과 주변의 주변이 모두 가난과 억압의 상황에 있다. 처음에 중심인 영국이 미 대륙의 평원에서 주변인 인디언을 몰아내고 그 땅에 수억 마리의 소를 사육하였다.

다시 영국 대신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 미국은 중남미의 열대우림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목장을 만들었고 대신 원주민들은 멸종이나 기아의 상태로 전락하고 있다. 중심의 중심과 주변의 중심인 자본가와 목장주는 부와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목동은 헐값에 착취를 당하고, 농부와 원주민들은 자신의 땅에서 추방되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죽었다. 급격한 인구감소로 노동력이 하락하자 임금이 인상되었고 비교적 많은 돈을 갖게 된 노동자층은 상층의 전유물인 고기를 소비하였고 이로 ‘육류소비의 폭발’이 일어난다.

콜럼버스는 향신료 대신 광대한 목초지를 발견하였고 영국의 자본가들과 미국의 기업가들은 그 땅의 주인인 인디언과 버펄로를 학살하고 미국 전체 영토의 40%를 차지하는 서부 목장 지대에 육우를 사육하였다. 1870년에는 지방이 많은 쇠고기를 고집하는 영국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공짜 초지’와 ‘잉여 옥수수’가 서로 결합되었다.

 이들은 지방이 많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목초를 충분히 먹인 다음 옥수수로 배를 채우게 하였으며 이들을 결합하여 축산기업을 만들었다. 이후 정부, 축산업자. 옥수수 재배 농부 사이에 공조관계가 형성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민족국가들과 다국적 기업들은 중앙 및 남북 아메리카를 하나로 아우르는 단일 축산단지를 조성하는 공동작업을 하였다. 영국 투자기관들은 미국의 평원에 축산 회사를 설립하는 동시에 남미의 대초원에도 침투하였다. 20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냉동운송선이 정기적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남미의 쇠고기를 영국과 유럽으로 운송했다.

일부 영국 상인들은 아르헨티나와 무역을 통하여 부를 거머쥐었다. 아르헨티나가 영국의 귀족과 중류층이 소비하는 쇠고기의 대부분을 공급했다면, 우루과이의 육우들은 주로 영국 노동자 계층이 소비하는 유명한 ‘리빅 익스트렉트’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많은 미국 기업들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쇠고기의 생산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1960년대 이후 중미 삼림의 25%가 육우 사육을 위한 목초지로 개간되었다. 중앙아메리카에 거대한 축산단지가 둥지를 틀자 선택받은 소수의 삶은 더욱 부유해진 반면 대다수의 시골 농부들은 극도로 궁핍해졌으며, 사회적 불안정과 정치적 격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현재 중앙아메리카에는 농촌 가족의 절반 이상인 3천5백만 명이 스스로를 부양할 농토가 아예 없거나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반면 지주층과 다국적 기업들은 이용 가능한 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그곳을 목초지로 개간하고 있다.

아마존은 각각의 나무 한 그루에 1,700종의 곤충들이 둥지를 틀 정도로 생명의 보고이자 지구의 허파이다. 하지만, 미국 기업들이나 자본들이 이곳을 상업적으로 개간하여 목장으로 만들면서 열대 우림의 38%가 훼손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공동체를 이루던 원주민들은 살기 어려운 더 깊은 밀림 속으로 추방당하여 기아와 빈곤으로 급속도로 해체되는 과정에 있다. 원주민과 목축업자의 갈등은 1987년 수액 채취업자 조합의 지도자인 치코 멘데스의 살해로 정점에 달하였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지주층이 불과 20년 만에 적도 삼림의 80%를 개간하고 사유지화하면서 이용 가능한 국토의 절반을 목초지로 탈바꿈하였다. 최근에는 영향력을 가진 2,000여 가족이 코스타리카 경작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과테말라에서는 3%도 채 되지 않는 인구가 농경지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을 육우용 목초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목축이 단지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사막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중심의 착취를 강화하여 주변을 더욱 주변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맥도널드 햄버거는 119개국의 3만여 개의 매장에서 매일 5천만 명의 고객에게 팔리고 있다. 전세계인들이 맥도널드의 황금빛 아치 아래로 들어가 단 몇 분 만에 이 상품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외식을 즐긴다.

이들은 햄버거만 먹는 것이 아니다. 그에 담긴 미국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며, 더 나아가 미국의 생활양식과 꿈의 양식마저 받아들인다. 프랑스의 문화 비평가 기소르망의 말대로 배는 맥도널드 햄버거로, 머리는 매킨토시 컴퓨터로 채우는 맥의 세상, ‘맥몽드(mac-monde)’가 도래한 것이다.

5. 더 나은 사회를 향하여

육식은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치고 있다. 육식은 각종 성인병과 암의 원인이다. 축산기업은 지구 환경을 심각한 지경으로 파괴하고 사막화를 앞당기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 1가량을 낭비하고 있으며 주변에 대한 착취와 억압, 중심과 주변의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의 수는 12억 8천만 마리다. 소의 사육 면적은 전 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한다. 데이비드 피멘텔은 현재 미국의 곡물, 목초 가축 사료 시스템을 완전한 목초 가축 사료시스템으로 전환시킨다면 미국에서만 1억 1천만 톤의 곡물을 인간이 직접 소비할 수 있어 4억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추산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17억 톤이 생산되는 총 곡식 생산량의 3분의 1가량은 가축용이다. 피멘텔의 비율로 따져보면, 이것이 완전한 목초 가축 사료 시스템으로 바뀔 경우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음을 뜻한다. 육류소비를 10%만 줄여도 1천2백만 톤의 곡물을 해마다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것은 6천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이다.

평균 미국인 가정이 불필요한 단백질에 쏟아 붓는 돈은 한 달에 40달러로, 이것은 단백질 생산자들에게 연간 360억 달러에 달하는 여분의 수입을 보장해 준다. 미국 인구의 24~27%가 과다체중이며, 3천4백만 명이 비만이다. 체중 감량을 위해 연 50억 달러를 소비하며, 미국 질병 통제소 보고로는 과체중자와 비만자에게 매년 들어가는 의료비용이 1998년에만 785억 달러에 달한다. 매년 심장혈관 질환의 사망자들이 지출하는 비용만 1천억 달러를 상회한다.

인류 가운데 13억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1천3백30억 달러로 최빈국 총수입의 1.5배에 달한다. 아태 지역에 9억 5천만 명, 아프리카에 2억 2천만 명, 중남미에 1억 1천만 명,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실패한 옛 사회주의권의 인구의 3분의 1인 1억 2천만 명 등 14억에 달하는 인류가 하루 4달러 이하의 돈으로 연명하고 있다.

 남반구와 동아시아에서는 5억의 사람들이, 남미에서는 1억 6천만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해마다 4천만∼6천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매해 1천5백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와 관련된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려 가는데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에 걸려 이를 치료하고자 그들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돈의 몇 배 이상을 낭비한다는 것, 한쪽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그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 곡식을 풀을 먹는 소에게 강제로 먹여 지방이 많은 부드러운 고기를 먹는다는 것, 이것은 정녕 야만을 넘어 범죄다.

제레미 리프킨의 지적대로 이는 ‘차가운 악(cold evil)’이다. 우리가 지금 먹는 한 조각 쇠고기와 햄버거엔 목축업자들로부터 쫓겨나 굶주려 죽어 가고 있는 제3세계의 원주민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농민의 피와 눈물,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수천 종, 수억 마리의 곤충을 품어 주던 열대우림의 나무, 쓰레기와 사료를 강제로 먹다가 도축장에서 죽으며 내던 소의 고통스러운 단말마가 담겨 있다. 이제 인류는 더 이상 범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육식에 담긴 야만과 범죄, 질병을 철저히 인식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우리의 밥상을 바꾸어야 한다. 인류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된다면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겠지만, 모두가 지금 당장 승려처럼 채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도기적 대안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질병 덩어리인 축산기업에서 사육한 고기를 거부하고 에코 시스템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생산한 고기를 먹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유기농법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유기농법은 자연을 살리고 우리의 몸을 살리는 길이다. 유기농법은 토질을 보전하고 생물의 다양성을 높이며, 질소의 유실로 인한 오염을 줄이고 재래식 농법에 비하여 더 적은 에너지로 수확을 하고, 흙 속에 더 많은 산소를 포함시키고 이산화탄소 방출량을 줄인다.

한 나라 단위에서는 지리산 실상사 산하의 공동체가 대안이겠다. 이들은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생명, 인드라망 공동체, 귀농학교, 작은 학교, 생협 등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귀농학교에서는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농 농법을 가르치고 이곳을 졸업한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현재 20기를 배출하였는데 이들은 유기농법으로 지은 싱싱하고 몸에 좋은 농산물을 생협을 통하여 공동체의 구성원과 공유한다.

도시인 모두가 지역 농산물을 먹을 수 없고, 이 경우 주변의 가난한 나라는 계속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중심인 선진국의 사람들이 모여서 제3세계의 농민에 투자하여 유기농 채소와 곡물을 생산하고 이를 공정한 가격을 주고 구입하여 공유하는 델카보협동조합식 방법도 대안이다.

이런 대안들은 나를 건강하게 하면서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길이다. 오늘 내 앞에 놓인 밥상의 국그릇에 소의 순진무구한 눈망울과 아마존 원주민 아이가 해맑게 웃는 웃음, 그리고 인류의 미래가 담겨 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 제》《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등, 다수의 논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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