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편집자 주
쪰 이 논문은 계간 불교평론(재단법인 만해사상실천선향회 발행)이 후원한 불교심리학회 학술회(2008년 5월 24일 조계종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발표된 것임.

1. 심리치료와 불교수행론의 만남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요약한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괴로움〔苦〕의 정체’와 ‘괴로움의 원인〔苦集〕’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苦滅道〕’의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사성제의 진리는 해(解), 단(斷), 증(證), 수(修)라는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 성취된다. 즉,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괴로운 것〔苦〕이라는 점은 이해〔解〕해야 하고, 그러한 괴로움을 야기한 원인〔集〕은 끊어야〔斷〕 하며, 괴로움의 소멸〔滅〕은 체득〔證〕해야 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道〕은 닦아야〔修〕 한다.1)

또, 다음에서 보듯이 사성제의 가르침은 질병의 진단과 치료과정에 비유되기도 한다.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고하셨다. “네 가지를 갖춘 경우 세속의 왕에 필적하는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르느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질병을 잘 아는 것이니라. 둘째는 질병의 원인을 잘 아는 것이니라. 셋째는 병의 치료법을 잘 아는 것이니라. 넷째는 질병의 치료가 끝나면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 아는 것이니라. …… 여래·응공·등정각이 네 가지 능력을 갖추어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여래는 고성제(苦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고, 고집성제를 그대로 알고, 고멸성제를 그대로 알고, 고멸도성제를 그대로 아느니라.”2)

훌륭한 의사이기 위해서는 질병의 정체와 질병의 원인과 질병의 치료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질병의 치료가 끝나면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것을 잘 알아야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붓다는 중생의 병인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잘 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심리치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상담자는 먼저 내담자가 어떤 심리적 괴로움〔苦〕을 겪는지 정확히 파악〔解〕해야 하며, 그런 괴로움을 야기한 원인〔集〕을 찾아 낸 후, 합당한 방법〔道〕을 사용〔修〕하여 그런 원인을 제거〔斷〕함으로써, 내담자가 마음의 평안〔滅〕을 찾는 데〔證〕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사성제로 요약되는 불교의 수행론’과 ‘심리치료’는 이렇게 문제에 대한 접근과 그 해결 방식에서 일치하지만 그 최종 목표를 달리한다. 즉 ‘마음의 아픔을 겪는 내담자(來談者)’의 심리상태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일반인’의 수준 정도로 개선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심리치료인 반면,3) ‘마음의 아픔을 겪는 사람’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일반인’까지 ‘종교적, 철학적 고민에서조차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불교수행의 궁극 목표이기 때문이다.4)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심리치료의 내담자가 겪는 마음의 아픔은 불교용어로 ‘고수(苦受)’, 즉 ‘괴로운 느낌’에 해당할 것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을 심리치료에 적용할 때, ‘마음의 아픔〔苦〕을 겪는 내담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滅〕 위해서는 우선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괴로움의 근본원인 두 가지는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이며 이를 ‘번뇌(Kles큑, 惑)’라고 부른다.

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넓은 의미의〕 이러한 번뇌(惑, 障)를 다시 〔좁은 의미에서〕 번뇌장(煩惱障: Kles큑-a칥aran.a)과 소지장(所知障: Jn쁢ya-a칥aran.a)으로 구분한다. 유식학의 전범(典範)인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번뇌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번뇌장이란 것은 ‘실재하는 자아〔實我〕라고 망상분별한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내가 있고 나의 것이 있다는 생각〔有身見〕’5)을 선두로 삼는 128가지의 ‘근본적인 번뇌’ 및 등류(等流)의 ‘부수적인 번뇌’들이다. 이것들 모두가 중생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롭혀서 열반을 방해하기에 번뇌장이라고 명명한다.6)

소지장이란 것은 ‘실재하는 법〔實法〕이라고 망상분별한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내가 있고 나의 것이 있다는 생각〔有身見〕’을 선두로 삼는 견(見), 의(疑), 무명(無明), 애(愛), 에(킏), 만(慢) 등〔의 번뇌들〕이다. ‘앎의 대상인 무전도성’을 덮어서 보리를 방해하기에 소지장이라고 명명한다.7)

불교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하기에 이해가 쉽진 않겠지만, 그 졸가리만 추리면 번뇌장은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과 그런 집착에서 파생된 번뇌들이고 소지장은 ‘법에 대한 집착〔法執〕’과 그런 집착에서 파생된 번뇌들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면 내생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 해탈의 목표를 성취하고, ‘법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면 ‘삶과 죽음, 인생과 세계’에 대해 완전하게 통찰하는 ‘보리’를 획득한다.

그런데 ‘자아에 대한 집착〔아집〕’과 ‘법에 대한 집착〔법집〕’은 공성(空性)의 체득을 통해 제거된다. 《성유식론》 서두에서는 이렇게 번뇌의 발생에서 공성의 체득을 통한 번뇌의 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아집과 법집으로 인해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두 가지 장애가 모두 생한다. 만일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는〕 두 가지 공성(空性)을 체득하면 그런 〔두 가지〕 장애는 그에 수반하여 끊어진다. 장애를 끊으면 두 가지 뛰어난 결과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끝없이 태어나게 만드는 번뇌장을 끊기 때문에 참된 해탈을 증득하고, 통찰에 장애가 되는 소지장을 끊기에 대보리(大菩提)를 획득한다.8)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아공(我空)의 진리를 체득할 경우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이 끊어져 번뇌장이 사라지고 해탈〔열반〕을 증득하게 되며, “법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는 법공(法空)의 진리를 체득할 경우 법에 대한 집착〔法執〕이 끊어져 소지장이 사라지고 보리(菩提: Bodhi)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집〔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때 ‘자아’의 의미는 명확하다. 그러나 ‘법집’이라고 할 때의 법의 의미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법(法)’은 ‘~를 띄다(bear, hold)’를 의미하는 산스끄리뜨 어근 ‘√dhn.’에서 파생된 단어인 ‘dharma’의 번역어인데,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하며, 언어의 최소 단위인 ‘개념’을 의미하기도 하고, 나와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붓다는 자아와 세계를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등 ‘구성요소’로 낱낱이 분석한 후 갖가지 ‘개념’들을 동원하여 ‘가르침’을 펼쳤고 붓다의 가르침 모두가 ‘진리’이기에, ‘법(dharma)’이란 말에는 ‘구성요소’, ‘개념’, ‘가르침’, ‘진리’라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성유식론》에서 법집(法執)이라고 할 때의 ‘법’은 우리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구성하는 갖가지 ‘개념’들을 의미한다.9) 다시 말해 우리의 ‘인지(認知: Cognition)를 구성하는 개념’들이 바로 ‘법’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지성’과 ‘감성’으로 양분된다. 심리학 용어로 풀어보면 지성은 인지(認知)에 해당하고, 감성은 정서(情緖: Emotion)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구분법에 비추어 볼 때, 유식학에서 말하는 번뇌장은 ‘정서장애’, 소지장은 ‘인지장애’10)라고 번역 가능할 것이다.11) 유식학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내담자가 겪는 정서적 고통은 ‘자아에 대한 과도한 집착〔강력한 아집〕’에 기인한 것이며, 인지적 고통은 ‘잘못된 세계관이나 인생관〔강력한 법집〕’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아에 실체가 없다.”는 아공(我空)의 가르침을 통해, ‘정서장애’의 치료를 모색할 수 있고, “세계관이나 인생관과 같은 개념적 지식이 모두 허구”라는 법공(法空)의 가르침을 통해 ‘인지장애’의 치료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지장애에 해당하는 소지장과 정서장애에 해당하는 번뇌장의 선후 관계는 어떠할까? 《성유식론》에서는 “아집은 반드시 법집에 의존하여 발생한다〔我執必依法執而起〕”12)고 설명한다. 소지장에 의존하여 번뇌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지장애가 선행하고 그에 의존하여 정서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심리치료 기법 가운데 하나인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를 떠올리게 된다. 인지치료는 1960년대에 미국의 정신과의사인 아론 벡(Aaron T. Beck) 등이 창안한 심리치료법으로 그 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는 잘못된 ‘인지나 생각의 패턴’이 부적응적인 ‘행위와 감성의 반응’을 일으킨다고 추정하는 심리사회적 치료이다. ‘심리’와 ‘성격’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사고’에 변화를 일으키는 데 치료의 초점을 맞춘다. …… 부적응적인 행위는 ‘습관적인 사고(automatic thought)’라고 불리는 부적절하거나 비이성적인 사고패턴(思考pattern)으로 인해 야기된다.

어떤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자신의 왜곡된 관점에 따라서 습관적으로 반응한다. 인지치료는 이런 사고패턴〔‘인지의 왜곡’이라고도 함〕의 이면에 깔려 있는 여러 가지 가정들(assumptions)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이런 사고패턴을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런 과정을 ‘인지적인 개조’라고 부른다.13)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인지치료에서 말하는 ‘인지’는 ‘부적절하고 비이성적인 습관적 사고패턴’을 의미하며, ‘인지치료’에서는 그런 사고패턴의 이면에 깔려 있는 여러 가지 가정들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사고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을 지향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적절하고 비이성적인 습관적 사고패턴’은 유식학에서 말하는 ‘법집’에 다름 아니다. 또 “잘못된 ‘인지나 생각의 패턴’이 부적응적인 ‘행위와 감성의 반응’을 일으킨다.”는 추정은, “인지적 장애인 ‘법집’에 의존하여 정서적 장애인 ‘아집’이 발생한다.”고 보는 유식학의 이론에 그대로 대응된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불전의 모든 가르침이 집약되어 있는 사성제에서는 ‘괴로움〔苦〕의 정체’와, ‘괴로움의 원인〔苦集〕’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苦滅道〕’에 대해 가르치는데, 사성제를 골격으로 삼아 유식학의 번뇌론과 임상심리학의 인지치료를 비교, 대응시키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인지치료는 원래 우울증 치료를 위해 창안되었으나 자살, 자해적 행동, 범 불안 장애, 공황 장애, 일부 인격장애, 섭식장애, 건강염려증, 신체화 장애, 동통장애, 약물 혹은 알코올 중독성, 성기능 장애, 일부 소아정신질환, 부부갈등 등에 대해서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한다.14) 이런 대부분은 정서적 문제들인데, 내담자의 인지를 ‘건드림’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인지치료의 큰 원칙이다.

그런데 불전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인지의 전환’을 통해 ‘정서의 문제’를 해결한 대표적 예화 두 가지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속가의 부인에 대한 음욕 때문에 환속을 하려는 난다(Nanda)의 예화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처님께 애원하는 고따미(Gotam┓) 여인의 예화이다. 그런데 방식은 좀 다르지만 이 두 가지 예화 모두에 ‘연기(緣起)의 원리’가 도입된다. 본고에서는 이들 두 인물의 인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연기론이 각각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는지 분석해 봄으로써 ‘연기론에 바탕을 둔 인지치료 기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인지치료 기법이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수준을 넘어서 ‘깨달음을 지향하는 수행’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

2. 불전에 등장하는 연기론적 인지치료

1) 아공(我空)의 연기와 법공(法空)의 연기


원래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연기는 주로 십이연기를 의미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공식(緣起公式)의 경우도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으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며 ……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가 멸한다.”는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을 요약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가르침의 취지는 ‘무한히 반복되어 온 모든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은 연기관계에 있는 열두 가지 법(法)들의 반복된 흐름일 뿐이며, 그 이면에 ‘자아(自我: A칣man)’나 ‘인아(人我: Pudgala)’와 같은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즉, 무아(無我: Ana칣man, Pudgala-naira칣mya) 혹은 아공(我空)을 가르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반야계 경전이 등장하면서 ‘자아’를 넘어 ‘법(Dharma)’ 그 자체에까지 연기의 법칙을 확대 적용하여 법의 공성, 즉 법공(法空)의 이치를 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용수(龍樹, Na칐a칞juna: 150~250경)에 의해 창안된 중관학(中觀學)에서 이를 적극 논증한다. 중관학의 전범(典範)인 《중론송(中論頌: Ma칍hyamika Ka칞ika?》에서는 법과 법의 연기관계, 즉 법의 공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만일 ‘가는 자’를 떠난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가는 자’가 성립하겠는가? (M.K., 2-7)

‘색인(色因)’이 없으면 ‘색(色)’은 포착되지 않는다. ‘색(色)’이 없어도 ‘색인(色因)’은 보이지 않는다. (M.K., 4-1)

이 두 게송 모두 법과 법 간의 쌍조건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앞의 게송은 ‘가는 자 ↔ 가는 작용’, 뒤의 게송은 ‘색인 ↔ 색’15)과 같이 쌍방향의 조건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십이연기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식(識)과 명색(名色) 이외의 다른 모든 지분들이 ‘무명 → 행 → …… 생 → 노사’와 같이 일방향의 조건 관계를 갖는다.16) 그 이유는, ‘십이연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살아가는 자아의 공성을 드러내는 계기적(繼起的) 연기’이고, 중관학의 연기는 ‘가역적(可逆的) 관계를 갖는 법과 법 간의 구기적(俱起的) 연기’이기 때문이다. 즉, 십이연기는 아공을 드러내는 연기이기에 불가역적이고 중관학의 연기는 법공을 드러내는 연기이기에 가역적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아공(我空)의 연기: A → B
법공(法空)의 연기: A ↔ B 〔A → B, A ← B〕

이런 조망은 앞 장에서 설명했던 유식학의 수행론에도 그대로 대입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두 가지 번뇌 가운데 정서장애에 해당하는 번뇌장은 아집(我執)으로 인해 야기되며 아공을 체득함으로써 사라지고, 인지장애에 해당하는 소지장은 법집(法執)으로 인해 야기되며 법공을 체득함으로써 사라진다. 그리고 앞으로 소개할 난다(Nanda)의 예화와 고따미(Gotam┓) 여인의 예화 모두 아(我)와 법(法) 가운데 법의 문제, 즉 인지(認知)의 문제와 관계된다. 다시 말해 법의 연기성을 체득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인지치료의 예화들이다.

2) 난다(Nanda)의 예화와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유전연기(流轉緣起)

《증일아함경》에는 출가 전의 옛 부인에 대한 음욕을 참지 못해 환속하려는 난다(Nanda, 難陀)를 교화하는 예화가 있다. 재가자의 경우 건전한 부부생활을 통해 음욕을 충족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없겠지만, 율장의 4바라이법(波羅夷法: pa칞a칓ika?dhamma?17)에서 보듯이 출가자의 경우는 단 한 번의 ‘직접적인 성교’만으로도 그 자격을 박탈당한다. 따라서 난다의 예화는 일반인에게도 활용될 수 있는 심리치료의 예화가 아니라, ‘고결한 출가자로서의 심성’을 갖추게 만드는 ‘성격(Personality) 교정’의 예화로 볼 수 있다. 난다의 예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속가(俗家)의 부인 순다리(孫陀利, Sundar┓)를 잊지 못하여 난다가 환속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세존은 ‘불로써 불을 끄리라〔以火滅火〕’고 생각하고 난다를 원숭이들이 사는 향산(香山)으로 데리고 간다. 세존은 ‘애꾸눈 원숭이’를 가리키며 그 모습과 순다리의 미모를 비교하게 한다. 난다는 순다리의 미모는 애꾸눈 원숭이에 비할 바가 아니며 원숭이와 비교하니 순다리가 더 보고 싶어진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세존은 천상으로 난다를 데리고 가서 500명의 천녀들을 보여준 후 그녀들의 미모와 순다리의 미모를 비교하게 한다. 난다는 “천녀들과 순다리를 비교하니 순다리는 마치 ‘애꾸는 원숭이’같이 추악해 보인다.”고 답한다. 세존은, 난다가 청정행을 닦을 경우 내생에 이런 천녀들 모두의 남편이 되어 즐기며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난다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甚懷喜悅 不能自勝〕’ 속가의 옛 부인을 완전히 잊고 열심히 수행 정진한다. 얼마 후 세존은 난다에게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보여준다. 지옥에서는 수많은 중생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한쪽에 빈 가마솥이 보였다.

 난다가 옥졸에게 그 용도를 묻자 옥졸은 “수행을 잘 한 난다가 내생에 하늘나라에 태어나서 일천 년 간 천녀들과 즐기다가 목숨을 마치면 무간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텐데, 이 가마솥은 그 때 난다가 들어가 살 곳이다.”라고 대답한다. 옥졸의 말을 듣고 공포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선 난다는 크게 참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사람의 삶이란 귀할 것도 없으며 / 천신도 수명이 다하면 죽는구나 / 지옥의 고통은 쓰리고 괴로운 것 / 열반의 즐거움만 오롯이 존재하네.” 그 후 난다는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아라한이 된다.18)

붓다는 먼저 난다의 출가 전 부인인 순다리의 외모를 ‘애꾸눈 원숭이’와 비교함으로써 난다에게 순다리의 ‘아름다움’을 확인시킨다. 그리곤 난다에게 천녀들의 모습을 보여주어 동일한 순다리가 추하게 보이게 한다. 붓다는, “청정행을 닦을 경우 천상에 태어나 그런 천녀들의 남편이 되어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순다리에 대한 난다의 음욕을 우선 잠재워 수행에 매진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불로써 불을 끄는〔以火滅火〕’ 이열치열(以熱治熱)의 교화방식이다. 불전에서는 아난다(A칗anda)가 이러한 난다를 꾸짖는 게송이 발견된다. 이는 다음과 같다.

수양이 서로 맞부딪칠 때/ 앞으로 가려 하나 물러서듯이/ 그대가 음욕(淫慾) 위해 계(戒)를 지키면/ 그것도 역시 이와 같으리/ 몸으론 비록 능히 계(戒)를 지키나/ 마음만은 욕망에 잡혀 있어서/ 그 행동은 청정하지 못한 것이니/ 이런 계(戒)를 지켜서 무엇하리요?19)

난다가 출가 전 부인인 순다리에 대한 욕정을 버리긴 했지만, 욕정 그 자체를 버린 것이 아니라, 더 큰 욕락을 얻는 것이 그 목적이었기에 아난다로부터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얼마 후 붓다는 무간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천상에 태어나 복락을 누리더라도, 천상에 태어나게 만든 지계의 공덕이 소진되면 언젠가 그러한 지옥에 태어나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자각하게 만듦으로써 난다로 하여금 참된 수행자의 길을 가게 한다.

욕정에 시달리던 난다를 수행에 전념하게 만들었던 붓다의 이러한 가르침에서 우리는 ‘연기적 조망’을 추출할 수 있다. 이는 앞 절에서 정리했던 아공과 법공의 두 가지 연기 가운데 ‘법공의 연기’ 즉 ‘A ↔ B’로 표시되는 쌍조건적인 연기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원숭이(醜) ↔ 순다리(美)
순다리(醜) ↔ 천녀들(美)
윤회(苦) ↔ 열반(樂)

애꾸눈 원숭이와 비교할 때 아름다웠던 순다리가 천녀들과 비교하니 추악하게 보인다. 순다리의 외모는 변하지 않았는데 비교대상에 따라 그 모습이 달리 보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길이의 막대기가 있을 때, 더 짧은 막대기와 비교하면 길어 보이지만 더 긴 막대기와 비교하면 짧아 보이는 것과 같다. 어떤 크기의 방이 있을 때, 보다 작은 방과 비교하면 커 보이지만 더 큰 방과 비교하면 작아 보이는 것과 같다.

이 때, ‘긴 막대기’나 ‘짧은 막대기’라는 생각, ‘큰 방’이나 ‘작은 방’이라는 생각들이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 즉 연기(緣起)한 것이듯이 순다리의 ‘아름다움’이나 ‘추악함’ 역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나 천녀들과의 비교를 통해 발생한 생각들이다. 연기한 것들이다.

연기공식에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와 같이 긍정적으로 표현되는 연기를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 하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와 같이 부정적으로 표현되는 연기를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한다. 상술(上述)한 난다의 예화에 동원된 연기는 이 가운데 유전연기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원숭이의 추악함에 의존〔緣〕하여 순다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발생〔起〕하지만, 곧이어 천녀들의 아름다움에 의존〔緣〕하여 순다리가 추악하다는 생각이 발생〔起〕함으로써 난다는 순다리에 대한 욕정을 잊고서 천상락(天上樂)을 위한 청정행에 매진한다.

이어서 붓다는 그러한 천상의 쾌락도 잠깐일 뿐 지계의 공덕이 소진되면 다시 지옥의 가마솥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난다에게 확인시킨다. 일반인들은 윤회의 세계를 즐거운 곳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도 직후의 붓다 역시 ‘온갖 욕망을 다 소멸한 열반〔滅諸欲愛盡涅槃〕’에 대해 얘기해 보았자, 이를 납득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설법하기를 주저했다고 한다.20)

사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세속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열반’은 ‘공포’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갖는 존재는 누구든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아수라, 천상의 육도를 끝없이 오르내려야 하며 이 가운데 인간, 아수라, 천상과 같은 삼선도에 태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태평양같이 넓은 바다 밑을 헤엄치던 한 마리의 눈 먼 거북이가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다가 마침 그곳에 떠다니던 나무판자의 구멍에 목이 끼는 정도의 확률’밖에 안 된다21)는 점을 직시할 경우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즉, 윤회를 즐겁다고 보는 사람에게 열반의 사라짐은 공포로 느껴지겠지만, 윤회의 괴로움을 통찰한 사람에게는 열반의 사라짐이야말로 행복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런 조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윤회를 즐거움으로 볼 경우〔緣〕 열반의 사라짐에서 공포스러운 느낌이 발생〔起〕하지만, 윤회의 괴로움을 자각할 경우〔緣〕 열반의 사라짐에서 행복한 느낌이 발생〔起〕한다. 천상의 욕락을 위해 청정행을 닦던 난다를 ‘진정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해 지옥의 가마솥을 보여주는 예화는 이런 두 가지 유전연기(流轉緣起) 가운데 후자에 해당한다.

연기론의 유전문적(流轉門的) 방식의 교화를 통해, ‘육도윤회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괴로운 곳일 뿐’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통찰하는 불교수행자의 인지체계(Cognitive System)를 갖추게 된 난다는 천상의 쾌락이 아니라 그런 천상을 포함하는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열반’을 지향하는 청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게 된다.

3) 고따미(Gotam┓)의 예화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환멸연기(還滅緣起)

앞 절에서 소개한 난다의 예화에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되는 연기의 유전문이 활용되었지만 이와 반대로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연기의 환멸문이 교화에 사용되기도 한다. ‘말라깽이 고따미(Kisa?Gotam┓)’ 여인의 예화가 바로 그것인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밧티(Sa칥atth┓) 성에 ‘말라깽이 고따미’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결혼 후 심한 학대를 받으며 생활했는데 아들을 하나 낳자 사람들은 이 여인을 칭찬하며 더 이상 학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뛰어 놀 수 있을 만큼 자란 아들이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비탄에 잠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등에 업고 약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부처님을 찾아 왔다. 그리곤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여인은 온 종일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하려고 했지만 단 한 톨의 겨자씨도 구할 수 없었다. 그 때 여인은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 예류과(預流果)를 얻게 된다(요약).22)
여기서 고따미 여인의 괴로움은 “남들은 혈육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나만 혈육의 죽음을 경험했다.”거나 “남들은 모두 행복한데 나만 불행하다.”는 잘못된 ‘인지(Cognition)’에서 비롯된 것이다. 붓다는 고따미로 하여금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을 찾아내어 겨자씨를 얻어 오게 하고 그러면 죽은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겨자씨를 구하지 못한 고따미는 “나에게만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불행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겨자씨를 구하는 과정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고따미의 ‘잘못된 인지’가 개선되는 과정을 사성제 및 유식학의 번뇌론과 대응시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예화에서 고따미 여인이 최종적으로 깨달은 것은 “나에게만 ‘혈육이 죽은 슬픔’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혈육이 죽은 슬픔’이 있다.”는 사실이다. 혈육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려다가 그런 시도가 무모한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다 그렇다!”라는 지혜가 생긴 것이다.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道聖諦)는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하며 팔정도는 지계, 선정, 지혜의 삼학(三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학을 닦는 궁극적 목표는 이 가운데 마지막인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는 ‘공(空)의 지혜’이며 ‘해체의 지혜’인데, 이런 해체가 ‘인지치료’에 활용될 경우 고따미의 예화에서 보듯이 절대부정의 조망과 절대긍정의 조망을 병치하여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누구나 다 그래!”라는 격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고따미에게 잘못된 인지가 발생하는 과정은 연기의 유전문(流轉門)에 해당한다. 고따미에게 지독한 슬픔을 초래한 생각은 “나 이외의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이 있기에 나에게만 불행이 있다.”는 인지로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유전연기(流轉緣起)의 공식과 그 구조가 같다. 그러나 겨자씨를 구하러 다녀본 결과 “나 이외의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만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인지가 생기게 된다. 이는 “이것이 없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저것이 없다〔= 있는 것이 아니다〕.”는 환멸연기(還滅緣起)의 공식에 그대로 대응된다.

 여기서 “나에게만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조망은 역으로 “누구에게나 다 불행이 있는 법이다.”라는 조망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앞의 것은 절대부정(絶對否定)의 조망이고, 뒤의 것은 절대긍정(絶對肯定)의 조망이지만 그 취지와 목적은 동일하다. 두 가지 모두 고통을 야기하는 ‘잘못된 분별’을 해체시켜 주는 조망으로 ‘인지장애’를 치료해 주는 조망이다. 유식학의 용어를 빌리면 “소지장(所知障)을 적멸(寂滅)에 들게 하는 법공(法空)의 조망이다.”

3. 연기론적 상담사례와 바람직한 상담기법

이상에서 보듯이 난다의 예화에서는 ‘이열치열’의 방식이 활용되었는데 이는 ‘유전연기’에 해당하고 고따미의 예화에서는 ‘동병상련’을 체감케 하는 방식이 활용되었는데 이는 ‘환멸연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인지치료의 선구자 아론 벡(Aaron Beck)이 제시하는 상담사례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연기구조를 추출할 있다. 아래 인용하는 두 가지 사례는 ‘정서증상’ 가운데 ‘죄책감’과 ‘수치심’을 치료한 사례들이다.

〈사례1〉
치료자: 당신이 왜 딸의 자살에 책임이 있나요?
환자: 나는 그 애가 자살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어야 했어요.
치료자: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자살에 대해서 연구를 해오고 있지만, 누구도 어떤 사람이 언제 어디서 자살할지 정확하게 예언할 수 없습니다.
환자: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어야 했어요.
치료자: 당신이 알 수 없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믿음은 자연의 섭리에 모순되는 것입니다. 당신 딸이 자살을 하기로 결정하는 실수를 했다는 것과 당신이 이 일에 책임이 있다고 고집하는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입니다.23)

〈사례2〉
환자: 직장 사람들이 내가 우울해져 있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나를 나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치료자: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때때로 우울해집니다. 이것이 왜 수치스럽습니까?
환자: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들은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치료자: 당신은 사회적 문제와 심리적 상태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희생자를 책망하는 꼴입니다. 그들이 비록 당신을 나쁘게 생각할지라도 이는 그들의 무지 때문이거나 사람을 평가하려는 미숙한 태도 때문이므로 당신은 그들의 평가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들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는 경우에만 즉, 당신이 그것이 수치스럽다고 실제로 믿을 때에만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24)

위의 〈사례1〉에서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당신만 다른 누군가의 자살을 예측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의 자살을 예측하지 못합니다.”라는 식으로 해체의 조망을 제시한다. 앞 장에서 소개했던 고따미의 예화와 마찬가지로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의 조망을 병치하는 ‘동병상련의 환멸연기’가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례2〉에서는 “당신만 때때로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때때로 우울해집니다.”라는 조망과 “우울한 사람을 열등하다고 보는 자는 무지하거나 미숙한 사람이다.”라는 조망이 제시되는데, 전자에는 ‘동병상련의 환멸연기’가 내재해 있고 후자에는 ‘이열치열의 유전연기’가 내재해 있다.

내담자의 신뢰를 받는 노련한 상담자의 경우 상담과정에서 내담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심리상담’이라는 것이 반드시 전문기관에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친구나 선후배 간에 이루어지는 ‘심리상담’이 훨씬 많을 것이다. 친분관계에 있는 상담자와 내담자는 언제든지 경쟁관계로 돌변할 수 있으며 내담자는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재산의 문제’로 우리에게 ‘복통(腹痛)’이라는 ‘정신신체장애(Psychosomatic disorder)’를 일으키는 장본인은 ‘빌 게이츠’나 ‘로스차일드’가 아니라, 너무나 친하게 지냈던 ‘땅을 산 사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담자와 경쟁관계에 있는 상담자의 경우 내담자의 마음을 오히려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연기론을 활용한 바람직한 상담기법’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4. 불교적 인지치료의 궁극 목표 ―‘인지의 완전한 해체’

본고 서두에서 “불교의 수행론과 심리치료는 문제에 대한 접근과 그 해결 방식에서 일치하지만 그 최종 목표를 달리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말라깽이 고따미 여인의 예화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는 데 환멸연기의 방식으로 법공의 조망이 활용되었지만, 그것만으로 고따미 여인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번뇌까지 녹인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 예화는 고따미 여인을 출가하게 만든 계기일 뿐이었다. 출가 후 고따미는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 수행정진하여 첫 단계의 성자인 예류과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수행을 하고 어떤 조망을 체득해야 ‘인지장애’를 넘어서 ‘깨달음의 체득’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모든 번뇌를 제거하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 있을까? 앞에서 소개했듯이 불교유식학에서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체득할 경우 모든 번뇌가 제거된다고 가르친다. 아공을 체득할 경우 아집(我執)이 야기한 번뇌장이 사라지고, 법공을 체득할 경우 법집(法執)이 야기한 소지장이 사라진다. 그리고 아집은 법집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이기에〔我執必依法執而起〕, 모든 번뇌를 제거하기위해서는 먼저 법집을 제거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갖가지 개념〔法〕들을 재료로 삼아 우리의 사유(思惟)가 만들어 내었던 세계관과 인생관〔見: dr.s.t.i〕’을 해체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의 사유가 만들어 내었던 세계관과 인생관은 우리의 인생행로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좌표가 되기도 하지만, 거꾸로 우리에게 ‘인지적 문제’를 일으켜 ‘심리적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법공을 체득하여 법집을 제거할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화엄학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법의 외연(外延)이 무한히 열려 있다는 조망을 체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야중관학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법의 실체를 해체하는 절대부정의 조망을 체득하는 것이다.

본고 제1장에서 ‘법’은 ‘개념’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25) 사유의 최소 단위인 ‘개념’의 외연이 무한히 열려 있다는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그대로 무한이다)’, ‘일중일체(一中一切: 하나 속에 무한이 들어 있다)’26), 또는 ‘일중해무량(一中解無量: 하나 속에서 무한을 해석해낸다)’27)의 ‘절대긍정의 조망’이나,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모든 개념들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니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 있다)’28)를 역설하는 절대부정의 조망을 체득할 경우 우리는 ‘개념’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 ‘모든 인지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의 조망을 한 가지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여기서 ‘발표자’이지만, 학교에 가면 ‘교수’이고, 아내에게는 ‘남편’이고, 자식에게는 ‘아버지’이고, 조카에게는 ‘삼촌’이며, 부모에게는 ‘아들’이고, 길 가는 행인에게는 ‘아저씨’이며 …… 아프리카 정글에서 만난 배고픈 사자에게는 ‘먹음직한 고깃덩어리’이고, 바퀴벌레에게는 ‘위험한 괴물’이다. 이 가운데 “그 어떤 이름도 본래의 내 이름이 아니지만〔無名〕, 이 모든 이름들이 나에게 부여될 수가 있다〔一卽一切〕.” 전자는 ‘나’라는 하나의 개념에 대한 반야중관적인 절대부정의 조망이고, 후자는 화엄적인 절대긍정의 조망이다.29)

진제(眞諦)와 속제(眞諦)의 이제(二諦) 가운데 진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렇게 ‘절대부정’의 조망과 ‘절대긍정’의 조망을 병치함으로써 ‘분별의 고통’을 극복한 대표적 예화가 바로 ‘아들 잃은 말라깽이 고따미 여인의 일화’인 것이다. 겨자씨를 구하던 고따미는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누구나 다 그래!”라는,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이 병치된 해체의 조망’을 통해 ‘인지의 고통’에서 해방된다.

‘나’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논리의 토대가 되는 수만 가지 개념들 모두에 대해 우리는 이와 동일하게 ‘절대긍정’의 방식으로 조망할 수도 있고, ‘절대부정’의 방식으로 조망할 수도 있다. 다른 예를 들어, ‘생명’이라는 개념의 경우, 《화엄경》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생명이다.”라고 가르치지만, 거꾸로 《금강경》에서는 “생명이랄 것도 없다.”고 가르친다.

《화엄경》에서는 ‘주해신(主海神), 주산신(主山神), 주하신(主河神) ……’이라고 하듯이 바다도 살아 있고, 산도 살아 있고, 강도 살아 있으며,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고 하듯이 태양도 보살이고 달도 살아 있는 보살이다. ‘생명’ 개념에 대한 절대긍정의 조망이다. 이와 반대로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을 비판하면서, 자신에 대해 ‘생명체〔Sattva: 衆生〕’라는 ‘생각〔Samjn쁝? 想〕’도 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생명’ 개념에 대한 절대부정의 조망이다. 《화엄경》과 《금강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생명이기에 생명이랄 것도 없다.”
이렇게 ‘나’와 ‘생명’은 물론이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에서 절대긍정과 절대부정의 조망을 발견함으로써 그런 개념들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심리적 아픔’을 초래하고, ‘종교적 철학적 고민’을 만들어내었던 ‘과거의 인습적 인지체계〔Cognitive system〕’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불교유식학의 용어로 표현하면 ‘소지장(所知障)’이 사라지는 것이다. ‘분별의 고통’이 해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적(認知的) 오도(悟道)의 체험’을 근대의 고승 효봉(曉峰: 1888~1966)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30)
하늘을 나는 제비가 바닷물 속에 집을 지었는데, 숲속에 있어야 할 사슴이 그 제비집에서 새끼가 아니라 알을 낳아 품고 있다. …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세계가 무너져 있고 언어가 흩어져 있다. ‘일반적인 인지치료’를 넘어서 ‘인지 그 자체’가 완전히 ‘해체’되어 있다. 이런 해체와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사유’가 만들어낸 종교적, 철학적 고민 모두에서 해방된다. 불교적 인지치료의 궁극이다. ■

김성철 / 서울대 치과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저서에 《중론》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를 비롯하여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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