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진 미술평론가

1. 서언: 발제의 변

한국미학예술학회는 근·현대의 주요한 미학의 영역들을 연구대상으로 함과 동시에 이와 병행하여 지난 1999년부터는 〈한국예술의 해석가능성〉이라는 대주제로 일련의 기획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한국 예술과 한국인의 미의식의 근거와 핵심적 요소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밝혀내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에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이 반영된 무속, 그리고 4대 종교와 관련된 사상의 측면들뿐 아니라 동양철학을 망라하여 우리의 미와 예술 현상의 근원을 탐구하고 있다.

그동안의 기획 심포지엄에서 다뤄진 연구 주제들을 분야별로 분류하면, ‘한국 미학 연구의 근본문제’(제1주제), ‘한국 미학의 기초개념 연구’(제2주제), ‘미학 연구의 방법적 모색과 과제’(제3주제), ‘한국 미학 연구의 방향성’(제4주제) 등으로 총괄된다. 본 학회는 1999년 이래 이와 같은 기획 심포지엄을 통해 거의 미답지였던 ‘한국 미학’을 이론적으로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였으며, 무엇보다 여러 가지 문제 발굴과 구체화를 통해 향후 연구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미학 연구의 연계선상에서 본 학회는 2006년 봄 심포지엄에서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전통 예술과 사상에 넓은 지반을 이루는 불교예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재인식하고 불교예술과 이를 통해 추출할 수 있는 미학적 단초들을 탐구하기 위해 〈불교미학과 불교예술〉이라는 주제로 기획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이인범(상명대)의 〈불교미학 예술학 시론〉, 김응기(법현, 동국대)의 〈범패의 미학: 경전에 보이는 악과 범패 가창의 미를 중심으로〉, 이진오(부산대)의〈형상언어를 통한 불교의 경계의 표현과 예술〉에 관한 연구발표를 통해 불교예술과 미학의 관계 및 그 특성들을 살펴볼 수 있었으며, 주성옥(명법, 서울대)의 〈중국 산수화 발전에 끼친 선종의 영향〉, 최재목(영남대)의: 〈‘건달’의 재발견: 불교미학, 불교풍류 탐색의 한 시론〉에 대한 연구발표는 불교예술의 사상적, 미학적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이 심포지엄은 불교예술의 미적 근거를 파악하고 불교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야심찬 기획이었고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지만, 당 심포지엄의 종합토론에서 거론되었듯 (《미학·예술학 연구》 제23집, 154-184쪽 참조) 일회적 심포지엄으로는 불교미학이라는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심포지엄을 통해 얻어진 바는 불교미학과 더 나아가서는 이와 연관된 향후 한국 미학 연구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제기되었다는 점과, 보다 중요한 것으로는 불교의 기초개념들을 통해 불교미학을 정초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2007년 4월 기획 심포지엄에서는 미학 연구에 있어 대표적인 범주로 거론되어온 인격미, 자연미, 예술미의 불교철학적 경계를 탐색하고, ‘자비(eleos/엘레오스)’의 개념 및 ‘불이, 일여’, ‘법열, 삼매(THEIA와 MANIA)’, ‘내심경’, ‘유심낙’, ‘무상적정’,‘공(空)과 일체(一切)’ 등의 개념에 대하여 미학 연구의 기초개념 범주로 새롭게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불교미학의 정초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렇게 계획된 심포지엄은 불교사상에 함축된 미적 체험의 근거와 원리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 미·추를 분별하는 것을 뛰어넘는 철저한 의식의 부정이 절대 자유로 가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불이미(不二美)가 진정한 의미의 자재미이고, 진정한 극치의 미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미적 체험 일반에서 거론되는 ‘의식의 부정성을 통한 진정한 자유의식’, ‘몰아’를 전제로 한 미의식의 오묘한 경계 해명에 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종교학, 미학, 문학, 사회학, 철학 등의 학제 간 교류를 촉진하여 연구 성과들을 공유하게 한다는 데에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번 2007년 봄 기획 심포지엄은 여러 분야의 고명한 학자 분들을 모시고, 〈불교미학·예술학의 문맥과 불교예술해석의 지평〉이라는 제목 하에, 제1부에서는 ‘불교미학 예술학의 이론적 가능성’을 살피게 될 것이고, 제2부에서는 ‘불교사상과 예술사유’라는 제목으로 불교사상과 예술에 대한 해석이 다각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현 단계 불교철학 및 예술론의 연구 성과들을 돌아보고 재고하게 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예술 현장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불교학과 미학을 접목하는 데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론을 통하여 한국 미학의 근간과 정체성을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한 계기도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이를 통해 부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예술과 그에 대한 사유를 둘러싼 전통과 경험을 두텁게 축적하고 있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양의) 불교문화예술을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평과 가능성을 넓혀 현대의 중요한 문화 컨텐츠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본 심포지엄을 통해 다양한 학문 분야의 학제간 교류가 촉진되어 특정 현상(예술)에 대한 단면적 접근으로만 연구되었던 기존 연구의 일면성과 한계를 벗어나 보다 다층적이고 심도있는 불교미학 연구의 기틀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되며, 이로써 불교미학 및 한국 미학에 관한 국제적 연구를 개진하는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 여겨진다.

2. 종교와 예술, 그리고 미학

인간은 본래 ‘예술적인 인간’(homo estheticus)이면서 또한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sus)이라고 할 만큼,1) 예술과 종교는 밀접히 교착융합(交錯融合)하는 가운데 문화의 큰 흐름을 형성해 왔다.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지평 위에서 영위된다. 말하자면 생존으로서 인간조건의 자기 길을 밟아가지만, 동시에 우주나 신들의 삶, 초인간적인 삶을 공유하기도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열린 세계 가운데서 살고 있으며 또한 그의 실존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확충해가는 정신적 능력을 타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과 종교는 바로 이러한 인간정신의 투사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의 시원은 종교적 경험과 깊이 연루되어 있으며, 최초의 예술은 주술적인 것과 종교의례 가운데의 노래와 춤, 그림 등의 혼합된 복합체로서 미지의 세계에 대응하는 삶의 한 방식으로서 잉태되고 태어났다.

물론 예술의 본성과 양태가 종교의 그것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그 본래적 목적과 표현방법에도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진실한 예술은 어떤 의미로는 종교적”2)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본래의 사명이 개인을 진실한 인간성에로 환원시켜 현실의 압력과 인간조건의 질곡(桎梏)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한다면, 종교의 이상 또한 인간의 욕망을 순화시키고 현실계의 한계상황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사명은 종교의 높은 이상과 합치된다.

이러한 합일점은 바로 인간정신의 가능성, 즉 자아와 환경, 자아와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의 유한성과 불확실성 가운데 보다 나은 상태를 지향하는 인간성의 한 계기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우리는 현실의 결핍상태를 조정해가려는 창조적 결의(決意)가 어떻게 초인간적(超人間的)이고 비의적(秘義的)인 정신과 교합(交合)하고 있는가 하는 인간정신의 위대성을 수많은 문화 유산 속에서 가늠해보게 된다.

헤겔(G. W. F. Hegel)은 인간정신이 거쳐 온 그 특유의 발생론적(發生論的) 전개를 다룬 《정신현상학》(Ph쮉nomenologie des Geistes, 1807) 속에서 예술과 종교의 양태 상의 차이를 밝힘과 동시에, 예술적 의식과 종교적 의식은 처음부터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발전해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헤겔이 전개한 ‘의식의 경험의 학’으로서의 정신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의 본성으로 되돌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은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세 분야를 탄생시켰지만 그 뿌리는 하나이다. 즉 예술은 ‘이념(理念)의 감각적 비추임’이며, 종교는 ‘이념의 정신적 표상(表象)’이고, 철학은 ‘이념의 개념화’로서 다만 그 양태를 달리할 뿐 ‘절대정신의 저기전개(自己展開)’라는 측면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3)

 말하자면 예술의 본성은 정신성과 감각적 현상의 결합에 있으며, 정신성을 이질적인 자료를 통해 객관화시킨다. 그러나 종교의 본성은 절대적 정신성의 ‘주관적 표상’에 있으므로 그러한 한도에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외적인 질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예술과는 구분되며 정신 자체의 순수한 자기표상(自己表象)이자 자기인식(自己認識)인 철학과 상통하지만 또한 철학과 다른 점은, 철학은 정신의 개념화를 소임으로 삼으며, 종교는 신(神)의 믿음에서 성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에 관해 알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모름지기 신 자신의 정신이고 또 한편 신이란 가장 정순한 인간의 정신에 다름 아니므로 철학의 관심사와 구별되는 종교의 고유한 관심사란 없다.

헤겔에게 있어서 종교가 외적 질료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예술이 종교의 필요조건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종교는 정신성의 객관화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갖기 때문에 비가시적(非可視的)인 이념을 감각적인 형상으로 가시화(可視化)하는 예술의 도움을 빌린다. 실제로 우리는 사원이나 교회가 예술의 발전을 주도해온 시대를 역사 속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한편 종교의 경우와는 달리 참된 예술은 반드시 종교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절대정신의 표상이라는 최고의 내용을 예술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참된 예술적 의식은 내용적인 면에서 종교적 의식과 전혀 별개가 아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말미 〈종교〉편(Ⅶ)에서 ‘자연적 종교’(Ⅶ .A), ‘예술종교’(Ⅶ. B), ‘계시종교’(Ⅶ. C)라는 제하에 예술적 의식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며, 그 논지가 이후의 《미학강의》(Vorlesungen ?er die 훥thetik, 1817-1829)4)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참된 예술적 의식은 정신이 절대성의 단계로까지 발전할 경우 비로소 나타나며 진정한 예술은 “가장 보편적인 세계관 및 모든 시대와 민족들의 종교적 관심들”에 결부되어 있는 인간의 “가장 최고의 절대적인 욕구들”5)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욕구들은 자신의 존재와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 일반을 자기 스스로 정립하려는 인간의 사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예술은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자의식(自意識)에 도달하려는 사유의 본성을 현실화하는 한 필수불가결적 방편이다.

헤겔은 “모든 예술의 목적은 정신을 통해 나타난 동일성(同一性)으로서, 이 동일성 속에서 영원한 것, 신적인 것, 그리고 절대적으로 참된 것은 실제적 현상과 형태를 통해 우리의 외적 관조와 심정과 표상에 현시된다.”6)고 말한다. 여기서 이른바 ‘정신을 통해 나타난 동일성’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일상적 의식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스스로에게 객관적 현존재(現存在)를 부여하려는 정신의 자기운동(自己運動) 가운데서 성립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자유의식의 실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생존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외적 대립, 예컨대 육체와 정신, 대상과 사유, 현상과 물자체(物自體), 자연과 이념, 감각적 경향성과 도덕 등의 수많은 대립에서 벗어나 그 궁극적 극복으로서의 절대정신에 도달하려는 형이상학적 열망을 근본적 소질로서 지니고 있다.7)

이상과 같은 헤겔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술과 종교는 서로 그 양태를 달리하면서도 인간정신의 노정에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또한 그 높은 이상에 있어 서로 합치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예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서양에서는 이미 플라톤(Platon), 플로티노스(Plotinos) 이래로 개진되어온 예술과 미(美)의 신현적(神顯的) 의미와 함께 ‘참된 미는 절대적 선(善)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전통적 예술론8)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지만, 특히 헤겔의 사상은 ‘정신으로서의 세계사의 노정’이라는 큰 틀 속에서 사변적(思辨的)인 방법이면서도 예술과 종교의 형이상학적·비의적(秘義的)인 특질의 근거를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헤겔 자신도 동·서양의 문화를 가릴 것 없이 역사적 실례를 들어 자신의 논거를 전개했지만,9) 실제로 동양문화권에서의 우주와 인간, 자연과 정신, 혹은 도(道)와 신기(神氣) 등의 예술·종교문화의 기본개념 논의와도 일맥상통한다.10)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미학자와 종교학자들이 진·선·미·성(聖)의 통로와 경계, 그리고 종교와 예술의 궁극적 가치와 그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하는, 여전히 난제(難題)로 남아 있는 과제에 직면해 있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광범한 논의는 유보하기로 한다. 다만 앞서 살펴본 헤겔식의 논거를 염두에 두면서 인간조건에 대한 일종의 조정방식으로서의 예술 창조에 내재하는 종교적 성격에 대해 좀 더 살피기로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리글(A. Riegl)은 예술 창조의 내적인 동인(動因), 즉 ‘예술에 내재하여 예술을 움직이는 힘’으로서의 ‘미적 충동(美的衝動)’ 내지 욕구를 ‘예술의지’(Kunstwolle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지’란, 예술작품의 외적인 다양한 양식 특성을 내면에서 규정하는 중심적인 형성원리로서의 양식원리를 지칭한 것이었고,11) 이 개념에 대한 해석·수용에 있어 많은 학자들이 예술과 종교의 내적 연관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예술의지 개념을 비합리적·형이상학적 특질이 부여된 힘으로 해석한 카슈니츠(Kaschnitz)는 예술의 ‘일반적 구조’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을 세계에 대(對)한 또는 세계 내(內)에서 작용하는 신적(神的)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결합에 대한 비유로서 파악할 경우, 구조란 (…) 예술 안에 우주적 내지 신적인 에너지의 상태로 다가가는 어떠한 힘의 작용형식(Wirkungsform)이다.”12) 그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한편으로는 물(物, Materie)의 조직화가 작품으로 실현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물에 직면해 예술적인 비유의 조직화로서 예술적 표현이 달성된다”13)고 한다.

 이처럼 어떠한 신비스런 힘이 예술의 일반적 구조를 결정짓는다고 보았던 카슈니츠를 이어 제들마이어(H. Sedlmayr) 역시 리글의 예술의지 개념을 헤겔적인 전통 속에서 해석, 그것을 각 예술작품의 중심적 구조원리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사 전개의 구조원리로서 파악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정신은 비록(신과 인간 사이가) 부정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절대정신에 관한 관계, 즉 신에 대한 관계에서 가장 깊이 규정된다.”14)고 보고 “인간정신과 절대정신과의 관계에 대한 효력을 신뢰하지 않는 한 예술이나 역사를 ‘진지하게’다룰 수 없다.”15)고 전제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사는 시대의존적인 인간정신의 노정 속에서 ‘절대정신의 현현의 역사’일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16) 여기서 절대정신의 신(神)이란, 해석학적인 예술학의 지평에서 생각해 볼 때 세계 내에 있는 인간의 현존재(現存在)의 최종적이며 무제약적인 의미 근거를 뜻하며, 이 의미 근거는 모든 다른 것을 철저히 넘어서고 동시에 근거로 하면서 모든 다른 것을 포괄한다.

이러한 의미논거 자체(神)를 예술작품의 ‘중심’으로 보고 있는 제들마이어는 예술사를 ‘본래적인 신성화(神聖化) 내지 의신성화(擬神聖化, quasisakral)에 종사하는 예술복합체(Kunstwerk-komplexe)의 성립, 해체, 세속화(世俗化)의 역사’17)로서 기술할 것을 주장한다. 헤겔 이후 드보르작(M. Dvor큑k)에 의해 개진되었던 ‘세계관의 역사로서의 정신사적 예술사’의 이념, 즉 “예술이란 인간적 영혼과 신과의 관계의 역사”라는 관점은 제들마이어에 의해 더욱 심화되며 시대 예술의 가치 판정기준으로 된다.

그래서 제들마이어는 “생각할 수 있는 문제지평의 최고도에서 정신사로서의 예술사는 ‘성령학과 악마학으로서의 예술사(Kunstgesghichte als Pneumatologie und D?onologie)’로 이행한다.”18)고 보았고, 예술 고찰에 있어서의 가장 포괄적인 카테고리를 ‘천국의 예술, 지상의 예술, 지옥의 예술’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술작품이 하나의 ‘세계’로서 품고 있는 정신의 질(質)을 진단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가 제기한 ‘형상의미론’으로서의 이코놀로기(Ikonologie)도 이처럼 예술의 발생과 그 역사를 기본적으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교섭으로 봄으로써 결국 정신사적 예술사를 ‘숭배사(Kultusgeschichte)로서의 예술사’ 내지 ‘종교사로서의 예술사’에로 고양시키는 가운데 모색된 예술사 기술의 한 방법이다.

 제들마이어의 학설의 핵심은 결국 어떠한 다른 정신현상에 의해서도 대용불가능한 예술의 고유성을 헤겔과 마찬가지로 ‘절대정신의 감각적 비추임’으로서의 신성(神性)의 현현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예술사가 보링거(W. Worringer)는 리글이 제시했던 ‘예술의지’의 개념에 보다 심리학적인 색조를 가미하여 해석하는 가운데, 양식심리학적인 입장에서 예술과 종교의 연관관계를 규명한다. 그는 인간의 외계자연에 대한 관계, 즉 우주에 맞서 있는 인간성의 심리적 상태를 ‘세계감정(Weltgef?l)’이라고 명명(命名)하고, 예술의 역사를 이러한 세계감정의 변천사로 파악한다.

그는 “미지(未知)의 것에 직면한 정신의 공포는 최초의 신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한 최초의 예술을 만들었다.”19)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인간성의 원초적 상태는 자아와 세계의 부조화적 세계감정(不調和的 世界感情)이며 ‘예술의지’란 ‘자기외화충동(自己外化衝動, Selbstent?ßerungs-bed?fnis)으로서 그러한 이원대립(二元對立)에 의한 내적 불안(內的不安)에서 벗어나려는 욕구(Erl?ungs- bed?fnis)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그는 예술발전 과정의 내용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의 승리와 패배, 포기와 화해 등의 변동으로 규정지으며, 이러한 변동은 바로 각 시대·민족의 내면적인 지향(指向)을 담고 있는 종교관과 밀접히 연루되어 있음을 밝힌다. 요컨대 예술에 있어서의 양식상의 변천은 바로 ‘인간성의 역사가 갖는 정신적 범주의 가변성(可變性)’20)으로서 세계감정의 변화를 반영하며 각 시대의 종교적 관련과 성격-유일신(唯一神) 사상이든 혹은 범신론적(汎神論的)인 사상이든-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보링거의 관점은 예술과 종교의 발생과 발전의 교응관계를 밝혀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모든 예술활동은 기본적인 인간성의 한 계기에서 비롯되며 예술가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응하여 현실을 제어하고 현존을 위한 투쟁을 조정하는 반응양식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를테면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미와 예술의 자율성을 표방하는 현대예술의 여러 경향 속에서도 우리는 그 저변에서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응하는 강렬한 형이상학적 열망, 즉 역설적으로 표출된 일종의 종교적 열망을 읽을 수 있다.21)

이와는 다른 한 방향에서 접근한 예술사회학자 휘셔(E. Fischer) 역시 예술창조에 내재한 종교적 성격을 갈파하고 있다. 그는 《예술의 필요성》에서 많은 민속학자들의 탐구 성과를 바탕으로 예술의 기원을 살피는 가운데 예술창조에 내재하는 현실제어의 특질이 근대 이후의 예술상황에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22) 그의 논지에 따르면, 예술은 그 기원에 있어서 주술적이며, 실재하지만 밝혀지지 않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주술적인 보조수단이었다.

원시인들이 동굴에 그린 그림들은 순수한 미적(美的)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사냥꾼으로 하여금 먹이에 대한 안도감과 우월감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사물의  명명(命名)을 통해 발달된 언어와 시가(詩歌) 또한 미지의 자연을 지배하는 데 유사한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사냥을 나가기 전의 열광적인 부족춤, 그리고 물감으로 위장하는 일 등은 실제로 적에게 겁을 주고 부족의 사기를 고취시켰으며 전사들로 하여금 결연한 태도를 취하게 하였다. 이처럼 나약한 동물인 인간이 위험스럽고 불가해하며 공포스러운 자연과 대결함에 있어서 주술은 인간정신의 한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그와 같은 주술 속에 바로 무용, 시가, 회화, 드라마 등 예술의 발생계기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인간, 동물, 식물, 돌, 샘, 삶과 죽음, 집단과 개인-이 모든 것들의 완벽한 통일은 모든 주술적 의식의 전제였고, 본래의 주술은 그 후 예술, 종교로 분화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술은 인간집단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로 했던 주술적 도구였다. 물론 예술의 그러한 주술적이고 암시적인 요소는 사회가 분화되면서 합리적·계몽적인 요소로 대체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예술에서 주술적인 요소는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점차 분화된 사회 속에서 외부세계와의 훼손된 통일성과 조화를 회복시키는 일은 오히려 더 중요한 예술의 몫으로 기능한다. 즉 애매하고 단편화된 개별성의 불안, 불확실한 존재의 두려움, 개인주의화된 인간관계의 파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등 현실에 결핍된 평형상태(equilibrium)를 이루기 위한 ‘삶의 대용물’로서의 예술의 기능은 여전히 중요하다.23)

뿐만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이란 본래 현존 질서를 유일한 리얼리티로서 받아들이기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동시에 현존 질서를 넘어서는 ‘자유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이미지들을 부단히 불러일으킨다. 피셔의 이러한 논지는 어디까지나 ‘예술창조를 통한 현실의 변형’이라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예술사회학적 입장에서도 예술창조에 내재하는 종교적 성격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변철학 체계 속에서건 심리학적인 접근에서건 혹은 예술사회학적인 관점에서건 종교와 예술은 각각 그 양태를 달리하면서도 인간 삶의 총체성 속에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며 발생되고 전개되어왔음을 확인하고 있다. 헤겔도 지적했듯이 예술이 종교의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종교는 형태와 형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예술은 실존을 의식하는 인간정신의 한 표현인 한에서 “‘그 속으로 흘러들어갈 더 넓고 더 깊은 강’으로서 종교로 돌아오기 마련”24)이다. 그러므로 “종교예술이야말로 민족, 시대의 세계인식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영역”25)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종교예술은 “그 제작의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적 존재임과 동시에, 근원적으로 그에 결과된 조형적 존재성에 있어서 하나의 예술작품이다”.26) 따라서 어떤 종교예술 작품에서 종교적인 가치와 예술적인 가치를 각각 따로 떼어놓고 보기는 사실상 힘들다. 물론 종교예술작품은 그 창작의 계기에 있어 어디까지나 예술적 표현을 수단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앞서 살폈듯이 종교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정신의 주관적인 표상’에 있기 때문에 언어사량(言語思量)의 피안(彼岸)에 있는 초감각적(超感覺的)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는 비가시적(非可視的)인 세계를 가시화(可視化)하는 예술의 직관적 형식을 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그린 벽화들이나 우리나라 석굴암, 혹은 고대 마야의 미술도 예술 외적인 신앙의 목적을 위한 창작물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들 신앙의 심층을 해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그 예술작품들을 보지는 않으며, 또한 신앙 내용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

그런데 특히 건축이나 조각, 회화 등 미술의 표현양식은 특히 ‘직접 본다’는 일이 명확히 수행되며, 그 ‘내재적(內在的) 의미작용의 미적 규범성(美的 規範性)’에 있어 여타 다른 예술 장르보다도 관조적(觀照的) 성격이 강하다.27) 예를 들어 종교적 정서에 포화(飽和)되어 제작된 종교회화에 있어 그 정서는 직접적으로 형태과 색채를 통해 향수자에게 전달되는 것이지 어떠한 종교적 제재(題材)의 연상(聯想)에 있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28)

그러므로 종교회화에서도 교의도해(敎義圖解)라는 신앙 내용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각 시대와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미의식(美意識), 그리고 제작자의 예술적 상상력과 기질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요컨대 종교적 내용은 초감각적(超感覺的)인 절대정신의 표상이라는 최고의 내용을 예술에 제공하며 예술적 표현은 종교적 이념을 감각적인 형식으로 관조자 앞에 현전(現前)하게 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예술의 상승작용(相乘作用)은 종교예술에서 가장 잘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예술품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이념이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느냐가 그 중요한 평가기준이 될 수 있으며,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자극하는 능동성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일반 감상용 예술품과는 구별된다.

물론 종교는 주관적인 심적(心的) 현상인 동시에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종교도 사회적 성격을 갖는 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전달을 위해 일정한 상징 형식을 취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종교도상(宗敎圖像)의 발달과 함께 때로 파격적인 표현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예술품의 해석에는 종교적인 기능과 예술적·미적인 기능 사이의 여러 난제를 고려해야 하고, 이에 따라 작품해석의 여러 방법론들도 부단히 모색되어 오고 있다.29)

이처럼 미학의 학문 분야에서 예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 및 작품의 해석방법론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글의 제목에서 ‘…그리고 미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예술과 종교, 종교와 예술의 교응(交應) 관계 자체가 이미 미학 연구의 한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질적인 다른 것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문화사 속에 서로 용해되어 있는 동종성(同種性)의 근거에서 미학 연구의 한 계기가 마련된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유보하기로 하고, 불교사상이나 불교예술의 현상 등에서 드러나는 미학적 문제들을 아우르면서 이른바 ‘불교미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 ‘불교미학’의 기초개념들

1) 불교의 상징체계와 불교미학

불교에는 팔만 사천이 넘는 경전이 있지만, 그 핵심은 모두가 깨달음을 향한 하나의 법문으로 귀일된다. 그러므로 팔만 사천 혹은 미진수(微塵數)의 법문이 모두 하나의 법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수많은 방편을 놓아 깨달음 수행의 길을 다양하게 열어놓고 있다. 체계가 없는 듯이 다양하면서도 하나의 상징체계로 포일(抱一)되는 것이 불교의 철학이고 또 예술이다. 대해(大海)와도 같은 불교사상의 체계를 여기서 몇 낱 문구로 담을 수는 없고, 잠시 불교예술 해석의 예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불화를 중심으로 보더라도, 불교신앙의 내용이 압축ㆍ도설(圖說)된 불화는 사원건축이나 가람의 배치 등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구조적 특질을 지닌다. 일찍이 제들마이어는 성당을 하나의 ‘예술복합체(藝術複合體)’로 보고 그 속에 부속된 회화나 조각상의 의미 내용은 그 전체구조 속에서의 위상(位相) 파악과 더불어 비로소 해독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었다.

그가 말하는 위상 파악이란 건축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형상권(形像圈) 내에서 한 작품이 점유하는 구체적인 공간적 위치(장소)뿐만 아니라 전체 의미 체계 내에서의 발생의 양태, 즉 작품의 유형구조(類型構造)에 대한 파악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발생론적(發生論的) 이코놀로기(Ikonologie)’의 방법적 전제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30) 이 같은 제들마이어의 발의(發意)는 한국의 불화 해석에 있어서도 유용한 방법론으로 응용될 수 있는 여지를 보인다. 왜냐하면 사원에 부속된 개개의 불화는 다양하게 나타나면서도 하나로 통일되는 만다라적인 구조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상호연관성(相互關聯性)의 의미연관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사원건축에 있어서 그 전통적인 정신은 승려들의 불도 수행의 도량으로서 혹은 일반 민중의 신앙심을 보다 효과적으로 고취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청정도량으로서의 가꿈이었다. 이를테면 불보살을 모신 곳을 청정화(淸淨化)하고 그 공간을 성역화(聖域化)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사원의 입구는 일주문, 사천왕문, 인왕문, 금강문, 혹은 불이문(不二門) 등의 가람 형성을 보이고 있다. 본래 승원(중원)을 가리키던 가람(S칊ngh칊r칊ma)은 오늘날 당(堂), 탑, 산문(山門)을 합쳐서 사원을 형성하는 불교 건축 일반을 가리키는데, 물론 처음부터 정연한 체계를 갖고 불교 건축이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즉 이들은 처음에는 각기 필요에 응하여 개별적으로 발생하였으나 점차 발달하여 만다라적인 전각 배치를 보이기에 이른다.

불탱(佛幀)의 발생적 서열, 즉 그 유형분화도 이러한 가람 형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즉 사원의 가람형식과 신앙의 양상, 불탱의 유형구조는 상호관계성의 질서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가람 형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극락전(혹은 彌陀殿)·대적광전·화엄전·약사전·미륵전·관음전 등이 있다. 이같이 여러 불전(佛殿)이 본전(本殿)의 기능을 갖는데, 주지하듯이 각 사찰의 종파나 주불(主佛)의 차이에 따라 본전의 명칭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는 전각은 대적광전,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할 때는 대웅전이라고 명명하는 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옹호신중각(擁護神衆閣)을 들 수 있는데, 금강문·인왕문·사천왕문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대개 사찰의 입구에 위치하여,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옹호신들에 의하여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등 한국 사원 특유의 전각을 살필 수 있다. 이들은 한국불교의 토착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이들 전각에 모셔지는 신앙의 대상은 주로 불보살이 아닌 재래의 토착신들이며, 이들이 불교의 수호신으로 수용되면서 다시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분화된 양상을 보인다.

이 같은 한국의 가람 구조는 신앙형태면에서 살펴볼 때 불(佛)·보살(菩薩)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상단신앙(上壇信仰), 불법(佛法)의 수호신을 모신 옹호신중각의 중단신앙(中壇信仰), 그리고 이들 신중(神衆)이 다시 분화되어 원래 모습을 불교적으로 전개함에 따라 신앙하게 된 하단신앙(下壇信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31)

이러한 3단의 가람구조는 한국불교의 특질 즉, 상·중·하 3단신앙의 표상임을 구조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각 사찰들은 건축 규모가 크든 작든 일면 만다라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대사찰에 있어 방위에 따른 전각의 배치와 그 안에 모셔진 불교신앙의 여러 대상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압축해낸다면 일종의 만다라도(曼陀羅圖)가 될 수 있을 것이다.32) 원래 전각의 배치도 어떤 종교적 규범에 의해 이루어졌으리라는 짐작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일판집(一判集)》에서 전하는 가람배치의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대체로 비로전과 영산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극락전 등 대체적인 질서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데, 바로 가람의 형성이 불교신앙의 3단 구조와 이에 따른 의식(儀式)의 분단법(分壇法)과 깊이 연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33)

이상과 같은 예는 작은 규모의 사찰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으로서, 예컨대 단일전각(單一殿閣)의 경우, 그 안에 역시 불·보살단과 신중단, 영가단(靈駕壇)이 갖추어지며 그 방위도 임의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가람 형성과 탱화의 분화관계(分化關係)는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재래신앙을 포섭하여 불교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신앙형태는 일정한 통일원리에 의해 상징적이고 체계적인 만다라적 전개를 보인다. 즉 상·중·하단의 다양한 불화는 상단불화의 하나로 귀일될 수 있고 또한 상단의 불화는 중·하단으로 전개되는 개합(開合)의 원리에서 한국 불교신앙의 구조는 여실히 만다라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화엄사상의 큰 줄기에서 볼 때 한국의 만다라는 이른바 ‘화엄만다라’라고 할 만한 전개를 보인다. 

이처럼 한국의 사원건축은 그 구조나 장엄 내용에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복합체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서 건축을 중심으로 조각·회화(탱화뿐 아니라 내벽화, 외벽화, 단청 등), 공예(제단의 장식이나 장엄구 등)가 서로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불교 교리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서양의 성당건축이 이른바 ‘돌로 쓰여진 성(聖)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전(聖典)’(M. Dvorak)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사원건축 역시 ‘돌과 나무로 쓰여진 불교성전(佛敎聖典)’이 아닐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불교의 상징체계를 근저에서 규제하고 있는 주요 철학들을 돌아보면, 종교와 미학 사이에서 많은 기초개념들이 재고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이를테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시·공간적 의식을 통한 의미의 일원적(一元的) 환원에서뿐 아니라, 심법(心法)에 있어 의식의 집주(集注)와 탈의식(脫意識)과 연관된 미의식의 문제, 형상의 근거와 대면한 진리의 토포스(topos)와 공무(空無)사상, 그리고 미학의 핵심적 연구 대상이 되는 미적 범주론 등이 그것이다.

일찍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불교미학의 비원(悲願)》(1958년)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서구의 미학적 문제제기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불교미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언표한 바 있다.34)

또한 국내에서는 원의범 교수가 《불교미학과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서구의 미학과 불교의 개념들을 비교 해석한 강의안을 엮어낸 바 있다.35) 그러나 이외에는 ‘불교미학’이라는 화두를 직접 발의하면서 미에 대한 불교적 사색과 학문적 접근을 시도한 저서는 흔치 않다. 그런 만큼 이번의 시론은 많은 부담을 안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 서구미학과 동양의 예술사유를 아우르면서 새로운 미학 연구의 지평을 열어갈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일조를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서 ‘발제의 변’에서 거론하였던 여러 기초개념들을 일일이 다루기보다 앞으로의 연구 방향성을 개진해보는 범위에서 포괄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2) 자연미, 예술미, 인격미의 범주

미학의 연구대상으로서 ‘미’와 ‘미적인 것’은 자연과 인간, 예술의 영역에 광범위하게 현상되고 있어 그에 따른 자연미, 인격미, 예술미는 미학 연구에서 미의 범주론 의 큰 틀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철학자와 미학자들은 자연과 예술의 관계 및 인격미의 구현에 대해서도 폭넓게 다루어왔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불교미학의 측면에서 궁구할 수 있는 자연미, 인격미, 예술미의 경계는 미학 연구에 또 다른 한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미에 대한 불교적 사색에 있어 자연미의 경계는 ‘자연법이’(自然法爾)와 ‘여(如)’의 경지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성(性)으로 돌아가고 하늘이 준 바탕대로 그렇게 있는 것으로서 ‘그대로의 것’을 지향하는 것이 ‘자연법이’와 ‘여’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여’의 모습 그 자체라고 본다. 상식적으로나 또한 서구적 관점에서는 미추(美醜)의 구분을 통해 자연미도 상대적으로 용인되었고, 예술에 인용되는 자연미도 불완전함을 수정하고 보충하는 이상적인 세계 표현으로 원용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불교의 미 사유에서는 미추의 구분 이전이거나 그것을 넘어선 지점에서 불완전함이나 졸렬함까지도 포용하는 그대로의 자연을 진정한 자연미로 인정한다.

애초에 만물 자연은 미추의 구분이 없는 본성을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아름답게 되려고 안달하기보다 본래의 성에 있으면 어떤 것도 추함으로 떨어지지 않는다.36) 야나기는 그의 불교미학 이론을 개진하는 가운데 ‘미의 정토(美の淨土)’에 대하여 언급, 미추미생(美醜未生)의 경지에서 볼 때, 이원(二元)의 논리를 미의 세계에 적용하려 하는 것은 “햇빛을 보려고 횃불을 켜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단순한 광도의 차이가 아니라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37)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선종사상에서도 자연은 모든 상대적인 세계의 관념을 넘어선 경지에서 ‘참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용인된다. 그 참본성이란 바로 ‘여여(如如)함’의 세계로서, 일체의 분별을 넘어선 중도(中道)의 세계이기도 하다.38)

노자가 미와 추, 선과 악 등의 분별을 넘어선 자연의 조화와 상생을 거론(《도덕경》 제2장)하였듯이 당대의 혜능대사는 36대(對)의 상대세계의 개념들(有無, 色空, 動靜, 淸濁 등)을 들어 분별의 한계를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중도를 설하고 있다: “누가 어둠을 물으면 ‘밝음은 어둠의 원인이요, 어둠은 밝음의 원인이다’라고 대답하라. 밝음이 사라지면 어둠이 오니, 어둠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밝음은 어둠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이 둘의 상호관계 속에서 비로소 중도의 의미가 밝혀진다.”39)
또한 불가에서는 범아합일(梵我合一)의 관념을 바탕으로 우주와 자연과 인간이 대극적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도가에서는 도(道)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이(理)와 사(事), 근원과 현상계의 관계를 하나로 수렴하였고, 여기에 불교가 발생 유입되면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포일(抱一) 관념과 불이 관념이 보다 정밀한 세계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를테면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화된 불교의 이념에서 보면, 자아가 곧 우주이고, 내 마음이 곧 일체(一切)이며, 부처와 중생,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시(是)와 비(非),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하나여서 본래부터 구별이 없고, 구별은 오직 사람의 관념 속에 있을 뿐이다. 이 같은 경계에서는 역시 미추(美醜)의 경지도 따로 없으며, 모든 것이 진선미(眞善美) 아닌 것이 없다. 이처럼 선종에서는 분석이나 추리, 판단의 일반적 논리의 단계를 버리고 완전히 자신의 내심(內心)의 체험과 직각적(直覺的)인 느낌에 의존하여 일체를 파악해야 한다는 사유방식을 제시해놓고 있다.40)

자연미에 대한 이 같은 관점은 바로 예술미에 대한 관점으로도 연결된다. 불가사상에 있어 심법의 요체는 인간과 만물이 하나가 되는 본성을 깨닫는 데 있으니, 모든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경계를 넘어 무심(無心)한 경지에서의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

노장철학의 핵심개념인 도(道)는 천지만물을 존재하게 한 근원이면서 다시 현상계의 모든 갓이 수렴되는 포일(抱一)의 개념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러한 도는 ‘자생자화’하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여 도법자연(道法自然)의 경계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긴다. 즉 인간의 분별에 의한 작위나 조작이 아닌 ‘그대로의 것’을 따르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법(理法)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또한 자연 속에서 깨우친 인간의 원숙한 경지를 예술표현의 백미로 삼았었다.

이러한 도가사상의 바탕 위에서 선종의 예술이념 또한 지식과 규범에 매인 예술보다는 부작위의 경지를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표현에 우위를 두고, 의식의 조작을 넘어선 천진난만함과 초연하고 무심한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을 예술의 지고한 가치로 용인한다.

그러한 자연스러움은 예술에 있어 때로 비규칙성과 부조화, 그리고 비정형성(非定形性)과 연계되어 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모든 애착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표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서예와 다도(茶道) 공예품, 선시(禪詩)나 선화(禪畵) 등에서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나아가 일반회화나 건축, 정원예술에 이르기까지 그 미적 이념은 매우 폭넓게 구현되고 있다.

이를테면, 시니치 히사마츄는 그의 저서 《禪과 미술》 속에서 선미(禪美)의 특징을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무심(無心)’, ‘무표현(無表現)에 따른 고요함’, ‘평정(平靜)’, 그리고 ‘세련된 깊이’와 ‘단순성’, ‘간결한 함축성(정제성)’ 등 일곱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41)

 또한 선미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정원예술의 예로는 일본의 류안지(龍安寺)에 있는 공정(空庭)을 떠올릴 수 있다. 일흔다섯 평의 평지에 흰 색의 돌과 모래로만 되어 있을 뿐 나무나 풀포기도 볼 수 없다. 모래 위에 다만 열다섯 개의 크고 작은 자연석들이 7·5·3 형식의 돌무더기로 배치되어 있고, 모래 위에 바람이 쓸리거나 새 발자국이 나는 것조차 감상의 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이 정원은 형의 크고 작음이나 색의 아름답고 추함, 움직임과 고요함 등의 이분법을 넘어 대자연의 여여(如如)함과 불교 공(空)사상의 이면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자연과 예술에 대한 이 같은 불교 사유와 함께 또 다른 미적 범주로서의 인격미에 대한 것은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인격미에 대한 논의는 서구 미학에서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불가에서는 인간의 의식 및 실천수행과 연관하여 깊이 있는 미적 개념들을 제시해놓고 있다.

 즉 불교에서는 ‘아름다운 사람’이나 ‘인간미’를 부처와 보살의 자비심(慈悲心)을 통해 드러내면서, 나아가 모든 중생과 범인(凡人)들의 사랑과 자비에 초점을 두고 설하고 있다. 성불을 이루기 위한 지혜의 계발과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행은 불교에서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불교사상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인격미에 대한 서양미학의 주관심이 개인과 천재, 혹은 예술교육을 통해 특별히 도달한 ‘아름다운 영혼(Das schoene Seele/ Schiller)’이었다면, 이와는 다르게 불가에서는 중생과 범인에 초점이 주어지며, 특히 모든 분별심을 떠나 있는 평상무사(平常無事)의 경계에 있는 순진무구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중생 모두가 본래의 성(性)으로서 지니고 있던 것인데, 미망(迷妄)에 의해 그것이 가려 있으므로 수행실천을 통해 닦아 본래면목에 이르는 것이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야나기는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람의 선·악, 그리고 신(信)과 불신(不信), 미추의 분별을 넘어 주어진 그대로의 ‘본분’으로 돌아가 (…) 순진무구함과 무심(無心) 자재(自在)함”을 지닌 중생들이 사는 세계가 곧 진정한 현실세계 속의 정토(淨土)임을 역설하고 있다.42)

불전마다 중생들에게 진리를 이르는 문구에서 “선(善)남자 선여인들아, 들으라 (…)” 하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모든 중생들의 근본바탕을 여여(如如)한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들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성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미적 기초개념이 자비이다.

모든 종교가 신과 인간의 사랑을 전제하고 있지만, 특히 불가에서는 자비의 이념을 미적 인간상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사랑(priya), 친절(mitra), 자비(maitra)는 모두 하나로 통하는 개념이지만, 특히 자비의 개념은 중생에게 낙(樂)을 주는 것으로서의 자(慈)와 고(苦)를 없애주는 것으로서의 비(悲)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슬플 비 자를 써서 중생의 고통을 가련하게 여겨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보듬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불가에서는 ‘삼연자비’(三緣慈悲)라고 하여 세 가지 형태의 자비 이념을 설하고 있다.

첫째로, 중생연(衆生緣)자비는 친한 이나 다른 이를 똑같이 보아 베푸는 자비로서, 범부나 또는 도에 뜻을 두고 있지만 아직 번뇌를 끊어버리지 못한 이가 일으키는 자비이다.

둘째로, 법연(法緣)자비는 만유의 온갖 법이 오온(五蘊)의 거짓 화합임을 알고, 또한 물심(物心)의 본체가 공(空)한 줄을 알아 번뇌가 없어진 성자(聖者)가 일으키는 자비이다.

셋째로, 무연(無緣)자비는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의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아는 부처의 자비로서, 이미 물심 제법의 부실허광(不實虛팂)한 모양을 알고 마음에 소연(所緣)이 없는 부처가 저절로 일체 중생에 대하여 베푸는 자비이다.

이 같은 자비의 이념은 진정한 아름다운 삶을 위한 지침으로서 팔만사천 대장경 법문의 전체에 걸쳐 전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례를 든다면, 자타카(jataka) 169편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 무한히 자비하는 원만하고 행복한 마음을 업(業)은 유한한 것이어서 이기지 못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자념경(慈念經 mettasuttam)을 비구들에게 설하는 가운데 자비심의 12가지 공덕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전한다.43)

야나기는 《미의 법문》에서 불교미학이 단순히 미사상의 체계가 아니라 신미일여(信美一如)와 자타상즉(自他相卽)의 미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전제로, 민중의 미의 성취가 바로 부처의 대비(大悲)에 의해 보증된다고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44) 그만큼 ‘자비’의 개념은 인격미의 범주에서 앞으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요망된다.

다음으로는 미적 체험의 자율성과 연관하여 불교미학의 기초개념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기로 한다.

4. 의식의 부정을 통한 의식의 자유
 ― 불교의 심법(心法)과 미적 체험의 자율성
 

미학은 미적 개념을 형성하고 그러한 개념에 따라 미적 본질과 현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여기서 미학은 결국 인간의 심리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 미적 본질을 규명하게 된다. 이러한 작업이 서구 미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지만, 동양의 불교사상에 내포된 심법과 그 해석은 새로운 각도에서 미적 주관과 대상의 상호관계에서 비롯되는 미적 체험의 자율성 및 미의식의 무욕성(無慾性)을 드러내고 있다. 불교미학의 기초개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많은 개념들이 존재하지만, 실은 그 모두가 ‘깨달음’을 향한 노정에서 상정된 다양한 방편적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개념들을 다 거론할 수는 없고, 그 중에도 절대부정을 통해 절대긍정에 이르는 노정에서의 공(空無)개념과 일체(一切)의 경계, 그리고 언망절려(言亡絶慮)의 경지에서의 미적 체험의 자율성과 미적 의미의 불확정성, 나아가 불이일여(不二一如)와 미적 무욕성 등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공무(空無)사상의 이면성과 일체(一切): 미적 체험의 자율성

불교에서는 인간의 사유를 ‘빈 마음’으로 극한까지 진행시킴으로써 마침내 대상을 잃고 사유 자체를 여의게 되는 경지에서 공무(空無)의 세계를 설하고 있다. 서양의 형이상학이 유(有) 및 존재에 최종 관심을 두고 있었던 반면, 동양의 도가나 선불교에서는 도(道)의 형이상학적 특징으로서 무와 공의 세계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천하만물은 모두 유(有)에서 생기는데, 유는 무에서 생긴다.”(天下萬物皆于有 有生于無)고 하여 무는 당당하게 철학적 본질론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주를 실체(實體)의 세계로 탐구해온 서양에 비하여 동양에서는 더 원초적인 근원에 대하여 사유하였고, 도와 무, 이(理)와 기(氣), 그리고 카오스(chaos) 등의 개념을 통하여 독자의 우주관을 피력해왔다.

이러한 개념들은 이성중심주의적인 서양의 사고체계에서 보면 당연히 논리성이나 명증성이 떨어지지만, 카오스 이론이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세계를 설명하는 오늘날의 철학이나 미시물리학, 우주과학 등의 최첨단 과학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개념과 사고의 폭은 새삼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는 추세이다. 이제 유만을 실체로 생각하던 서구적 관념은 ‘존재하는 무’를 인정하면서 동양의 공무사상을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유무상생론(有無相生論)에서 무는 서구인이 이해하듯 실체가 차지하는 위치와 운동장소로서의 허공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하고 변화하고 창조하는 작용으로 충만한 기(氣)를 뜻한다. “허공은 바로 기이다. 형태가 없는 태허(太虛)가 기의 본체이고,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일시적 변화의 형태일 뿐이다.”라고 장자는 말한다.45) 여기서 기는 본래 작용성을 지닌 힘이다.

그러므로 동양문화에서 무로 이해되는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은 작용성을 지닌 힘, 즉 기로 가득 차 있다. 이렇듯 ‘존재하는 무’가 유를 가능케 하고, 유가 쇠락하면 다시 그 근원인 무로 회귀한다. 이러한 순환에서 유와 무, 실체와 허공은 이원적으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로 환원되는 개념이다.

이 같은 공무사상은 동양예술 전반에 걸쳐 ‘무한한 허(虛)’와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정(靜)과 한가로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망(忘)과 속세를 초월한 무기(無己)의 경지에서, 말하는 것보다는 말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기고, 채우는 것보다는 비우는 것을, 넘치는 것보다는 평정(平靜)함을 미적 가치로 여기는 예술사유를 배태시켰다. 이러한 예술사유에 의해 동양에서는 건축과 조경, 조각과 도자공예, 서예에 이르기까지 충실(充實)의 부피만큼 허를 요리하는 기술로서의 허술(虛術)과 포백(布白)을 중시한 작품들이 생산되었고, 특히 회화에서는 여백(餘白)과 평정(平靜)의 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부상한다.

이처럼 중국의 현학(玄學)과 선학(禪學)의 융화에서 엿볼 수 있는 예술사유의 저변에는 불교 특유의 심법과 그에 따른 공무사상이 큰 맥을 이루고 있는데, 사유 자체를 부정하고 그 너머의 자유를 추구하여 절대긍정에 이르는 불교의 심법은 미적 체험의 특징에 있어 그 자율성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더욱 주목할 만하다.

미적 체험이나 미의식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특징을 돌아보면, 특유한 주관-객관의 상호침투 관계(noesis-noema)에서 일어나는 감성적 체험의 성격을 지니며, 몰인식성(沒認識性, Erkenntnislossigkeit)과 몰의지성(沒意志性, Willenlossigkeit), 그리고 미의 가상성(假象性)과 연관된 미적 태도 측면에서 무관심성(無關心性) 및 자기목적성(自己目的性)과 정관성(靜觀性) 등을 특징으로 한다.46) 이 같은 미학사의 문맥은 이성과 논리를 위주로 했던 서양의 합리주의 전통과 여전히 맞물려 있는 것이지만, 동양의 불교사상을 통해 반추해 볼 때, 미체험의 자율적 속성을 이해하는 데 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중생심(衆生心)에 대한 정교한 심법을 통해 공의 사상을 전개한 무착(無着: 아상카)과 세친(世親: 바수반두)의 유식(唯識) 계열의 경전, 이를테면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에서는 결국 실유(實有)로 인식되는 모든 것은 식(識)이 만들어낸 것이고 실재로는 공(空)한 것이라는 것을 핵심으로 설하고 있다.47) 한편 용수(龍樹: 나가르쥬나)의 《중론(中論)》과 그 해석에 따르면,48) 연기법(緣起法)으로서의 일체법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실재성이 없는 환(幻)과 같은 것으로 가상(假象)이다. 우리가 실재하고 있다고 보는 일체가 모두 모순을 이룬다. 따라서 공에서는 이런 모순률에 따라 일체법으로서의 연기법을 예외 없이 모두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부정 자체도 철저히 추적하면 모순률을 이루기 때문에, 부정도 또한 부정되어 절대긍정으로 전환한다.

일체 부정을 매개로 한 일체 긍정이므로 논리의 법칙을 넘어서고,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나 대립을 넘어선, 말하자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일단 부정된 아(我)도 긍정되며, 무아와 연기도 부정을 매개로 하여 긍정된다. 난해난득(難解難得)의 공의 세계, 즉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로서의 공의 세계는 바로 열반의 경지를 방편교시(方便敎示)하기 위한 것이고, 종국에는 인간 삶의 세계, 즉 세속제(世俗諦) 이외에 달리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속이 곧 열반이요, 번뇌가 즉 보리인 그런 경지의 깨달음에서 열리는 세계이다.

유식사상사에서 볼 때, 모든 분별에 의한 지혜는 미망(迷妄)이라는 가치평가를 동반하며, 분별을 초월한 무분별한 지혜가 중요시된다. 요컨대 허망분별(虛妄分別)이라는 것은 우리들 의식의 사실로서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경우에 상정되는 아는 것〔主體〕과 알아지는 것〔客體〕에는 실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어느 장소에 없을 때, 그것에 대해서 그 장소는 공(空)이라고 말해지는 것과 같이, 아는 것과 알아지는 것에 대한 허망한 분별은 공(空)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알아지는 것과의 실재가 부정됨에도 관계치 않고 허망한 분별은 의식의 사실로서 존재한다.49) 단지 표상(表象)하는 식(識)만 있고, 외계의 존재는 공하다고 보는 것이 유식사상이지만, 공의 세계를 요해(了解)해가는 과정에서의 심법과 ‘공의 논리’는 서양의 어떤 심리학체계보다도 치밀하고 깊다.50)

여기서 심법을 다 들여다볼 수는 없고, 요점만 간추려서 살펴보기로 한다. 불가에서 마음을 해석하는 방법은 아주 독특하다. 우주 만유를 색(色)과 심(心)으로 분류하여 색은 현상이며 허상이고, 심은 본체이며 실상이라고 보지만, 본체인 심이 색에 걸려 미혹돼 부자유하다고 불가는 판단한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현상과 본질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색일여(心色一如)’, ‘공색일체(空色一切)’라고 본다. 여기서 일체(一切)는 무엇과 무엇의 연관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일체(一體)와 달리 연기(緣起)의 추상적 해명이고, 따라서 ‘심색일여’는 곧 ‘물심일체(物心一切)’의 뜻을 지닌다. 연기의 장(場)에서 낱낱이 자기로 환원될 수 없음에서 각각은 무자성(無自性)의 공성(空性)으로 동일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이룬 데서 보면 서로 다를 뿐인 관계이다.

이같은 색과 심의 관계에서 미혹으로부터 벗어난 실상으로서의 심(心)만이 만유의 조(造) 가운데 오견(五見: 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과 오심(五心: 率爾心, 尋求心, 決定心, 染淨心, 等流心)으로 얽힌 인연들이 끊겨 절대자유를 누리게 되며, 이 경지가 해탈이고 열반이다. 이같은 열반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 의식작용의 본체〔心王〕가 객관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心所〕을 적멸의 경지로 이끌어야한다는 것이 각(覺)이며, 이 각은 진정한 지혜〔菩提와 佛果〕에 이르는 길이나 같다. 바로 선정(禪定)은 모든 인연의 고리로부터 벗어난 절대 자유의 심(心)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고, 이러한 선정의 마음이 불가에서는 곧 미적 이념이며, 이상이고 극락이다.51)

그러므로 불가의 미적 가치는 의식(意識)의 해탈에 있게 된다. 특히 불가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하는 주체를 6종(眼識-色, 耳識-聲, 鼻識-香, 舌識-味, 身識-觸, 心王으로서의 意와 法)으로 나누고 그것들을 종합하여 의식이라고 본다. 인연법에 얽혀 있는 이러한 의식의 부정과 해탈을 통해 보다 큰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 불교의 미적 이상이지만, 보편적인 미체험의 속성이나 미적 판단의 해명에도 불가의 심법은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요컨대 미적 체험의 자율성에서 본다면, 좌망(坐忘)과 망아(忘我)의 정신적 집주(集注)와 의식의 부정 뒤에 오는 자유로서의 몰의식과 몰의지성, 이성적·실천적인 것에의 무관심성과 자기목적성의 해명에 단서를 제공해주며, 또한 의미나 가치와 연관된 미적 판단의 경우, 의미의 결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형성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해석의 또 다른 한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52)

2) 언망절려(言亡絶慮): 미적 의미의 불확정성

정교한 심법을 통하여 위와 같은 식으로 진리를 설파하는 과정에서 불가는 언어와 형상의 한계를 전제하고, 또한 인식과 사유의 부정을 통하여 식심견성(識心見性)을 추구한다. 일찍이 중국 현학(玄學)에서는 득의재망상 득상재망언(得意在妄象, 得象在忘言)〔왕필이 《주역》 해석에 부친 글〕이라고 하여 “뜻을 얻는 것은 상을 잊는 데 있고, 상을 얻는 것은 말을 잊는 데 있다.”고 하였듯이,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은 중국 선학에서는 ‘득의망언’의 방법으로 불경을 요해할 것을 설파한다.

이에는 승조, 도생, 혜능 등이 무상(無相)과 무명(無名)을 연결시켜 언상(言相)의 한계를 지적했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53) 혜능은 무념(無念), 무주(無住)를 강조하면서,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한데, 다만 어떠한 언상(言相)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심(自心)이 생각 생각에 머무름이 없고 어떠한 망념도 없다면, 비로소 식심견성(識心見性)하고 돈오불법(頓悟佛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불교의 문맥에서 볼 때, 중생교화의 방편으로 삼는 형상적인 조형예술품의 제작은 그 상징적인 의미연관을 일반예술품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수많은 경전 속의 묘사와 그 내용이 조각이나 회화 등으로 제작된 바 있는 천상(天上, 極樂)이나 지옥(地獄) 그림의 해석도 도상의 분석을 넘어 불교 상징체계와 의미 연관의 해석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외적인 형상의 미추(美醜) 경계를 넘어 진정한 그 의미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천상(天上)-지상(地上)-지옥(地獄)의 위계(位階)는 어느 종교에서나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일정한 상징적 패턴으로 형용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것과 초월적인 신(神)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나 혹은 의식에 내재하는 정신적 위계의 관념인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deva)은 일반적으로 천신(天神)들의 세계를 일컫는 것으로서 지거천(地居天), 공거천(空居天) 등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수많은 천계(天界, /六欲天)를 상정하고 있다.54) 그러나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이 천계도 여전히 욕망이 남아 있는 욕계(欲界)에 속하며, 그 위에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선정자(禪定者)의 세계를 상정한다. 이를테면 초선(初禪)의 삼천(三天), 이선(二禪)의 삼천(三天), 삼선(三禪)의 삼천(三天), 그리고 사선(四禪)의 팔천(八天)으로서 각각 이생희락(離生喜樂), 정생희락(定生喜樂), 이희묘락(離喜妙樂), 비고비락(非苦非樂)55)의 경계로 상승해가는 경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도 아직 꼴이 남아 있는 색계이며, 그 위에 또다시 무색계(無色界)의 세계를 상정, ‘정신의 완전한 자유’ 즉 모든 상대적인 것을 여읜 절대적인 정신에 이르는 도정을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56)의 상승 단계로 표현한다. 색계까지의 경계는, 예를 들어 사선(四禪)의 최고경지를 색구경천(色究竟天)으로 표현하여 지상에서부터 1천 600억 유순(由旬) 떨어진 거리에 있다든가 그 넓이는 대천세계(大千世界)라든가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한편 무색계의 경지는 어떠한 방향이나 장소도 초월한 것으로서 우주관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전혀 공간의 개념을 떠나버린 세계로서 표상된다.

이처럼 지상으로부터 지하 몇만 유순 아래에 어떤 지옥이 있다는 등의 설명에 비한다면, 불교의 우주관에서 설명하고 있는 천상(天上) 위에로의 정신의 상승 도정은 몇 천억 유순을 넘어 완전히 공간개념을 떠나버리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까마득한 위계로 설정된다. 말하자면 지하의 지옥으로 인간의 죄업의 깊이를 비유하는 만큼 그에 대비하여 인간정신의 상승의 가능성은 우주론적 개념을 넘어설 만큼 무한히 열려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승불교에서의 최고의 경지는 완전한 무(無)에 돌아가는 것으로, 실제 《구사론(俱舍論)》에서 불(佛)은 삼계(三界)에서 탈출하여 무에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堤 下化衆生)을 표방하는 대승불교의 이념에 따라 극고(極苦)와 추(醜)의 양상으로 상상한 지옥의 광경과 온갖 세속적 장엄으로 가득한 극락(極樂)의 세계가 묘사된다. 여기서 특히 미와 추, 고와 락의 관계에서 본다면, 추로 미를 드러내고 고로 락을 드러내는 방편을 쓰고 있다고 할 만하다. 요컨대 흔구정토 염리예토(欣求淨土 厭離穢土)의 이념을 조형적으로 가시화한 것이 지옥도계 그림이나 극락 그림, 혹은 이에 상응하는 조각, 건축들이라고 할 수 있다.57)

이처럼 언어나 조형으로서는 다 이를 수 없는 세계를 불교예술에서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유비적인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이념이 일반예술에는 어떠한 영향으로 드러나는지, 특히 동영화의 예를 들어 살펴보면, 여백(餘白)사상이 그 핵심에 놓여 있다.

요컨대 동양화에서의 여백은 존재의 형(形)으로는 공과 허와 무이지만, 가능의 형으로는 실(實)이므로 언어의 영역을 넘어선 언어의 의미를 지닌다. 선불교나 도가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언외지의(言外之意)’, ‘무언지언(無言之言)’과 같은 어구들은 바로 동양회화사에서 ‘필외지의(筆外之意)’, ‘상외지화(像外之畵)’ 등의 이념으로 연결되면서, 그려진 부분보다 오히려 그려지지 않은 부분의 여의(餘意)와 암시, 여운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적허(寂虛) 상태의 관조를 통해 함축적인 최후의 필묵 필선만을 취해 그리고 남긴 여백은 무표현의 무차별적인 무가 아니라 그려진 부분인 묘사 형체와의 관계에서 유를 규정하는 무이고, 화면상의 의미 연관에 있어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무인 것이다.58)

 특히 야나기 무네요시는 〈종교적 무(無)〉(《종교와 그 진리》, 야나기 《전집》 제2권)에서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 사상에 근거하여 논리와 언어 너머의 신(神)을 암시하는 시와 예술에 대하여 논구한 바 있다. 그는 ‘사물의 가상을 넘어서’ ‘물 자체의 세계’, 그리고 자기적멸(自己寂滅)과 망아(忘我)의 경지를 체득해가면서 ‘침묵’과 모든 한계를 초월한 절대적인 ‘무’ 및 ‘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가없으며 그대로인 즉여(卽如)이자 불이(不二)인 것이 ‘무’임을 천명한다. 나아가 그러한 ‘종교적 무’의 표상 가능성으로서 ‘민예’의 개념을 서구적 용어인 ‘미술’ 개념을 극복할 만한 대안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59)

3) 불이일여(不二一如)와 법열(法悅): 미적 무욕성(無慾性)

동양예술 사유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포일과 불이의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은 물론 위에서 살펴본 공무사상과도 연계되는 것이지만, 우주관이나 세계관에 있어 근본을 이루는 자연관의 차별성을 대변한다.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 한국 등 동양에서는 범아합일(梵我合一)의 관념을 바탕으로 우주와 자연과 인간이 대극적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도가에서는 도(道)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이(理)와 사(事), 근원과 현상계의 관계를 하나로 수렴하였고, 여기에 불교가 발생 유입되면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포일(抱一) 관념과 불이일여(不二一如)의 이념이 보다 정밀한 세계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를테면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화한 불교의 이념에서 보면, 자아가 곧 우주이고, 내 마음이 곧 일체(一切)이며, 부처와 중생,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시(是)와 비(非),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하나여서 본래부터 구별이 없고, 구별은 오직 사람의 관념 속에 있을 뿐이다. 이 같은 경계에서는 역시 미추(美醜)의 경지도 따로 없으며, 모든 것이 진선미(眞善美) 아닌 것이 없다. 이처럼 선종에서는 분석이나 추리, 판단의 일반적 논리의 단계를 버리고 완전히 자신의 내심(內心)의 체험과 직각적(直覺的)인 느낌에 의존하여 일체를 파악해야 한다는 사유방식을 제시해놓고 있다.

인간은 생존의 완벽한 자유를 위하여 미적 창조를 하고 미적 표현을 하며 미적 체험을 한다. 또한 미적 판단은 의미의 결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형성의 자유를 추구함에 있다고 할 때, 선종의 심법(心法)은 미적 심리를 해석하고 해명하게 하는 기초개념들을 제공해준다.

요컨대 미적 체험의 자율적 성격에서 본다면 선종은 의식의 부정이 왜 의식의 자유인가를 불이사상과 심법을 근간으로 하여 동양미학의 핵심주제로 제시해주고 있는 셈이다. 동양예술에서 자연대상을 관찰하되 궁극적으로는 경험과 분별을 초월하는 직각관조(直覺觀照)를 중시, 직관에 의해 파악된 사물의 본성과 주관의 결합이라는 물아일치(物我一致)를 추구하면서 형사(形似)를 넘어서 고도의 사의성(寫意性)을 추구해왔던 점은 바로 불이사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산을 그리려면 화가가 산이 되어야 하고, 대나무를 그리려면 화가가 역시 대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물아일치의 경계를 강조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일획자 만유지본 만상지근(一畵者 萬有之本 萬象之根)”이라 하여 일획으로 만물의 형상을 다 담아낼 수 있다고 설파한 석도의 화론도 일즉다 다즉일의 불이사상과 그 경계를 같이 한다. 

앞의 항목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야나기는 “무(無)의 마음은 어떠한 것도 아직 분별되지 않은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서는 아직 옳고 그름의 언어조차 없다, 미생미성(未生未成)의 세계이다. 따라서 여기엔 분별의 지(知)를 덧붙일 터럭 하나의 여지도 없다. 이런 경지에서는 대소(大小)는 불이(不二)이다. 선악(善惡)은 미생(未生)이다. 유무(有無)는 원융(圓融)이다. 미는 곧 추(醜)이며 추는 곧 미이다. 모든 것은 그대로 조화한다. 둘 없이 둘을 포함하는 것이다.”60) 라고 말한다. 그는 ‘무유호추(無有好醜)의 원(願)’(《大無量壽經》 속의 48大願 중 제4願)을 빌어 “아름다운 사람과 추한 사람의 구별이 없는” 불국토를 지향하는 미의 법문(法門)을 세우고자 했고, 미와 추의 구분이 없는 ‘불이미(不二美)’를 진정한 미의 이상으로 천명하였다.61)

불교 경전 전체가 이분법적인 분별을 넘어선 세계를 지향하고 있지만, 자타불이(自他不二), 범성등일(凡性等一) 등 부처의 초월적 성격까지도 ‘불이’의 경계에서 부정하고 ‘불즉시심(佛卽是心)’의 세계를 설한 경전들은 《능가경》, 《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 등 다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유마경》의 〈불도품(佛道品)〉과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은 앞으로의 미적 사유에 있어 ‘불이’의 경계와 진정한 미적 엑스타시, 즉 불교적인 법열(法悅)에 대한 재고의 여지를 보여준다.

〈입불이법문품〉에서는 생멸(生滅), 아(我)와 아소(我所), 수(受) 불수(不受), 보살심(菩薩心) 성문심(聲聞心), 선(善) 불선(不善), 죄(罪) 복(福), 유루(有漏) 무루(無漏), 유위(有爲) 무위(無爲),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 생사(生死) 열반(涅槃), 진(盡) 부진(不盡), 아(我) 무아(無我), 명(明) 무명(無明), 색(色) 색공(色空), 사종성(四種性) 공종성(空鍾性), 안(眼) 색(色), 보시(布施) 회향일체지(回向一切智), 공(空) 무상무작(無相無作), 불법(佛法) 중(衆), 신(身) 신멸(身滅), 신구의(身口意) 선(善), 복행죄행(福行罪行) 부동행(不動行), 종아(從我) 기이(起二), 유(有) 소득상(所得相), 암(暗) 여명(與明), 낙열반(樂涅槃) 불락세간(不樂世間), 정도(正道) 사도(邪道), 실(實) 부실(不實)의 불이(不二) 등 수많은 불이의 연유를 설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많은 법문을 마치고 나서 그같은 불이법문조차 “(…)여아의자 어일체법 무언무설 무시무식 이제문답 시위입불이법문( … 如我意者 於一切法 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나의 뜻은 일체법에 언설이 없으면 무식을 보이어 모든 문답을 여의게 할 것이니 이것이 불이법문에 든 것이 된다)”이라고 하여 ‘묵연무언(默然無言)’의 경계로 불이법문을 수렴하고 있다.62)

여기서 일일이 법문을 해석하는 것은 유보하고, 몇 가지 내용을 분석하면, 불이법은 바로 ‘나와 나의 것’, ‘받고 받지 않음’, ‘더럽고 깨끗한 것’, ‘얽힘도 없고 풀 것도 없는 것’, ‘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넘치지도 흩어지지도 않는 것’, ‘아와 무아’, ‘본 것과 보지 않은 것’ 등의 이분법을 넘는 무의지(無意志)와 무욕(無慾)의 경지에서 참다운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법열을 느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관중생품(觀衆生品)〉의 “(…)무소득고이득(…)(無所得故而得, 얻는 것이 없으므로 얻는다)”63)의 문맥과 연결하여 살필 때, 《유마경》의 〈불이품〉은 미적 체험에 있어 의식의 집주(集注)와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엑스터시 및 무욕성(無慾性)의 열락(悅樂)과 법열(法悅)의 관계에서 앞으로의 미학 연구에 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이와 연관해서 세속적 낙(樂)에 대해 언급한 자타카(Jataka 134)의 한 구절, 즉 “상(想)이 있는 사람도 항상 괴로워하고, 상이 없는 사람도 항상 괴로워하였다. 유상(有想) 무상(無想)의 양단(兩端)을 떠나고 버리라. 저 등지(等至)의 기쁨이야말로 청정하다.”(《南傳大藏經》 권29, 95쪽)64)는 교설 또한 불이의 경계가 법미(法味)의 최고 경지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Schopenhaur)가 불교의 법열과 해탈론을 그의 예술론의 핵심계기로 삼았던 점도 바로 이러한 무욕성의 근거를 요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65) 우주만상과 시 공간의 존재 양태를 인드라망(網)의 그물에 비유하여 ‘다즉일(多卽一)’의 불이론으로 수렴한 《화엄경》의 세계 또한 실제적인 대상과 형상 너머의 진리와 선, 그리고 미의 진정한 경계를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앞으로 불교미학 연구의 한 계기를 열어놓고 있다.66)

5. 결어: 불교미학 연구의 의의와 방향성

오늘날의 예술기류에서 ‘신르네상스’의 흐름으로 일컬어지는 조짐은 그동안 서양의 사고체계에서 이분법적으로 취급되어왔던 이성과 감성, 과학과 예술, 인간과 자연 등의 대립적인 요소들을 융화하고, 인간성 회복이라는 공통분모와 함께 동양사상을 기초로 하여 그동안 이성에만 치우쳐 소홀히 했던 감성과의 균형을 되찾는 조류를 반영한다.

그동안 서양은 동양을 타자로서만 취급해왔지만, 이제 서구문명과 문화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서양인들은 동양사상에서 인간적 사유의 출구를 찾고 있고, 그에 따라 동양의 예술문화와 그 예술사유에 대한 가치인식도 제고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양사상과 현대 예술조류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설파한 이론가들의 논고도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67) 여기서 한 예를 든다면, 포스트모던 문화의 양상을 밀도 있게 분석하고 있는 이합 하산(Ihab Hassan)의 논문과 그에 대한 국내 학자의 해석 중에 노장사상과 선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글도 소개된 바 있다.68)

이합 하산은 〈포스트모던 조망에 나타난 다원주의〉69)(1987)라는 논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11가지로 꼽고 있다. 즉 불확정성, 단편성, 탈정전화(脫正典化), 주체의 상실과 깊이의 상실, 현전(現前)의 불가능성과 재현(再現)의 불가능성, 아이러니, 혼합성, 축제화, 행위와 참여, 구축성, 내재성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도가사상이나 선불교의 선사상을 떠올려보더라도 코스모스보다는 카오스에서 더 근원을 찾고, 존재와 실체보다 공과 무에 더 가치를 두고,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과 직관을 중시하며, 규정성과 규범보다는 자유와 해탈을 추구하는 점에서 위의 특징 중 불확정성, 탈정전화, 현전의 불가능성, 행위와 참여, 축제화, 아이러니 등의 항목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위의 특징 중 일부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혼돈과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동양사상과 그 예술사유가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니라 첨단의 현재성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양의 사상은 물질과 정신의 가치를 함께 조율해옴으로써 서양의 물질만능주의를 배격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고,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신의 자유로움과 물질에 매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는 이제 그 가치가 고갈된 서양의 포스트모던 문화에 활력을 주는 또 다른 요소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산이 언급한 ‘새로운 영지주의(new gnosticism)’가 물질이나 자연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력이 자연과 문화에 상호작용하는 툭 터진 지형을 마련하는 일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양사상의 접목 및 그 현대성은 역사적 필연성을 지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현대예술의 현장에서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어 역시 그러한 추세를 창조와 행위로서 드러내는 작가들이 전세계적으로 다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동양의 전통은 이성적 인식과 감성적 인식이 통일적으로 도달하는 높은 경계, 진·선·미가 합치하는 이상적인 경계, 종교·윤리·학문·예술이 통합되는 폭넓은 경계를 추구하였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의경(意境)’과 ‘경계(境界)’ 같은 동양 고전미학의 중심 범주이다. ‘의경’은 여러 종류의 “예술 중 독창적으로 예술을 구상하는 예술 수법을 빌어 성취한 감정과 경치가 상호 융합되고, 허실이 통일되고, 우주생기나 인생의 진리를 능히 심각하게 표현한, 그리하여 심미 주체의 몸과 마음이 감성적 구체를 초월하고, 사물과 자아를 관통하여 즉각 광활하기 그지없는 공간에 진입한 예술의 화경” 을 가리킨다.70)
‘경계’는 ‘의경’과 비슷한 동양 전통미학의 중심 범주이다.

‘경계’ 개념이 동양미학의 중심 범주로 성립하게 된 데에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 불교에서 ‘경계’라는 말은 불학의 조예나 종교적 수양이 도달한 고차원의 정신세계를 가리킨다. 그것이 확대되어 “학자나 예술가가 자아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 중에 도달한 높은 정신적인 단계를 가리키게 되었는데, 그 고차원은 곧 순간적으로 돈오하여 천인합일의 무차별적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 무차별적 정신 경계는 강렬한 심미적 의미를 갖는다.”71)

이처럼 높은 경계와 의경을 추구하는 동양 고전미학의 관점에서 미적 인식은 진리와 윤리적 가치의 인식도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동양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가는 우주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윤리적인 인격의 완성을 이루어야 비로소 그가 터득한 이러한 경계의 내용을 아름답게 표현해 낼 수 있다.

이상의 관점과 의의를 전제로 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불교미학의 기초개념에 대한 연구 시론의 결과와 앞으로의 연구 방향성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미학의 분야에서 예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 및 작품의 해석방법론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글의 제1장에서 〈종교와 예술, 그리고 미학〉이라는 제목 하에 예술과 종교, 종교와 예술의 교착융합(交錯融合) 관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 자체가 이미 미학 연구의 한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와 예술의 관계는 이질적인 다른 것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문화사 속에 서로 용해되어 있는 동종성(同種性)의 근거에서 미학적 연구의 한 계기를 이룬다. 특히 동양의 정신문화 속에 불교와 그 사상이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 깊으며, 그에 따라 ‘불교미학’의 연구 가능성이 확보된다.

둘째, 불교의 상징체계는 사상과 의궤, 그리고 방편으로 묘출된 다양한 예술 형식들이 하나로 아우러지면서 만다라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팔만사천의 법문이 깨달음을 향한 하나의 법문이 되고, 3단의 분단법(分壇法)에 의한 다양한 의궤와 그에 따른 탱화나 벽화 등의 발생분화 관계(發生分化關係)가 결국에는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는 가운데, 미적 형식원리로서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념과 비교미학적인 측면에서의 깊이 있는 논의가 요망된다.

셋째, 불교에서 인식하는 자연미, 예술미, 인격미의 미적 범주를 돌아볼 때 자연미에서는 미추(美醜)의 구분을 넘어 자연법이(自然法爾)와 여여(如如)의 경지를, 예술미에서는 부조화(不造化)와 비정형성(非定形性)의 미를 용인하면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심(無心), 무표현(無表現)에 따른 고요함과 평정의 미를, 인격미에서는 신미일여(信美一如)에 따른 자비(慈悲)의 이념을 불교미학의 기본개념으로 제시해놓고 있다.

넷째, 불가에서는 현상과 본질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색일여(心色一如)’, ‘공색일체(空色一切)’라고 본다. 여기서 일체(一切)는 무엇과 무엇의 연관을 말하는 것으로서, 연기(緣起)의 추상적 해명이고, 따라서 ‘심색일여’는 곧 ‘물심일체(物心一切)’의 뜻을 지닌다.

연기의 장(場)에서 낱낱이 자기로 환원될 수 없음에서 각각은 무자성(無自性)의 공성(空性)으로 동일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이룬 데서 보면 서로 다를 뿐인 관계이다. 이 같은 색과 심의 관계에서 미혹으로부터 벗어난 실상으로서의 심(心)만이 만유의 조(造) 가운데 오견(五見)과 오심(五心)으로 얽힌 인연들이 끊겨 절대자유를 누리게 되며, 이 경지가 해탈이고 열반이다.

이 같은 열반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 의식작용의 본체〔心王〕가 객관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心所〕을 적멸의 경지로 이끌어야한다는 것이 각(覺)이며, 이 각은 진정한 지혜〔菩提와 佛果〕에 이르는 길이나 같다. 바로 선정(禪定)은 모든 인연의 고리로부터 벗어난 절대 자유의 심(心)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고, 이러한 선정의 마음이 불가에서는 곧 미적 이념이며, 이상이고 극락이다.

그러므로 불가의 미적 가치는 의식(意識)의 해탈에 있게 된다. 이처럼 사유 자체를 부정하고 그 너머의 자유를 추구하여 절대긍정에 이르는 불교의 심법은 미적 체험의 특징에 있어 그 자율성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더욱 주목할 만하다.

 미적 체험이나 미의식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특징을 돌아보면, 특유한 주관-객관의 상호침투 관계(noesis-noema)에서 일어나는 감성적 체험의 성격을 지니며, 몰인식성(沒認識性, Erkenntnislossigkeit)과 몰의지성(沒意志性, Willenlossigkeit), 그리고 미의 가상성(假象性)과 연관된 미적 태도 측면에서 무관심성(無關心性) 및 자기목적성(自己目的性)과 정관성(靜觀性)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같은 미학사의 문맥은 이성과 논리를 위주로 했던 서양의 합리주의 전통과 여전히 맞물려 있는 것이지만, 동양의 불교사상을 통해 반추해볼 때, 미체험의 자율적 속성을 이해하는 데 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다섯째, 정교한 심법(心法)을 통해 진리를 설파하는 과정에서 불가는 언어와 형상의 한계를 전제하고, 또한 인식과 사유의 부정을 통하여 식심견성(識心見性)을 추구한다. 특히 선학에서는 ‘득의망언(得意妄言)’의 방법으로 불경을 요해할 것을 설파하고, 무상(無相)과 무명(無名)을 연결시켜 언상(言相)의 한계를 지적, 종래는 언망절려(言亡絶慮)의 경계에서 무념(無念), 무주(無住)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고 설하고 있다. 앞으로 미적 의미의 불확정성(不確定性), 즉 미적 판단은 의미의 결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형성의 자유를 추구함에 있다고 할 때, 선종의 심법(心法)은 미적 심리를 해석하고 해명하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언망절려의 경지에 대한 재고(再考)는 미학 연구의 한 계기가 될 것이다.72)

끝으로, 불이일여(不二一如)와 법열(法悅)의 관계에서 미적 무욕성(無慾性)의 특성을 반추할 수 있다. 포일(抱一)과 불이(不二)의 이념은 동양의 예술사유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자아가 곧 우주이고, 내 마음이 곧 일체(一切)이며, 부처와 중생,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시(是)와 비(非),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하나여서 본래부터 구별이 없고, 구별은 오직 사람의 관념 속에 있을 뿐이다. 이같은 경계에서는 역시 미추(美醜)의 경지도 따로 없으며, 모든 것이 진선미(眞善美) 아닌 것이 없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분석이나 추리, 판단의 일반적 논리의 단계를 버리고 완전히 자신의 내심(內心)의 체험과 직각적(直覺的)인 느낌에 의존하여 일체를 파악해야 한다는 사유방식을 제시해놓고 있다. 인간은 생존의 완벽한 자유를 위하여 미적 창조를 하고 미적 체험을 한다.

요컨대 미적 체험의 자율적 성격에서 본다면 불가의 선종은 의식의 부정이 왜 의식의 자유인가를 불이사상과 심법을 근간으로 하여 동양미학의 핵심주제로 제시해주고 있는 셈이다. 동양예술에서 자연대상을 관찰하되 궁극적으로는 경험과 분별을 초월하는 직각관조(直覺觀照)를 중시, 직관에 의해 파악된 사물의 본성과 주관의 결합이라는 물아일치(物我一致)를 추구하면서 형사(形似)를 넘어서 고도의 사의성(寫意性)을 추구해왔던 점도 바로 불이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모든 이분법을 넘는 무의지(無意志)와 무욕(無慾)의 경지에서 참다운 법열(法悅)의 세계를 설하고 있다.

특히 〈관중생품(觀衆生品)〉의 “(…) 무소득고이득 (…)(無所得故而得, 얻는 것이 없으므로 얻는다)”의 문맥과 연결하여 살필 때,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은 미적 체험에 있어 의식의 집주(集注)와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엑스터시 및 무욕성(無慾性)의 열락(悅樂)과 법열(法悅)의 관계에서 앞으로의 미학 연구에 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이와 연관해서 세속적 락(樂)에 대해 언급한 자타카(Jataka 134)의 한 구절, 즉 “상(想)이 있는 사람도 항상 괴로워하고, 상이 없는 사람도 항상 괴로워하였다.

유상(有想) 무상(無想)의 양단(兩端)을 떠나고 버리라. 저 등지(等至)의 기쁨이야말로 청정하다.”(《南傳大藏經》 권29, 95쪽)는 교설 또한 불이의 경계가 법미(法味)의 최고 경지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Schopenhaur)가 불교의 법열과 해탈론을 그의 예술론의 핵심계기로 삼았던 점도 바로 이러한 무욕성의 근거를 요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우주만상과 시 공간의 존재 양태를 인다라망(網)의 그물에 비유하여 ‘다즉일(多卽一)’의 불이론으로 수렴한 《화엄경》의 세계 또한 실제적인 대상과 형상 너머의 진리와 선, 그리고 미의 진정한 경계를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앞으로 불교미학 연구의 한 계기를 열어놓고 있다. 이밖에 서론 부분에서 언급했던 여타의 기초개념들에 대해서도 학제간의 교류 연구를 통해 앞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

장미진 /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미학 및 미술사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홍익대학교 박사과정 미학과에서 불교도상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가톨릭대학교 예술학과 강의전담교수, 영남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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