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호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

편집자 주
본고는 《회당학보》 제12집(2007)에 발표한 〈출가·재가 이분(二分)의 실천적 근거 ― 초기경전을 중심으로〉를 수정 보완하였음을 밝힌다.

 

1. 들어가는 말

불교 수행공동체 또는 신앙공동체를 일반적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 한다. 사부대중은 비구중, 비구니중 그리고 우바새중, 우바이중을 말하며, 다시 비구중, 비구니중은 출가중(出家衆)으로 우바새중, 우바이중은 재가중(在家衆)으로 구분한다. 출가중의 출가는 종교적으로 불교가 갖는 독특한 특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동아시아 등에 소개된 대표적인 인도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한다.

 현재 한국불교는 진정한 출가정신의 회복과 이와 맞물려 재가자와의 관계가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왜 출가와 재가가 나누어졌는지, 왜 출가는 요구되는지, 출가자와 재가자의 기본 이념과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지, 그들의 사회적 종교적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재가와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지 등을 초기불교경전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출가 기원에 대한 검토

처자식과 함께 하는 가정을 떠나 수행하고 교화하는 불교의 출가는 언제부터 유래하였을까? 여기서는 출가수행이 바라문교로부터 기원한다는 기존의 설에 대해서 간략히 문제제기하는 것으로 한정한다.

출가가 불교 흥기 이전부터 있었음은 불전(佛傳)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의 극적인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자이나교와 같은 사문 종교에서는 수행에 있어 기본조건으로 출가가 요구되었다.

고대 인도에 있어 출가의 기원과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입장이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시기에 있어 인도 유럽인이 인도아대륙으로의 진출을 중심으로 그들이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아대륙의 선주민에게서 행해졌다는 입장과 그와는 달리 멀리 불교 흥기에 즈음하는 늦은 시기로 보려는 입장이 그것이다. 다시 이와 맞물려 인도 유럽계가 중심을 이루었던 바라문 전통이라는 주장과 인도 유럽계가 아닌 선주민 계통의 고유한 종교 전통이라는 상반된 주장이 다시 제시되었다.

 여기서 출가의 기원을 불교 흥기에 즈음하는 늦은 시기로 보려는 입장은 주로 출가가 바라문 종교의 반동에 의해 일어났다고 보려는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바라문계 기원설은 설득력이 없다. 반대로 출가 전통이 바라문 전통이 아닌, 그리고 시기적으로 인도 유럽계가 이주해 오기 이전으로 보는 견해는 인더스 문명의 유물은 물론 R.g Veda 등의 오래된 문헌을 통해서도 논의되고 있다.

불교 흥기에 즈음하여 인도아대륙의 동북부 지역에서 특히 출가의 종교적 수행이 폭넓게 행해졌음은 바라문계 전적과 사문종교인 불교와 자이나교의 경전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이 점에서 출가는 사문종교의 전적에서는 중요한 특징이었던 것에 반해 경쟁관계에 있었던 바라문에서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그래서 바라문 문헌이나 불교 문헌 더 나아가 아소카 비문에서도 출가의 사문과 바라문은 언제나 대립관계로 언급된다.

초기경전에서도 양자의 적대적인 관계와 함께 많은 일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바라문 앵무마납이 붓다를 찾아 자신이 들은 바로는 “만일 집에 있으면 큰 이익이 있고 큰 공덕이 있지만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라문교의 전통적이고 주류적인 부류가 출가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또 다른 유명한 《삼명경(三明經)》은 바라문과 붓다의 대론으로 경이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바라문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붓다는 “삼명(三明) 바라문 즉, R.g Veda 등 세 베다에 달통한 바라문들이라도 가족과 산업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바라문의 답변은 바라문계의 중심과 주류 사람들이 모두 가족과 사업이 ‘있는 것’으로 증언한다. 그러한 바라문의 답변에 붓다는 가족과 산업이 있는 사람과 이를 떠난 출가 비구중 누가 더 자재(自在)하고 탐진치(貪瞋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비심이 있고 질투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데 이러한 것으로 당시 바라문과 출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일본불교학계의 영향으로 출가의 기원을 바라문교의 4주기(A칢큥ama) 단계 중 마지막 유행기와 관련하여 구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지만 바라문교에서 유행기가 4주기에 더해지는 것 자체가 불교 흥기보다 훨씬 늦은 시기임이 논의된다.1) 그러므로 사문들의 출가가 바라문 전통의 4주기 중 유행기로부터 유래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기본적으로 출가 사문의 성격과 특징들은 바라문교와는 상당히 다른 전통이었다. 출가 사문은 바라문의 결발(結髮)과 달리 삭발과 유행(遊行)과 함께 성교를 끊는 금욕적인 생활이 강조되었다. 이에 반해 바라문 주류전통의 Upanis.ad에서는 Upanis.ad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이야기되는 Ya칓n쁝valkya의 경우에 있어서 두 명의 아내까지 거느린 것으로 나타난다.2) Upanis.ad의 많은 곳에서 바라문은 성교를 즐기고 철학적 종교적 논의의 대가로 많은 소가 거래되었으며 제자에게는 400마리의 스승의 소를 1,000마리로 늘리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일까지 맡겨지기도 한다.3)

이렇듯 바라문계 종교 전통에서 출가의 기원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자이나교와 불교와 같은 사문종교에서 출가는 강조되었고 중심을 이루었다. 초기불교경전만 보더라도 불교 외의 수많은 출가 사문들의 등장은 출가 수행의 전통이 불교 흥기 이전부터 얼마나 깊고 오래된 뿌리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출가 사문 전통은 바라문 종교 전통과 다른 독립된 기원을,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불교 흥기보다는 훨씬 이전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출가와 재가의 의미와 조건

석가모니 붓다의 제자는 크게 출가자와 재가자로 구분된다. 다시 출가한 남성인 비구와 여성인 비구니로 출가중을, 그리고 재가 남성을 우바새, 재가 여성을 우바이로서 재가중(在家衆) 또는 우바새중(優婆塞)이라 하며 이를 합하여 흔히 사부대중(四部大衆 : catta칞i parisa?이라 한다. 먼저 양자의 의미 차이를 살펴본다.

1) 출가

한역 출가(出家)는 빠알리(Pa칕i)의 pabbajja??산스끄리뜨의 pravrajya??해당한다. 기본 어의는 ‘나아간다(the going forth)’이며 이 말에 대한 경전에서 수식하는 설명은 거의 관용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집에서 집이 없는 삶으로 나아간다.’
(aga칞asma?anaga칞iyam. pabbajiati.)

‘믿음에 따라 집에서 집이 없는 삶으로 나아간다.’
(uddissa saddha?aga칞asma?anaga칞iyam. pabbajiati.)

출가수행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정형구는 한역 《사문과경(沙門果經)》에 이에 상응하는 빠알리 Sa칖an쁭쁝phala Sutta 등에 반복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은 마가다 왕이 붓다를 찾아 출가 사문의 수행의 과보(결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가르침을 듣고 여래에게 믿음을 가진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한다. ‘집에 머무는 재가는 번잡하고 염오(染汚)의 길이고, 집을 떠난 출가는 허공과 같다. 집에 머물면서는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잘 닦여진 자개껍질과 같은 청정한 범행(梵行)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얼마 뒤에 재산이 많이 있거나 적거나 간에 모두 버리고, 일가친척 또한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출가한다.4)

내용상에 있어 빠알리 Sa칖an쁭쁝phala Sutta에 대한 한역은 장아함보다 중아함과 이에 상응하는 빠알리 여러 경전에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가정이란 지극히 좁고 괴로운 곳이요, 집을 떠나 도를 배우는 것은 환히 드러나고 넓고 큰 것이다. 내가 지금 집에 있을 경우 사슬에 묶여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범행을 닦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적은 재물이건 많은 재물이건 이 재물을 버리고, 적거나 많거나 친족을 떠나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써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리라.

그는 그 뒤에 적건 많건 재물을 다 버리고, 적거나 많거나 친족을 떠나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써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운다. 그는 집을 떠난 뒤에는 친족의 상(相)을 버리고, 비구의 중요한 가르침을 받아 금계(禁戒)를 닦아 익히고, 종해탈(從解脫)을 지켜 보호하며, 또 위의와 예절을 잘 거두어 잡고, 털끝만한 죄를 보아도 언제나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으며, 배운 계를 받아 지닌다.5)

이 경문은 출가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시설되어 있으며 출가의 의미에 있어 한마디로 모든 가족과 사회적 끈 또는 유대관계를 끊고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출가하였더라도 수행과 중생교화에 관심이 없고 생존 수단으로 출가한 ‘적주비구(賊住比丘)’가 있었으며 또한 형상만 승려일 뿐, 행동은 속인과 다를 바 없는 ‘속승(俗僧)’에 대한 경계와 비판을 경전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누구든 가사를 입고서
세속적인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아직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다.

누구든 모든 더러움을 버리고
착함이 잘 정립되어 있으면
가사를 입을 만하다.6)

더 나아가 출가와 관련해 매우 시사적인 내용의 경전 하나는 붓다는 자신이 반열반한 1,000년 뒤 타락을 다음과 같이 예견하고 있다.

미래 세상의 비구들은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면서 살림을 즐겨해 왼쪽에는 아들을 안고 오른쪽에는 딸을 안을 것이다. 또 젓대나 퉁소를 들고 거리를 다니면서 걸식을 할 것이다.7)
그래서 Suttanipa칣a에서는 대단히 강경한 어조로 거짓 수행자인 속승과 적주비구를 “마치 쌀겨를 키질하여 바람에 날려버리듯이 그들을 날려 버려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8)

2) 재가

재가는 출가와 대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초기경전에서는 재가자의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본다.

출가가 기본적으로 ‘집에서 집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 사는 것’을 의미할 때 재가는 기본적으로‘집 없는 삶으로 나아가기 이전의 집에서의 삶’을 의미한다. 즉 집에 머무는 남자를 gahapati, 그리고 여자를 gahapata칒라 했다. 또는 gahat.t.ha도 쓰이며 특별히 ‘재가자 (지계)수행’이라는 말로 gahat.t.ha-vatta라는 말도 언급되면서 오계(五戒) 수행이 나열되는 경우도 있지만9) gih┓나 gihin라는 말이 더 많이 나타난다.

나아가 더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집에서 살면서 붓다의 제자됨을 받아들이는 남녀는 각각 Upa칢aka와 Upa칢ika??정착되었다. 이는 출가의 주체자가 각각 비구와 비구니라 하는 것과 같이 재가의 주체자를 이름하는 말이 된 것이다. 이러한 재가자를 한역하여 Upa칢aka는 우바새(優婆塞)로 음역되고, 의역으로는 근사(近事)·근사남(近事男)·근선남(近善男)·신사(信士)·신남(信男)·청신사(淸信士)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Upa칢ika??우바이(優婆夷)로 음역되고, 근사녀(近事女)·근선녀(近善女)·근숙녀(近宿女)·신녀(信女)·청신녀(淸信女)로 의역되었다. 기본 어의에 있어 Upa칢aka(upa+a칢+ka)와 Upa칢ika??한역에서도 나타내고 있듯이 ‘가까이 함께하는 자’나 ‘가까이 같이하는 자’ 또는 ‘가까이에서 섬기는 것을 갖는 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불·법·승 삼보를 가까이에서 함께하고, 가까이 같이하고,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우바새·우바이는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바새·우바이에 대한 정의로 규정되는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우바새란 집에 머물며 청정한 삶을 살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삼보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이에 저를 증명하고 알아주십시오’라고 맹서한 사람이다.10)

재가로서 붓다의 제자가 되는 최소한의 조건은 삼보에 대한 귀의가 먼저 요구된다. 더 나아가 오계의 수지까지를 그 범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11) 계속해서 오계에 이어 몇 가지 계율을 더 부가한 팔재계(八齋戒)가 주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아함의 《우바새경(優婆塞經》12)은 그 경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가불자를 위한 기본 가르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경은 많은 경전에 산재해 있는 재가자에 대한 기본적인 교설의 요점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데, 재가자는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제자’로 언급되면서 오법(五法)과 사증상심(四增上心)을 실천할 것이 설해진다. 오법은 오계를 지켜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사증상심이란 네 가지 뛰어난 마음을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서 삼보의 염(念 : anussati)에 계(戒)의 염이 더한 것이다.
이렇게 붓다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출가든 재가든 기본적으로 모두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오계(五戒)를 수지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출발하지만 또한 ‘집과 집이 없는 삶’이라는 다른 출발점이 획을 긋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출가와 재가의 차이

1) 성격과 생활방식

출가자의 세세한 생활 수칙은 《율장》에 계율로서 제정되었다. 여기서는 《율장》보다 앞선 여러 경전 가운데 출가에 이어 출가자의 생활방식이 열거되는 경전을 정리해 본다.13)

출가자는 종자나 초목을 해쳐서도 안 되고, 하루 한 끼만을 먹고, 밤에는 먹지 않고, 때 아닌 때 먹어서도 안 된다. 노래와 춤, 연주와 구경거리 등을 행하지도 또는 보거나 듣지도 않는다. 화환이나 향으로 치장하거나 장식하지 않는다. 높은 침대의 잠자리를 갖지 않고 금과 은을 받지 않는다.

날곡식과 생고기를 받지 않는다. 여인과 소녀와 남녀 하인을 받지 않는다. 염소, 양 , 닭 그리고 돼지 등의 가축들을 받는 것에서부터 전답을 소유하지 않는다. 중개하는 일이나 심부름, 사고파는 일을 하지 않는다. 저울을 속이고 돈을 속이고 도량을 속이는 일 등 어떠한 종류의 속이는 부정한 일을 해서도 안 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죽여서도 안 되고 또한 누군가를 강제하고 구속하여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

따라서 출가 비구의 생활이 최소한 몸을 가릴 만한 옷과 배고픔을 지울 만한 음식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은 마치 새가 날개만으로 어디든지 가는 것으로 비유된다. 이상과 같은 출가의 생활 방식은 ‘계율 완성’으로 제시된다. 이는‘짧은 길이의 계’와 ‘중간 길이의 계’ 그리고 ‘긴 길이의 계’로 시설되지만 뒤의 중간 길이와 긴 길이의 계는 먼저의 ‘짧은 길이의 계’를 골격으로 부수적이고 세세한 설명이 부가된다.14) 다른 경전에서는 출가자에게 네 가지 오점이 될 수 있는 행위는 ‘음주’와 ‘음행’과 ‘금은을 받는 것’ 그리고 ‘삿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15)

다음으로 출가비구의 수행 장소는 앞에서 나열한 계율을 바탕으로 성스러워진 감각기능을 잘 보호하고, 또한 성스러운 염(念)과 정지(正知)를 갖추어 하루의 대부분을 한정처(閑靜處)16)에서 경행(can.kama)과 좌선(nisajja?을 주로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7) 이로써 출가자는 계학(戒學)의 구족에 이어 본격적인 정학(定學)과 혜학(慧學)의 확립으로 나아간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출가의 삶은 ‘소욕지족(少欲知足)’의 계율을 바탕으로 한정처에서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출가자는 마치 모든 잎이 떨어진 나무처럼 ‘재가의 모든 삶의 방식’(gih┓vyan쁧ana칗i)은 멀리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강조된다.18) 재가의 생활습관과 재가의 기억과 마음가짐을, 그리고 재가의 근심걱정과 고뇌를 제거하여 바른 수행의 길에 들어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해야 함이 강조된다.19)

이에 반해 재가자의 삶의 방식(gih┓vyan쁧ana칗i)은 출가자와 대비적으로 생각하면 된다.20) 일반적으로 출가자와 다른 재가자의 표식은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흰 옷(gih┓oda칣a vasana?과 장식을 하며 처자를 거느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Suttanipa칣a에서는 압축적으로 일반적인 재가의 삶의 모습으로 처자식, 부모, 소유물 등을 통해 마음이 즐겁고, 끊임없이 감각적 쾌락을 좆는 삶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벗어난 출가자는 재가자와의 비교에 있어 공작새와 백조로 비유된다. 즉 멀리 하늘을 나는 데 공작새는 백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으로 재가자는 출가자를 따라잡을 수 없는 차이를 말한다.21) 그래서 오백여 명의 재가자가 붓다를 찾아 ‘출가’와 ‘재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재가는 출가의 삶의 양식을 배워야 한다는 것으로 답한다. 그러면서 출가자의 자리이타적인 삶의 방식을 설명하고 재가생활이 지향해야 할 실천윤리로서 ‘재가자의 삶의 방식(gahat.t.havatta)’이 제시된다.

여기서 특별한 사항은 붓다는 무소유의 삶을 사는 출가자에게 주는 가르침과 그러한 가르침을 소유에 얽매어 지킬 수 없는 재가자에 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도불교에서 왜 출가와 재가가 나누어졌는지에 대한 사상적 이유를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재가자에게 생명 있는 것을 자신은 물론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된다는 생명윤리로 시작하여 불투도(不偸盜)와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불사음(不邪淫) 등의 오계(五戒)에 이어 때 아닌 밤에 음식을 먹지 말고 화환 등으로 사치하지 않는 등의 팔재계(八齋戒)을 확장하여 설한다. 또한 매달 8일, 14일, 15일 그리고 23일, 29일, 30일에 포살(布薩 : uposatha)을 행할 것이 시설된다.

그런 뒤에 다음날 아침 일찍 출가자에 공양을 베풀어야 하는 것으로 ‘재가자의 삶의 방식’이 설해지는데 이는 출가자의 삶의 방식에 나아가는 실천덕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출가자가 보름마다 포살을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에 반해 재가자는 보름에 두 번 가량의 포살이 권장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외관상 출가와 재가는 ‘집에 머물며 불교에 귀의하느냐’ 아니면 ‘집을 떠나 불교에 귀의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구분이 된다. 이외에도 출가자는 ‘분소의(糞掃衣 : pam.suku칕a c┓vara)’22)와 ‘물들인 옷인 가사(袈裟 : ka칢a칪a)’를 입고 재가자는 ‘흰 옷 입은 사람’으로 표현된다는 형식적인 차이가 있다. 출가자는 재가자처럼 흰색 옷을 입을 수 없음이 율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자발적인 환속이나 교단에 의한 파면에 따르면 반드시 흰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것이 설해진다.

2) 삶의 양태와 성격

한 초기경전에서는 한 바라문과 붓다와의 대론에서 재가자와 출가자의 삶의 양태와 성격을 대비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23)

바라문 : 집에 있는 사람에겐 어떤 괴로움이 있으며,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에겐 어떤 괴로움이 있는가?
붓다 : 집에 있는 사람은 자재하지 못한 것을 괴로움으로 여기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자재한 것을 괴로움으로 여긴다.

이에 다시 그러한 이유를 바라문이 묻자 붓다는 먼저 ‘집에 있는 사람의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집에 있는 사람은 만일 돈이 불어나지 않고, 금 은 진주 유리 수정들이 다 불어나지 않으며, 목축과 곡식과 노비와 심부름꾼 또한 불어나지 않으면, 그 때 집에 있는 사람은 걱정하고 괴로워하며 시름하고 슬퍼하나니, 그로 인해 집에 있는 사람은 걱정과 괴로움이 많아지고 시름과 슬픔을 많이 품는다.

계속해서 붓다는 ‘출가자의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만일 행이 그 욕심을 따르고 행이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면, 그 때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걱정하고 괴로워하며 시름하고 슬퍼하나니, 그로 인해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걱정과 괴로움이 많아지고 시름과 슬픔을 많이 품느니라. 범지여, 이와 같이 집에 있는 사람은 자재하지 못한 것을 괴롭다고 여기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자재한 것을 괴롭다고 여긴다.

다음으로 바라문은 “집에 있는 사람에겐 어떤 즐거움이 있으며,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에겐 어떤 즐거움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집에 있는 사람은 자재한 것을 즐겁다고 여기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자재하지 못한 것을 즐겁다고 여기는 것”을 다음과 같이 대비적으로 설한다.

집에 있는 사람은 만일 돈이 불어나게 되고, 금 은 진주 유리 수정들이 다 불어나게 되며, 목축과 곡식과 노비와 심부름꾼이 또한 불어나게 되면, 그 때 집에 있는 사람은 쾌락하고 기뻐하나니, 그로 인해 집에 있는 사람은 쾌락과 기쁨이 많아진다.

범지여,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행이 욕심을 따르지 않고, 행이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지 않으면, 그 때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쾌락하고 기뻐하나니, 그로 인해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쾌락과 기쁨이 많아진다. 범지여, 이와 같이 집에 있는 사람은 자재한 것 때문에 즐겁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자재하지 못한 것 때문에 즐겁다.

출가와 재가가 각각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삶의 가치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로써 불교가 말하는 양자 간의 삶의 양태와 성격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3) 경계는 범행의 실천

재가와 출가에 있어 외관상 차이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면에 있어 큰 차이는 재가자의 오계 가운데 세 번째인 불사음계와 출가자의 바라이법(波羅夷法 : pa칞a칓ika)의 제일 음계(淫戒)의 차이이다. 즉 재가자의 불사음계는 자신의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과의 성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24) 이는 자신의 배우자와의 성관계는 허용된다. 반면에 출가자의 음계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성관계〔淫行〕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25) 만약 갖게 되면 승단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비구가 될 수 없다. 이를 범한 비구를 꾸짖는 붓다의 다음과 같은 문구로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무시무시하고 독을 품은 뱀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낫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흑사(黑蛇)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낫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활활 타오르는 숯 구덩이에 집어넣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26)

출가 후 평생 동안 성행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많은 경전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그 이유는 “성 행위(methuna)에 탐닉하는 자는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삿됨을 행한다.”27) “홀로 수행하는 지혜 있는 자라 하더라도, 성행위에 빠지면 사리분별이 흐려진 사람처럼 괴로워한다.”28) 등으로 간략하게 설명된다. 특히 출가 비구에 있어 성행이 금지되는 이유는 수행 교단의 안정적인 유지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붓다 자증(自證)의 중도적 체험 때문이다.

즉 성행과 같은 쾌락적인 낙행(樂行)과 반대인 자학의 고행도 궁극적인 고멸(苦滅)을 담보할 수 없고 그렇기에 일체 고가 다한 열반 또한 성취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적 쾌감에 대한 반성이나 포기 없이 열반을 성취하고 해탈하겠다는 것은 마치 독사를 잡겠다고 하면서 꼬리나 몸통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목을 잡아야 독사에 물리지 않지 몸통이나 꼬리를 잡다가는 물려 죽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29)

따라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성적 행위의 단절인 범행(梵行)의 실천으로 완전히 고(苦)을 멸한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30)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출가자와 재가자가 구분되는 결정적인 경계로서 성행(性行)을 차단할 수 있는 마음자세와 함께 환경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할 수 있다. 《율장》의 여러 조항에 의하면 출가 비구는 이성 또는 동성 간의 직접적인 성행위는 물론 자위행위를 포함한 그 어떠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성적 쾌락을 즐기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상대 성을 말로 희롱해서 성적 쾌감을 얻는 경우나 상대 성의 자태에 대한 기억이나 상상을 통해서 얻는 것도 포함된다.

붓다는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에서 사람이 만족할 수 없는 두 가지 법이 있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법을 익히면 끝내 만족할 줄 모르는 것으로 음욕(淫欲)과 음주(飮酒)를 들고 있다.31) 어떤 사람이라도 이 두 가지 법을 익히면 끝끝내 만족할 줄을 모르고 그 행의 결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성행위와 술 등의 중독은 점점 높은 강도와 잦은 횟수를 요구하여 자제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재가는 출가와 같이 음욕을 줄여나가는 실천이 갖가지 방편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면, 재가의 포살은 며칠만이라도 그러한 출가의 삶의 방식으로 확장하여 실천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기본적으로 출가 지향의 종교라 할 수 있다. 다시 이같은 음욕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 우바새의 이중적인 삶이 경전에 그려져 있다.

과거 세상 어느 때, 섬에 살고 있던 어떤 우바새가 다른 우바새의 집에 찾아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가운데에서 애욕(愛欲)에 대하여 몹시 나무라면서 말했다.

“이 애욕이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사람을 속이는 법으로서, 마치 꼭두각시가 어린애를 속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하던 그는 정작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다섯 가지 애욕을 마음껏 누렸다.32)

이와 비슷한 내용이 《별역잡아함》에서는 한 우바새가 아닌 여러 우바새가 모여서 애욕의 허물을 꾸짖으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33) 마찬가지로 이러한 재가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백유경》의 이야기가 또한 매우 시사적이다. 즉 한 어리석은 사람이 꿀을 달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가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꿀을 대접하고 싶었으나 너무 뜨거웠다. 그래서 꿀을 식히기 위해 불 위에서 꿀을 그대로 놔두고, 부채질한다는 이야기로 속된 탐욕의 불을 그대로 두고 지혜의 꿀을 찾는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앞의 경전에서 범부의 삶은 애욕의 꼭두각시 놀음이라고 하였는데 불교의 입장에서 이를 분명히 간파하는 것이 강조된다. 사성제의 집성제는 성적 쾌락을 살아가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심층의 욕구로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실천적인 면에서 출가와 재가라는 이분(二分)과 관련하여 그 중심문제는 성 문제이다.

성생활을 벗어나는 길이 바로 출가의 시작이고 완성에 있어서는 성욕을 존재의 뿌리로부터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전이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聖)과 속(俗) 그리고 성인과 중생의 차이는 마치 종이 한 장 차이의 문제일 수 있지만 실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성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완전한 해방을 성취하는 것이냐 아니면 반성 없이 함께하느냐의 차이가 수행에 있어 특히 중요하다.

5.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과 경지

출가나 재가 모두 불교 수행의 목적은 같다. 한 바라문이 무슨 이유로 붓다에게 재가자나 출가자가 배우는가를 묻는 질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집에 있거나 혹은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나의 제자들이 널리 듣고 외워 익히는 까닭은 스스로 마음을 제어하기 위함이요, 스스로 마음을 쉬기 위함이며, 스스로 열반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범지여, 집에 있거나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나의 제자들은 이런 이유로 널리 듣고 외워 익히느니라.34)

이외에도 많은 경전에서 ‘마치 모든 강들이 있지만 결국 큰 바다로 기울어 나아가듯이 불교에도 출가와 재가가 있지만 이 또한 모두 궁극적으로 열반성취로 나아감’을 말하고 있다.35) 마찬가지로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 성취와 관련해 한 외도가 붓다를 만나 질문하는 내용과 답변으로 출가와 재가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휜 옷 입은 재가자 가운데 얼마만큼이나 범행(梵行)을 닦아 오하분결(五下分結)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 보다도 훨씬 많은 재가자들이 범행을 닦아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비구·비구니에 이어 같은 형식으로 재가자에게도 해당하는 질의응답인데, 여기서 분명히 불설(佛說)에 의해 많은 수의 재가자들이 범행(梵行)을 닦고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어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재가자 또한 궁극적인 경지로서 열반의 성취를 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그 성취하는 과정까지 결코 모두 같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출가의 중요성이 강조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재가자의 조건은 출가자보다 열반 성취에 있어 훨씬 힘들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욕애(欲愛)를 벗어나기 훨씬 힘든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가자라 할지라도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보다도 훨씬 많은 수가 언급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칪a)》에서는 열반을 성취한 21인의 재가자 이름이 열거되기도 한다.36)

6. 사회적 실천운동

1) 출가자

성행위는 사람간의 가장 은밀한 인격적 교류이며 가장 원초적이고 자극적이며 끈질긴 욕망으로 간주된다. 수행하는 출가자에게 강조하는 음계의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중생구제라는 이타적인 면에 있어 처자식과 가정이 있게 되면 항상 처자식과 자신의 것에 붙들려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가정은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애정에 바탕하고 있다.

부부간의 애정이라 하더라도 이는 사적이며 이기적인 음심(淫心)이다. 그렇기에 흔히 애정의 표현은 주로 어둡고 비밀스러운 사적인 공간과 관련된다. 심리적으로 사적이고 이기적이면 이타적이기 쉽지 않다. 타인이 ‘욕망의 대상’으로 대상화되는 한 이타적이기 어렵다. 따라서 자기중심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한 성스러운길로, 거룩한 길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性)은 성(聖)스럽지 않고 성(性)스러운 것에서 떠날 때 성(聖)스럽고 거룩해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 있어 성(聖)과 성(性)은 성(聖)과 속(俗)을 그리고 승(僧)과 속(俗)을 그대로 의미한다. 이렇게 일체의 성적 활동을 끊는 단음(斷淫)을 통해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함께 하화중생(下化衆生)에 전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출가자라 하더라도 종종 출가자는 사회에 대해 은둔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있다.

불교 흥기의 사회 실천적 배경은 당시 종교적 사상적 그리고 윤리적 혼란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경전은 다음과 같다.

존자이시여, 케사푸타에는 사문과 바라문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만을 드러내어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헐뜯으며 멸시하고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존자이시여, 또다른 사문과 바라문들이 케사푸타에 옵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이론만을 드러내어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헐뜯으며 멸시하고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존자이시여, 우리는‘이들 존경하는 사문과 바라문들 가운데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의심을 갖게 되며 매우 혼란스러워집니다.37)

불교의 이러한 혼란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비판하는 역할이 바로 사회적 실천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당시에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던 바라문교적 세계관의 신본주의와 사문의 세계관, 그리고 일반대중의 주술적 세계관 등을 불교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연기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사회적 실천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실천운동의 전면에 파견되었던 그의 제자는 바로 재가자가 아닌 출가자였다. 이 점에서 출가집단은 ‘수행공동체’와 함께 다름 아닌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교화하기 위해 전도 조직을 결성하여 각지로 파견한 ‘전도(傳道) 또는 전법(傳法)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 인간과 신으로부터의 ― 모든 질곡(桎梏)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 또한 나와 같이 모든 질곡으로부터 자유롭다. 비구들이여, 그러니 이제 인간과 신들의 이익을 위해 ‘세계에 대한 큰 자비심을 가지고 ‘많은 종류의 대중들의 복지’와 ‘많은 부류의 대중들의 행복’을 위해 널리 돌아다녀라. 그래서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조리 있고 적절한 표현으로 법을 잘 설하라. 그리고 안팎(내용과 형식)에 있어 무엇이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와 삶의 완성인지를 보여주고 설명하라. 중생들(satta? 가운데는 법을 알아들을 아직 때묻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구제 받지 못하고 퇴보할 것이다. 그러나 법을 들으면 곧 이해하고 깨달아 나아가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갈 것이다.38)

출가자의 사회적 역할과 함께 실천운동이 담아내야 할 내용까지도 매우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출가자 자신들과 같이 일체 존재를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제 정신(救濟精神)에 따른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사회적 운동이다. 출가자의 자비는 모든 존재들의 ‘이익’(attha)과 ‘복지’(hita), 그리고 ‘행복(sukha)’을 위한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출가자의 유행(遊行)은 출가가 세속과 완전한 단절하지 않은 사회실천의 기능을 보여준다. 출가는 세간을 정화시키는 청정제 역할, 마치 연꽃이 더러운 진흙탕에 거하면서 연못을 맑히는 것처럼 출가자는 다시 세속으로 귀환(歸還) 또는 회귀(回歸)하여 세속을 성화(聖化)시키는 방식을 띠고 있다. 즉 속된 세상을 성화시키는 회향(回向)의 존재로서 출가자이다.

2) 재가자

출가자의 이타적인 실천운동과 함께 재가자의 사회적 실천 수행을 또한 비교적으로 논의해 볼 수 있다. 이는 재가자 마하남이 우바새가 되는 조건을 붓다에게 질문한 데에 대한 답변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39)

우바새는 바른 믿음(正信)을 완전히 갖추어 남도 완전히 갖추도록 하여야 하고, 스스로도 깨끗한 도덕적인 삶을 확립하고 남도 확립하게 한다. 자신도 보시하고 남도 행하도록 하고, 스스로 (절에 나가) 여러 비구들을 뵙고 남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 스스로도 열심히 법을 듣고 남도 또한 듣게 한다. 스스로도 법을 받아 가지고 남도 받아 가지게 한다. 스스로도 이치를 관찰하고 남도 관찰하게 한다. 스스로도 깊은 이치를 알아 법에 따르고 향하며 닦으면서 남도 깊은 이치를 알아 법을 따르고 향해 수순하여 닦게 한다.

이상과 같은 16가지 이타적인 실천은 재가자라 하더라도 개인적인 수준의 신행뿐만 아니라 자신을 넘어 이타적인 실천행으로 지향해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즉 재가자의 사회적 실천운동은 자신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도 신(信), 계(戒), 보시(布施), 문(聞)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도록 권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전문적인 출가공동체의 조직적인 대 사회적 실천 활동에 이어 재가자 또한 이타행으로 남을 위하는 대 사회적 실천이 불교의 맥락에서 그 범위와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에서 보살이 닦아야 할 육바라밀의 내용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7.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

수행공동체로서 사부대중은 모두 붓다의 한 제자라는 점에서 같지만 전통적으로 출가자의 위치와 역할은 불교의 온전한 전승과 함께 사회의 사표로서 그리고 대중 교화 활동에 헌신해 왔다는 점에서 재가자들에 비해 훨씬 높고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재가자 중심으로 몇 가지 점을 서술해 보자.

1) 붓다의 반열반과 관련하여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에서 재가자의 위치를 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붓다의 반열반과 관련해서이다. 즉 붓다의 마지막 여로(旅路)를 담고 있는 장아함의 《유행경》이나 그에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에 의하면 반열반에 즈음하여 반열반 든 후의 붓다의 유체(遺體)와 관련하여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 하는가 하는 아난존자의 질문에 붓다는 출가자가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전적으로 재가자들이 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따라서 불탑은 원래 재가자들이 유지 관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승불교 흥기와 관련하여 재가자의 역할이 중요하게 논의될 수 있는 이유도 이러한 불탑 숭배와 관련한 재가자들의 역할 때문으로 논해지기도 한다.

2) 재시와 법시

왜 출가자가 붓다의 장례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는가는 출가자는 오로지 수행 정진에만 매진하라는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정신에서 출가자는 어떠한 식의 경제적인 활동도 금지되었다. 소욕지족(少欲之足)의 무소유 정신에 따라 생존의 기본적인 삼의일발(三衣一鉢)과 사의법에 의해 살도록 하였다. 재가자와 같이 경제적인 생산을 위한 육체적인 노동이나 매매 등을 계율로써 금지하였다. 따라서 출가 수행자는 오로지 재가자의 공양에 의존한 수행생활만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경구는 다음과 같다.

재가자와 출가자는 서로 의존하여 참된 법과 최상의 안온함에 이른다. 출가자는 재가자로부터 음식, 의류, 생필품, 침구 그리고 약품을 받는다. 이에 재가자는 선서(善逝)인 출가자를 의지하여 아라한의 반야지혜와 선정을 믿는다. 현생에서 닦아 좋은 세계에 이르는 길과 기쁨이 있는 욕락의 천상을 성취한다.40)

기본적으로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이처럼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로 설명된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믿고 물질적인 보시에 따라 욕락이 있는 천상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전의 여러 곳에서 항상 재보시와 법보시라는 두 가지 종류의 보시 가운데 법보시가 더 뛰어나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41) 이처럼 출가와 재가는 재보시와 법보시를 통한 불가분의 관계로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물질적인 공양을 그리고 출가자는 재가자에게 법을 베푸는 의존 관계이다.

 또한 재가와 출가가 궁극적인 지향점은 같다 하더라도 출가자는 바로 열반과 해탈 그리고 깨달음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강조된다면, 재가자는 먼저 선행과 공덕을 짓는 작복의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차이도 있다. 출가자가 필요한 음식물과 생필품 그리고 약품을 제공하는 것은 재가자의 주된 의무였고 출가자는 이러한 것에 의존하여 재가자를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출가자는 재가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청정하고 성스러운 삶을 살고 평화(적정)와 자유(해탈)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세속 재가인의 정신적인 고통을 감소시키고 끊을 수 있는 방편력을 갖추어 적극적으로 돕는 교화활동을 펼친다. 그렇기에 출가자는 복전(福田)일 수 있으며 재가자는 보시를 통해 더욱 많은 이들의 고통을 감소·제거시키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보시가 바로 복을 짓는 복업사(福業事)로 강조된 것이다.

3) 견제역할로서의 재가자

이처럼 출가승단은 재가자의 보시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이와 역할은 달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 긴밀하고 의존적이면서 또한 상보적인 관계로 강조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재가자는 출가승단이 일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승단 내에 화합하지 못하고 분규가 일어날 때는 평상시의 외호(外護)의 역할과 달리 일종의 압력 단체처럼 출가승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 또한 많이 나타난다.

이는 출가승단의 문제가 단지 출가 승단의 문제로만 독립되어 있거나 한정되어 있지 않고 붓다의 재세 시부터 항상 재가자의 건의 또는 요구에 따라 출가승단 내부가 조정되고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율장》을 보면 교단의 일이라든가 출가자들의 계율 가운데 많은 조항들이 재가자들의 제의와 비판에 의해서 붓다 당시 출가수행자는 재가자의 시여를 받을 수 있을 뿐이지 일체의 경제적 활동은 계율로써 제한되었다. 오직 삼의일발(三衣一鉢)과 함께 여러 두타행(頭陀行)을 통해 종교 도덕적 권위가 발휘되었다.

하지만 불교 교단이 성립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출가자의 수는 늘어나고 일정한 장소에 승원이 세워지면서 여러 가지 물품이 필요하게 되었다. 때문에 계율을 어기지 않고 또한 재가자의 비난을 사지 않고서 승원을 유지·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 출가자와 세속의 중간에서 승원의 유지와 관리의 일을 맡았던 재가자를 바로 정인(淨人: kappiya칔araka)이라 불렀다. 이러한 정인에 대해 초기불교 부파 소속의 《율장》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몇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가 밭·집·가게 등을 가지게 되자 속인들이 비난하게 되었다. 어떤 속인이 밭·집·가게 등을 대중스님에게 보시하였는데 대중이 받아서 정인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45)

그때에 비구들이 과일밭을 받았는데 붓다는 말씀하시되 ‘받아도 좋다’하시고, 누가 관리할 것인가를 물으니 붓다는 말씀하시되 ‘절을 지키는 사람이나 사미나 우바새를 시키라’하셨다.46)

붓다는 정인을 다스리고 감독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먼저 탑을 만드는 일을 시키고 , 다음에 나그네 비구를 접대하는 일을 시키고, 다음에는 음식을 만드는 일을 시키고, 다음에는 물건을 분배하는 일을 시키고, 그 다음에는 순서대로 상좌·중좌·하좌 스님들께 시중드는 일을 시켜 이같이 모든 스님들이 하는 일을 두루 돌보도록 한다. 정인을 감독하는 사람은 속인 가운데서 근면하고 능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를 뽑는 것을 청허한다.47)

출가자가 재물과 가까이 하는 세속적 활동을 금하는 이유는 출가자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세속과 관련하는 일에 정인을 내세움으로써 출가자의 위의(威儀)가 지켜져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종교적인 지도자로써 존경과 권위가 실추될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던 것이 정인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종단분규로 교단의 권위와 도덕성을 추락시켜온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초기불교 《율장》에 나오는 정인 제도가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8.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초기경전을 통해 출가의 기원과 출가와 재가의 이분의 근거, 궁극적 목표와 경지, 사회적 역할, 그리고 재가와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출가·재가의 성립과 사상에 대한 검토는 출가는 재가를 바탕으로 있고, 재가는 출가에 의해 그 의미가 새롭게 부각됨을 알 수 있다.

 즉 출가가 있게 된 배경과 이유에 대한 이해는 재가의 의미와 함께 진정한 출가정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동시에 불교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앞으로 양자 간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도 기대할 수 있다. 한 가지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불교사는 전반적으로 재가에서 출가로 지향하는 방향에 있다는 점이다. 불교 흥기는 물론 대승에 이르러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잠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는 하나 다만 그것은 초기현상에 불과하다. 교리의 내용을 비롯한 모든 대승의 상황이 곧바로 출세간의 출가지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출가와 재가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하는 데 있어 출가는 가정적 세속적인 집착과 속박을 여의고 바로 열반 해탈을 목표로 하는 반면에 재가는 가정적 세속적인 속박 때문에 장애가 많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전의 다음 구절은 출가와 재가의 관계에 있어 매우 시사적이다. “어떤 출가비구가 나(붓다)의 가사를 붙잡고 뒤를 따르고 나의 발자국을 밟는다 해도 그가 만약 욕심과 애욕에 들끓고 삿된 생각과 산만하고 고요하지 못하면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반대로 100 요자나48)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어도 애욕에 들끓지 않고 삿된 생각이 없고 고요하면 내게 가까이 있다”라는 말이다.49)

이유는 법을 보는 자는 붓다를 보고, 붓다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는 가르침 때문이다. 이같은 붓다의 가르침에 이어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또한 상기된다. 즉 “몸은 비록 산중에 있어도 마음이 번뇌와 집착에 매어 있으면 진정한 출가라 할 수 없고, 반면에 몸은 비록 세속생활에 놓여 있지만 마음에 번뇌와 집착이 없으면 출가한 사람과 다름이 없다”50)라는 말이 그것이다. 따라서 재가는 비록 출가할 수 없는 세속 생활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출가정신을 계승하는 수행과 방안을 더욱 강구하면서 살아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시대의 백봉 김기추 거사(1907~1985)의 경우 탄허 스님은 그를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까지 했는데, 그러한 수승한 재가자 또한 출가와 재가 간의 실천수행에 관한 다음과 같은 지적을 소개하는 것으로 본고를 맺고자 한다.

사람 중에서도 슬기로운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이 슬기로운 사람은 누리의 삶을 어떻게 엮는가. 오로지 수단·방편을 다하여 생사업(生死業)을 걷어내고, 적멸락(寂滅樂)을 바탕으로 세기의 삶을 엮는다. 석가세존을 비롯한 역대 조사와 선사가 승가풍을 선양함도 이 때문이요, 유마 거사를 비롯한 선지식이 거사풍을 천명함도 이 때문이니, 중국의 이통현·배휴·방온 거사와 우리나라의 윤필·진부슬 거사 등이 있음은 도(道)에 승속(僧俗)이 따로 없음을 드러냄이라. (중략)

거사풍은 가정을 가꾸는 시간과 공간에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시간과 공간을 짜내야 한다. (중략) 어지러운 세정(世情) 속에서 내일을 위하여 수단과 방편의 비상한 각오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승가풍 이상의 각오와 노력이 없이는 벽에 그려진 떡이나 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51) ■

조준호 / 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저서(공동)로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 주요 논문으로는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사띠(sati/smr.ti, 念)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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