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종교와 정치권력

1. 서론

이슬람은 정치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이슬람은 현실정치에 어떻게 그리고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나? 이슬람이 정치행위의 주체라면 구체적으로 그를 이끄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불교나 기독교라면 행위주체가 어느 정도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종단, 스님, 교회, 교황, 목사, 신부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슬람에는 출가사문도 성직자도 없다. 무슬림들의 종교적, 정치적 구심점이었던 칼리프 제도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를 대신해 오랫동안 이슬람 세계를 이끈 사람들은 이슬람법, 샤리아의 전문가인 울라마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는 전통적인 이슬람법 전문가들 외에도 이슬람을 기치로 내세운 정당정치인들, 이슬람 전성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운동가들, 일상생활에서부터 이슬람적 가치를 관철시키려 노력하는 활동가들, 기존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려는 혁명가들 등이 있어 각각 자신들의 방식대로 이슬람의 대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슬람과 정치권력을 주제로 하는 이 글은 결국 이들이 정치 혹은 정치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슬람 정치라고 하면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는 개념이 하나 있다. 정교일치 혹은 신정정치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아랍어로도 ‘딘와 다울라’, 즉 ‘종교는 곧 정치’라는 개념이 있어 이슬람 정치철학의 본질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이는 한때 역사적 실재였기는 하지만 그 이후론 줄곧 정치적 이상향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슬람 정치철학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역사적 현실과의 괴리는 어떠한가?

2. 하느님의 사자, 무함마드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사한 형태의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유럽의 한 이슬람 학자가 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적 가정에 대한 호기심보다 종교의 역사성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면 이 말은 나름대로 유익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함마드가 석가모니처럼 그 어떤 박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가르침을 펼칠 수 있었다면 이슬람은 어떤 형태의 종교로 발전했을까? 상당부분 불교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무함마드는 석가모니와는 달리 자유롭게 주유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펼칠 수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했던 순교의 길을 가지도 않았다. 이슬람이 기독교나 불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 데에는 분명 이러한 창시자의 삶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석가모니보다는 약 천 년, 예수보다는 약 오백 년이나 뒤늦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가 처했던 상황은 모든 면에서 다른 두 세계종교의 창시자들보다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예수에게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법규범을 지닌 로마제국이 있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누가복음 20, 25) 맡길 수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는 씨·부족 중심의 혈연공동체에 기초한 원시적인 질서밖에 없었다. 불교나 기독교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종교로서 이슬람은 이 껍질을 깨지 않으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또한 석가모니에게는 비옥한 자연환경과 종교적, 영적 지도자를 존중하는 문화적 토양, 그리고 그로부터 조성된 사회적 관용과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지리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도 황량하기 그지없었던 아라비아 사막의 거친 풍토, 그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복음의 전파는커녕 우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결행한 것이 헤지라! 젊잖게 표현해서 ‘이주(移住)’, 실질적으로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헤지라가 거행된 것은 서력으로 622년, 무슬림들은 이 해를 기려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고, 이슬람은 이를 기점으로 종교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메디나로 피신한 이후에도 무함마드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우선 자신과 함께 고향인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한 무슬림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또 메디나 원로들이 자신에게 맡긴 소임, 즉 메디나 여러 부족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분쟁을 원만하게 조정,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슬림들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는 메카의 적들을 상대로 싸워 이겨야 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목숨은 물론 이슬람의 명운이 걸린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몸소 교우들과 함께 참호를 파는가 하면, 패색이 짙었던 한 전투에서는 심한 부상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무함마드는 자신을 하느님의 사자로 믿는 무슬림들의 종교지도자로서뿐만 아니라, 메디나 도시국가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632년, 마침내 적대세력을 제압하고 메카로 무혈입성(無血入城)할 즈음 무함마드의 권위는 종교와 정치를 함께 아우르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 무함마드 생애 후기, 특히 메디나에서 활동할 당시 계시된 꾸란 속에는 일상적인 삶에 필요한 규범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어 이슬람 율법, 샤리아의 초석을 이루게 되었다.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내용은 주변의 교우들에 의해 그때그때 암송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아랍어로 계시된 그 말이 하느님의 말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을 아는 사람은 가축의 뼈나 나무 조각에 그 내용을 적어서 보관하기도 했다. 계시된 내용을 모두 암송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무함마드 사후, 계시된 내용은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다. 꾸란이 바로 그것이다. 꾸란 속에는 하느님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귀감으로 삼으라는 가르침도 실려 있다.

매사 하느님께 의지하고, 항상 최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자나 깨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예언자는 실로 훌륭한 사표(師表)이니라.(33;21)

무슬림들이 꾸란에 이어 무함마드의 언행록, 하디스를 중히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정치와 관련된 하디스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슬람 초창기 무함마드는 젊은 장수 무아즈를 예멘지역 총독으로 파견한 적이 있다. 무아즈를 임지로 보내기 전 무함마드는 그에게 물었다.

“주요 사안에 대해 어떻게 결정하겠느냐?”
“하느님의 성서에 있는 대로 결정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물었다.
“하느님의 성서에 없으면 어떻게 결정하겠느냐?”
“하오면, 하느님의 사자께서 보여주신 길, 순나에 따라 결정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자가 보여준 길에도 답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오면 소인이 개인적으로 판단(이즈티하드),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만족해하며 주님을 찬양했다.
“하느님의 사자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찬미 있을진저!”

이는 이슬람 국가의 위정자가 따라야 할 국정운영 원칙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하디스이다.
무함마드 생존시 무슬림들은, 유교적 용어를 빌리면, 요순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도, 예배, 순례, 단식 등의 종교의례는 물론 인사, 식사, 의복, 성생활, 육아, 교육, 장례, 상거래 등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에서부터 조세, 사법, 군사, 외교 등의 국정운영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필요한 규범을 하느님의 사자(使者)가 직접 제공했던 것이다.

3. 정통칼리프 시대

그러나 무함마드의 서거와 더불어 이슬람의 요순시대도 그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무슬림들에게 더욱 애석했던 것은 무함마드가 자신의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거나 그와 관련된 확실한 규범을 세워두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무함마드 사후 초기에는 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는 듯 했다. 무함마드의 정치적 후계자, 칼리프 문제가 나름대로 협의를 통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중대 사안을 결정할 때는 슈라, 즉 협의를 하라는 것은 꾸란의 가르침이기도 했고, 무함마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는 항상 원로들과 협의를 했다. 그래서 무함마드 사후 4대까지는 칼리프가 원로들의 협의나 추인을 받아 추대되었다. 이른바 정통칼리프 시대가 그것이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정치 앞에서 이슬람의 정치적 이상주의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협의의 원칙은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고, 그나마 어렵게 얻은 협의 결과도 존중되지 않았다. 결국 661년,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죽음과 함께 정통칼리프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함마드가 유명을 달리한 지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비록 짧은 기간에 그쳤지만 아무튼 이 시점까지 이슬람 국가는 명실 공히 정교일치체제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지도자가 직접 국정까지 수행했던 것이다.

4. 이슬람법 샤리아의 전문가들, 울라마

알리가 자객의 손에 암살을 당한 후 칼리프위(位)는 오히려 알리에게 반기를 들었던 무아위야와 그가 속한 우마이야가(家)에 귀속이 되었다. 우마이야가는 무함마드의 박해에 앞장섰던 메카의 유력 호족으로서 대부분 메카가 정복당한 후 개종한 가문이었다. 그러므로 칼리프위가 우마이야가에 귀속된다는 것은 독실한 무슬림들, 특히 알리가(家)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고 가혹했다. 칼리프의 보위가 우마이야가에 세습되는 과정에서 결국 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이 그들의 손에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680년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카르발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로 인해 알리와 그의 후손들의 정치적 정통성만을 인정하는 시아파와, 비록 유감스럽고 비통한 일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순니파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마이야 칼리프조(朝)는 결국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이란, 이라크 지방에서 일어난 혁명세력이었다. 이들은 원래 ‘(무함마드의) 가문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궐기했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것은 무함마드의 후손들이 아니라 그의 삼촌이었던 압바스의 후손들이었다. 압바시야 칼리프조(朝)는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기고 한때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제9대 칼리프 와틱(842~847)을 끝으로 압바시야 칼리프조의 영광은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화근은 칼리프의 신변안전과 권력유지를 위해 양성한 터키계 노예 출신 근위대에 있었다. 칼리프의 최측근에서 권력을 키운 이들은 오히려 칼리프들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보위까지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이후 뿔뿔이 나누어진 이슬람 세계의 통치권은 현지에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가문에 의해 계승, 세습되었다. 결과적으로 음모, 야합, 반란 혹은 혁명을 통한 보위찬탈과 왕조 교체라는 정치과정은 비이슬람 세계의 그것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무슬림들에게 주어진 과업은 ‘이렇게 냉혹한 정치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슬람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꾸란, 그를 전한 무함마드가 남김 규범, 무함마드가 직접 통치했던 이상적인 시대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있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통치했던 시기와 칼리프가 통치했던 시대를 정치적 이상향으로 삼고 그를 기준으로 이슬람 고유의 정치관을 정립했다. 이슬람 정치관은 이슬람 정치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 칼리프제도에 기초한 정교일치의 국가체제, 이슬람 국가체제를 운영, 감독하는데 필요한 이슬람법, 지하드를 포함한 국가의 대외정책에 관한 원칙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슬람 학자들이 이슬람 정치가 관철시켜야 할 근본적인 가치로 제시한 것은 협의(수라), 정의(아들), 자유(홀리야), 평등(무싸와)이었다. 이러한 정치원리가 현실정치에서 완전히 구현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협의의 원리는 칼리프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습군주제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러나 정의를 비롯한 다른 원리는 이슬람 국가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서 계속 강조되어 이슬람 사회의 이념적 건전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정치적,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가 이슬람적으로 운영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무함마드 사후 2세기경에 완성된 이슬람법, 샤리아였다. 샤리아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의 국가적 사안에서부터 무슬림들의 개인적인 의례와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이슬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확립한 총체적 규범이다.

 이슬람 법학자들은 꾸란, 무함마드가 남긴 사례(순나), 유추(키야스), 그리고 공동체의 합의(이즈마)를 법원(法源)으로 삼아 이 이슬람 특유의 법률체계를 완성시켰다. 여기에서 이즈마, 즉 ‘공동체의 합의’는 실질적으로는 이슬람법 전문가, 울라마들의 합의를 의미했다. 울라마들은 한편으론 샤리아에 대한 전문지식, 다른 한편으론 종교적 이상주의와 도덕적 청렴성을 통해 일반 대중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떠한 정치권력도 백성의 지지가 없이는 나라를 통치할 수 없는 법이다. 위정자들은 자연히 대중적 신뢰를 얻고 있는 울라마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울라마들 역시 통치자들의 정치적 정통성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았다. 그럴 경우 정통칼리프 시대 이후의 통치자들을 거의 대부분 부정해야 하는데, 그로 인한 일신상의 위험이나 사회적 혼란보다는 안정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울라마들은 위정자들이 이슬람의 근본정신과 샤리아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들을 도와 이슬람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비록 권력을 둘러싼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이슬람 세계가 다른 세계와 별반 다름없는 양상을 보였지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훨씬 더 안정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이슬람 법학자들이 ‘빛과 소금’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전성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이슬람 세계의 정치권력은 칼리프를 최고 정점으로 하여, 비록 형식적으로라도, 그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술탄, 혹은 각 지역의 왕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삼권분립제도에서 말하는 행정권에 국한된 것이었고, 입법권과 사법권은 샤리아의 전문가인 이슬람 법학자들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간에서 전개된 권력투쟁과 현실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은 대신, 울라마들은 전통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분야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나는 통치자로 하여금 샤리아를 존중할 것,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다 정의로울 것을 권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 혹은 지역공동체가 샤리아에 준해 질서를 유지하도록 지도, 감독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울라마들이 활용한 것은 파트와, 즉 법률적 소견서로서, 울라마들은 그를 통해 위정자들의 정치행위가 ‘올바른 길’, 샤리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했다.

위정자의 정치적 정통성과 관계없이 거의 독자적으로 돌아가는 이슬람 국가 체제의 우수성은 몽골 지배하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죽지세로 몰려온 몽골 침략군이 이슬람 세계의 핵심부인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압바시야 칼리프조를 멸망시킨 것은 1258년. 그러나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이슬람 사회를 지배하는 데는 샤리아가 얼마나 유용하고, 또 그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울라마들의 협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즉시 파악했으며, 스스로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는 데도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몽골에 이어 중앙아시아 지역을 통일하고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것은 터키계 오스만제국이었다. 오스만제국은 1453년 동로마제국을, 다시 1516년에는 이집트 맘룩왕국을 무너뜨리고 지중해 제해권은 물론 대서양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당대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 인도의 무굴 왕조와 함께 샤리아를 기초로 하는 이슬람 정치 시스템의 우월성을 전 세계에 과시할 수 있었다.

5. 쇠퇴기, 식민지배 시대

이슬람 문명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울라마들은 차츰 자만에 빠져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형적인 예는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혔다’는 교리 아닌 교리일 것이다. 이슬람 고유의 율법체계인 샤리아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이즈마(합의)는 다른 전통이나 다른 지역의 법률적 관례를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등 창조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이즈마의 기능은 차츰 경직되기 시작하여 변화하는 시대적 환경에 적응하도록 무슬림들을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체의 변화와 쇄신을 억제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울라마들은 이제 새로 제기된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결하기 위해 꾸란이나 하디스를 독자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법원에 대한 개인적인 탐구, 즉 이즈티하드의 문이 닫혔다는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이즈마를 통해 한번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영원히 유효한 것으로 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혁신(비드아)은 무엇이든 부정적인 현상으로 터부시되고, 타끌리드, 즉 맹목적인 모방이 최선의 선택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중세적 관행과 케케묵은 사상이 이슬람의 신성한 유산인 양 보존,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시대적 변화에 대한 이슬람 사회 전반의 적응력을 차츰 마비시켰다.

울라마들은 이슬람법의 전문가이자 수호자로서 그 동안 자신들이 구축한 특권을 지키기 위해 이슬람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인쇄술의 도입문제를 놓고 울라마들이 보인 태도가 그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슬람 초기 무슬림 학자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무엇이든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또 발전시켰다.

그러나 침체기에 접어든 이슬람 사회는 인접한 서양의 인쇄술을 도입하는 데 거의 300년이 걸렸다. 울라마들이 인쇄술을 비이슬람적인 것으로 규정, 도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울라마들은 꾸란이나 하디스를 비롯한 각종 종교서적이 대량 생산될 경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오용될 위험이 있으므로 인쇄술을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쇄술 이외에 서양에서 발명된 각종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도 울라마들은 오랫동안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결국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던 이슬람 사회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로 변했고, 이렇게 서서히 활력을 잃게 된 이슬람 세계는 차츰 서구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 눈을 뜬 무슬림 지식인들의 심정은 같은 시기 우리나라나 중국 지식인들의 심정만큼이나 참담한 것이었다. 이슬람 세계가 이토록 굴욕적인 상태에 이르도록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유럽 열강의 침략과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식인들이 매달려 씨름한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질문이었다.

이슬람 사회를 병들게 한 원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무능하고 무력한 위정자들, 시대착오적이거나 부패한 울라마들, 부적이나 기적에 대한 믿음 등 각종 미신에 젖어 있는 일반대중, 그들을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격리시키는 이슬람 신비주의자들, 이슬람 사회의 내부에 누적된 인종적, 종파적, 지역적 알력, 그리고 그를 이용하여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획책하는 유럽 열강의 정치적 농간 등이 그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몇몇 진보적인 군주가 추진했듯이 단순히 군대를 유럽식으로 개편한다거나 유럽의 기술만 도입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즉 이념적인 차원에서의 개혁이 있어야만 극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식자들 사이에는 별 이론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 과연 어떠한 이념을 통해서 이슬람 세계가 외세를 물리치고 재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그들이 선택하고 추구한 이념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서구지향적, 세속적인 이념과 전통지향적, 이슬람적인 이념이 그것이다.

서구지향적인 지식인들은 이슬람 세계가 유럽 열강의 지배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술적, 제도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념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유럽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비록 유럽에서 발생하긴 했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유산의 근대적인 열매라고 할 수 있는-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헬레니즘, 히브리즘, 기독교 등과 더불어 바로 이슬람도 그 탄생에 한 몫을 한 근대적인 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식민지 종주국인 유럽 현지에 유학생으로, 망명 정치인으로 혹은 용병으로 거주하던 많은 무슬림 엘리트들은 유럽의 근대 사회 출현에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사상이나 사건들, 즉 계몽주의, 자연 과학의 발달, 산업혁명,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1776), 프랑스 대혁명(1789), 러시아 10월 혁명(1917) 등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현지의 신문보도 등을 통하여-이슬람 세계와 더불어 한때 세계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국이 패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인류의 역사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사실과 당시 국제 사회를 지배하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질서를 싫든 좋든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자주와 독립을 추구하던 세속적 무슬림들은 당시 유럽사회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는 공산주의자들만큼이나 혁명적인 소명의식으로 차 있었고,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적인 장치와 이념적인 구심점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선진 유럽 사회에서처럼-종교나 종파, 인종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시민사회, 주권재민 사상에 입각한 민주주의, 의회 민주주의의 기초인 삼권분리의 원칙, 이념적 차원에서 헌신과 충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민족 내지는 민족국가, 이슬람과 그 근본 목표가 같다고 여겨진 사회주의적 이상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속적인 정치운동은 이렇듯 주로 근대적인 문물과 제도를 접하고 그 우월성에 압도당한 젊은 엘리트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당시 그들의 신념을 굳혔을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 즉 서양 문물과 제도 그리고 서구적인 이념인 민족주의를 그대로 모방한 극동의 한 작은 나라가 그 짧은 기간에 국력을 키워 유럽 열강 중의 하나인 러시아 제국을 이겼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당시 대부분의 유럽 지식인들이나 우리나라의 신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종교전통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극단적인 경우엔 오히려 그를 멀리하고 배척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이 또한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태도와 동일했던 것으로서-그 종파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오히려 국민의 단결과 융합을 저해하고, 또 그 보수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해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 즉 유럽에서처럼 정치가 종교로부터 일체의 간섭을 받지 않고 종교적인 원리원칙에 구애됨이 없이 과감하고 현실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세속주의 원칙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했다. 더 나아가 이들 중에는 유물론에 입각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심취한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다.

한편 전통지향적인 무슬림들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슬람 사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목표에 있어서는 세속적 무슬림들과 뜻을 함께 했지만, 그를 위한 이념과 목표의 선택에 있어서는 그들과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자 혹은 이슬람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이 추구한 것은 모든 개혁의 근본을 이슬람에 두고, 그 바탕 위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개혁하여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무슬림 공동체, 움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즉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하면, 이슬람 사회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이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슬림들이 진정한 이슬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이슬람 사회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이슬람 본연의 정신과 원래의 제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인 세속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슬림 일반 대중 속에 만연한 미신적 경향, 현실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체념적인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구태의연하게 이슬람 전통에만 매달려 있던 울라마들을 비판하며, 이슬람 본연의 정신과 기풍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가 물러나는 과정에서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은-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몇몇 토후국을 제외하곤-모두 세속적인 엘리트들, 구체적으로는 터키, 아랍, 그리고 이란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미 1923년 터키에서는 외세의 침략과 내분으로 멸망해 가던 오스만 제국을 식민지배의 위험으로부터 구출한 무스타파 케말이 터키인의 민족국가로서 터키 공화국을 수립, 사실상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었다.

이어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의 아랍 세계에서도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노선을 주창하는 세력이 집권을 했다. 또한 당시 이란을 지배한 팔레비 왕조가 내세운 기치도 옛 이란의 영광, 이슬람 이전에 페르시아가 누렸던 영광을 중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세속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을 선양하는 목소리는 한동안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설사 그런 소리가 있어도, 이미 이슬람 전통에 식상한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슬람은 이제 극히 보수적이거나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종교적 유물처럼 보였다.

6. 새로운 조짐, 이슬람 부흥운동

60년대 말 70년대 초, 해방과 독립, 그리고 건국에 따른 사회적 흥분이 차츰 식으면서 수십 개 국민국가로 분리된 무슬림들은 차츰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집트, 시리아 등 주요 이슬람 국가가 처한 시대적 정황은 경제적 침체, 정치적 억압, 그리고 대(對) 이스라엘 전쟁에서의 패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3년의 오일쇼크, 즉 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과 서방세계를 견제하기 위해 아랍 산유국들이 취한 석유자원 무기화 정책은 이슬람권 비산유국의 경제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체제 운동을 촉진시켰다. 경제적으로는 무능하고 정치적으로는 억압적인 정부에 대한 비판과 이상적인 사회적 대안을 제시함에 있어서 이들보다 더 정교한 이론과 이념을 지닌 그룹은 달리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70년대 중반 8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이슬람을 기치로 내세운 운동조직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이슬람 대안그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견제하고자 했던 각국 정부의 전략, 해외 이슬람 조직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정지원,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보여준 이중성, 이란 이슬람혁명의 성공, 전 세계 무슬림들의 정서를 크게 자극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그에 이은 공산권의 몰락,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보여준 쾌락주의적, 물질주의적 경향에 대한 거부감 등이 큰 역할을 했다.

가까이는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부터 멀리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이슬람은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금요집단예배는 물론, 자카트, 즉 종교세와 성지순례에 참여하는 무슬림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수염을 기른 남성, 베일을 쓴 여성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띠고, 신문, 방송 등 대중언론 매체에서는 이슬람 관련 기사와 기획 프로그램을 대폭 늘려 편성하고 있다.

이슬람과 현대사회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더욱 빈번해지고, 또 그를 주제로 한 논문이나 교양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술, 도박, 매춘 등을 추방하고, 샤리아를 보다 폭넓게 적용하라는 요구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도 모스크 건립, 이슬람 교육기관 지원금 증액 등을 통해 무슬림 대중의 호감을 얻으려 노력하고 있다.

자선사업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구호단체로부터 국가와의 전면전까지 불사하는 지하 혁명조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조직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이슬람주의로 분류되는 몇몇 주요 조직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레바논의 신의 당(히즈볼라), 이슬람 희망(이슬람 아말), 하마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알제리의 이슬람 구국전선,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이슬람해방기구, 지하드 사회, 불신과 이주(타크피르 와 알 히즈라), 신의 군대(준드 알라), 인도의 경건주의자 협회(타블리그), 튀니지의 이슬람 경향운동, 부흥당(엔나흐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사회(자마아티 이슬라미), 그리고 9.11테러로 이슬람을 세계적인 이슈로 부각시킨 알 카에다. 이들 조직은 범국가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이슬람 세계는 물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무슬림 공동체에도 크고 작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순니파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 부흥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의 인물은 전통적인 울라마들이 아니라 교사, 전기기사, 의사, 엔지니어, 학자 등 일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꾸란이나 하디스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그를 인용, 자신들의 이념적, 정치적 담론에 이용한다. 사다트 대통령 암살 그룹이 ‘가리워진 명령’이란 제목으로 공포한 성명서가 이러한 경향을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반이슬람적인 권력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기 위해서 이슬람 운동 투사들이 울라마들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 구체적으로 이란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 울라마들 스스로 정권의 주인이 되었다. 이란은 1970년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구화에 박차를 가했던 나라였다. 그러나 그에 앞장섰던 국왕 레자 팔레비는 급격한 근대화,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야기된 민중봉기를 수습하는 데 실패하고 1979년 1월 프랑스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를 대신해 정권을 잡은 인물은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로서 ‘벨러야테 파키’, 즉 이슬람법학자, 파키에 의한 통치를 원칙으로 하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시아파 이슬람은 물론 이슬람사(史)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정치체제로서 여기에서는 최고위 울라마가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나 국회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고무되어 순니파 이슬람 세계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1979년 11월 메카 대사원 점령, 1981년 10월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암살, 1989년 수단의 군사 쿠데타, 1995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이슬람공화국 수립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탈레반은 9.11테러의 주역인 오사마 빈 라덴과 연루되어 미국 및 동맹국과의 전쟁을 자초한 결과 다 잡은 승리를 놓쳤고, 수단의 군사 쿠데타만 성공,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인 하산 알 투라비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국가를 탄생시켰다.

오늘날 이슬람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다양한 조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이슬람을 절대적인 가치로 지향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한 이념의 공존을 인정하는 그룹이다. 전자는 공산주의마저 몰락한 오늘날 물질주의적인 자본주의의 병폐로부터 이슬람 세계, 더 나아가 인류사회를 구할 수 있는 이념은 이슬람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룹이고, 후자는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원주의적, 세속주의적인 정치제도의 틀 안에서 이슬람의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그룹이다. 다양한 이념의 공존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놓고 볼 때, 전자는 냉전시대 동유럽 여러 나라의 공산당과, 후자는 서유럽 여러 나라의 기독교 계통 정당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그의 추종자들, 즉 현재 이슬람 공화국을 이끌고 있는 세력은 전자에 속한다. 호메이니는 혁명에 동참했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일체의 권력에서 배제시켰으며, 고등교육기관의 이슬람화를 명령했다. 혁명정부는 비이슬람적인 학과와 강좌를 없애고 교수들을 숙청하느라 대학을 몇 년씩 폐쇄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좌익성향의 대학생들과 교수들은 모두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탈레반 정권하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유사한 인권유린이 자행되어 연일 국제뉴스를 장식한 바 있다. 그들은 심지어 1500여 년 전에 제작된 바미안 석불을 비롯해 수많은 불교문화재를 종교적 이유로 파괴하기까지 했다. 비록 정도는 다르나 수단의 이슬람 정권도 인권문제나 종교적 박해로 인해 국제 인권단체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인도의 경건주의자 협회(타블리그), 터키의 정의개발당, 파키스탄의 이슬람 사회(자마아 이슬라미야) 등은 후자에 속한다. 이들은 기독교 계통의 정당이나 종교운동처럼 민주주의적인 기존의 정치 질서를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경건주의자 협회(타블리그)는 1927년 모하메드 일리아스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는 인도 아대륙에서 소수그룹으로 살아야 하는 무슬림들이 힌두 사회로부터 ‘오염되는’ 상황을 우려하여 같은 무슬림일지라도 진정한 무슬림과 ‘길 잃은 자’들을 엄격히 구분하는 행동기준을 정해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경건주의 운동은 이슬람 세계의 정치사회적 격변기,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무슬림들, 특히 식민모국인 영국을 비롯하여 디아스포라 지역에 흩어져 살던 무슬림들 사이에 전파되어 호응을 얻었다. 타블리그는 현재 이슬람 세계 최대의 초국가적인 운동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타블리그나 그와 유사한 이슬람 운동의 지도자들은 무슬림들을 한편으론 세속적인 사회 환경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론 급진적, 폭력적인 이슬람 운동조직으로부터 격리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를 위해 그들은 일반 시민단체나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실업, 탈선, 약물중독, 폭력 등의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기도 하고, 정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사회(자마아티 이슬라미)나 터키의 정의개발당과 같은 이슬람 정당은 유럽 각국의 기독교 계통 정당들처럼 의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이슬람의 가치를 구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기독교인이라고 모두 기독교계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듯이 무슬림이라고 모두 이슬람계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정치적 여건이 유리해지면 이들은 집권을 할 수도 있다. 실례로 터키의 이슬람주의적인 정당, 정의개발당은 2002년 총선에서 34%를 득표, 전체의석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하는 집권 여당이 되었다.

현대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원주의, 세속주의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슬람 국가의 이슬람계 정당과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계 정당은 같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에서 이슬람계 정당이 집권하는 것과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계 정당이 집권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정치신학과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이슬람 국가에서 이슬람계 정당, 특히 알제리의 이슬람 구국전선과 같은 이슬람주의적인 정당이 집권할 경우, 이란이나 수단에서처럼 세속주의적인 민주주의 원칙 자체가 폐기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터키공화국의 건국이념 가운데 하나인 세속주의 원칙이 이슬람주의적인 집권 정당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이 될 때마다 터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에도 터키 군부는 이슬람주의자가 대통령직을 맡을 경우 쿠데타가 있을 수 있다는 노골적인 경고를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에 한 바가 있다. 언뜻 보기에 터키 군부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수호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동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7. 전망

현대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종교적, 사상적 자유와 그에 따른 다원화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세속주의 원칙은 다원화된 현대사회에 가장 적합한 정치적 틀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서 세속주의(Secularism)라 함은 세속적인 가치를 최고선으로 추구한다거나 ‘세속적으로 살자’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의미한다.

즉 정치는 다양한 종교집단의 종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특정 종교인이 아니면 국가원수나 공무원이 될 수 없고, 종교적 소수집단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등 종교에 의한 신분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렇다고 종교인들의 정치참여가 배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 속에서 보장된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통해 종교인들도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또 원하면 언제든지 종교의 이름을 내세운 정당을 만들 수 있고, 터키의 정의개발당이나 독일의 기독교민주당처럼 집권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유권자들이 선택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민심이 곧 천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꾸란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2, 256), 종교인들은 각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42,15), 종교공동체들은 누가 선행을 더 많이, 더 열심히 하는지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를 단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지 않은 하느님의 섭리라는 가르침이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 상이한 믿음을 지닌) 너희들에게 (각자의) 계율과 길을 정해 주었느니라. 만약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그분은 너희들을 단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셨을 것이나, 그분은 너희들에게 (각각 상이하게) 주신 것을 통해 너희를 시험하고자 하시니, 선행을 놓고 서로 경쟁하라.(5,48)

여기에서 ‘너희들’이란 유대교, 기독교 등 이슬람 이전에 태어난 유일신교 공동체를 말한다. 이 신성한 가르침에 이슬람 이후에 태어나 나름대로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집단들, 즉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과 신종교 공동체들까지 모두 포함을 시킨다면, 이는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화합과 안정을 위한 규범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을 것이다.

실제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민주화와 자유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 수많은 이상주의자들 덕분에 이제 몇몇 독재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는 ‘선의의 경쟁’을 위한 장이 펼쳐져 있다.

그래도 이슬람은 꼭 정권을 잡아야만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고, 무슬림들은 진정한 이슬람 국가에서만 진정한 무슬림으로 살 수 있는 것일까? 신앙의 자유, 정치적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어 무슬림들이 제대로 이슬람의 가치를 추구할 수 없다면, 무슬림들은 먼저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슬람만이 최고선이고,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관철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과연 이슬람의 정치적 이상인 정의, 자유, 평등인지, 아니면 찬란했던 지난날의 전통, 혁명적인 지도자들의 카리스마,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형제애에 기대어 자신의 심리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보상받으려는 것인지 한번 냉정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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