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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 현상의 문제점 / 유승무
특집-종교와 정치권력 :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35호] 2008년 06월 10일 (화) 유승무 smlew691@hanmail.net

1. 왜 다시 종교권력인가?

우리 사회에서도 이따금씩 종교권력 현상이 세인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실재로 특정한 종교 내부의 교파 및 계파 간 갈등이나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갈등이 발생할 경우, 혹은 이른바 초대형 교회들의 엄청난 경제력이나 소수 권력을 가진 성직자의 경제적 부정부패가 노출될 경우,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종교권력이란 개념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지금까지의 종교권력 현상과는 다른 새로운 종교권력 현상(‘정치권력-매개-종교권력’)이 발생했고 또 발생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최초의 현상’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특정한 종교와 세속적인 정치권력 사이의 유착관계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과 불교의 유착관계는 물론 조선시대 유교와 사대부계층의 유착관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최소한 제정분리가 제도화된 근래에는 특정종교와 정치세력 사이의 독점적 유착관계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최근 기독교와 정치세력의 유착관계 혹은 기독교의 직접적인 정치참여 등은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최근의 종교권력 현상이 왜 문제인가? 물론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사회 환경 속에서 특정 종교가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꾀하려는 노력은 일견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정하지 않는 경쟁 수단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오늘날 한국사회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특정 종교가 배타적으로 지배적인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칫 종교간 갈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동양종교와는 달리 구원의 개념이 매우 발달한 기독교의 경우 성직자들만이 구원재를 독점하고 있는바, 여기에다 정치권력까지 가세한다면, 그러한 성직자의 종교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된다. 때문에 그러한 종교권력이 폭력적으로 행사될 때, 그것을 제재하거나 견제할 수단은 많지 않다. 따라서 정치권력을 매개로 한 종교권력 즉 최근 등장한 새로운 종교권력 현상은 정치의 공공성 및 공정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기에는 한국사회의 정치문화도 한 몫을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같은 인적 연결망이나 대인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국사회의 연고주의 문화 혹은 관행은 민주적인 제도의 발전을 가로막고 나아가 공공성과 공정성을 해침으로써 한국 정치발전 혹은 민주주의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부정부패나 패거리 문화를 재생산함으로써 사회문제의 근원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대 한국 정치현상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각인된 지연 혹은 지역주의는 한국정치의 고질병으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소위 ‘고소영’이란 신조어가 암시하듯이 최근 ‘특정한 종교적 연고’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조짐이 나타나 우리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고 있다. 실재로 이명박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종교적 연줄 특히 개신교 연줄은 정치권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소영’란 신조어에 등장하는 소망교회와 연줄을 가진 인사들이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원회에 다수 참여하였고, 심지어는 이명박 대통령과 소망교회를 통해 면식을 형성한 이경숙씨가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원장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항간에서는 소망교회의 권사 및 집사에 들어가기가 국회에 진출하기보다 어렵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우연의 산물쯤으로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발언 등 이명박 대통령의 과거 행적이나 최근 기독교계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종교적 연고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개연성은 결코 작지 않다. ‘정치권력-매개-종교권력’은 한국민주주의발전에 또 하나의 구조적 걸림돌로 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까마귀가 나니까 배가 떨어지듯이, 이러한 정치적 국면 즉 종교가 정치에 접근할 수 있는 호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자마자 이번 총선에서 통일교는 통일가정당을 결성하여 국회의 진출을 시도하였고, 이에 뒤질세라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개신교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대한민국 기독국가건설’이란 기치아래 기독사랑실천당을 결성하여 국회 진출을 꾀하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원로들과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각종 종교행사나 학술행사를 개최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한 정치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심지어 청교도영성훈련원장인 전광훈 목사는 “투표 자체가 정치이므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투표도 하지 말아야 한다”, “국회를 100% 점령해 예수 안 믿는 놈은 감방에 5년 보내면 예수님나라 만들기 간단하다” 등의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렇게 된다면, 미래 언젠가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특히 불자)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든가 혹은 감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 자신의 종교(불교)를 믿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이처럼, ‘정치권력-매개-종교권력’에게 공정한 게임의 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매개로 한 종교권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물론 최근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고 있으며, 교수불교연합회와 기독자교수연합회가 공동으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 두 번의 세미나를 통해 충분히 해명되기에는 고려해야할 사항이 너무 많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종교권력에 대한 개념, 이론적 논의에 대합 합의, 종교권력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평가, 종교권력과 관련된 다른 나라의 사례, 그리고 종교권력을 해체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노력 등에 대해서 정밀한 논의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것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본지(本紙)의 특집으로 기획한 의도이다. 그러나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이치야 본지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지 기획의 총론으로서 이 글 역시도 이와 동일한 맥락(context)과 한계 속에서 전개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글이, 종교권력 현상을 둘러싸고 있는 몇 가지 핵심적인 쟁점들을 제기함으로써, 최근 우리사회의 종교권력현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 약간의 개념적-이론적 논의

1) 종교권력의 정의와 유형

종교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매개로 한 종교권력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종교권력에 대한 풍부한 개념적 논의가 요구된다. 그러나 종교권력이란 개념이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오해와 혼란도 만만찮게 발생하고 있다.

해서 여기에서도 종교권력을 조작적 차원에서 정의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종교권력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권력에 대한 개념적 합의가 요구된다. 그러나 권력 개념 역시도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보편적으로 합의된 개념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을 논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학자가 바로 베버(M.Weber)다. 해서 여기에서는 베버의 권력개념에서 출발하여 종교권력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도달해 볼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권력은 개인 또는 집단이 사회적 행위 속에서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 또는 기회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즉 권력행위란 첫째, 분석단위가 개인인가 집단인가에 따라 권력이 다른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둘째, 권력에 대한 저항 및 갈등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셋째,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행위라는 점이다. 그러나 베버의 정의는 매우 높은 추상성을 지니고 있어서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때문에 이러한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상승시킴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종교권력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 및 시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권력의 유형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자. 물론 가장 기본적인 유형은 분석단위가 개인이냐 집단이냐에 따라 개인권력과 집단(혹은 계급)권력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개별 성직자의 종교권력과 특정 종교의 종교권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권력이 작용하는 삶의 영역에 따라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 등으로 유형화할 수도 있으며, 권력 행사의 제도화된 수단에 따라 국가권력, 시장권력, 종교권력, 교육권력, 언론권력, 법권력 등으로 유형화할 수도 있다. 물론 종교권력도 다시 종교에 따라 불교권력, 기독교권력, 이슬람권력 등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베버의 저항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하면 권력은 갈등론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 혹은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예컨대 대표적인 기능주의자인 파슨스(Parsons)에 따르면, “권력이란 사회전체가 집단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자원을 동원하는 일반화된 능력”이다. 반면에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인 플란챠스(Poulantzas)에 따르면, “권력이란 특정한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달성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이렇게 본다면, 성직자가 신도에게 행사하는 종교권력은 기능론적 관점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날 한국과 같은 다종교 상황 속에서 종교시장에서의 자신의 세력화를 위해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다른 종교에 대해 각종 기회를 배타적으로 선점하는 데 활용되는 종교권력은 갈등론적 관점에서 더 잘 해석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력 행사의 수단 및 그 정당성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권력이 존재한다. 예컨대, 권력의 행사 과정에서는 무력, 협박, 회유, 조작, 설득, 권위 등과 같은 다양한 권력수단들이 하나 이상 활용되며, 그 정당성의 기반 역시도 권력자의 카리스마, 전통, 혹은 합법성 등에 따라 또 다시 분류될 수 있다. 통상 성직자가 신도에게 행사하는 종교권력은 그 정당성이 성직자의 카리스마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지만, 종교와 정치의 유착관계 및 다른 종교와의 정치적 관계에서 작용하는 종교권력은 최소한 법치주의 사회에서는 합리적이거나 합법적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종교권력에 관한 모든 담론은 나름대로 모종의 정의에 기초하고 있는바, 그것을 공유할 때 비로소 학문적 논의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종교권력에 대한 논의의 가장 기초적인 작업은 종교권력에 대한 최소한의 고정성, 즉 조작적 정의를 분명하게 하고, 그러한 정의를 어떤 유형론에 따라 확장함으로써 종교권력의 구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지를 정밀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혹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최근 한국사회에서 종교권력 현상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서 발생한 권력현상이 아니라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발생한 권력 현상이다. 이 글에서 우리의 초점도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 현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때문에 이 글에서 우리는 종교권력을 다음과 같이 조작적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즉 특정한 종교가 세속적인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매개로 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질서나 지배관계를 형성, 유지하거나 또는 전복, 변형할 수 있는 합법적·비합법적 힘을 종교권력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2) 종교권력에 관한 이론적 논의: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상 종교권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는 최고의 통치자가 동시에 제사장인 제정일치 사회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시간의 흐름 따라 현실세계의 정치적 지배자와 이상세계의 정신적 지배자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분화했다. 전자가 물리적 폭력을 독점했고 후자는 구원재를 독점하면서 종교제도와 정치제도는 분명하게 분리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제도의 분리 정도는 사회분화의 정도에 비례한다. 그리고 한 사회 속에서 각각의 사회제도들은 단절적이기보다는 상호침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제도 자체의 특성 때문에 정치사회적 현실 속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 정립의 문제는 매우 민감한 정치사회적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종교권력 현상에 대한 이론적 관심도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문제 즉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로 수렴된다. 물론 이미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몇 가지 선행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신대 종교학과 교수인 강인철은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라는 저서를 통해 해방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종교와 국가의 관계 및 그것을 매개로 형성된 교회의 종교권력을 경험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또한 정치학자인 김영은 《한국정치와 교회-국가갈등》이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 천주교가 전래 이후 지금까지 국가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변화해 왔는지를 경험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또한 사회학자인 전성표도 《권력과 조직 : 교회 권력관계의 이론과 실제》라는 저서를 통해 교회 내의 권력 현상을 설문조사를 토대로 경험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모두 기독교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다. 비록 강인철이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전통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지만, 이는 기독교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교의 용도로서 활용되고 있는 정도다. 이렇게 볼 때, 대체로 기독교 이외의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의 종교권력 현상에 대한 총체적 논의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며, 그 결과 한국 사회의 종교권력 현상에 대한 일반화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론적 차원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레빈(Daniel H. Levine)의 주장을 가장 자주 언급한다. 종교와 정치 사이의 ‘역동적’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그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크게 3가지 유형, 즉 융합(fusion), 분리(separation), 그리고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균형(dynamic and dialectical balance) 등으로 구분한 바 있다. 또한 동아시아 종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는 로버트 벨라(Robert Bellha)도 그 관계를 융합(fusion), 분리(disjunction), 그리고 창조적 긴장(creative tension)으로 구분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론은 두 제도, 즉 종교제도와 정치제도 간의 힘의 균형 상태를 가정한 합의모델에 입각할 때 가능한 유형론이다. 만약 마치 나치즘(Nazism)의 국면과 같이 힘의 균형이 어느 일방, 특히 세속적 정치권력 쪽으로 쏠리는 경우 종교는 정치에 종속되거나 어용적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으며, 사회주의 체제의 경우처럼 소멸할 수도 있다. 또한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한국 사회의 민주화과정에서 나타난 한국 천주교회와 정치의 관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갈등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종교의 상대적 자율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네오-마르크스주자 오토 마두로(Otto Maduro)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

1. 종교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단순한 수동적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적 과정을 조건지우며 동시에 그것에 의해 조건지워지기도 하는 사회적 역동성의 능동적 요소이다.

2. 종교는 사회적 과정에서 항상 종속적 요소는 아니다. 즉 종교는 종종 특정한 사회구조의 탄생과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행사한다.

3. 종교란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기능적이며 재생산에 이바지하는 보수적인 요소만은 아니다. 종교는 종종 사회혁명을 낳는 주요한(때로는 유일한) 가용 수단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종교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논의함에 있어서 종교는 또 다시 두 차원 즉 당위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으로 나누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당위적 차원에서는 성과 속의 분리에 기초하여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세속적 권력에 대한 종교 우위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보면 권력은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의 산물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세속적 권력에 종속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종교 우위의 관계’조차도 정치적 상황이나 국면에 따라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일반이론은 언제나 역사적 실천이나 경험에 의해 수정될 운명임을 암시한다.

3. 종교권력의 역사성과 역사상의 종교권력

1) 종교권력의 역사성


모든 종교는 한편으로는 세속과는 다른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개발하여 자신의 초월적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세속적인 현실과 타협하면서 적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적 운명에 처해 있다. 바로 이러한 얄궂은(?) 운명 때문에 종교권력 현상과 관련해서도 당위와 현실의 괴리는 발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례로 고려 불교의 정치권력화 과정을 보자.

주지하듯이 붓다가 가르침을 펼치던 시기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합병하여 지배하던 제국주의적 국제정치 질서가 관철되던 상황이었을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국가권력이 국민을 억압하고 약탈하던 국내 정치상황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당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붓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의 수행에 전념하도록 가르쳤다. 이는 세속적인 정치의 길과 수행자의 길이 다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최소한 초기불교에서는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속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초기불교의 태도가 중국불교를 거치면서 호국적 성격으로 전형을 겪었고 그것이 한반도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한국불교는 왕실 및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성격과 전통을 계승한 고려 불교는 특히 무신정권 이후 정치세력화에 성공하면서 무소불위의 종교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불교의 권력화야말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 셈이다.

이렇듯 현실적 차원에서 본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당위적 차원의 그것과는 달리, 역사성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변화해 온 종교, 특히 불교의 흥망성쇠는 불교의 세력 여부가 종교와 정치의 관계라는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규정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무소불위의 불교 권력이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숭유억불정책과 당시 정치적 지배세력이었던 사대부들의 불교탄압으로 인해 거의 와해되어, 조선후기에 이르면 불교 권력은 거의 사라지는 운명을 겪었다.

이처럼 실제로 모든 종교권력은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다. 특히 아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당위적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 차원에서 볼 때 종교권력은 동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동시대의 정치적 조건과 종교의 연관성을 통해 우리는 종교권력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으며, 때문에 종교권력에 대한 이론적 일반화도 가능하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일반화야말로 종교권력에 대한 광범위한 비교연구-종교별, 시대별 그리고 국가별-들의 지속적인 축적을 요구한다. 본지가 세계종교의 종교권력을 살펴보려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종교권력은 동시대의 정치적 조건과 조응이라는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국가 및 특정한 시대의 종교권력은 또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최근 한국 사회의 기독교 권력은 고려시대의 불교 권력이나 조선조의 유교 권력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종교권력의 보편성을 이해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어떤 특정한 종교권력은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더 유의미하다. 물론 이 글에서 우리의 관심도 최근 한국 사회의 기독교 권력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에 아래에서 역사상 나타난 종교권력의 구체적 모습을 확인해 봄으로써 최근 한국 사회의 기독교 권력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마련해 두고자 한다.

2) 역사상의 종교권력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도 역사의 선상에서 볼 때는 결국은 당위의 차원보다는 매우 현실적 차원에서 세속적인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종교권력화의 길을 걷게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지면 관계상 자세하게 논의할 여유는 없지만, 우리는 기독교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종교의 권력화 현상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1)

주지하듯이, 유대교나 초기 기독교의 신은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의 신들처럼 국가나 통치자의 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통치에 신음하는 노예나 민중의 신으로서 국가(혹은 세속적인 정치)에 대립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세속권력에 관한 기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기반이었다. 곧 당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면서부터 국가권력에 대한 초기의 태도를 잊고 서서히 지배자의 종교로 전형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서구에 전파된 기독교는 이른바 ‘콘스탄티누스적 전환(Die Konstantinische Wende)’을 거치면서 종교권력화의 길을 밟았다. 신학자인 손규태는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 받는 종교가 아니라 박해하는 종교로, 더 이상 비특권적 종교가 아니라 특권적 종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의 종교가 아니라, 부유하고 군림하는 지배자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더 이상 광야에서 자기를 계시하던 야훼 하나님의 종교가 아니라 궁정이나 거대한 성당에 자기의 거처를 두고 있는 신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더 이상 고통당하는 노예를 해방하는 하나님의 종교가 아니라, 노예를 두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억업자들과 지배자들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듯 기독교 역사의 현실은 당위와는 정반대로 전개되었으며, 그러한 현실 속에서 발행하는 종교권력들은 현실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나타났다. 종교권력이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기 이후부터 기독교는 선교라는 미명하에 국가의 영토 확장에 봉사하고, 심지어는 교황권을 더욱 강화하여 독자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절대권력화는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와 공의의 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른바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암흑시대야말로 또 다시 역설적으로 프로테스탄트를 낳았을뿐만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 앞에서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정치권력화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친 것은 아니었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에도 기독교는 선교정책적 차원에서 식민지정복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근 한국 사회의 기독교 권력도 이처럼 정복적 성격의 선교정책과 동일선상에서 발생한 현상이라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러한 의혹 때문에, 서두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최근 한국사회의 기독교 권력을 문제 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종교의 권력화 현상과 그 귀결은 항상 현실의 논리만이 아니라 당위와 규범의 논리가 동시에 요구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요컨대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현실과 당위 사이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통찰력은 탁월하다. 니버는,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인 아가페적 사랑은 바로 그 아가페적 사랑의 실천이 불가능한 현실세계에서의 사회정의와 변증법적 관계를 유지할 것을 제안했다. 한마디로 초월적 사랑과 현실적 사회정의 사이의 변증법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증법은 종교권력화를 제재하는 데 다소의 효과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이미 구조적으로 완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종교권력을 근원적으로 해체시킬 수는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우리는 이 글의 마지막 소주제 즉 오늘날 한국사회의 종교권력구조와 그 해체전략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4.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종교권력, 어떻게 할 것인가?

통상 많은 사람들은 종교권력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의 근원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거의 대부분 세속적인 정치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뿌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항상 지극히 정당한 주장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주장이 공허하기도 하며, 무책임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마치 오늘날 불교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모든 불자들이 붓다가 되어야 한다는 말(당위)만큼이나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종교권력은 당위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권력의 역사는 오히려 현실적 차원에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종교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주체들의 적극적 실천이 훨씬 더 중요하고 또 요구되기도 한다.

물론 주체의 실천과 관련해서도 논쟁의 여지는 있다. 우선 주체의 영성(spirituality)개발 혹은 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추구 등과 같이 주체의 자각을 통한 종교권력의 해체전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종교적 자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세속적 이해관계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이 그만큼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도 ‘근원회귀론’과 동일한 한계를 내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 태도의 배후에 버티고 있는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 관심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종교권력을 해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평신도의 역할에 기대를 건다. 성직자 혹은 성직자 집단이 종교권력의 담지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입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실제로 한국불교 재가연대의 입장과 활동 노선이 이에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최근 한국 사회의 종교권력화 현상 즉 세속적인 정치권력을 매개로 한 종교권력을 해체하는 전략으로서는 설득력이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탁월한 통찰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유태인 문제》에서 유태인 문제의 원인은 유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당시 유럽인들은 유럽 사회의 모순에서 파생된 경제적 문제를 모두 유태인들에게 돌림으로써 유태인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켰고 때문에 유태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유태인을 박해하거나 혹은 영구히 지구에서 추방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유태인 문제는 유럽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파생된 문제를 유태인에게 뒤집어 씌운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유태인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희생양이다. 때문에 아무리 유태인을 박해해도 유태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심지어 유태인을 모두 인종 청소한다고 해도 유태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유태인 문제의 근원이 당시 유럽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었듯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종교권력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다. 전자본주의 사회의 종교권력과는 달리,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종교권력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 배태되어(embedded) 있다.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사회구조가 오늘날 종교권력의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오늘날 한국의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일부 성직자의 자본의 힘과 그 이윤추구 동력이야말로 종교권력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실현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공교롭게도 18대 총선에서 국회 진출을 모색한 종교집단,

즉 통일교는 말할 나위도 없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등 보수 대형교회의 목사들로 구성된 기독교 보수집단은 천문학적 자본을 소유한 종교집단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집단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는 첫째, 지금 현재에도 단일교회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으며, 둘째, 그렇듯 수십만 민중들의 구원재를 독점하고 있으며, 셋째 천문학적 크기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으며, 넷째로 세속적인 정체세력과의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는 이미 무소불위의 종교권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파국론적 관점을 가져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을 독일의 저명 시사주간지 기사가 쓴 것으로서,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운명이 파국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고, 이 하나님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며, 그의 성체(聖體)는 미국의 달러고,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레믈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Der Spiegel, 1991.12.31)2)

이 인용문을 보면, 이미 기독교는 자본주의로 사실상 대체된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이러한 과정을 당장 밟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특정 종교의 파국을 바라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건강한 기독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서 우리는 종교권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종교권력을 적극적으로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종교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 구조, 제도적 장치, 자본, 그리고 세속적 정치세력과의 연결망 등을 해체해야 한다.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물론 평신도의 역할과 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과시적 성과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평신도, NGO 및 NPO, 일부 소외된 성직가나 대자적 의식의 일부 성직자 등 다중의 주제가 종교권력의 토대를 허무는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나아가 중립적인 국가기구나 세속적 정치가들이 공공성과 공정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정교분리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실천하도록 감시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종교사회구조 즉 종교와 시민사회 및 국가 사이의 역학관계가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권력화는 물론 종교와 세속적 정치권력의 야합을 제재(sanction)할 수 있는 유효한 하나의 방안이기 때문이다.

5. 마무리

지금까지 우리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기독교 권력 현상을 새로운 종교권력 현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종교권력을 종교와 세속적 정치권력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조작적으로 정의하고, 그와 관련된 이론적 논의를 다소 전개해 보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종교권력이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 사회의 기독교 권력 현상도 그러한 역사적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전제 하에, 기독교 권력의 역사적 변화과정을 추적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러한 종교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방안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 보았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최근 한국사회의 기독교 권력을 이해하기 위한 시론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글에서 제기한 다양한 논점들은 하나하나 구체적인 경험적 증거를 통해 입증되어야 하는 일종의 가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제기한 논점들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권력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나 징검다리가 된다면, 우리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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