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스님 부산 흥법사 주지

밖에는 희미한 달빛에 바람이 나뭇잎을 뒤흔든다. 풍경소리가 덩달아 요란하다.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계절의 정취를 더한다. 망상 피기 좋은 정경이다. 이쯤이면 삶의 능선을 따라 시 한 수가 자연스레 읊어져야 멋스럽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시적 상상력은커녕 빡빡한 일정으로 여리던 감성마저 메말라 삭막하기만 하다. 서정적인 감각이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월의 무게이다.

풍요로운 인생을 이야기하면 여지없이 문화가 등장한다.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문화와 함께하는 인생에는 부드러움과 여유, 그리고 품격이 있다. 일상의 평범함에서 벗어나 성숙된 공연을 보며 감동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문화의 향유는 중요하다.

겁도 없이 도심포교의 중심에 있을 때 과감하게 ‘21세기는 문화를 통한 포교의 시대’라고 선언 했었다. 그래서 합창, 무용 등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강좌를 개설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90년대 초 어느 부처님 오신날 저녁에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공연을 하는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연이 무용에 이르러서 시선에 문제가 생겼다. 다소 노출이 심한 여대생 무용단의 의상에 거사님들은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적잖이 놀라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요즘은 절에서의 문화행사가 그저 평범한 일이 되었고 거기에다 공연의 장르도 다양해서 어색하기만 하던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조금 전 아는 스님의 절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작은 산사 음악회를 보고 왔다. 사물과 모둠 북으로 공연을 주도하는 눈에 띄는 팀이 있었는데 YMCA 소속이라 했다. 다섯 명이 연출하는 공연은 사물놀이로 시선을 끌고 설장구와 모둠 북으로 이어져 우리 가락의 멋과 흥이 넘치는 우리 정서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참 기분이 묘했다. 이웃 종교들은 그들의 이름을 걸고 우리 문화를 전문적으로 펼쳐가고 있는데 내가 아는 한 부산에는 불교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화를 이어가는 전문 연주가는 드물다. 그저 친 불교 성향의 아마추어일 뿐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열린 종교인 모임에 초청을 받아 성당에서 성탄절 미사에 법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미사의 시작에서 끝까지 국악 반주로 성가대가 찬송하는 것을 보고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예 한 권의 책으로 악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북 장구가 가락을 주도하고 가야금과 대금이 흥을 돋우는 국악 연주는 다소 설익은 구석이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동떨어진 어색함도 없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 귀에 익어지면 자연스레 자리 잡힐 일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작곡된 것이라는 아는 순간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인연의 끈이 이어져 올해 부처님 오신날 저녁 봉축 공연에 성당 성가대를 초청했더니 흔쾌히 30여 명이 왔다. 불교 합창단이 한복을 벗어나지 못하는 단복의 한계를 자연스레 뛰어넘어 자주색 윗도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대중가요 〈만남〉을 시작으로 민요 메들리를 합창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곡과 곡 사이의 연결고리는 이미 성숙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악에 맞춰 편곡해서 듣기에 편안하고 장구까지 곁들여져 그야말로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새로운 퓨전음악으로 다가왔다.

그런 관점에서 불교의 음악을 보면 참 어설프다. 이웃 종교가 서양 음악을 넘어 국악에 관심을 돌릴 때 우리는 국악을 정착시키기는커녕 어설픈 서양 음악을 기웃거리는 정도였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큰절들의 연중행사나 특별행사 정도가 아니면 국악 연주는 생각도 못할 일이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 서양식의 찬불가는 어떤가. 고작 대웅전에 있는 피아노 한 대가 찬불가 연주의 악기를 대변하는 것이 전부다. 모든 절들이 현대화의 상징처럼 피아노를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진전은 아직 없다. 대형 교회들이 오케스트라로 성가대와 연주하는 시대에 우리는 국악도 양악도 아닌 목탁과 피아노에 의지하는 현실은 아무리 유구한 불교의 역사로 현실의 부족함을 자위해 보려 해도 쓰린 가슴을 달랠 수 없다.

불교에 있어 우리 문화를 지키는 의식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는 종종 불교를 우리 문화의 상징으로 착각하고 있다. 천년의 건축문화가 살아 있는 곳은 일부의 궁궐과 대다수의 절이라고 자부한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전승되는 곳은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절 건축도 이제는 목조보다는 현대식을 많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단청이나 목조건축, 풍경소리에 염불곡조 정도로 우리 문화를 논한다면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문화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웃 종교가 승무만 빼고는 모두 선교의 방편으로 무용을 활용하고 있다. 스님들의 전유물로 여기던 차를 마시는 다도도 그들 나름으로 정착시키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더 가져야 한다. 모든 분야에 있어 절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각 절이 한 가지씩이라도 우리 것을 지키고 전문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노력을 가질 때 진정 불교가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막연하게 우리 전통 문화를 계승한다고 자만한다면 머지않아 공허한 허공만 바라보는 암담한 현실을 맞이할 수도 있다.

어느새 밤이 깊어 고요하다. 풍경소리마저 잠들었다. 잔잔한 달빛만이 심난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