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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불교의 근대성 수용 경로와 차이점 / 김경집
김경집 동국대 강사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 김경집 kyungjib@chollian.net

1. 들어가는 말

한중일 삼국은 지리적으로 이웃한 관계로 역사적 긴밀함을 유지해 왔다. 그 가운데 불교의 수용과 발전은 종교적 사유체계를 함께 하여 그 관계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 후 지역과 민족적 특성에 의해 각기 고유성을 지니게 된 삼국의 불교는 동아시아의 고유한 불교문화를 창출하였다.

이와 같은 한중일 불교는 근대 이후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적 가치관으로 인해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지금까지 국가의 통제를 받던 불교교단 이 그 모순을 극복하고자 스스로의 변화를 도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대략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교단의 쇄신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예전의 모습에서 본다면 분명 새로운 의미와 가치성의 창출이라 할 수 있다.

한중일 삼국의 불교는 그런 변화에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삼국 모두가 근대라고 하는 시대적인 전환기에 각자의 현재 상황과 변모 그리고 미래적 지평을 확대하여야 하는 동일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삼국의 불교가 처해 있는 현실적 여건이 각기 다른 관계로 그 반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근대성의 우열이 아닌 개별적인 시공(時空)에서 일어나는 한중일 불교의 차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한중일 불교의 근대성 수용

1) 한중일 불교의 정체성 인식

한국불교는 조선 후기 전래된 서학(西學)이 전래되면서 자연적으로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불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종단은 합법성을 박탈당하고 종명마저 없어진 상태였으며, 오히려 거사(居士)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들은 불교신앙을 중시하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한 대표적인 인물들이 개화파였다. 그들의 활동은 사회인식에서 소외된 불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이들과 연계해서 개화의식을 지녔던 승려인 이동인(李東仁)과 무불(無不)은 개화파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신지식을 습득하고 국제정세에도 정통하여 진보적인 안목을 지닐 수 있었다.

이런 단편적인 활동을 넘어 불교계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하기 시작한 것은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이후이다. 그것은 불교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종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을 회복하고 민중을 포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쇠락한 자질을 향상시켜 교단을 부흥하고자 한 것은 1899년 시작된 경허(鏡虛)의 정혜결사(定慧結社)이다. 그것은 내부적인 모순의 극복과 함께 일본불교의 활동이라는 외부의 압력이 가중된 시기에 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하는 길은 수행을 통한 자기성찰(自己省察)과 그것을 대중에게로 회향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현이라고 하는 불교 본연의 자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 전통을 중요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근대 한국불교의 자기인식 역시 역사적으로 한국불교의 중흥을 가져온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사상을 계승함으로써 법통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오랜 배불(排佛)의 역사 속에서 허물어진 수행처를 복원하고, 수행자가 지켜야할 청규(淸規)를 제정하여 승풍을 진작시켰다. 더 나아가 현우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여 불교의 평등성과 불조(佛祖)의 정신이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결사의 정신은 일제의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각종 통제와 함께 내적 모순을 극복하고 한국불교를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이어졌음을 볼 때 근대 불교의 자기인식이 민족적인 불교운동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불교 역시 근대라고 하는 전환의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움직임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청나라 말기 중국불교는 수행적 가치를 상실하여 사회적 존경을 잃고 있었다. 그 결과 일반 세간과 같이 취급될 정도로 불교에 대한 인식은 현저하게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을 전후하여 밀려온 서구의 사상은 불교에 대한 비판을 더하여 불교는 더욱더 쇠퇴의 길로 향하게 되었다.

이 시기 승려들과 함께 근대 중국불교를 발전시킨 것은 거사들이었다. 그들은 불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고도의 윤리성과 정신적인 가치에 주목하였다. 그 가운데 양문회(1837∼1911)는 청대 불교를 대표하는 거사로 중국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전 생애를 불교부흥에 바쳐 오직 불교연구와 홍통과 출판에 종사하였다. 그는 1866년 남경에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설치하여 불서간행사업과 불교서적의 수입을 통해 불교부흥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양인산은 불교에 대한 박해로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이때 각 사원의 재산은 몰수되어 학교 경영과 군대의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불교정책이 극단적으로 흐르자 민심의 불안으로 사유재산보호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중화민국 성립 이후에는 경안(敬安)에 의해 ‘중국불교총회’가 결성되면서 사유재산의 청원에 의해 사산보호령(寺産保護令)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승한 태허(泰虛) 법사는 관민에게 호소해서 불교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거사들의 활동에 힘입어 중국 각지의 거사림회가 형성되었다. 특히 상해 세계불교거사림의 왕일정과 중국내학원의 구양점을 비롯한 많은 거사들은 각기 자신의 주거지에 위치한 불교거사림에 관계하면서 불교의 각 방면에 눈부신 활동을 계속하여 불교의 융성을 도모하였다.

일본불교에 있어서 근대적 전환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이다. 명치정부는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 정책을 진행하면서 신불분리(神佛分離)와 폐불훼석(廢佛毁釋)을 야기하였다. 그 영향으로 신사로부터 불교의 색채가 일시에 불식되자 새불교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치적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막부는 사원의 통제를 위해 중세 이래 가지고 있던 치외법권인 수호불입권(守護不入權)을 박탈하고 본말제도로 재편성하여 지배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불교의 정체성 인식은 서양에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들은 직접 체험한 해외 상황을 참고하여 국내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불교잡지를 통해 교육의 융성과 문명개화를 주장하였다. 이런 계몽 사상은 많은 논설을 통해 정교분리로 이어지면서 불교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1872년 12월에 쓴 묵뇌(默雷)의 《삼조교칙비판건백서(三條敎則批判建白書)》로 시작된 정교분리운동은 1889년 제국헌법의 제정에 의해 법률적으로 신교자유(信敎自由)의 원칙을 보장받기에 이르렀다.

명치정부 중반에 이르게 되면 종교의 역사적 연구와 자유연구로 인한 비판적 정신이 활발하여 새로운 인식이 생겨 났다. 이 시기 선도적이고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역시 불교계 잡지였다. 이런 잡지들은 비판적 정신이 풍부한 글을 게재하였으며, 국수주의에 편승한 지식 지상주의적 불교의 한계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한 새로운 이념들을 제시하였다.

2) 한중일 불교의 교단 쇄신

한국불교의 근대에 있어 불교계의 역량과 조직체계의 결여를 보완하기 위해 교단을 정비하고 잃어버린 승직이 제정된 것은 1899년 원흥사(元興寺)의 창건과 1902년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의 설치 이후이다. 원흥사는 일본불교가 한국 내에서 상당히 위세를 발휘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이로 인해 교단이 정비되고 승직이 제정되는 등 불교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사사관리서는 그러한 조직 관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의도에서 설립된 정부 부서로 일본불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한국불교를 발전시켜 일본불교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이러한 불교정책은 조선조의 배불 경향에서 본다면 상당히 변화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는 격변의 시대라는 한계성과 담당자의 소명의식의 부족으로 기대만큼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불교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종단 건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1908년 전국의 사찰대표자들이 모여 원종(圓宗)을 결성하고 종정을 선출한 것은 한국불교 자체적인 역량의 성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중국불교에 있어 교단의 변모는 1928년 태상추의 ‘묘산흥학운동’과 같은 불교탄압에 반대하면서 나타났다. 그 중심이 태허였다. 그는 1929년 남경에서 ‘중국불교회(中國佛學會)’를 발흥하고 전국의 사원에 서신을 띄워 불교도의 단결을 재촉하여 정부의 불교탄압에 대해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5년 《정리승가제도론》과 1921년 《승제금론》을 저술하여 자신의 개혁관을 피력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첫째, 새로운 승제의 건설로 27만의 사묘와 74만의 승니에 대한 악폐를 제거하고 현대적 적응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손문의 삼민주의에 따른 불승(佛僧), 불화(佛化), 불국(佛國)의 삼불주의이다. 여기서 불승이란 승단의 개혁으로 타락한 승려를 배격하고 훌륭한 승려를 양성하는 것이며, 불화는 전국에 승속의 신중단체를 만들어 사회를 불교화하고 모든 국민이 불교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국은 이 국토를 정토로 가꾸고자 하는 보살행이다. 둘째로 교단개혁으로 승중을 분류하여 장로중(30년 이상인 자), 학행중(구학비구, 홍법보살), 니중, 복무중을 두어서 출가자일지라도 생산업에 종사하자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급진적인 교단 개혁에 비해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 사람은 원영이었다. 그는 인산, 왕일정, 관형지 등과 승단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 불교통일단체인 ‘중국불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그는 이 단체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장하고 정부를 향해 불교의 재산을 침해하는 ‘사묘관리조례’의 개정을 촉구하여 1929년 11월 ‘감독사묘조례’로 개정하는 성과를 얻었다. 또한 교단 내부의 정리개혁 및 사회교화에 전력하였다. 여기에 개혁에 뜻있는 승속은 모두 참가하였고 《해조음》 《현대승가》 《중국불학》 등 많은 불교기관지도 모두 이 운동에 참여해서 힘을 더해 주었다. 이런 움직임은 각 성에서 제각기 불교회를 조직하여 교단의 개혁과 부흥운동을 이루는 데 일조하였다.

일본불교에 있어서 근대적 교단은 종파에 의해 교회(敎會)가 조직되고 대중들에 의해 서민신앙의 유형인 결사가 추구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84년 8월 법령으로 각 종파의 종제(宗制)와 사법의 인가가 의무로 정해졌고, 1885년 3월 교회결사는 종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후 명치 20년대로 접어들어 국수주의적 성격이 강해지자 불교의 혁신이 주장되었다. 이때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불교와 정치, 불교와 국가 간의 관계 규명과 불교를 교육에 응용하여 국민정신의 함양과 불교진흥을 추구하였다. 또한 불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자유로운 계몽활동을 촉진하고 불교의 근대화와 거사불교의 혁신에도 일조를 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종문의 혁신으로 이어져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제도적인 조직의 정비를 위해 종제사법(宗制寺法)의 개정, 말사회의의 개설, 상국조직(上局組織)의 개정, 재정부의 개정, 지방부의 폐지, 임시교학자금부의 폐쇄, 지방사무출소 및 취급소의 변경, 포교와 권학의 설정, 인재등용의 규정 등 여러 사항이 논의되어 혁신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0년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아 왕법위본(王法爲本), 흥선호국(興禪護國), 진호국가(鎭護國家) 등의 교설이 현저하게 강조되었을 때도 신불교운동은 이어졌다. 고하남(古河南)이 시도한 이 운동은 1899년 10월 결성된 불교청도동지회(佛敎淸徒同志會)의 강령을 통해 불교의 건전한 신앙을 근본으로 하고, 그것을 진작, 보급하여 사회의 근본적인 개선을 추구하였다. 또 불교 및 타종교의 자유로운 토론과 연구를 주장하고, 일체 미신을 근절하고, 종래 종교적 제도와 의식을 보호하며, 정치적인 보호와 간섭을 배척하였다. 이런 주장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간섭을 벗어나 근대적 교단을 추구하는 움직임이었다.

3) 한중일 불교의 사회화

불교계가 처한 시대적 위상과 함께 내재적 모순을 살펴봄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는 논의는 근대성의 핵심이다. 한국불교에 있어 이와 같은 주장은 1912년 권상노의 《조선불교개혁론(朝鮮佛敎改革論)》을 시작으로 1913년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그리고 1922년 이영재의 《조선불교개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개혁사상은 모두 일제의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개항 이후 축적된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였다.

그것은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고 유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교단을 정비하여 그 총체적인 힘이 사회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한국불교계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교육을 꼽았다. 그것은 교육이 혁신되어야 교계의 통일된 정책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민중의 무지나 사회적 빈곤 등의 문제의식을 지적하여 전근대적 사회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 계몽적인 활동을 제시하였다.

실제 한국불교에 있어 이론적 제시를 넘어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1910년 10월 각황사(覺皇寺) 창건 이후이다. 각황사에서는 불교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포교활동과 불교강연 그리고 서적발간 등을 시작하였다. 창건 다음날부터 일반인의 불교를 위한 포교문과 수계식을 거행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강연은 당시 유명한 선승을 초청하거나 서울 각 포교당이 연합하여 불교대강연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그리고 서적의 발간은 각지의 승사(僧史), 사적(寺跡)을 조사하여 발간할 계획으로 편찬위원을 선정하는 등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되었다. 그 이외에 중앙포교당과 각 사찰과의 연락관계를 위해 〈불교월보〉를 발간하였다.

중국의 불교에서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 역시 근대 이후이다. 먼저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1922년에 창립한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이 있다. 태허를 원장으로 한 이 학교는 전국의 불교계 학교 가운데 모범이 되어 인재배출의 요람지가 되었다. 그 외에 하문의 민남불학원, 영파의 홍법불학원, 북경의 홍자불학원 등도 불교학 연구와 인재의 배출로 불교의 사회활동에 많은 힘이 되었다.

중국불교의 복지활동은 불교회와 각 단체, 사묘, 개인 등에 의해 각지에 고아원, 양로원, 시약기관, 시료기관 등이 경영되었다. 1921년 화북 오성의 대기근을 구제할 목적으로 설치된 불교주진회(佛敎籌賑會)의 활동과,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구제를 위한 불교보제일재회의 활약이 컸다.

사회교화에 있어서는 승속의 수양단체가 설치되어 채식주의를 주장하여 살생을 금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북경의 육미재, 상해의 공덕림인데 이것은 음식을 통해 불교의 자비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그 외에도 특수포교로서 감옥포교, 철도포교, 군대포교 등이 행해졌다. 특히 감옥포교는 1919년 무렵부터 절강성 제일감옥에서 시작하여 점차 각지의 감옥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일본불교의 사회활동은 명치유신기에 두드러졌다. 1879년 각 종파는 낙태와 어린아이의 유기방지를 위한 복전회육아원(福田會育兒院) 설립, 1883년 나가노 선광사(善光寺) 내에 구호와 보호를 위해 대권진양육원(大勸進養育院) 설립 등이 있었다. 그 후 1890년에 이르면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증대되고, 1891년 농미(濃尾)를 중심으로 대재해가 발생하자, 각 종파는 관장대리를 파견하여 구제를 담당하였다. 이때 동경각종협동불교자선회에서는 자선연설과 탁발로 기금을 모금하였다. 이런 자선활동은 1888년 11월 자하현대진시(滋賀縣大津市)에서 근강부인자선회(近江婦人慈善會)의 결성과 1890년 각 종파의 관장회의에서 불교자선회(佛敎慈善會) 창립이 결의된 이후 더욱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일본불교의 사회화는 산업화로 새로운 빈곤층이 생겨나자 점점 활발해졌으며, 이것은 1901년 대일본불교자선회재단의 결성, 1911년 대곡파자선협회의 결성 등으로 이어졌다. 재해구조 활동은 1905년 동북 대흉작에 대해 동북불교 각종연합회, 1910년 8월 관동대수해에 대해 천태종의 구제활동과 의료활동은 뛰어났다. 일련종에 의한 나병환자의 의료병원이 설립된 것도 이때이다. 또 특수포교를 살펴보면, 1900년에 이르면 감옥포교가 활성화되어 재소자의 교육은 물론 석방자의 거주 장소와 생계의 방도를 제공하여 석방자 보호를 위한 시설이 전국 각지에 건설되었다. 그 외에도 아동보호, 감옥포교, 출소자에 대한 보호시설, 그리고 공창폐지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이 전개되었다.

3. 한중일 불교의 근대성 차이

1) 한국불교의 외세 극복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사회에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불교는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동조하여 한국불교를 지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실제 한국불교에 있어 근대의 기점이 되는 1895년 승니의 도성출입금지의 해제가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승려인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한국불교가 친일적 경향으로 급진전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한일합방 이후 한국불교는 자주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의 일본불교라고 하는 외세의 극복이 현실문제로 대두되었다.

일제의 한국지배가 심화되면서, 일제가 한국불교 통치를 위해 제정한 법령은 1906년 11월 17일에 발령(發令)한 6개조의 ‘종교의 선교에 관한 규칙’과 1911년 6월 반포한 전문 7조의 사찰령, 그리고 1915년 제정된 전문19조의 포교규칙 등이다. 이러한 일제의 통치에 한국불교는 이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흐름이 생겨나면서 그 본질이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불교계에서는 자주적인 전통을 되찾고자 하였다. 그런 움직임은 주로 혁신적인 행동을 전개하는 단체나 이론에 의해 주장되었다. 특히 3·1운동 이후 성립된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는 조선불교유신회(朝鮮佛敎維新會), 그리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朝鮮佛敎靑年總同盟)으로 변모하면서 일제하에서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사찰령의 철폐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일본불교의 극복에 중점을 두었다.
일제의 불교정책으로 교단의 수행풍토 가운데 가장 변질된 것은 지계(持戒) 정신이었다. 이것은 승풍(僧風)의 문란으로 이어져 1912년 인가된 본말사법 가운데 대처식육에 관한 조항이 1929년에 이르면 대부분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일어난 선풍운동은 일제의 각종 통제와 함께 내적 모순을 극복하여야 했다. 당시 한국불교는 전국의 선원을 규합하여 불교계의 유기적인 관계를 도모하였고, 수행도량의 확보와 함께 수행자의 지도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선의 대중화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수좌와 함께 일반인들이 선을 닦을 수 있는 불교대중운동으로 승화시켜 갔다.

2) 중국불교의 인문적 부흥

중국불교의 근대성이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의 방향과 다른 점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불교의 전통을 복원하고 부흥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점이다. 고대로부터 형성된 중국불교의 전통은 청나라 말기로 오면서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 말기의 중국불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원이 존재하였지만 참다운 구도자가 없을 정도로 침체하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수행자 대부분은 생활을 위해 출가하였으며, 사원은 범죄자의 은신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지배세력들은 사원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서구사상의 유입을 촉진하여 불교계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 영향으로 사원의 재산은 몰수되고 교육의 기금과 공공용 강습소로 충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중국불교는 쇠퇴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불교에 있어 근대의 변화는 이런 시대적 모순을 척결하고 중국불교를 부흥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외형적 모습을 건축하는 일이 아니고 불교 속에 담겨져 있는 정신적 가치를 되찾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은 불서의 발간이었다. 양인산이 세운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에서 불서가 간행된 점과, 일본에서 불교서적을 수입해서 인쇄사업을 부흥시킨 점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노력에 의해 대소승 및 중국찬술불서 2천여 권이 발간된 것은 그 의의가 크다. 그밖에 상해의 불학서국, 의학서국, 상무인서관과 북경의 대불사류통처, 중앙각경처 등에서 불서의 출판이 이루어지면서 불교학과 출판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대장경 간행도 근대 중국불교 부흥에 기여하였다. 일본의 축쇄장경을 번각한 빈가정사의 《빈가장》, 송판척사대장경의 영인, 그리고 금판대장경의 희귀본이 《송장진귀》로 영인되었다. 그리고 북경 백림사장의 용장이 인행되면서 근대 중국불교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어 경전과 조사어록의 간행, 소책자 발간, 고승들의 총서 등이 간행되어 불교보급에 일조하였다.

중국의 불교를 이어갈 인재의 양성에 중점을 둔 것도 불교부흥의 일환이다. 그것은 불교계 학교의 건립으로 이어졌는데, 1922년 창립한 무창불학원은 전국의 불교계 학교 가운데 모범이 되어 당시 청년 승려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불학원이 세워져 인재양성의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불교학 연구로 이어져 중국의 불교부흥에 많은 힘이 되었다.

중국불교의 부흥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인사들은 승속에 관계없이 내부적 모순의 척결과 사회교화에 진력하면서 불교기관지를 발간하였다. 이때 발간된 《해조움》 《현대승가》 《중국불학》 등 많은 불교지가 창간되어 불교부흥운동에 일조하였다.

3) 일본불교의 국수주의 극복

일본불교의 근대성이 한국과 중국과 다른 점은 외세의 간섭과 기반의 부실이라고 하는 어려움보다 국가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던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는 점이다. 실제 일본불교에 있어 근대적 불교개혁의 변화가 없는 것은 정치적 가치가 우위에 있고, 정신적이고 윤리적 가치가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즉, 일본불교는 근대적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국가적인 통제 하에 있었다. 막부가 불교를 본말제도로 재편성하여 지배하자 종교적 가치보다는 윤리적 가치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치유신 이후 왕정의 복고로 신불분리가 법으로 제정되면서 신사에서 불교적인 요소는 철거되었고, 승려의 사무도 금지되었다.

불교계는 이런 배불에 대응하기 위해 명치 원년 12월에 경도에서 도곡(韜谷)을 중심으로 각 종단과 종파를 초월한 제종동덕회(諸宗同德會)가 결성되고 보국사학(報國社學)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정부에 대해 명확한 종교정책의 시행을 위한 사원국(寺院局)의 설치와 기독교의 금지 그리고 승려의 환속 금지를 요구하는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안으로는 불교 탄압의 빌미가 되었던 승폐(僧弊)를 일신하였다. 이어 1869년 동경에서 제종회맹(諸宗會盟)이 결성되고 승려의 자각과 새로운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불교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일본불교는 명치 20년대에 이르면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국수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어 호국은 곧 호법이라는 논리가 촉진되었으며, 왕법위본, 흥선호국, 진호국가 등이 현저하게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국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계는 건전한 신앙을 근본으로 하여 사회 개선을 추구하고, 불교의 제도와 의식을 보호하여 정치적인 간섭을 배척하는 신불교운동을 개진하였다. 그런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여러 잡지들이었다. 당시 잡지들은 비판적인 글을 통해 국수주의에 편승한 지식지상주의의 불교를 파악하고 그 한계를 비판하여 새로운 이념의 창출을 시도하였다.

4. 맺는 말

한중일 삼국은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 가운데 불교는 역사적 유구함은 물론이고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동아시아 불교라고 하는 문화를 창출할 만큼 교류의 폭과 깊이가 대단하였다. 그렇지만 근대에 이르러 서구 열강의 동방진출이라고 하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면서, 삼국은 급격한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런 변화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불교였다. 그것은 불교가 삼국의 근원적인 정신세계로, 공격의 대상인 동시에 민중의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중일 불교는 그 변화를 수용하고 자신을 변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대략 자기인식과 변모 그리고 사회화로 요약되고, 이것이 삼국 불교가 근대성을 수용하는 과정 속에 나타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변모는 삼국의 불교가 국가적 성격을 탈피하고 사회적으로 종교적 가치를 높여 새로운 신앙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당시 삼국의 현실이 다소 달랐던 탓에 현실적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과제가 각기 달랐다. 한국불교는 일본에 의한 문호개방과 일본불교의 적극적인 유입으로 정체성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일제의 강점기라는 현실 속에서 외세의 극복은 한국불교가 해결해야 과제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쇠락한 불교를 인문학적 부흥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학교설립과 인재양성, 그리고 대장경을 포함한 서적의 발간 등이 현저하게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지금까지 유지해온 불교가 정치적인 변동으로 야기된 국가적인 통제 아래의 국수주의를 극복하고 종교적 가치를 되찾는 것이 현실적 과제였다. 그 결과 새로운 불교운동이 전개되고 그것이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

김경집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석, 박사 학위 취득. 동국대, 중앙승가대, 성균관대에서 불교학 강의. 저서로는 《한국 근대불교사》 《한국불교개혁론 연구》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범란 이영재의 혁신사상 연구〉 〈경허의 정혜결사와 사상적 의의〉 〈근대 원흥사의 창건과 시대적 의의〉 외 30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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