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에키 후미히코 / 태선주 역 yarukii@hanmail.net

1.일본 근대의 중층성

‘근대’라는 말이 원래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상당히 애매하다. 영어의 ‘modern’ 및 그것과 같은 뜻을 지시하는 유럽어의 범위 또한 매우 넓으며, 일본어로는 근세·근대·현대 모두에 해당될 정도로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을 이념으로 채택하는지에 따라 이미지가 크게 달라진다.

서구의 근대는 상식적으로 르네상스, 지리상의 발견, 종교개혁 등에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인간 개체1)의 확립이 성립된다. 칸트에 이르러 이념적 완성을 이룬 고전적인 근대의 정신은, 독일 관념론의 전개를 통해 헤겔의 장대한 체계에 도달한다. 그와 함께 자아의 비대화는 동시에 붕괴로 이어지고,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마르크스나 니체에 의해 근대 이후(포스트 근대, ポスト近代)로 돌진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산업혁명 이후의 시민(부르주아) 사회의 변용과정을 반영한다.

일본의 근대화는(사실 아시아의 근대화는 구체적으로 다양한 상이점을 가지면서도 결국은 유사한 궤적을 채택하게 되지만), 전근대 즉 일본 에도(江戶) 시대에서 시작하는 독자적인 근대로의 방향 설정이 메이지(明治) 시기에 서구와 접촉을 통해 단숨에 가속화되었으며, 이로써 일본의 근대화는 항상 서구화와 짝을 지어 생각해야 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와 함께 19세기 후반의 서구사회는 이미 고전적 시민사회 시대가 붕괴기에 접어들어 있었으므로, 이런 사정을 반영하여 근대주의와 함께 포스트 근대주의가 동시에 도입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저 악명 높은 ‘근대의 초극(超克)론’은 이미 메이지 시기에서부터 예정되어 있던 과제였다.

일본의 근대는 이렇게 복잡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거기에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포스트 근대가 병존해 있어서, 근대화를 언급할 때에는 동시에 전근대의 잔존을 인정하면서 또한 포스트 근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러한 삼중성(三重性)을 떠안은 채 사상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본래 포스트 근대이어야 하는 것이 근대로서 말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근대의 종국을 지적하는 니체가, 일본에서는 오히려 초인사상의 강력한 자아주장이라는 점에서 개체의 확립을 추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포스트 근대가 때때로 한 바퀴 돌아서 전근대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도 된다. 게다가 포스트 근대는 동시에 반(反)서구와도 결부되어, ‘비(非)서구=일본’ 또는 ‘동양으로의 회귀’도 가리키게 되었다. 짧은 생애 가운데서도 국가주의·니체주의·일련(日蓮)주의를 두루 거치며 유동했었던 다카야마 초규(高山樗牛)는 이런 일본의 근대 상황을 상징한다.

이때 발견되는 전근대의 일본 또는 동양 사상은, 물론 전근대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라는 장(場)에서 재구성된 것이어서, 이것을 간단히 수구, 보수, 또는 반동으로 단정해버릴 수는 없다. 국가 신도(神道)가 근대의 산물인 것은 이제 와서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제 개체의 확립이라는 점을 조금 더 고려해 보자. 이것은 명백히 근대 사상사 상에서 큰 지표이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전근대의 봉건적 신분제도를 전제로 한 공동체 내의 존재로부터 해방된 ‘개인’이 바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로서의 개체의 확립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초기 계몽주의에서 백화파(白樺派)를 포함하는 대정(大正) 교양주의, 나아가 오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 등 전후의 근대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념이다. 가정과의 투쟁, 부권(父權)과의 투쟁은 근대문학의 가장 큰 과제로 지속되어 왔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개체의 확립 과정이 동시에 또 한편에서는 개체를 뛰어넘는 무엇의 탐구와 항상 짝을 지어왔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명제(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칸트의 이성 비판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초월적인 것을 배제하여, ‘개체’의 논리와 윤리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던 강인함을 여기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개체’의 확립은 ‘개체’의 확립으로서 충분한 논리적 귀결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그 한계점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개체’를 뛰어넘은 무엇인가에게 ‘개체’의 구원이 요구되어지거나 또는 그곳으로 도피해 가는 것이다. 거기에 포스트 근대와 동시적으로 진행해 가는 일본 근대의 특징이 있다.

2.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경우

예를 들면, 소세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일본 근대에서 개체의 확립을 가장 양심적으로 또한 단순한 머릿속의 이론이 아니라 몸에 배어든 사상으로서 추진한 사람이 바로 소세키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고자 생각한다면, 동시에 타인의 개성도 존중해야 한다.”(《나의 개인주의(私の個人主義)》)에서처럼, 영국식 상식을 근간으로 한 소세키의 개인주의관은 매우 타당하고 건전한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그후(それから)》 이후의 소세키 소설들은, 그러한 건전함에 항상 위협당하여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체가 불안감에 빠져가는 과정을 그리는 검증과도 같다. 여기에서는 부모와 자식, 형제 간의 인간관계는 이미 공동체로서의 아름다운 윤리의 기초가 되지 못한 채, 금전을 둘러싼 추악한 갈등만이 정면으로 드러난다. 공동체의 방침을 의지하지 못하는 개체는, 노출된 개체로서 고립하여 타자와 관계하는 법칙을 확립할 수 없다.

《마음(こころ)》은 소세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매우 알기 쉽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작품에서는, 가정에 의지하지 못하는 한 개체가 우정이나 연애라고 하는 새로운 개체와 개체간의 관계를 확립하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자살에까지 내몰리게 된다. 너무나도 급속하게 다가온 개체의 자립에, 당연히 그것과 함께 동반되어야 했던 윤리가 뒤쫓아 오지 못한 것이다.

서구의 고전적 근대에서는 시간을 두고 성숙시켜 왔던 자립한 개체의 공동체 이념을, 일본의 근대는 천천히 논의하고 있을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단숨에 그 모순의 노정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노기(乃木) 장군의 자해를 계기로 가장 급진적으로 시대를 예견한 두 지식인, 모리 오우가이(森鷗外)와 소세키는 정반대의 방향에 서게 된다. 오우가이는 역사소설이라고 하는 전시대적, 봉건적인 공간 속에 스스로를 한정하는 것으로, ‘그럴 듯한 철학’에서 볼 수 있었던 고뇌로 가득 찬 근대와의 갈등을 버린다. 그리고 자각적인 시대착오를 도회의 길로서, 전근대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있어야 할 윤리를 구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소세키는 바로 정면에서 이런 위태함을 응시해 간다. 《그후》 이후의 소세키의 소설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말해진다. 안이하고 타협적인 해결을 거부한 곳에서 ‘일본의 근대’에 대한 소세키의 투철했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소세키가 다른 한편에서 ‘즉천거사(則天去私)’2)를 주창하고 있는 것은 얼핏 보기에 당황스럽다. 소세키에게 ‘즉천거사’는 무엇이었던가. ‘즉천거사’에서 비로소 소세키가 도달한 경지가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더 이상 구제할 도리가 없는 인간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즉천거사’는 너무도 절망적인 현실을 그리는 것에 지쳤던 소세키의 유일한 기분전환과도 같은 몽상이었던가.

그러나 그 어느 견해도 일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모두가 소세키에게는 똑같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소세키가 양자를 안일하게 결부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면에 개체를 초월한 ‘즉천거사’적인 세계―이것은 《풀베개(草枕)》에서 ‘비인정(非人情)’의 전개이고, 전통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를 가지면서 또는 가지는 것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고 근대적인 개체로서의 인간관계에 대한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후자에서 전자로 간단하게 비약하지 않는 부분에 소세키의 양심이 있다. 소세키라고 하는 한 사상가 속에서 이 양측면은 사실적으로는 상보적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는 결코 바로 결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피할 수 없는 모순된 병존이 끝까지 소세키를 괴롭혔던 것이다.

3. 개체와 개체를 초월하는 것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개체’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의 관계 여하라고 하는 근대 일본사상의 거대한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근대 일본사상의 큰 특징은 독립한 ‘개체’의 집단으로서 사회를 고려하고 또한 윤리를 생각했던 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유 민권은 무사 가문의 불만과 결부된 열매 맺지 못한 꽃으로 시들어 버리고, 그곳에서는 사회계약설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철학적으로 볼 때, 독아론(獨我論)도 불사한 근대의 인간 주관에 대한 탐구는 중도에서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귀착지로서 철저했던 니힐리즘과도 인연을 맺지 못했고, 유물론도 어디까지 뿌리내렸는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마르크시즘으로부터의 ‘전향’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던 것은 유물론의 깊이가 그만큼 얕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포스트 근대는 근대의 철저한 붕괴로부터 도달한 종말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대적인 개체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개체를 초월하는 것’으로의 소박하기까지 한 신뢰를, 개체의 확립에 대항하는 원리로서 자각적으로 주장한 것에서 나타난다. 소세키가 이 두 원리를 자각하면서도 안이하게 결부한다거나 혼합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결부시키지 않은 채 방치한 것은, 소세키의 한계가 아니라 바로 소세키의 탁월한 점이다. 시가 나오야(志賀直哉)가 《암야행로(暗夜行路)》의 최후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이 ‘개체를 초월하는 것’ 속에서 융합하는 형태로서의 화해를, 소세키는 끝까지 거부했다.

그렇다면 일본 근대사상에서 ‘개체를 초월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까. ‘개체를 초월하는 것’의 실태는 대개의 경우, 전근대적인 발상의 유입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근대적인 ‘개체’를 초월하는 포스트 근대적인 것으로서 자각적으로 수용되고 또한 재편된다. 그와 동시에 거기에 반(反)서구주의, 내셔널리즘이 투영된다. ‘근대=개체의 확립=서구화’라는 등식에 대하여, ‘포스트 근대(=전근대)=개체를 초월하는 것=일본(동양)’이라는 또 하나의 등식이 가구(假構)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를 초월하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는 ‘일본’이라는 장(場)이고, 국가라는 공동체도 될 수 있다. 근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일본주의나 국가주의의 올가미에 손쉽게 빠졌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서구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만 보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 봉건적 신분제도의 붕괴 속에서 노출된 ‘개체’의 모순과 불안이, 천황(天皇)과 신민(臣民)을 부자(父子)의 관계로 비유하는 의사(擬似) 가족적인 국가 일체감 속에서 평온함을 발견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4. 근대 불교가 떠맡은 것

그렇지만 이와 같은 형태의 국가주의나 천황숭배는 ‘개체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너무 노골적이고 구체적이며 또한 과도하게 정치적이다. 그리고 심정에만 호소한다고 해도 근대적인 비판에 견뎌낼 수 있는 견고한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지식인에게 있어서는 보다 세련된 논리를 가지면서 ‘개체’의 갈등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게 해 주는 무엇이 필요했다. 또 한편으로는 ‘개체’의 확립이라는 근대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개체를 초월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논리는 무엇인가. 서구적인 근대와 동등한 역할을 완수하면서 또한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일본의 논리, 동양의 논리는 무엇인가.

그런 상황에서 떠올랐던 것이 바로 불교였다. 신도(神道)는 논리로서는 매우 취약하고, 또한 정치적인 천황숭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유교는 전근대적 봉건 신분제도와의 연속성이 너무 강하다. 그 가운데서 전통적인 전근대의 사상이면서, 게다가 근대적 비판에도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변형 가능하고, 해석 가능한 유일한 것이 불교였다. 근대의 불교는 바로 일본 근대사상에 부과되었던 세 가지 과제, 전근대적·전통적인 것과 함께 근대적이며, 동시에 포스트 근대적이라고 하는 삼중성을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운명의 장난 같기도 하다. 불교야말로 근대의 출발점에서 폐불훼석(廢佛毁釋)이나 신불분리(神佛分離)에 의해 철저하게 공격당하고 부정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계몽적인 개혁운동의 세례를 거쳐―거기에는 미묘한 위치에 서 있는 사상가들 즉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默雷)로부터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등을 포함한다―근대 지식인의 문제로서, 새로운 내실을 동반하면서 부활하는 것이 메이지 시대에서도 후반기 즉 19세기 말의 일이다. 불교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면의 문제에 깊이 침잠해, ‘개체’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의 관계에 큰 진전을 보여 주었던 쓰나시마 료센(綱島梁川)은 이 시대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일단 한 번 부정되었던 바로 그 점이 불교 재생의 큰 강점이 되었다.

불교는 전근대의 사상이면서 또한 전근대와 단절한 것으로서 발견된다. ‘조사(祖師)로 돌아가라, 또는 나아가 원시불교로 돌아가라’고 하는 원점복귀의 운동으로서 전개하는 것이다. 전통적이면서 그 전통의 직접적인 연장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의해, 그 사상은 이념화되고, 자각적인 재구성을 허락하게 된다. 원점복귀를 가장하면서 사실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근대불교’인 것이다. 근대의 신도가 복고 신도의 혈통을 이으면서도, 적어도 중세로부터의 지속을 분리하는 것으로 고대를 이념화하는 점에서 성립하는 것과 동일하다.

상술한 것처럼, 근대의 국가주의는 확실히 제도로서는 강고한 속박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상으로서 또는 종교로서 어느 정도까지 개체의 의지처가 될 수 있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후에, 기타 잇키(北一輝)나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 등으로 대표되는 일련주의가, 잘못된 일련의 이해로부터 초국가주의와 결부되었다는 것은 종종 언급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오히려 어째서 그들은 국가주의, 천황숭배만으로 끝내지 않고, 동시에 일련주의자로서 불교를 필요로 했던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천황숭배로 채워지지 않는 것을 메우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일련 신앙이 아무리 왜곡되어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 그것은 근대 일본사상에서 불교의 필요성이라는 점에서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근대에서 전개되는 불교 가운데,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가 이끄는 국주회(國柱會)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일련계가 국가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반해, 보다 순화된 불교로서의 선(禪)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선호되었다. 소세키 등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의 기수 히라쓰카 라이쵸(平塚雷鳥)도 또한 젊은 시절 선에 몰두했던 한 사람이었다.

선은 한편으로는 철저한 개체의 추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개체를 돌파해서 ‘개체를 초월하는 것’에 향하게 하는 것으로, 바로 근대 일본 사상의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완수하는 것이 된다. 최근 종종 지적되는 것처럼,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로 대표되는 근대 선은 승당이 가지는 전통적인 의례성이나 습합성을 사상(捨象)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근대 지식인의 거사불교로서 합리화되고, 재편성되어 되살아났다. 그렇지만 그 선도 또한 손쉽게 국가주의의 올가미에 빠져들고 만다. 그것은 깨달음과 국가라고 하는 언뜻 보기에도 명백히 수준을 달리하는 ‘개체를 초월하는 것’이, ‘개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한도 내에서 무반성적으로 동일시되어 유착된 전형이다.

정토계도 또한 똑같은 요청에 응해 간다. 일견 개체의 확립과는 역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정토사상이지만, 기요자와 만시(淸澤滿之)의 정신주의는 명확히 “자가(自家)의 확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한다.”(이와나미 문고판, 《기요자와문집(淸澤文集)》, 17쪽)는 것을 주장한다. 타력(他力)이란 개체가 해소하는 곳에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 타력이 각자의 정신에 느껴지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같은 책, 31쪽) 타력이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개체를 개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개체’의 확립과 ‘개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하는 일본 근대의 이중적인 과제에 대한 답이 훌륭하게 제시되어 있다. 기요자와 교학이 근대 교학으로서 많은 영향을 주는 것도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의 상즉은 그 정도로 자명하게, 예정 조화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요자와는 자기의 고뇌와 갈등 속에서 그 곤란함을 고백한다. “진정으로 종교적 천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부모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네, 처자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네, 재산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네, 국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네,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네.”(같은 책, 83쪽)

이렇게 기요자와의 생애는 고행적인 구도자의 분위기를 띠게 된다. 거기에는 소세키 본인의 고뇌와 통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슬아슬한 범위에서 ‘개체를 초월하는 것’으로서의 절대자와 국가의 동일화가 회피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아슬아슬한 일선에서 멀어져 애매하게 되었을 때, 기요자와 문하가 전쟁 협력에 말려 들어가는 것도, 이 또한 우연한 일은 아니다. 천황도 아미타불도 ‘개체를 초월하는 것’이고, 그 점에 중점을 두는 한 양자를 구별하는 제어장치는 작동할 수 없다.

5. 니시다(西田) 철학의 과제

‘개체’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을 계속 요청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정도로 자명하게 그리고 낙천적으로 양자의 결합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소세키가 몸소 보여 주었다. 이 양자의 관계를 보다 급진적으로 논리화한 사람은 훨씬 이후에 등장한, 후기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일 것이다. 초기 니시다의 순수경험론은 ‘개체’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자기의식을 비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진척시켰다. 이에 반해 후기 니시다는, ‘개체’와 ‘개체를 초월하는 것’(즉 ‘場’)이라는 이 양자의 존재와 그것들의 필연적인 관계가 요청되면서도 이 양자가 직접적으로 결부되지 않는 모순관계를 논리화하고자 고민한다.

“오직, 하나의 개물(個物)은 개물이 아니다. 개물은 개물에 대한 것에 의해 개물이다. ……따라서 개물이란 자기 모순적 개념이다. 우리들의 자아는 자기 모순적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자각에 대해서(自覺について)〉, 《철학논문집》, 제5집) “절대로 개물적인 것은 한정함이 없는 한정으로서, 절대무의 자기 한정으로서, 사실이 사실 자신을 한정한다. 일회적인 사실, 절대의 사실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같은 책) 어째서 ‘개체를 초월하는 것’은 ‘절대 무’로서 표현되어야 하는가. 어째서 ‘세계는 무한한 자기모순’(같은 책)인가.

근대 일본의 사상사적인 귀결로 보이는 한, 그것은 필연적인 표현이었다. 근대와 동시에 근대로의 회의로서 포스트 근대를 인수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요청된 ‘개체를 초월하는 것’은, 칸트에서처럼 단순한 실천이성의 요청에서 멈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헤겔적인 절대이성과 같이 장대하고 거의 낙관적인 자기의 비대화에도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의 포스트 근대가 직면해야만 했던 심각한 니힐리즘이나 유물론에 급진적으로 이동하기에는, 전근대로부터 유입한 ‘개체를 초월하는 것’이 아직도 계속 살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근대적 비판 앞에서 소박한 신뢰를 얻을 수가 없다.

근대 일본에서 ‘개체를 초월하는 것’의 이러한 모순적인 성격은 바로 ‘무’라고 하는 부정 표현으로밖에 나타낼 수 없고, 그래서 ‘개체’와 ‘개체를 초월하는 것’의 관계는 모순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투철한 논리를 전개했던 니시다조차 “세계의 성립 근저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국가적이라는 것이다.”(같은 책)의 형태로 역시 국가를 들고 나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니시다 철학은 결코 불교 그 자체의 논리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깊은 선 체험에 의거하면서, 불교가 근대에서 담당해야 했던 역할을 가장 적확하게 논리화한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것의 결정적인 영향하에서 교토(京都)학파의 불교론이 전개되고, 지금에 이르는 불교 해석의 큰 맥이 형성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요즘 또다시 마치 새로운 것인 양 포스트 근대가 회자되고, 불교가 포스트 근대를 책임질 것처럼 각광받고 있다. 너무도 진부하게, 과거의 ‘근대의 초극론’과 비교해도 훨씬 차원이 낮은 논의가 염치도 없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 불교라면, 장례식 불교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더욱 영광일 것이다. 그러나 진부하고 형편없는 논의는 진부하고 형편없는 만큼 한층 더 횡행하기 쉽고, 전말이 좋지 않으며, 위험하다. 거기에 휩쓸려 들어 그 장단에 춤추지 않기 위해서는, 한 번 더 근대사상에서 불교가 담당했던 역할과 그 제약을 대상화해서 그리고 재인식하는 것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

동경대 문학부 졸업. 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서 박사 취득. 현재 동경대 대학원 교수. 저서로는 《헤이안 초기 불교사상의 연구》 《일본불교사상사 논고》 《일본불교사-사상사로서의 접근》 《벽암록을 읽다》 《해체하는 언어와 세계-불교로부터의 도전》 등이 있으며, 편저서로는 《일본의 불교》 제1기, 제2기, 《현대어역 벽암록》 등 다수가 있다.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졸업. 현재 일본에서 정진하고 있으며, 《21세기 지의 도전》《호모에로티쿠스: 동물행동학으로 보는 인간의 성과 사랑》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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