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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근대화의 두 얼굴, 만해와 성철 / 김종인
―전근대성과 근대성 간의 긴장과 갈등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 김종인 jonginkim@korea.ac.kr

1. 들어가면서

만해 한용운(1879∼1944)과 퇴옹성철(1912∼1993)은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들이다. 한국 근현대 불교사는 온갖 질곡과 파행의 역사였지만, 이 두 인물은 한국 근현대사에 이름을 남긴 다른 어떤 분야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 업적의 위대함에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두 인물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전혀 반대되는 길을 걸었으면서도, 각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만해의 활동 영역은 단지 불교계에만 머물지 않고 문학과 정치 분야에까지 미치기 때문에, 불교계 내에만 국한된 성철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교사적 측면에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들은 각기 한국불교에 근대성을 부여하려 한 세력과 그러한 근대성을 거부하고 근대 이전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려 한 세력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활동 시기와 사고양식을 단순 비교하면 만해와 성철은 서로 순서를 바꾸어 태어났었어야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두 사람은 반세기를 격하여 활동하였는데, 20세기 초·중반기에 활동한 만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매우 혁신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불교운동을 펼친데 비하여, 20세기 중·후반기에 활동한 성철은 매우 보수적인 불교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역사에 일정한 진행 방향이 있고, 불교 역시 이러한 역사의 변화에 맞추어 가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분명 두 사람은 순서를 바꾸어 태어났어야 했다. 물론 역사에 일정한 진행 방향을 설정한다는 것은 하나의 철학적 관점을 전제하는 것이며, 불교 역시 여기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 역시 불교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글은 역사에 일정한 진행 방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두 사람을 비교해 볼 것이다. 그러나 불교 역시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만해와 성철이 활동한 시대를 한국사회가 전근대에서 근현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로 보고, 이 시기의 성격에 비추어서 두 사람의 사상과 활동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불가피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불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상반된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한 두 사람의 철학과 그 철학의 현실에서의 구현 결과에 대한 공정한 비교 검토를 해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 검토는 지금까지 제대로 검토해 본 적이 없는 한국불교의 근대성 문제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2. 만해의 시대, 성철의 시대

한국불교의 근대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두 사람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산 시대적 상황의 동일성과 차이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만해는 1879년에 나서 1944년에 입적하였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가 타의에 의해 근대 사회로 이행한 시기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근대의 성격과 이행과정 및 동력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적어도 만해의 생존 시기에 해당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매개로 해서 사회의 전반적 영역에 걸쳐서 급격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럼 성철이 주로 활동한 시기의 성격에 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성철은 1912년에 나서 1993년에 입적하였다. 성철은 만해보다 33년 후에 세상에 태어난 것이 되며, 만해가 입적한 1944년은 성철이 32세가 된 해이다. 성철의 인생의 전반기는 만해의 삶의 후반기에 해당한다. 또 성철은 1936년에 출가를 하였으므로 만해와 성철은 8년 동안 한국 불교계에 함께 몸담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런데 이처럼 두 사람이 생존한 시기는 반이 겹치지만 두 사람이 각기 한국불교계의 가장 주목받는 승려로서 활동한 시기의 한국 사회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만해가 활동한 20세기 전반의 한국 사회는 근대로의 이행기에 해당하지만, 성철이 활동한 20세기 후반의 한국 사회는 우리가 흔히 ‘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만해가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한국은 농업을 주요 산업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전 국민의 태반은 문맹 상태에 있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근대문명의 각종 이기들이 속속 소개되고 있었지만, 국민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농촌에서는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지속되고 있었다. 도로와 철도를 매개로 농촌 역시 도시와 도시의 신문명과 연결되고 있었지만, 그러한 연결은 농촌 사람들의 삶에서 여전히 비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성철이 활동하던 시대의 한국인의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성철의 생애 동안 한국 사회는 급격한 현대화 과정을 거쳐서, 그가 열반할 즈음에는 한국인의 90% 이상이 문맹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농촌 인구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완전히 도시화된 한국인들의 삶은 최첨단 문명의 이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삶의 양식은 한국인의 일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사회의 일부 특수한 영역과 현재의 일상과 분리된 문화적 유산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불과 33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지만, 만해가 활동한 사회는 근대 혹은 근대 이행기의 한국 사회이고, 성철이 활동한 사회는 현대 한국 사회로서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현대 한국 사회에서 활동한 사람이 근대 한국 사회에서 활동한 사람보다 더 전근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세계관이 사회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그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그 자체 내에 다음과 의문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도대체 한국 사회에서 근대란 것이 얼마나 보편성을 지니는 것인가? 불교는 근대의 보편성에서 벗어난 것인가?

3. 만해와 성철, 그리고 근대와 전근대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에서 16장에 걸쳐서 한국 불교의 방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제목에 있는 유신(維新)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만해는 한국불교는 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변화는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반적이고 혁신적인 변화이다. 만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식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1)

만해가 이처럼 과격한 말을 하는 것은 우선 당시의 한국불교가 매우 쇠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친 억불정책의 결과로 한국불교는 매우 쇠락해 있었는데, 만해는 한국불교의 이러한 현실을 보고 승려는 “빈천에 시달리지 않으면 미신에 혹한 무리들이어서, 게으른 데다가 어리석고 나약하여…… 인류의 하등”2)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쇠락한 불교를 바로 세우는 것이 굳이 유신일 필요는 없으며, 그 유신이 파괴를 통한 유신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부흥을 이야기하고 재건을 이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해 이전의 2,500년 불교 역사상 ‘파괴’와 ‘유신’이란 말을 쓴 불교인은 없다. ‘파괴’와 ‘유신’이란 용어 자체뿐 아니라 그러한 의미 자체가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만해는 정치와 혁명의 구호를 불교의 혁신에 도입한 것이다.

만해가 이처럼 불교전통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신’과 ‘파괴’란 말을 사용하여 불교의 혁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기존의 불교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서구에서 유입되어 만해 당시의 동아시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진화론 특히, 사회진화론이다. ‘유신’과 ‘파괴’는 바로 진화의 기본원리인 것이다. ‘파괴’란 기존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고 ‘유신’은 새로운 존재의 생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유신’과 ‘파괴’가 진화의 두 측면 즉,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한국불교가 유신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쇠락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생성을 의미하는 유신은 모든 존재에 항상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만해는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요,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 천지 사이의 형이상 형이하의 문제치고 연구하여 유신하지 않음이 없어서…….”3) 만해는 이처럼 진화론의 연장선상에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구분 없이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고를 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전근대 사회에서 두드러진 고정 불변의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의 부정 즉, 좁은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 사고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만해는 이러한 근대적 사유의 특징인 반형이상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불법 자체도 변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만해의 불교의 제도 및 정책 개혁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만해는 실상은 불법의 절대성조차 부정하고 있다.

만해는 불교승려이지만 불교를 유일 절대의 진리로 파악하지 않는다. 만해에게서 진리는 끊임없이 진화 발전해 가는 문명이다. 그럼 만해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만해는 불교를 가장 우수한 철학이라고 본다. 그러나 절대 유일의 진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불교는 다른 여타의 철학 가운데 하나이며, 문명의 한 요소이다. 만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만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야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줄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착실히 하게 될 것이다.4)

만해는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이처럼 종교와 철학도 발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종교는 더 이상 절대 진리에 기초한 믿음의 체계가 아닌 것이다. 불교 역시 더 나은 불교로 발전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제도와 정책이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변화·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불교 승려이지만 불교 역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변화·발전해 가는 문명의 일 요소라고 보고 있다.5)

불교를 유신해야 한다고 보는 만해의 태도가 결코 쇠락한 한국불교에 대한 반성에서 단선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서양의 진화에 영향받은 반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부되어 도출된 것이라는 것은 한국불교에 대한 성철의 태도와 비교해 보면 더욱더 잘 드러난다. 반세기 후의 성철 역시 한국불교가 쇠락할 대로 쇠락하였다고 보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처방으로 ‘유신’과 ‘파괴’가 아니라 근본에의 ‘회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문제를 놓고 만해와 성철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이한 처방 배후에는 상이한 세계관이 깔려 있다. 뒤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성철은 불교의 진리는 유일 절대의 가르침이라고 보기 때문에 현재의 불교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원래 가르침에의 ‘회귀’를 통해서만 바로잡아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럼 성철이 당대 한국불교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에의 회귀를 주장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성철은 82년의 음력 5월의 법회에서 한국불교 중흥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한 1947년 봉암사 결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당신네가 여태까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는 절했지만, 스님네 보고 절한 일 있나? 생각해 봐.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한테서 법을 배우는 사람이야. 당신네는 제자고 스님은 스승인데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 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조선 5백 년 동안에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야.6)

이 일화는 성철이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 보살계를 시행하려 하자 여기에 참석한 신도들에게 절을 강요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만 해도 신도들의 머릿속에 있는 승려란 조선시대 천민의 연장이었다. 때문에 거기에 참석한 신도들은 승려들에게 절을 하라는 성철의 요구에 다만 어안이 벙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성철 역시 그들이 왜 절하기를 주저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승려가 신도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하고 위신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성철은 이렇게 망한 한국불교를 되살리기 위해서 근본에의 회귀를 이야기한다. 1980년대에 불교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성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에는 만고에 일관된 진리가 있을 뿐,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시하처(何時何處)를 막론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만사를 행할 따름입니다. ……천겁을 지나도 과거 아니요, 만세에 걸쳐 항상 지금이로다.”7) 성철이 믿는 불교의 진리는 초역사적인 절대 진리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진리가 아니라 언제나 동일한 진리이다.

성철이 산 시대는 만해가 산 시대만큼이나 급속한 문명의 발달과 문화의 변천이 있던 시대일 뿐 아니라, 만해가 산 시대의 변화를 이미 겪은 시대이다. 또 세속적 관점에서 보자면 성철 시대의 한국불교는 여전히 이러한 사회 일반의 문명의 발달과 문화의 변천을 못 좇아가고 많은 승려들이 대처승이 되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만해 시대의 불교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성철은 불교가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못 좇아가서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불교가 세태의 변화에 어울리면서 그 근본정신과 생활양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보고, 부처님 당시의 생활방식대로 살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비단가사, 장삼, 목발우를 불사르고 대신 석가모니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믿는 괴색 가사와 흙발우를 만들고, 육환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8)

근본주의자인 성철은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통할 수 있는 영원불변의 절대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근대의 어떠한 철학도 허위라고 본다. 그는 동서고금의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허위이며, 서양의 어떤 위대한 철학자, 종교가, 과학자라고 해도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나서 말하는 것은 한마디도 없다고 본다.9)

뿐만 아니라 그는 불교 가운데서도 오직 돈오돈수의 참선 수행만이 유일무이한 진리의 수행방법이라고 보며, 여타의 것은 ‘삿된 가르침’이라고 보았다.10)

그러나 문명의 진보와 발전을 특정의 종교적 가르침보다 상위에 놓는 만해는 불교 교리에 대한 탐구와 참선을 유일무이한 공부방법으로 보지 않는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의 〈논승려지교육(論僧侶之敎育)〉에서 “조선 승려는 배우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여 노예의 경지로 들어가게 하였다.”고 하면서 승려들의 폐쇄적인 공부 내용과 방법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만해는 근대적 지식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객관 세계에 대한 탐구까지 승려들의 공부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만해는 승려들이 공부해야 할 교과목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보통학이요, 둘째는 사범학이요, 셋째는 외국유학이다.

만해가 말하는 보통학의 내용을 보면 대체로 근대적 시민 교육에 해당하고, 사범학은 근대적 고등교육을 가리키고 있다. 사범학은 다시 자연사범과 인사사범(人事師範)으로 나뉘는데 각기 근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에 해당한다. 만해는 이러한 근대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토대 위에 불교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해의 이러한 학과 분류에 따르면 결국 불교학은 근대 인문과학의 한 부분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불교학은 더 이상 종학(宗學)이 아닌 것이다.

4. 근대적 가치: 욕망의 문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만해와 성철은 기본적인 지향점이 서로 정반대인 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차이가 현상적인 측면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불교의 입장에서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불교는 극단적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를 모두 부정하고 수행상의 중도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욕망을 철저히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특히 성욕은 가장 금기시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만해는 근대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이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철학적 측면에서 서양의 중세와 근대의 근본적인 차이는 형이상학적 믿음과 과학적 합리주의의 차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적 가치의 측면에서는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혹은 육체적 욕망의 차이이다. 서양 근대 문화의 근본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대한 긍정인데, 만해 역시 이를 긍정하고 있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 가운데서 가장 세간의 관심을 끌고 또 불교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승려의 결혼 허용이다. 만해는 〈논불교지전도계어승려지가취여부자(論佛敎之前途關於僧侶之嫁娶與否者)〉에서 승려의 결혼을 금하는 것은 윤리에 어긋나고, 국가의 이익에 어긋나고, 포교에 장애가 되고, 교화에 장애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결혼 금지가 윤리에 어긋나고, 국가의 이익에 어긋난다는 것은 성리학자들이 전형적인 윤리적 측면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논리일 뿐이며 특별히 새로운 내용도 또 관심을 끌 만한 내용도 아니다. 특이한 것은 만해가 결혼 금지가 포교에 장애가 되고, 교화에 장애가 된다고 본다는 점이다.

만해는 결혼을 금지하는 데서 오는 욕망의 부정 때문에 불교의 포교와 대중교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승려에게 독신생활을 의무화하는 것은 분명 많은 사람들이 승려가 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 포교와 교화상의 한계로 연결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대처승과 비구승이 공존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 신도들은 대처승보다는 비구승들을 훨씬 더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보는 만해의 논리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육체적 욕망을 긍정하는 자신의 근대적 인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해는 “육체를 세상에 타고 나서 식욕, 색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요 아첨하는 말일 따름이니 어찌 실천할 수 있으랴?”11)라고 말하고 있다. 실로 불교의 근본을 뒤엎는 말이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꾸로 쏟아지는 물은 막을수록 쏟아지고, 도망쳐 달리는 말은 조종하려 할수록 더욱 횡포하게 마련이다. 식욕, 색욕도 억제할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니, 이는 보통 사람의 상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이란 결코 소멸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억제되어서도 안 된다는 논리이다. 색욕에 이끌리지 않는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 아니라,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만해는 결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에 일임할’ 문제일 따름이라고 본다.

불교 전통에서 보면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만해의 이러한 논리는 가히 혁명적이다.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혁명적인 발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 깔려 있는 인간 욕망의 긍정이 가히 혁명적인 발상인 것이다. 기존의 불교 전통에도 결혼 경험이 있는 무수한 승려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만해가 주장하는 것처럼 석가도 결혼을 하여 아들을 두었으며, 석가의 삶을 기본 모델로 하고 있는 경전 속의 다른 많은 부처들도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불교가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불교 계율들에서 성적 욕구의 추구를 부정하는 불사음계(不邪淫戒)가 가장 중시되고 있다. 단 하나 성행위를 수행의 도구로 보는 불교 분파가 있다면 일부 좌도밀교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보면 불교가 인간의 성욕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데서 발생한 지극히 돌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면 근본주의자인 성철은 근대적 가치관을 받아들여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고 승려의 결혼을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보는 만해와 같은 사고방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철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정(淸淨)한 계율을 견지(堅持)하여 훼범(毁犯)하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최후 유촉은 불교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성쇠(盛衰)는 승려의 지계(持戒)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불교를 파괴하려는 식민정책으로 승려의 대처(帶妻)를 권장하니, 대처승(帶妻僧)이 교단(敎團)을 지배하여 우리 불교사상 일대오점을 남겼습니다.12)

만해는 대처를 통해 쇠락한 한국불교에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 데 비해 성철은 대처의 허용을 한국불교사의 일대 오점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를 불교를 파괴하려는 식민정책의 일환이라고 몰아 부친다. 이러한 논리가 타당하다면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만해는 한 번도 항일투쟁을 한 적도 없고, 승려들이 항일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 성철의 평가에 의해 졸지에 일본 식민정책의 앞잡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대처승의 허용을 불교를 파괴하려는 식민정책으로 보는 것은 성철의 주장일 뿐이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관관계는 지금까지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것이 ‘부처님의 최후 유촉’이자 ‘불교의 생명’이란 말은 결코 성철의 편협한 시각이라고 볼 수 없다. 만해는 “불교의 진수가 어찌 자질구레한 계율 사이에 있겠는가? 불교를 계율에서 구하는 것은 참으로 용을 한 잔의 물에서 낚고 호랑이를 개미집에서 찾는 태도라.”13)라고 하지만, 계율을 제외하고서 불교를 논할 수는 없다. 불교는 경율론을 일컬어 삼장(三藏)이라고 한다. 그만큼 율은 불교를 이루는 기본적 토대이다. 또 계정혜를 일컬어 삼학(三學)이라고 부르고 있다. 계율을 부정하고는 불교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불교의 생명’이란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계율 중에서 결혼과 관련된 불사음계는 대소승의 모든 계율에서 으뜸이 되는 항목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철은 일제시대의 대처승 허용이 한국불교사의 일대 오점이었다고 보았으며, 그 자신 대처승을 몰아내기 위한 정화불교운동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5. 만해와 성철, 두 사람은 순서를 바꾸어 태어 났어야 했다

만해와 성철은 종교 혹은 불교를 보는 시각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근본적 차이는 근대적 종교관 혹은 불교관과 전통적 종교관 혹은 불교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만해는 성철보다 반세기 앞서서 활동했지만 근대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성철은 반세기 후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불교관을 지키고 있었다.

만해는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 말에는 불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깔려 있지만, 성철이 보여 준 것과 같은 불교 진리의 초역사성과 영원성에 대한 믿음은 없다. 종교를 문명과 문화의 한 요소로 보는 것은 서양의 지성사에서 보여 주는 매우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근대에 이르러 일어난 다양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인문학의 부흥은 기독교의 보편왕국을 무너뜨리고 기독교를 하나의 특수한 문화현상과 가치관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현실은 비기독교들뿐 아니라 상당수의 기독교 신학자들까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인류의 문명이 부단히 진보하는 것으로 보고, 불교를 미래 도덕문명의 원료품으로 보는 만해의 진보적 사고는 이들 기독교 신학자들의 사고와 맥이 통하는 것이다.

만해 개인의 실제 행동 양식에도 이런 사고는 반영되어 있다. 스스로 자신의 출가동기를 밝힌 〈나는 왜 중이 되었는가〉에도 나와 있듯이, 만해는 실존적 생사의 고뇌를 벗어 던지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그의 출가는 좁은 시골 고향 밖의 세상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으며, 어쩌다보니 승려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그는 승려이면서도 다양한 서양의 철학사조를 섭렵하였으며, 이들과 불교가 여러 면에서 상통함을 논하고 있다.

그는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하였지만,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시인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또 그의 활동에서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 역시 시인으로서의 활동과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이다. 그는 결코 세속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사회를 떠나 불교를 추구하지 않았다. 이러한 만해의 불교는 한마디로 세속화된 불교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성철은 출가한 이후 줄곧 선방에서 지냈다. 한 번도 도회에서 머무른 적이 없다. 성철 역시 매우 박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저술을 통해 살펴보면, 그는 불교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산중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만을 추구하였을 뿐 아니라, 후배 승려들의 세속에 대한 관심까지 경계하였다. 불교는 그의 삶의 전부였다. 그에게 불교는 최고의 가르침이었으며, 절대 유일의 가르침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절대 진리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세속을 불교화(佛敎化)시켜야지, 불교가 세속화하면 불교는 죽어요.”14)라고 그는 말한다. 성철의 불교는 여전히 초세속적인 불교인 것이다.

6. 맺음말

이처럼 만해와 성철의 불교관과 승려로서의 삶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만해는 변화하고 있는 세상, 근대로 이행하고 있는 사회의 문화를 흡수하고 불교를 이와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반면에 성철은 그러한 변화를 무시하고 자신이 믿는 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부흥시키고 지키려 하였다. 두 사람은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의 이처럼 상이한 관점은 결코 서로 융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이 둘 중 누구의 관점과 태도가 한국불교의 현실에 적합한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시대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모든 전근대적인 요소는 근대적 요소로 대체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만해와 성철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만해의 불교관은 오늘날까지도 그다지 수용되지 않고 있다. 반면에 근대와 현대는 물론 모든 시대의 초월을 주장하는 성철의 근본주의 불교관은 현대 한국불교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아무래도 종교로서의 불교의 특수성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상당수의 근대 불교학자들이 서양 근대철학의 주요한 특징인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불교 속에서 찾아내고 부각시키려고 하였지만, 전반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교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근대를 주도하고 있는 주요한 가치관 및 사고방식과 충돌한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태도가 그렇고, 진리의 궁극성에 대한 입장에서 또한 그렇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신적 깨달음의 절대성 대신 문명의 끝없는 진보를 믿으면서,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 상태에서 불교의 정체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는 불교적 진리의 비객관성을 심문하면서 불교를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근대적 가치관과 사유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김종인

고려대 BK 연구교수. 서울대 철학과 석사, 미국 스토니 부룩 대학 박사. 연구물에는 〈法華宗要에 나타난 元曉의 法華經 이해〉 〈법화경 방편사상에 나타난 해석학적 관점〉 〈 體用과 元曉의 和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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