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

1. 서론

16세기 서구의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서구적 근대가 발전모델 및 역사발전의 보편성으로 전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록 약간의 시간상 지체가 있었다 하더라도 동아시아지역의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19세기 이래, 동아시아에서 서세동점은 그러한 전제의 폭력적 강제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서구적 근대가 인류의 발전 모델 혹은 역사발전의 보편성으로 전제된 데에는 강제와 폭력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전제가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서구 근대적 사회질서가 규율화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 이외 지역의 자발적 동의와 규범 준수가 철저하게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전제의 정당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적 추세였던 합리화,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적 자본주의와 그 연관의 역사사회적 효과(발전 혹은 진보) 등에 대한 기대였다. 그 이후 실제로 이루어진 기대의 충족(경제적 발전이나 정치적 민주화 등)은 그러한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 결과는 서구 근대 이외의 시공간은 특수성, 예외성, 저발전으로 현상되었다.1)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부정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상당히 달라졌다. 비록 서구 근대 이외의 시공간이 완전한 자신감을 회복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서구 근대도 지속적인 정당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정당성은 특히 양차대전을 경험하면서 이미 서구 내부에서부터 도전을 받아 왔다. 물론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도 이러한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서구 중심주의적 근대성이 그 이면에 자연의 반란,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파괴하는 동질화 경향 등과 같은 자기 부정적 현상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현실이 점점 더 파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이제는 ‘전지구적으로 그리고 삶의 전 영역으로’ 관철되어 가고 있다. 그 결과 서구 근대의 부정적인 현상은 보다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환경파괴의 가속화, 사회적 불평등 및 사회적 배제의 심화,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의 규율화에 따른 문화적 동형화와 고유문화의 급속한 파괴, 그리고 폭력과 전쟁의 빈발 등과 같은 부정적인 현상이 수반되고 있다.

부정적인 사회현상의 심화 정도는 사회체제의 정당성과 반비례한다. 이제 서구적 근대성이 낳은 부정적인 측면은 현대사회의 체제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체제의 전환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늦었더라도, 우리는 지금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체제 모델은 ‘그에 적합한 혹은 그 기초가 되는’ 새로운 문화를 요구한다. 문화는 행위자의 욕망 형성과 실현에 지침이 되는 ‘본보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서구적 근대성의 근본적 대안을 규범적으로 재구성해 보는 데 있다. 그러나 서구적 근대성의 대안적 본보기를 탐색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적 근대성이라는 본보기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바, 여기에서는 수많은 논쟁거리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재구성 작업은 그러한 논쟁과의 의미 연관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도 수반한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서구적 근대성과 관련된 비판적 대안들 중 이미 공론화된 사실들을 모아서 이론적으로 재구성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론화된 대안들 중에서도 이 글의 구성과 관련된 주제만을 선별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의 구체적인 재구성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불교의) 중도사상이 서구적 근대성을 지양하고자 하는 탈근대 사상의 사상적 원형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중도사상이 서구적 근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세계관을 내장하고 있다는 공론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니체, 데리다, 푸코 등 핵심적인 탈현대사상가들이 불교사상에 의지하여 서구적 근대성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학계의 일반화된 논의가 공론의 기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서구적 근대성에 기초한 사회적 구성―경제적 측면의 자본주의, 정치적 측면의 형식 합리적 민주주의, 문화적 측면의 서구문화 우월주의 및 획일주의, 그리고 환경적 측면에서 환경 파괴적 생활양식 등―에 대한 대안적 공론을 모아서 재구성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는 생태주의적 대안, 자본주의 넘어서기, 참여민주주의, 문화적 다원주의 등을 전체 사회의 부문별 대안적 공론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대안적 구성 원리들로 구성된 총체적 사회 모델을 ‘또 다른 진보’의 본보기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두 가지 논의를 하나의 이론적 체계, 즉 선순환 모델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교적 세계상을 행위적 차원과 연관시켜 논의하고 ‘또 다른 진보’는 사회구조적 차원이나 체제의 차원에서 논의한 다음, 이러한 둘 사이의 선순환 관계를 밝혀 봄으로써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을 규범적으로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2.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

그렇다면 왜 지금 이러한 재구성 작업은 불가피한가? 그것은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자.

첫째,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은 환경위기를 야기한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잘 알려진 더글라스 루미스(C. Douglas Lummis)는 ‘제로성장을 환영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다소 낭만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경제성장이 오늘날 환경위기의 근원임이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원인은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에 의해 생산된 욕망과 그 새롭게 생성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의 순환 그리고 그 생산, 즉 잉여가치의 창출을 위한 지속적 생산과 그 생산의 지속을 담보해 주는 소비 그리고 욕망의 순환이야말로 오늘날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다. 경제발전과 환경위기 사이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파악한 바 있는 벨라미 포스터(J. Bellamy Foster)에 따르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사회관계에 의해 매개된다. 때문에 오늘날 환경위기는 근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악화되고 있으며, 더 근원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유지시키는 욕망과 서구 근대성의 악순환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은 사회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사회불평등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 하나는 남북 사이의 불평등이다. 1976년 세계은행이 저소득국으로 분류한 나라들의 1인당 평균소득은 고소득국의 2.4%에 지나지 않았다. 1982년 이것은 2.2%로 떨어졌으며, 1988년에는 1.9%로 떨어졌다. 다른 하나의 불평등은 남북 모두에서의 국내 불평등이다. 산업화이후 지금까지의 사회발전모델은 백인-남성-청장년-정상인 중심모델이었고, 특정한 사회의 가치도 이들에게 유리하게 배분되도록 구성되었다. 때문에 이 모델에서 배제된 소수자인 외국인, 여성, 노인 및 어린이, 그리고 장애인은 상대적으로 불평등을 겪어 왔다.

이러한 두 가지 불평등 현상은 자본주의 역사, 즉 내포적 축적과 외연적 축적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축적 방식의 전개과정은 축적의 본질적 성격에서 유래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분배 및 소비 양식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오늘날 부유한 나라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새롭게 구축하려고 하는 이유나 부유한 나라의 부유층들이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부의 축적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자본 간 경쟁 이외에도 끊임없이 새롭게 창출되는 욕망과도 무관하지 않다.

셋째, 앞에서 살펴본 사회적 불평등 구조는 또한 자원에 대한 통제권 및 소유권에 의해 유지되기도 한다. 심숀 비클러·조다단 닛잔에 따르면 자본 자체는 이미 사회적 관계를 재구조화하는 권력이다. 때문에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전쟁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 전쟁의 본질적 원인이 중동의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 및 석유자원의 생산 및 분배와 관련된 국제관계의 재구조화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한편 탈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제3 세계 곳곳에서 인종갈등이 폭증한 것도,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은 그 억제력이 제거되는 어디에서나 항시 분출되어 인종갈등과 같은 사회갈등을 야기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로 욕망과 서구적 근대성의 악순환은 인간소외 및 자아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네 가지 형태의 인간소외가 야기됨을 언급한 바 있다. 노동력(인간)의 상품화,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유적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소외현상은 상품 혹은 화폐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중시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간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주술적인 힘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인간은 주술적인 힘을 갖는 화폐, 즉 화물신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자기 소외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고도화됨에 따라 이러한 물신화 과정은 삶의 전 영역으로 전일화되어 간다. 자본주의의 고도화 과정은 토지와 노동력뿐 만 아니라 지식, 예술, 교육 및 서비스 영역까지도 모두 상품화해 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는 인간의 정신적 생활이나 영역까지도 물질화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점점 더 공허함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더욱더 물질적 소비에 탐닉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져 든다. 이러한 악순환이 물질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 즉 자아상실로 귀결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아가 이러한 악순환이 문화적 제국주의를 동반하면서 전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이상의 한계는 한마디로 욕망(The more)과 서구적 근대성(The more)의 악순환으로 인한 한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보다 낮추고(The less) 그리고 서구적 근대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진보의 모델(The less)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3.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

1) 발상의 전환: 악순환에서 선순환으로

어떤 두 요인 사이의 인과 사슬이 인간에게 점점 더 큰 해로움만 가져다 주는 것을 악순환이라 한다면, 동일한 논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인간에게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을 선순환(혹은 호순환)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순환을 선택해야 함은 자명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욕구 실현의 가치, 근대성의 발전, 그리고 그 두 요인 간의 인과사슬이야말로 인간에게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 즉 선순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를 악순환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이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기존의 상식이나 편견에의 도전을 요구한다. 때문에 우리는 선순환을 새롭게 조작적으로 정의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행위적 차원의 특정한 가치와 사회구조적 차원의 특정한 사회체계의 인과연쇄가 사회적 배제 없이 보다 많은 인간에게 물질적 이익을 포함하여 삶의 행복을 가져다 줄 때, 그 인과연쇄를 선순환이라 정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른다면, 소수 집단의 물질적 이익 이상을 담보해 주지 못하는 욕망 추구와 근대사회체제 사이의 인과사슬은 더 이상 선순환이 아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배제된 집단에게는 최소한의 욕구 충족도 어렵게 했던 전근대적 가치와 전근대적 사회체제 사이의 인과연쇄도 선순환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에서 추구하는 선순환의 경험적 사례는 근대사회에서는 물론 전근대사회에서도 흔히 찾아보기 어렵다. 최소한 시공간적 특수성을 지닌 서구 근대의 경험이나 아시아적 가치론에서 전제하는 경험적 사례도 우리의 선순환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선순환은 당위적(규범적)으로 재구성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일종의 모델이자 본보기이다.

선순환 모델의 재구성 전략은 이렇다. 첫째, 삶의 행복을 개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특정한 개념으로 특정화하는 순간 그러한 목표달성의 불가능성 혹은 그러한 조건은 곧바로 불행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2) 둘째,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적 조건 속에서 실천 가능한 전략으로써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조건들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이다. 셋째, 그리고 그 실천 방법은 행위적 차원과 구조적 차원에서 동시에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그리고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찾기란 어렵다. 다만 우리는 행위적 차원에서는 불교의 중도적 실천이, 그리고 사회구조적 차원에서는 근대사회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구성 원리를 추구하는 각종 공동체운동이나 세계시민운동 등이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에 비교적 근접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중도적 실천은 근대사회의 체제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조건을 형성해 나가는 데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사회운동은 개별 행위자의 실천을 동기화하는 데 있어서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힘이 약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규범적인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 모델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2) 불교의 욕망 방정식

존 브룸필드는 서구 근대의 진보를 일종의 망상이라고 비판하고, 양자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덴마크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Niels Bohr)의 사례를 들어 다른 문화를 통해 그 한계를 돌파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문화적 선입관을 만드는 거울로 이루어진 방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고, 무언가를 찾고자 이 거울을 응시하지만 되돌아오는 문화적 이미지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보어는 다른 문화의 철학이 이 거울을 투시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과학적 정신이 비서구문화로부터 개념적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서구 근대의 욕망 방정식과 가장 먼 대척점에 불교의 욕망 방정식이 자리하고 있다. 서구 근대의 욕망 방정식이 끝없는 욕망의 충족을 지향하고 있다면, 불교는 욕망 그 자체의 지양, 최소화, 그리고 지멸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욕망이야말로 고(苦)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교의 욕망관은 연기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연기사상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상호 조건적 존재일 뿐이다. 때문에 모든 존재는 무상하며 자아라고 할 그 어떤 실체도 없다(무아). 인간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존재론에 따르면, 연기의 법칙을 무시하고 배타적 자아 개념 혹은 개별적 자아개념에 기초하여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은 우리의 욕망을 더욱 자극할 뿐이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욕망의 불을 끄는 방법, 즉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의 가장 기본적 교리인 사성제이다.

사성제의 궁극적인 귀결은 물론 도(道), 즉 고(苦)를 없애는 길이다. 그 길이란 바로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3) 이는 동시에 중도(中道) 실천의 길이다. 팔정도에서 올바르다는 것(正)은 곧 극단적 금욕(고행)과 극단적 탐욕(쾌락)의 중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붓다가 발견한 길이자 불교적 수행(실천)방법의 독특한 특징이다. 물론 이러한 팔정도에서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로, 정정진, 정념, 정정은 정(定)으로, 정견과 정사유는 혜(慧)로 다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계정혜 삼학이 비구계 수지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팔정도를 모두 통과하면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할 수 있는 비구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팔정도의 단계를 모두 통과하면 중도의 길을 모두 통과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는 욕망의 불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대중들이여! 모든 고통은 사물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극복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길에서 우리는 지혜와 집중을 얻기 위해서 계율을 따라야 합니다.…… 모든 고통은 우리가 지혜에 이를 때 극복됩니다. …… 계율, 마음의 집중 그리고 지혜의 길이야말로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개인의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물론 팔정도가 이미 그 자체 속에 자비의 실천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것마저도 개인적 차원의 행위론적 의미를 가질 뿐 사회구조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집합적 실천은 아니다.4) 비록 틱낫한이 행복의 존재조건(외적 조건)의 중요성을 언급하지만 그것의 해결책을 마음 다함(mindfulness)을 통한 자비의 실천에서 찾고 있다.

반면에 세계 참여불교운동을 이끌고 있는 술락시바락사는 직접적으로 자본주의적 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틱낫한의 수행중심의 운동과 대비된다. 다시 말하면 틱낫한이 행위론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면, 술락시바락사는 사회구조의 극복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틱낫한은 수행자로서 불교의 전통성에 기초하여 개인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수행 중심의 불교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반면에 술락시바락사는 불교의 전통성에서 벗어나 사회구조의 변화를 모색하는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대비에서 알 수 있듯이, 행위자가 중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사회적 조건이 요구된다. 사회경제활동에 있어서는 교호성의 원리가 지배적이고, 정치적으로는 배타적 자아의 극복은 물론 배제자의 참여가 가능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그리고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일상생활은 인간을 모든 자연(대상)의 일부로 간주하고 실천하는 생태학적 삶 등으로 구성된 사회조직 원리야말로 중도실천의 적합한 조건을 창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 중도사상과 탈근대성의 친화성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중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맥락은 근대사회의 모델을 넘어선 또 다른 사회모델이다. 때문에 이러한 사회모델은 근대사회 구성의 사회사상적 토대였던 계몽사상 즉 근대성을 넘어선 새로운 사회사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한때 우리사회에서도 풍미했던 탈근대사회사상(포스트모더니즘)이 이성과 합리성에 토대를 둔 서구 계몽사상을 계승하는 근대성(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이자 대안적 사상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탈근대성과 어느 정도 친화력을 지니고 있는가?

불교와 탈근대성 간의 친화력은 탈근대성의 정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여러 사상가들과 불교사상 혹은 중도사상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고 있는 학문적 성과의 축적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다. 우선 가톨릭 사제이면서 불교연구가이기도 한 로버트 매글리올라(Robert Magliola)는 용수의 중관사상과 대표적인 탈현대사상가인 데리다의 해체사상이 매우 유사함을 보여 줌으로써 불교사상과 탈현대사상이 매우 친화력을 지니고 있음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그 후 데이비드 로이(David Loy)가 데리다의 해체사상이 용수의 중관사상과 유사하지만 동일성의 부정에만 집착함으로써 동일성과 차이성의 동시적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는 용수와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메글리올라를 비판한 바 있고 최근에는 헤롤드 코와드(Harold Coward)가 로이의 견해에 가세함으로써 용수와 데리다 사이의 사상적 친화성과 차이는 더욱더 풍부하게 연구되어 가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김형효가 또 다른 탈근대사상가인 하이데거와 화엄사상 사이의 사상적 친화성과 차이를 방대한 저술을 통해 자세히 밝혀 준 바 있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차이까지도 자세히 밝혀줌으로써 불교사상과 탈근대사상 간의 친화성 문제는 이미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은 주제가 되었다. 게다가 박경일은 탈근대사상의 태두인 니체는 물론이고 데리다, 하이데거, 그리고 심지어 사회학자인 푸코까지도 불교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제 불교와 탈근대사상이 사상적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점차 확고해지고 있다.

물론 불교사상과 탈근대성 사이의 친화성이 철학적 측면이나 사상적 측면에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록 구체적인 경험적 연구가 축적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불교사상이 생활 속에서 구현되거나 표상된 것, 즉 불교문화 전반에서도 우리는 불교사상과 탈현대성 사이의 친화성에 대한 근거를 무수히 제시할 수 있다. 어쩌면 불교와 근대성 사이의 비친화성 및 갈등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경험들도 불교와 탈근대성 간의 친화력을 방증하는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불교의 중도사상이 탈근대성과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중도사상이 근대를 넘어선 또 다른 사회구성, 즉 ‘또 다른 진보’의 이념적 토대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함5)과 동시에 그러한 사회와 친화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문제는 중도적 삶의 실천과 친화력을 지닌 대안적 사회를 실험적 차원에서라도 구체적으로 제시해 내놓는 일일 것이다.

4) ‘또 다른 진보’의 본보기와 선순환의 가능성

‘저발전의 발전’ 테제로 유명한 대표적인 종속이론가 프랑크(Andre Gunder Frank)는 최근 저서 《리오리엔트(ReOrient)》에서 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 만들어진 사회이론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이론들은 ‘프로쿠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였기 때문에 서구 근대 이외의 역사와 현실은 심하게 왜곡되었으며 오히려 지금까지 인류문명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이란 저서로 유명한 칼 폴라니에 따르면 18세기 거대한 전환 이후에 나타난 시장경제체제, 즉 경제외적 사회관계로부터 독립된 시장경제체제는 인류역사상 유일한 예외적인 경제체제였으며, 오히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호혜’와 ‘재분배’라는 비경제적 사회관계가 시장경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서구 근대의 경험을 역사발전의 보편으로 간주할 근거는 완전히 사라진다. 존 브롬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인들은 실제적인 윤리도 내적인 견실함도 없이 사물을 탄생시키며, 그 안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속화된 진보, 발전만을 추구하는 진보, 숙고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그것을 헛된 구호로 채우는 진보는 전혀 진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을 기만해 절망에 빠뜨리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새로운 진보이론의 구체적인 모색으로 연결시키는 데 성공한 학자가 바로 세계적인 발전이론 연구자로 알려진 헤트네(Hettne)이다. 그는 아프라카, 라틴아메리카 등 세 세계(Three world)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또 다른 사회이론을 전개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적인 발전 실태를 보면, 전 세계인구의 60%는 경지침체, 주변화, 그리고 가난으로 특징지워지는 주변인이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대안적 발전이 모색되어야 하는 실제적인 드라마’이다. 대안적 발전론은 발전 드라마의 승리자보다 보이지 않은 수많은 희생자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배제된 자의 시각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제하에, 그는 지금까지 제기된 대안적 발전론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포함한 대안적 발전이론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 기능주의의 대안으로 공간적 영토주의원칙,6) 둘째 표준화된 근대화의 대안으로 문화적 다원주의적 원칙,7) 셋째 성장주의와 소비주의의 대안으로 생태학적 지속성의 원칙. 이러한 원칙에 따를 때, 세계관의 차원에서는 비주류 세계관을 부활시키고, 경제적 차원에서는 교호성의 원리에 따라 경제생활을 제도화하고, 마지막으로 정치적 차원에서는 왕 중심의 제1 정치체제나 부르주아 계급 주도의 제2 정치체제가 아닌 배제된 자의 참여를 포함한 시민 중심의 제3의 정치제제를 정치활동의 조건으로 성숙시킬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가는 세 세계(Three world)인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현실을 보면 이러한 대안적 사회체제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것은 두 가지 쉽지 않은 문제 때문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이 서구 지향적 가치관으로 변화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의 문제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연관되기 때문에 자연발생적 저항세력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근대적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별도의 행위 지침이 요구된다. 때문에 ‘또 다른 진보’라는 대안적 사회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행위자인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에 중도와 같은 행위 지침이 내면화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4. 결론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 모델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는가는 이 글의 관건이다. 해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에 기초하여 ‘욕망과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선순환 모델을 구성할 수 있는 두 가지 차원, 즉 행위론적 차원과 사회구조적 차원을 검토해 보았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가 추구하는 목표가 GNP로 대표되는 물질적 성장이 아니라 삶의 행복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삶의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조건에 있어서도 두 가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회적 배제의 극복, 사회적 교호성의 증대, 친환경적(생태적) 생활 등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행위론적 차원으로서의 중도와 사회구조적 차원의 ‘또 다른 진보’는 서로서로가 보완될 때 보다 실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최소한 ‘욕망과 근대성의 악순환’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대안적 모델로서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 모델을 규범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재구성 가능한 것으로 일단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모델의 설득력은 이론적 차원에 있지 않고 실천적 차원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델의 설득력은 이러한 가설적 모델이 실천적 차원에서 얼마나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양적인 수치로 정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욕망과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혹은 지양하고 있는 삶의 양식들은 실제로 무수히 많다.

실제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수억 명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은 욕망과 자본주의의 악순환과 무관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을는지 모른다. 물론 한국사회의 경우에도 한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욕망과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지양하려는 사회운동들도 매우 다양하다. 오늘날 전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각종 반세계화 운동이나 방글라데시의 그라멘 은행의 사례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불교의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 모델에 적합한 대표적인 사례만 꼽더라도 라다크 프로젝트의 사례, 술락 시바락사의 참여불교 사례, 틱낫한의 플럼빌리지의 사례 등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에 가까운 삶의 양식은 지속적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반세계화 운동이나 불교사회 운동의 사례는 아직도 일종의 실험일 뿐이며,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실험들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욕망과 근대성의 악순환이 우리의 미래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하는 한, 대안 찾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안 찾기가 계속되는 한, 대안적 모델이나 대안적 사회운동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도와 ‘또 다른 진보’의 선순환 모델이 우리의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유승무

한양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사회학 박사.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불교사회학의 성립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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