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1. 친일파 처리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아간다. 지하철이나 만원 버스에서 남의 발등을 밟는 작은 실수에서부터, 한 사람의 부주의로 인하여 큰 재앙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알고 한 잘못이건, 모르고 저지른 잘못이건 간에 모든 잘못이 쉽게 용서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로 인하여 입은 피해를 보상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정상적인 해결방법이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는 그로 인하여 발생한 사태에 책임의식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잘못을 범한 사람이 도리어 화를 내고 큰 소리를 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드물지만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당황스럽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다. 우리 현대사에서 친일파 처리도 이렇게 곤혹스러운 문제가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서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 경기도 일대에 보유했던 땅이 무려 95만 평이나 되며 시가로 수 조원에 달한다는데, 그 후손이 땅을 찾기 위해서 소송을 제기하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며 그 땅이 어떻게 그들의 소유가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 넘기기 위해서 경쟁하였던 사람이며, 나라를 판 대가로 일본 정부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은사금을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과 산림령 그리고 임야조사령을 시행한 결과 전국토의 40%에 가까운 토지를 임자 없는 땅으로 판명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을 동양척식회사에 넘기고 또 헐값으로 친일파들에게 불하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나라를 파는 데 협력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전국에 걸쳐 많은 양의 땅을 매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해방을 맞이하여 60년이 지난 지금 그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수 조원에 이르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자손들이 조상의 부끄러운 행적을 반성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 땅을 찾아서 부를 누리겠다는데 있다. 실제로 이들은 법원에서 승소를 하여 상속권을 인정받아 그 많은 토지 가운데 일부를 되찾는 데 성공하였다. 재야 단체에서는 소급입법을 해서라도 이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법률적으로 그것이 쉽지 않은 듯하다.

작년 연말에 국회는 우여곡절 끝에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원안이 시행되기 전에 국회에서 개정안을 의결한 드문 경우이다. 개정안의 특징은 원안에 비해서 범위가 포괄적인 반면에 진상조사는 신중을 기하도록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친일’이란 표현이 ‘반민족행위’로 바뀐 것 또한 주목을 끌고 있다. 친일파는 그 개념이 광범위하다.

19세기 말 조선이 열강 세력의 침략에 시달릴 때 개인의 입장에 따라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라는 정치세력이 존재했었다. 흔히 우리가 친일파라고 부를 때 친일의 개념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자와 일제시기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던 자를 일컫는다. 친일파가 처벌되어야 하는 까닭은 국가가 수난에 처해서 동족이 고통을 받을 때 그들은 일제와 타협해서 식민지 통치정책을 충실히 따르며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민중을 수탈하였으며, 35년간 식민지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아서 이들은 마땅히 처벌되었어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친일파가 처벌되지 않은 까닭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민족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외세의 힘으로 민족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해방공간에서 미군정 시기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민족의 염원인 친일파를 숙청하기보다는 그들의 통치 편의를 위해서 일제시대 관리들을 해방공간에서 그대로 재임용하였다. 미군정으로부터 제1공화국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신탁통치안을 놓고 좌익과 우익이 분열되어 극심한 혼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친일파들은 반공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은 국내 세력 기반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주축으로 구성된 한민당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서 내각을 구성하였다. 제헌국회는 친일파가 다수를 점령하였지만 항일세력을 중심으로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을 통과시켜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마련하였지만, 친일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결국은 유야무야로 끝나게 되었다.

이 글은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광복을 맞은 지 60년이 되는 시점에서 친일파 문제를 점검해 보고 불교계의 친일승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일제시대 불교계는 어떤 친일 행각을 하였을까

친일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왜 친일파가 친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친일의 동기를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친일 동기를 해명하는 것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리화시켜 주자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당시에 친일이 아니고는 생존할 길이 없었는가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제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그 어려운 시기를 살았느냐는 오늘날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일제시대 불교계의 친일 행위은 일본의 식민통치 정책과 직결되어 있다. 통치정책의 강도가 이완되면 상대적으로 항일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탄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친일세력의 활동이 두드려졌다.

1910년 이전의 친일과 1910년 8월 나라가 망한 이후의 친일행위는 성격이 다르다. 1910년 이전의 친일파의 행동은 나라를 일본에 넘겨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활동한 몇몇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부국강병을 실천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일본의 선진문물을 배우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승려로는 이동인과 탁정식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본 선진문물의 실체를 파악하고 조선을 부국강병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개화기에 일본의 문물을 배우려고 하였던 사람들의 활동은 1930년대 중일전쟁 이후의 노골적인 친일행위와 동일하게 평가하여서는 곤란하다. 그들이 활동하였던 시기의 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 주도세력들의 후원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서 서구의 이론과 현실을 소개한 책들을 가져왔으며, 문명의 산물들을 도입해 오는 역할을 하였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 승려로 손꼽히는 한용운도 1908년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동종 대표들을 만나고 일본의 현실을 살피고 온 적이 있다. 근대 초기에 일본을 다녀왔던 승려들이 일본문화를 동경하고, 상대적으로 조국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해서 이것을 친일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행적에서 나라를 일본에 넘겨 주려는 의도 같은 것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행적은 나라가 망한 이후 조선총독부라는 식민통치 기구가 설치되고 난 다음에 전개되는 친일행위와는 구별되어져야 한다.
불교계의 친일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1910년 8월 이후에 전개된다.

1911년 6월에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사찰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찬양한 승려들이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사찰령은 통제 일변도의 법령으로 불교계의 숨통을 죄는 악법이었다. 불교계의 일부 고승들과 불교학을 공부한 지식인들 가운데는 사찰령이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명맥이 끊어져 가던 불교계를 회생시킨 영약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는 본사 주지들도 있었다.

일제시대 본사 주지를 지냈거나 교단의 간부를 지낸 승려들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친일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본사 주지의 실질적인 임면권이 조선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본사 주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통치정책을 수용하여 불교도들에게 일본에 충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1910년대 불교계의 친일행각 가운데는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의 한 종파인 조동종과 연합시키려는 음모가 있었다. 이 음모는 대한제국 시기에 창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종단이었던 원종의 종정을 지냈고 근대 불교계의 대강백이라 불렸던 이회광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대체로 1910년대 불교계의 친일행위는 사찰령을 찬양하고, 우리의 불교 종단을 일본불교의 한 종파에 연합시키려는 음모와 관계되어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라는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경험한 일제는 1920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는 적극적으로 친일파를 양성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인 단체 활동을 허용하였다. 일본에 시찰단을 파견하고, 우수한 청년 학생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을 보내는 외곽 단체들을 만들 것을 종용하고 정책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러한 친일파 양성책은 조선의 승려와 불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일본문화의 선진성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일본불교에 동화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 우리 불교계에 수많은 대처승들이 생겨났고, 이것은 해방 이후 비구·대처승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불교계의 본격적인 친일활동은 1930년대 후반, 그러니까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에 전개된다. 이 무렵 일제는 소위 ‘대동아공영권’ 구축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서구의 영미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독립국가를 유지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불능론을 내세워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에 대한 회의를 조장하고 위협과 회유책으로 사상전향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은 고대부터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을 내세웠다. 그 이면으로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법’과 ‘조선사상범예방구금법’을 시행하여 민족운동가들이 독립노선을 포기하였더라도 재범의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정치범들에게는 형기가 만료되었더라도 예방구금소에 수용하여 계속 투옥시켰다. 불교계의 지도부 또한 이러한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에 회유되어 조선의 민중들을 전쟁에 참여시키는데 앞장섰다.

불교계는 일본 천황의 황은에 보답한다는 이름 아래 이른바 ‘황도불교’라고 지칭하였고, 일제가 모든 민중들을 전쟁에 참가시킨다는 ‘총후보국’을 표방하였다. 그리고는 승려와 교도들을 선발하여 전쟁터로 위문 사절단을 파견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행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승려들은 시국강연회에 참여하여 물자를 아껴 쓰고, 저축을 강요하는 연설을 하였다. 1940년에 일제가 조선 사람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불교계는 무료상담소를 설치하여 창씨개명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승려들이 거리를 돌면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시주를 받아 국방헌금으로 납부하기에 이르렀다.

1941년 태평양이 발발하자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수탈에 박차를 가했고, 불교계도 거기에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지도부는 태평양전쟁을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 야욕을 타도하는 성전이라고 외치면서 조선 사람들도 이 전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논설을 발표하고,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교단의 승려들과 교역자들 그리고 일반 신도들에게까지 국방헌금을 강요하였고, 그렇게 모금된 돈으로 군용기를 5대나 헌납하였다.

당대의 학승이라 불리던 권상로는 1943년 침략전쟁을 교리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성불(成佛)은 전승이다’ ‘계는 전투훈(戰鬪訓)이다’ ‘지계(持戒)는 국방(國防)이다’ ‘살생(殺生)의 범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우리 모두의 살 길이며, 전쟁의 승리는 종교와 모든 윤리 도덕에 우선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혜화전문학교의 교수로서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남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라고 강요하였다. 얕은 지식으로 불교의 근본교리 자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는 또 일본 정토진종 신도들이 집안에 봉안하고 있던 철제 불상을 헌납하였다는 기사를 읽고 전승을 위하여 교주의 성상(聖像)까지 내다 바친 일본인들을 용기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극찬하였다.

조선불교계도 전쟁 말기의 금속류 헌납운동에 호응하여 각 사찰에서 사용하던 범종, 바라, 징, 향로 등 금속류를 걷어 바쳤다. 불교계의 승려들이 쓴 친일 논설들을 지면 관계상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총무원장에 해당하는 종무총장을 지냈던 이종욱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논설을 발표하였다.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일본 천황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는 논조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모든 것을 걸고 전쟁에 광분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비참하였다. 식량이 부족하여 들판의 나물을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다 먹을 수밖에 없었으며, 학생들은 공부를 포기하고 기름을 얻기 위해 솔방울을 따려고 산으로 내몰렸다.

3. 해방 이후 친일승

해방을 맞이하여 지하에서 활동하였던 독립투사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해외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국내의 세력기반이 없었고 더구나 경제적으로 궁핍하였다. 친일파들은 여전히 부자였고,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친일파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갈수록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몹시 좁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쌓은 부를 가지고 세력기반이 약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독립운동가들이 구성한 정당에 정치자금을 지원하였다.

초기에 독립운동가들이 구성한 정당에서는 친일파들이 제공하는 정치자금을 거절하는 청렴함을 보였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강도는 엷어져 갔고 나중에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도덕성과 정통성을 상실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친일파들은 도리어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하였다. 거듭되는 좌우익의 분열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서 국회의 동의를 받아서 구성된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과 그 법을 집행하기 위한 진상조사위원회와 특별경찰대에 친일파가 기용되는 모순을 범하였고 점차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친일파로 지목되어 체포구금된 사람들 가운데는 보석신청을 하여 구금상태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상 친일파 청산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고 유아무야로 끝을 맺었다.

불교계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계종의 종무총장 이종욱과 교무부장 임석진, 서무부장 김범룡, 재무부장 박원찬 등의 간부들이 총 사직을 하였다. 그 다음날인 8월 18일에 결성된 조선불교혁신대회는 종무원을 방문하여 종단운영권을 인수하고 전국승려대회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9월 22∼23일에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서는 사찰령, 태고사법, 31본말사제도의 폐지와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설립과 각 도 교무원 설치, 13교구제 실시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종무총장이었던 이종욱에게는 3년간 승권정지 처분이 내려졌고, 해인사 주지를 지내면서 사명당 비석을 파괴하고, 이고경 스님을 옥사시키고, 임환경에게 옥고를 치르게 한 혐의를 물어 승권을 박탈하였다.

그러나 이종욱은 승권정지 기간에도 강원도 교무원장을 지냈고, 1950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1년 총무원장에 복귀하여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종욱은 1920년대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런데 친일을 한 경력은 밝혀지지 않은 채 독립운동가로 평가되어 1977년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또한 일제시대 학승으로서 승려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였던 권상로는 1952년 초대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고, 1962년에는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남의 자식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죄과를 받아서일까.

그도 1950년 6·25전쟁 때 아들과 사위를 잃는 비극을 맛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을 마감하는 날까지 그의 친일행각을 반성하는 글은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그 밖에 일제시대 국방헌금을 헌납하거나, 군용기를 헌납하는 현장에 참석하였던 불교계의 허영호, 임석진을 비롯한 간부진들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내거나 총무원장을 역임했는데, 이처럼 친일행각은 베일에 가려지고 해방 이후에도 그들은 영화를 누렸다. 친일승 가운데 그 누구도 해방을 맞이하여 자신의 행각을 반성하는 자가 없었다.

4. 이제 친일승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친일파 당사자들 대부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이제 곧 죽음을 앞둔 고령이다. 이들에게 형벌은 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니고, 이미 그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다. 친일파는 일제시대 민중들의 이렇게 비참한 삶과는 달리 동족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대가로 호의호식을 하였고 자식들을 일본에 유학시켰다.

그 자식들이 귀국하여 장관에 기용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되었으며, 국회의원이 되었고, 대학 강단에서 교수로 활동하는 등 사회지도층이 되었다. 친일파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려면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친일파의 후손들이 건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앞으로도 영화를 누릴 것이다. 친일파들이 세상을 떠났다고 그들의 행적마저 묻어 버린다면 고귀한 생명을 바쳐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역사에 친일파의 행적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친일파의 후손과 제자들은 지금까지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국회에서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 통과될 때도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법안이 누더기가 되어 시행도 되기 전에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평가는 엄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먼저 항일운동을 한 경력이 있지만 후에 변절하여 많은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지 못하고 훼절하여 저질렀던 그 행적을 그대로 밝히고 그 죄를 물어야 한다.

친일파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행적마저 묻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를 기만하는 것이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처벌은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행적은 낱낱이 밝혀 세상에 공개하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영원히 전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거짓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국립묘지에 묻혀 있거나 포상을 받은 사람들의 행적을 밝혀 국립묘지를 정화시켜야 하고, 서훈을 박탈하여야 한다.

불교는 용서를 최대의 미덕으로 여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그 원한은 영원히 종식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용서를 하려면 먼저 그 조건이 성숙되어져야 한다. 친일승들은 대부분 처자식을 가진 대처승들이었다. 그들의 후손과 제자들은 아직까지 건재하며, 불교계의 고승으로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용서의 조건을 만들지 않는 한 친일승을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친일행위를 한 당사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완용이나 송병준의 후손처럼 파렴치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겸허하게 조상과 스승의 친일행위로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통하여 조상들의 죄과를 반성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불교계 또한 친일승들의 행각을 참회하는 반성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친일승으로 인하여 고통 받은 사람들과 사랑하는 남편과 부모 그리고 자식을 잃은 많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 줄 수 있는 합동위령제를 올려야 한다. 물론 일제시대 불교계에는 친일승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친일승들의 행위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듯이 이 부분에 관해서도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불교계는 교단차원에서 한시적으로라도 전문 학자들을 위촉하여 친일행적 진상을 조사하고, 독립운동의 공적을 현창해야 한다. 이 일은 시각을 지체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어려워지고, 부담이 가중된다. 이러한 일이 원만히 이루어졌을 때 불교계는 친일승 시비로부터 다소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

김순석

고려대에서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으로 박사학위 취득. 《일제 잔재 19가지》 《친일변절자 33인》 등 친일문제 전문지 편집위원, 고려대·순천향대·공주대 강사, 독립기념관 연구원.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주요 논문으로는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과 조선불교계〉 〈3·1운동기 불교계의 동향〉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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