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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철학사상과 불교(2) / 김형효
김형효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 김형효 kihyhy@aks.ac.kr

4. 표지―문자학적 사유와 그 철학

파르마콘과 코라의 사유는 이 세상을 결국 책으로 보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아니라 텍스트로 보는 사유를 뜻한다.

텍스트로서의 세상은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을 상대주의적 시각으로 보도록 종용하는 것이 아니고, 상관적인 상호연루(co-implication)의 얽힘으로 읽어야 함을 말한다. 이런 상호연루의 법칙으로 읽는 세상을 데리다는 또한 표지-문자학적 사유(la pense큖 grammatologique=grammatological thinking)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표지-문자학이나 표지-문자학적 사유를 단순히 글자(la lettre)를 주제적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학문은 역시 문자 중심주의를 초래하는 것으로 잘못 미끄러진다. 표지-문자학적 사유는 바깥과 안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사유다.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의 대립을 무시해 버리는 그런 사유다. 표지-문자학은 어떤 의미의 구성과 창조를 위하여 무의미를 배제하고 의식의 엄숙한 결단으로 몰입하는 그런 형이상학이 아니다. 표지-문자학은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놀이(le jeu=play)의 심정으로 이 세상을 관조하는 그런 자세와 상통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유는 만상이 어떤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고, 서로 거래관계처럼 오고가는 사이이고, 주고받는 포트랏치(potlatch)처럼 증여(le don=gift)와 반(返)증여(le contre-don=counter-gift)의 놀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지-문자학은 의식학과 자아학을 우습게 여긴다. 표지-문자학은 진리가 존재론적 현존의 자기 동일성이라고 여기는 곳에서는 꽃피지 못한다. 그런 진리는 곧 목소리가 영혼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발상과 유사하다.

문자-표지(l’e큓riture=writing)는 우리가 앞에서 거론하였듯이 말을 기록하는 좁은 의미의 글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문자-표지는 일부의 사람들이 말하는 글쓰기의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도 앞의 각주에서 밝혔다. 보통 데리다가 말한 문자-표지의 용어를 잘못 터득하여 ‘글쓰기’의 의미로 읽고 있는 것은 큰 착각이다. 문자-표지는 현존이 진리의 본질이 아니라, 흔적(la trace)이 진리의 다른 표현임을 이해하는 곳에서 가능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은 흔적의 관계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이 표지-문자학이다. 이런 문자-표지의 흔적과 흔적의 상호연루의 성질을 데리다는 또한 차연이라는 반개념(le contre-concept=counter-concept)의 용어로 표시한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차연의 반개념을 우리는 뒤에서 곧 설명할 것이다.

이 세상의 필연적 사실이 선험적으로 표지-문자학적 관계의 그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데리다는 또한 원흔적(l’archi-trace)이나 또는 원문자(l’archi-e큓riture=archi-writing)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글자도 문자-표지의 한 장르이지만, 그것이 문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을 통하여 알려진 소크라테스는 말이란 영혼의 순수한 표현이요, 문자는 그 말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죽은 대용품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영혼의 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영혼에 진리의 말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자가 말을 가능케 하는 근거라고 데리다는 언명하였다. 말을 통하여 일시에 모든 내용을 동시에 우리가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말은 영혼에 새겨진 것을 비동시적으로 언급해야 하는 차이의 접목에 다름 아니므로 말의 근거는 차이의 접목과 같은 비동시적인 것의 순차적인 표출과 같다. 비동시적인 차이의 표현은 곧 말이 문자의 생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표지-문자학이 인간의 어떤 로고스 학문보다 더 나이가 들었고 고어(la pale큢nymie=paleonymy)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문자-표지의 세계에서 시작과 새 것은 없고, ‘이미(le de큜a`=the al-ready)’와 얼룩진 것만이 있다. 문자로 보는 세상에서 폭력의 흔적이 없는 순진무구함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모든 것은 이미 다른 것에 의하여 감염되어 있고, 또 폭력의 상처를 입고 있다. 표지-문자학의 개념과 흔적의 의미는 같이 간다.

표지-문자학은 모든 것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고, 자기현존적 존재의 실체를 띠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문자학의 세계에서 보면 도대체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하여 절대적 집착을 견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의 소치에 해당한다.

이런 문자학의 사유를 데리다는 차연의 의미로 풀이하였다. 차연은 존재의 현존적 자기 동일성의 고집 대신에 모든 것이 서로서로 타자의 흔적으로서 상관관계의 연기법적인 연회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곧 차연의 의미를 숙고하겠지만, 좌우간 차연은 만상이 다 타자와의 만남에서 그 타자와의 인연으로 자신의 위상이 설정되고 설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연은 만상이 각각 타자의 흔적에서 자신의 위상이 결정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그런 차연의 연회가 만상의 개개적 사항보다 더 고어에 해당하고 시간적으로도 앞서는 선험적 바탕이라고 여기므로, 데리다는 이 차연적인 문자의 흔적을 원흔적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문자학적 원흔적이 현상학적 근원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고 본다. 이 말은 차연의 문자적 사유가 존재론적 현존적 사유보다 더 오래된 사유이고, 더 이 세상의 사실에 가깝다고 여기는 발상이다.

자기 동일성(self-identity)의 부정이 문자-표지의 의미와 상통한다면, 같음(le me늤e=the same)은 무엇이겠는가? 같음에는 자기와의 동일성을 지시하는 논리적 동일률이 적용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같음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identique=identical)는 그런 뜻일 수 없다. 같음은 다름(l’autre=the other)이 있기에 발생하는 연회에 불과하고, 역으로 다름도 같음이 대대법으로 마주하고 있기에 성립하는 연생에 불과하다. 따라서 같음은 다름이라는 짝에 대한 대칭적 명칭에 불과하고, 다름도 같음이라는 상대에 대한 기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같음을 다름의 다름(Le me늤e est l’autre de l’autre.=The same is the other of the other.)’이라고 규명하고, 또 ‘다름도 자기와 다르게 같음(L’autre est le me늤e autrement que soi.=The other is the same otherwise than self.)’이라고 명제화하였다. 만상이 이처럼 연회의 계기에서 성립하는 연생에 불과하다면, 만상은 같음과 다름이 서로 서로 차이 속에서 동거해 있는 그런 이중성의 위상에서 읽혀져야 한다. 차이와 동거가 만상을 해석하는 가장 간단한 언명이고 이 언명이 곧 로고스와 같은 말이 아니라, 파르마콘과 같은 문자-표지라는 것이다. 이중성의 파르마콘이 곧 문자-표지의 별칭이라면, 문자-표지의 형성은 반드시 이중성을 한 단위로 하여 이룩된다.

예컨대 종이 위에 물결무늬를 그린다고 해도, 그 무늬는 흰 바탕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기에 흰 바탕이 물결무늬의 타자인 셈이다. 흰 바탕을 배제한 물결무늬는 사상누각과 같다. 그런 점에서 물결무늬와 흰 바탕은 서로 상호연루되어 있고 공동 출두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결무늬와 흰 바탕 사이에는 서로 상보적인 가역작용이 성립한다. 흰 바탕이 없이는 물결무늬가 그려질 수 없고 물결무늬가 새겨짐으로써 흰 바탕이 이미 둘로 쪼개져서 두 면을 동시에 지시한다. 두 면을 차이로서 동거시킨다. 말-표현의 세계는 계시적으로 일회성으로 흘러 내려가서 공관적 사유(synoptic thinking)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자-표지의 세계는 이처럼 상호 가역적 순환의 반복이 가능해서 공관적 사유가 가능하다.

로마의 신화에서 야누스가 로마의 기원을 이룩한 시조의 신이며 또한 수호신으로서 얼굴이 앞뒤로 이중적이어서 서로 가역적 교차가 가능하고 또 평화 시에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고 전시에는 그 문을 열어 두는 것도 반복적 이중성의 상징이고, 그의 아들의 이름도 폰스(Fons)라 하여 샘의 근원을 상징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야누스의 신은 로마의 평화와 경제적 풍요와 도덕적 정직을 대변하는 신이어서 로마의 동전에 야누스의 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야누스적인 모습은 자연의 실상으로서 자연이 교역이고 교역이 평화를 보장하고 그것이 또 풍요를 가져 온다고 로마인들은 생각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중적이고 단일하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보고 그런 이중성의 인식이 풍요와 정직과 평화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사상을 담고 있다. 샘의 근원도 야누스의 아들과 관계하기에 결코 단일할 수 없다. 서양어로 정월을 뜻하는 ‘Janu-ary(Janvier/Januar)’는 야누스(Janus)에서 나온 용어다.

삶과 죽음도 차이와 동거의 이중성으로서 반복 가능한 가역적 공모의 상호의존적인 의타연성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죽음에 연기되어 있고 죽음도 삶에 연기되어 있다. 여름의 무성한 생명력은 부패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고, 겨울의 스산한 죽음은 안으로 감추어진 생명의 안온함에 공모되어 있다. 무덤은 삶이 죽음으로 연장되는 것을 뜻하고, 동시에 죽음이 삶으로 연기되는 가역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무덤은 인간에게 죽음이 최후의 종착역이 아니고 죽음에서 다시 삶에로 연기되어지기를 축원하는 인간의 소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무덤은 하나의 감치기(le surjet=whipstitching)의 경계선에 불과하다. 옷감의 천이 다시 다른 옷감과 천의 이음을 펼치려 하면, 옷감의 끝은 마침의 종료가 아니고 새로운 시작의 출발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연쇄의 이음이 텍스트의 본질이다. 그래서 텍스트는 텍스트의 연합(l’inter-texte)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그런 텍스트의 연합은 어떤 목적을 전제로 한 목적인의 의미로 읽혀져서는 안 된다. 목적인의 사유는 해바라기처럼 태양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텍스트로 비쳐진 세상에는 그런 최종적 태양이 없다. 모든 것은 상호간의 연회요 연생이기에 만물이 만물에 대하여 평등한 연루의 공생을 매듭짓고 있다. 그래서 그런 무목적의 세상활동을 데리다는 놀이(jeu=play)에 비유하였다. 놀이의 본질은 서로 서로 역할을 맡아서 그 역할의 계기를 대응해 주는 무상행위이다.

놀이의 세상에서 자아의식이 뚜렷이 부각되지 않는다. 놀이하는 아이는 자의식이 없이 다만 어떤 상관적으로 설정된 역할을 맡아서 임시적으로 대행할 뿐이다. 혼자 놀이를 하여도 마음에는 이미 상대가 정해져 있고 그 상대와 상관적 차이를 엮는다. 놀이를 하는 마음은 역할의 차이와 동거를 동시에 같음과 다름의 이중성으로 엮고 있기에 가능하다. 놀이하는 마음은 이 세상을 어떤 목적의식으로 통합하지 않고 그 마음도 세상의 포트랏치에 연루되어 함께 차연의 고리를 엮어 나간다. 세상의 차연적 오감과 함께 인간도 세상의 만상이 된다. 특별히 인간이 의식의 자가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차연의 주고받는 공놀이가 바로 다른 것들과의 인연을 맺게 한다. 그러므로 만상과의 인연의 그물망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 차연의 주고받음을 가능케 하는 중간의 빈 여백이나 사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차이의 여백(la marge=margin)은 경계를 말하는 표식(la marque=mark)이면서 또한 그 여백이 모순대립의 투쟁을 야기하는 싸움터가 아니고 서로 동거하기 위하여 왕래하는 통로의 행정(la marche=march)1)과 같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의 철학적 사유에서 여백과 표지와 행정은 같음과 다름을 갈라놓으면서 이어주는 다리나 산마루의 주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우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와 길과 주름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다리와 주름은 앞에서 설명한 코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파르마콘과 코라는 언제나 같이 성립한다. 왜냐하면 이중긍정의 파르마콘은 사이의 빈 공백과 같은 이중부정적인 코라의 배경 없이는 구조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불교적으로 가유의 의타연성과 진공묘유의 원성실성은 같은 사실을 다르게 표명한 것이다. 의타가성이 파르마콘이라면, 원성실성은 코라와 유사하다. 우리의 마음은 현상적으로 보면 의타기성이고 동시에 체성상으로 보면 원성실성과 다르지 않다.

데리다가 그의 《문자-표지와 차이(L’Ecriture et la diffe큥ence)》에서 “우리는 오직 씀으로써만 씌어진다(Nous ne sommes e큓rits qu’en e큓ri-vant.=We are written, only writing.).”라고 천명하였다. 문자-표지로서 우리는 능동이고 수동이다. 우리가 타방에 대하여 작용하는 힘인 한에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쓰고 있지만, 우리가 타방에 대하여 작용을 받는 저장고인 한에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씌어진다. 우리는 화엄학적으로 연기의 순환작용에서 유력(有力)이고 동시에 무력(無力)이다. 유력인 한에서 우리는 타자에로 진입하나, 무력인 한에서 우리는 타자로부터 진입당한다. 이 세상에 온전히 순수한 자가성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5. 낭만적이지 않는 보충대리의 세상사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와 루소의 철학사상을 검토 음미해 보기로 하자. 루소는 유럽의 현존적 존재론의 형이상학에 영향을 받아서 진리의 현존적 존재를 모색하는 데 그의 생애를 바치다시피한 철학자다. 그래서 그는 현존의 형이상학적 진리의 선봉에 서서 후설이 의도한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le-s’entendre-parler)’의 철학을 금과옥조로 신봉하였다.

그런데 그런 현존적 영혼의 생생한 진리를 찾으려 한 루소는 점차로 생생한 말의 현존은 죽음의 문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생각에 경도되었다. 말이 살아 있는 목소리에 비유된다면, 문자는 생기가 없는 죽은 표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문자가 단순히 생명의 바깥에 있는 우연으로 보기 어려움을 루소가 직감하였다. 나라는 인간이 죽기 시작했을 때에, 나는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난다는 역설을 루소가 감지하였다는 것과 저 말은 상통한다.

그런데 그 전에 말은 자연의 천부적 선물이고 문자는 사회생활의 필요성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작된 죽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루소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진리는 말의 생명 속에 실려 있지, 문자의 시체 속에 표현될 수 없다고 여겼다. 루소에게 자연은 선의 화신이고 문명은 악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자연이 선의 화신이라면, 인간은 자연의 아들, 딸로서 자연적인 것으로 충족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자연의 손으로서만 성장하지 않고 사회제도가 만든 교육의 도움을 받아야 힘과 지능을 구비하게 된다. 자연의 선이 사회의 악에 의하여 보충대리 되는 셈이다.

따라서 자연의 현존과 선이 문명의 인위와 악에 의하여 보충대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루소의 철학을 새롭게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에 의하여 이 사회에 악이 도입되는데, 역설적으로 그 사회의 손에 인간이 키워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는 현존적 철학의 주장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동시에 낭만적 사랑의 지순한 감정도 성욕과 같은 폭력적 에로티시즘에 의하여 오염되고, 뒤섞여 있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부드러운 정감적 사랑의 낭만도 성욕의 음심을 배제하기 힘들고, 더구나 음심과 동거해 있어서 사랑과 음욕이 서로 보충대리 되고 있다는 느낌을 보았다. 그리고 사랑과 음욕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서로 동거하고 있는 차연의 관계라고 어렴풋이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낭만적 현존의 아름다운 행복의 달성이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 아닐까 그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는 《참회록》을 쓰면서 어떤 어긋남의 경험을 갖게 된다. 그는 진실한 자기의 과거 잘못을 만인에게 고백하려고 책을 쓰는데, 그가 현재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은 순수하게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조금 전의 근접 과거의 것에 대하여 그가 거리를 두고 한 번 반추해 보는 격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고로 현재진행형은 현재진행하고 있는 것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근접 과거의 것에 대한 반성에 지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그 근접 과거의 것에 대하여 그가 감추고 숨기고 싶은 것과 진솔하게 털어 내놓아야 하겠다는 것과 또 약간 미화해서 말해야 하겠다는 생각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복합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저 모든 것이 뒤섞인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는 목도하게 되었다. 현재는 결코 단순하게 일 점 근원처럼 순수하지 않고, 그런 현재는 존립하지 않다는 것을 루소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하게 낭만적으로 ‘자연=근원=본연=선’ 등이 같은 계열로 묶이고, 또 ‘문명=허위=오류=타락=악’ 등이 또 다른 계열로 동질화되어 서로 오염되지 않는 순수성을 각각 유지하지 않음을 통찰하였다.

그는 자연적인 것이 현존적이고 그것이 인간의 모성애과 같은 정감적인 느낌으로 이어진다고 옛날에 여겼다. 가장 자연적 정감은 동정심(la pitie?pity)이라고 여겼다. 그 동정심의 숭고한 감정도 이미 그 안에 남에 대한 정감적 우월감의 쾌감이 뒤섞여 활동한다는 것을 그는 또한 직시하였다. 이것은 마치, 자기사랑(l’amour de soi=self-love)의 순진무구한 감정이 이미 대타의식적인 자존심(l’amour propre=self-conceit)의 악의적인 비교감정과 같이 동거하고 있는 현상과 유사하다 하겠다.

자기사랑도 순진무구하나 또한 이기심을 늘 뒤로 감추고 있고, 자존심도 악의적인 대타의식의 허세를 띠고 있으나 또한 비굴의 악덕을 방지하는 긍정적인 요인도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이 파르마콘처럼 이중적인 것을 한단위로 하고 있는 양면적 얼굴의 야누스와 같다. 또 남성적인 이성(la raison=reason)과 여성적인 수치심(la pudeur=shame)은 ‘보충대리의 보충대리(le supple큟ent au supple큟ent=the supplement to supplement)’로서 이중적인 보충대리의 작용을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것이 자연이 준 약이라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남성이 범하기 쉬운 폭력적인 것과 방만한 것에 대한 치료적 보충대리의 역할을 한다. 그것이 사회가 제공한 약이라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남성이 지으려는 열정의 과격함을 중화시키는 치료적 보충대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수치심이 자연적인 약이라면, 역시 그것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짓는 교활한 유혹을 막는 치료적 보충대리일 수 있고, 그것이 사회적인 약이라면 그것은 자연이 여성에게 준 감정적 환상에 대한 치료적 보충대리일 수 있다. 이처럼 이성과 수치심은 자연적이든 사회적이든 각각 사회적인 악과 자연적인 악에 대한 치료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보충대리의 보충대리라는 이중적 보충대리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루소는 자연적인 것은 오로지 선이고 사회적인 것은 오로지 악이라는 그런 택일적 일원론의 사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점차 생각하게 되었다. 또 그는 점점 모든 것이 파르마콘과 야누스처럼 일원적 진리의 개념으로 정돈되지 않는 세상의 사실을 보게 된다. 일점 근원의 진리를 찾으려 하는 마음은 낭만주의적 꿈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세상은 낭만적 현존의 형이상학의 질서로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모든 낭만주의는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루소는 굳혀 간다.

언어의 기원도 루소는 처음에 일점 근원의 한 점 시작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루소는 언어의 기원을 탐구하는 도중, 말과 목소리의 현존처럼 자가성의 일치를 구가하며, 낭만적 선율의 열정적 언어활동에 의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감탄과 언어활동이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런 사랑의 고백이 노래로 변하고 그 노래가 선율의 멜로디를 탄다고 그는 상상했다. 그러나 루소는 언어활동이 사랑의 낭만적이고 열정적 고백과는 무관하게 생물학적 생존의 현실적 필요에 의하여 요청되는 이성의 냉엄하고 정확한 분절의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지각했다. 그래서 전자의 언어활동은 남방적인 낭만적 사랑의 언어활동이고, 후자적인 언어활동은 비낭만적인 생존과 필요의 언어활동으로서 노래가 아니고 사실의 기술이 중요한 언어의 요체라고 보았다. 이것은 북방적인 사실적 언어활동에 해당한다.

그래서 언어활동도 남방적인 낭만적 언어활동과 북방적인 필요상의 언어활동으로 보충대리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남방은 모음이 많은 언어활동이고, 북방은 자음이 많은 언어활동이라는 것이다. 음악이 낭만적 어조의 선율과 북방적 분절의 화음으로 보충대리 하듯이, 회화도 스케치인 선의 소묘와 살을 입히는 채색의 이중주라고 그는 언급하였다. 모든 것이 젓가락 운동처럼 그런 상호성으로 이 세상의 사실이 보충대리 되고 있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그래서 루소는 일점 근원의 낭만적 진리는 현실적으로 한 번도 구현되어 본 적이 없는, 시제가 없는 비현실적 문법에 유사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루소는 점차로 그런 낭만적 향수를 의심해 갔다. 보충대리의 법은 자기의 안과 타자의 바깥의 이분법적인 분류가 무의미하고, 보탬과 모자람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사유의 논리다.

모든 세상의 사실은 다 이질성끼리의 접목과 다르지 않으므로 이 세상에서 일점 근원처럼 어떤 외부의 영향이 없는 순수한 내면성의 왕국도 성립하지 못하고, 어떤 타자의 이질성을 배제한 동질성의 순종을 찾는다는 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잡종이다. 이 세상의 사실은 다 잡종이다. 만약에 데리다의 철학에서 신을 언급할 수 있다면, 그 신은 단지 놀이꾼(le joueur=player)에 불과하다.

보충대리(le supple큟ent=supplement)는 앞에서 우리가 거론한 차이와 동거의 이중성을 한 뜻으로 응집시킨 일종의 반개념적 성격이다. 그 반개념적 성격은 불일의 차이와 불이의 동거를 동시에 알려 주는 ‘이중적 이음줄’과 비슷하다. 하이데거가 로고스를 투쟁적인 것(Strittigkeit=st-rife)과 친화적인 것(Innigkeit=intimacy)의 이중성으로 해석한 것은 데리다가 말한 파르마콘과 유사한 성격을 지칭한다. 고로 데리다가 비판한 로고스의 자기일치의 공명적 진리는 데리다가 해석한 서양 전통적 로고스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그 로고스가 다르게 읽힌다. 존재의 의미도 하이데거에게는 생멸의 사건(Ereignis=event)으로 해독되기 때문에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영향으로 읽은 현존의 자기동일성(l’identite?de soi pre?sentielle=presential self-identity)으로서의 존재의 개념과 동일한 차원이 아니다. 따라서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현존의 철학자로 비판한 것은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의 오독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현존의 질서를 말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무의 본질현시(Anwesen=presence)로서 무가 자신을 증여하는 보시처럼 읽어야 한다. 또 무는 존재의 본질퇴거(Abwesen=absence)로서 존재가 자신의 뿌리에로 귀환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법성의 연회서의 유(존재)와 그 연회의 본성이 성공이라는 영가현각 대사의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의 유/무의 이중주와 닮았다.

6. 차연과 진리의 결정 불가능성

앞장에서 우리는 차연의 의미를 몇 차례 암시하였다. 이제 여기서 본격적인 설명을 시도할 차례에 이르렀다. 데리다의 철학은 차연의 철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차연의 개념은 차이(diffe큥ence)와 연기(연장, de큞ai=delay)의 두 뜻이 하나로 합쳐진 조어다. 그런데 불어에서 특이하게 차이(diffe큥ence)의 명사를 동사화하면 ‘diffe큥er’가 된다. 이 동사 ‘diffe큥er’는 ‘차이나다(differ)/연기하다(defer)’의 두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동사는 두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으나 명사에는 그런 단어가 사전에 없으므로 데리다는 그런 명사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차연으로 번역되는 ‘diffe큥ance’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차연이란 단어의 발음은 차이를 가리키는 ‘diffe큥ence’와 똑같다. 마치 하이데거가 차이를 뜻하는 단어 ‘der Unterschied’와 발음이 똑같은 단어 ‘der UnterSchi-ed’를 조어화하였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데리다가 말한 차연의 의미와 유사하다 하겠다.

보통 저 용어를 그냥 ‘차이(Unterschied)’와 같은 뜻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하이데거가 이유 없이 말장난하기 위하여 저런 용어를 만든 것이 아니다. ‘unter=inter’에다가 ‘schied’는 동사 ‘나누다(scheiden)’의 과거형인데, ‘Unter-Schied’의 용어에 가운데 줄(-)을 그은 것을 예사롭게 봐서는 안 된다. ‘Uner-Schied’는 사이에 나누어져 있는데 그 분절된 것이 다시 줄(-)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독일어에서 ‘Schiedsgericht’는 중재재판소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 차연의 성격을 하이데거가 이미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고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현존의 철학자로 비판하였으나, 기실 안으로 보면 두 철학자는 매우 흡사한 것 같다.

차연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반개념이다. 반개념이란 것은 일의적으로 의미가 통일되지 않고 적어도 이중적인 것이 하나의 단어에 필연적으로 게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차연은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이 일의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과 같은 ‘차이 속의 동거’ 관계임을 지시한다. 그래서 세상사는 단순하지 않고 아무리 단순하게 읽어도 모든 것이 적어도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중적인 ‘사이’가 가장 선험적인 요소를 띠고 있으므로 원흔적(l’archi-trace)과 원표지-문자(l’archi-e큓riture)로서의 차연이 가장 오래 된 고어라고 데리다는 설파한다.

차연의 관계는 두 가지의 이항적 대립보다 더 나이가 먹었고 오래 되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즉, 산은 계곡과의 차연관계인데, 산과 계곡이 생기기 전에 인간은 이미 표지-문자학적인 사유의 선험성에 의거해서 산과 계곡을 하나의 이항적 관계로 묶을 수 있는 그런 원흔적의 선험성을 사유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연의 사유방식은 시간과 공간을 칸트의 철학에서처럼 전자를 내적 감성의 직관형식으로, 후자를 외적 감성의 직관형식으로 나누어 두 가지로 쪼개는 이분법을 수용하지 않는다. 차연은 이분법이되 이원적인 이분법이 아니고 이중적인 이분법으로 세상사를 인식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여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그런 애매모호성으로서 세상을 읽는다. 공간과 시간도 그런 불일이불이의 관계로서 이해한다. 연기(le de큞ai=delay)의 개념이 시간적 대기(temporisation=tempori-zing)의 의미로서 사용되기도 하고, 또 공간적 간격(espacement=spacing)의 뜻으로 인식되어도 무방하다.

그래서 데리다는 ‘시간의 공간되기(le devenir-espace du temps=becoming-space of time)’와 ‘공간의 시간되기(le devenir-temps de l’espace=becoming-time of space)’로서 시간과 공간을 차연의 관계로 다발처럼 묶는다.

전후의 관계는 시간적 대기의 차원으로 읽어도 되고, 공간적 간격의 차원으로 봐도 무방하다. 또 역으로 전후를 시간의 간격이라고 봐도 좋고, 그것을 공간적 대기의 관계로 봐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차이만 나는 이물질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얽혀서 묶여지는 동거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시공은 하나의 차연의 관계로서 상호 연루되어 있고, 연좌의 법으로 묶여 있다.

시간은 공간의 성질로 찍혀 있고, 공간도 시간의 성질로 오염되고 있어서 모든 것은 자가성을 지우면서 타자를 가리킨다. 이런 차연의 모습을 데리다는 또한 능동과 수동의 두 양식을 다 함의하고 있기에, 그는 차연을 ‘중간태(la voix moyenne=middle voice)’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런 중간태는 불법의 상징인 만자(卍字)와 같고 수사학적 교차배어법(chias-me=chiasmus)에 비유되기도 한다.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으므로 의미상의 산종(la diss e큟ination=disse-mination)에 비유되기도 한다. 산종은 자기의 의미를 개념적 씨(la semence=seed)로서 여기지 않고 의미의 씨를 뿌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것에 분봉하여 흩어 버리기 때문에 주된 것과 종속된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의미로 생긴 용어다. 자가애정의 소유의식이 없으므로 산종은 자아의 자가성과 실체의식의 소멸과 상응한다. 무아의 철학이 결국 산종의 철학이고 차연의 철학이다. 본디 어원적으로 ‘씨’와 ‘의미’가 희랍어에서 상응하기 때문에 영어로 의미론을 씨앗론과 유사한 ‘semantics’라 부르고, 불어에서 씨를 ‘semence’라 하는데, 이 낱말은 희랍어로 인식의 표식을 뜻하는 기호(se-ma)에서 발단되었다고 한다.

산종은 모든 주체의 철학적 해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산종의 철학은 일체의 모든 내면성의 고유한 성역을 인정하지 않고 해체시킨다. 내면성은 주체의 철학이 의지하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간주된다. 산종과 차연의 철학은 의식의 주체가 신비스런 내면성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 양 여기는 자아의 우상을 파괴하려 한다. 데리다는 저서 《위상(Positions)》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내면성은 자기 바깥에 의하여 이미 가공되어 있고 내면성은 언제나 이미 자기 바깥에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내면성은 모든 표현의 행위 이전에 자기로부터 차이를 만들거나 지연시키고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항대립을 기본 논리적 철칙으로 삼는 구조주의가 해체적 차연의 철학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차연의 철학이 이항대립의 구조를 가능케 하기에 차연이 이항대립의 가능 근거로서의 ‘이전의 중용(le milieu ante큥ieur=mean anterior)’과 같다는 것이다.

이전의 중용은 심리학자 융이 말한 무의식적인 이항 대립의 ‘대대적 흐름(Enantiodromie=enantiodromy)’을 성사시키는 빈 간격이나 공간 또는 주름의 경계의 뜻과 유사하다. 이런 사이가 파르마콘의 이중긍정을 가능케 하고 동시에 코라의 이중부정을 성립시킨다. 차연이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을 가능케 하는 근본이므로 데리다는 그 차연과 산종을 ‘이전의 중용’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양면성을 가능케 하는 기본으로서의 차연과 산종은 이원성과 일원성을 다 지양하므로 불일이불이의 구조를 띠고 있기에 논리적으로 결정불가능성(l’inde큓idabilite?undecidability)의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이 이미 양자택일이나 양자용납을 불가능하게 하므로, 결정불가능성의 상징과 마찬가지인데, 거기다가 다시 이중적으로 긍정과 부정을 다 성립시키는 결정불가능의 결정불가능을 나타내므로, 차연의 철학은 확실하게 본질적으로 진리의 결정불가능성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결정불가능성은 이 세상사가 인간의 판단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사에서 인간이 목숨을 걸고 집착해야 할 도리도 없고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야 할 진리도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타인들에게 어떤 집착과 신념을 강요하기 위하여 타국이나 타인의 침략을 막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방어는 택일의 집착적 결정과 독재에 대한 자기 방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진리의 결정불가능성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정부적 방임주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진리의 불가결정론은 진리의 부재를 가리키는 허무주의를 뜻함이 아니고, 진리의 절대적 시원과 궁극적 목적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진리의 태양 중심주의적(heliocentric)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자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궁극적인 진리에의 집착은 전쟁의 존재론(l’ontolo-gie de guerre=ontology of war)을 동반한다고 레비니스가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하이데거는 이미 ‘철학의 종말(das Ende der Philosophie=the end of philosophy)’을 말한 적이 있다. 철학의 종말은 이 세상사를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심판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말과 동의어이다. 노자가 이 세상을 신기(神器)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인간의 정신에 의하여 장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과 같이 데리다는 ‘철학을 우스갯감으로 만들어 세상에 북을 쳐서 알리기(tympaniser la philosophie)’라고 표명하였다. 철학의 이념을 세상에 북을 쳐서 알려 그것이 얼마나 웃기는 헛소리인가를 공표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철학은 서양사를 통하여 현존적 존재론의 진리에 해당하는 일점 지향의 근원으로서의 태양처럼, 만물이 다 우러러보는 그런 빛으로 숭배되어 왔었다. 이제 데리다는 그런 숭배의식에 가득찬 철학의 이념을 해체하려 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결정불가능성의 세상사는 니체의 반전통과 반형이상학의 정신과 대단히 유사하다. 우리는 니체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 서양의 형이상학사는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적 영혼중심의 역사가 기독교의 신학을 만나면서 신 중심의 역사로 치환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중심의 역사나 신 중심의 역사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중세기에는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기에 신의 인간화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7세기의 데카르트에서부터 중세 신학이 근대의 인간학으로 방향전환을 이룩하였다. 그런 인간학의 절정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다. 이런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곧 인간학의 신학되기에 다름 아니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그런 인간학의 신학화를 실천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낭만주의의 극치에 해당하는 것 같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Gott ist tot=God is dead)’라고 외친 것은 인간학의 신학화되기가, 즉 인간의 신되기(apotheosis)가 결국 신을 죽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근대의 인간중심적 낭만주의가 신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통찰력이다. 니체는 철학의 낭만주의적 인간중심주의(신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이 세상사가 허무주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경고한 선각자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이 니체의 철학을 계승한 후계자다.

이 세상사가 다 타자의 흔적을 상감하고 있는 한에서 상처를 입지 않는 지순(至純)의 존재는 낭만적 공상의 세상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각도에서 이 세상사를 보면 ‘문명 자연’ ‘정신 물질’ 등의 택일적 이분법은 덧없는 형이상학에 속한다.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의 진리를 망치로 부수려고 하였다. 차연의 입장에서 보는 세상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인간에 의하여 판단되지 않는 여여한 세상의 사실을 말하는 것과 같다. 판단의 유보가 차연의 철학적 주장이리라. 차연의 철학은 이 세상이 너무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의미로 과잉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의미의 과잉은 허무주의를 생산한다.

그러면 이 세상을 무의미하게 방치하자는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다른 것과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형상이기에 하나의 가치판단으로 이 세상을 재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데리다에 있어서 모든 것은 존재(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의 존재자)가 아니고 흔적이므로 흔적의 위상은 최소한도로 모든 것이 이중성의 상감과 접목으로 융섭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 이중적인 것들을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 이중성은 각각 자기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고 그 자리를 지우는 그런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사가 일정하게 원인과 결과로 결정되지 않고 목적과 방편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시작도 종말도 없이 얽히고설킨 그런 새끼 꼬기의 연쇄와 같다. 따라서 하나의 의미를 극대화할 수 없고 생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회전운동의 바퀴와 같을 뿐이다.

데리다가 가끔 해체의 세계를 알리기 위하여 ‘ellipse(타원/생략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타원(l’ellipse=ellipse)은 평면 위의 두 점으로부터 생기는 거리의 합이 항상 일정하게끔 움직이는 한 점의 궤적을 말한다. 생락법(l’ellipse=ell-ipsis)은 문장 상에서 생략되어 언외의 뜻이나 여운이나 암시를 독자가 파악하게 하는 수사법을 뜻한다. 즉 차연처럼 이 세상의 세상사는 두 점의 ‘차이’로부터 생긴 거리의 합으로서의 ‘동거’가 언제나 일정하게 형성하는 ‘차이와 동거’의 이중성과 같기에 데리다가 그것을 타원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차연의 타원은 일점 중심을 갖고 형성되는 같은 궤적의 원과 다르다.

타원은 평면상의 두 점의 사이에 따라 형성되는 타원의 크기가 다르므로 두 점은 불일이불이의 관계성을 이루고 있다. 타원은 마치 텍스트의 직물짜기의 교직적 얽힘과 유사하다 하겠다. 그리고 그 차연은 수사학적 생략법처럼 생략된 단어나 문장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문장보다 그 사이에 시간적 공간적 단축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또한 그 사이는 이미 생략을 통하여 두 단어 사이에 차연의 다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타원(l’ellipse)은 이중긍정의 파르마콘을 암시하고, 생략법(l’ellipse)은 이중부정의 코라를 상징한다. 세상사가 축구공처럼 규칙적으로 굴러 가지 않고, 럭비공처럼 불규칙으로 굴러가는 수많은 타원들의 엮음장식이므로 어떤 원인과 목적의 일정한 진로를 예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의 창조설과 예정조화설은 타원의 불규칙 운동에서는 설명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세상사는 무수한 생략법의 수사학과 유사한 것 같다. 고로 세상사는 생략법의 빈 공간과 시간의 여백이 항상 문장의 행간에 깃들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여백이 차연의 사이를 가리키는 ‘이전의 중용’의 표지이고, 그것이 또한 사이의 왕복을 말하는 행진이기도 하다. 차연의 철학은 예정조화설의 부정이고, 오히려 그 신의 예정조화설의 자리에 비어 있음의 허공의 여백을 읽을 것을 종용한다. 그 사이로서 허공의 여백은 표지의 역할을 하고 행정의 왕복의 길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여백은 허무가 아니고, 세상사를 여유와 관계의 신호로서의 표지와, 또 서로 다른 것과 장애 없이 오가는 무애의 행정과 같은 길로 읽기를 종용하는 사유가 아닌가? 세상사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자가성에 얽매인 고집이라 하겠다. 차연의 철학은 이 고집의 어리석음을 북으로 쳐서, 세상의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것이다. ■

김형효

서울대 철학과 졸업.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석사ㆍ박사학위. 공군사관학교 조교수, 서강대 철학과 부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부설 한국학대학원 대학원장,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제10회 열암학술상 수상. 저서로 《데리다의 해체철학》 《데리다와 老莊의 독법》 《메를로-뽕띠와 애매성의 철학》 《老莊사상의 해체적 독법》 《원효에서 다산까지》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물학, 심학, 실학》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1, 2)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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