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호 동국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사띠(sati/smr.ti, 念)’의 중요성은 초기불교는 물론 이후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에 놓여 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과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그리고 팔정도(八正道)로 구성되어 있는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대부분에 사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에 들어서 더욱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해서이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은 이러한 37조도품을 모두 아우르는 말로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도를 한마디로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사띠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위빠사나는 물론 초기불교 전체의 실천적 행법을 적합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때문에 먼저 사띠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경전을 통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위빠사나는 물론 이후 모든 불교 수행 전통과의 관련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 본고는 근본적 의미의 올바른 사띠 이해를 위해 빠알리 경전과 한역 아함 경전을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검토를 해 볼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2. 현재까지의 사띠 이해

최근 우리의 학계에서도 사띠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그 가운데 필자는 기존의 사띠 이해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그 번역어로서 먼저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말을 제시해 보았다.1) 서구 학계에서는 흔히 사띠를 mindfulness로 옮기고 있다. 번역 과정에서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 고심한 흔적은 찾을 수 있으나, 경전에 근거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같이 가장 많이 쓰이는 mindfulness는 영어권 이외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글 역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 ‘마음집중’ ‘마음모음’ 그리고 ‘마음새김’ 등에 있어서도 그 어의의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현재 국내에서는 ‘알아차림’ ‘주시’ ‘관찰’ ‘각성’ 등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용어들 중에 사띠가 선정삼매와 무관한 행법처럼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있는지, 혹은 특별히 불교만의 전문적이고 특별한 수행도라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와 유사한 용어와 개념의 말은 일반 세간은 물론 유가나 도가를 비롯한 기독교나 회교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역어에 따라 사띠가 선정수행과 무관한 행법이나 선정과는 독립해 있는 영역의 행법처럼 받아들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띠 자체를 대단히 분별적이고,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즉 작위의 개념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초래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수행도에 있어 미세한 법상의 차이 때문에 동일한 경전 또는 한 경구에서조차 여러 용어들을 구분되어 사용되는 경전의 맥락이 무시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사띠(sati)와 정지(正知, sampaja-na)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하고 혼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3. 근본적 의미의 사띠

1) 사띠와 삼빠자나 개념의 차이

여기서는 올바른 사띠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용례를 빠알리 경전은 물론 아함 경전을 통해 살펴보자. 사띠와 삼빠자나(sampaja-na)는 한역에 있어 각각 염이나 정지로 옮겨졌다. 그렇지만 현재 양자의 개념을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모두 ‘알아차림’ 등의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음의 《사띠 경(Sato sutta)》를 통해서 사띠와 삼빠자나가 동의어가 아니며, 서로 간에 분명한 개념상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사띠와 삼빠자나에 머물러야 한다. 이러한 것이 그대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띠에 머무를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a-ta-p┓)’과 ‘삼빠자나’ 그리고 ‘사띠’가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삼빠자나’ 그리고 ‘사띠’가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삼빠자나’ 그리고 ‘사띠’가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법에서 법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삼빠자나’ 그리고 ‘사띠’가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비구의 삼빠자나는 무엇인가? 비구는 나아갈 때나 뒤로 물러설 때나 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다.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으며,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다. 가사(겉옷)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으며, 먹거나 마시거나 먹고 난 후에나 씹고 맛볼 때에도 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으며,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으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고 있을 때(sutte)’나 (잠에서) 일어나 있을 때에도 그리고 말하거나 침묵할 때도 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다.2)

이처럼 독립된 한 경전에서조차 사띠와 삼빠자나에 대한 교설이 나누어 제시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빠알리 원어로 사띠는 어디에서나 “ka-ye ka-ya-nupass┓ viharati a-ta-p┓ sampaja-no satima- vineyya loke abhijjha- domanassam.” 같은 문구가 정형적인데 이때 a-ta-p┓는 물론 sampaja-no까지 일렬로 묶어 서술한다. 여기서 문장 구조상 사띠는 a-ta--pino sampaja-na- 뒤에 위치하여 ka-ye ka-ya를 다시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 경전에서 지시하는 사띠의 범위는 ka-ye ka-ya까지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념처를 설명하는 또 다른 정형구에서 ka-ye ka-ya 말이 사용되면 a-ta-pino sampaja-na-는 생략되지 않지만, 사띠라는 말은 생략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또 다른 사념처, 또는 위빠사나의 정형구에서 그러하다.

몸에서 몸을 따라 관하는 데 머문다. 이는 ‘오롯한 정진력(a-ta-p┓)’과 삼빠자나(분명히 깨어 있는 상태)와 전일(專一)하고, 투명하게 청정해진 마음, 삼매에 든 심일경(心一境) 상태에서 몸의 여실한 지견(知見)을 위한 것이다.3)

이 경구는 사띠 확립과 관련한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 높은 수준의 선정삼매를 배제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구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보다 중요한 점은 사띠라는 말의 생략은 ka-ye ka-ya 자체가 바로 사띠임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2) 삼빠자나를 통해 본 사띠의 성격

삼빠자나는 앞의 경문을 통해 볼 때 사띠와 달리 일체의 신체적 행위에 대한 ‘생생한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즉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과 같은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생생한 깨어 있음이 그것이다. 그 정도에 있어서는 ‘잠자는 동안’에도 잠자고 있음을 아는 상태이어야 한다는 점은 특히 주목된다. 이는 삼빠자나의 상태가 얼마만큼 높은 성성(惺惺)한 지경의 선정 상태임을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분명한 각성상태’이며 ‘오롯하게 깨어 있어 지극히 성성(惺惺)한 지경으로 이러한 ‘생생한 깨어 있음’은 후대 선가의 내외명철(內外明徹)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취침상태 속에서까지 삼빠자나라는 것은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경지와도 또한 비견될 수 있다.

다시 이는 사띠와 위빠사나를 설하는 한역 《염처경(念處經)》에서도 이러한 경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 준다.

비구는 안으로 몸을 보는 데 있어 몸과 같이한다. 밖으로 몸을 보는 데 있어 몸과 같이한다. 염(念)을 세워 몸이 있고 지(知)가 있고 견(見)이 있고 명(明)이 있고 달(達)이 있다. 소위 이것을 비구가 몸을 보는 데 있어 몸과 같이하는 것이다. 다시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과 같이 관하는 데 있어 광명상(光明想)을 염하여 잘 받아 지녀 염(念)한 바를 잘 억(憶)하기를 앞과 같이 뒤에도 또한 그러하고, 뒤와 같이 앞도 또한 그러한다.

마찬가지로 낮과 같이 밤도 그러하고, 밤과 같이 낮도 그러하고, 아래와 같이 위에도 또한 그러하고, 위와 같이 아래도 또한 그러하니, 이처럼 뒤바뀌지 않고 다음에는 얽매임이 없이 광명상을 닦아 마음이 마침내 어두움에 덮이지 않는다.4)

한역의 광명상(光明想)에 대한 빠알리어는 a-loka-san쁭쁝나 a-loka-san쁭삧?甄? 깨어 있음이 마치 밝은 빛과 같은 상태로서 전후와 밤낮, 상하 등 일체에 있어 밝은 빛과 같이 뚜렷하고 분명하도록 한역 아함경이나 빠알리 경은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다시 삼빠자나와 사띠가 언급되는 제삼선의 정형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제삼선에 이어 사념처의 정형구에 사띠와 삼빠자나가 각각 언급된다. 이러한 경구는 사념처 수행이 기본적으로 제삼선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초기경전의 이른 층에서부터 삼빠자나는 사띠와 함께 계정혜 삼학 가운데 정학으로 선정을 나타내는 말로 분명히 한정적으로 명시되어 나타난다.5) 이러한 사실은 위빠사나를 선정 밖이나 선정의 바탕이 없는 선정 이전의 상태로 이해하고 단지 일상생활에서의 행동거지를 ‘알아차리고’ 감지하는’ 정도의 인지활동으로 보아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3) 앉아서 누워 있는 사람과 마주하듯, 누워서 앉아 있는 사람을 마주하듯

다음으로 이러한 사띠의 정의를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경전은 다름아닌 사념처를 말하는 빠알리 《대념처경(Maha-satipat.t.ha-na Sutta)》에 대응되는 중아함의 《염처경》 등의 다른 빠알리 경을 통해서이다.

비구는 안으로 몸을 보는 데 있어 몸과 같이 한다. 밖으로 몸을 보는 데 있어 몸과 같이한다. ‘염(念)을 세워 몸이 있고(立念在身)’, 지(知)가 있고, 견(見)이 있고, 명(明)이 있고, 달(達)이 있다. 소위 이것을 비구가 몸을 보는 데 있어 몸과 같이하는 것이다.

다시 비구는 몸을 보는 데 있어 몸과 같이 한다. 비구여, 잘 받아들여 서로 마주 보고 (또는 마주하여 보는 대상을 단지 느끼고) 염(念)한 바를 잘 기억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있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 보듯이, 누워 있는 사람이 앉아 있는 사람을 마주 보듯이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잘 받아들여 서로를 마주 보고 염한 바를 잘 기억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한다.6)

이러한 비유는 너무나 극명하게 사띠의 성격과 개념을 보여 준다. 즉,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마치 어떤 사람이 있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 보듯이, 누워 있는 사람이 앉아 있는 사람을 마주 보듯이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1 : 1 거리 두기’나 ‘1 : 1 간격 형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맑은 거울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입념재신(立念在身)은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satipat.t.ha-na)’을 말하며, ‘몸에서 몸으로, 느낌에서 느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법에서 법으로’으로 대상화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좀더 부연하자면 대상과 직면한 ‘대칭적(對稱的) 주의집중’에서 위빠사나는 시작한다.

4) 추수 전후 목동이 소나 염소, 양을 돌보는 것에 대한 비유

또다시 경전에서 사띠가 무엇인지를 잘알 수 있는 재미있는 비유는 추수 전후에 목동이 소를 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인도는 예나 지금이나 들판에 소를 방목한다. 소 떼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과 함께 가끔 논밭에 들어가 작물을 뜯어먹는 경우를 보게 되고 이를 황급히 몰아내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즉 추수철에는 소들이 논밭에 들어가 뜯어 먹지 않도록 바짝 가까이에서 신경을 써서 논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채찍으로 때려 막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밭의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추수 후 소치는 것으로 사띠 수행(satikaran.┓ya)이 비유·설명되는데 이는 사띠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는 좋은 예에 속한다.

비구들이여, 비유하자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모든 곡물을 수확하여 마을로 거둬들인 후 소치는 자는 나무 아래나 공터에 머물면서 소들을 지켜보는 데(rakkheyya) 있어 ‘여기 소들이 있다’라고만 주의를 집중한다(satikaran.┓yam). 비구들이여, 그리고 다시 이와 같이 ‘여기 모든 것들이 있다’라고만 주의를 집중한다.7)

추수 전처럼 소들이 논밭에 들어가 뜯어먹지 않도록 가까이 바짝 신경 써서 채찍으로 관리하는 것이라면 사띠 수행은 나무 아래나 공터에 머물면서 단지 소들에 ‘일정한 거리만을 유지한 채 집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점에 이르면 마치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맥락은 같이 소들을 ‘지켜본다’라고 하지만 추수 전과 후는 판이하게 다른 형국임을 보여 준다. 즉 ‘여기 소들이 있다’고 할 정도만 집중한다는 것은 바로 ‘주의의 수동성’을 말한다.

이는 위빠사나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대념처경》의 반복되는 정형구인 “‘몸이 있다’라고 하는 수동적 주의 집중 상태가 확립되어 단지 그러한 사실을 알 뿐이고 단지 주의 집중만을 뚜렷하게 할 뿐이다.”8)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소들을 채찍으로 ‘……을 쫓거나’, 들어간 소들을 ‘찾아내는’ 뜯어먹지 않도록 하는 능동성에 반해 단지 간격 형성에 ‘따른’ 수동성을 나타낸다.

5) 사띠 행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단지 바라 볼 뿐’

여기서 사띠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전적 근거는 아래의 경구이다. 이 경전의 일부는 이전에 필자에 의해 사띠를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결론내리게 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전 근거로 사용하였는데 다음과 같다.9)

말루끼야뿟따여, 그대가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안다고 하자. 이때 보는 데 있어 단지 바라볼 뿐이며(dit.t.he dit.t.hamattam. bhavissati), 듣는 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지각하는 데 있어 단지 지각할 뿐이며, 아는 데 있어 단지 알 뿐이다. 그러므로 말루끼야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는 데 있어 단지 바라보게 되고, 듣는 데 있어 단지 듣게 되고, 지각하는 데 있어 단지 지각하고, 아는 데 있어 단지 알게 될 때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대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루끼야뿟따여, 그것 안에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이것과 이것의 너머 혹은 그 사이에도 너는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苦)가 다하는 길이다.

이러한 세존의 요긴한 가르침을 받은 늙은 말루끼야뿟따는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간략하게 말씀하신 바를 다음과 같이 (다시) 풀어 이해해봅니다.”

만약 색(色)을 봄에 있어 사띠를 잃으면 좋아하는 색상을 보고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대상에 탐욕을 느끼고,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게 된다. 그러한 느낌의 치성과 집착에 머물러 수많은 색상의 일어남과 탐욕과 진심(嗔心)이 생기고 그의 마음은 더욱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이 같은 고통이 쌓이면 열반은 더욱 멀다고 한다.(마찬가지로 聲·香·味·觸·法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된다.) ……

만약 색을 보는 데 patissato(sati)가 있어, 색을 보는 데 있어 탐욕이 없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없고, 단지 느낄 뿐이어서 색에 대한 탐욕을 느끼지 않고 집착이 없다. 만약 그가 이와 같이 하게 되면 (색을 보고 단지 보게 되고 탐을 일으키지 않으면) 사띠에 머물러 두루 행하게 된다. 그래서 고통이 집적되지 않고 열반은 가까워져 있다고 한다.(마찬가지로 聲·香·味·觸·法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된다.) ……10)

이 경은 붓다에 의해 요긴하게 사띠의 의미가 시설되자 한 제자에 의해 재확인하는 형식으로 경이 구성되어 있다. 핵심적인 내용은 보는 데, 듣는 데, 냄새 맡는 데, 맛보는 데, 접촉하는 데, 그리고 인식하는 데 있어 그 어떠한 것도 싣거나 개입시키지 않고, 첨가하지 않고, 단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어떠한 경계에도 떨어지지 않고 궁극적으로 고의 소멸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역으로 말하면 보는 데 있어 단지 바라볼 뿐이며, 듣는 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냄새 맡는 데 있어 단지 냄새를 맡고, 접촉하는 데 있어 단지 접촉할 뿐이며, 아는 데 있어 단지 알 수 있는 것이 ‘사띠’라는 것이다. 분명 경전의 부연 설명에서 사띠라는 말이 중심이 되어 사띠의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사띠의 확립으로 ‘여기에 몸이 있다’라는 정도의 사실을 단지 알 뿐이고 단지 주의 집중만을 할 뿐이다.”라는 《대념처경》의 정형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무분별(無分別)한 경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어떠한 마음도 일으키지 않는 ‘무심한 주의집중’을 말한다. 달리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이다. 이로서 사실 사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띠의 의미는 화두선의 행법과 그대로 내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선종에서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배고프면 밥먹고 피곤하면 잠잔다(饑來喫飯困來卽眠).”라는 말을 통해서이다. 이 같은 말은 단지 생리적인 욕구에 충실하라는 그러한 의미는 아님은 대주혜해의 주석적인 설명에서도 분명하다. 즉 이 말에 대한 설명으로 선사는 일반 사람과 달리 밥먹고 잠잘 때 그저 밥먹고 잠을 잘 뿐 다른 ‘분별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는 앞의 사띠 설명과 정확히 같은 맥락에 있음을 보여 준다.

모두 ‘간단(間斷) 없는 대면(對面)’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는데 달리 말하자면 ‘무분별한 대면’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sati의 확립’이란 바로 무심(無心)·무분별(無分別)한 상태이다. 동북아 선종에서 화두를 들다가 깨달았다는 기연(機緣)이 많은데 이는 사유분별이 없는 무분별의 상태와 깨달음은 직결되는 문제로 초기불교에서도 사념처를 깨달음과 열반의 일승도로 강조되는 맥락과 일치한다.

6) 사띠와 ‘기억’ 그리고 ‘선정’의 문제

다음의 한역 염(念)처럼 기억과 관련한 경구를 살펴보자.

염근(念根)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성제자(聖弟子)는 사띠와 생생히 깨어 있음으로 지난 과거에 말하고 행했던 것들이 떠오르고 기억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염근이라 한다.11)

사띠는 기본적으로 ‘기억’을 의미하는 말이다.12) 하지만 기억은 선정수행 상과 일상생활 속에서 말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대부분 선정수행 시와 일상적인 쓰임새를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 때문에 왜 위빠사나와 관련한 핵심적인 행법을 기억이라 했을까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된 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의구심 때문에 기억이라는 말의 쓰임이 회피되어 왔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선정수행 시 ‘기억’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의미에서 ‘잊었던 것을 기억’해 내거나 ‘향수에 젖어 과거를 회상’하는 것, 또는 ‘암기하였던 것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미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빠사나에 있어 왜 기본적으로 기억이라는 말이 쓰였는지는 다음의 몇 가지 설명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술을 많이 마신 나머지 ‘필름이 끊겨’ 그 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까지는 기억이 되는데 이후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또 꾸벅 꾸벅 조는 사람에게 졸았다고 지적하면 인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완강하게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화가 났을 때 한 말을 부인하는 경우나 강의중 학생들이 꾸벅꾸벅 조는 것을 지적할 때 완강하게 부인하는 경우 거짓으로 잡아떼거나 우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전혀 자신은 기억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게 말하지도 졸지도 않았다며 결백을 주장하며 억울하다고만 할 뿐이다. 그렇지만 제3자나 또는 다른 여러 사람이 분명히 보거나 들었다고 증거를 대는 경우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술 취한 상태에서나 환각 상태에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일상 우리의 삶에서도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잠들어 있는 동안의 자신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잠에서 깨어난 후 하루 일과, 아니 1시간 단위나 사람에 따라 단 10분 동안이나 방금 전까지도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해 내지 못한 경우가 있다.

이것을 볼 때, 우리의 의식은 사이사이 끊김이 있는 가운데 진행됨을 알 수 있다. 즉, 생각생각(念念)의 상속(相續)이 순간순간[刹那刹那] 생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순간이나 기간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은 술이나 수면 등 또는 감정상의 장애가 일어나 어느 순간에서 어느 순간까지가 생략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건너 뛰어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과음 시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표현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명료하게 또는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 항상 깨어 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 이러한 의식의 흐름과 비슷한 속성이 선정수행 시의 ‘기억’의 문제이다. 따라서 기억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다른 점이라면 기본적으로 좌선과 같이 대부분 선정수행 시를 염두로 두고 사띠가 언급된다는 점이다. 즉, 좌선을 통한 선정수행으로 ‘뚜렷이 깨어 있는 상태’에 이르면 생멸의 무상(無常)을 끊김 없이 대면(對面)할 수 있다. 이러한 ‘간단(間斷) 없는 대면 상태’를 바로 ‘사띠의 확립(四念處)’이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띠 확립 이후, 숙련자에 의해 일상생활로 확장되는 것은 가능해도 처음 시작부터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선정수행 시 간단 없는 대면 상태가 끊기면 그것을 바로 ‘실념(失念, sati mut.t.ha-)’이라 한다. 따라서 수행에 있어 사띠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 없는 대면상태라는 결과적 측면을 이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좌선 시 순간적으로 꾸벅 조는 경우도 있지만 계속적으로 꾸벅꾸벅 조는 경우까지 있다.

경책하면 인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졸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졸았다고 하는지 의아스러울 때가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처럼, 염염상속의 찰나생멸의 속성상 어느 순간에서 어느 순간까지가 생략되어 버리고, 현재 순간에서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건너뛰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띠를 잃은 상태로 자신이 얼마나 졸았는지를 결과적으로 기억할 수 없다.

경전에서 말하는 수행상의 사띠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말한다. 선정과 사념처에서 안반념삼매(安般念三昧) 또는 출입식념정(出入息念定)으로 옮길 수 있는 a-na-pa-nasati-sama-dhi라는 복합어가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3) 따라서 사띠는 선정상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수련에 따라 일상의 모든 삶으로 확대된다. 경전에서는 주로 전문 수행자인 비구의 모든 삶으로 확대된 사띠로 나타난다.

즉 오랜 그리고 집중적인 수행을 통해 일상에 확립되어 있기에 사선 등을 설명할 때도 사띠가 중심이 되어 도식적인 차제 수행도가 설명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띠가 먼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경전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사띠를 선정 이전이나 무관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전에서 사띠는 분명 선정수행의 범위라는 정학에 있다. 기본적으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오개(五蓋)의 혼침 수면의 상태와 대치되는 선정의 범위로 사띠 상태가 설명된다.

더 분명한 것은 팔정도에서 사띠의 정념은 분명 삼학 가운데 정학에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띠는 선정삼매의 범위라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경전에서 오개와 선정 상태와는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오개가 쉬거나 그칠 때 ‘처음의 선’이라는 의미에서 초선이 말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전에서 왜 선정과 사띠의 관계를 ‘사띠는 삼매의 주인 또는 힘(a-dhipateyya-, lordship, power)’이며 다시 곧이어 ‘사띠의 최상은 반야’라고 하는 교설을 이해할 수 있다.14) 좀더 부연하면 a-dhipateyya-는 경전에서 최고 주권을 가진 최고신이며 창조신인 자재천을 설명할 때 쓰는 말로 주로 나타난다는 점으로 삼매와의 관계에서 사띠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띠는 바로 ‘삼매의 간단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삼매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삼매의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삼매와 사띠 그리고 반야와의 관계에서 무엇이 상위법이고 하위법인지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 주는 중요한 경구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초기불교가 의미하는 사띠가 화두선의 ‘화두 듦’과 ‘염불’에 있어 간단 없는 상태가 강조된 맥락과 서로 통해 있음을 보여 준다.

7) 사띠와 사유 그리고 분별의 문제

오랜 불교교리사에서 ‘깨달음’ 문제와 관련하여 ‘사유’의 문제는 쟁점이 되어 왔다. 불교가 다른 종교철학과 다른 불교만의 정체성은 ‘참된 진리 인식’의 문제에 있어 언어와 사유분별이 쉴 때 노출되는 진실을 강조하는 데 핵심이 놓여 있다. 이는 붓다의 깨달음과 관련해서도 스스로 ‘사유의 범위를 넘어 있음(atakka-vacaro)’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한역 아함에서도 이를 ‘불가사유(不可思惟)’라는 말로 옮겼다.15)

동아시아 선종 전통에서 불립문자와 언어도단 그리고 사유분별을 쉬어야 함이 강조되는 맥락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가끔 불교를 신비화하고 몰상식화하며 (세속적 의미에서) 무분별하게 만드는 주범처럼 부정적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경계에 있는 많은 사람은 상당한 혼동과 혼란을 느끼고 있다. 이 점에 있어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처럼 깨달음의 문제와 관련해 언어와 사유의 배제는 동아시아 선종 전통을 넘어 모든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교에서 이미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좀더 경각심을 일게 하는 경구 하나만을 대표적으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 사문 고타마는 인간을 뛰어넘지 못했고. 성인이 갖출 수 있는 지견(知見, n쁝-n.adassana)의 성취가 없다. 그는 (다만) 사유(思惟, takka)가 개입된 개인적 이해에 따른 분별(分別, v┓mam.sa)16)로 법을 설한다. ……만약 이 같은 사견(邪見)을 가지고 제시하며 (끝내) 사견을 버리지 않으면 지옥의 나락에 떨어질 것이다.17)

여기서 우리는 사유와 분별과 대비되는 참된 앎(n쁝-n.a)과 직관(dassa-na)이 참된 진리인식의 문제와 관련해 어떠한 심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불교 인식론에 따르면 사유와 분별 그리고 앎과 봄은 꼭 일치하여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사띠’는 사유와 분별을 뛰어넘어 참된 앎과 직관할 수 있는 중핵의 장치로 경전의 매우 이른 층에서부터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띠 확립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진 《대념처경》 전체에서 사띠 확립에 따른 결과로 n쁝-n.a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띠에 대한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4. 마치는 말

기본적으로 사띠 이해의 출발이 다르면 이후 불교의 모든 행법에 있어서도 커다란 이해의 차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까지의 분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띠는 모든 행(行)의 지멸을 목표로 하는 선정체계 속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띠 확립’의 상태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지극한 평정심의 지속상태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제3선에 이어 제4선에서 나타나는 사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띠는 다시 ‘무심한 주의집중’ 또는 ‘취사(선택)없는 주의집중’이나 ‘재 반응 없는 주의집중’으로도 바꿀 수 있다.

둘째, 사띠는 경전의 여러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서 몸, 느낌에서 느낌, 마음에서 마음, 법에서 법과 같이 ‘1 : 1 거리 두기의 확립’을 의미한다. 마치 맑은 거울 앞에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이 대상과 직면한 ‘대칭적(對稱的) 주의집중’이라는 말로도 통한다.

셋째, 사띠의 유무(有無)는 탐욕이 일어나면 사띠는 없고, 탐욕이 없이 ‘단지 인식’할 수 있으면 사띠가 있다는 것으로 사띠 상태의 조건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띠는 ‘무욕의 주의집중’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이로 보아 사띠행법은 단지 기술적인 면이 아닌 대단히 윤리적인 면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띠는 ‘간단 없는 대면 상태’로 달리 ‘무분별한 상태’이다. 이는 화두선에서 화두를 간단 없이 드는 것이 강조되는 것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

조준호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 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저서(공동)로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 주요 논문으로는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사띠(sati/smr.ti, 念)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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