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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친일 논리 / 김광식
김광식 만해마을 연구실장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 김광식 jiher@yahoo.co.kr

1. 들어가면서

   

김광식
만해마을 연구실장

최근 한국사회 내부에서는 이념 갈등이 한창이다. 이 갈등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대두되었고, 그 전개과정도 사회 전체를 흔들 만큼이나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갈등 속에는 이른바 ‘친일파’ 문제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에 여, 야의 정치권도 이에 대한 인식과 처리방법을 놓고 그 대결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배경하에 여기에서는 춘원 이광수의 친일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춘원의 친일 문제는 지금껏 문학, 역사학 방면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그의 친일을 수긍하는 쪽이 대체적인 인식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춘원의 친일을 강조하거나, 혹은 친일은 너무 가혹한 것이라는 입장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필자도 춘원의 친일 문제를 다룬 관련 책자나 글을 자세히 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필자는 춘원의 친일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기존의 연구자들의 해석에서 비교적 자유스러울 수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이 글에서는 춘원이 자신의 친일행동에 대한 입장을 담담하게 개진한 《나의 고백》을 소개하고, 그 내용에 나오는 불교의 단면을 정리하려고 한다. 춘원은 한때 불교 신앙에 경도되어, 불교와 관련된 문학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 그는 봉선사의 큰스님이었던 이운허의 6촌 종형제라는 인연으로 봉선사에 머물렀고, 불교정화를 주도하였던 이청담과의 인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춘원이 자신의 친일 행동을 해명한 《나의 고백》에 대한 개요부터 살펴보자. 《나의 고백》은 1948년 12월 1일, 춘추사에서 발행되었다. 제원은 12.5×18cm이며, 페이지는 213면이다. 이 책자는 《이광수전집》의 제7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문

    나의 告白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
    민족운동의 첫 실천
    망명한 사람들
    기미년과 나
    나의 훼절
    민족 보존
    해방과 나
    親日派의 辨
    弘濟院沐浴
    三學士
    官公吏는 反民族者였던가
    美國人의 親日派觀
    大韓民國과 親日派

이 책은 크게 〈나의 고백〉과 〈친일파의 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인 〈나의 고백〉에서는 자신이 일제하에 관련된 민족운동과 친일 행동에 관한 내용과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친일파의 변〉에서는 자신의 친일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자신의 행동을 소상히 밝히면서 자신의 행동이 친일을 위한 친일이 아니었음을 호소하는 춘원의 의도에서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나의 고백인가, 변명인가

이제 목차를 따라가며, 춘원의 친일문제를 소개하고, 그것이 불교적 시각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춘원은 서문에서 자신은 처음부터 이 책을 쓸 마음이 없었다 한다. 춘원의 동료들은 그에게 ‘친일파 노릇을 한 곡절을 말해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라고 해명을 요구했지만, 춘원은 이를 거부하고 해방 후 3년 간 침묵을 지켰다.

그 후 춘원은 마음을 바꾸게 되는데, 이것은 자신이 계속 침묵을 지키게 되면, 자신을 아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잘못된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춘원은 자신의 친일 행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나는 조그맣게라도 가지고 있는 명예를 버리고 친일파의 누명을 쓰고 나섰는고? 어리석을는지는 모르나 내게는 나로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자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것은 일언이폐지 하면 나를 희생해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동포를 핍박에서 건지자는 것이다.

춘원은 자기의 친일은 자신을 희생해서 동포를 핍박에서 건지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춘원은 자신의 그 판단을 불교의 교훈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더 젊어서 뜻이 커서 능히 민족을 온 몸으로 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적어도 인도의 간디를 긔약한 것이 내가 설흔 살에 상해에서 돌아올 때의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제가 몇 푼 어치 못되는 것을 깨달으매 큰 꿈은 글로 남기고 몸으로는 민족의 조그마한 이익을 구하는 데나 쓰리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한 중생이라도 네 목숨을 던져 구할 수 있거든 다양하게 알라는 불교의 교훈이 내 마음에 맞았던 것이다.
그럼으로 나는 내 이익을 위해서 친일 행동을 한일은 없다. 벼슬이나 이권이나 내 몸의 안전을 위해서 한일은 없다. 어리석은 나는 그것도 한 민족을 위하는 일로 알고 한 것이었다.

춘원이 불교의 교훈으로 제시한, “비록 한 중생이라도 네 목숨을 던져 구할 수 있거든 다양하게 알라.”는 내용이 불교의 어떤 경전에서 나온 말인지는 필자는 판단할 여력이 없다. 다만 이는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런데 춘원은 자신의 친일 행동이 불교의 교훈에서 나온 것이기에 자신의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 너무 무리하게 불교의 교훈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춘원은 이러한 맥락하에 자신의 친일도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원은 〈친일파의 변〉에서 이 글이 제삼자의 처지에서 쓴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가 이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춘원은 친일파라고 지목받았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심경과 논리를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이것을 정리해서 소개해야 할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춘원이 말하기를, 소위 친일파라는 하는 부류들과 자주 접촉해 보니, 그들을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춘원의 논리대로 친일파를 바라보면, 친일파는 거의 없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궤변이다.

그러나 그들과 오래 여러 번 만나는 동안에 나는 그들도 꼭 같은 조선 민족이라고 깨달았다. 그들은 결코 일본인이 된 사람들도 아니오. 조선인보다도 일본인을 위하는 이들도 아니었다. 도로혀 민족의식에 있어서는 친일파 소리 아니 듣는 사람 보다 강한 편이 많았으니 그들은 날마다 일본인과 접촉하기 때문에 가슴 아픈 차별대우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기뻐하고 이 나라에서 충성을 다하랴는 정신에 있어서도 다른 동포들보다 다름이 없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나는 친일파의 변을 이 책 끝에 붙였다.

이러한 춘원의 논리에 의하면 당시 친일파로 지목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타 민중보다 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한편으로는 더 차별대우를받았으며, 나라에 더 충성을 하려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춘원의 논리를 수긍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자못 궁금하다. 물론 친일파 중에서 춘원의 논리에 부합하는 인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의 개념, 친일파에 대한 이해를 춘원의 논리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독선, 독설, 아집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비판은 본 고찰의 범위를 넘는 것이기에 그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나의 고백》에는 춘원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에 관한 그의 회고가 소상히 나와 있다. 춘원은 근대문학의 선구자였으며, 그 역시 나라 잃은 서러움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1919년 3·1운동을 촉매한 동경 유학생 중심의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으며, 선언서의 작성자이었다. 이후 춘원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그를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의 중심부에 있을 때 당시 불교 승려들도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 사실을 〈기미년과 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인찰지 수백매로 된 이 독립운동 방략은 예정대로 새해 첫 국무회의에 제출되어서 축조로 심의한 결과로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그래서 오대산 월정사 중 이종욱(李種郁) 등이 연통제 실시의 사명을 띠고 본국으로 파견되어서 꽤 넓은 지역에 군감(郡監)까지도 선정되어서 독립신문 배달, 기타 임시정부의 정녕의 전달이 되게 되었다.(이종욱은 이 일로 잡혀서 오년이나 징역형을 졌다.)

그 후 춘원은 상해에서의 독립운동 일선을 떠나 국내로 들어왔다. 춘원의 귀국은 당시 일제에 투항한 행동이라고 비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그의 고민은 독립운동의 바른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내린 결론은 ‘민족 자체의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이에 춘원은 〈독립신문〉에 ‘국민개업(國民皆業), 국민개거(國民皆擧), 국민개병(國民皆兵)’이라는 취지의 글을 기고하고, 국내로 돌아올 결심을 한다. 춘원은 자신의 결심을 안창호에게 전하였으나, 그는 춘원의 국내 귀국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춘원은 안창호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3·1운동의 여파와 일제의 문화정치 정책으로 인해 민족운동 전선에 새로운 기운이 형성되던 상황이었다. 이때, 이에 대한 춘원의 논리는 합법적인 민족운동, 제한적인 자치, 일제통치의 수긍이라는 구도하에서 조선민족의 특수한 단위성을 인정받는 것이었으며, 이는 합법적인 민족운동의 한계선이었다. 이러한 미온적인 민족운동노선의 배경하에서 춘원은 〈민족개조론〉 〈상생의 세계에서 상애의 세계로〉 〈조선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글을 발표한다.

특히 〈민족개조론〉은 청년층의 반발이 거세었다. 심지어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한편 춘원은 흥사단의 국내 사업의 일환으로 수양동맹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춘원은 일제하의 현실을 고려하여 흥사단의 강령, 목적을 일부 수정하여 발동하였다. 후에 춘원은 그것이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이것이 민족개조요. 이러한 개인을 많이 늘리고 많이 모으는 것이 곧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다. 독립에 관한 말은 아직 말고 이만한 운동만을 하자는 것이 수양 동맹회의 노선이다.

춘원이 주도한 수양동맹회(1922. 2. 12)와 평양에서 이 노선을 지지한 동우구락부가 합쳐져 수양동우회가 출범(1926. 1. 8)하였다. 동우회는 ‘선민족개조, 후독립’의 논리하에서 민족의 독립을 유보한, 일종의 개량주의 노선이었다. 한편 그는 《동광》지를 발간하여, 동우회의 선전지로 활용하였다. 1930년대 초 그는 동아일보에 기자(편집국장)로 들어가 〈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을 기고하였으나, 곧 이 글이 논란이 되어 동아일보를 퇴사하였다. 1933년 8월에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1년여 근무 후 퇴사하였다. 그리고 동우회는 1934년경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

3. 불교 생활에 경도되다

이즈음 춘원은 자하문 밖 홍제동의 집 입구에 있던 사찰인 소림사에서 ‘불교 생활’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가 어떤 연유로 불교에 심취하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짐작컨대 그의 종형제인 봉선사 승려 이운허와의 인연을 고려해 봄 직하다. 최초로 춘원이 불교에 인연을 맺은 것은 1922년 방인근 부부와 춘원 부부가 석왕사에 가서 《법화경》을 접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1923년 7월, 이병기, 박한영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할 때, 비 때문에 신계사 보운암에 5, 6일 간 머물렀다. 이때춘원은 《법화경》을 읽었다고 한다. 또 이 여행 중에 머물렀던 마하연 선방에서도 혈서로 쓰여진 《법화경》을 읽었다고 한다. 혈서로 6년 간 쓰여진 《법화경》을 보고, ‘모골이 송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연들로 1934년 봄 그는 집에서 《금강경》 《원각경》을 통독하고, 그해 6월에는 금강산에 백성욱을 찾아가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1934년 8월에는 이운허로부터 《법화경》 한 질을 전해받고, 본격적으로 《법화경》을 탐독하였다.

당시(1934. 10) 춘원은 《법화경》으로 소설을 집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운허는 춘원이 《법화경》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고, 도반인 이청담을 찾아가 춘원이 소설을 집필하지 못하도록 설득해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청담이 소림사로 춘원을 찾아가자, 춘원은 청담에게 “이곳에 나랑 머물면서 일 주일이건 한 달이건 토의를 해봅시다. 상대방이 더 이상 물을 것이나 답할 것이 없을 때까지 토론을 해봅시다.”고 제안하였다. 그 후 춘원과 청담은 1주일 간 깔 것을 하나씩 들고 산이나 개울로 나가, 《법화경》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불교와 《법화경》을 두고 대화를 지속해 나가다 보니, 서서히 춘원의 한계가 드러났다. 그 후부터는 춘원이 불교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 청담의 설명이 뒤를 이었다.

마침내 청담은 춘원에게, “춘원, 《법화경》을 이 정도로 이해해서 소설을 만들거나 번역하지 마시오. 《법화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글을 만든다는 것은 더 큰 오류를 낳을 것이오. 우선 《원각경》과 《능엄경》을 읽어 보시오.”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춘원은 불교 공부를 더욱 본격적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의 생활을 춘원은 ‘불교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청담이 춘원에게 《법화경》을 소재로 소설을 만들지 말라는 구전에서 그 것이 소설인지, 번역인지는 애매하다. 왜냐하면 춘원은 1934년 10월부터 《법화경》 번역에 착수하였는데, 동우회 사건으로 압수당하여 종로 경찰서에서 휴지가 되어 버린 원고 뭉치가 바로 번역을 시도하다 청담이 만류하여 중단한 그 성과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후일 춘원은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1944년 김소운이 찾아갔을 때, 《법화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로 보아 춘원은 《법화경》에 매우 심취했던 듯하다.

4. 어정쩡한 자기합리화

춘원의 친일은 중일전쟁(1937) 전후로 더욱 본격화되었다. 1937년 6월 일제는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 동우회 관계자 181명을 체포하고 그 중 41명을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양동우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는 일제가 동우회 관계자들을 회유, 전향시켜 일제의 대륙 침략정책과 민족 말살정책의 보조세력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총독인 남차랑이 1936년에 부임하면서 전개한 이른바 심전개발운동의 구도 속에 벌어진 사건이다.

여기에 춘원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후원하기 위한 차원에서 ‘선만일여 국체명징 내선일체(鮮滿一如, 國體明徵, 內鮮一體)’를 내세웠으며, 종교계, 문학계 인사들이 일제 식민통치정책에 동원되었다. 요컨대 친일파 양성, 친일노선의 경주이었다. 그리하여 춘원은 수양동우회의 해산, 동우회 관계자의 친일파로 전향이라는 흐름 속에 일제에 피체되었다.

일제에 피체된 춘원은 재판에 회부되어 근 1년간 구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병을 얻어 집으로 나와 요양하였다. 이즈음 춘원은 작가들이 중국의 북경에 ‘황군(일본군)위문사’를 보내는 모임에 참가하는데, 이것은 그가 일본에 협력한 최초의 훼절이다. 그의 두 번째 훼절은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일제에 협력한 것이었다. 당시 춘원은 일제가 문인들의 신변을 위협한다는 판단하에 그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문인협회의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협회가 만들어진다면 총독부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문인들에 대한 대탄압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춘원은 수양동우회 사건 과 관련한 재판을 받는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재판정에서는 피의자가 문인단체를 만든 것이 불리하다는 변호사의 충고를 듣고, 춘원은 그 단체의 회장직을 사임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검사는 춘원의 민족주의 의식을 놓고 7년 구형을 언도하였으나, 판사는 무죄를 구형하였다. 당시 춘원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검사의 말은 옳다. 내가 천황을 말하고 내선일체를 말하는 것은 오직 조선 민족을 위한 것이다. 만일 그리하는 것이 조선 민족에게 이익이 아니 된다면 나는 곧 독립운동을 시작할 것이다.

이 발언은 춘원이 〈나의 고백〉에 소개한 것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여기에서도 춘원은 자신의 친일이 조선민족의 이익임을 강변하고 있다. 결국 춘원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것은 구속된 지 4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 후 춘원은 취직과 활동에 일정한 제재를 받게 된다.

춘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때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로 당시 일제 식민통치는 더욱 가혹해졌다. 민족지도자, 지성인, 작가들에 대한 탄압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며, 일반 민중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때 춘원은 일제에 저항할까도 생각하지만 결국 그는 저항은 불가능 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춘원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일본이 요구하는 대로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리라.” 춘원이 당시 정세를 이해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물자 징발이나 징용이나 일본이 하고 싶으면 우리 편의 협력 여부를 물론하고 강제로 제 뜻대로 할 것이다.

    ② 어차피 당할 일이면 자진하여 협력하는 태도로 하는 것이 장래에 일본에 대하여 우리의 발언권을 주창하는 데에 유리하다.

    ③ 징용이나 징병으로 가는 당사자들도 억지로 끌려가면서 대우가 나쁠 것이니 고통이 더 할 것이고 그 가족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자진하는 태도로 가면 대우도 나을 것이오. 장래에 대상으로 받을 것도 나을 것이다.

    ④ 징용이나 징병은 불행한 일이어니와 이왕 면할 수 없는 처지일진대 이 불행을 우리 편이 이익이 되도록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다. 징용에서는 생산 기술을 배우고 징병에서는 군사훈련을 배울 것이다. 우리 민족의 현재의 처지로서는 이런 기회를 제하고는 군사훈련을 받을 길이 없다. 산업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은 동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민족의 실력은 커질 것이다.

    ⑤ 수십만 명의 군인을 내어보낸 우리 민족을 일본은 학대하지 못할 것이오. 또 우리도 학대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고 괴롭게 하던 소위 내선차별을 제거할 수가 있을 것이다.

    ⑥ 만일 일본이 이번 전쟁에 이긴다면 최소한 우리는 일본 국내에서 일본인과의 평등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의 평등권을 얻는 것이 아니 얻는 것보다는 민족적 행복의 절대 가치에 있어서 나을 것이오. 또 독립에 대하야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것이니 대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훈련을 받을 수가 있고 또 민족적 실력을 자유로 양성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⑦ 설사 일본이 져서 우리에게 독립의 기회가 곧 돌아오더라도 우리가 협력한 것은 이 일에 장애는 안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일본 국내에서 정치적 발언권이 없는 백성임으로 전시에 있어서 통치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춘원은 나아가 우리 민족이 일본에 협력하지 않으면 일제가 대학과 전문학교에 한국인 학생의 입학을 제한하는 등 우리를 더욱 탄압할 것이며, 우리 민족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마침내 춘원은 일제에 협력하기로 결정한다. 춘원은 자신의 친일 논리를 아래와 같이 합리화하고 있다.

당시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 재판 결과는 무죄였으나 경찰과 검사국은 여전히 나와 동우회 회원 일동을 죄인 대우를 함으로 취직을 할 수도 없고 또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이때에는 교육이나 산업이나 합법적인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피난이 되었으나 내게는 그러한 피난처가 없었다. 게다가 말과 글이라는 것이 시국의 회피에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내가 몸을 시국의 희생으로 던지게 한 원인도 되었다.(중략)
만일 이 몸을 던져서 한 사람이라도 동포의 희생을 덜고 터럭 끝만치라도 다쳐오는 민족의 고난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내 무엇을 아끼랴. 게다가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몸이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내 눈 앞에는 삼만 몇 명이라는 우리 민족의 크림이라 할 지식계급과 현재 이상의 무서운 압제와 핍박을 당할 우리민족의 모양이 보였다. ‘내 몸이 죽어서 정말 저들의 머리 위에 달린 당장의 고난을 면할 수만 있다면’하고 나는 생각하고 괴로워하였다.

춘원은 자신의 친일 이유를 자신에게 피난처가 없음에서 우선 찾고, 그 연후에 동포들의 희생 및 지식계급의 고난을 면하게 하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피난처가 있었다면 춘원은 친일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피난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자신의 생계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함인가, 아니면 자신의 글재주를 숨길 수 없음을 말함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일제에 협력한다고 해서 권세나 명예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의 결단의 저변에는 민족을 위해서 협력하였다는 논리가 강하게 서 있는 것이다. 한편 그즈음 부인의 설득에 못 이겨 양주의 사릉에 집 한 채를 짓고 잠시 숨어 지냈으나, 이내 친일의 대열에합류한다. 그의 창씨개명에 대한 변을 들어 보자.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성을 창설하고 광량(光郞)이라고 일본적인 이름으로 바꾼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天皇御名)과 독법(讀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매일신보》(1940. 2. 20)에 기고한 〈창씨와 나〉의 일부이다. 보다시피 민족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겠다는 논리로 보기에는 친일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 역설적으로 보면 일제의 신뢰가 충분할 정도이다. 아무리 목적을 위한 글이라고는 하지만, 민족의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저버린 그의 글 이면에 담긴 논리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5. 춘원, 끝나지 않은 기억

8·15해방 후, 춘원은 침묵의 나날을 보냈다. 해방의 소식을 듣는 순간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2년 동안 독서와 소일거리로 보냈다. 그때 사릉의 집을 버리고 양주 봉선사로 간 것은 산중에 숨어 버리자는 결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건강과 가정 사정으로 산에서 나와 소설 집필에 나선다. 그때 쓴 것이 《나의 고백》이다. 이 글의 집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반민법도 이미 실시되었으니 내가 언제 심판을 받을지도 모르고 심판을 받으면 어떠한 법의 처분을 받을는지 모르니 아직 글을 쓸 수 있는 동안에 민족운동과 나와의 대략을 적어서 평소에 나를 사랑하고 염려하여 주던, 또는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던 이들에게 내 심경을 알리고자 하야 이 글을 쓴 것이다.

자신의 일제 협력에 대한 심판을 예감하면서, 민족운동과 자신과의 대략을 적어서 널리 알리고, 그에 연관된 자신의 심경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춘원은 자신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자신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자신이 지성인, 지식인으로서 투철하지 못하였고 나약하였음을 인정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사회 지도층의 일원으로 일반사회에 끼친 도덕적 책무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즉, 자신은 피난처가 없었기에 협력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그 피난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춘원은 〈친일파의 변〉에서 당시 친일파들의 변호의 입장을 소개하였지만, 거기에는 자신도 동의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친일파의 변〉은 춘원의 입장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친일파의 변〉에서 춘원은 먼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서울의 사대부집 아녀자들을 홍제원에서 전부 목욕시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사례를 들고 있다.

이로써 부녀자들의 정조문제를 매듭지으려 한 역사적 사례를 인용하며 친일파의 처리도 이와 같이 처리하자고 주장한다. 즉 삼천만 민족 전체가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 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맹세함이 옳기도 하고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의 ‘삼학사의 변’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절의를 지킨 것은 갸륵하며, 민족이 모두 숭앙한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춘원은 전 국민이 다 삼학사가 될 수는 없어서, 270여 년간 청나라의 절제 밑에서 살았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민족전체를 삼학사의 절개를 표준으로 단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런 단죄는 민족에게도 이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에서는 친일을 한 반민족자들에게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을 찍으면 그들의 재주를 활용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인의 친일파관’에서는 미 국무성 파견 장교의 입장을 소개한다. 즉, 그 미국인은 일본에 협력한 자를 다 제외하면 죽은 자와 외국으로 망명한 사람들로 새 국가를 구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친일파 배제를 주장하는 인물들은 좌익이며, 안락의자 정치가라는 의견에 대하여 그도 동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과 친일파’에서는 당시 대한민국의 최대의 과제는 인화라고 전제하며, 자신의 입장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민족의 대의로 말하면, 지난 3년간의 친일파에 대한 설주필주(舌誅筆誅)의 병고도 이미 3년 징역의 통고만은 할 것이요, 또 반민법의 제정으로 민족대의의 지향을 명시하였으니, 이제 추궁함이 없이 망각법을 결의하여 민족의 대화(大和)를 회복하고, 민족 일심일체의 신기력(新氣力)을 진작함이 현명한 조처가 아닐까. (중략) 화(和)는 힘이다.

이것이 춘원의 최종적인 결론이라면 그는 친일파의 문제 처리에 ‘망각(忘却)’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망각이 아닌, 기억의 재생이며 지속적인 기록의 보존이다. 망각은 오히려 반역사적인 행태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그 흔한 역사의 격언을 떠올릴 필요조차 없다. 더욱이 글의 도입부에서 소개하였지만 춘원은 자신의 친일이 민족을 위한 것이며, 그 논리를 불교의 중생구제에서 찾고 있음은 아연할 뿐이다. 춘원이 수용한 불교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소박하게 생각하면서, 추후에는 춘원과 같은 불행한 인물이 이 땅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부천대 교양과 교수,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용성》 《새불교운동의 전개 》 《첫키스로 만해를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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