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영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정보화 사업팀 기획팀장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이 아직까지 실감이 안 나던 설 연휴, 보통사람들처럼 유유자적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던 오후. 문득 서랍 속의 하얀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종종 속옷을 새하얗게 삶아 맑은 날 빨랫줄에 널곤 하셨다. 그 기억이 떠올라 옷장에 있던 하얀 옷들을 모두 꺼냈다.

흰옷과 함께 개중에 연한 빛을 띠고 있던 옷들도 괜찮겠지 싶어 열심히 비누칠을 해서 큰 솥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큰 솥은 이내 하얀 거품과 함께 모든 옷들이 변해 가고 있을 즈음 아차! 그 안에 있던 옷들의 색깔이 모두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단을 떨며 솥 안에 있던 빨래들을 쏟아내고 살펴보니, 모두가 분홍빛 옷들이 되어 있었다.

내가 아끼던 하얀 티셔츠도 예쁘게 분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쩜 그 짧은 시간에 나는 염색을 하고 만 것이다. 멍하니 옷들을 바라보다 보니, 나의 어리석은 행동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눈에 띈 것은 락스병. 이 락스는 색깔 옷도 모두 하얗게 만드는 그 락스가 아니던가. 그래 한 번 해 보자! 어떻게든 흰색으로 만들어 보려는 욕심으로 락스 한 병을 모두 빨래에 부었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분홍색의 빨래들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아직도 찬란한 분홍빛들 일색이었다.

결국 색깔의 변화를 포기하고, 락스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 옷들을 찬물에 다시 빨아 널고 말았다. 아주 연한 색이지만 어쩔 때는 한 색깔의 위력으로 다른 모든 색들이 물이 든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경험이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의 물들어 가는 모습들을 생각해 본다. 분위기에 물들어 가고, 사고방식에 물들어가고, 주변상황에 물들어 가고……. 자신의 색깔을 띠고 있기란 저 솥의 하얀 옷들처럼 무척이나 힘든 일인가 보다.

최근 지율 스님의 백일단식이 이슈화되면서 세상 사람들은 흑백의 색깔을 띠고 서로의 주장을 큰소리를 내어 말하고 있다.

“정말, 사람이 백일 간 단식을 할 수 있는 것인가 ? 경이롭다!”
“혹시 몰래 뒤에서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닌가?”

서로의 입장에 따른 가지각색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한쪽에서는 단지 한 비구니가 백일 동안 물만 먹고 단식을 한 것에만 놀라워하고 있다. 그 이면에 깔린 본연의 색은 보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지율 스님께서 백일 간의 단식을 풀었다는 발표가 나오자 그 자리에서 밤새워 가며 스님을 응원하던 사람들은 한밤중에도 그 기쁨을 나타내고자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그 노래 부르는 사람들 중에 나의 친구도 있었다. 친구는 매일 밤 스님을 위해 기도하고, 종이 도롱뇽을 접으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매스컴 화면에 나온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부처님 앞에서 모두들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두드리는 모습들은 가지각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분명 자신들만의 빛이었다. 진정으로 자연을 위하는 빛들이었으며, 진정으로 환경을 위하는 빛들이었다. 그 빛들의 소리는 지율 스님의 빛보다 찬란하고 아름다웠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물론 그 빛을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의 절대적인 희생과 노력도 필요했지만 그 빛을 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었다.

나는 그 빛들을 바라보는 회색이다. 저 사람들처럼 자연과 환경에 절실하지도 않았으며, 뭇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저곳에서 종이 도롱뇽도 접지 않았다. 아마도 저 색들 속으로 들어가면 나의 색이 변질될까봐, 더욱 검어질까봐 겁내하는 한 중생의 모습인 것이다. 확실한 목적과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는 자위적인 달램으로 나의 회색을 위로하지만, 행동하지 못한 나는 그저 회색으로 남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찬란한 색도 필요하지만 색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는 회색이 필요할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다. 다만 그 색들이 짙은 음영이 필요할 때는 나의 회색으로 그 찬란한 빛을 더욱 강조해 주는 역할로 만족할 따름이다.

모든 사바세계의 색들의 근원은 태양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지혜는 곳곳에 색들의 빛을 발하게 해 주는 근본이라 생각하며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이 저 사람들의 빛을 감싸주길 바랄 뿐이다.
그 빛이 발할 때 나의 회색은 그들의 그림자를 색칠하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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