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 이 글은 데리다의 사망을 계기로 김형효 선생님께 특별히 받은 원고이다. 다만 글의 분량이 많은 관계로 2회로 나누어서 게재한다.(편집자 주)

1. 책(le livre=book)과 텍스트(le texte=text)의 구분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거장이다. 그의 철학을 보통 해체주의(de큓onstructionism)라고 부른다.

왜 해체적인가? 기존의 서양철학사의 진리관과 형이상학을 해체시켜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독일의 하이데거의 사유와 유사하나 본인은 하이데거도 해체적 비판의 대열에 올려 놓고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서양의 기존 철학을 해체하려 한 공적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존재론적 사유를 청소하지 못하고 거기에 연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가 데리다보다 서양 전통철학을 해체하는 사유의 길을 먼저 걸어갔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가 자기의 철학의 특성으로 말하는 차연(差延, la diffe큥ance=differance)의 발상법도 하이데거가 이미 말해 놓은 차연(差延, der Unter-Schied=differance)의 길을 답습한 느낌을 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데리다가 해체하려 한 그런 서구 전통철학의 존재론과 다르므로 데리다의 하이데거 존재론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데리다의 철학이 하이데거의 사유와 같은 뉘앙스를 매양 풍기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와 하이데거를 갈라놓는 가장 큰 차이점은 데리다의 철학이 철두철미 존재론(l’ontologie)을 부정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을 부정하는 사유로 가득 차 있기에 그의 철학은 하이데거처럼 존재(存在)와 무(無)를 철학적 화두로 삼고 있지 않다. 데리다가 모든 존재론을 존재신학(l’onto-the큢logie)이라고 명명하면서 그것을 지우려고 하는데, 이 반(反)존재-신학적 사유도 이미 하이데거가 시작하였던 작업이었다.

데리다는 존재의 개념을 영원한 현존(現存)의 진리와 그 형이상학의 아성으로 보아서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는 데 반하여, 하이데거는 존재를 데리다처럼 현존의 초시간적 성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반존재론적 철학은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오독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의미는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서의 현존(la pre? sence=presence)이 아니라, 생멸을 나타내는 사건(das Ereignis=event)이거나 생기적 사상(事象, die Sache=state of affairs)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데리다 철학의 해체작업은 세상을 존재신학의 의미로 가득 채우려는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을 뜻한다. 존재신학은 이 세상이 신에 의하여 창조된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즉 이 세상이 의미의 창조자로서의 최초의 원인이자 마지막의 목적인 신의 현존적 존재에로 통일되고 귀결된다는 사상이 바로 존재신학의 기본이다. 즉 존재신학은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의 사상으로서, 이 세상은 신이 적은 책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신이 작성한 의미의 기승전결의 이야기로서의 역사라는 것이다.

신이 중심이고 중심은 하나이므로 신을 하나님으로 번역한 개신교의 사고방식은 강력한 일원론적인 존재신학의 대명사와 같다. 데리다의 철학은 일원론적인 신학적 세계관의 부정일 뿐만 아니라, 그 일원론적 신학적 세계관에 짓눌린 세상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를 풍기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신의 현존을 지우고 레비나스(Levinas) 철학의 영향으로 오히려 신의 부재(不在, l’absence=absence)를 자유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신중심주의의 거부는 인간중심주의의 해체와 연결되고, 이것은 또 자아의식의 지우기와 상관적이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자아철학과 의식철학의 종말을 유도한다. 신중심주의는 자아중심주의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고, 그 자아중심주의는 의식의 각성과 그 의미화에 집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아적인 각성은 하나님의 생각과 등식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그런 유아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존재신학적 철학은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일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아를 논리적 보편의식으로 무장한다. 그러나 겉으로 논리적 보편으로 무장한다 해도, 그 보편은 자아의식을 만인의식으로 도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와 자아중심주의는 다 열광주의(fanaticism)에 탐닉하는 위험성을 지닌다.

세상이 신이 저술한 책이라면, 그 책의 내용은 신의 진리가 백과사전식으로 다 담긴 완벽한 전체적 체계임에 틀림없으리라. 존재신학적 철학의 정상에 속하는 헤겔(Hegel)이 《철학의 백과사전(Enzyklop 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이라는 저서를 썼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은 일원적 진리의 중심이면서 최초의 근원이고 전체적 의미의 완벽한 체계이고 만물 속에 현존하는 영원한 선(善)의 모형인 셈이다.

그러면 악(惡)은 왜 생겼는가? 악은 가장 골치 아픈 난제(難題, aporia)다. 그래서 존재신학에서 악은 인간의 잘못(아담의 불복종)으로 추후에 우연적으로 이 세상에 도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악은 기독교적 존재신학에 의하면 하나의 스캔들의 치부로 간주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런 신학적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창세기 에덴의 낙원에 이미 이 세상에 악을 유혹한 뱀이 아담과 이브와 함께 있었고, 또 선악과가 이미 에덴의 낙원에 공존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신에 의하여 비로소 시작된 성선의 책이 아니라, 이미 일점 근원이 아닌 처음부터 이 세상은 선악이 함께 천을 짜 나간 그런 텍스트라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책과 구별하기 위하여 등장된 용어로서 책의 일관된 줄거리에 대하여 텍스트는 그런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직물(le textile) 짜기의 교직성(交織性, la textrualite?textuality)과 같은 의미의 계열에 속한다. 직물은 가로 세로의 실이 서로 교차하면서 직물을 짜나간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완벽한 체계가 없고 언제나 다른 천이 또 접목되어 상호텍스트(l’inter-texte)의 조립이 가능하고 또 연합텍스트(le con-texte)의 형성도 가능한 열린 구조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신이란 저자에 의하여 씌어진 책이 아니라, 저자가 없는 다양한 만남의 상호 연계성이 짜 나가는 천으로서의 텍스트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래서 세상은 불교적 표현처럼 상호 만남의 연기(緣起)가 짜나가는 열린 텍스트로 해석된다. 세상이 텍스트이므로 데리다는 그의 저서인 《문자학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와 《산종(散種, La Disse큟ination)》에서 각각 ‘텍스트 바깥은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There is nothing outside text.)’라는 유명한 명제를 발표하였다.

텍스트의 세상에서 신과 같은 최초의 시원도 최종의 목적으로서의 궁극적 소기(所記, le signifie?the signified)도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적인 사유는 하나님과 같은 강력한 일원론적 세상의 거부를 함의하고 있다.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거기에 시원과 목적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이 세상에 하나의 근원적 출발점도 없고, 되돌아가야 할 종국적 귀착점도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어서 자기 것과 타자의 것을 정확히 경계짓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만물의 자기 동일성(self-identity)의 주장이 무의미하고 또 불가능하다. 시원이 없기에 어딘가 이미 있는 시공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잠정적으로 얹어서 논의해야 한다. 이 세상이 바로 텍스트라는 것의 의미는 이 세상이 어떤 소기적 주제(所記的 主題, le the`me signifie?the signified thema)로 정리되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그물의 얽힘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현상은 자기의 독특한 자가성의 의미를 소유하고 있지 않고 다른 계기들을 만나서 접목되는 관계의 매듭에 의하여 특성이 결정된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늘 다른 현상을 만나서 짜여지는 무대의 연대(連帶)가 중요해지므로 고립적인 현상이 성립하지 않고 모든 현상은 늘 타자를 끊임없이 찾는 그런 욕망(desire)과 같다. 이 욕망은 노자가 《도덕경》 1장에서 말하는 만물의 유욕(有欲)과 유사한 의미이다. 만물은 자기와 다른 타자와의 해후에서 직물을 짜나가므로 텍스트의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 구조는 이중성으로서 데리다가 말한 두 가지 얼굴을 한(bifa-ce=bifacial) 야누스와 같고, 두 갈래로 나누어진(bifide=bifid) 잎맥과 흡사하다 하겠다.

2.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해체로부터 시작

데리다의 철학은 20세기의 철학적 이대 조류였던 후설의 현상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먼저 해체하기 시작한다. 현상학의 이념은 의식의 의미부여가 배제된 대상적 객관성을 진리로 간주하는 과학주의와 오로지 의식의 주관적 심리현상을 진리로 여기는 심리주의의 양극단을 넘어서 의식의 진리를 추구하되 심리주의에 빠지지 않고, 객관성을 진리의 기준으로 알되 몰의식적 대상주의에 젖지 않는 그런 중도의 위상을 탐구하려 하였다.

그래서 의식의 현상이 진리의 명증한 조건이 되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 현상학의 이념이다. 현상학은 객관적 대상을 의식의 노에마(Noema)로 여기고, 의식의 주관적 활동성을 노에시스(Noesis)로 명명하여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현존적 일치에서 진리의 명증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런 일치에 의하여서만 의식의 생생한 지향과 의식의 대상이 살아 있는 교감을 이루어, 의식이 스스로 진리임을 의식하는 공명현상 속에서 노에시스의 의식과 노에마의 존재가 의식현상 안에서 완전한 현존적 진리의 근원적 순수성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후설의 현상학이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형상학적 진리는 의식의 주관성과 존재의 객관성이 관념적 의미의 동일성을 이루는 일치의 현재적 순간에 다름 아니다.

의미의 동일성은 객관적 존재가 의식의 지향성 앞으로 다가와서 의식의 의미작용인 노에시스의 말하고자 함(le vouloir-dire)이 노에마적 존재의 불변적 의미(le vouloir-dire)를 채울 수 있을 때에 발생한다. 불어에서 ‘le vouloir-dire’은 ‘말하고자 함’의 뜻과 ‘의미하다’의 뜻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le vouloir-dire’은 노에시스적인 ‘말하고자 함’이 노에마적인 ‘의미함’과 일치하는 그런 채움의 본질이 현존의 순간이고, 그 현존의 순간은 또한 의식에서 영원의 시간으로 나타나는 현재라고 현상학은 주장한다. 진리는 불변적 절대성을 지니고 있고, 그 불변적 절대성은 영원의 다른 이름이고, 그 영원은 의식상에서 오직 현재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것으로 다 비존재(非存在)인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하므로 따라서 그 현재는 영원한 절대적 존재의 의식상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본질적으로 의식학이고 자아학(egology)이다. 자아를 보편적 선험의 논리로 읽더라도, 그것이 자아학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후설은 현상학의 진리가 의식 내부의 자기 명증성의 확실성으로 간주하면서, 그 명증성이 의식에 의하여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표현이 안 된 진리는 자의식으로 명증화가 안 된 잠자는 상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표현(Ausdruck=expression)은 의식이 존재현상과 일치시킨 존재론적 명증성을 스스로 의식화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 표현을 데리다는 ‘말하고자 함=의미함’의 뜻인 불어의 ‘le vouloir-dire’로 나타내고 있다. ‘말하고자 함’은 의미(le vouloir-dire)를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자 함(le vouloir-se-dire)’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자기표현은 삼위일체의 현상을 띠고 있다.

이 삼위일체가 살아 있는 생명의 의식이라고 후설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저 생명의 살아 있는 의식의 현상으로서의 현존은 눈 깜짝할 사이의 현재적 직관과 같다는 것이다. 즉 현재적 직관에서 의식의 노에시스와 존재의 노에마가 의미상에서 일치의 포개짐(Deckung=covering)이 성립한다고 후설은 주장하였다.

여기서 후설의 현상학은 존재론적 현존(presence)의 구조적 진리와 시간적 현재(present)의 발생적 진리가 서로 일치하는 그런 합일을 모색한다. 왜냐하면 현존의 구조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고 그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현재의 시간은 직관된 존재가 의식에 이성적으로 의미화되는 것과 만나는 시점이므로, 현상학적 진리는 ‘지금’이라는 현재가 현존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시점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긴다.

현상학은 무수한 현재 중심의 무한한 연속을 예상하는 철학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역사적 지평을 떠날 수 없는 의식학이고 자아학이다. 현상학의 진리는 무수한 현행적 지금의 시각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현존적 현행태의 형이상학이라고 데리다는 진단한다. 그래서 이 현재적 지금의 현존적 현행의 시각을 의식의 근원적 본(Urform des Bewußtseins=archiform of consciousness)이라고 후설은 주장하였다. 그래서 현재적 시간의 근원성이 과거와 미래를 구성한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중심의 언저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후설의 현재적 현존의 진리개념에 대하여 해체를 시작한다. 과거나 미래가 현재 중심의 파생체가 아니라, 현재는 과거의 다시 당김이고 미래의 미리 당김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소론이다. 즉 현재의 지금은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서 성립하는 차이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의 흔적이 현재적인 지금보다 더 나이가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차이가 현재의 현존보다 더 앞서고, 어긋남이 자기 동일성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해체적 견해다.

그러나 후설은 목소리의 말이 곧 의미의 표현이고, 이것은 또 자기 목소리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듣는 그런 자가일치의 현존적 질서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목소리의 말은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le-s’entendre-parler=hearing-oneself-speak)’ 현존적 진리의 표준으로 여겨서, 후설은 목소리의 말이 순수의식의 내면적 자가성의 현존적 진리로 인식한다.

목소리의 말은 보편적 의미의 이성과 의식이 내면성에서 공명을 일으키는 현존의 순간이다.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le-s’entendre-parler)’ 것은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내가 나를 만지는 것과 다르다고 후설은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보거나 만지는 것은 외면적인 것을 느끼는 감각과 관계하나,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내면적인 의식 안의 공명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소리(Stim-me=voice)는 ‘함께 앎으로서의 의식(con-science)’이라고 후설은 보았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목소리의 말하기를 듣는 것이 자기 현존의 일치공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소리로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현상은 조금 전에 말하여진 것을 내가 다시 잡아당기는, 근접 과거에 대한 흔적의 기억을 통하여 가능하지 현행적인 단순성으로서 구성된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말하기와 듣기의 내면적 일치공명으로서의 현재적 현존이 비현재적인 흔적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니라, 비현재적인 흔적(la trace)이 현존을 가능케 한다고 역설한다. 흔적이란 비현재적인 것이 이미 현재적인 것에 삼투되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고 듣는 것도 동일성의 현존이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듣는 것이 즉각 뒤따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말의 흔적에 대하여 동의하든지, 아니면 후회하거나 수정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가장 근접적 행위로서의 말하고 듣는 것도 아주 미세한 차이를 띠고 있는데, 나라는 자아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현존의 존재론적 자기 동일성을 하나의 허구적 환상이라고 비판한 데리다는 일체의 동일성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의식의 내면성과 자기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은 현존이 아니라 단지 의식의 내면에서도 같음과 다름이 나누어지고, 의식도 바깥의 비의식과의 차이에 의하여 표시되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순수 내면성의 자기 동일적인 표현(l’expression)이 아니고, 다른 것과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 기호적인 표지(l’indice)에 불과하다. 데리다가 볼 때 후설의 현상학은 순수 자기 동일성의 논리, 일점 근원의 형이상학적 현존의 신앙, 현재 중심의 절대성 신화, 내면성의 정신주의의 승리를 겨냥한 그런 존재론적 자가성의 철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상학이 의식학이고 자아학의 철학이라면, 구조주의는 반(反)의식학, 반(反)자아학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현상학과 실존주의가 지나치게 의식현상을 금과옥조로 삼고 철학적 사유를 펼쳐 나가는 것에 반하여, 의식의 바깥에 있는 사회적·문화적 무의식과 자연의 탈의식을 철학의 영역으로 개척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언어학적 구조주의는 소쉬르(de Saussure)의 언어학에서 출발을 하였다.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역시 문자학적 요인을 본질적 언어활동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 그것을 방계적인 것으로 치지도외하였다. 그는 소리를 언어학의 기본으로 여겨 소리의 음운론적 가치를 구조화하는 작업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그 소리의 음운도 다른 것과의 차이를 흔적으로 여기면서 기호적 변별성에 의존하므로 소리의 자기 동일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의미의 최종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도 하나의 허구적 꿈에 지나지 않음을 데리다는 지적하였다.

비록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음운과 의미의 자기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이항적 대립에 의한 구조적 대대법을 생각하였다 하여도, 데리다가 볼 때에 구주주의는 그 이항적 대립을 너무 정태적으로 보고 그 이항 사이에 오가는 힘의 상호적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 정태적 사유체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구조주의를 현상학보다 더 우호적으로 생각하였으나, 구조주의가 너무 정태적 이가논리(二價論理, le binarisme stati-que=static binarism)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레비-스트로스(Le큩i-Strauss)의 인류학의 철학도 데리다가 해체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레비-스트로스도 문자를 문명의 타락현상으로 진단하고 문자가 없는 순수 말의 사회를 자연적 유토피아에 가까운 현존적 정신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문자는 정신이 아닌 바깥의 물질적인 표지를 이용해야 하고, 문자는 유식한 자가 후천적으로 배우는 소유적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지나, 소리의 말은 그런 차별이 없는 인간 마음의 동감적 질서를 창출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루소(Rousseau)의 현존적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은 자연적 인간의 공동체적인 현존질서와 그 교감의 표현인데, 문자는 인공적인 표지로서 말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먼 거리의 거대 사회에서 지배하기 위하여 필요한 비현존적 문명의 도구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는 현존적 표현의 친근감이 죽은 부재적 표지의 상징과 같다.

그러나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가 루소의 영향으로 그런 현존적 유토피아니즘의 환상에 역시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현존과 일점 근원의 기원은 다 허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자기 것으로 충족되고 자기 일치의 동질적 현존으로 모두가 평화스럽게 산 문화는 있어 본 적이 없고, 순수 자연의 소리로서 모두가 공동의 삶을 영위한 그런 공동체가 성립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데리다의 소론이다. 순수 자연의 생활은 반(反)자연적 문명과의 차이와 그 흔적으로 살게 되어 있고, 인간 사이의 말도 이미 폭력과 상처내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고, 타인의 등장이 나의 성숙을 위한 자각이고 동시에 나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적의이기도 하여서, 모든 것이 시작이 없는 시작부터 이미 현존적 질서가 하나의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는 언명한다.

동일성의 유지가 평화이고 차이의 관계가 폭력이라면, 그 경우에 이 세상에는 이미 평화는 없고 오로지 폭력의 상관관계만이 전부인 셈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그런 유토피아니즘의 환상적 신화 대신에 인식론적으로 지나친 이항대립의 구조적 경직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시각이다. 말하자면 구조주의는 모든 것이 홀로 성립하지 않고 이분법적인 양식으로 나누어져서 성립하는 자연과 사회의 기본법칙을 이항적 대립(l’opposition binaire=binary opposition)의 이름으로 구조화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그 구조가 자체에서 스스로 분비하고 있는, 상호간 오가는 힘의 반송을 망각하였다는 것이 데리다의 진단이다.

말하자면 레비-스트로스는 전체 구조의 형식적 틀을 인식하기 위하여 ‘산업사회의 기술(la technique)/신석기시대의 하찮은 일하기(le brico-lage)’, ‘역사적 진보의 논리/야생적 구조의 논리’, ‘실존적 말(la parole)의 통시성(ls diachronie)/구조족 언어(la langue)의 공시성(la synchro-nie)’, ‘아버지-아들의 구조/외삼촌-조카의 구조’ 등으로 이분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저런 이분법의 대대적 구조를 통하여 전체적 구조의 인식이 보다 형식적으로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에 의하면 구조주의가 형식적 이항대립의 구조인식에 전념해서, 그 이항대립 사이에 오가는 힘의 반송과 왕래를 이해하지 못한 그런 한계를 정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조주의는 기계론적 차이를 말하면서도 그 차이가 단순한 이항적 대립의 관계가 아니고 차연(差延, la diffe큥ance)의 이중성을 한 단위로 엮고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견해다. 그래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의 큰 차이점은, 전자는 이항적 차이가 구조인식의 형식적 틀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후자는 차연의 상관적 이중성이 세상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있다.

3. 로고스와 다른 파르마콘과 코라로서 세상보기

 

로고스(logos)를 말이라고 흔히 옮긴다. 데리다는 서양의 철학과 형이상학이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평가한다. 데리다가 비판하여 마지않는 현존의 형이상학, 자기 동일성의 진리, 현재 중심의 시간관, 진리의 소리와 말을 의식이 내면적으로 듣는 자가애정의 정신주의는 서양철학이 애지중지하여 온 로고스 중심주의의 다양한 면모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로고스 중심주의는 말소리 중심주의(le phonocentrisme)로 번안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말소리는 정신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순수정신의 계시와 관계하지만, 말소리와 다른 문자는 바깥의 물질적인 표지에 의거해서 말소리의 생생한 생명의 현존적 현재의 순간을 살리지 못하는 죽은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말소리의 듣기는 신이 나의 의식을 통하여 생생하게 전하는 영혼의 소리와 유사하다고 보아서 전통적 철학이 중요시해 왔다.

이것이 ‘양심의 소리(la voix de la con-science morale=the voice of conscience)’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전통적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말=소리=의식=양심=영혼’의 등식이 성립하여 왔었다고 천명한다. 이 로고스 중심주의는 다른 말로 표현하여 진리가 정신적 내면성의 일치와 공명과 그리고 현존의 차원과 동일하다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 동일성의 최종적 소기(所記)가 신(神)이다.

이 신은 존재신학의 형이상학을 빚게 하는 원천이고, 존재신학적으로 신은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절대적 존재에 해당한다. 이런 존재신학의 영역은 인간의 의식 이외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은 신의 존재를 모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의식은 자아의식의 다른 이름이므로 신의 존재신학은 절대적인 자아의식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자의식 중심주의와 상통하고, 자의식의 진리가 주체성을 성역으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이 주체적 자의식은 곧 자가애정(l’auto-affection=self-affection)의 심리를 옹호한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자인 마아크 테일러는 자의식의 존재신학이 결국 나르시시즘의 병을 필연적으로 안게 된다고 진단한다. 나르시시즘의 병은 철학적으로 자아의 신격화를 은연중에 도모한다. 이런 로고스 중심주의의 자의식이 결국 서양 중심주의라는 백색신화(la mythologie blanche=white mythology)를 낳아서 종족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말하는 자의식 중심주의’와 이웃하여서 자가애정의 심리를 보편적 논리로 장식하고, 백색신화에 담긴 자가애정의 심리와 그 논리를 형이상학적 존재의 고유성(proprie큧e?property)으로 삼았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이 고유성은 역사의 현실에서 소유의 재산권(proprie큧e?propriety)을 신성시하는 발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재산권을 신성시하는 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 사회주의도 재산소유의 개인적 의미를 말살시키면서 관료제도적 소유주의를 지향하는 점에서 비개인적인 것을 결국 역설적으로 관료지배층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은폐된 소유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진리의 최종적인 소기가 있다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 최종적 소기는 곧 이 세상에 으뜸가는 순수한 일점의 근원적인 진리가 정신으로서 영원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그런 사상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소크라테스가 서양 철학사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부상시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쓴 《파이드로스(Phe큕re)》의 대화편에서 그런 진리의 원본은 늘 영혼의 말(logos)로서 내면적으로 표현되지, 결코 외면적인 흔적을 빌려서 표시하는 문자(gram-me-)의 기록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문자로 기록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교감에 의한 진리의 접근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혼이 없는 지식들을 알려서 지식을 하나의 생존 방편으로 삼으려는 소피스트들의 삶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비판하였다.

그래서 문자의 기록은 영혼에 진리의 현존이 없는 죽은 지식의 상품화와 유사하다고 간주하여, 그것을 진리 자체인 로고스와 다른 파르마콘(pharmakon)과 유사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비유하였다. 파르마콘은 오직 유일한 진리인 로고스와 달리 이중적인 괴상한 괴물과 유사한 자기동일성이 없는 그런 반개념(le contre-concept=counter-concept)으로서 약(藥)이자 동시에 독(毒)인 그런 자기 정체성의 상실과 같다.

파르마콘은 문자가 로고스의 말을 기록하는 점에서 약이지만, 그 기록은 이미 생명이 죽은 시체와 같은 기록이므로 인간에게 생명의 말을 망각케 함으로써 독이기도 하다. 그래서 파르마콘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의학의 탈을 쓰고 있으나 실제로 그렇지 못하므로 사이비 의학인 파르마케이아(pharmakeia)로서의 무당 굿거리와 유사하다고 소크라테스는 여겼다. 또 소피스트처럼 문자를 말의 대용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파르마코스(pharmakos)나, 또는 파르마케우스(pharmakeus)로서의 주술사나 마법사와 같다고 그에 의하여 생각되었다.

그래서 파르마콘은 말을 기능을 대신하여 망각에 대비하는 역할을 하는 점에서 선(善)이기도 하나, 그것은 진리와 영혼의 일치공명을 방해하고 단지 죽은 정보만을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악(惡)이기도 한 문자의 이중성과 닮았다. 문자에 사람들이 의존하기에 사람들이 기억을 공고히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억력의 감퇴를 자초하므로 문자의 역기능이 더 강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신의 고유한 기억력(mne-me-)과 다른 문자에 의한 간접적인 회상(hypomnesis)을 구분하였다. 기억력은 진리가 정신에 현재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상징하지만, 회상은 문자를 통하여 과거의 흔적을 현재에 잡아당기는 것이므로 현존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회상은 과거를 현재로 이끌어 오는 점에서 죽은 것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자와 문자의 기록에 의한 회상은 다 말의 현존성과 생동감의 생명력에서 보면 환영받지 못할 이물질이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기피물질과 유사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파르마콘은 로고스의 진리를 대신하려는 외부의 가택침입자에 비유되었다.

그런 점에서 파르마콘과 같은 문자와 표지(e큓riture=writing)1)는 현존적 존재론적 진리의 차원에서 세 가지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파르마콘과 표지적 문자는 애매모호한 이중성의 얼굴을 갖고 있어서 진정한 학문의 정신인 ‘참·거짓’ ‘안·밖’ ‘선·악’ ‘본질·가상’ ‘약·독’ 등의 대대법에서 앞의 계열을 택일하는 명증성의 논리에 어긋난다. 둘째로 파르마콘과 표지적 문자는 영혼의 자발적인 지식의 축적으로서 기억을 도와주지 못하고 생기가 빠진 죽은 지식만을 연장시켜 주는 회상만을 강화시켜 주어 오히려 인간의 기억력을 감퇴시킨다. 셋째로 파르마콘과 표지적 문자는 인간 내면의 정신적 생명력과 관계없이 바깥에서 들어 온 불청객이고 불법가택 침입자다.

이상 세 가지의 약점 때문에 파르마콘과 문자는 카드의 조커처럼 자기 정체성이 없이 명증한 정의가 불가능하고 이상야릇한 괴물과 같은 환영(幻影)으로서 이성의 판단을 우습게 여기는 반(反)진리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런 파르마콘이 아테네 법정에서 파르마콘과 동종의 의미인 파르마코스(pharmakos)라고 단죄된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비판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파르마케이아는 사이비 학문이라고 하여 그것을 참 학문과 준별하였고, 또 그런 학문을 하는 소피스트들을 파르마코스나 파라마케우스로 지탄하였는데, 소크라테스가 오히려 스스로 이테네의 정치당국에 의하여 아테네의 시민들과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파르마케이아를 전파시키는 무당이나 주술사로서의 파르마코스나 파르마케우스로 재판을 받아 독을 마시는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데리다는 크게 지적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지적 문자와 파르마콘과 같은 그런 이중적 애매모호성을 지니고 있는 환영과 유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닌지?

더구나 로고스를 진리의 대명사로 여겼던 플라톤마저도 표지적 문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력은 유한한데, 유한한 기억력으로서 무한히 반복되어야 하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공식적인 사랑방의 천명과는 달리 비공식적인 안방의 기술에 의하여 진리가 정신의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영원한 자기 동일성의 현존적 존재양식을 품고 있는 이데아보다는 오히려 어떤 관념적 동일성도 보지하고 있지도 않고, 고유성을 띠지도 못하는 파르마콘이 진리의 속성을 더 진솔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암암리에 생각하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술회하였다.

파르마콘은 약이자 동시에 독이므로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처럼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와 같은 자기 현존의 빈틈없는 동일성의 자기 명증성과 다르다. 파르마콘은 자기 정체성의 결여로 정의가 불가능한 비이성적 반(反)논리와 같다. 그래서 파르마콘은 진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진지하지 못하기에 믿을 수 없는 허상(虛像)이요, 가상(假像)의 환영(幻影)과 같다. 그 파르마콘이 약이면서 독이고, 선이면서 악인 그런 이중성의 구조를 띠고 있기에 그것은 양면긍정(et-et-=both-and-)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양면긍정의 이중성이 각각 자기 고유성을 지니는 실체가 아니므로 파르마콘은 ‘약-독’의 ‘사이(l’entre=the between)’와 다른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애국자요, 아테네의 정신을 다시 부활시키려한 로고스의 화신이기도 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그를 사이비 학문의 전파자요, 아테네 청년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자로 재판받기도 하였다. 전자를 보면 그는 선의 화신이지만, 후자로 보면 그는 악의 저주로 간주된다. 물론 이런 견해는 아테네 지배층의 편견이라고 일축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데리다의 철학에서 보면 이 세상에 진선진미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도 역시 파르마콘처럼 이중적인 야누스의 환영을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파르마콘이 약이자 동시에 독의 이중긍정인데, 그것은 동시에 약과 독으로서의 자기 고유성을 지니지 않는 가운데의 ‘사이’와 같고 그 ‘사이’는 이중부정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이중긍정은 약과 독이 서로 상호의존적인 발생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스스로 자생적인 실체가 아니므로 하나의 연생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약과 독은 서로 다르기에 또한 상호의존하는 사이의 왕래와 같다. 파르마콘으로서의 약과 독은 자가성을 각각 지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타자가 있기에 또한 자기가 성립하는 그런 의타기적인 성질이다. 이 가운데의 사이는 약과 독도 아닌 제3의 장르로서의 빈 터전인 셈이다. 이 빈 터전을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인 《티마이오스(Time큖)》에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코라(chora)로 명명하였다.

파르마콘이 이중긍정의 초점 불일치로 여겨진다면, 코라는 이중부정의 뜻으로 이해되고 그 이중부정은 중간의 사이에 있는 허공이나 동굴과 같은 빈 터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말의 직접적 표현에 대한 문자의 간접적 표지요, 로고스의 자기 의식적 진리에 대하여 정체성이 없는 야누스 같은 파르마콘의 이중성이요, 이데아의 태양과 같은 선의 최종적 의미와 같은 아버지의 법에 대하여 중심이 없이 동굴(l’antre)2)처럼 비어 있는, 어머니의 무중심과 같은 코라의 이중부정은 데리다의 철학이 왜 서양 전통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생아인가를 이해케 한다. 결국 데리다의 철학은 파르마콘(pharmakon)의 이중긍정과 코라(chora)의 이중부정의 세상보기를 말한다.

데리다가 언명한 파르마콘의 비논리적 논리와 같은 이중긍정은 불가에서 말하는 상관적 연기법(緣起法)의 사유와 유사하고, 코라의 비논리적 논리와 같은 이중부정은 불가에서 보는 반야공(般若空)의 사유와 가깝다. 연기적인 가유(假有)의 현상은 본성상으로 바로 반야공의 무성(無性)과 같으므로, 파르마콘의 이중긍정의 현상이 바로 본성인 코라의 이중부정의 가시화와 같다고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또 코라처럼 이중부정이 보여 주는 ‘사이’의 비어 있음은 이중긍정의 현상이 존재론적 자기 동일성의 질서가 아니고, 다만 상대방이 설정되어 있기에 생기는 가정적 생멸의 환영에 불과다는 것을 정시한다.이 점은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인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대위법과 대단히 유사하다.

그러나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차이점이 미묘하게 존재하는 것 같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는 유무(有無)의 차이와 동거를 동시에 말하는 존재론인데, 데리다는 아예 존재론의 용어를 파괴시키면서 모든 존재를 문자학의 파르콘과 코라의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차원으로 세상보기를 주장한다. 말하자면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철학적 차이는 존재론(ontology)과 문자학(grammatology)의 차이로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데리다가 비판한 전통적 로고스 중심주의적 그런 형이상학적 존재론이 아니다. 그런 존재론은 하이데거가 이미 비판한 존재자적인 존재론으로서의 형이상학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ontologisch=ontological)인 의미와 존재자적(ontisch=ontic)인 의미의 차이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데리다가 비판한 존재론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과 다르다. 여기서 데리다의 하이데거 읽기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의 존재(Sein=Being)는 무(無, Nichts=nothingness)의 현상으로서 사실상 데리다 철학의 용어로 옮기면, 파르마콘적인 그런 이중성을 이미 함의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를 생기의 사건(Ereignis)으로 보기를 종용한 것은 존재가 이미 단가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라, 생멸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알린다. 그리고 데리다가 말한 코라의 의미도 하이데거가 말한 무(無)의 의미와 유사하나 다른 점이 있다.

데리다가 말한 코라는 노자가 《도덕경》 1장에서 지적한 유욕(有欲)으로서의 생/멸(生/滅)과 멸/생(滅/生)의 연기법을, ‘동/이(同/異)’를 차이 속에서 동거하게 해주는 사이의 중간 통로와 같은 공백의 뜻인 ‘요(틃)’에 오히려 더 유사하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무(無)는 무욕(無欲)의 무(無)가 함의하고 있는 무한대의 ‘묘(妙)’를 알려 주는 의미에 더 어울린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무는 불교적으로 공성(空性)의 뜻으로 풀이되고, 데리다의 코라는 공상(空相)의 의미로 읽혀지는 것 같다. 따라서 데리다의 철학은 가유(假有)의 연기법의 현상적 측면에서 해석됨직하고, 하이데거의 철학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실상을 더 말하는 것으로 비유도 좋을 것 같다.

파르마콘은 하나의 현상이 그 자체 독자적으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과 다른 것들과의 무수한 교감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현상은 오로지 정신적인 실체도 아니고, 더구나 물질적인 실체도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이미 상호 얽힘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각각의 현상은 다른 모든 것과 얽혀 있는 관계를 띠고 있기에 얽혀 있는 쌍방의 양가성이 오히려 어느 한 쪽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일방도 양방의 상호 얽힘을 떠나서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파르마콘의 논리는 또한 코라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코라의 허공과 사이의 빈 공간은 양방의 상호 얽힘의 거래를 가능케 해 주는 터전이기도 하고, 그 양방이 자가성을 지닌 자기 동일적 실체가 아님을 암시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중긍정의 이면이 이중부정이다. 파르마콘의 이면이 코라이다. 따라서 파르마콘은 양자택일의 로고스적인 논리의 파괴며 해체를 부른다.

파르마콘의 논리를 양가성(ambivalence)의 논리, 또는 동거(cohabi-tation)의 논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논리는 마치 젓가락 운동이 그리는 왕복의 표지와 유사하고 새 날개의 춤으로 무보(舞譜)가 새겨지므로로, 이것은 로고스의 궁국적 진리를 찾는 일원(一元)의 형이상학을 비웃는 것과 닮았다. 그러므로 파르마콘의 논리는 잡종(雜種)의 논리로서 이 세상에 순종(純種)의 현상이 성립할 수 없음을 반영한다. 데리다가 보는 이 세상의 사실은 이 세상이 잡종의 만(卍)자와 다르지 않고, 그 만(卍)자는 상호의타적인 이중성의 현상에 다름 아니므로 그 이중긍정은 자가성이 없는 환영(simulacrum)의 사이와 같다. 그래서 그 환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이중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마치 불가에서 현상론적으로 보면 연기법인 것이, 실상론적으로 보면 반야공이라고 일컫는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파르마콘과 코라의 법은 이 세상의 사실이 서로 차이의 다름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서로 동거의 접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파르마콘과 코라가 이 세상의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는 택일의 엄숙한 결단과 태도로 진지하게 집착해야 할 어떤 것도 없는 셈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유심론이나 유물론의 형이상학으로 결정화하거나 정의화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텍스트나 텍스트 연합이므로 모든 것이 서로서로 전염되어 있고, 이질적인 것과 접목되어 있을 뿐이다.(다음호에 계속) ■

김형효

서울대 철학과 졸업.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석사ㆍ박사학위. 공군사관학교 조교수, 서강대 철학과 부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부설 한국학대학원 대학원장,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제10회 열암학술상 수상. 저서로 《데리다의 해체철학》 《데리다와 老莊의 독법》 《메를로-뽕띠와 애매성의 철학》 《老莊사상의 해체적 독법》 《원효에서 다산까지》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물학, 심학, 실학》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1, 2)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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