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적 코드와 사역적 기능

1. 호명과 명령

나는 그동안 스님들의 공안을 읽으며 이 공안들이 숨기고 있는 어법 혹은 코드에 관심을 두고 몇 편의 글을 쓴 바 있다.

선적 코드란 공안이 숨기고 있는 의미작용의 체계를 뜻하고 이런 체계는 일상적 언어의 코드와 다른 특성을 보여 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적 코드는 자연 언어의 코드를 부정하고 해체하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탈코드를 지향한다. 요컨대 선적 어법은 말하는 행위를 부정하기 위해 말하는 어법이다.
모든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고 언어적 의사소통의 조건은 야콥슨에 의하면 발신자, 수신자, 지시물(문맥), 접촉, 코드, 발언행위(메시지) 등 여섯 요소이다. 발신자는 수신자에게 전언을 보내고 전언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지시물(문맥)이 요구되고 발신자와 수신자가 함께 공유하거나 적어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코드가 요구된다. 접촉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물질적 회로와 심리적 연결을 뜻하며 발언 행위는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의사소통이 시작되고 지속되는 것은 접촉에 의해서이다. 모든 말에는 이상 여섯 가지 요소가 드러나지만 어느 요소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언어적 기능은 달라진다.

발신자를 강조하면 표현적 기능, 수신자를 강조하면 사역적 기능, 지시물을 강조하면 지시적 기능, 접촉을 강조하면 친교적 기능, 코드를 강조하면 메타 언어적 기능, 발언행위를 강조하면 시적 기능이 나타난다. 물론 오직 한 기능만을 충족시키는 언어적 메시지는 없고 대체로 각 요소 사이엔 위계적 질서가 존재하고 따라서 지배적 기능을 하는 요소가 존재한다.(R. Jacobson, 'Closing Statement-Linguistics and Poetics', Style in Language, ed. T. A. Sebeok, The MIT Press, 1964, 353 )

그러나 나는 그 동안 선적 어법 혹은 코드의 특성을 살피면서 이상 여섯 가지 기능을 별도로 고찰했고 그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 선적 코드와 자연 언어의 코드가 보여주는 차이가 좀더 분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발표한 글은 '선과 언어'(시와 세계, 2003, 여 ), '시적 어법과 선적 어법'(한국언어문화, 2003, 24집), '시적 코드와 선적 코드'(유심, 2004, 봄), '선적 코드와 메타 언어적 기능'(한국언어문화, 2004, 25집), '기호학으로 읽는 선'(세계의 문학, 2004, 가을) 등이고 특히 뒤의 세 편에서는 친교적 기능, 메타 언어적 기능, 지시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이런 작업의 일부로 야콥슨이 말하는 사역적 기능을 중심으로 선적 코드의 특성을 밝히기는 데 목적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어적 교통이 수신자를 강조할 때 이른바 사역적 (conative) 기능이 나타난다. 일부에서는 능동적 기능이라고도 번역하지만 나는 사역적 기능이라고 번역한다. 능동이나 사역이나 크게 보면 비슷한 의미이지만 다시 생각하면 능동(conation)은 움직이게 하는 발신자의 의욕이 강조되고 사역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신자의 행위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물론 수신자를 강조하는 말하기에선 발신자의 명령이 중요하고 따라서 야콥슨에 의하면 사역적 가능의 문법적 표현은 호격과 명령법이다. '호준아!'라고 내가 부를 때 이런 호명은 발신자인 내가 아니라 수신자인 호준이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이런 언어적 메시지는 수신자의 반응을 유발하고 따라서 호준이는 내가 부르면 '네!'라고 대답하거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한다. 명령의 경우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그러나 야콥슨도 지적하듯이 명령은 진술과 다르고 이런 차이는 단순히 사역적 기능이 수신자를 강조한다는 점을 초월하는 철학적 특성을 보여 준다. 예컨대 명령문 '술을 마셔라'는 서술문 '그는 술을 마신다'와는 다른 특성을 보여 준다.

첫째로 서술문은 주체가 지금 술을 마시는지 마시지 않는지 혹은 물을 마시며 술을 마신다고 거짓말을 하는지 실제로 증명할 수 있고 이런 실증의 원리에 의해 이 문장의 진리/허위가 판별된다. 말하자면 서술문의 경우엔 진위(眞僞)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마셔라'의 경우엔 이런 진위 판단이 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명령문, 명령은 객관적 진위의 세계를 초월한다.

둘째로 서술문 '마신다'는 '마셨다, 마신다, 마실 것이다'처럼 시제 변화가 가능하고 그런 점에서 시간의 구속을 받는다. 요컨대 서술문은 시간을 내포한다. 그러나 명령문 '마셔라'의 경우는 이런 시간성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이런 문장 혹은 말은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제 변화가 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이런 진술은 오직 말하는 순간, 지금 여기서만 가능하고 지금 여기는 따지고 보면 없고 시간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없고 지금 여기도 없기 때문에 명령은 시간을 초월하는 절대의 힘을 소유한다.

셋째로 서술문 '그는 술을 마신다'는 의문문 '그는 술을 마시는가?'로 전환이 가능하고 또한 시간이 개입되면 의문문 '그는 술을 마셨는가? 마시는가? 마실 것인가?'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마셔라'의 경우에는 이런 전환이 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명령문은 의문, 질문, 회의를 초월하는 어법이고 그런 점에서 질문을 초월하는 절대적 힘을 소유한다.(이상 호격과 명령법에 대해서는 야콥슨, 위의 글 참고)

요컨대 사역적 기능은 (1) 수신자를 지향한다, (2) 진위의 세계를 초월한다, (3) 시간을 초월한다, (4) 질문을 초월한다는 특성을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사역적 기능을 강조하는 어법은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절대적 영향을 주는 힘, 권위, 권력의 어법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호명(appellation)과 질문(interpellation)에 의해 주체를 구성하고 라캉에 의하면 모든 말하기는 수신자에게 영향을 주고 그런 점에서 권력의 제도화이다. 선적 담론에서는 사역적 기능의 이런 특성이 과연 어떻게 드러나는가?

2. 네가 왜 오느냐 ?

알튀세르가 말하는 질문과 호명에 의한 주체 구성은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고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내포하기 때문에 관념적이 아니라 물질적인 개념이다. 곧 종교, 교육, 가족, 법, 정치, 노동조합, 언론 매체 등이 여기 속한다.

이들은 복수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억압적 국가 기구와는 다르고 주체는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여러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참여할 때, 그 구체적 의례를 따를 때, 그 의례가 요구하는 실행 속에 자리를 잡을 때 나타난다. 이데올로기가 호명과 질문에 의해 주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먼저 일상적 의례와 주체의 문제. 방문을 두드리는 친구가 있다.

나는 방문을 향해 '누구야?'라고 묻는다. 질문한다. 그는 '나야'라고 대답한다. 이런 대답이 가능한 것은 이런 대답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친구라는 것을 알고 문을 열어 준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암시하는 것은 당신과 나는 '언제나 이미 주체'라는 것. 말하자면 주체는 일상적 의례 속에 기능한다. 그러나 이런 인지는 알튀세르에 의하면 관념적 인지의 의례, 곧 실행의 인지이지 이런 실행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주체의 범주가 구체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 첫째 정식화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구체적인 주체로 부르거나 구체적인 주체로서의 구체적인 개인에게 질문한다.'(이상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문제는 이승훈, '알튀세르의 주체 개념', 탈근대주체이론-과정으로서의 나, 푸른 사상, 2003, pp. 142-143 참고)

위의 보기가 강조하는 것은 관념적 주체이고 따라서 이런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거나 질문 받을 때 구체적인 주체로 구성된다. 비유해서 말하면 '누구야?' '나야'의 형식은 관념적이고 '누구야?' '한양대 국문과 2학년 누구'의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 왜냐하면 이런 질문에 의해, 그러니까 교육 체계를 전제로 구체적인 개인은 구체적인 주체로 변형된다. 그렇다면 공안의 경우에는 이런 질문과 대답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음은 건주 처미(處微) 선사의 공안이다.

대사가 앙산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혜적(慧寂)입니다.' '어느 것이 혜이고 어느 것이 적인가?' '눈앞에 있을 뿐입니다.' '앞과 뒤는 여전히 있구나.' '앞뒤는 고사하고 화상께선 무엇을 보셨습니까?' '차나 한 잔 먹으라.' (전등록 1, 동국역경원, 2002, 335 )

처미 대사는 이름을 묻고 앙산은 '혜적'이라고 대답한다. 앙산은 혜적의 호. 혜적 선사는 강서 대앙산(大仰山)에 머물며 호를 앙산이라고 했다. 이 공안이 강조하는 것은 이름을 알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름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 인간은 명명됨으로써 주체가 되고 이른바 自性을 지니지만 원래 자성은 없고 이름은 우리를 구속할 뿐이라는 것. '어느 것이 혜이고 어느 것이 적인가?'라는 처미 선사의 질문은 언어 유희에 의해 이름을 부정하고 파괴한다.

이름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고 이 이름은 종교 체계에 속하고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호명이지만 위의 공안은 그런 이데올로기를 부정한다. 한 마디도 선불교의 혁명적 사유는 일체의 이데올로기, 심지어 종교적 이데올로기마저 거부하고 부정하고 파괴한다는 데 있다. 諸法無我 諸行無常이기 때문이다. 임제는 다음처럼 말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이기영, 임제록강의 하권, 한국불교연구원, 1999, pp. 23-25)

부처를 죽이는 것은 부처도 이름이고 관념이기 때문이고 조사를 죽이는 것은 선(禪)은 종파가 아니기 때문이고 무슨 종파 같은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고 나한을 죽이는 것은 깨달음도 없기 때문이다. 부모를 죽이는 것은 부모의 권위 대한 부정(이기영)일 수도 있지만 선이 강조하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이고 친척권속을 죽이는 것은 친척이라는 것도 관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제가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수처작주(수처작主)이다. 가는 곳마다 네가 있고 네가 주인이라는 것. 요컨대 자아, 주체는 없고 자아, 주체도 관념이고 이 관념이 인간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선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은 이런 데에 있다. 기독교의 종교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이 강조된다. 예컨대 알튀세르도 지적하듯이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난 삐에르라 불리는 한 인간인 너에게 말한다. 너는 삐에르이고 이것은 너의 근원이다. 네가 사랑의 율법을 지킨다면 너 삐에르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 점에서 기독교적 주체는 하느님이라는 대타자에 종속되는 주체이다. (이승훈, 위의 글, p. 145)

그러나 선은 같은 종교이지만 이런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부정하고 파괴한다. 위의 공안은 혜적이라는 법명, 곧 불교 이데올로기에 의한 호명 자체를 부정하는 보기이고 질문에 의한 주체 구성이 파괴되는 보기이다. 위의 공인이 질문과 관련된다면 다음은 호명과 관련되는 보기로 담주 위산영우( 山靈禑) 선사의 공안이다.

어느 날 대사가 원주를 불렀는데 원주가 오니 대사가 말했다. '원주를 불렀는데 네가 왜 오느냐 ?' 원주가 대답을 못했다. 또 시자를 시켜 제1좌를 불러 오라 해서 제1좌가 오니 대사가 말했다. '제1좌를 불렀는데 네가 왜 왔느냐?' 또 대답이 없었다. (전등록 1, 319 )

이 공안이 강조하는 것 역시 크게 보면 이름과 인간, 이름과 주체, 호명과 주체의 관계이다. 대사가 원주를 부르자 원주가 온다. 그러나 대사는 '네가 왜 오느냐?' 라고 묻는다. 대사가 강조하는 것은 너는 원주가 아니라는 것. 너는 너의 이름과 무관하다는 것. 요컨대 호명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부정이다.

이런 부정이 강조하는 것은 불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이고 그런 점에서 선은 불교라는 이데올로기, 관념, 언어를 부정하고 임제가 주장하듯 부처라는 대타자를 부정하고 자연 언어가 보여주는 사역적 기능을 부정하고 결국 자연 언어의 의미작용 체계가 해체된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하고 현실을 구성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주체나 현실에 대해 상상적 관계에 있다. 그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잘 알려진 것처럼 라캉의 거울 이론의 영향을 받고 그의 이론을 원용한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이고 이 거울 이미지는 이미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허상이고 가짜이고 허깨비이다.

이 거울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문제는 라캉의 거울은 상징계, 곧 언어 질서 이전의 단계에 속하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는 호명이 암사하듯 상징계, 곧 언어 질서에 속한다는 것. 띠라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나 질문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이중 구조를 보여준다.

곧 상상계에 속하며 동시에 상징계에 속하고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하고 질문하는 게 아니라 호명 자체가 구현하는 갭, 심연, 틈에 의존한다. 그런 점에서 공안이 지향하는 것은 이 갭, 심연, 틈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고, 따라서 공안에 나타나는 호명과 질문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를 해체한다.

크립스는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알튀세르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의 한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상적 자아와 자아 이상 사이에 존재한다.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는 이상적 자아에 해당되지만 이런 자아는 이데올기적 장치(대타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본다는 점에서 자아 이상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결국 이상적 자아와 자아 이상의 갭, 심연, 틈이 구성한다.

따라서 호명의 효과는 개인들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말하는 이 갭, 심연, 틈에 의존한다. 그런가 하면 알튀세르가 보기로 드는 경찰의 호명 역시 주체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호명되는 주체가 느끼는 모호한 죄의식과 명백한 무지의 긴장을 구성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H. Krips, 'Fetish: An Erotics of Culture', J. Lacan 3, ed. S. Zizek, Routledge, 2003, pp. 144-148)

3. 말하라

자연 언어에 나타나는 사역적 기능의 문법적 표현은 호격과 명령이고 이상은 호격을 중심으로 한 선적 담론의 특성. 알퉤세르에 의하면 호명이 주체를 구성하고 그런 점에서 호명은 권위, 힘, 영향, 지배의 어법이지만 선의 경우에는 이런 어법, 그러니까 호명 자체를 부정하고 따라서 주체마저 부정한다.

그렇다면 명령은 ? 앞에서도 말했듯이 명령의 특성은 진위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질문을 초월한다는 데 있다. 선적 담론에서는 자연 언어의 명령이 보여주는 이런 특성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음은 지주 남전(南泉) 보원 선사의 공안.

동서 양당(東堂西堂)에서 고양이 하나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대사가 이를 맡아 가지고 대중에게 외쳤다. '말하면 고양이를 살리겠거니와 말하지 못하면 목을 베리라.' 대중이 아무도 대답치 못하니 대사는 곧 고양이 목을 베었다. 때마침 조주(趙州)가 밖에서 돌아왔는데 대사가 앞의 일을 들어 이야기하니 조주는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갔다. 대사가 이를 보고 말했다. '아까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등록 1, p. 282 )

남전 참묘(斬猫)로도 유명한 이 공안에서 남전이 강조하는 것은 '말하라'는 명령이고 이 명령에 대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 이 명령으로 남전이 노린 것은 과연 무엇인가 ? 동서 양당에서 공부하던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자기네 것이라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말하면 고양이를 살리고 말하지 못하면 목을 베리라(大衆道得卽救 道不得卽斬却也). 남전이 노린 것은 그냥 말이 아니라 깨들음, 득도에 대해 말하라는 것.

그러므로 첫째로 그의 명령은 상황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두 편으로 나뉘어 스님들이 싸우고 있다면 그가 할 일은 이 싸움을 말리거나 어느 편 손을 들어 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분별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의 명령, 곧 도에 대해 말하라는 것, 득도에 대해 말하라는 그의 명령은 이런 분별, 구별, 판별을 초월한다.

둘째로 대중 가운데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남전은 고양이 목을 벤다. 물론 대답을 못하면 목을 베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는 살생을 금지하기 때문에 이런 행위는 도, 진리, 법에 어긋나고 따라서 그의 행위는 도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표면적으로는 도가 고양이 죽음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층적으로는 고양이를 살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가 ? 대답을 하면, 한 마디 도에 대해 말하면 고양이를 살리겠다고 말했다. 무슨 수를 쓰든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고 그것은 스님들에게 고양이와 인간, 고양이와 스님은 다르다는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죽어도 관계없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스님들을 지배한다. 말하자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특히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짐승이라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기영 교수는 이른바 이류중행(異類中行)에 대해 말한다. 곧 참묘 공안의 중요한 문제는 이류중행에 있다는 것. 따라서 남전 선사가 고양이 목을 벤 것은 이류중행과 관계 되고 이류중행은 다른 류의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불법을 행하는 것. 그러므로 남전 선사가 고양이 목을 벤 것은 대중에게 이류중행을 암시한 행위가 된다. 너희들도 고양이가 되어 불법을 행하라는 뜻. (이기영, 무문관강의, 한국불교연구원, 2000, p. 158)

넷째로 따라서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간 것은 분별이 없는 여여한 행위. 곧 위가 따로 있고 아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짚신은 모자도 될 수 있다는 것, 이른바 본말전도. 이런 행위를 이기영 교수는 이류중행의 의미로 해석한다.

다섯째로 '벽암록'에 의하면 남전의 이 공안은 의로(意路), 곧 상식이나 분별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로 수행자를 인도하고 언전불급(言詮不及), 곧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 언어를 초월하는 경지를 수행자 스스로 터득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른바 묘용을 터득한 자가 있느냐 없느냐고 물은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조주의 행위는 고양이를 토막 낸 남전의 행위에 대한 조주의 기지에 찬 대응으로 해석한다. 곧 남전 선사가 고양이 목을 벤 것이 철저한 부정이라면 조주의 행위는 철저한 긍정을 표현한다. (안동림 역주, 벽암록, 현암사, 1999, pp. 335-341)

끝으로 '선문염송'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대홍은(大洪恩)이 염하되 '고양이를 구제해서 무엇하려는고? 조주와 남전을 구제했어야 하리라.' 그런가 하면 취암기(翠岩璣)는 이렇게 말한다. '설사 신 두 짝을 다 머리에 이고 나갔을지라도 몽땅 베었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고? 끊어야 할 것은 끊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부르기 때문이다.'(선문염송2, 동국역경원, 2002, pp. 12-13)

요컨대 모든 공인이 그렇지만 이 공안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분분하다. 문제는 이 공안, 특히 선적 담론의 모델로 인용한 이 '말하라'는 명령이 노리는 기호학적 특성이다. 자연 언어의 명령처럼 이 공안에 나오는 명령도 수신자를 지향하고 절대적인 권위, 힘, 권력을 행사한다. 호명의 경우 이런 힘이 소멸한다면 명령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런 힘이 강화된다. 또한 자연 언어의 명령이 암시하는 철학적 특성을 전제로 하면 남전의 명령은 진위의 세계를 초월하고 수신자의 질문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다.

그의 명령이 노리는 것은 지금, 여기서의 깨달음이고 이런 깨달음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 도는 (1) 분별심을 버려라, (2) 인상(人相)을 버려라, (3) 이류중행을 행하라, (4) 여여한 행위를 보여라, (5) 언어를 초월하는 경지에 대해 말하라 등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대홍은의 말처럼 남전과 조주도 틀렸다면 남전의 명령도 부정된다. 그는 명령하지 말았어야 한다. 도를 만나면 도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공안이 암시하는 것은 남전 산사가 공연히 이런 공안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나를 괴롭힌다는 것. 그러나 한편 이런 고통이 선적 담론, 특히 선적 명령의 본질이다. 과연 남전 선사가 말한 것은 무엇이고 고양이 목을 벤 것은 무엇이고 조주가 우습게도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간 것은 무엇인가 ?

4. 선과 지배 담론

라캉에 의하면 담론은 권력을 제도화한다. 말을 할 때 말하는 사람은 타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캉의 경우 발신자는 행위자(agent)가 되고 수신자는 타자other가 된다. 그리고 언술 행위는 어떤 결과나 효과를 생산하고 행위자를 지배하는 진리를 강조하는 바 이때 행위자는 진리의 전달보다는 진리의 고통을 체험한다. 이상의 관계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t----a----o----p

t는 진리, a는 행위자, o는 타자, p는 생산을 뜻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경우 진리와 생산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하고 따라서 위의 도표는 아래처럼 변형된다.

a ----- o

t p

는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도표는 다시 기표, 주체, 타자 개념이 도입되면서 변형된다. 기표(SA)의 기능은 차이에 있고 따라서 주체와 타자는 기표에 의해 구성되고 기표는 기표1 (SA1)과 기표2(SA2)를 요구한다. 주체가 행위자를 대신하고 그러나 이 주체는 기표가 생산하고 기표2에 의해 기표1이 존재하고 기표2는 기표들의 보고이고 이 보고가 대타자를 암시하고 기표2는 기표1에 의해 조작되는 지식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기표2는 기표들의 상호의존적 그물을 뜻한다.

그러므로 a--- o는 SA1---- SA2로 대치되고 주체 (S)는 SA1에 의해 구성되지만 SA1은 SA2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라캉의 경우 주체는 기표와 기표 사이에 존재하고 따라서 주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SA1------SA2

 

S

그리고 담론이 생산하는 것은 의미화 과정에서 제거된 찌꺼기, 잔재, 잉여로서 이른바 소문자 타자 a에 해당한. 따라서 담론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완성된다.

SA1------- SA2

 


S a

라캉에 의하면 이런 담론이 이른바 지배 담론이고 이런 담론은 언어의 명령 차원에 속한다. 그리고 이상의 네 요소의 관계가 시계의 역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이른바 대학 담론, 분석가 담론, 히스테리 담론이 구성된다. (이상 G. Wajeman, 'The Hysteric Discourse', J. Lacan 1, ed. S. Zizek, pp. 79-81 참고)

위에서 살핀 남전의 명령은 지배 담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첫째로 t---a---o---p의 관계를 전제로 하면 남전을 지배하는 진리는 도, 깨달음이고 따라서 그는 대중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의 명령은 이 깨달음을 생산하기 때문에 진리와 생산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남전의 명령 자체가 대홍은의 지적처럼 선적 오류라면 이 도, 깨달음 같은 것도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행위자(a)와 타자(o)이고 남전 선사가 고양이 목을 베는 행위는 선사가 행위자이며 동시에 타자가 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때 고양이 목을 베는 것은 이류중행에 대한 깨달음을 암시하고 그런 점에서 그의 행위는 그가 대중이 되고 나아가 고양이가 되고 마침내 스스로 소멸하는 것을 암시한다, 요컨대 남전의 명령은 대중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지배 담론에 해당하지만 진리와 생산이 같고 행위자와 타자가 하나가 되는 특수한 지배 담론이다.

둘째로 그렇다면 주체, 곧 남전은 어디 있는가? 그가 고양이를 죽이는 행위를 이류중행과 관련시키면서 그의 소멸에 대해 말했지만 라캉에 의하면 주체는 기표와 기표 사이에 존재한다. 주체(기의)는 계속 미끄러지고 주체가 존재하고 구성되는 것은 배가 닻을 내리는 것, 혹은 누비점에 비유된다. 배는 항구에 닻을 내리고 영원히 거기 머무는 것은 아니고 다음 날 다른 항구로 떠난다. 이런 배처럼 주체 역시 기표에 의해 구성되지만 이 기표는 다른 가표로 치환하고 따라서 주체는 기표와 기표 사이에 기표로 존재한다.(라캉의 주체 개념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이승훈, '라캉의 주체 개념', 탈근대주체이론-관정으로서의 나, 푸른 사상, 2003, pp. 100-130 참고 바람)

라캉이 완성한 지배 담론을 전제로 하면 남전의 주체는 기표 SA1(명령)에 의해 구성되지만 이 기표는 다른 기표 SA2(고양이 목 베기)로 치환되고 따라서 주체는 기표와 기표 사이에 가까스로 힘들게 잠시 존재/부재한다. 그리고 이 담론이 생산하는 소문자 타자 a는 도, 깨달음이고 이 깨달음은 주체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남전의 공안이 보여 주는 지배 담론의 특성은 아래와 같은 특수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SA1 SA2

S = ( a )

문제는 기표 SA2, 곧 기표들의 그물, 혹은 대타자가 생산하는 잉여, 말하자면 의미화 과정을 초월하는 잉여 쾌락, 욕망의 대상인 소문자 타자이다. 고양이 목을 베는 남전의 행위는 의미작용 체계를 초월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행위를 통해 그가 보여 주는 기표의 찌꺼기, 의미를 초월하는 잉여 쾌락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선불교에 대한 정신분석을 요구한다.

다만 내가 소문자 타자 a를(a)로 표시한 것은 하나의 기설로 선의 경우에는 정신분석이 해명하는 이런 잉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무아(無我) 사상은 의식, 전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도 부정하기 때문이다.

5. 내 꿈을 해몽하라

다음은 꿈과 관계되는 담주 위산영우( 山靈祐) 선사의 공안이다.

대사가 조는데 앙산(仰山)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대사가 돌아 앉아 벽을 향했다. 앙산이 말하기를 '스님 어찌 그러십니까.' 하니 대사가 일어나서 말했다. '내가 아까 꿈을 꾸었는데 풀어 보라.' 앙산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대사께 세수를 시켜 주었다. 조금 있다가 향암(香岩)도 와서 문안을 하니 대사가 말했다. '내가 아까 꿈을 꾸어 혜적이 풀었는데 그대도 해몽을 해 보라.' 향암이 차 한 잔을 다려다가 바치니 대사가 말했다. '두 사람의 견해가 사리자(鷲子)보다 더 하구나.' (전등록 1, p. 321)

첫째로 앙산이 와서 문안을 드리자 졸던 영우 산사가 벽을 향해 돌아앉은 것은 참선을 뜻한다. 면벽(面壁) 혹은 벽을 보는 행위(壁觀)가 이런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초조 달마가 소림사에서 벽을 마주하고 9년을 지낸 일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 공안에서는 대시가 졸다가 앙산의 문안을 받고 벽을 향해 돌아앉는다. 돌아앉는 것은 외면하는 것. 그러므로 대사의 행위는 이중적 의미를 띤다. 하나는 앙산의 인사를 부정하는 것. 다른 하나는 참선의 중요성. 말하자면 '그대는 인사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당장 참선이나 하라'는 뜻.

둘째로 앙산은 돌아앉는 대사를 보고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다. 이 물음은 왜 자신의 인사를 받지 않느냐는 것. 그러자 대사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한 해몽을 부탁한다. 도대체 꿈 내용도 모르는 꿈에 대해 어떻게 해몽을 한단 말인가 ? 그러나 이런 명령은 남전의 명령보다 한 수 위이다. 남전의 경우에는 도에 대해 말하라는 것이고 물론 이때 도는 언어를 초월한다. 그러나 명령의 내용은 암시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서 기표(명령)는 기의 (도)를 전제하고 암시한다.

그러나 영우 선사의 경우엔 기표(해몽하라)가 기의(꿈의 내용)를 배제하고 기의를 초월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명령은 순수한 기표, 절대적 기표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 이런 명령은 기의가 아니라 기표, 지시물이 아니라 기호, 언어 자체에 대한 질문이고 명령이다. 그런 점에서 꿈은 무슨 내용이 있는 게 아니라 순수한 기표의 세계이다. 라캉은 꿈,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응축-은유/치환-환유)고 말하지만 영우 선사에 의하면 꿈,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된 것이 아니라 기의가 없는 기표, 내용이 없는 언어가 된다.

셋째로 이런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앙산은 물 한 대야를 떠다가 대사께 세수를 시켜 드린다. 쉽게 해석하면 이런 행위는 세수가 암시하듯 대사가 꿈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의미이지만 해몽과는 모순되는 행위이고 동시에 해몽을 뜻하다. 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날씨가 차츰 흐려오고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다. 늦은 가을 저녁 다섯 시. 나야말로 이 방에서 나가 세수를 하고 와야 하는 게 아닐까? 요컨대 이런 행위, 세수가 꿈에서 깨는 일이고 꿈을 해석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해몽이다.

이 세상이 꿈이라면 이 세상에는 무슨 의미, 내용, 기의가 있는 게 아니고 그런 점에서 무가 있고 무라는 기표가 있고 이 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앙산의 행위는 해몽도 아니고 해몽이 아닌 것도 아니다. 유마가 강조한 불이(不二)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영우 선사는 앙산이 자신이 꾼 꿈을 제대로 풀었다고 말한다. 향암이 차 한 잔을 대려 바치는 행위 역시 비슷한 문맥을 거느린다. 차를 마시는 행위나 세수를 하는 행위나 그 의미는 비슷하고 그것은 모두 꿈에서 깨어남, 자아 소멸, 무아, 정화, 고요를 암시한다.

넷째로 영우 선사의 공안은 라캉이 말하는 분석가 담론에 해당한다. 이 담론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나타난다.

a S

SA2 SA1

. 담론을 지배하는 것은 a, 곧 소문자 타자이고 이것은 의미화 과정에서 제거된 찌꺼기, 잔재, 잉여로서 정신분석의 대상이지만 분석가의 자리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 소문자 타자(분석가)는 S, 곧 주체(피분석가)의 말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이때 주체가 생산하는 것은 SA1, 곧 주체의 원초적 기표 SA1이고 이와 대립되는 SA2는 분석가가 전제로 하는 지식으로 분석가는 이 지식을 피분석가에게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SA2는 주체의 무의식적 지식을 의미하고 이 두 기표의 단절은 무의식적 진리가 제대로 규정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이상 G. Wajeman, 위의 글 참고)

영우 선사의 공안에서 선사가 앙산과 향암에게 해몽을 부탁하는 상황은 선사가 피분석가, 곧 주체에 해당하고 그가 자신의 꿈, 곧 무의식, 욕망에 대한 해석을 앙산과 향암에게 부탁하기 때문에 앙산과 향암은 a, 곧 소문자 타자의 자리에 있게 된다. 말하자면 두 스님은 그들의 지식(SA2)을 전제로 선사와 대화를 나누고 이런 대화에 의해 피분석가인 선사는 자신의 원초적 기표(SA1)를 생산한다. 그리고 이 원초적 기표와 지식은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나 위 공안에서는 이런 분석가 담론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첫째로 피분석가에 해당하는 영우 선사는 꿈을 꾸었지만 꿈의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고 따라서 그의 소문자 타자, 곧 무의식과 욕망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분석가의 자리에 있는 소문자 타자 a는 존재하지 않고 앙산의 행위나 향암의 행위는 이런 소문자 타자의 부재와 관계된다. 둘째로 분석가 가와 피분석가 사이에 대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주체 ( 피분석가 )인 선사가 생산하는 원초적 기표 SA1도 존재하지 않고 분석가에 해당하는 앙산과 향암에게는 그들이 기댈 지식 SA2도 존재하지 않는다. 앙산이 세수를 시켜드리고 향엄이 차를 대려 드리는 행위는 이런 지식의 부재, 곧 그들의 행위가 지식, 언어, 말의 세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런 분석에 의하면 앞에서 해석한 것들, 예컨대 세수와 차 마시기의 상징적 의미, 곧 깨어남, 자아 소멸, 정화 같은 의미도 덧없게 된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행위가 해몽이라는 역설은 유지된다. 셋째로 남는 것은 피분석가에 해당하는 선사의 말과 행위이고 이런 말과 행위 역시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해방되고 그런 관계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그는 피분석가이며 동시에 분석가가 된다. 말하자면 그는 앙산과 향암에게 '내 꿈을 해몽하라'고 말했지만 이 말은 진리도 아니고 허위도 아닌 명령의 형식이지만 수신자의 직접적인 반응을 노린 것은 아니다.

6. 병 속의 거위를 꺼내라

이상에서 나는 선적 담론, 곧 공안에 나오는 사역적 기능의 특성을 질문, 호명, 명령의 차원에서 살폈다. 호명의 경우에는 호명이 주체를 구성한다는 알튀세르의 개념을 원용하고 명령의 경우에는 라캉의 지배 담론과 분석가 담론을 원용했다.

첫째로 자연 언어의 경우 명령은 (1) 수신자를 지향한다, (2) 진위의 세계를 초월한다, (3) 시간을 초월한다, (4) 질문을 초월한다는 철학적 특성을 보여 준다. 명령이 수신자를 지향한다는 것은 발신자의 발언이 수신자의 직접적인 반응이나 행동을 유발하고 이때 직접적이라는 것은 수신자가 발신자의 명령을 명령대로 따르는 것. 그러나 공안의 경우에는 발신자의 명령이 수신자를 지향하지만 직접적 반응과 행동을 유발하지 않는다.

둘째로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런 호명, 질문, 명령에 대한 반응과 행동이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공안의 경우에는 이름 자체를 부정하고 이런 부정은 언어 부정, 주체 부정과 통하고 특히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부정하고 해체한다. 선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이런 점에서도 드러난다. 기독교가 종교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면 선은 종교 이데올로기를 부정한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 세례명인 삐에르라 명명되는 순간부터 주체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선의 경우에는 법명, 곧 불교 이데올로기조차 부정한다.

셋째로 남전의 참묘 공안을 모델로 할 때 명령은 수신자를 지항하고 절대적인 힘, 권위, 권력을 행사한다. 호명의 경우 이런 힘이 소멸한다면 명령의 경우에는 강화된다. 공안의 명령 역시 자연 언어의 경우처럼 진위를 초월하고 수신자의 질문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자연 언어가 추상적 시간을 지향한다면 공안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의 깨달음을 지향하고 이 깨달음에 의해 순간도 초월하고 시간도 초월하고 마침내 시간에서 해방된다는 특성을 보여 준다.

넷째로 라캉의 지배 담론을 전제로 하면 남전의 주체는 기표(명령)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지만 이 기표는 다른 기표(고양이 목 베기)로 치환되고 따라서 주체는 기표와 기표 사이에 존재/ 부재한다. 그리고 이 담론이 생산하는 소문자 타자, 잉여 쾌락, 의미 초월의 쾌락은 정신분석을 요구한다.

다섯째로 영우 선사의 공안은 라캉의 분석가 담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공안의 경우엔 소문자 타자, 곧 선사의 무의식과 욕망은 드러나지 않고 주체가 생산하는 원초적 기표도 존재하지 않고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선사의 말과 행위는 분석가 담론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선사는 피분석가이며 동시에 분석가가 된다.

공안에서 읽을 수 있는 이런 언어적 특성, 특히 사역적 기능의 특성은 물론 이 밖에도 여러 유형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1) 물건을 가져오라, (2) 관념을 가져오라, (3) 시키는 대로 하라 (4) 차나 마시고 가라 등의 유형이 있다. 그러나 이런 유형도 궁극적으로는 위에서 살핀 특성을 기본으로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지만 주어진 지면도 그렇고 힘도 없고 무엇보다 날씨가 흐려서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특히 '전등록'에 자주 나오는 이른바 끽다거(喫茶去) 공안으로 알려진 '차나 마시고 가라'는 공안과 메타 언어적 기능에 속하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공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요구된다.

옛 사람이 병 속에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거위가 점점 커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병을 깨뜨려도 안 되고 거위를 죽여도 안 된다. 어떻게 거위를 꺼내겠는가? 병 속의 거위를 꺼내라! (전등록 1, p. 382 )

육긍 대부가 남전에게 한 이 말이 지금 서초동에 앉아 글을 쓰는 나에게 하는 말 같고 중요한 것은 병 속의 거위를 꺼내는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 병 속의 거위를 꺼내라! 어떻게? 오늘의 화두이다.

이승훈

1942년 춘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196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인생', '비누' 외 다수, 시론집 '한국모더니즘시사',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외 다수.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백남 학술상 수상.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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