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온 진각종 교육원 연구교수

국가의 동량이 되겠다고 느즈막에 행정학도로서 공부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 때 민주화를 위해 서울 시내는 온통 시위의 인파로 가득 차 있었고, 최루탄 냄새로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면서 역사의 현장에 내가 있어야 한다며 뛰어 나가던 동료 학우가 생각난다. 학교 도서관 옥상에서 구호 소리와 여기 저기 터지는 최루탄 발사 소리를 들으며, 자욱한 연기 속에서 이리저리 흩어지는 시위대를 바라보며 일어났던 많은 단상들을 잊을 수가 없다.

행정학으로 과연 민중을 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그 뜨겁던 열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물질적으로 결코 풍요롭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 불교학을 공부한 지도 십여 년을 훨씬 넘기고 있다. 지금은 불교학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다니며 떠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불교학의 길에 들어선 그 순간 나도 출가의 길에 들어섰던 셈이지만, 지금은 출가의 그 초심을 잃어버리고 조바심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붓다는 비록 조그마한 나라였지만 일국의 왕자였다. 개인교수 밑에서 당시에 알려진 모든 학문적 이론과 무술 등 몸으로 익히는 일체의 것을 다 배웠다고 한다. 또한 이웃 나라의 공주를 맞아들여 결혼도 하여 자녀를 두기도 하였다. 국왕은 그들을 위해 사계절 쾌적하고 호화롭게 지낼 수 있는 궁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그가 왜 자리를 박차고 달밤에 도망치듯 출가를 하였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대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민족과 민중의 고통을 목도(目睹)하고 선각자적인 사명감에 불타 그 고통을 해결하고자 결단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인들은 그 성인들이 속했던 민족의 불운이 있었으며, 그 불운을 극복하는 과정인 경우가 많았다.

붓다의 나라는 이웃한 대국인 코살라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는 않고 있었지만, 약소국가로서 거의 속국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모로 직접적인 간섭을 받은 것은 아니며, 자주적인 모습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즉 직접적인 지배 하에서 민족이나 민중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일국의 왕자로서 국왕과 마찬가지로 주변대국으로 인한 정신적인 압박감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적인 압박감이 출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이라면 그 압박감을 피해 출가하기 보다는 차라리 국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행동을 옮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벌레는 새에게 잡아먹히고 새는 또한 독수리에게 잡아먹히는 중생들의 어쩔 수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을 목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각 중생들이 차별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다.

곧 중생들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목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에게 이러한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졌을까? 그는 비록 조그마한 나라이긴 하지만 일국의 왕자로서 하고자 하는 일을 채우면서 그것을 즐거움으로 하여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세간의 인간으로서 성취해야 할 것이 모두 성취된 상황에서, 다시 뭔가를 성취할 것은 바로 인간을 넘어선 것에 대한 성취 바로 그것인가? 욕심을 전환한 또 하나의 욕심, 쉽게 말해 명예욕 같은 것, 그것일까? 욕구의 단계를 밟고 올라간 끝에 마지막으로 행한다고 하는 욕구, 바로 그것을 위해 그는 출가한 것인가? 아니다. 그가 말한 내용을 보면 그것은 분명 아니다. 그가 출가하여 얻으려고 했던 것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얻는 것이었다.

욕구를 채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여건임에도 그가 출가를 단행한 동기는 고통 즉 괴로움에 있었다. 욕구를 채움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 즉 잠시 사라지는 고통은 또 다른 욕구가 일어남으로써 고통은 사라지지 않음을 안 것이다. 삶과 죽음의 반복 속에서 그 괴로움은 반복되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 해탈과 대자유, 열반과 적정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갈애, 애착, 애욕, 욕구, 욕망, 욕심을 놓는 길뿐이다. 그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욕구의 근본 발생지인 자기를 놓는 길뿐이다. 그리고는 진리 그 자체에 맡기는 길뿐이다. 방법은 그것뿐이다.

출가 후 그는 기존의 모든 수행방법을 섭렵하였으나, 그 기본은 욕구·욕망을 놓는 일을 실행한 것이다. 곧 자신의 욕구를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을 진리에 맡겨버린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욕망을 놓아버리는 것이 진정한 출가의 정신이건만.

이제 돌이켜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버려야 할 '나'만이 아니라 만나는 것마다 집착하고 마는 이 '나'를. 많은 수행자들은 '나'를 버리기 위해서 세속을 벗어나는 출가를 단행한다. 그리고 또 많은 수행자들이 '나'를 버리기 위해서 세속을 향해 돌진하는 '출가'를 단행한다. 우리는 그 중의 어떤 것에 속할까?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속을 벗어나는 출가였든 세속을 향해 부닥쳐가는 출가였든, 출가하던 그 날의 초심을 혹여 잃어버리지나 않았는지? 혹여 '버린다'는 그 초심을 잃어버리고 주위의 누군가에게 '붙잡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IMF 시절보다 더한 불황이 우리 사회를 폭풍처럼 강타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이 악물고 버티는 것이야 당연지사겠지만, '붙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혹여 '버려야' 할 것까지 꼭 붙잡고서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마다 살펴볼 일이다, 출가의 초심으로 되돌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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