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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 오리엔탈리즘의 시작-니시다와 교토학파 / 김수정
해외불교논단
[21호] 2004년 12월 10일 (금) 버나드 포오레 김수정 crys9@korea.ac.kr

편집자주
* 이 글은 버나드 포오레(Faure, Bernard)의 선에 대한 이해와 오해: 선 전통에 대한 인식론적 비평(Chan Insights and Oversights : An Epistemological Critique of the Chan tradition,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3.)의 '제2장 젠오리엔탈리즘의 시작 '의 일부분(pp.74~88)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자주는 별도로 '(역자주)'라고 표시하였음을 밝혀둔다.

1. 니시다 연구에 대한 기존의 시각 비판

교토 학파는 일본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 (西田幾多郞, 1870-1945)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니시다의 사후에 '니시다 철학(西田哲學)'의 주요 주제들은 교토학파가 재집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니시다 철학이 "일본이 배출한 철학자 중 가장 까다로운 철학"1) 이라고 강조하지는 않겠다. 1) Piovesana, Gino K. 1968. Recent Japanese Philosophical Thought, 1862-1962: A Survey. Rev. ed. Monumenta Nipponica Monographs 29. Tokyo: Sophia University. p.91.

단지, 여기서는 젠2) 에 대한 현재의 철학적 논의에서 '니시다 효과(Nishida effect)'를 평가하려고 하며, 니시다의 복잡한 사상의 틈새에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오리엔탈리스트적인 '정신의 극단적 단순화(esprit simpliste)'의 재현에 주목하고자 한다. 2) (역자주) 저자 Faure는 이 책에서 한국의 'Seon', 중국의 'Chan', 일본의 'Zen'을 구별하여 쓰고 있다. 따라서 번역에서도 'Zen'을 음역하여 '젠'이라고 통칭한다.

비록 그의 철학 속에 담겨있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설명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연구는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폴 드 망(Paul de Man), 마르세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등이 해온 최근의 정치적 입장에서의 연구와는 구분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할 것이다. 일본과 서양의 역사가들에 의한 많은 니시다 비판은 오리엔탈리즘의 비난 속에 작동하는 '전가(轉嫁) 기제(scapegoating mechanisms)'에서 비롯된다.

비록 나의 최초 관심이 니시다의 담론에 있는 젠의 수사적인 요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 의해서, 이 수사가 국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순수경험(純粹 經驗)'에서 나온 '순수철학'의 표현으로서 니시다와 교토 학파의 저작물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치적 환원주의로 빠지지 않고서, 서구 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러한 경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의 많은 저작물에도 불구하고, 니시다의 사상은 아직 서구에 그다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3) 최근에 서구 학계에서 니시다와 교토 학파에 대한 연구 점차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니시다의 철학에 관해서는 Noda (1955), Dilworth (1969, 1970, 1978), Waldenfels (1966), Maraldo(1989)가 있다. 교토학파에 관해서는 Ogawa(1968), Waldenfels(1966), Kasulis(1982), Maraldo(1989)등의 연구가 있다. (이 연구물에 대한 서지사항은 Faure, p.75 각주33과 pp 281-315의 Bibliography 참조)

교토학파를 설명하는 학자들에 의해 니시다 철학이 스즈키(鈐木大拙)의 철학과 유사다는 정도로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니시다의 철학은 스즈키의 철학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다. 니시다 철학은 그 자체로서는 아니지만, 교토 학파와 스즈키가 '오리엔탈리스트'적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아마도 니시다의 계승자이며, 스즈키와 함께 젠에 관한 많은 책을 공저했던,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같은 후기의 사상가들의 연구를 밝히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면 제약 때문에 여기서의 설명은 교토 학파의 창시자로서 니시다에 대한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동안 대부분의 연구에 있어서 니시다의 제자들은 니시다의 연구물들을 단지 부연 설명하는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2. 교토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니시다와 스즈키가 동창이었고, 둘의 우정이 니시다가 죽은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젠의 역할에 대해서, 니시다와 스즈키는 서양 철학에 대해서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스즈키가 젠의 반 체계적 본성을 강조하면서, 서양 철학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경멸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해, 니시다는 서양 철학과 양립하는 방법에서 젠의 통찰력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니시다 철학'은 때때로 '순수 경험'의 개념에 바탕을 둔 '젠 철학'으로 이해되기도 했었다.

니시다의 철학을 통한 조화로움의 추구는 실존주의적 문제를 타협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그의 초기 철학에서, 니시다는 스즈키의 경우를 너무나 의식하였기 때문에 참선 수행 혹은 지적 성취에 대해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후에 니시다는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으나 '견성(見性)' 바로 직전, "학문을 위해 젠을 오용했었다"4) 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Knauth Lothar, 1965. "Life is Tragic: The Diary of Nishda Kitar .", Monumenta Nipponica 20, 3-4: p.342.

단지 교토에 있는 한 사찰에 그의 묘를 안치한 것 자체만 놓고서, 젠에 대해 깊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교토 학파와 젠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의 상징으로는 볼 수 있다.
니시다는 전후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한 것 때문에 그동안 신랄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경우에서처럼,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주의 깊은 질문거리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또한 니시다의 보수주의가 '비굴한 조화의 유형(cringing harmony type)'에 속하는 것이라 여기는 맑스주의자적 설명 역시 최근 '니시다 철학'의 성장세를 막지 못하였다. 어떤 이는 이 판단이 니시다의 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실패한, 철학의 사회정치적 개념을 반영하는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로더 카우스(Lothar Kauth)는 "니시다가 전적으로 지적, 역사적 도전에 응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스즈키와는 달리, "니시다는 단순히 전통과 근대화라고 하는 양극단에 위치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5) 고 한다. 5) Knauth Lothar, 1965. p.358.

또한 데이비드 딜워스(David Dilworth) 는 "전체적으로 니시다의 사상은 때때로 그의 이름을 흡수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에 확 뜨일 만큼 현재의 사상들(예를 들어 초 국수주의자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니시다의 글은 그러한 관점에서 다소 비전형적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딜워스는 덧붙이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동안 니시다의 글에서는 맹목적인 애국주의적 정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완화된 특징을 보인다. 그것은 그의 글 전체에서 단지 '하나의 일관된 중심 사상(a leitmotiv)'일 뿐이다."고 한다. 6) Nishida Kitar . Last Writings: Nothingness and the Religious Worldview. Trans. David A. Dilworth.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p.129 원문참조. "It is only [sic]a leitmotiv in the overall corpus of his writings."

니시다는 '국체(國 )'의 조건에 대해 상당히 의심쩍은 글들을 남겼다. 또 1941년에 그는 황제에게 역사철학을 강의했다.『일본 문화의 문제 (The Problem of Japanese culture)』는 원래 1938년 교토대학의 강의록 시리즈로 발간되었다. 이것은 일본과 서양의 유사성을 강조하고자 한 시도로, 그는 이로 인해서 전쟁 동안 친서구적 인물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특별히 지방군과 관련한 은폐 사건 때문에 그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극우당은 그의 글을 계속해서 사전 검열 하였다. 7) Knauth 1965, p.348

비록 니시다가 "세계와 인간성에 대해서 오리엔탈적 관점을 강조하고, 옥시덴탈8)의 개념에서도 만약 그것이 우월하지 않다면, 이것과 동등한 어떠한 점이 있다."9) 고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수주의자들에 대해 반대하며,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를 수도, 없고 어떠한 문화를 취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10) 8) 역자주) 박노자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타자화하여 비하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인식"이며, 옥시덴탈리즘이란 "서양을 정형화 범주화 하는 서양/비서양 식의 이분법적 인식"이라고 구분한다.(박노자,『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례신문사, 2003, p.9.) 9) Tsunoda Ryusaku, Wm. Theodore de Bary and Donald Keene, eds. 1964,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2 vol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 p. 352. 10) Ibid, p.353.

오리엔탈리즘을 반대했던 니시다는 "동양을 하나라고 지칭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 같은 하나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11) 고 말하였다. 11) Ibid, p.35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양의 문화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발견하였다. 비록 스즈키처럼 동양의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의 논리를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물을 대상으로 간주하는 논리인 옥시덴탈적 논리를 마음을 대상으로 간주하는 오리엔탈적 논리와 대조하였다. 12) Ibid, p.356.

하지만 니시다 철학은 화엄-젠 철학에서 기인한 이상적인 조화였고, 모든 갈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은 모든 것을 편향적이게 하는 효과를 너무 쉽게 가져 올 수 있었다. 서양의 독자들은 "개인은 창조적 세계의 창조적 요소들"13)이고, 이 세계는 "우리 각각이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자아 정체성의 세계에서 개별적 총체로서 자유 의지로 살아가는" 14) 곳이라 말하는 그의 견해에 매력을 느낄지도 모른다. 13) Ibid, p.359. 14) Ibid, p.361.

그러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해결책으로서, 그의 이론적 개인주의가 차츰 황국 체제를 위한 변명으로 변화할 때, 니시다의 개념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명확해진다. 니시다는 천황가가 중심인 일본 역사의 특수성 속에서 황제를 위해서는 개인과 전체는 서로를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15) Arima Tatuo. 1969. The Failure of Freedom: A Portrait of Modern Japanese Intellectual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p.11.

니시다가 1941년 황제에게 역사철학을 강연한 것에 대해 니시다의 제자들은 그것은 일본의 '신성한 임무'의 거부이며, 개인이 애국심이라는 제단에 희생당할 때 개체주의를 역설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신성한 천황(天皇)과 신국(神國) 일본 사이에 본질적인 정체성이 있다고 하는 견해에 따르면, 니시다가 국체(國 ) 이념을 주장했던 것과는 모순된 것이었다. 그의 저서,『일본 문화의 문제』(1940)와 『국체(國 )』(1944)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잘 나타나 있다. 16) Tsunoda. pp. 350-365.

니시다에 대한 다양한 글 읽기는 근대의 독자들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주/객 이분법이 없는 궁극적 진리라는 관점에서, '순수한 경험'의 단계에 바로 접근할 만큼 운 좋은 사람들에게 세속적 수준에서의 역사적 가치는 다소 의미 없는 듯이 보여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사회정치적 결정론이라는 관점에서 철학의 진리에 대한 주장을 해석하기 위해서 속제의 단계에 남겨져 있다 할지라도, 아마 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니시다는 그 이전의 (철학적) 비평에 대해 "전적으로 나만의 입장에서 나온 비평이란 없다.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입장에서 나온 비평은 진정한 비평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7) Nishida, 1987. p.128

물론, 바로 그 표준이 니시다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양의 종교 전통에 대한 그의 비판이 그러하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엄밀히 말하면, '차연(diff rend)' 해석에서 어떤 단일한 해석적 접근조차도 상대를 완전히 패배시킬 수는 없다. 다만 일단 어떠한 철학적 논의가 모종의 교조적인 징후를 보인다고 할 때, 그것은 스스로 이념적 적합성을 만들게 된다는 사실이다.

니시다는 '침묵하는 공범'이었는가? 아니면 심지어 대일본(大日本)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지지자였는가? 아니면 단순히 일본 문화의 열렬한 옹호자이었는가? 비록 문헌의 실제 상태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 하더라도, 우리는 정상참작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니시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굉장히 문제가 되며, 그의 철학에 대해 위험이 따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니시다 철학의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는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3. 순수경험(純粹 經驗)

나의 목적은 니시다의 도덕적, 정치적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지금부터는 소위 니시다 철학의 인식론적 요소들에 돌아가서 그것의 문제가 되는 면들을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순수경험이라는 개념에 대한 짧은 논의를 하겠다.

교토학파의 한 가지 주장은 즉, '절대 무(無)'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스즈키의 반야지(般若智)와 마찬가지로, 순수 경험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도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한 부정적 용어들은 대승 불교 전통에서의 묘사와 니시다가 끊임없이 언급했던 마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ckhart)의 신(新)-플라톤 전통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묘사를 생각나게 한다.

이것은 그의 뒤따르는 서술에서 뿐만 아니라, 순수경험 그 자체는 불교 특유의 기대치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것에서부터 발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스티븐 카츠(Steven Katz)에 따르면 "순수경험이란 없다. 즉, 모든 경험은 과정이며, 조직되는 것이며, 그 자체가 극단적일 정도로 복잡한 인식론적 방법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18) Katz, Steven T. 1978. "Language, Epistemology, and Mysticism." In Mysticism and Philosophical Analysis, ed. Katz, 22-74.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26

다른 말로 하면, 심지어 '무(無)'자 조차도 "문자"19) 라는 것이다. 19) Boon, James A. 1982. Other Tribes, Other Scribes: Symbolic Anthropology in the Comparative Study of Cultures, Histories, Religions and Tex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234

'순수경험'이란 용어는 또한 그리스도 신비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떠올리게 한다. 니시다에게는 종교적 경험이 첫째이고, 가장 우위에 있는 정신 활동이었다. 그는 "색깔이 색깔로서 그저 눈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그래서 신이 종교적 자아에게 스스로의 영혼에 대한 사상(事象)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20) 고 하였다. 20) Nishida, 1987. p.48

그러나 마르셀 머스(Marcel Mauss)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를 비판한 것처럼, 어떤 이는 "종교적 원천으로서 이 종교경험론은 단지 병리학적, 종교 심리학적 사고에 근거하여 극단적인 분석 속에서 예외적이며, 거의 일어나지 않는 상태만을 고려한다."21) 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21) Mauss, Marcel. 1985. Sociologie et anthropolog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59

그리스 철학적인 '공간의 논리', 피히테(Fichte)의 '절대의지'라는 관념뿐만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정형화된 니시다의 '순수'나 '내재적' 경험은 아마 그가 카나자와(金澤)에서 보낸 고교 시절 경험에서 나온 듯하다. 기억에 의해 재생되는 역할은 이러한 경우에 프로이드(Freud)의 '보완 행동(Nachtr glichkeit)'이라는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즉, 그것은 새로운 상황 속에서 과거, 의미의 능동적 재구성인 '기억의 흔적(memory traces)'를 소급해가는 조작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럴싸한 심리적 효과를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없는 일을 기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프로이드가 전제로 삼은 논리는, 그러한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순수한 현재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혹은 온전히 실재한다는 것은 항상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22) 참조. Derrida, Jacques.1967. L' criture et diff rence. Paris: Seuil. p.314.

어쨌든, 순수 경험에 대한 니시다의 공식은 명백히 젠이었다. 니시다가 스즈키처럼 교토(京都)와 카마쿠라(鎌倉)의 여러 사찰에서 1897년부터 10여 년간 젠 수행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03년 여름, 대덕사(大德寺)에서 마침내 어떠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어떻게 니시다를 읽을 것인가'라는 짧은 글에서 스즈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일상에서 젠 경험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니시다의 절대 무의 철학 혹은 절대모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의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본다. 니시다 그 자신은 훌륭한 젠 수행자였다. 그의 임무는 젠을 서양에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궁극적인 것을 경험했고 그 때,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지적인 분석을 하고자 했으며, 복잡함을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기 위해 그의 경험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 결과가 바로 니시다 철학이다. 23) Nishida,1960, A Study of Good. Trans. V.H. Viglielmo. Tokyo: Ministry of Education. p. iii-vi.

스즈키는 주지적(主知的) 성향이 있었던 니시다의 첫 번째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 자신의 반주지주의적 어조를 누그러뜨렸음이 분명했다. 비록 니시다는 자신을 위하는 스즈키의 말에 대답해야할 필요를 느껴본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즈키의 언급은 문제가 조금 있긴 했지만, 이것은 후에 교토학파에 있어서 니시다 철학 읽기의 기초가 되었다.

만약 젠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라고 하는 언명 속에 어떤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순수경험이라는 개념은 절대 순수경험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러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을 특징지으려는 어떠한 시도나 심지어 최소한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라도 그 기대에는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 다양한 문맥 속에서 초기 니시다와 그의 제자들이 사용한 철학적 카테고리로써, 순수경험은 일상 수행으로 기능하였고, 철학의 영역 밖에서 구체적인 효과들을 끌어냈다. 예를 들어, 맑시스트 비평가인 아리마 다츠오(有馬 達郞)는 "모든 논리적 수식(修飾)을 사용해서, 그것은 개인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써 사회적 관련을 그만두도록 설득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고 말한다. 24) Arima, 1969 p.13.

그래서 순수경험 자체는 존재론적으로 '비평 이전(pre-critical)'-즉 주체와 객체 간의 어떠한 차별에도 선행되는 것으로서-이며, 니시다 철학의 순수경험은 이념적으로는 비판력이 없는 상태였다. 니시다의 제자였던, 타나베 하지메(田邊元)는 "니시다는 명백히 종교의 영역과 철학의 영역에서 변형시킨 전제들로부터 비합법적 결론을 끌어내었고, 그 결과 철학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고 지적하였다. 25) Waldenfels, Hans. 1966. "Absolute Nothingness: Preliminary Considerations on a Central Notion in the Philosophy of Nishida Kitar and the Ky to School." Monumenta Nipponica 21, 3-4: p.372.

왜냐하면 타나베에게 "절대 무(無)의 종교적 경험은 철학체계의 원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동양의 '신비한' 경험과 서양의 논리적 사고의 결합은 실패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26) Ibid., p.373.

만약 종교적 결의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그 범주를 주의깊게 사용한다면, 늘 이럴 필요는 없다. 확실히 니시다가 사용한 범주는 타나베의 비판을 피할 만큼 충분히 정교하지 못했고, 인식론적 한계가 명백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더 넓은 합리성이 인간 경험의 종교적 차원을 포섭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의 한계는 앎의 가능성의 위한 긍정적 기초를 제공 한다"27) 는 견해를 따른다면, 칸트(Kant) 이래로 '유한성에 대한 분석'이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무한에 대한 분석'이 가능한 날이 오지 않을까? 27) Dreyfus,Hubert L., and Paul Rabinow. 1983.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ermeneutic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30.

4. 동-서간의 대화

니시다가 젠과 서양의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언어들을 차용했지만 그것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언어들은 이것을 계승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와 우에다 시즈테루(上田閑照)와 같은 사람들의 글을 통해, 갈수록 그 의미가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문맥상으로도, '무(無)'를 'Nothingness'로 번역하고 그것을 독일 신비주의의 'Nichts'와 동일시하거나 혹은 거꾸로 서양의 'Being'이라는 의미를 '유(有)'라는 용어와 혼동하는 것은 큰 문제점이었다. 니시다가 '동양의 무(Nothingness)'와 서양의 '존재(Being)'를 대조하게 한 '언어상의 오해가 불러온 존재론에 관한 혼돈'은 또한 하이데거(Heidegger)의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을 도겐(D gen)의 『유시(有時)』의 개념과 비교하려고 하는 많은 비교주의자들을 양산했다.

니시다가 실제 '젠을 서양에 설명'하려 했든, 젠을 서양의 영성과 비교하려 했든, 혹은 그가 단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든 간에 문제는 발생한다. 니시다의 일기, 그리고 다른 글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니시다의 젠과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이해는 표면적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불교에 대한 해석은 특이했고, 니시다 자신도 그의 젠 이해가 다소 전통적 젠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니시다는『단경(壇經, The Platform S tra)』,『벽암록(碧巖錄, The Emerald Cliff Record)』,『전심법요(傳心法要, The Essentials of Mind Transmission)』,『임제록(臨濟錄, The Record of Linji)』,『대등국사록(大燈國師錄, The Record of National Master Dait )』,도겐의『정법안장 (正法眼藏, Sh b genz )』과 같은 '찬/젠(Chan/Zen)'의 문헌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용한 것뿐만 아니라, 스코투스 에리지나(Scotus Erigena), 마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ckhart), 제이콥 보힘(Jacob Boehme), 니콜라스 쿠사노스(Nicholas Cusanos), 마틴 루터(Martin Luther), 소렌 키어케가드(S ren Kierkegaard)와 같은 그리스도 신비주의자와 신학자들의 문헌까지도 자유롭게 요약해서 인용하였다.

그러나 니시다는 그의 논문을 설명하면서 서양과 불교의 문헌에 대해 '일상 수행적(Performative)'인 것이 어떤 소용이 있는지 전혀 묻지 않는 듯하다. 비록 니시다가 위에 열거한 그리스도인들(대부분은 新-플라톤주의자들)의 인용을 통해서, 절대적인 것에 대한 불이(不二)적인 고유성이라고 개념 설명을 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문화-교차적 분석이 니시다 텍스트의 강점 중의 하나이다."라고 딜워스가 주장한 것처럼 나는 이것을 철저히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28) Nishida, 1987. p.130.

니시다는 인생의 말기에서, 그의 젠에 대한(그리고 정토종)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그의 마지막 저술에서 니시다는 더 나아가서 젠에 대해 광범위한 오해를 올바르게 고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젠은 신비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29) Ibid., p.108

비록 신비주의가 젠과 아주 근접해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는 젠이 플라톤 시대 이후로, 서양 철학에서 신비주의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신비주의는 결코 '객관 논리(object logic)'라는 입장을 초월할 수 없었다고 본다. 젠 전통에서는 일상성을 중요시 하지만, 사실 신(新)-플라톤주의에서는 평범함과 일상성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30) Ibid., p.109

니시다의「일본 문화의 문제」와 「장소의 논리와 종교적 세계관 (The Logic of Place and the Religious Worldview)」31) 과 같은 글은 그 시기에 니시다의 국수주의적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다. 31) Nishida 1987, Yusa Michiko.1986-1987. "The Logic of Topos and the Religious Worldview."The Eastern Buddhist(n.s.)19, 2:1-29;20, 1:81-119.

니시다는 1940년대 중반에,『일본 정신(Japanese Spirituality)』와『선과 일본 문화(Zen and Japanese Culture)』를 쓴 스즈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언급했듯, 니시다는 국체(國 )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국수주의를 위해 서양 철학과 불교에서 빌려온 개념들을 결합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젠의 중요 개념인 '무심(無心)'과 정토종의 '자연 법이(自然法爾, jinen h ni)'를 일본 정신의 가장 깨끗한 발현으로 해석했다.

그는 이러한 일본 정신은 실재와 실재 사이의 본체로서 사물의 진실에 이르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즉, "우리 스스로 아래에서부터 이러한 절대를 실현하는 것"32) 으로, 대승불교와 보다 정확하게는 일본식으로 변형된 젠과 아미타신앙뿐만 아니라 '신(神)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신토(神道)를 일본의 정신으로 규정지었다. 32) Tsunoda, 1964. p.364

아래의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참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일본 문화의 특징은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고, 실재 그 자체가 되고, 그 자체가 스스로를 보게 되고, 또 그것 자체가 행동하게 되는 것으로, 주관에서 객관(주위환경)으로 옮겨가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사물 속에 빠져있는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를 비우고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심(無心)'이나 혹은 큰 노력을 요하지 않는 아미타 신앙의 '자연 법이(自然法爾)'를 수용하는 것들은 우리 일본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상태이다.……일본 정신의 본질은 실재와 사태 속에서 하나가 됨이 틀림없다. 그것은 자아도 타자도 아니라고 하는 원(原)지점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33) Nishida 1965, bekkan 6:104; Tsunoda,1994, 2: 362

당시 니시다가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을 가지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이 '고차원적 융합(point of high fusion)'이 히로시마에서 궁극적으로 표현된 것을 어떤 이가 잊을 수 있겠는가? 흥미롭게도, 위의 인용문을 영어로 번역한 서구의 대표적인 교토학파 대변인인 아베 마사오(阿部 政雄)는 다음 문장을 삭제하였다. "이 모순적인 '자기 정체성(auto-identity)'의 중심은 황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34) Nishida 1965, 6:104; Nishida, 1991, La culture japonaise en question. Trans. Jan Pierre Lavelle. Paris: Publications Orientalistes de France. p.74

'실재 속에 몰입되어 있는 자아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것과 사물을 보는 것'이라는 표현은 도겐의『정법안장(Sh b genz )』의 현성공안(現成公案)35) 을 생각나게 한다. 35) T.2582 23c.

니시다는 종종 국수주의자적, 팽창주의자적 맥락 속에서 도겐을 인용하고 있다.

수천 년간 그것을 특징짓는 수직적 '보편성'을 갖는 동안, 오늘날 우리에게 국제 문화라고 하는 문제는 단지 수평적 '보편성'을 넓히는 것으로써만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유연심의 문화, 심신탈락의 문화를 알리는 데 필요하다.……그리고 반드시 실재에 위임된 단일한 세계를 모순적인 자기-정체성의 방법 속에서 만들어야 한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동양의 정신을 구성하고자 하는 일본의 사명이다. 36) Nishida 1965, 6:107; 1991, 76-77.

그러나 니시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비판과 같은 이 언급에 미묘한 차이를 둔다. 그는 "만약, 주체로서 우리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다른 것과 동화한다면, 이것은 다름 아닌 제국주의이며, 이것은 일본 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니시다가 도겐을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니시다의 젠에 대한 이해는 스즈키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편향되거나 단순화된 것 같다. 도겐에 대한 언급과는 별도로, 니시다는 스즈키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었는데, 특히 후기의 저작들이 그러하였다. 비록 니시다가 그 '구체적인' 철학을 정교하게 만들려는 욕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수 경험', '절대 무(無)' 등의 관념들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이며 이중적이었다.

만약 이것을 보다 철저하게 적용한다면, 대승의 불이(不二)의 논리는 '순수 경험'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표현이 언어학적으로 적절하지도 않게 된다. 왜냐하면, 순수 경험과 순수하지 않은 평범한 경험의 사이나 혹은 철학적/형이상학적 언어와 일상의 언어 사이에 있는 그러한 구별은 이중적일 뿐만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에게는 형이상학적 혹은 메타언어학적인 입장이 없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부정할 때는 가치들만이 이데올로기화 되는 것이다. 심지어 니시다가 종종 언급하는 '구체적 세계'조차 어떠한 사회문화적 실재와 큰 동질성이 없는 관념론의 소산이며, 추상적인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실재(real thing)'로 되돌아오기가 불가능했던 것은, 대다수 철학자들의 경우처럼 그의 논의에 철학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니시다가 지불해야 했던 희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니시다가 그것을 '절대 즉 실제(actual qua absolute)'라고 하는 불교의 개념에 적용하려 노력하였을 때, 그는 '국체'와 황실을 '실제(actual)'과 동등한 것으로 결론지어 버렸다. 비록 니시다가 일본 근대성의 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는 그가 가진 일본과 서양의 정통성에 대한 노스텔지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철학은 그와 우리가 이해하고 실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개념들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액을 퇴치함(exorcism)' 정도로 보인다. 비록 그가 베르그송(Bergson)의 영향을 더 받았다고 하지만, 니시다는 어떤 면에서 뒤르켐(Durkheim)을 닮았다. 뒤르켐에 대해서는 후기 저작에서 단 한번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니시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역사적으로 공고해진 사회는 뒤르켐이 말한 '신성화(le sacr )'라고 하는 종교적 토양에서부터 시작한다." 37) Nishida 1987, p.116.

그도 역시, 개인주의의 발단은 사회라는 개념을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다. 니시다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그 자신 안에서 절대적 자기표현을 포함하는 세계이다."38) 고 하였다. 38) Ibid., p.122.

스즈키로부터의 마지막 인용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는다. "국가란 이번 생에 있어서 정토(淨土)의 반영(反影)이다." 39) Ibid., p.123.

서문 40) Nishida 1987,

'행동에서 인식까지(From Acting to Seeing)'에서 이미 니시다는 전통 동양 문화를 위한 '철학적 기초 공급하기'라는 그의 소망을 말하였다. 여기서, 그는 "동양 문화의 기저에 놓여 있는 형태 없는 형태, 소리 없는 소리라는 개념은 우리 선조들로부터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것이다."41)
고 말한다. 41) Ibid., p.127.

마이스터 엑하르트와 같은 서구 신비주의자들의 공통된 관심으로, 니시다나 스즈키는 그리스도교를 대승 불교의 열등한 버전 정도로 오해하게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서양인들에 의해 동양에 지워졌던 오래된 도식을 역전시켰다. 스즈키의 연구처럼 니시다의 '모순된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둔 '동양의 논리'를 정교하게 하기 위한 '즉비(卽非)'의 논리는 오리엔탈리스트적 범주에 의해 운영되었고, '본토주의(nativist)'라고 하는 편향성을 낳게 되었다. 니시다는 스즈키 덕에『금강경(金剛經, The Diamond S tra)』에서 즉비의 논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42) Nishida, 1987. p.70.

그가 쓴 마지막 글에는, 특별히 스즈키를 반복인용하고 있으며, 스즈키 스타일로 젠 어록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스타일은 후기 교토 학파의 저작물의 큰 특징이 되었다. 니시다는 동서양 사이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서 특히 스즈끼를 인용하고 있다. "만약 자비의 개념이 (스즈키가 주장하듯이) 서양 문화의 기초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점에서 나는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 간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43) 고 말한다. 43) Nishida, 1987 pp.107-108.

비록 많은 중요한 철학적 통찰력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단순한 가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의 작용은 '니시다 철학'의 정당성을 위태롭게 한다. 딜워스는 "'니시다 철학'의 어떠한 면모들은 '동양적', '서양적'인 것들을 정의할 때 사회-역사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영역을 혼동할 위험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니시다는 스즈키를 포함한 다른 본토주의 사상가들보다 더 민감하고 섬세하였기 때문인데, 그는 스스로도 열심히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을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단결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44) Nishida, 1991. pp.14-15.

5. 전후의 교토 학파

니시다(와 스즈키의)의 모순적인 정체성 논리로 만들어낸 이분법적 틀과 이념적 무기로서 '동양적 무(無)'의 사용은 전후 교토학파 철학 활동의 대부분을 점유한 동양과 서양에 대한 신학적/철학적인 대치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동서양의 대치는 젠과 서양 철학, 혹은 젠과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다소 성과 없는 '대화(dialogue)'를 낳았으며, 전후 교토 학파의 '철학적'활동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최근 들어서 교토학파의 일방적인 '대화'의 예를 아베 마사오의 『선과 서구사상(Zen and Western Thought)』(1985)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형이상학과 문화적 속성을 다소 혼동한 일본 철학자들"45)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니시다가 교토학파에 영향을 끼친 만큼이나 스즈키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45) Nishida, 1987. p.146.

앞에서 언급했듯이, 니시다 철학이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그의 제자들의 저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42년의 세계역사철학협회, 즉 교토학파의 오른쪽 날개를 구성하는 코사카 마사키(高坂正顯, 1900-1965),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1900-1991), 코야마 이와오(高山岩男, 1905-),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 1907-1988) 등에 의해 설립된 심포지엄에서 그 국수주의적 경향의 표현은 정점에 달한다. 이 심포지엄은 인류의 삶을 모든 차원에서 통합하는 것으로써 총력전을 지지하였다.

1942년 1월에 열린 심포지엄인 '세계 역사와 일본'에서 후에 스즈키와 많은 책을 공동 편집하였고, 현재 교토학파의 대표자로 알려진 젠의 권위자 니시타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정치적 자의식이 더 우수하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히틀러(Hitler)같은 사람들 속에 있는 내부 질서를 원상 복구할 필요성에 대한 의식은 일본 지도자들의 의식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비록 오늘날 많은 동양인들이 유럽식의 국가 의식이라는 개념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마도 공존공영권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관점에서는 그것들은 공존공영의 범주의 사람들로서 구성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니시타니는 청년기의 그 실수에 대해서 어떠한 후회도 하지 않았고, 그의 저서에 나타난 이러한 면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조차도 논의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노토 텔레(Notto Thelle)의 니시타니에 대한 프로필 제목이 "꽃은 벼랑 끝에서 핀다."인 것은46) 순전히 우연이다. 46) 참조. Thelle, Notto R. 1984. "'The Flower Blooms at the Cliff's Edge's': Profile of Nishitani Keiji, a Thinker between East and West." Journal of American Religion 13, 3:47-56.

니시다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일본학의 우메하라 타케시(梅原猛)학파 또한 새로운 교토학파로 알려졌는데, 이 학파는 스즈키의『선과 일본문화(Zen and Japanese Culture)』에서 시작한 논의를 널리 확장시키는 데 공헌을 하였다. 이 학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아젠다는 우메하라가 1986년 나카소네 정부에 의해서 교토에 만들어진 일본 문화 세계 센터의 회장에 취임하면서 진전되었다.

따라서 젠은 더욱더 서구 사회에서 일본 문화의 이미지를 증진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되었으며 소위 '일본인론(cultural exceptionalism)'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다. 47) 참조. Harootunian, H.D. 1988 Things Seen and Unseen: Discourse and Ideology in Tokugawa Nitivism.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 473.

되풀이해서 말하면, 여기서 나는 '니시다 철학' 자체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스즈키의 경우처럼, 젠에 대한 권위 있는 담론의 구성에 있어서 '니시다 효과'에는 관심이 있다.

이 담론은 후기 교토학파에 의해서 독점되었으며,「동양 불교 (The Eastern Buddhist)」혹은「동서양의 철학(Philosophy East and West)」같은 저널과, F.A.S.(For All Mankind Society) 같은 기관들에 의해 진전이 되었는데, 이 기관은 1958년 히사무츠 신치(久松眞一, 1889-1980)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보편주의, 개인의 자각, 비판정신, 개혁의지"라는 기치를 내건, 다소 과장된 이상주의적 재가운동이었다.

이번 장의 주요한 목적은 니시다의 철학적 혹은 정치적 견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리엔탈리스트와 본토주의적 구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스즈키와 교토 학파의 '수사 양식(rhetorical style)'을 분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젠 철학'의 이데올로기적 역할과 젠 오리엔탈리즘의 인식론적 위치에 대해 두 개의 질문을 던지면서 끝을 맺을까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뒤르켐적 의미에서는 그것 자신의 생산 조건에 대해서는 장님인 담론만이 니시다(혹은 스즈키)가 동양과 서양의 반목이 모든 힘의 총체적 표현이었을 때, 그가 썼던 오리엔탈리스트 범주와 쇼비니스트적 수사를 사용한 것을 비난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비평은 필요하다. 그러나 오직 이 범주들과 이것들이 강조하는 바는 전적으로 다른 역사적 맥락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토 학파의 철학자의 사상 속에서 여전히 활동적이다. 48) 참조, Asada Akira. 1988, "Infantile Capitalism and Japan's Postmodernism: A Fairy Tale." South Atlantic Review 87, pp. 633-634.

게다가 하이데거의 경우에서처럼, '철학적 텍스트'의 범위가 넓혀온 것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맥락(context)' 속에서 영향 받은 것임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환언하자면,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오리엔탈리스트와 국수주의자가 추악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니시다 철학뿐만 아니라 교토 학파와 서양의 교토 학파 추종자들에 의해 옹호되었던 젠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신교토학파의 우메하라 타케시처럼, 니시다와 교토 학파는 '일본인륜(日本人論)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역설적이게도, 니시다가 "동양과 서양 문화가 만나는 한 지점은 일본에서 찾아질 수 있다."라고 했던 때와 같지 않은 건 아니나,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심지어 최근의 비평가들조차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카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주장하기를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로 예시되어지는 일본의 사상은 포스트모던적 이며, 후기 구조주의적 '문자 이전으로의 회귀(avant la lettre)'라고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티는 필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불교 철학에 포함시킨 용어로, '중국적 마음'이라고 하는 '당심(唐心)'를 친절하게 제외하고서- '이성주의자적'인 관점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자신의 담론이 이념적으로 중립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것은 다시금 우리가 특정한 담론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제한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젠은 스즈키와 함께 초월적 정신의 위치를 주장하는 투명성의 신화를 일본 이념에 부과하며, 일본 문화의 전 영역을 흡수했다. 또한 젠은 니시다와 교토 학파 덕분에 비교 문화적 철학의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즈키, 니시다와 그의 계승자들의 노력을 덕분에 반복 혹은 해석을 요구했던 이전의 '찬/젠' 논의와는 현저히 다른, 새로운 논의의 영역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비록 투명성과 순수이라고 하는 중심 사상이 단순한 현장부재(alibis)는 아니지만, 보르디외(Bourdieu)의 용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그것은 '젠 해비투스(a Zen habitus)'의 산물인데, 이 '젠 해비투스'는 이것은 단지 그들의 생산 조건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투명한'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49) Bourdieu, Pierre. 1980, 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r. Paris: Minuit. p.88

이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자발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나타날 지도 모른다. 그의 추종자들뿐 아니라 스즈키의 비평가에게 '젠'이라고 불리는 어떠한 것의 존재가 항상 당연시 된다는 사실은 이러한 담론이 성공한 것임을 증명한다.

김수정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근현대 불교사상을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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