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한국불교를 다시 생각한다

1. 서언

기복성 문제는 한국불교계의 오랜 숙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무수히 기복불교를 논하면서도 그 판단근거는 그리 명확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복을 바라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보다 직접적인 신앙의 목적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초기불교시대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복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복에 대해서 복덕, 기복, 구복, 작복 등의 용어가 난무하다시피 하지만, 정작 어떤 복을 권하고, 또 어떤 복을 버려야 할 것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기복불교의 형태로 보는 재난의 극복, 불상조성, 또는 치병, 득남득녀의 기원 등의 경우, 만약 불교의 경전에 근거한 신앙행위로 이루어진다면 이를 무조건 기복불교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복불교의 판단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기준은 아무래도 불교의 근본 정신과 그 근거가 되는 삼장의 교학사상에 입각하여 참다운 불교를 구현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먼저 불교신행에 나타나는 기복(祈福)과 구복(求福)을 불교 근본정신에 입각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어 한국불교의 기복성향을 교학과 신앙의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 이를 호불관(好佛觀)에 입각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국불교의 기복에 관한 문제는 신행인의 호불관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불교 정법에 의한 호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고찰해 볼 때 구복과 기복의 차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법에 바탕을 두고 호국이 이루어졌을 때 바람직한 한국불교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의 근본 정신에서 본 기복(祈福)과 구복(求福)

현대종교에서 가장 큰 문제 거리의 하나로 보는 것이 종교의 기복성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도 그 종교의 태생부터 기복성을 가지고 시작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진다. 불교의 경우는 태생부터 기복성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양의 종교라는 'Religion'은 라틴어 'Religio'에서 온 말이라 한다. 이는 곧 대상을 신봉하고 예배하며 그와 결합하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따라서 서양의 종교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구(祈求)하고, 그러기 위해 기도(祈禱)하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불교는 기구하는 대상으로서의 신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기구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학자 아서 드레미스(Arthur Dremis)는 {종교철학}에서 "불교는 종교적 주체로서 영혼도 인정하지 않고 종교적 대상으로서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는 종교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불교의 발생할 때부터 브라만의 유신교 신앙에 대해서 무신론을 주창했다. 브라만교에서는 일체는 범천이 창조하고 인간의 행·불행이 신의 영역인 범천에 대한 제사행위라는 일방적인 기구(祈求)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철저한 자기 수행에 의한 고(苦)의 해탈과 행위에 의한 업보로 이루어지기에 수업(修業) 곧 구복(求福)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불교에서 신앙행위의 첫 단계는 '귀의'로부터 시작된다. 귀의란 나무(南無, 범어 namas 팔리어 namo)를 뜻한다. 이를 풀이하여 경례(敬禮), 귀명(歸命), 신종(信從)이라 하며, 한문으로는 '귀의(歸依)한다'고 한다. 이를 다시 풀어보면 신명을 다해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그 대상에는 셋이 있으니 불·법·승 삼보이다. 최초로 깨달음을 연 부처를 존경하고 따르고, 그 가르침을 존경하고 따르고,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무리(승단)를 존경하고 따라서 행하여 그와 같이 되고자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신행의 근본이다.

이처럼 귀의란 유신교처럼 무조건 믿고 복종하여 받드는 상하관계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기에 아비달마시대에 대부분의 논장에서는 맨 먼저 "삼보께 귀명한다"고 명시하고서 논을 시작한다. 즉 불교의 신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삼보에 귀의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고, 귀의가 전제되어 수업(修業)의 수행 곧 구복이 이루어진다. 삼보에 귀의하는 자체 속에 이미 불도의 수행을 내포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지혜와 복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장아함경}의 말씀을 들어보면,

구라단두(究羅檀頭)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3제사(祭祀)와 및 16사구(祀具)를 갖추어 큰 과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있다."

또 여쭈었다. "어떤 것이 그것입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3제사와 16사구를 가지고 만일 능히 항상 중승(衆僧)을 공양하여 끊이게 하지 않으면 그 공덕은 저보다 뛰어나다. … 비록 삼종의 제사와 십육의 사구로써 여러 승중을 공양하여 끊이지 않게 하고 또 초제승(招提僧)을 위하여 승방이나 당각을 세우더라도, 환희심을 일으켜 입으로 스스로 '나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에 귀의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못하다. 이 복이 가장 뛰어나다.…만일 여래·지진(至眞)·등정각(等正覺)이 세상에 나오심에 어떤 사람이 불법 중에서 출가하여 도를 닦아 온갖 덕을 두루 갖추고 내지 삼명(三明)을 갖추어 모든 어리석음의 어둠을 멸하여 지혜의 밝음을 구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방일하지 않고 한가하고 고요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복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 … 큰 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欲求大福者) 마땅히 삼보께 공양하여라(當供養三寶)."1) {장아함경} 권제16 구라단두경(대정장1, p.100중∼101상)

여기서 복을 구하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여 공양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삼보에 귀의하여 도를 닦아 복덕을 갖추고 지혜가 열려 번뇌를 끊음으로써 불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는 절대자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기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대승불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삼보에 귀의하고 공양하여 복업을 닦으면 불도를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2) {대지도론} 권제13(대정장 25, p.160상) "當供養三寶 佛寶法寶比丘僧寶 勤修福業 以來佛道"

타력신앙의 성격이 강한 정토계의 {관무량수경}에서도 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세 가지 수복(修福)을 설한다. 세간의 도덕을 닦으면 세간의 십선업을 닦으면 세간의 복[世福]이 되고,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 곧 삼귀의, 오계 등을 닦으면 계복(戒福)이 되며, 보리심을 내고 대승의 자행 화타의 선근을 닦으면 행복(行福)이 된다3)고 하고 있다. 3) {관무량수경}(대정장12, p.341하) 및 慧遠의{觀無量壽經義疏}참조.

곧 현세의 구복뿐만 아니라 정토에 나기 위한 신행도 수업(修業)의 구복에서 비롯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삼보에 귀의하여 교법을 따르면 선업이 따르고 악업이 차츰 소멸되어 복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복(福)에 대해 아함 이래로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으로 나누는 경향도 보인다. 여기서 유루복은 세간의 복락으로 오계와 십선을 닦아 이루어지는 것이며, 무루복은 출세간 복으로 보리심을 내고 보리분(菩提分)을 닦는 것이다. 그런데 유루복 무루복이란 것도 실상은 유루의 지혜 무루의 지혜를 얻는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선근복덕을 의미하므로, 이미 일방적인 기복이 아니라 수행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대승에서는 육바라밀을 닦아 복덕과 지혜를 겸하여 구족하게 된다. 따라서 복을 얻는 것[求福]은 곧 복을 닦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불교에는 '복(福)'자가 들어가는 말이 꽤나 많다. 절이 있는 땅을 복지(福地)라 하고, 복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인을 복인(福因), 특히 오바라밀을 갖추는 것을 복족(福足)이라 한다. 또 승가에서는 부처님을 대복전(大福田)이라 했고, 승려들을 복전이라 부른다.

따라서 불교신행의 근본은 불교에 귀의하여 수업하고 수복하는 것이요, 수복은 기복이 아니라 구복을 뜻함을 알 수 있다.4) 김영태, {삼국시대 불교신앙연구} 불광출판사, 1990, p.25

이와 같이 본다면 불교의 기복신앙은 구복신행(求福信行) 곧 수복(修福)에서 오는 것임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3. 한국 기복불교의 형성과 호불관(好佛觀)

1) 삼국시대 불교와 구복신앙

(1) 고구려 불교수용과 구복신앙

한국 불교의 역사는 대략 1600여 년이 넘는다. 먼저 고구려에서 신행된 불교의 모습을 살펴보면, 불교를 공인한 소수림왕을 계승한 고국양왕은 말년(391)에 "불법을 숭신하여 구복하라"5)는 하교를 내리고 있다. 5)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9 "崇信佛法求福"

이러한 구복신앙은 기복신앙과 다른 한국불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불교 자체가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참되게 실천함으로써(곧 숭신함) 스스로 복을 얻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김영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구복은 기복과 다르므로 복을 주재하는 어떤 신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은 아니다. 복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불법을 숭신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구복에는 불법의 숭신이 선행되어 있다. 그러므로 불법의 숭신은 구복과 목적을 같이 하는 동격어가 되며 따라서 복을 얻고자 한다면 불법을 숭신하여야 하고, 불법을 숭신하면 곧 복을 얻게 된다."6) 김영태, {삼국시대 불교신앙 연구} 불광출판부, 1990, p.249.

이는 곧 수복(修福), 수업(修業)의 정법 신행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불교는 숭신하는 구복하는 불교로 시작하여, 바로 다음 왕인 광개토대왕이 392년 평양에 아홉 사찰을 지어7) 불법을 믿고 구복할 수 있는 수행처를 마련하고 있다. 7) {삼국사기} 권18, 광개토왕 2년조

같은 광개토대왕 때인 태원 연간(376∼396)에 석담시(釋曇始)가 요동지방에 불법을 홍포하였는데, 경율 10부를 가지고 와서 삼승법을 전해주고 삼귀 오계의 법을 세워 법을 폈다8) 고 전한다. 8) {양고승전} 권제10 神異(대정장50, p.392중) "晋孝武大元之末 諸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顯授三乘立以歸戒 蓋高句麗聞道之始也"

또 평원왕 때의 왕고덕(王高德)은 깊이 신심을 내어 정법을 펴고자 승려 의연(義淵)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불교를 배워오도록 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불교사와 대승 경론 등을 배워오도록 하고 있다. 또 보덕(普德)의 {열반경} 강의,9) 수나라에서 천태학을 공부한 파야(波若, 562∼613)와, 승랑(僧朗)의 삼론학, 일본 삼론학의 시조가 되었던(625) 혜관(慧觀) 등 많은 교학승의 존재는 고구려 교학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9) {삼국유사} 권3 탑상4 고려영탑사조

고구려 불교에서 신행의 경우는, 1967년에 발견된 고구려 불상중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의 광배에 '현세 현겁 천불을 조성해서 그중 29인현의불(因現義佛)을 유포하도록 했다'10)는 내용을 통해서 삼세 삼천불중 현세불의 유포를 발원하는 신앙을 엿볼 수 있다. 10) 황수영편, {增補韓國金石遺文}, 일지사, p.238.

1930년대 발견된 신유명금동삼존무량수상(辛卯銘 金銅三尊無量壽像)에도 '무량수상을 조성해서 돌아가신 사승과 부모가 태어나는 곳마다 마음에 항상 선지식을 만나고, 미륵부처님 처소에 태어나 함께 부처님 법문 듣기를 발원한다'11)고 되어 있다. 11) 황수영편, {增補韓國金石遺文}, 일지사, p.237.

불상의 조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기복신앙이 이 경우에서는 '자심(自心)에서 선지식을 만나고 불법을 듣고 불도 이루기를 발원'하는 수업(修業) 신앙의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본 고구려 불교신행의 모습은, ①숭신 불법하는 불교로 시작해서, ②때로는 불교의 교법을 홍포하고, ③불교사상을 통해 정법정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④29인현의불처럼 불교의 삼세 삼천불의 출현이라는 불교 교리에 입각한 불교 신앙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삼존 무량수상을 조성하면서도 일방적인 극락왕생을 기구하기보다는 망자가 세세생생처 마다 불법의 가르침으로 불도에 들어오기를 발원하는 숭신불법(崇信佛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고구려 불교가 세간의 염려처럼12) 기복불교에 기울지 않았음을 말해준다.12) 황인규, <기복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불교평론} 제3권 2호(통권7호), p.58에서는 구복신앙도 기복신앙의 한 예로 포함시켜 논술하고 있다.

(2) 백제불교에 나타난 구복신앙
다음으로 백제불교의 신앙 양상을 살펴보자.
불교를 처음 수용한 침류왕은 원년(384)에 동진에서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들여오자 곧 불교를 공인하고, 이듬해 한산에 불찰을 세우고 10인을 출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이었던 아신왕은 등극하자마자(392) "불법을 숭신하여 구복하라"13) 는 명을 내리고 있다. 13) {삼국유사}권3 흥법 難陀闢濟조.

현전하는 전기로 볼 때 마라난타는 신이영응(神異靈應)의 인물로 나타나고 있어, 백제불교의 기복성을 의심할 지는 모르나, {송고승전} 여환삼매(如幻三昧)를 부리는 난타(건중연간 780∼783)와는 다른 인물이다.14) {해동고승전} 권1 釋摩羅難陀조.

아신왕의 불법을 구복하라는 하교는 고구려와 같은 맥락에서 불교를 수용한 이래 숭신할 장소가 이미 마련되었으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불교를 통해 수복(修福)하여 구복(求福)하도록 한 예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법왕때에는 살생을 금하게 하고 민가의 매를 방면시키며 수렵도구를 불태웠다고 한다. 또한 그는 왕흥사를 세우고 30인을 출가시키므로써 적극적인 호불의지를 보여준다. 이후에 전개된 백제불교학과 신앙을 살펴보면, 적어도 백제불교가 구조적으로 기복성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백제 불교신앙의 특징은 미륵사 창건 연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무왕의 미륵사 창건은 미륵경사상을 사찰 건립에 구현한 예이다. 왕비의 발원으로 세워지는 용화산 밑의 대가람 미륵사는 미륵경의 삼시설법을 뜻하는 삼존(三尊)과 전탑(塼塔) 삼소를 배치하여 3탑 3금당형식의 독특한 사찰양식을 보이면서 무왕의 미륵불국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15) 김영태, {백제불교사상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p.121.

이는 백제불교가 교학에 입각해서 불교신행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제불교의 기복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도 보인다. 일본측 전적에 의하면, 일본의 청관음신앙과 묘견신앙, 영부신앙 등이 백제를 통해서 전해졌다고 한다.16) 김영태, {백제불교사상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p.235.

또 성왕 23년(545) 장육존상 조성 발원문에서는 천황에 복덕을 기원하고 천하 일체 중생들이 다 해탈하기를 발원17).하고 있어서 다소의 기복성도 나타나고 있다. 17) {일본서기} 권19, 欽明 6년 9월조

이를 통해서 백제불교의 기복불교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추측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어느 정도의 비중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백제의 불교는 경·율·론에 입각한 교학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특히 앞선 율학을 바탕으로 교단이 형성되고 실천적인 법화·미륵사상 등이 적용되고 있어서 기복신앙의 문제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신라의 전통신앙 수용과 기복성향의 극복
신라불교는 삼국에서 가장 늦은 법흥왕 15년(527)이 불교를 공인하지만, 통일신라까지 이어지는 동안 다양한 불교신앙형태가 나타난다. 특히 신라불교는 불교학을 사회윤리와 신앙에 적용시켜 호법에 입각한 호국사상으로 승화시키고 있어 불교의 사회적 적용에 있어 모범이 된다고 하겠다. 법흥왕이 흥륜사 불사를 일으켜 이차돈 순교이후 불교를 공인하지만, 이때 이미 법흥왕은 사찰을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업을 소멸시키는 도량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8)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조 "自登位 願爲蒼生 欲造修福滅罪之處"

진흥왕에 이르면 백성들의 출가가 허용되고, 안장법사를 대서성에, 고구려로부터 귀화한 혜량을 국통에 임명하여 승단을 정비하여 신라불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문무왕의 불교이념에 의한 호국정치가 이후 왕들의 정법정치의 모범이 될 정도였다.

신라는 교학에 있어서도 안함, 원광, 자장 등이 대승교학을 활발히 폈다. 전기의 교학 경향이 주로 귀족중심의 불교였다면, 통일신라시대를 맞이하면서 원효, 혜공, 혜숙 등은 주로 서민을 위한 교화행을 펼쳤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활약한 원효, 의상, 경흥, 태현, 의적, 진표 등 고승 대덕이 출현하면서 불교학의 발전을 이루었다.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는 데 오랜 기간이 소요된 것은 지정학적 조건도 크게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신라 전통신앙의 반발 때문이라 여겨진다. 전통신앙은 주로 무교적 신앙의례로 여겨지는 천신제사와, 사직단에 모셔지는 조상신, 산천의 여러 신에 기원하고 감사하는 제사의식과, 국가와 부족의 대소사에 있어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내는 점복과, 악신을 몰아내는 주술의식 등이 있었다.

이들 신앙은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신라불교는 수용되면서부터 이들과 대립 및 섭화의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속으로 대표되는 전통신앙은 기복적 성향은 물론 부족 사회를 대표하는 성격이 강하였다. 이에 왕권을 강화하려던 신라왕실은 불교의 업설과 전륜성왕사상 미륵사상 그리고 불연국토사상을 수용하여 이를 대체하려고 했기 때문에, 불교 수용 초기에는 전통무속과 대립하고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연국토사상은 장차 신라인들의 주체적인 불교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전통신앙 중의 조상신앙이 이 불연국토설에 의해 대체된다. 21대 소지왕 때에는 전통신앙을 강화하는 신궁을 세우고 있고(소지왕 9년), 10년조에는 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무속인인 일관(日官)에 의해 사살되고 있는 것은 그 대체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대립의 산물이다(사금갑조). 이들 무(巫)의 신앙지는 7처가 있었는데, 모두 전불시대의 가람터였다고 하면서 신라 역대 왕들은 이곳에 모두 절을 세우고 있다.

23대 법흥왕이 흥륜사를 세우려던 천경림, 법흥왕비와 진흥왕비가 출가하는 영흥사는 삼천기(三川岐), 진흥왕이 장육존상을 봉안했던 황룡사는 당시 무격신앙지였던 용궁 남쪽에 세워졌다. 선덕여왕 때는 사천미(沙川尾)에 영묘사를 세우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다. 문무왕때는 무격신앙지였던 신유림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신라 역대제왕들은 불사는 당시 전통신앙이나 무격신앙의 본거지에 사찰을 건립하면서 불교신앙을 펴나갔다. 이처럼 신라는 불교사나 불교학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인 불연국토설에 의해서 기존의 기복적인 무격신앙지를 수복(修福)의 도량으로 섭수하여 차원 높은 불교신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전통신앙인 천신(天神)신앙은 불교의 제석천 사상으로 섭화되었다. 진평왕이 천제로부터 옥대를 하사받고, 선덕여왕이 도리천에 뭍어달라고 한 것이나, 문무왕이 호국대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숭상하고 국가를 수호하겠다고 한 것도 그 수용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천신의 일방적인 기복신앙에서 불교의 수업(修業)에 의한 제석천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산천신에 대한 기원은 팔관회나 수륙재의식에 수용되고, 점복신앙은 불교의 첨찰경에 의한 신앙으로, 주술신앙은 밀교의 주 다라니 신앙으로 섭화되면서 기존의 기복성에서 탈피하여 불교 경설에 입각한 신행체계로 바뀌었다.

신라 초기 불교에서 보이는 이러한 전통 무속신앙을 불교로 대체시키는 과정에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급들이 업설이나 전륜왕사상 미륵사상 불연국토사상들을 현세이익적 측면에서 이용함으로써 초기 불교에서 기복적 성향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있으나,19) 황인규, "기복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불교평론} 제3권 2호(통권7호)

이는 일면적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라불교가 전통신앙을 섭수하면서 보여준 신라의 업설과 전륜성왕 사상은 전통종교의 기복성향으로부터 벗어나 복을 닦고 악업을 멸죄하는 불교 본래의 신앙정신으로 돌아오는 데 기여했다20).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20) 고익진, {한국 고대불교사상사}, 동대출판부, p.89

한편 개인신앙에서 관음신앙은 현실감 있는 민중신앙으로서 전통종교를 쉽게 섭화하였다고 한다. 개개인의 괴로움과 고달픈 인생문제를 풀어주는 개인적 신앙생활의 대상으로 영이(靈異)를 비는 기도의 대상이 필요했다. 이런 기도를 들어줄 신앙으로 불교의 관음신앙은 매우 유용했다고 보고 있다. 곧 하느님을 대상으로 한 무교적 풍토에서 개인적 기도의 대상을 찾는 데 있어서, 특히 관음은 자비를 구현하는 구세대비주로서 무한한 사랑은 그에게 기도하여 성취될 내용들, 인생에서 겪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관음은 중생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하여 괴로움을 덮어주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현·지장·미륵과 같은 보살의 응신이 자장·지통·진표·경흥과 같은 고승을 상대로 계를 수여하고 영지를 지시하고 만심을 깨우치는 것과는 매우 취지가 다르다 따라서 관음신앙은 무불(巫佛) 교체기에 재래의 신앙을 이어 새로운 신앙형태로 등장한 것이라고 보고 싶다"21) 고익진, {한국 고대불교사상사}, 동대출판부, p.83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관음신앙의 중요한 일면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관음신앙을 설하는 법화경에서는 중생의 삶 속에 나타나는 7난(수난·화난·풍난·가쇄난·도장난·악귀난·원적난)과 삼독(음욕·진에·우치)과 이구양원(求男·求女)이 설해지고 있다. 그리고 중생들이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심으로 관음을 칭명하여 관음의 가피를 얻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찰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실제 관음의 신행에서 중생의 해탈은 일방적인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태의 {관음의소}에 의하면, 중생들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생의 감(感)이 이루어지고 관음의 응(應)함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은 중생이 관음을 일념으로 칭명하여 신기감응(身機感應)과 구기감응(口機感應), 의기감응(意機感應)이라는 삼업의 감응이 있고, 또 삼매속에서 자신의 육근이 청정해져서 관음을 삼업으로 감하게 되어, 이근원통으로 법신 보살의 단계에 있는 관음이 응하게 되기 때문이다.22) 졸고, "천태지의의 관음일불승 사상" {천태학연구} 제4집, p.435∼441참조.

또한 관음이 문수나 미륵처럼 응신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오해라 할 수 있다. 경전에는 관음이 33응신으로 19설법을 한다23)고 하였고, 실제 {삼국유사}에도 경흥우성조에 경흥이 병이 나자 십일면 관음이 응신하여 병을 낫게 한 사례가 있으며, 노힐부득 달달박박조에도 관음이 응신하여 성불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다. 23) {수능엄경} 권6(대정장 19, p.56하), {법화문구}권10하(대정장34, p.146) 등.

따라서 관음신앙이 현실감 있는 민중신앙으로서 개인의 기원을 들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기도를 들어주는 기복신앙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다시 말해서 관음신앙은 중생이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심으로 칭명할 때 중생 쪽에서 감이 일어나고 관음에서 응함이 일어나는데, 이는 일심의 삼매라는 자기수행이 전제되기 때문에 단순한 기복신앙은 아니다.

2) 고려·조선시대의 호불관과 기복성향의 강화

신라 말 불교이념이 흐려지고 불교학의 침체를 가져오면서 고려시대를 맞았다. 신앙면에 있어서 고려시대는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기복양재(祈福禳災)의 불교라 할 수 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불신력에 의한 삼한 통일이라고 믿었으므로, 그의 건국이념은 자연 진호국가와 도선국사의 비보산천이라는 신불(信佛)사상이었다.

그의 호불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은 {훈요십조}이다. 그중 에서 불교관련 내용으로, 제1조에는 산한통일의 국가대업이 제불의 호위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제 2조에는 고려에 세워진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 국사가 점지한 것으로, 이 외에 절을 지으면 지덕이 쇠하니 후대의 왕들이 절대 함부로 건립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 또 제6조에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반드시 행하도록 했다.

여기서 팔관회는 천령(天靈)과 명산대천,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이고, 연등회는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다. 이 같은 태조의 훈요는 곧 그의 호불관이라 할 수 있다. 제1조의 불신력에 의한 삼한 통일이라는 인식과 제2조의 도참사상 제6조의 부처님과 제천 산천에 대한 기복신앙은, 신라에서 전통신앙을 불교로 섭화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태조는 많은 사찰을 지었다. 그 중에 2년 개경에 십찰을 세운 것은 그의 불교이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석가여래인 법왕을 모신 법왕사, 여래 자비의 법운을 뜻하는 자운사, 전륜성왕사상의 왕륜사, 제석신앙의 내제석사, 화엄신앙의 사나사, 중생제도의 염원을 담은 보제사, 신흥사, 문수사, 관음신앙의 원통사, 지장사가 있다. 이들은 시방 찰토가 하나의 불세계에 섭수되듯이 삼한이 하나의 부처님 국토로 합일되기를 염원한 것24).이라 한다. 24) 김영태, {불교사상사론}, 민족사, 1992, p.548∼566

그런데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고려불사가 행해지기 시작한다. 곧 전몰 장병을 위해 개태사를 짓고, 공신들을 위해 신흥사를 중수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경향은 그후 광종 때가 되면 태조의 원당으로 봉은사를 창건하고, 선비(先 )를 위해 원당을 짓는 등 고려 시대 내내 진전사원을 설치하게 된다. 사찰이 불교 본연의 수복멸죄의 장소로서보다는 추선추복(追善追福)하는 조상숭배의 장소로 변질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중요한 대장경 편찬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이 대장경을 편찬한 목적은 몽고군의 침입에 대응하여 대장경을 조성함으로써 온 국민이 단결하여 불신력을 빌기 위함이라 하고 있어 기복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는 거란의 침입 때 초조대장경을 조성하자 물러갔던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고려불교의 특징은 각종 재회와 도량의 성행이다. {고려사}와 {동국이상국집}에 보이는 각종 불교행사는 83종에 달한다고 한다. 여기에는 연등회, 소재회(消災會), 팔관회, 인왕도량 등이 있는데,25) 이 중에는 경전에 근거한 행사들도 있다. 특히 인왕도량과 같이 호국의 목적으로 행해진 도량이 특히 많다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25)서윤길, {高麗密敎思想史硏究}, 불광출판부, p.158∼174.

이러한 각종 도량과 재회는 소재와 호국을 위한 신행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신앙 모습은, 정법이 신앙의 근본이 되는 호법은 이루어지지도 못한 채 내우외환의 재난 속에서 이를 불신력으로 극복해보려는 호국사상만이 강조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곧 고려불교는 호법보다는 호국이 중시되면서, 개인의 구복과 국가의 진호를 위한 전형적인 기복불교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유생들의 배불숭유에 의해 불교교단이 통폐합되어 나중에는 유명무실해졌고, 불승들은 산중 속으로 들어가면서 산중불교시대가 열렸다. 간혹 태조 세조와 같은 호불왕이 등장하여 불교 부흥을 꾀하고자 했으나, 시대적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산중불교는 휴정이후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서 삼문 수업에 매진하는 이판승과 가람수호 및 사원 재정을 위한 사판승 제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 시대의 교학은 조선초 자초와 기화, 설잠 등이 활약했으나 학파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서산대사 이후 불조의 맥을 이어가게 된다.

조선시대의 사찰은 중생들의 수업을 위한 곳이라기보다, 조상의 추선이나 추복을 위한 신행으로 인식되어 기복불교가 이어졌다고 하겠다. 한편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외환에 처해서는 멸시받던 불승들이 오히려 호국불교의 기치아래 왜적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이 시대는 삼보의 신행체계가 무너지고 신행이 불교본연의 정신에 부합되지 못하여 호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간혹 호국만이 요구되었다.

4. 결어

불교의 신행은 근본정신에서 볼 때 절대자에 대한 일방적인 기구행위인 기복이 아니라, 자기 수행으로 불도에 들어가는 구복신앙이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삼보에의 귀의로부터 이루어지고, 삼보의 귀의와 공양은 곧 수업(修業)을 통한 수복(修福)의 행위로서 구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대승에서는 오바라밀행이 구복을 위한 행위이고 반야바라밀을 통해 지혜를 구족하게 된다.

불교전래 이전 한국인들은 대개 샤마니즘이나 토템이즘 또는 정령신앙 등의 다양한 신앙형태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초능력의 힘을 가진 존재로 인간의 숭배대상이었다. 여기서 고단한 인간생활의 보상을 위한 절대신에 대한 기복신앙이 시작되었고, 사후의 안녕을 기구하는 종교생활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불교라는 고등 종교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절대신의 위치에 불교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불교의 전래와 수용과정에 나타난 신행의 모습을 보면, 초기 한국불교의 신앙형태가 불교신행의 근본정신인 '구복신앙'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법을 숭신하여 구복하라고 하며, 신라의 법흥왕은 그 장소인 절을 복을 닦고 죄업을 소멸시키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시작은 삼국이 대체로 불교 교학에 입각한 신행이 이루어지면서 호법을 바탕으로 호국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삼국 신라의 불교의 성격을 기복불교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법흥왕 이후 삼국통일기까지 전개된 업설과 전륜성왕사상 미륵사상 불연국토사상은 기존의 전통신앙인 무속신앙을 섭화하면서 일방적 기복신앙에서 불교교리에 맞는 불교신행으로 바꾸어 놓고 있어서, 당시의 호불관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시대는 정법에 입각한 호법을 바탕으로 호국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대에 들어서면서 기복양재의 호불관으로 인해 구복에서 기복신앙으로 바뀌고 있다. 수많은 도량과 재회 및 불전의 간행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수복(修福)보다는 추선(追善) 추복에 기울어 있을 뿐 아니라, 잦은 내우외환속에 호국의 불사와 불교행사가 빈번히 행해지면서 기복불교의 문제를 노출하고 말았다. 곧 정법에 의한 호법보다는 호국신앙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지 못한 채 숭유억불책으로 삼보의 신행체계가 붕괴됨으로써, 호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간혹 호국신행이 이루어진 시대로 고려의 기복불교 양상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한국불교의 특징이자 대표적인 병폐의 하나로 여겨졌던 기복신앙이 적어도 그 출발점에 있어서는 기복이 아니라 정법에 기초한 구복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한국불교의 기복 양상은 실은 그 밑바탕에 구복이라는 정법의 입장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구복의 불교가 기복의 불교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직시함으로써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병폐로 여겨지는 기복불교의 양상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경희대 철학과와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 현재 동국대·경희대·원광대·위덕대 등에 출강. 논저서로 《법화삼매의 전승과 수행》 〈백제 현광의 교화행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 정업원의 설치와 불교신행〉 〈천태지의의 관음 일불승 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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