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한국불교를 다시 생각한다

1. 간화선에 괄호 치기

"참선(간화선) 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근래 대구 동화사에서 한창 진행되었던 담선대법회의 주제이다. '간화선' 세 글자를 괄호로 처리한 것은 묘한 인상을 준다. 학술회의 주제로 이런 형태의 문장을 취하지 않는 게 통례이다.

여기서 '간화선'은 괄호 밖의 '참선'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듯한데, 분명치 않다. 또 '참선'이 아닌 '간화선'이 괄호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 왜 '간화선(참선)'으로는 쓸 수 없었는지 그 곡절도 알기 어렵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간화선을 괄호 치고 얘기하는 상황 속에 있다.

4년 전인 2000년 10월 24일, 불교신문사가 창간 40주년을 맞아 조계사와 공동으로 개최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다. 당시의 주제는, '간화선 대 토론회'였다. 그 형식과 내용, 구성원과 주된 관심사에 비추어 봤을 때 동화사 담선대법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두 학술회를 두고 가장 정직하게 밝힐 수 있는 차이는, 4년이라는 시차를 거치면서 '간화선'이 괄호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참선(간화선)'의 글쓰기에는 참선과 동격이 되기에는 왜소해진 간화선이라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사태는 이미 십여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간화선 유일주의에 대한 각종 견제장치가 낳은 결과이다.1) 이미 십 년전에 심재룡 교수는 간화선이 도전받고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 바 있다. "성철 스님께서는 화두잡이만이 유일한 성불의 길이라고 간화유일주의를 주창한 바 있다. 최상근기의 출가승만을 두고 이같은 요청을 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 몸을 담고 있는 일부 승려들 사이에 위빠사나라는 명상수행법으로 성불을 도모하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생각이 생겨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종정의 권위로도 임제선의 정통이라는 간화유일주의를 지키기는 어려운 모양이다."(심재룡, [普照禪과 臨濟禪: 죽음 말귀 살려내기], {보조사상} 8, 1995) 이러한 발언은 간화선 유일주의와 관련된 성철스님의 주장을, 선 이론과 관련지어 평가하기보다는 종정이라는 그의 위치와 관련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지금, "참선(간화선) 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구를 자랑스레 새긴 횡단막이 별 문제제기 없이 한국의 담선법회장에 휘날리고 있다. 이 사건을 두고, 간화선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미 한국 선문의 안뜰까지 점령했다고 말하면 비약이 될까. 만일 동화사 담선대법회의 목적이, 어느 논평자가 지적한 것처럼, 간화선 선양을 위한 것이었다면2) 이번 담선법회는 주제문 설정에서부터 빗나가고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2) 11월 6일에 진행된 열 번째 담선법회에 논평자로 참여한 마성 스님은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러한 (간화선의) 위기의식에서, 간화선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간화선이야 말로 한국불교의 정통 수행법임을 천명하기 위해 이러한 담선대법회가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 (이번 법회의 주제인) 위빠싸나와 간화선의 비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간화선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위빠싸나를 들러리로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위빠싸나 수행과 간화선의 비교>라는 (발표자의) 발제문도 이러한 취지에 맞도록 작성된 것이다. 즉 간화선 우월주의적 시각에서 위빠싸나를 낮춰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간화선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위빠싸나 수행의 우월성과 효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담선법회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참선(간화선)"의 글쓰기는 간화선에 대한 또 한번의 조종(弔鐘)이다. 좋든 싫든 앞으로도 한동안, '간화선'과 '돈오돈수'에 대한 비판적 의견개진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선문 내부에서 불거져 나올 것이다.

지금 한국의 간화선 실참(實參) 수행자들은 안팎으로 시달리고 있다. 안으로는 선 이론 전문가들에게 치이고 밖으로는 낯선 수행법에 부대끼고 있다. 이론에 밝은 선문의 내부인사들조차 선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정도로만 평가할 뿐, 수행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래저래 현대 한국의 간화선 실참 수행자들은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간화선 수행의 효과와 목적, 정당성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급기야 입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다그치지만, 실참 수행자들의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말로 하기 어렵다는, 넋두리성 발언뿐이다. 이들은 간화선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배운 일이 없다. 지금껏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에 대한 평가는 좀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간화선에 대한 문제제기가 올바르게 진행되고 얼마간의 성과라도 도모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와 연계되어만 한다. 먼저, 지금까지 한국의 간화선 수행 전통이 조사선의 본령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것은 조사선의 본령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검토는 물론이고, 한국 불교사를 통틀어 간화선의 공과(功過)를 따져봐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두 번째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최소한 간화선이 보여주었던 만큼의 철학적 엄밀성과 수증론적 효과, 그리고 대사회적 위상까지 확보하고 있거나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이 두 가지 과제와 연계되지 못한 체 개진되는 간화선에 대한 문제제기는 장하지만 무력하다.

2. 조선 재야선문의 간화선 전통

1) 재조선문의 한계와 유불회통

조선전기는 간화선에 관한 한 암흑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를 통틀어 봐도 간화선을 중심으로 이렇다할만한 사상을 전개한 선승이 보이지 않는다. 간화선과 관련된 조선전기의 특징을 굳이 말한다면, 간화선에 대한 특별한 이해 없이, 왕권수호와 결합된 종권 수호라는 수세적이고 방어적 차원에서 간화선이 이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말선초 이래로 재조(在朝)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된 선문은, 독립된 종교세력으로서보다는 황실 및 집권세력과의 유대관계 속에서 그들의 존재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중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왕권에 대한 신권의 견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결국, 불교는 성리학 지식을 갖춘 보다 강력한 재조세력에 의해 집중적으로 견제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황을 허응(虛應) 보우(普雨, ?-1565)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불교의 기풍 쇠폐함이 올해 같은 때가 없었으니
    피눈물 흘러내려 베옷을 적시네.
    구름 속에 산이 있건만 내 자취는 어디에 의탁할꼬
    티끌 세상 속 어디에도 내 몸 둘 곳이 없네.
    하늘 아래는 모두 당우(唐虞)의 땅이요
    이 땅에 사는 사람 치고 누가 요순(堯舜)의 신하 아니겠는가
    참담하게도 우리는 복도 없어서,
    평안한 세상에서 도리어 평안치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구나3).

    3) {虛應堂集}, <韓國佛敎全書> 7책, 536쪽 中段∼下段.(* 이하 "한불 7, 536b∼c" 형식으로 나타냄.) "釋風衰薄莫斯年 / 血淚  滿葛巾 / 雲裏有山何托跡 塵中無處可容身 / 普天盡是唐虞地 率土誰非堯舜臣 慙愧吾 偏 福 大平還作不平人."

이 시의 제목은 아주 길다. "무술년 가을 9월 16일에 성상께서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의 덕을 겸비하시고서도 여러 곳의 절들을 불태우고 헐어버렸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피눈물이 수건을 적시는 것도 깨닫지 못한 체 다만 [우리 불교가 성상의] 지극한 다스림의 은혜를 입지 못한 것만을 유감스럽게 여겨 울면서 몇 줄의 시를 적어 여러 벗들에게 보이다." 4){虛應堂集}, 한불 7, 536b. 戊戌之秋九月旣望, 警聞聖上以兼三五之德, 燒毁諸方佛寺, 不覺血淚沾巾, 憾其獨不蒙至治之澤, 泣成數律, 以示諸友云.

하지만 이렇게 제목만 보고 나면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하다. 1538년(중종33) 신륵사(神勒寺)의 승려들이 감히 유생들을 박대했다는 이유로 관가로 잡혀갔고, 사찰은 불태워졌다. 소식을 전해들은 보우는 이렇게 시를 지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황은 그랬다.5) [長安寺]와 [師子庵]({虛應堂集}, 한불 7, 532a; 532b)이라는 제목의 선시와 [禪宗判事繼名錄]; [敎宗判事繼名錄]({虛應堂集}, 한불 7, 549c-550c)에서도 당시 불교계의 참담한 상황과 보우의 심경을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때에 이르러 사나운 바람이 불어닥친 뒤로 중종이 [불교를] 아주 버렸다. 이로부터 선풍(禪風)과 불일(佛日)이 잦아들고, 나라 안의 절간이 하루가 다르게 망하고 허물어져 내렸다. 산에는 절이 없어졌고 절에는 중이 없어졌다. 6)[禪宗判事繼名錄], {虛應堂集}, 한불 7, 549c. "嗚呼下及本朝燕山之時, 一見嵐風之吹, 永爲中廟之棄. 由是禪風掩扇, 佛日潛輝. 凡寺刹於國內者, 日亡月毁, 山無寺而寺無僧." 조선시대 유블관계론에 포괄적인 연구결과물로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서울: 일조각, 1993이 있고, 연산군대의 배불현황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돕는 자료로는 이봉춘, [연산조의 배불책과 그 추이의 성격], {불교학보} 29, 서울: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2이 있다.

건국초기부터 지속되었던 왕권과 신권 사이의 갈등은 중종대에 일단락되었다. 7)최승희, [조선 태조의 왕권과 정치운영], {진단학보} 64, 1987, 135-136쪽; 김돈, {조선전기 군신권력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01-114쪽 참조.

갈등의 와중에 늘 도마위에 올랐던 불교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살펴보면, 승패의 판가름은 분명하다.

이 때에 이르러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와 기신재(忌晨齋)가 폐지됨 8)으로써 왕가와 불가의 인연은 절단 났고, 사찰노비와 토지를 추쇄(推刷)하여 공(公)에 귀속시킴9)으로써 불교계의 경제적 기반은 거덜났다. 8) 命罷內需司長利及忌晨齋. 《中宗實錄》, 11년 6월 2일 條. 9 )傳曰: "寺刹奴婢, 雖祖宗朝有王牌處, 除有陵寢外, 皆推刷屬公." 《中宗實錄》, 11년 11월 9일 條.

신하들은 득의만만했고 내친 김에 도승법(度僧法)의 폐지와 소격서(昭格署) 철폐까지 주청했다. 그 역시 관철되었다. 10)《中宗實錄》 11년 12월 16일(壬戌) 條; 13년 9월 庚子 條.

유교와 불교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갈등을 극복하는 가장 편리한 논법은 둘 사이의 일치점을 찾는 길이다. 찾아서 없다면 만들어 내야하고, 만들 수도 없다면, 우기기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난감한 과정은 전적으로 아쉬운 자의 몫이다. 유학과 불교의 회통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이미 고려 말부터 진행되어왔는데, {불씨잡변}으로 대표되는 신흥사대부들의 불교비판에 대한 응전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응전의 내용이라는 것 역시 성리학과 불교의 중요개념들을 무리하게 접목시킨다든지, 성리학에서 비중을 두는 덕목에 대해 우리도 그런 것 있다는 식의 반론을 펴는 정도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다분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의 타협이었다.

조선전기의 선문은 점차 유학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젖어들었다. 모든 가치 기준을 유학의 시각에서 판단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유불회통은 더 이상 당위가 사실이었다. 보우는 '일정(一正)'이라는 독창적 개념을 가지고 불교의 일심(一心)과 유학의 중(中)을 합일시키려 했다. 그는, 불교의 일(一)은 일심이요, 정(正)은 마음의 순수함이며, 유교에서 일은 일기(一氣), 성실(誠實), 중(中)이라고 했다. 또 일은 성실하여 허망하지 않음[誠實無妄]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대학}의 성의정심(誠意正心)과 서로 같다고 했다. 또 이를 '일물(一物)'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여기 한 물건이 있어 혼연히 고금을 관통하고 있도다
    본체는 비어 있으나 스스로 신묘하여 작용이 있으면서도 그 자취는 없네
    굽어보거나 우러러보아도 숨어 있어 아득하고 또 아득하지만 보고 들음에 뚜렷하며
    음양과 사시에 걸쳐 끊임없이 움직여서 멈추지 않는도다
    유학에서는 이를 칭하여 태초(太初)라 하고 불가에서는 원적(圓寂)이라 부르니
    잠기면 연 못 속의 물고기요 움직이면 비상하는 학이 되는구나
    …… (하략)11)
    11)[次華法師軸韻序], {虛應堂集}, 한불7, 539a. 有物在於斯 / 渾成貫今昔 / 體虛而自神 / 用實其無跡 // 俯仰隱玄玄 / 視聽明曆曆 / 陰陽與四時 / 運行無暫息 // 儒稱此太初 / 佛言斯圓寂 / 爲在淵魚 / 動作飛天鶴.

이러한 의식에서 볼 때, 단순히 불교도라는 이유로 씌워지는 멍에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비록 억불의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조선 건국이후 선문의 재조세력은 〈무학(無學) 자초(自超, 1327-1405) 득통(得通) 기화(己和, 1376-1433) 혜각(慧覺) 신미(信眉, ?-?) 허응보우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12)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12)自超는 태조 즉위 초에 선종의 대표자격으로 王師에 봉해졌다.({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10월 丁巳 참조) 그리고 己和의 경우는 비록 승직을 제수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자초의 제자임이 분명하고 왕실과 관련이 깊은 회암사와 어찰인 어자사에 주석했다는 점과 세조가 信眉에게 {금강경오가해}와 {선종영가집}에 기화의 說誼를 편입토록 명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를 제조세력으로 보는데 별 무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익진 역시 기화의 사상적 영향력이 당시에 지대했었다고 확인하고 있다.(고익진, [함허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대해], {불교학보} 11, 1974, 208쪽; 고익진, {한국의 불교사상}, 동국대학교출판부, 1987, 55-56쪽) 그리고 守眉는 세조시의 왕사였으며, 수미와 신미 두 사람 모두 나옹의 법손으로 추측된다.(허흥식, [한국불교사의 과제와 방향], {한국사학} 14,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187쪽.) 또 세종은 信眉에게 判禪敎宗事를 제수하려 했다.

이들의 행장에서 나타나는 한결같은 특징은, 그들의 정치사회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불교계 내에서의 역할과 업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의 활동이 왕실을 비롯한 조정과의 관계 속에서 주로 이루어졌을 뿐, 선문의 정체성 확립 등 당시 불교계 내부의 역량강화를 위한 노력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재조선문의 한계였다.

조선조 재조선문의 한계는, 그들의 위상과 권위를 불교계 구성원들의 합의와 여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왕실과의 개인적 친분을 통해 확보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역할 역시 신권의 견제로부터 왕권을 확립하는데 일조하고 그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위상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단적인 예로 김수온(金守溫, 1409∼1481)과 신미가 주도한 세조대의 불경언해 작업의 경우, 엄밀히 말해서 흥불(興佛)사업이었다기보다는 왕권의 확립과 관련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유학과 관계개선에만 치중한 나머지, 불교계 자체의 발전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조선문은 그들이 취한 방식이 억불의 상황 속에서 선문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불회통을 통해 불교의 대사회적 위상과 역할이 재고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었었다. 유불회통은 선교(禪敎) 회통과는 그 계통부터 다르다. 유학과 불교는 그 최종적인 지향점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태생부터 공존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주자학의 이론적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가 (선)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그래도 이 둘이 공존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면, 그 유일한 방식은 회통이나 포용이 아니라 '힘의 균형' 뿐이다. 따라서 조선중기의 선문에서 재조선문의 유불회통과 같은 방식이 아닌, 자내(自內)의 체질강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2) 재야선문의 간화선을 통한 선문 정체성 모색

유불회통 논의는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사회에, 불교도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탄압이라는 외적 요인보다, 불교 스스로 소진해 가는 것이었다. 정작 두려운 것은 박해가 아니라 자진(自盡)이다. 이러한 사태를 통찰하고 새롭게 선문의 정체성 확립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벽송(碧松) 지엄(智嚴, 1464-1534)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엄의 행장이나 이력에 대한 정보는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이 지은 [벽송당행적](碧松堂行蹟)이 전부이다시피 하다. 하지만 그를 조선 재야선문의 거목으로 지목해도 좋다. 13)"조선시대에는 산중 寺庵의 수행도량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곳이 碧松智嚴이 주석했던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碧松寺이다." 종범, [선원의 위상과 역할], {선원총람},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편, 2000, 74쪽.

그의 인품과 관련해서 휴정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엄대사는] 여러 산을 떠돌 뿐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이 없었다. 천지를 소요하는 한가한 도인이었다. 1520년 3월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풀로 만든 암자에 살았다. 성품의 도량은 더욱 넓어지고 기풍의 귀감됨이 더욱 분명해졌다. 옷은 한 벌밖에 없었으며 하루에 한 끼만 드셨다. 문을 닫아걸고 고요히 할 뿐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익히려고 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익히려고 들지 않으니, 세상에 아첨할 일이 없었다. 아첨할 일이 없으니, 불법을 파는 일 따위도 하지 않았다. 불법을 팔지 않으니, 여러 참선하는 이들이 절벽을 보고서 뒷걸음질치듯이 했고 거만하다고 비방했다.14) {三老行蹟}, 한불 7, 753a. "遊戱諸山, 居無定止. 逍遙然天地間, 一大閑道人也.  庚辰三月, 入智異山, 棲身草庵. 性度益弘, 風鑑益朗. 身無再衣, 日不再食. 杜門冥寂, 不修人事. 不修人事故, 不諂於世. 不諂於世故, 不賤賣佛法. 不賤賣佛法故, 泛 禪學者, 望崖而退, 多以倨慢譏之."

지엄이 승직에 올랐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생전과 입적 후에 권력층과의 관계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인용문 가운데 '불법을 판다'[賣佛法]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첨한다는 말과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 이 말의 의미를 두 가지 정도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승려 신분을 이용하여 왕실 주변과 일부 친불성향의 권력층과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된다.

또 일반 백성을 현혹하여 금품을 착취한다는 의미도 된다. 두 가지 모두 상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수행자들이 지엄을 보고서 절벽에서 뒷걸음질치며, 건방지다고 구시렁댔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먹물 옷 입은 자들이 불법을 팔았던 게 분명하고, 지엄의 위치가 재야였던 것 또한 분명하다.

휴정은 지엄이 1508년 가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대혜어록}과 {고봉어록}을 연구했고 평생동안 그 선풍을 진작했다고 적고 있다. 또 초학자들을 지도할 때에는 먼저 {선원집}(선원제전집도서)과 {별행록}(법집별행록병입사기)으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세우게 한 후에, {선요}(禪要)와 {어록}으로 지해(知解)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열어주었다15)고 한다. 15){三老行蹟}, 한불 7, 752c-753a. 正德戊辰秋, 入金剛山妙吉祥, 看大慧語錄, 疑着狗子無佛性話, 不多時日, 打破漆桶. 又看高峯語錄, 至 在他方之語, 頓落前解, 是故師之平生所發擇者, 乃高峰大慧之風也.

이후 이러한 교육체계는 그대로 조선 선문의 수행체계를 이루었다." 16)종범, [선원의 위상과 역할], {선원총람},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편, 2000, 74쪽.

그 경로나 과정은 분명치 않지만, 지엄의 선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또 그가 중요시했던 문헌들이 보조 지눌의 경우와 중복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지엄은 지눌의 사상 속에서 종밀과 대혜의 선사상이 공존하는 의미와 효용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승가교육에 직접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지엄이 지눌에 주목했던 요인은 그가 선문의 정체성 정립에 매진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지엄이 깊숙이 관여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조선중기의 선문 부흥운동 때문이다. 지엄과 관련된 문헌으로 {조원통록촬요(祖源通錄撮要)}(중종24, 1529년 간행)가 있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이 책을 간행하면서 지엄이 발문(跋文)을 적고 있다는 점이다. 발문의 협주(夾註)에 의하면 당시 전라도 광양현의 백운산(白雲山) 만수암(萬壽庵)에서는 {석가여래행적송}과 {통록촬요} 등 13질의 문헌이 간행되었다. {조원통록촬요}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파석훼불(破釋毁佛)과 관련된 사항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 강한 말법의식을 반영한 운묵무기(雲默無寄)의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17)도 함께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간행 배경에는 자칫 잘못하면 불법의 단절이 올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위기의식과 그에 입각한 전법의 사명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 {석가여래행적송}의 편찬은 백련결사의 성격이 묘련사계를 중심으로 점차 귀족불교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으로, 당대의 승풍을 비판하며 출가자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정토신앙을 중심으로 백련사 옛 전통의 부흥을 꾀하는 불교운동의 일환이었다.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편, {석가여래행적송}(불학총서 3), 1996의 해제; 황패강, [{석가여행적송}연구], 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편,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下), 서울: 가산불교문화진흥원, 1992.. 544-586쪽.

이러한 움직임은 극심한 법난 속에서 전남 광양현 백운산 만수암을 중심으로 불교의 정맥을 지키려는 불교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고익진, [祖源通錄撮要의 출현과 그 사료의 가치], {불교학보}21, 167쪽.

바로 이 선문 부흥운동에 지엄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엄은 조선 선문에서 대혜와 지눌을 부각시킨 장본인이다. 대혜의 선사상은 이미 지눌에 의해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간화선 법맥에서는 정작 대혜가 빠져 있거나 비중 있게 거론되지 못했다. 당시 선문에서도 분명 간화선을 표방하고 있었었지만, 이때의 간화선은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중심으로 한 몽산(蒙山) 덕이(德異, 1231-1308?)의 선사상이었다. 조선 건국초기의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에 의하면 임제선의 법맥은 〈원오극근(圓悟克勤)-호구소륭(虎丘紹隆)-파암조선(破庵祖先)〉의 경로로 도식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자초(自超) 자신이 바로 이 법맥을 계승하고 있는 평산에게서 인가를 받은 나옹의 제자임을 드러내고 있다.19) {佛祖宗派之圖}, 한불 7, 6-8

조선초기에 대혜를 결부시켜 임제선의 법맥을 거론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가지만 해도 임제선이나 간화선이라고 하면, 호구소륭을 상상했지 대혜종고는 안중에 없었다. 이는 공교롭게도 여말선초에 지눌의 선사상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한다.

조선불교 전체를 통틀어 공안과 관련해서 대혜종고의 입장을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는 최초의 책이 아마도 지엄의 {염송설화절록}(拈頌說話節錄)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은 혜심의 {선문염송}에 해설을 붙여 편찬한 각운(覺雲)의 {禪門拈頌說話}를 초록한 것이다. {설화}가 혜심을 비롯한 다수 선사들의 마을 골고루 싣고 있는데 비해서, {절록}은 대혜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다. 지엄은 {절록}을 통해 공안과 관련해서 대혜의 입장을 비중 있게 소개함으로써, 선문에서 간화선이라고 하면 점차 대혜의 선사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했다.

지엄은 유불회통의 원리적 통합만 모색했던 재조세력의 행태에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처신으로는 결코 선문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자내의 역량 강화만이 유일한 활로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지엄으로 대표되는 조선조 재야선문은, 종단의 유지보존과 관련된 심각한 위기의식 속에서, 그 과정에서 조선중기 수선사의 엄격한 수행정신과 철저한 출세간주의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러한 수선사의 선풍을 진작하는데 핵심적인 이론이 돈오점수와 간화선에 있었음을 알고, 지눌과 대혜 그리고 종밀의 선사상을 조합하여 강원의 교육과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3. 맺음말

대혜가 제창한 간화선의 철학적 특징은, 수행자의 능동적인 자세와 적극적인 현실참여라는 '현장성'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런 면모가 한국의 간화선 전통에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선문에서 간화선을 수용하는 방식이 다분히 선택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여말선초와 같은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선문은 출세간 중심의 종교적 순결주의를 고수하는데서 조사선의 정통성을 찾았고, 간화선 역시 그러한 기조 위에서 받아들이고 강조하였다.

특히 조선의 재야선문에서 수용한 간화선 전통은, '지눌을 통해 이해된 간화선'이었다. 그들은 전면적인 억불의 상황 속에서, 사그라지는 불(佛)씨를 살려낼 수 있는 길은 엄격한 수행주의를 근간으로 선문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길뿐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원류를 여말선초가 아닌 그 이전, 지눌의 정혜결사에서 찾았던 것이다. 조선조의 재야선문은 승단의 명운이 걸린 절박한 상황을 간화선으로 그렇게 정면 돌파해 나갔던 것이다.

지눌 이후로 한국의 간화선 전통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특징을 꼽는다면, 엄격한 수행 중심주의에 근간을 둔 종교적 순결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와 같은 이론적 향배와는 무관하게 한국의 선문을 유지해 온 비결이며, 한국 간화선 전통의 박복함인 동시에 홍복이다.20) 허우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조선의 생명력을 보면 세속과의 교통을 전제로 하는 참여불교가 반드시 불교의 생명을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다. 순수를 부르짖고 경제적 자립을 유지하는 집단이 오히려 그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 지눌의 출세간주의는 논리적으로 참여주의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청정한 승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요구가 아니라 실제적인 요구이다." 허우성, [지눌 윤리사상의 특성과 한계], {지눌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186-187쪽.

그런데도 단지 그 박복한 면만을 문제 삼아, 그것이 마치 간화선 수행법 자체의 고질(痼疾)이라도 되는 양 말한다면, 듣는 간화선은 못내 섭섭하다.

지금 간화선은, 겨울날 골목길에 버려진 연탄재 마냥 안쓰러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 간화선 실참 수행자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천더기가 되어버린 연탄재만 보다가, 그 온기에 대한 기억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 간화선의 멱살을 드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면서 나지막이, 시인처럼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서울대·경희대 강사. 논저서로 〈선불교의 정통성에 대한 의지〉 〈대혜종고의 공안선 비판과 간화선의 지(知)의 문제〉 《無를 향해 기어가는 달팽이》 《깨달음의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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