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지성의 새 지평을 여는 첨병이 되라

조성택: <불교평론>이 창간된 지 5년이 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지만 이제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새롭게 다시 출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들을 모시고 <불교평론>의 공과는 무엇이며, 앞으로 개선 내지는 지향해야 할 점 등을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 토론할 것은 대강 <불교평론>에서 지금까지 다룬 내용, 방향, 필진 등에 대한 논의로 세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불교평론>이 지난 5년간 대외적으로 미친 영향과 역할,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큰 주제가 될 것입니다. <불교평론>은 교육받은 불교인, 즉 불교 지식인을 겨냥한 본격 계간지를 표방한 것으로는 거의 처음 나온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방향을 설정했었습니다만 여전히 미비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지난 경과에 대해서 본지 편집위원이신 유승무 선생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승무; 저는 창간 때부터 <불교평론>에 관여해 왔습니다. 처음 창간할 때 편집위원들의 의도는 불교의 현대적 해석, 불교를 통한 사회비판, 사회 속에서의 불교 이해 등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비판적 성격을 강하게 표방하고, 그것으로부터 불교와 사회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자는 의미에서 '평론'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하나의 화두이자 목표는 불교의 대중화였습니다.

대중성이 하나의 큰 주제였고 그러면서도 잡지였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을 이끌어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또 학자들이 주된 필진이다 보니 학문적 성격, 교육적 성격도 기획 속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사회를 불교적 안목으로 해석하려는 의지가 특히 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문제들 때문에 애초에 기획했던 성격, 취지가 그 동안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이 편집위원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숙제이고 고민거리입니다.

대상 계층은 분명하되 불교의 틀에 갇히면 곤란

한형조 교수
한형조: 지금 말씀대로라면 교육받은 불교 지식층을 주된 독자층으로 삼았다고 하셨는데, 저는 불교 전반적으로 신문이나 잡지는 독자층을 좀더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불교도라는 큰 틀 안에서 일반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젊은 층, 교육받은 이들, 스님들-스님들도 또 다양한 계층이 있고, 절간에서 신행 활동을 해 오신 분들의 불교 인식 등 매우 다양하거든요. 다양한 만큼 거기에 맞추어 특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종학(宗學)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특정한 절간을 중심으로 하거나 학파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그런 식의 방법론, 예를 들어 일본불교와 같은 형태도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성택: 저희 같은 경우는 특정한 종파성을 배제하려고 의식해왔습니다만.

한형조: 저도 그런 종파성은 당연히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일본의 경우를 통해서 얻어지는 장점 곧 종파성이 아닌 특화의 필요성은 분명히 인식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불교는 임제종, 조동 중심, 법화 중심, 화엄 중심의 불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통(通)불교'적이다 보니까, 각 산문별로, 예를 들어 화엄 중심으로 교리에서부터 신행체제를 다시 특화시킨다든가, 완전히 임제선 중심으로 간다든가, 아니면 아예 정토를 중심으로 한다든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성택: 지금 말씀을 <불교평론>에 적용시킨다면 '특집'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불교평론> 전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한형조: 특정 독자들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 독자들을 축으로 평론의 편집 방향 설정을 좀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지나치게 특화하면 독자층이 제한된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유승무: 저희 편집위원들은 늘 <불교평론>이 불교학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저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지향한 방향도 아니고요. 그러나 <불교평론>이 불교학 연구자들의 저널과 구분이 안 되는 그런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고, 끊임없이 탈피하려고 애썼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미산스님
미산: 대중성과 학문적 교육적 성격을 지적하셨는데, 이것을 겸하려고 했을 때 오히려 잡지의 목표가 희석될 가능성이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대중성을 강화하려면 그 쪽에 초점을 맞추거나, 아니면 화보도 크게 넣고 해서 대중들이 그 화보만 보고도 이 책을 사보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도 좋고. 아니면 대중성을 좀 배제하고 불교 지성을 대상 독자층으로 했다면 영역을 좀더 높여서 불교에 호감을 갖는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특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자를 다양화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한형조: 그렇죠. <불교평론>이 전문가 집단만을 축으로 한다면 곤란합니다. 사실 불교인이든 아니든, 지식인들이 불교에 대해서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불교학자들이 접근하는 것과는 상당히 코드가 다르다는 점도 인식해야 합니다.

조성택: 지금 지적하신 부분들은 저희 편집회의에서도 항상 제기되어 왔습니다만, 불교학 전문가가 아닌 국제학, 경영학, 정치 전문가들이 글을 써주면 좋은데, 그래도 불교적이라는 제약이 있다 보니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원고청탁을 거절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형조: 제 생각으로는 불교라는 틀을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불교에 관심이 있거나 신행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서도 자기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굉장히 유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꼭 불교적으로 써야 할 필요는 없죠. 《심상사성(心想事成》이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등을 집필한 사람들, 예컨대 불교적 사고를 통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불교라는 제약을 두지 말고 분출할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불교의 틀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불교를 현대화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조성택: 그렇긴 해도 정체성의 문제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저희 모토 중의 하나가 불교를 가지고 세상을 평하고, 세상을 가지고 불교를 평한다는 것인데…….

한형조: 틀이 없어야 훨씬 불교다운 것 아닙니까?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렇고요. 이 틀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매트릭스'를 벗어나야 합니다. 매트릭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관행적 시각에 매몰되게 되죠. 밖에서 보면 너무 분명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우리 관심은 이것인데 왜 저 안에서만 놀고 있지? 일반적인 학계의 분위기처럼, 불교계 잡지나 신문도 자체의 시각이나 틀에 너무 갇혀 있습니다. 좀더 과감하게 바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성택: 선생님 말씀은 대상 독자층은 분명히 하되 불교라는 테두리는 좀 많이 벗어나면 좋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또 우리가 계속해서 불교학연구자 중심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유승무 교수
유승무: 지금 주로 불교학자 위주의 경향에 대해서 비판들을 하셨는데, 그러나 연구자 중심이었다고 해도 비판성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지식인들의 관심을 모았다는 점에서는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대중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여전히 한계이지만……. 다만, 평론이 추구해야 될, 왜 불교를 하고 어떤 방향으로 불교를 끌고 가야겠다는 등의 부분에서 명징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면에 교육적 측면이나 학문적 측면은 충분히 담아내었다고 생각하고, 어쩌면 과도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불교의 현대적 해석 같은 측면도 나름대로 시도를 해왔고 성과가 없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성택: 역시 편집위원이시다 보니 좀 방어하는 입장이 되네요. (전체 웃음) 미산 스님은 독자이면서 필자이기도 하고, 게다가 스님이라는 입장도 있어서 아무래도 저희들과는 좀 다른 관점을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새로운 시각을 통한 이슈 선점과 예측 기능을 갖춰야

미산: 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불교평론>을 보았는데, 창간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첫인상이 상당히 바람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교의 사상을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내면서도 분명한 교리인 근거를 제시하는 그런 잡지의 성격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계속 보면서 느낀 것이 주제가 너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간화선과 비파사나'가 주목받는 주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제3수행법 논쟁'으로 다룬 것이죠. 그런데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최근에 다시 같은 주제를 다루어서 반복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불교평론>이라면 주제의 반복보다는 다른 시각에서 새로운 주제를 발굴해야 하고, 그것이 <불교평론>의 이미지를 올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늘 기회가 되면 그 점을 가장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조성택 교수
조성택: 단순한 반복에서 그치지 않고 심화되었으면 칭찬받았을 일인데 아쉽군요.

동일한 맥락에서 저는 이슈의 선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상적인 관심들은 그런 대로 반영했지만 이슈를 선점하고 만들어낸다는 측면은 부족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교평론>의 비판적 기능은 이슈의 선점이라는 문제와 함께 고민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교단이든 아니면 불교 자체든 간에 내적인 자성과 불교 밖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기능은 끊임없이 유지되고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저변확대도 연관해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진과 주제의 중복은 저변확대가 제대로 안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이슈의 선점에 실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한형조; 저변확대나 필진의 고갈은 불교라는 틀 자체를 고집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불교 교리 상으로도 불교 안에 한정되어 있는 것만이 불교는 아니라고 하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불교 밖에도 불교가 엄청 많거든요. 서양철학, 문학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곧 교리 밖에서도 불교에 헌신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 분들에게는 그냥 원고를 써달라고 하면 안 되고, 이분들이 갖고 있는 것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끌어내어서 편집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작업들이 수행된다면 불교 자체의 교리만이 아닌 불교와 연관된 수많은 분야의 얘기들을 새롭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 불교 밖의 지식인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을 것이고, 불교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이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불교의 틀, 교리나 교단, 수행 등에 한정되어 있으면, 주제에서부터 필자 확보까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좀더 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산: 저는 아까 말씀하신 이슈 선점 문제를 좀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불교평론>과 같은 잡지의 기능이 앞으로 생길 문제들에 대한 예측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 있지만 앞으로 몇 년 이내의 나타날 현상들, 예를 들면 웰빙은 사실 지금 나타난 것뿐이지 몇 년 전부터 예측될 수 있었던 것이거든요. <불교평론>이라면 적어도 틀을 만들어서 전문가 집단 몇 분들이 계속 조사하고 예측해서 기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불교평론>도 그런 열의와 예측 기능이 적용되어야만 저변을 확대하고 진취적인 성격이 더해지면서 다른 잡지에서 넘볼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편집위원들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간헐적으로 이슈를 제공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형조: 주제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틱낫한 스님의 《화》 같은 경우는 저도 예측을 전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화》에서 보는 것처럼 현대의 소외 상태가 일반적인 정황이 되고 있는 것들인데, 이 일반적인 정황을 일반적으로 다루는 데는 익숙하지만 이것을 특화시켜서 상황도 보고 시기를 맞추는 것은 익숙하지 않죠. 만약 익숙하다고 해도 이것을 어떤 식으로 상품화시킬 것인가 기획해 나갈 것인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틱낫한 스님 같은 경우는 사실 여러 가지 상품성을 가지고 있죠.

조성택: 틱낫한 스님 같은 경우는 이미 서양에서 상품성이 검증된 경우라고 할 수 있죠.

한형조: 그분이 베트남에서 반전운동도 했고, 비판받고 한 경우인데…. 그런데 사실 지금 우리 스님들도 얼마든지 독특한 자원 그 이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이것을 상품화시키기는 데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불교평론>에서 잘 기획해서 한국사회에 어필하는 불교를 만들어가는 촉진제로 삼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불교에 대한 전통이나 문제의식과는 접목되어 있지는 않지만, 보다 보편적 관심에 연관되어서 이해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정토는 의외네요. 틱낫한 스님의 전체 성격은 소승불교와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미산: 그 정토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염불을 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정토가 아니라,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초점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여불교죠. 그것이 틱낫한 스님의 주장 중의 하나입니다.

유승무: 틱낫한 스님의 경우를 한국에서 '성공한 불교적 기획'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서구에서 환영받았던 요인들은 어떤 것입니까?

미산: 틱낫한 스님은 실제로 간화선 수행을 하시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서양에 갔을 당시에 선이 상당히 유행했습니다. 그래서 선어록을 보고 나름대로 책도 쓰셨지만, 큰 관심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분의 관심은 대승불교에 많이 기울어져 있고 그것을 체계화해서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것이죠. 남방불교는 수행법만 차용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서구사회에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죠.

조성택: 지금까지 <불교평론>이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을 많이 내주셨는데, <불교평론>의 지난 공과를 정확히 평가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이야기들도 좀 해주시죠. <불교평론>이 있기 전과 나온 후에 불교계에 나름대로 달라진 면들이 있기는 합니까?

한형조: 우선 대중성, 곧 종단 중심의 그런 편향된 입장을 떠나서 거리를 두고 불교 자체를 열려 있는 시각으로 토론하는 문화들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고, 학문적인 성과들을 충실히 반영하려고 노력했다는 점, 그리고 당대의 이슈들을 불교의 입장에서 논하는 관점들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사실은 불교 자체를 블랙홀이라고도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논의를 하나 던졌을 때 그것이 바다에 빠진 돌멩이처럼 반응이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데 사실은 반복만 계속되고 마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것에도 약간의 테크닉이 있어서 전체를 보고, 각론을 보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행되다 보면 다시 또 처음으로 되돌아가버리는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상당히 열려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 불교 전체의 인상인데도, 이런 점에서는 오히려 닫혀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평론>이 그런 인상들을 많이 희석시켰습니다. 또 불교 관계 글에서 많이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기본적으로 읽을거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불교평론>에서 불교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들을 다루어주고, 필진들도 상당히 열려 있는 입장에서 그리고 재미있게 글을 쓰려고 하는 점들이 눈에 보입니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읽을거리가 부족했던 불교계에 읽을거리를 제공한다는 점만도 대단히 유용하다고 평가해야 되겠지요.

유승무: 저는 지금도 사회단체, 사회과학 잡지나 비평, 학술지 등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사회과학 잡지들은 이슈를 빨리 선점하고 사회 비판의 입장을 부각함으로써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킵니다. 그러면 그 제기된 이슈들이 다시 사회 속에서 쟁점이 되는 현상도 많이 보이고요. 그런데 불교계의 잡지를 보면 그런 기능을 한 잡지가 없습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잡지들이 발간되다가 갑자기 없어지고, 이제는 불교계 신문이나 불교방송 같은 것들이 그러한 기능을 대신하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런데 불교계 신문이나 방송은 종단 정책이나 스님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고 문제제기를 해주는 열린 공간이 부족했던 것이죠. <불교평론>이 해온 역할이 그런 부분에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능을 했고, 그것을 추구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합니다. 비판 없는 집단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조성택: 말하자면 운영이나 체제상에서 자유롭다는 것도 있지만, 우선 목적 자체부터 신행을 돕는다는 입장보다는 비판적 기능에 있기 때문에, <불교평론>으로서는 지금 말씀한 것과 같은 비판 기능은 당연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느냐 하는 각론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하고 반성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건전한 비판 기능 더욱 강화해야

미산: <불교평론>이 나오고 불교계에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잡지가 탄생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비판을 체계적으로, 영향력 있게 하는 잡지로 발돋움해야겠죠. 그런데 최근호를 보니깐 서평 부분이 있어서 그것과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외국에 있다가 귀국한 후에 불교 관련 서적들을 열람하면서, 이런 책들을 일반 독자가 읽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불교에 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책들은 전문가가 <불교평론>이나 전문 학술지에서 서평을 통해서 분명히 오류를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조성택: 잘 된 책만 소개할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책들에 대해서도 명확하고 구체적인 지적을 해줄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미산: 그렇죠. 외국의 경우, 불교 관계 서적이 나오면 여러 전문지에서 서평을 하기 때문에 자신 없는 책은 출판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책을 출판하면 여기저기서 비판을 받게 되니까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일단 출판하고 봅니다. 그러면 피해를 누가 보느냐? 결국 독자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평론>에서 앞으로는 그런 역할도 강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잘된 책만 소개하는 것보다는 문제되는 책들, 일반 독자들이 잘못된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는 그런 책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해서 정확하게 무엇이 문제인지 꼬집어주고 독자뿐만 아니라 필자도 반성할 수 있는 따끔한 비판을 서평란에서 해주어야 합니다.

한형조: 외국에서는 책이 한 번 나오려면 편집 과정 등등 너무 어려운데, 한국에서는 누구든지(?) 책을 낼 수 있습니다. 출판 단계에서 걸러져야 하는데, 시장에 나온 다음에 독자의 판단을 기다리는 상황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님 말씀대로 하자면 불교계에 나온 책들도 큰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고, 지적하신 역할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지금의 출판 관행에서 보자면 스님께서 지적하신 서평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조성택: 결국은 비판적으로 쓸 사람이 있느냐가 문제 아닐까요?

유승무: 학문적으로 정확하게 비판하고 그것으로 논쟁을 치열하게 하는 그런 과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풍토입니다. 그래서 <불교평론>에서는 의도했지만 막상 원고에서는 그러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받아들이는 정서도 감정적인 대응이 돌출되는 경우가 많고……. 어쨌든 저는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오해하거나 과장되거나 하는 것을 짚어줌으로써 정확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논문들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한 페이지에서 두 페이지 정도 장점과 한계를 제기해 주면 도움이 되는데,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잡지가 사실 달리 없습니다.

조성택: 세계 불교 학계의 논문 수준이 높아진 계기가 드용이라는 사람 때문인데, 이 사람은 상당히 젊을 때부터 절필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글에 대해서 시비만 합니다. 그런데 그 시비가 굉장히 정확해요. 그런 태도가 불교학계의 긴장을 유발해서 논문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죠. 우리 불교계에서도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한형조: 문제는 우리 풍토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나 풍토가 너무 열악하다는 사실입니다. 불교만큼 교리상으로 열려 있는 것이 없는데. 저는 사실 불교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불교를 전공하는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특히 불교학자 중에 불교 쪽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종단이든 불교학이든 간에 비판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합니다. 어떤 식으로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심지어는 논평도 자기변명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들어보면 그다지 심각한 것도 아닙니다.

조성택: 그 부분과 연결해서 오히려 <불교평론>의 필진들이나 편집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우리가 불만을 가지는 것은, 끊임없이 종단이나 이론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데 오히려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싱거울 정도로요. 아까 말씀하신 일종의 블랙홀 같은 것이죠.

한형조: 그래서 <불교평론>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가 문제를 제기하고 종단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불교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좀더 확장시키면서 또 한편에서는 종단이나 불교계 자체가 반응이 없기 때문에 내부에서 먼저 생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오늘의 동양사상> 같은 책을 보면 아예 의도적으로 논쟁을 만드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기자들은 이것이 문제 거리가 되는지 안 되는지 구분하지도 않고 얘깃거리를 재생산합니다. 어떤 형식이든 이것이 관심을 끄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아직 해결은 안 되는 것이지만, 이것이 중요하고, 뭔가를 해보고 연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평론>도 그런 식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조성택: 스님들께서는 <불교평론>에 대한 시각이 어떠신지? 서적을 읽으시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불교 전체에 조금이라도 활력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스님 개인의 의견보다는 좀 일반적인 스님들의 생각을 전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산: 제가 다른 스님들의 <불교평론>에 대한 의견을 대변할 수는 없고, 제가 만나는 스님들의 경우에는 <불교평론>을 받아보시고 참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정보의 양이 많으니까요.

조성택: 어떤 측면에서는 정보의 양이 많다고 하시는 것인지?

한형조: 정보의 양이 굉장히 많은 것이죠. 다만 많기는 한데 너무 전문적인 그런 점은 있죠. 정보의 양이 많으면서 전문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실질적으로 과연 나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는지는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정보의 양은 충분할 정도로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산: 설법을 좀 격조 있게 하시는 분들은 많이 보시더군요. 일반 보살님들을 대상으로 설법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참고하기가 어렵죠. 처사님들을 상대로 특별법회를 한다든가 하는 경우에는 <불교평론>을 많이들 참고하시고….

조성택: 제가 알기로는 신학이나 일반 철학계 쪽에서는 반응이 꽤 있는 편입니다. 다른 데서 읽을만한 저널이 없었다는 것이죠. 일부 신학대학 도서관 같은 곳은 구입요청을 하기도 합니다.

미산: 그 이야기가 맞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문 학술지 같은 경우는 비전공자가 읽기에는 딱딱하거든요. 그런데 적어도 <불교평론>은 전문성을 띠고는 있지만 문체도 부드럽고 부담을 안주니까, 그분들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주었을 것 같아요.

유승무: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종교학계나 일반 철학계에서 <불교평론>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히 긍정적인데 오히려 우리 불교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가 본 것, 느낀 것에 불과합니다만 상대적으로 좀 젊은 층에서는 <불교평론>을 참고도 하고 인용도 하는데, 공부의 연조가 오래된 분들은 -본인들이 공부를 잘 안하는 것 같다는 얘기는 아니고(전체 웃음), 잘 보시지도 않고 참고를 잘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어차피 독자층이 길러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젊은 층 석·박사 과정에서 공부하시는 분들이나 소장 층에서 최근의 이슈에 관련된 글을 쓸 경우에는 인용을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미산: 응용 분야라든가 윤리 및 생태 분야에서는 <불교평론>이 거의 원전처럼 많이 인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유승무: 젊은 층에서 현대적인 이슈와 관련된 글을 쓸 때는 경전을 찾기도 그렇고 누가 먼저 찾아놓은 것도 많지 않고, 그런 점들 때문에 자꾸 <불교평론>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형조: 저는 이 책을 화제 삼아서 얘기를 한 적이 거의 없고, 생각보다 불교 지식인들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실제로 어떤 반응이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겠습니다. 가끔 인용하는 것은 본 적이 있습니다.

조성택: 제가 귀국해서 <불교평론>을 처음 봤을 때 상당히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계간지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창작과비평>과 <세계문학>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 책들은 한국의 정치적 문제, 문화적 문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일정한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었다고 기억합니다. 70년대 말 무렵의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창비>나 <세계문학>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여 이슈화시키고 비판적 기능을 유지하면서 여론을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죠. 동시에 <창비>가 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이슈가 사회적으로 계속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창비>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반대로 사회가 <창비>를 끌어갔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비>의 전성시대에 이루어졌던 계간지의 역할과 <불교평론>의 역할을 비교할 때 <불교평론>이 훨씬 더 열악한 환경입니다. 요즈음은 책을 보는 시대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시대에 책을 만들어서 고전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회여건에 비한다면 그나마 <불교평론>은 선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형조: <불교평론>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그렇겠지만, 특정한 현대적 사조에 적응하려는 경향이 다들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얘기들이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환경문제, 생태문제 등에 관심이 쏠려있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건 내용을 안 봐도 어떤 얘기들이 나오겠다는 예측이 뻔해지는……. <불교평론>도 그와 마찬가지라면, 그저 반복 재생산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자원낭비일 수도 있죠. 적어도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여론을 이끌어가는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문제라도 불교적으로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고, 또 색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계 신문 같은 경우에는 주로 생태 환경 문제와 관련되면, 개발한다고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도 안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도 불교적이지만 꼭 이런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불교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다양한 사회 문제 조망을 위해 개성 있는 필진 발굴 절실

조성택: 저희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시각을 반영하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필자가 드물고, 또 저희들이 그러한 쪽을 요구했을 경우에도 선뜻 나서는 필자가 드물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형조: 그래도 불교 안에서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역시 불교가 이슈를 선점하고 이끌어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 다른 목소리들이 획일적인 논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들을 도출해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신계사 복원불사의 경우에 불교계에서는 당연시 하는 시각이 팽배해 있고 또 동참들을 하고 있지만, 꼭 그런 시각만이 전부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하나의 시각만 있어서 여기에 대해 불교는 다른 목소리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이 된다면, 스스로 가능성을 거부하는 상황이 되죠. 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이슈가 불교를 이끌어가는 상황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 <불교평론>의 또 다른 역할일 것입니다.

유승무: 편집진들이 그런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그 얘기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많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찾아내기가 어렵죠. 자기 동료이기 때문에 기피하고 천성산 문제 같은 경우에도 다른 입장의 가능성에 대한 제기가 편집진 안에서는 끊임없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인류 역사 문화라는 것이 개발의 역사인데 그럼 대안이 있다는 것이냐는 식의, 그런 이야기들이 사석에서는 얼마든지 나오고. 그래서 한 번 해보자. 그런데 막상 해보자고 하면 그것 때문에 무슨 말을 들을 까봐, 혹은 시중에 떠도는 말로 왕따 당할까봐…….

한형조: 불교 안에서 타자 검열이든 자율 검열이든 간에 그런 소리가 잘 안 들릴 수 있다고 한다면 불교 밖에서 필자를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요?

조성택: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 생태 문제에 대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불교는 생태학의 대안이 아니라고 발표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요. 그래서 어디에든 게재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지면발표로만 끝나버려서 망설이는 면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반응이 없다는 것이죠. 주류의, 당연시 되는 견해가 아닌 반대의 입장을 개진했을 경우에, 거기에서 반응 없이 끝나버리면 일종의 왕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망설이게 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형조: 최근에 저도 불교 용어 때문에 칼럼을 한 번 썼었는데, 인터넷상에는 수십 개의 리플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는 이 일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제가 틀렸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다룬 책을 쓴 사람도 그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고, 옳다 그르다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도 없고…….

조성택: 일종의 원맨쇼를 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자기희생이 너무 커지는 것이죠.

한형조: 어차피 이것이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인데, 이것 없이 혼자 하는 것이 웃기잖아요? 어떻게 보면 대화 공론의 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죠.

조성택: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이 <불교평론>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이것을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이나 불교를 일정한 방향에서 끌고 나가겠다는 사람들이 모인 소수집단이라면 계속 줄기차게 그 쪽으로 갈 수 있죠. 새로운 필자 발굴도 하고.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열려 있는 담론의 장이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제약이 될 수도 있어서, 그런 면에서 <불교평론>은 좀 느슨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의 글들 중에서 좋은 것들을 모아서 하나로 묶어내는 방법을 찾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조성택: 앞으로의 방향을 생각할 때 지금가지 해온 이야기 속에 총론적인 이야기들이나 방향에 대한 것은 많았습니다만, 역시 각론에 들어가서 어떤 것들을 더 다룰지가 문제될 것입니다. 만약 각론으로 본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스님의, 그리고 선생님들의 관심사를 말씀해주셔도 좋고요.

한형조: 틱낫한 스님은 한국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데 그렇게 열광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다루고 있는 보편적 관심, 불교는 대개 삶의 이슈를 다루는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보편적인 문제를 어떻게 좀 현대적으로 보여줄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는 시사점이 있을 수 있겠죠.

조성택: 사회에서 불교의 주력 상품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부분이시죠? 사회의 현상적인 문제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한형조: 현상적인 문제는 워낙 다양한 층위가 있어서, 그것을 수용할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으면 물론 좋지만, 이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소외와 같은 문제를 구체적인 면면에 따라서 대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입장에서의 시각과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지원보다는 정서적인 그런 것. 특히 각론적인 현실을 접했을 때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도 좀 고민되어야 합니다. 흔히 많이들 보이는 것이 현실의 문제에 대한 대안, 근본적인 치유책을 찾기 위해서 근본불교로 되돌아가서 다시 현실로 접근해오는 경향들이 없지 않은데……

유승무: 저도 그런 식의 접근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접하고 있는 불교전통과는 다른 부분들이 없지 않아서 더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데서, 직접 접하고 있는 우리의 불교 전통에서 먼저 찾을 수 있어야지요.

한형조: 우리가 지금 이어받은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가는 그 길밖에는 없는 것이 아닌가? 각론에 대한 접근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죠. 다만 그것조차도 직접적인 것은 아닙니다만.

조성택: 오늘 말씀들을 들어보니까 불교평론이 확실히 좀 주지주의적인, 지식인 위주의 그런 비판적인 기능들을 강조되고 우선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산: <참여불교>라는 격월간지가 있습니다. 그 잡지가 참여불교운동 분야에서는 상당히 여론 주도적 기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쪽은 겨냥하는 독자층도 분명하고 나아갈 바도 분명하기 때문에 자연히 성격도 분명해지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불교평?gt;도 일정 부분 그런 잡지들처럼 성격을 좀더 명확히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가 과학적이라거나 현실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 그러하냐는 부분에 있어서는 고민을 더 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측면들을 객관화시키는, 계량화라든가 수치화 작업을 통해서 좀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는데, 이런 점들도 <불교평론>에서 해볼 만한 작업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 부분들은 불교에서 상당히 미비한 측면이기도 해서 계량화되고 수치화된 접근방법들이 범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해서도 불교에서는 손을 놓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이 발생합니다.

조성택: 말하자면 불교에서 현대적 접근방법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불교에는 그런 부분이 약하기 때문에, <불교평론>에서 보완하는 작업들을 해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지적이시죠?

미산: 그렇죠. 우리가 그런 객관화와 수치화 같은 현대적 접근 방법들에서 야기되는 역기능들을 <불교평론>에서 지적하고, 그것을 통해서 <불교평론>은 불교적 성찰을 환기시켜가는 형태의 접근도 필요할 것입니다.

조성택: 일부 과학자들이 최근에 불교에 대해서 많은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일면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위험하게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1차적으로 과학과 불교는 문제의식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대중성을 확보해나가니까, 불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유발시킬 수도 있습니다. 스님의 지적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불교평론>이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보입니다.

미산: 특히 그런 경우는 합리성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에 특히 곤란하죠. <불교평론>이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도 방향타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조성택: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불교평론>의 지난 5년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저의 <불교평론>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사항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좌담회에 참석하셔서 귀한 고언(苦言)을 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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