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욱 고려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한국사람이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 이민을 가서, 이제는 한국어도 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이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보아야 할까? 미국인이라고 간주해야 할까?

몸은 노란 얼굴을 한 동양인이고, 언어와 사고방식은 완전히 미국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육신’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바뀌지 않는 요소이고, ‘말’이나 ‘사유형태’는 장소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불교사상의 흐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불교사상에도 장소와 시간이 아무리 변천하고 흐르더라도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고, 공간과 시간에 따라 바뀌는 요소도 있다. 이것을 불교의 ‘독자성’과 ‘적응성’이라고 한다. 불교의 독자성은 불교사상만이 가지는 독특한 본래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적응성은 그런 독자성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소나무 씨앗이라고 해도, 어떤 장소와 어떤 시기에 심어졌느냐에 따라 그 소나무가 제대로 자랄지, 어떤 모습으로 클지가 정해지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래서 다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뿌리로 하는 불교사상이지만, 인도의 불교사상과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사상은 그 줄기와 잎이 다르고, 향기와 빛깔에서 자신만의 모습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독자성과 적응성, 이 두 가지는 불교사상의 흐름에서 보자면, 중요한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독자성이 없다면, 그것은 ‘불교’라는 간판을 걸 수 없을 것이고, 적응성이 결여되었다면, 그런 불교는 그 사회와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독자성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칫하면 시대와 여건을 무시한 메마른 이론이 되기 쉽고, 적응성만을 강조한다면 부처님 사상에 위반된 잘못된 사상을 불교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적응성을 강조하면 당장에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일시적 효과는 누릴지 모르지만 길게 보아서는 불교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내고 말 것이고, 독자성만을 주장한다면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이다. 대중이 없는 종교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철 지난 옷에 불과하다.

독자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잘 화합할 때 불교사상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발했고, 신록이 무성한 진녹색의 초여름같이 풍요로웠다. 이와 같이 불교가 번성했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독자성과 적응성이 잘 화합했는지 그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가 아쇼카 왕 이후 인도의 주요 종교세력이 되자 정체하는 현상이 생겨났는데, 이에 반성해서 생겨난 종교운동이 바로 ‘대승’이고, 대승도 다시 현실에 안주하게 되자, 다시 이를 딛고 일어선 것이 ‘밀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불교사상이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 독자의 불교사상을 꽃피웠다.

중국불교는 인도의 불교사상과 중국의 토착사상이 서로 결합되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도의 불교사상 요소는 ‘독자성’에 해당하겠고, 중국의 토착사상 요소는 ‘적응성’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중국불교사상이 한국에 전해져서 한국 특성에 맞는 불교로 다시 탈바꿈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원효는 화쟁사상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당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일치하였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은 당시의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정혜결사를 주장하고, 그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선(禪)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렇듯 그들의 사상에서 원효와 지눌은 독자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요구에 답하려는 적응성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적응성과 불교 본래의 독자성을 한국불교는 일치시키고 있는가? 한국불교사의 과제를 거칠게 말하자면, 통일신라시대에는 교종 간의 이론적 조화를 추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모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유교)을 숭상하는 정책에 맞서 불교·도교·유교가 본래 같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불교학의 과제는 과연 무엇일까?

현대는 인정하기 싫든 좋든 간에 서양의 문물이 지배하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독자성과 적응성의 조화라는 입장에서 보자면, 불교철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서 서양사상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가 최대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과제에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서, 이 방면에 있어서 서양의 두 대가, 콘즈와 칼루파하나를 비교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의 비교철학관에는 서로 대조되는 점이 있어서, 그 대조를 통해서 한국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의 비교를 어떻게 시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콘즈는 1904년에 태어난 영국의 불교학자인데, 문헌에 근거한 비판적 불교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인도불교사상사》 등 3가지가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D.J. 칼루파하나는 현재 하와이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데, 《불교철학사》를 필두로 한 그의 저서 3권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은 국내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는 불교학자라고 할 수 있다.

2. 비교철학의 유형과 방법

이 둘을 비교하기 전에 비교의 유형과 방법에 대해 살펴본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를 서로 맺어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선 과거에 서로 학연이나 지연 등이 있거나, 친지를 통해서 서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을 이어 주는 경우도 있겠고,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고, 학벌이나 성격, 재산, 원하는 이상형 등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소개해 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또 소개해 주는 사람이 이 남자·이 여자라면 서로 잘 어울리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것에 근거해서 밀어붙이는 경우도 가능하다. 필자의 경험에 근거하면, 세번째 방법이 서로를 맺어주는 데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세 가지 경우를 비교철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 비교철학도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좁은 의미의 ‘비교’이고, 둘째, 넓은 의미의 비교인 ‘대비’이며, 셋째, 비교연구에서 주체적 관점을 강조하는 ‘대결’이다.

좁은 의미의 비교는 과거에 서로 인연이 있었던 사람을 맺어주는 것과 서로 대응하고, 넓은 의미의 비교인 대비는 서로 간에 유사점이 있으면 만나게 하는 방식과 일치하며, 주체적 관점을 강조하는 대결은 소개하는 사람이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서 연결시켜 주는 것과 상응한다. 이 세 가지 유형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1) 1) 이후의 내용은 변규룡의 〈비교사상의 가능성과 방법론〉(심재룡 외,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 집문당, 1989) pp.273∼293의 내용을 정리하고 필자의 견해를 약간 추가한 것임.

첫째, 비교는 교섭이나 영향 관계가 있었거나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상을 비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와 성리학의 관계를 비교하거나, 프랑스 계몽주의와 유교사상을 비교하는 것 등이다.

둘째, 대비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상을 그 유사점을 잡아서 비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자와 예수의 비교연구, 불타와 예수의 비교연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좁은 의미의 비교는 연구범위를 서로 교섭이 있었던 대상으로 제한하는 단점이 있고, 그에 비해 넓은 의미의 비교인 대비는 너무나 연구범위가 넓다는 약점이 있다. 그리고 대비의 경우 단점이 이것에 그치지 않고 더 있다.

우선, ① 주제선택의 자의성을 들 수 있다. 왜 두 사상만을 비교하는가에 대한 필연적 설명이 요청되는데, 대개 주관적 기준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② 결론이 먼저 짐작되는 단점이 있다. 이런 유형의 비교연구는 이미 몇 개의 유사점이 전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결국 결론은 그것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③ 연구자 지식의 한계점이다. 한 사람이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의 양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올바른 비교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요구되는데, 한 사람의 연구자가 그 분야 전문가의 비판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두 영역에서 전문성을 기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경우 기껏해야 개괄적인 연구에 지나지 않는 단점이 노출된다.

④ 비교대상이 외국사상일 경우, 번역의 문제에 봉착한다. 엄밀히 말해서 번역은 그 원래의 의미를 왜곡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주 섬세한 개념정의 등에서 어쩔 수 없는 오해가 동반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비교연구에는 당연히 왜곡이 수반되어 있고, 이는 엄밀성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셋째, 대결은 위의 두 가지 단점을 넘어서서, 철학의 근본인 주체적 자각이라는 관점에서 두 사상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는 주체적 자각에 기초해서 두 사상의 구조와 구조를 대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 대결의 배후에는 연구자 자신의 주체적 자각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비’의 유형에 속하는 주장을 하는 학자에게 가서, 당신은 어느 유형에 속할 것같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주체적 자각에 기초한 대결에 속한다고 대답할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것은 ‘대결’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해 줄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남자와 여자를 맺어주는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 다시 이 예로 돌아가 보자. 남자와 여자를 소개시켜줄 때 그 사람의 성장배경, 교우관계, 사회생활의 성실성 등을 고려해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단순히 좋은 직장에 다니고, 명문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에 집착해서 보려는 것보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비교철학의 방법인 ‘유비적 방법’과도 상응하는 점이 있다.

남녀를 소개시켜 주는 데 그들의 성장배경 등을 고려해서 연결시켜 주는 것이 효과적인 것처럼, 비교철학에서도 단순히 개개의 대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 나오게 된 문화권과 문화권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개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그 사람의 개인적 잘못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게 되면, 그 사람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듯이, 철학도 그것이 나오게 된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이해의 심연은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두 사상을 비교하면, 문화권간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비교대상의 사상간의 비교가 이루어져서, 이 둘을 종합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이런 비교방법은 결국 개연성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 결정적 시각을 제공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단점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유비적 방법’은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채 주관적인 비교를 하는 것을 막아주는 장점도 있지만, 비교를 통해 무엇을 전하려고 하느냐의 문제에서는 대략의 윤곽을 그릴 수 있을 뿐, 그것을 넘어서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는 단점도 살며시 깔려 있다.

3. 콘즈와 칼루파하나의 비교철학관

앞에서 살펴본 것에 근거하면 콘즈는 ‘유비적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고, 칼루파하나는 ‘대비’의 유형에 속하거나 ‘대결’의 유형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칼루파하나에 비판적 사람이라면 그의 비교철학은 대비의 유형에 속한다고 혹평할 것이고, 칼루파하나 자신이나 그에 우호적인 인물이라면 이는 대결의 유형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사업가가 기업을 경영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직감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해서 그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객관적 자료라는 것이 이미 지나간 사실만을 반영할 뿐, 그것으로 변하는 미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동물적 감각을 믿으려 하기도 한다. 전자가 콘즈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후자가 칼루파하나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콘즈는 비교철학이라는 주관성이 난무하는 황량한 벌판에서 객관적인 영토를 확보하려는, 어쨌든 고군분투하는 한 마리 사자이고, 칼루파하나는 주관적인 영역을 지키려고 하는, 외롭지만 포효하면서 웅비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한 마리 호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1) 콘즈의 비교철학관

등산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등산하는 것의 의의가 어떻고, 그 결과가 어떻다라고 장황하게 떠드는 것보다, 산을 어떻게 올라가고, 혹여 올라가는 도중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설명하는 것이 산에 오를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실제적일 것이다. 이와 같이, 콘즈의 불교관도 이론적 분석을 일삼기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불교란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벗어나서 열반이라는 산에 올라가는 것이고, 그것에 오르는 방법과 오르는 단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유위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이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고, 진정한 구원은 열반이라고 하는 무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에 근거해서 논의를 더 진행해보자.

현상계인 유위의 세계는 항상하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그 속에는 진정한 자아란 없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5근이라는 수행방법을 통해 자신을 성숙시켜야 하고, 그런 다음 무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단계가 있는데, 공·무상·무원이라고 하는 세 가지 삼매를 거쳐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 다음, 콘즈는 불교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묵시적 가정을 제시한다. 첫째, 과학적인 유럽철학과는 다르게 요가 체험을 철학적 반성의 주요근거로 삼는다. 둘째, 이 세계는 단일한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성숙도에 따라서 여러 계층적인 구조가 있다. 셋째, 불교철학도 종교철학에 속하므로 세속의 용어와 구분되는 신성한 용어를 사용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의 권위를 인정하여, 이를 인식의 근거로 삼는다.2) 2) 에드워드 콘즈, 〈불교철학과 유럽철학의 유사성〉(김종욱 편역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민족사, 1990) p.18.

콘즈는 유럽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고전적인 철학과 과학적인 철학이라는 구분을 제시한다. 우선 고전적인 철학의 의미를 살펴보자. 어떤 성자가 있었다. 그는 일반 사람보다 더 지혜가 있고, 그리고 지혜가 있다는 것은 사물의 실상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혹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 성자에게 물을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 비슷하게 해보았는데, 나는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소. 당신 쇼하는 것 아냐?” 성자는 “진리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것이지만, 진정한 수행이 없이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다시 묻기를 “그러면 우리 같은 평범한 일상의 사람은 당신이 진리를 깨달았는지 어떻게 알겠소?”하니, 성자는 “말보다는 나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라.”고 응수할 것이다. 이런 내용을 콘즈는 네 가지 항목으로 정리해서 고전적 철학의 의미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가치 있는 인식을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마다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둘째, 인식에 대응하는 실재도 여러 계층이 있고, 높은 계층에 속한 것이 더 실재적이다. 셋째, 고대 현자들이 지혜를 개발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든 사람이 검증할 수 있는 그러한 유형의 경험적 토대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넷째, 참다운 가르침은 위대한 인물의 모범적 삶이나 카리스마적 자질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론에 의해서 검증받는 것이 아니고, 그 이론을 주장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점에 의해 그 가르침이 평가된다. 그리고 이런 특징의 고전적인 철학은 동양과 서양을 구분할 필요가 없이 공통적인 것이지만,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는 여기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요가의 체험을 중시하는 점, 업과 윤회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3) 3) 에드워드 콘즈, 〈불교철학과 유럽철학의 유사성〉(김종욱 편역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민족사, 1990) pp.20∼21.

그러면 이번에는 이제까지 소개한 고전적 철학과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는 과학적인 철학의 의미를 살펴보자. 어떤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진리란 어떤 일정 조건에서 반복해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물은 영하 0도 이하이면 얼음이 된다는 것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든지 분명하게 관찰될 수 있는 사실이므로, 이것은 과학적 진리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검증될 수 없는 것은 무시하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문명을 통한 물질적 풍요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의 풍요를 통해서 정신적 안온함도 도모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관은 자연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하는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한다. 이런 내용을 콘즈는 네 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무기물을 다루는 자연과학이 우주 실제 구조에 대해 말해주고 있으므로, 이것이 우리 인식형성에 큰 의미를 주는 것이다. 이는 수학적으로 공식화할 수 있고, 반복해서 관찰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더 과학적이라는 표준을 다른 학문분야에 제시한다.

둘째, 인간은 과학을 인식하는 최고의 존재자이므로 인간의 권리와 편의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비범한 정신력이라는 것이 물질적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죽은 뒤의 일은 과학적 방법에 의해 검증될 수 없으므로 무시해도 좋다.

넷째, 삶은 현세의 삶을 의미하고, 우리의 과제는 사회적인 측면에 힘써서 대중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그들의 생각과 조화하는 데 있다.4) 4) 에드워드 콘즈, 〈불교철학과 유럽철학의 유사성〉(김종욱 편역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민족사, 1990) pp.21∼22.

이런 구분에 근거해서 그는 불교철학과 제대로 비교할 수 있는 유럽철학으로 세 가지를 든다.

첫째 고대 회의론이고, 둘째, 중세 신비주의이고, 셋째, 일원론적인 전통이다. 첫째, 그는 고대 회의론과 중관(中觀)사상과는 서로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그 중, 키케로의 표현은 특히 더 일치한다고 한다. “회의주의자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은폐되어 있다. 인간의 지성은 이 은폐되어 있는 것을 뚫고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는 통찰력이 없다.”라는 표현에 콘즈는 의미를 두고 있다. 둘째, 중세 신비주의와 불교사상과는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서양의 명상가에서는 불교의 ‘공성’은 ‘신성의 불모지’ ‘헛된 공허성’ ‘누구도 안주할 수 없는 고요한 광야’ ‘적나라한 기도’ 등으로 표현된다. 특히 ‘나·나의 것·너·너의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통찰과 사랑으로 활동하는 신성한 인간(보살)’이라는 표현은 불교사상과의 친근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중세 신비주의는 17세기 말엽 거의 사라지게 되는데,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에 의해 다시 소생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모든 의지작용을 포기하는 정적주의, 인간의 의지를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금욕주의, 인간 자신의 내면 존재와 세계의 핵심이 동일하다는 신비주의라고 하는 중세 신비주의의 세 가지 전통을 모두 계승하였다. 이 세 가지 점에서 불교사상과 일치한다.

불교와 그의 철학이 다른 점은 두 가지이다. ① 그는 명상훈련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열반이라고 하는 숭고하고 평정한 마음상태를 ‘선정’이 아니라, ‘미적 관조’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이 둘이 서로 비슷한 점이 있지만, 미적 관조는 인간성을 변형시키는 데까지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② 그는 의지가 ‘물자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현상계에서만 욕심과 의지 등이 작동하고, 그것을 넘어선 열반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요동치지 못하고 무심의 상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의지를 인정할 것인가, 이를 넘어설 것인가에서, 이 둘은 서로 차이점이 있다. 셋째, 일원론적 전통과 불교사상과의 유사점이다. 일원론에는 일상의 경험세계를 무시하고 궁극의 진리를 주장하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변증법이 나오는데, 불교사상과 가장 가까운 변증법을 구사한 사람은 브래들리이다. 그는 앞에서 소개한 쇼펜하우어와 함께 현대유럽에서 불교사상의 일면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저서 《현상과 실재》에서는 모든 실재는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면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중관학파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5) 5) 에드워드 콘즈, 〈불교철학과 유럽철학의 유사성〉(김종욱 편역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민족사, 1990) pp.24∼38 정리.

이제까지 살펴본 것이 진정한 유사점이었다면, 다음에 소개할 내용은 사이비 유사점이다. 콘즈는 사이비 유사성이 생기는 이유는 현대의 서양적인 기준을 가지고, 불교사상을 흥미 있고 존경할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의 경우를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이 뛰어가고 있었고, 다른 사람도 열심히 뛰어가고 있었다. 둘 다 걷지 않고 뛰었다는 데서는 일치점이 있지만, 이 둘이 왜 뛰었는지는 각기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대학입시에 합격해 너무도 기뻐서 이 소식을 빨리 부모님께 전하기 위해서 뛰었고, 다른 사람은 집에 응급환자가 생겨서 119를 부르기 위해 뛰었을 수가 있다. 그런데 외형만 보고 서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8만4천 리나 어긋나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교철학에서도 단순한 유사점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고, 전체맥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콘즈의 견해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철학체계를 네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사이비 유사점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들 요소의 일부만을 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네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몇 가지 명제를 형식화하는 것이고, 둘째, 그 명제를 주장한 사람이 자신의 견해가 참이라고 믿게된 동기이며, 셋째, 철학자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논법이고, 넷째, 당시의 사회적·문화적·종교적 배경에 의해서 논의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가 같다고 해서,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의 일치를 주장한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 콘즈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사이비 유사점의 예로서 불교와 칸트, 불교와 베르그송, 불교와 실존주의, 불교와 흄을 비교하여 공통점을 추출하려는 것을 들고 있는데, 이는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채, 부분적인 유사점만을 강조한 잘못된 비교철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6) 6) 에드워드 콘즈, 〈불교철학에 대한 사이비 유사성〉(김종욱 편역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민족사, 1990) pp.40∼57 정리.

2) 칼루파하나의 비교철학관

불교는 실용주의 콘즈가 고전적 철학과 과학적 철학이라는 구분을 제시해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비교하려고 했다면, 칼루파하나는 초기불교와 미국의 철학조류인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는 서로 일치하는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콘즈의 입장에 서면, 칼루파하나는 전체 맥락을 달리하고 있는 것인데도 부분적인 유사점에 치우친 잘못을 범하고 있는 형국이 된다.

그러나 칼루파하나가 이런 콘즈의 주장에 동의할 리 없을 것이다. 우선 그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실용주의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실용주의는 미국에서 생겨나 뿌리를 내린 미국의 철학조류이다. 이것은 미국인의 생활관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는 C.S. 피어스(1839∼1931)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고, W. 제임스(1824∼1910)에 의해 보급되었으며, J. 듀이(1859∼1952)와 G.H. 미드(1863∼1931)에 의해 전개되었다. 어떤 사람이 신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하자. 그때 실용주의자들에게 신이 존재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없다고 해서 그가 만족해한다면 그것으로 흡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 결과로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뿐이다. 이 입장에 서면 모든 형이상학적 고민은 사라진다.

절대적 ‘착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일상생활의 구체적 양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의 의미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따라 인명을 해쳐서라도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각오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대의명분이든지 간에 사람을 죽이는 일은 옳지 못한 일 아닌가? 실용주의에서 말하는 ‘선’은 이런 것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결과에 근거해서 최선의 답을 모색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근본입장은 “어떤 관념이 참인가 아닌가는 생각이나 말로 따질 것이 아니라 실제적 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피어스의 말에 담겨 있다.

이것을 제임스는 종교문제에 적용하였는데, 그는 “참이기 때문에 유용하고, 유용하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받아들여 도덕에 적용한 사람은 듀이인데, 그는 선이 결코 유일한 것이고 고정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실용주의에서 말하는 선은 특수적·상대적이다.

보다 좋은 것이 선이고, 이것은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행복은 점진적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실용주의의 주장이다. 그러면 이제 칼루파하나가 주장하는 철학의 산맥을 탐색해 나가자. 그에 의하면, 붓다는 관념론자가 아니고, ‘근본적 경험주의자’이고, ‘실용주의자’였다.

그래서 붓다는 선험적인 세계를 갈구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러한 형이상학적 세계를 제시하지 않았다.7) 7) 칼루파하나, 《불교철학사―연속과 불연속》, 제8장 괴로움의 원인 (김종욱 옮김, 시공사, 1996) pp.150∼151.

그 이유를 살펴보자. 칼루파하나에 따르면, 붓다가 실용주의자인 이유는 행복을 맥락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행복을 특정한 느낌이나 감정이라고 보지 않았다. 붓다에게는 행복이란 맥락에 따르는 것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떠한 원천을 통해서도 행복을 인정할 준비를 붓다는 했다. 붓다는 추상적인 방법으로 행복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붓다가 취한 반본질주의적 접근방법이었다.8) 8) 칼루파하나, 《불교철학사―연속과 불연속》, 제9장 자유와 행복 (김종욱 옮김, 시공사, 1996) p.172.

그래서 칼루파하나는 초기불교는 실용주의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실용주의임을 그는 이번에는 공리주의와 비교해서 설명한다. 불교에서 어떤 행동이 옳은가·그른가, 선한가·악한가는 그것이 무집착으로 이끄는가 집착으로 안내하는가에 달려 있다. 무집착은 행복과 자유를 이끌고, 집착은 고통과 속박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은 불교윤리사상과 공리주의윤리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보게 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공리주의자는 동물적 쾌락과 높은 형태의 인간적 쾌락을 구분하기는 했지만, 행복이 쾌락에서 온다고 보았고, 그에 비해 붓다는 감각적 쾌락이 행복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만을 안겨 준다고 보았다.9) 9) 칼루파하나, 《불교철학》, 6장 도덕과 윤리 (최유진 옮김, 천지, 1992) pp.92∼93.

여기에 차이점이 있어서 불교와 공리주의는 한 묶음으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의 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선은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악은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건강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체적이든, 언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행동이라도 그 자신이나 남을 또는 모두를 고통으로 이끄는 그 행동은 악이다.

육체적이든, 언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행동이라도 그 자신이나 남을 또는 모두를 고통으로 인도하지 않는 그 행동은 선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선이냐 악이냐 하는 기준은 그 행동이 행복하거나 즐거운 결과를 끌어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진리이고, 악은 비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사람이 열반이라는 자유의 경지를 얻었을 때, 진리가 그대로 선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10)10) 칼루파하나, 《불교철학》, 6장 도덕과 윤리 (최유진 옮김, 천지, 1992) pp.94∼96.

그리고 붓다를 실용주의자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형이상학에 대한 부정적 입장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칼루파하나에 따르면, 붓다가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그 물음이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질의는 인식론적으로만 무의미하고, 답변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실용적인 면에서도 적절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 인간의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11) 11) 칼루파하나 『불교철학사―연속과 불연속』, 제9장 자유와 행복 (김종욱 옮김, 시공사, 1996) p.170.

앞에서 불교는 ‘근본경험론’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에 대해 검토해보자. 이는 경험에 근거를 두면서도, 그 경험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루파하나에 따르면, 붓다 이전의 사상가를 전통주의자·합리주의자·경험주의자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바라문들인데, 이들은 지식을 경전의 권위와 그것에 기초한 해석에서 뽑아내고 있다. 합리주의자는 추론이나 논리적 논변에 기초를 두고 있다. 붓다는 이들에 대해 추론의 타당함이 유일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경험주의자에 대해서는 붓다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붓다도 자신을 높은 지식을 가진 바라문이나 은둔자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요가 경험을 통해서 초감각적인 지식을 얻은 것을 붓다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초감각적 지식도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붓다는 모든 지식원천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붓다는 감각적인 인식·초감각적인 인식이라고 하는 직접적 지식 위에 연기·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추론을 제시하여,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정하였다.12) 12) 칼루파하나 『불교철학』, 2장 인식론 (최유진 옮김, 천지, 1992) pp.39∼49 정리

이것이 근본경험론의 의미이다. 칼루파하나는 초기불교와 실용주의를 이렇게 접목시킨 다음, 과감한 교상판석을 구사한다. 이 기준에 부합되면, 의미 있는 불교가 되고,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평가절하를 하고 있다. 그 중, 《금강경》과 《법화경》에 관한 내용만 살펴보자. 《금강경》에 대해서 칼루파하나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보살의 삶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잘못된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금강경》에서 극단적인 언어사용을 피하려는 의도는, 개념에 대한 집착을 피하고, 그러면서도 개념의 완전한 공백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개념의 실용적인 가치를 보존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보살의 삶을 풀이하면서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믿음을 제공한다.

그 이유는 무주(無住)를 강조하여 보살은 욕망이나 증오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관심도 갖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금강경》에서 자신의 복리와 타인의 복리를 인정한 것은 초기불교와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주를 말하는 것이 절대주의 전통에서 의무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13) . 13) 칼루파하나 《불교철학사―연속과 불연속》, 제15장 금강경에서 지혜의 완성 (김종욱 옮김, 시공사, 1996) pp.251∼262 참조.

그리고 《법화경》에 대해서는 칼루파하나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법화경》의 관심은 이론보다는 실천에 있다. 그 이유는 ‘공성’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화경》에서는 붓다에 대해서 절대적 긍정의 입장을 취하고, 초기불교의 제자들에 대해 낮은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점은 초기불교의 전통과는 다른 도덕철학을 수립하는 데로 이끌어진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행복에 기여하는 삶을 격려하는 초기불교의 ‘맥락상의 실용주의’는 포기되어졌다. 그리하여 《법화경》에서는 절대자 붓다에 대한 강조로 인해, 자신의 행복이나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것이 이상적 삶이라고 한다. 이 점이 문제이다.14) 14) 칼루파하나 《불교철학사―연속과 불연속》, 제17장 법화경의 개념적 절대주의 (김종욱 옮김, 시공사, 1996) pp.279∼287 정리.

 

4. 비판과 전망

이 둘이 세계적 대가로서 불교학방법론과 비교철학에 또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 둘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콘즈에 따르면 칼루파하나는 고전적 철학과 과학적 철학간의 구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일부분의 유사점을 확대해서 사이비 유사성을 말한 사람이 되고, 칼루파하나에 근거하면, 콘즈는 비교철학의 문 앞에 이르렀을 뿐 그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꼴이 된다.

이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앞의 비교철학의 유형과 방법에서 설명한 내용에 따르면, 콘즈는 ‘유비적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유비적 방법이라는 것은 문화권을 고려해서 개별 사상을 비교하자는 것인데, 그것을 콘즈는 고전적 철학과 과학적 철학이라는 영역으로 바꾸어서 이해하고 있다.

필자는 콘즈의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바이다. 개개의 사상에 부분적인 유사점에 휩쓸려서 큰 대세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콘즈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도 종국에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유럽인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예에 지나지 않는 점도 있다. 현재 불교철학을 동양에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고대철학체계에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게 그거라는 것이 콘즈의 속내이다.

그러면 칼루파하나의 주장은 어떠한가? 그의 주장은 앞의 구분법에 따르자면, ‘대비’에 속할 수도 있고, ‘대결’에 속할 수도 있다. 어차피 대비와 대결의 구분 자체가 애매모호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잘된 대비라면 이것은 대결이 될 것이고, 자신은 대결이라고 마음먹고 시작하였지만, 졸작이라면 결국 대비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루파하나의 주장은 유유히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이,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일 이외에는 현재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을 것같다.

그러나 붓다가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 침묵을 의미하는 ‘무기(無記)’를 한 이유에 근거해서, 불교가 실용주의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는 학자들이 있고, 필자도 그런 해석에 동조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칼루파하나는 여러 가지 입장이 가능한 그런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이의 주장은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만을 피력하고 있다. 이 점이 필자의 불만이다. 만약 칼루파하나의 주장대로, 붓다의 무기가 실용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다른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칼루파하나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칼루파하나의 공로도 매우 크다.

그의 주장을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불교가 미국에 소개되어 어떻게 ‘미국화’되어 가는가 하는 점을 잘 나타내주는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노장사상’이라는 안경을 끼고서 인도불교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는 오해이지만, 이제 그 누구도 이것을 오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중국인의 ‘독창적 이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칼루파하나의 견해도 미국식 격의불교의 한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의의도 자못 큰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필자는 콘즈의 예에서 비교철학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고, 칼루파하나의 예에서 불교가 어떻게 미국화되어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콘즈의 예는 유럽식의 독자성과 적응성의 조화를 시도한 경우라고 평가할 수 있고, 칼루파하나의 예는 미국식 독자성과 적응성의 일치를 구성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사람 다 의미 있는 작업을 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 이제 눈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콘즈도 유럽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기능을 겸하고 있고, 칼루파하나의 작업은 미국의 명예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면, 이 둘 다 한국에서 그냥 무작정 수용할 수 없는 비교철학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의 시각에서 콘즈와 같이 유비적 방법을 사용하여, 그것을 칼루파하나와 같이 대결의 구도로 몰고가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것이 이 땅에서 불교철학을 하는 이들이 풀어야 할 화두다. <끝>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강사. 논저서로는 〈천태지의 철학사상 연구〉 《천태사상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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